♠ 역사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으나 조선 후기 지장보살상을 후광으로 삼아
열심히
절을 꾸리고 있는 북한산 본원정사(本願精舍)
▲ 연등의 물결이 출렁이는 대적광전 뜨락 |
북한산(삼각산) 동쪽 자락 냉골에 둥지를 튼 본원정사는 화계사(華溪寺)와 4.19국립묘지 중간에
자리해 있다. 이곳에 오기 전에는 그저 조그만 절인줄 알았는데, 정작 와보니 제법 규모가 있는
절이었다. 속인(俗人)들의
주거지와 북한산의 푸른 숲이 팽팽히 경계를 이루는 곳에 자리해 있
지만 숲이 절의
상당수를 둘러싸고 있어 산사(山寺)의 멋은 그런데로 우려내고 있다.
이 절은 왜정(倭政) 초기에 손덕선(孫德善)이 창건했다. 그는 금강산 유점사(楡岾寺)에 들어가
청암(淸庵)을 스승으로 받들며 수행을 했다고 하며, 1920년대에 서울로 올라와 지금의 절을 지
었다. 처음 이름은 도성암(道成庵)이었는데,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조선 말부터 도성암이란 암
자가 있었다고 하며, 왕년에는 도선사보다 신도가 더 많았다고 전한다. 그 말이
맞다면 조선 후
기에 지어진 도성암을 손덕선이 중창을 한 셈이 되는데, 이를 입증할 기록이나 유물이 전혀 없
어 확인은 어렵다. 아마도 100년도 안되는 짧은 법등(法燈)을 좀 만회하고자 지어낸 것이 아닐
까 싶다.
손덕선은 여기서 50여 년을 머물다가 1973년에 입적했다. 6.25전쟁으로 북한산성(北漢山城) 안
에 있던 태고사(太古寺)가 잿더미가 되자 그곳의 지장보살상(목보살좌상)을 업어와 중심 불상으
로 삼고 열심히 절을 꾸렸다. 허나 인근의 도선사와 화계사 등 쟁쟁한 절에 밀려 상황은 좋지
못했으며, 그가 간 이후에는 거의 문닫기 직전까지 흐르다가 1980년대 초반 원성이 주지가 되면
서 절은 180도 달라진다.
그는 법당에 봉안된 지장보살의 본원(本願)을 따르고자 본원정사로 절의 이름을 갈아 이미지 변
신을 시도했다. 그리고
대대적으로 불사를 일으켜 대웅전과 명부전, 나한전을 건립했는데, 그만
1996년 5월 22일 불의의 방화사건으로 애써 지은 대웅전과 나한전이 그만 전소되고 말았다. 이
때 가까운 삼성암(三聖庵)과 화계사에도 연쇄방화사건이 터져 나란히 피해를 입었는데, 이곳에
모두 불을 지른 한심한 자는 기독교 광신도였다.
이후
1999년 대웅전과 나한전 자리에 2층 규모의 대적광전을 세워 법당(法堂)으로 삼았고, 약사
전과
나한전, 삼성각을 지어 지금의 모습을 이루게 되었다.
적당한 크기의 경내에는 대적광전을 비롯해 명부전과 삼성각, 약사전, 나한전 등 7~8동의 건물
이 있으며, 대적광전 1층은 종무소와 공양간으로 쓰인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목보살좌상이 있
는데, 이곳에 유일한 보물이다. 비록 본원정사에서 만든 것은 아니지만 이곳의 든든한 후광(後
光)이자 밥줄로 그가 없었다면 지금의 본원정사도 없었을 것이요. 내가 굳이 이곳에 오지도 않
았을 것이다.
그런 목보살좌상 외에는 딱히 두드러지는 것이 없는 현대 사찰이지만 속세와 자연의 경계에 자
리한 산사로 시내와도 가까워 적은 발품으로도 언제든 편히 찾을 수 있다. 또한 북한산 둘레길
의 동쪽 구간이 부근을 지나므로 둘레길 탐방 때 잠시 다리를 쉬어갈 만 하다.
※ 본원정사 찾아가기 (2013년 5월 기준)
* 지하철 4호선 수유역(3번 출구)에서 강북구 마을버스 02번을 타고 본원정사 종점 하차, 종점
에서 2분만 걸으면 바로 본원정사이다.
* 지하철 4호선 미아역(4번 출구) 중앙차로 정류장이나 미아3거리역(3/5번 출구)에서 151번 시
내버스를 타고 국립재활원(서울영어마을수유캠프)입구에서 하차 삼각산로를 따라 도보 12분
*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북구 수유동(인수동) 산125 (☎ 02-902-7337) |
▲ 본원정사 삼성각(三聖閣) |
본원정사에 들어서니 생각 밖으로 사람들이 무지 많아 내심 놀라고 말았다. 그에 비해 이곳 후
속으로 간 고려 후기 고찰, 경국사는 한산해 크게 대조를 보였지.
