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에게는 누구나 저마다의 지성소(至聖所)가 있다.
나의 지성소는 충주시 주덕읍 창전리 353번지이다.
그 당시는 자 기와집 이었지만, 지금은 앞 건물은 무너지고 뒷건물 ]자 형태의 양철지붕으로 남아 있다.
군대를 갔다 와서 복학하고 졸업을 하니 불황이 극심하여 공업교육학과를 졸업한 나는 학교 발령마저 멈추어 갈 곳이 없었다.
나는 2년간 아버지를 따라서 농사일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아직 노동일이 몸에 익숙지 않아 며칠 일을 하면 몸살이 나곤 하였다. 그 때는 국립대 졸업하면 순위고사까지 금지 되었고, 국가에서 발령 나는 곳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회사는 순수 공대를 나온 사람도 들어가기 힘드니, 나의 경우는 갈 곳이 없어졌다.
나는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뒤뜰에 나가 하나님을 만나려 애를 썼다. 기도후 하늘을 바라보면 하늘의 무수한 별들이 빛나고 있었다. 나는 아브라함을 생각했다."
“네가 저별을 셀 수 있느냐! 네가 셀 수 있을진대, 내가 네 후손을 저 별보다 많게 해주겠다.” 75세가 되도록 후손이 없는 아브라함에 한 그 님의 목소리이다.
“ 나는 정한수 떠놓고 빌고 기도하는 심정이 되었다.
그러기를 한 2년 꿈을 꾸는데, 창문도 없는 타워 어두운 곳에 내가 갇혀 있었다. 그런데, 바깥에서 아주 밝은 빛이 비추면서 나오라고 했다.
그리고 또한 꿈에 내가 상을 받는데, 내가 그 자리에 7번째 정도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내 서류를 옮겨 놓은 서울교육청을 방문하여 문의 하니 내 순서가 7번째이기에 올 3월에는 교사 발령을 받을 것이라 했다.
나는 그 힘든 노동에서 벗어나 하이칼라의 교사로 서울 경서중학교가 내 첫발령지가 되었다.
그 이후 시골을 갈 때면 그 지성소에 들렀다. 그리고 짧게나마 기도했다. 고맙고 감사하다고,.. 때로는 그때가 당신과 내가 더 친했다고, 지금은 기쁨이 없어졌다고 불평도 했다.
결혼을 하고 난후 아내는 시골에 가면 바로 서울로 올라가자고 졸라대어 나는 아버지를 도와 일을 해주고 오후에는 서울로 귀경을 하다 보니 나의 지성소는 찾는 시간도 줄어들고, 기도 시간도 아예, 그곳을 정비하는 시간으로 바뀌어 버렸다.
몇 해 전 늦가을 그 지성소의 말라빠진 딸기밭을 낮으로 정리하고 서울로 귀경했는데 온몸은 온갖 두드러기요. 벌레 물린 자국이었다. 한 20일 고생을 한 것 같았다.
그리고 올해 삼각괭이로 딸기밭 또랑을 정리했는데 또 병원에 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아! 이제는 그곳의 풀을 베는 것조차 두렵다.
지금 안병무 신학교수의 평전을 읽어보니 문득 깨달아 진다. 그곳은 내가 소피보는 장소요! 또한 나의 지성소 이었다.
당신은 소리 없는 벌레를 통하여 나한테 얘기 하고 싶었던 것 같다.
다시 시골에 가면 밤하늘 그곳에 가서 당신하고 옛날을 기억하며 얘기하렵니다. 기다려 주어서 고맙다고,,, 항상 당신을 잊지않겠다고,,,,,,,
첫댓글 아, 한선생님에게 그런 추억이 있으셨군요.
노동과 기도, 아버지의 기억까지... 소중한 장소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