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대통령
1931년 경상남도 합천에서 아버지 전상우와 어머니 김점문 사이에서 6남 5녀 중 4남으로 태어났다.
[19] 그의 위로 형 열환(1914년생), 규곤(1916년생), 기환(1929년생)과 누나 홍렬(1918년생), 명렬(1922년생), 선학(1924년생)이 있었다. 그가 태어난 뒤로도 여동생 점학(1936년생), 남동생 석환(1941년생), 경환(1946년생)이 태어났다.
본관은 완산(完山)이며, 그의 가계는 몰락한 양반으로 13대조인(조선)">
전제가 임진왜란 때 영산현감으로 일본군과 싸우다 권율의 명령을 어겼다며 처형당했고 이후 무관이 몇 명 배출됐지만 한동안 벼슬에 나가지 못한 상태였다.
아버지는 가난한 농부였으나 마을 구장을 지낼 만큼 상당한 한문 지식이 있었다.
[20] 약간의 의학 지식도 갖췄던 그는 정식 진료소를 차릴 수준은 아니었으나 마을 주민들을 민간요법으로 치료하기도 했다. 전두환은 이런 아버지의 성격을 닮았다.
[21] 어머니 김점문은 자녀들 중 전두환에 대한 기대가 강했다. 아들에 대한 기대가 얼마나 강했는지 지나가는 승려를 대접해준 뒤, 그 승려로부터 '어머니의 튀어나온 앞니가 아들의 운세를 가로막고 있다'는 말을 듣자마자 김점문은 부엌으로 달려가 쇠 집게로 생니 3개를 뽑을 정도였다고 한다.
육사 생도 시절의 전두환은 교번 152번으로 교육연대 2중대 2구대에 소속되었다. 육사 1학년 여름에 비상이 걸려 M1소총을 들고 완전 군장을 갖추고 24km를 구보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체력 “테스트”를 위해서였다. 이 훈련을 이겨내지 못하면 장교의 자격이 없다는 것으로 판정되어 유급 조치를 시키겠다는 것이었다.
진해 육군대학에서(마진터널)을 거쳐 창원군 상남을 지나 큰 고개를 넘어 다시 진해로 돌아오는 60리의 구보였다. 몇몇 생도들이 쓰려졌다. 이때 전두환은 한손으로는 한 동료의 옆구리를 잡아 이끌고 또 한손으로는 그의 M1 소총과 (배낭)을 움켜쥐고 목표 지점에 도착했다는 미담을 퍼트리기도 했다.
1955년 3월 육군 소위로 임관하여 제 25보병사단 소대장에 보임되고, 그해 9월 30일 광주육군보병학교 초군반(초등군사반)에 입교하였다
1970년에는 육군 대령으로 진급 육군참모총장 수석부관이 되어 1년간 근무했다. 1970년 11월 22일 백마부대 29연대 연대장이 되어 베트남 전쟁의 지휘관에 파병·참전했다. 1971년 1월 30일 박쥐 25호 공수낙하 작전을 개시하였다가 병사 1명이 실종되었다. 수색을 하였으나 병사는 찾지 못했는데, 기적적으로 이 병사는 홀로 살아서 돌아왔다. 2월 2일부터 2월 20일까지는 쑤이까이 및 망망 계곡에 숨어있는베트콩을 섬멸하였다.
3월 7일 29연대 3대대의 12중대 중대원 176명 가운데 한꺼번에 9명이 사망하고 10여명이나 부상당하여 후퇴하였다.
우기(雨期) 중인 6월 22일 박쥐26호 작전을 개시하여 베트콩 230여 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1979년 10월 26일에 대통령 박정희가 궁정동에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해 저격당하는 10·26 사건이 발생했다. 국무총리 최규하가 대통령 권한대행직으로 일시 권력을 승계했다.
이 날 전두환은 부하들에게 막강한 권한을 가진 합동수사본부의 설치 기안을 명령했다
[32] 10월 27일 새벽 비상국무회의에서 박정희 대통령 유고안이 내려졌고, 계엄사령부가 설치되자 전두환 소장은 곧 계엄사령부 예하 합동수사본부 본부장에 임명돼 박정희 대통령 피살사건의 수사 지시 명령을 받았다.