사람들은 대적광전과
명부전에 집중적으로 몰려있었는데, 그 혼잡함을 피하고자 제일 윗쪽부터
둘러보기로 하고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삼성각으로 올라갔다. 이곳은 경내 변두리라
인적은 별로 없었다.
삼성각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1999년 이후에 지어졌다. 이 건물은 토속신으
로 불교의 일원이 된 산신(山神)과 칠성(七星), 독성(獨聖)의 보금자리로 예전에는 창건주인 손
덕선의 진영(眞影)이 봉안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다른 곳에 가 있다. |
▲ 경내에서 삼성각으로 가는 길
▲ 산신 가족의 단란함이 엿보이는 산신탱
산신이 요즘 장사가 안되서 며칠 밥을 안준 것일까? 호랑이의 인상이 꽤나 날카롭다.
너무 인상을 써서 주름선이 강하게 생겼을 정도. 그에 비해 산신의 표정은 여유롭다.
중생들이 초파일이라고 상다리 아작날 정도로 제물을 올렸으니 그 제물로
호랑이 좀 챙겨줬으면 좋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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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성(나반존자)이 그려진 독성탱과 독성상 |
▲ 칠성이 그려진 칠성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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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성각 우측에 자리한 조그만 공간
중생들이 놓고간 조그만 불상과 동자상, 나한상
등이 그들만의 조촐한 법당을 이루고 있다. 다
들 동전과
지폐를 하나씩 쥐어들며 초파일 고수
익의 기쁨을
누린다. 너무 재물을 밝히는 것도
절집의 도리가 아닌데.. 그 돈으로 가난한 중생
이나 도왔으면 좋으련만.. |
▲ 삼성각에서 바라본 천하
농작물이 무럭무럭 숙성의 과정을 밟고 있는 비닐하우스 너머로 연등으로 장식된
대적광전 주변과 나한전의 머리가 보이고 산 너머로 강북구 수유동이 시야에
들어오는데,
속세와 비슷한 높이라 조망은 그리 좋지 않다.
▲ 약사전 앞에 놓인 5층석탑과 샘물을 제공하는 문수동자상 |
5층석탑은 1980년대에 만든 것으로 이곳의 유일한 석탑이다. 법당인 대적광전 앞이 아닌 약사전
앞에 바닥돌도 없이 둔 것이 이상한데, 아마도 기존의 대웅전과 나한전이 몰지각한 자에 의해
불에 타면서 임시로 이곳에 옮겨진 것으로 여겨진다.
석탑 옆에는 하얀 피부의 문수동자상이 물병을 쥐어들고 조그만 석조(石槽)에 물을 붓고 있는데,
물이 쉬지 않고 쏟아져 나온다. 그 작은 병에 도대체 얼마큼의 물이 들어있는 것일까.. 그렇다
고
물을 더 나오게 하려고 물병을 쑤시거나 부시진 말자, 그러면 물은 안나온다. 마치 이 땅의
흔한 쌀바위의 전설처럼 말이다. |
▲ 거대한 유리온실 같은 약사전(藥師殿) |
대적광전 우측에 자리한 약사전은 기와를 얹힌 불전(佛殿)이 아닌 유리를 씌운 건물이다. 유리
온실 불전은 거의 처음 보는 터라 기와집 불전에 익숙해진 두 눈이 영 적응이 되질 않는다.
이 건물은 2000년 이후에 지어진 것으로 동방정토(東方淨土)의 주인인 약사여래(藥師如來)의 거
처이다. 원래는 건물도 없이 불상만 있던 야외 법당이었으나 날씨와 온갖 외부 위협으로부터 불
상을
보호하고 참배객들의 편의를 위해 건물을 구상했는데, 기와집으로 짓기에는 불상이 허벌나
게 크고 소요 예산도 적지 않아 생각 끝에 유리 건물로 짓게 되었다. |
▲ 약사전 약사여래좌상의 위엄
서울에서 가장 큰 약사여래불로 지장보살상과 더불어 이 절을 먹여살리는 밥줄이다.
길고 가늘게 뜬 눈이 목조지장보살좌상의 눈초리와 좀 비슷해 보인다. |
첫댓글 본원정사... 정사라는 이름 때문에 가기가 망설여져 강북구 일원 답사 때 빼놓았는데 다시 기회를 만들어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거긴 아직 안가보셨군여. 불우이웃돕기 차원에서 손가락 뷰온좀 눌러주시길.
쿡 찍고 갑니다. 언제봐도 정성 가득한 글 고맙습니다.
불우회원돕기 차원에서 손가락 뷰온좀 가루가 되도록 눌러주시길. 이런 글 쓰는것도 다 개뻘짓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