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 처| 김태한 목사
오늘부터 대강절이 시작됩니다. 대강절(待降節)은 글자 그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를 기다리는 절기” 라는 뜻입니다. 대강절을 영어로 advent 라고 하는데, 그 뜻은 “출현(出現)” 혹은 “도래(到來)” 라는 뜻입니다. 첫 글자 A자를 대문자로 쓰면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는 크리스마스 전까지 4주간을 가리키는 대강절이라는 뜻이 됩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대강절은 이중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축하하는 의미가 있고, 또 하나는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소망 중에 기다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중에 열처녀의 비유가 있지요(마태복음 25:1-13)? 다섯 처녀는 등불에 기름을 준비하여 슬기롭게 신랑을 기다렸습니다. 미련한 다섯 처녀는 기름을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한 밤 중에 신랑이 온다는 전갈이 왔습니다.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불을 켜고 신랑을 맞으러 나갔습니다. 미련한 처녀들은 등불에 기름이 없어서 허둥대며 기름을 사 가지고 왔습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신랑은 이미 왔고 문은 닫혀서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문을 좀 열어달라고 대문을 두드렸습니다. 안에서 신랑이 말했습니다. “나는 너희는 모른다!”
대강절을 맞이하는 성도들은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날과 그 시간을 아무도 모릅니다. 항상 기름이 떨어지지 않도록 준비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돌아보아서 언제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할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오시는 것이 기쁜 것만은 아닙니다.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는 심판의 주님으로 오십니다. 우리는 모두 그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날을 위해서 준비해야 합니다. 가장 좋은 준비는 회개하는 심령입니다.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시편 51:17).” "상한 심령" 을 NIV 성경에 “a broken spirit and a broken and contrite heart” 라고 했습니다.
예수님 전에 와서 예수님께서 오실 길을 닦았던 세례 요한의 중심 메시지도 “회개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메시지는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a voice of one calling in the desert, 마태복음 3:3)” 였습니다. 좋은 집에서,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음식을 먹는 호의호식(好衣好食)하는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 빈들에서, 낙타 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었던 사람의 소리였습니다. 그것은 속세(俗世)에 물들지 않은 예언자의 소리였습니다. 대강절을 맞이하는 성도들은 “회개하라!”고 외치는 광야의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상한 심령으로 돌아가서 주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한 말씀을 보았습니다. 우리 말 성경에는 분명하게 나와 있지 않지만 원문에는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 관한 것을 “보았다(saw)” 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들은 것이 아니라 이사야가 본 “비전(vision)” 입니다. 이것은 영원한 평화에 대한 비전이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평화가 있습니까? 여러분 개개인에게 묻습니다. 여러분의 삶에 평화가 있습니까? 반대로 여러분의 삶이 불안하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한복음 14:27).” 예수님이 약속하신 참 평안을 알고 계십니까?
우리가 사는 이 세계는 어떻습니까? 이 세계에 평화가 있습니까? 얼마 전에도 뉴스에 보니까 미국과 러시아가 핵무기를 몇 %까지 감축하자는 합의를 했다고 하더군요. 이것이 세상이 잠깐이나마 유지하고 있는 평화입니다. 언제 한쪽이 이 합의를 깨고 핵무기를 양산할지 모릅니다. 그러면 세상은 다시 불안해질 것입니다. 세상은 평화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쉽지 않습니다. 끊임없는 전쟁과 테러의 위협 속에 세상은 불안해 하고 있습니다. 덕분에 서울 왕복 비행기 값이 500불도 안됩니다. 미국과 아프가니스탄 간에 전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미국이 이 참에 아예 이슬람 과격주의자들의 테러 위협의 뿌리를 뽑으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고 하더라도 미국에 대한 증오심이 남아 있는 한 테러를 근절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오늘 이사야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보여 주시는 평화에 대한 비전은 우리 개개인이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온 세상이 들어야 합니다. 세상이 그렇게 원하는 평화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바로 이 말씀 속에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은 크게 두 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1-4절 말씀은 구원에 대한 약속의 말씀이고,
5절 말씀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응답(應答, response) 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주목해서 보십시오.
먼저 여호와의 전의 산이 우뚝 솟을 것이고 모든 사람이 그 산을 찬양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 뒤에 나오는 말씀으로 봐서 그 산은 시온산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나서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 성산(聖山)을 향해 순례(巡禮, pilgrimage) 하게 된다고 합니다. 이 사람들은 순례를 하면서 모든 사람들에게 이 순례의 길에 초청하는 노래를 부릅니다. “어서 주님의 산으로 올라갑시다. 이스라엘 하나님의 성전으로 들어갑시다. 하나님이 거기서 우리에게 자신의 법도를 가르쳐 주시는 대로 복종합시다.” 그러면서 그 산으로 가야 하는 이유를 말합니다.