1980년 8월 6일 육군 대장(大將)으로 진급한 전두환은 곧 대통령 선거 출마를 선언했다. 보안사에 의해 검열과 조종을 받았던 한국 언론은 미국의 로스앤젤레스 타임스가 전두환 장군을 지지한다고 보도했다.
[52] 8월 16일 최규하 대통령이 사임했고 8월 22일 전두환이 군대에서 전역했다. 8월 23일 전두환은 보안사령관에서 사임하고 당시 수도경비사령관이던 노태우가 후임으로 임명되었다. 8월 25일 필리핀의 이멜다 마르코스는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은 전두환을 지지해야 한다고 했다.
[53] 8월 27일 장충체육관에서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에 의해 제11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후 9월 1일 잠실체육관에서 제11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경제 정책 자문
전두환은 1980년 9월에 김재익을 등용했다. 김재익은 "제가 생각하는 경제 정책은 인기도 없고 기존의 세력들이 환영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누군가는 이 일을 해내야 합니다. 그래도 저를 쓰시겠습니까"
[56]라고 말했다. 전두환은 김재익의 다짐을 받아들이고 김재익을 신뢰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전두환은 '경제에 관해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 라면서, 김재익에게 경제정책 전반에 대한 절대적인 권한을 부여했다.
김재익은 청와대 경제수석으로 입각한 뒤, 전두환의 경제 가정교사 역할까지 했다.
[56] 전두환은 자신이 경제학, 경영학 관련 지식이 부족함을 스스로 인정하고 김재익의 건의를 받아들여 경제학자들과 경영학자들을 청와대로 불러들여 새벽까지 강의를 들었다. 김재익은 하얀 종이에 경제 자율화와 안정화의 그림까지 그리면서 전두환을 가르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56] 전두환은 김재익의 경제, 경영학 강의를 통해서 나름대로의 경제관을 갖게 됐고, 사람들을 만나면 자신의 경제에 대한 소견을 밝히고
[57] 토론하기를 좋아했다. 그러나 김재익에 대한 신뢰가 커지면서 전두환의 집권을 도운 군부 세력은 김재익을 견제했다.
1983년 10월 제5공화국 내각은 전두환 대통령을 대동하고 동남아 순방을 다녀왔다. 10월 9일, 동남아시아 국가 순방 기간에 순방국 하나인 버마(미얀마)에서 아웅산묘소 참배 도중 북한에서 보낸 공작들에 의한 폭탄 테러 사건이 발생했다. 1진으로 도착하여 예행 연습 중이던 이범석, 서석준, 심상우, 함병춘 등 80명의 외교관과 취재진 및 현지 안내인이 피폭으로 즉사했다.
다만 1진으로 도착하여 예행연습 중이던 인원 중 이기백은 당시 현역 군인 신분이였기 때문에 장교 정복을 입고 있었는데 각종 휘장 및 약장이 방탄복 역할을 해서 목숨을 건졌다. 현지 한국인들을 방문하고 뒤늦게 2진으로 방문한 전두환은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사건 직후 현장에 도착했다가 다시 발길을 돌려 랑군 시내로 빠져나갔다.
이때 북한이 파견한 특수요원 중 미얀마 경찰에 검거된 조선인민군 상위 신기철은 격투 중 현장에서 사살됐고 체포된 소좌 진모는 사형에 처해졌다. 인민군 대위 강민철은 범행사실을 자백하고 수사에 협조하여 종신형을 선고받고 수감됐다가 2008년 5월 21일 사망했다.
[91] 전두환은 동남아시아 국가 순방일정을 전면 취소하고 비행기편으로 비밀리에 귀국했다.
첫댓글 역사공부~!
내가 존경하는 대통령중 한분이다. 와? 전통께서 현직때 정말 살기좋았다. 사회악은 다잡았으니까., 깡패.빨갱이가 어딨어? 우리같은 서민들은 지만 열심히하면 참살기 좋았다. 그때가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