“주께서 시온에서 가르침을 베푸실 것이다. 주께서 예루살렘에서 말씀을 선포하실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순례의 결과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수많은 국제 분쟁들을 해결하시며, 수많은 민족 간에 문제들을 직접 해결하십니다.
각 나라의 지도자들이 이 말씀을 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빈 라덴이 이 말씀을 듣고, 조지 부시가 이 말씀을 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PLO의 아라파트(Araft)가 이 말씀을 듣고 이스라엘의 샤론(Sharon) 총리가 이 말씀을 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김정일이 이 말씀을 듣고, 김대중이 이 말씀을 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수많은 소수 민족들의 불만이 쌓여 있습니다. 민족 간의 이해와 분쟁은 해결 실마리가 보이지 않습니다. 세계 각국들이 자기들의 무기를 모조리 부수어서 평화의 도구로 바꿀 수 있는 길이 있다면, 칼과 창을 쳐서 농기구(農器具, farming tools)를 만들 수 있는 길이 있다면, 이 세상에 영원한 평화가 찾아 올 길이 있다면 온 세상이 그 말씀을 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영원한 평화의 열쇠를 하나님께서 쥐고 계십니다. 보세요. 먼저 하나님의 말씀이 “나옵니다(sall go forth).” 하나님의 말씀이, 그분의 교훈이 시온에서부터 나오고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들으려고 만국 백성들이 그 말씀 앞으로 모여 듭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사람들은 그 말씀을 듣습니다. 그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스스로 무기를 버립니다. 하나님이 무기들을 때려 부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 살상무기(殺傷武器)들을 쳐서 농기구를 만듭니다. 이제 더 이상 사람들은 전쟁을 연습하지 않습니다. 비로소 세상에 영원한 평화가 옵니다. 이 평화의 기초(base)는 사람들 간의 합의가 아닙니다. 핵무기를 감축하자는 약속이 아닙니다. 서로 침략하지 말자는 불가침 조약이 아닙니다. 이 영원한 평화의 기초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이사야도 하박국 선지자도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하리라(이사야 11:9, 하박국 2:14).” 고 했는데,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온 땅에 충만해질 때 비로소 세상에 참 평화가 찾아옵니다.
그러면 이 엄청난 세계 평화에 대한 비전 앞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청년들이 즐겨 부르던 노래가 생각납니다. 부흥 2000에 나오는 노래인데요.「물이 바다 덮음같이」라는 노래입니다. “세상 모든 민족이 구원을 얻기까지 쉬지 않으시는 하나님, 주의 심장 가지고 우리 이제 일어나 주 따르게 하소서. 세상 모든 육체가 주의 영광 보도록 우릴 부르시는 하나님, 주의 손과 발 되어 세상을 치유하며 주 섬기게 하소서. 물이 바다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온 세상 가득하리라. 물이 바다 덮음 같이 물이 바다 덮음 같이 물이 바다 덮음 같이. 보리라. 그 날에 주의 영광 가득한 세상. 우리는 듣게 되리. 온 세상 가득한 승리의 함성”
주의 심장 가지고 우리 이제 일어나 주 따르게 해 달라고요. 주의 손과 발이 되어 세상을 치유하며 주님을 섬기게 해 달라고요. 이것이 세계 평화에 대한 비전을 보는 사람들이 해야 할 사명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그 말씀이 나와 있습니다. 바로 1절에 나오는 “유다와 예루살렘”이 이사야를 통해서 하나님의 평화의 비전을 본 사람들입니다. 바로 오늘 이 말씀을 듣는 여러분들입니다. 바로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입니다. 만국 백성들이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시온산으로 몰려 옵니다. 모든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몰려 옵니다. 하나님의 도를 배우려고 몰려 옵니다. 이 도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길(God’s ways)” 입니다. 하나님의 길을 배우려고 몰려 옵니다. 세상 모든 민족이 하나님의 길을 배워서 그렇게 살고 싶어 그 길을 배우려고 몰려오는 것입니다.
이 때 하나님의 백성들이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길” 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성경만 끼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삶은 어떤 것인지 우리가 보여 주어야 합니다. 과거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길을 보여 주지 못했습니다. 무슬림들이 기독교에 대해서 적개심을 가지고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슬람권에서 선교가 안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과거에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길” 을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들을 침략하고 죽이고 약탈했습니다. 왜 교황이 이슬람 세계에 저지른 과오를 사과하게끔 되었습니까? 저도 그 사과문을 읽어 보았는데요. 미흡합니다. 그 과오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명시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과오가 무엇인지 두리뭉실하게 넘어가는 사과가 과연 상대방에게 진정한 사과로 받아들여지겠습니까? 이것은 카톨릭의 문제만 아닙니다. 기독교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기독교도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뿌리가 거룩하지 못한데 부분적으로 개혁(종교개혁을 말함)을 했다고 해서 거룩해지겠습니까?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늘 말씀 5절을 보십시오.
“야곱 족속아,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빛에 행하자(Come, O house of Jacob, let us walk in the light of the LORD.).”
하나님의 빛 가운데서 살자는 것입니다.
그 빛 가운데서 생각하고, 그 빛 가운데서 행동하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도” 를 이 세상에 보여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렇게 세상을 산다고 우리가 보여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시대적인 사명입니다. 이 사명을 소홀하게 하면서 예수 믿으라고 전도만 해서 되겠습니까? 그렇게 전도하는 전도가 얼마나 효과가 있겠습니까?
우리교회에서 일대일 양육을 하고 있습니다. 일대일 양육의 내용을 수레바퀴로 설명합니다. 선박의 키로 설명하기도 합니다만 수레바퀴로도 설명합니다. 수레바퀴가 중심이 있고 살이 있습니다. 그리고 수레바퀴가 굴러갑니다.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중심 주변으로 구원의 확신이 있고 하나님의 속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8개의 바퀴 살이 있습니다. 그 칸마다 성경, 기도, 교제, 전도, 성령충만, 시험, 순종, 사역이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내 삶의 주님으로 모셔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구원의 확신을 가져야 하고 하나님은 누구신지 하나님의 속성(屬性)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8가지 요구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 때 비로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다스리는 삶을 살게 됩니다.
수레바뀌 원리에 대한 설명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수레바퀴는 굴러가야 합니다. 굴러가지 않는 수레바퀴는 의미가 없습니다. 수레바퀴가 굴러가기 위해서는 지면(地面)과 맞닿아야 합니다. 이 지면이 바로 이 세상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누구인지 모릅니다. 우리 중심에 누가 있는지, 우리가 날마다 성경을 읽는지, 기도를 하는지 우리의 삶의 내면(內面)을 속속들이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이 세상에 어떻게 어떤 모습으로 “굴러다니는지(살아가는지)” 를 보고 알 뿐입니다.
다시 오늘 말씀으로 돌아갑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과연 하나님의 빛 가운에서 “행하고(walk)” 있는지를 보고 판단합니다. 이런 점에 있어서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과거 어느 시대보다도 우리 그리스도인의 책임있는 삶을 요구된다고 하겠습니다.
지금의 나의 삶이 “하나님의 길”을 보여 주고 있습니까? 지금 나는 정말 주님의 심장을 가지고 “일어나 주님을 따르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지금 나는 주의 손과 발이 되어 세상을 치유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나는 정말 하나님의 빛 가운에서 수레바퀴가 되어 세상에 “굴러다니고” 있습니까? 우리가 이것을 보여 주지 않으면 누가 보여 주겠습니까? 세상은 우리를 보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얻기를 원하는데 우리가 그것을 보여주지 않으면 어디서 그 지식을 얻겠습니까?
성탄 전 날 밤에 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에게 하늘에서 음성이 들렸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평화가 임했습니다. 누구를 통해서요? 나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입니다. 이사야의 비전을 통해서 보여진 하나님의 영원한 평화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분은 이 세상에 “평화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평화를 내가 너희에게 준다고 하셨습니다. 이제 남은 문제는 하나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빛 가운데서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빛 가운데서 살지 않기 때문에 우리 자신들마저도 하나님의 평화를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빛 가운데서 살지 않기 때문에 세상은 하나님의 평화를 알지 못하고 불안하게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빛 가운데 살아가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하나님의 평화를 맛보십시오.서로 미워하고, 서로 싸우고, 서로 전쟁하고, 서로 시기하는 이 시대를 향해 하나님의 평화를 선포하십시오. 여기에 온 인류가 영원한 평화 속에 살 수 있는 길이 있다고 하나님의 “GOOD NEWS” 를 전파하십시오. 이 평화의 소식은 사방으로 포위되어서 이제는 죽음 밖에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어 보이는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군인들에게도 전파되어야 합니다.
성탄절이 20여일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이 대강절에 먼저 여러분 자신들을 겸손하게 돌아 보십시오. 그리고 회개하는 상한 심령들을 회복하십시오. “하나님의 길대로" 살지 못한 부끄러운 모습들을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의 결심을 하나님 앞에 말씀 드리십시오. “하나님, 이 대강절에 제 자신이 먼저 하나님의 말씀 앞으로 나가는 순례자가 되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하나님의 빛 가운데서 살아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