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천만 갈대군락지(순천만 갈대. 갯벌)순천만을 찾아 가려면 목포~부산간 2번 국도상의 순천이나 벌교에서 10여 분 안에 쉽게 도착한다. 도대체 갈대밭 15만평이 넓어서 인가, 아니면 ‘여자의 마음’처럼 갈대가 바람을 잘도 타서 관광지란 말인가. 한시대 풍자됐던 말, “여자의 마음은 갈대와 같다”는 말에 “남자의 마음은 갈대 위에 앉은 잠자리와 같다”고 했다지.
갈대라고 해봤자 뭐 별게 있겠나. 장어집 간판에 끌려 우선 허기를 시급히 해결할 요량으로 들어섰다. 식당 현관에 걸린 ‘순천만 흑백사진’을 만나는 순간에 순천만이 갖는 또 하나의 서정이 넘실대고 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시가 있고, 그림이 있고, 자연산 민물장어와 짱뚱어도 있고, 철새도 있고, 한없이 그리울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만나는 공간이었다.
나룻터에서 낚싯대를 걸어 놓고 오수를 즐기는 중늙은이를 만나 배를 타고 갯벌을 보고 싶다고 했더니, 언제 졸았던지 벌떡 일어선다.
“하먼이라, 교수들이나 뭘 좀 안다는 양반들은 배를 타고 뻘에 들어가자고 한디, 그냥 놀러 온 사람덜은 여그서 갈대 코빼기만 바뿔고 간단 말이여!”
통통배를 5만원에 빌려 타고 수로를 따라 조심조심 갈대밭을 벗어났다. 이게 뭔가? 물길 3km 좌우로 아득히 갯벌이 전개되는 순간 신천지를 발견한 감격이 이러했을까. 갈매기, 황새들이 떼지어 놀고, 짱뚱어를 쫓는 아주머니의 장단지가 건강하다. 앞으로 나아갈수록 수로가 넓어지고 통통배를 정지시킨 채 남정네들은 긴 대를 휘저으며 장어 낚아채기에 바빴다.
순천만의 자랑은 갈대가 아니라, 갯벌이다.
낙안읍성 민속마을순천만에서 가장 좋은 썰물 때를 만나 갯벌탐사를 마쳤다면 이번 남도여행 코스가 옹골차다는 느긋함에 빠져도 좋다.
소설 「태백산맥」의 무대 벌교읍내로 접어 들어 열두방천을 따라 우회전 하여 서서이 진행하라. 이 벌교천을 가로 질렀던 ‘뗏목다리(筏橋)’가 지명이 되고 아마 그 자리에 세웠던 홍교(길이27m, 높이3m, 폭4.5m)가 지금은 보물 제304호로 대우를 받고 있는가 보다. 저 너머 왼편으로 벌교성당이 보이는 삼거리에서 다리를 넘지 말고 우회전 하여 낙안벌을 달리자.
낙안읍성을 찾아 드는 산비탈엔 배과수원이 탐스럽다. 일찍이 낙안배가 세상에 떳었는데 나주배에 밀려 겨우 명맥 만이 유지되고 있다니 ‘낙안군’이 없어지고 낙안면으로 격하된 영향도 컷으리라.
낙안읍성의 동문인 낙풍루 앞에 서면 평지에 돌로 쌓은 성이 제법 잘 복원되어 있다. 충남 서산의 해미읍성과 외모가 닮은 듯 하나, 성 안에는 동내리, 서내리, 남내리 108세대 약 300명의 주민이 조선시대의 생활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민속마을이다.
낙안읍성 민속마을은 용인민속촌이나 제주민속마을처럼 인위적으로 조성되어 운영되는 시설이 아니라, 주민이 실제로 생활하는 ‘살아있는 민속마을’인 것이다. 낙안읍성이 본격적으로 복원되기 얼마 전만 해도 성 안에 학교, 면사무소, 성당, 우체국 등 모든 공공시설이 있었으나 밖으로 밀려나고, 순수 민가와 관아 만 남아 있다.
그래서 민속마을에는 인위적으로 설치한 볼거리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아 단조로움마저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옛모습이 보존돼 허준, 임꺽정 등 TV연속극을 비롯해 사극 영화나 각종 CF촬영지로서 뜨는 건 예사고, 주민들 삶 자체가 남도체험의 핵심인 것이다.
낙안읍성의 면적은 67,490평이며, 성곽길이 1,410m, 폭 3~4m이다. 축성연대는 백제 때 파지성이었으며 고려 때는 낙안군의 고을 터였는데, 왜구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해 1397년 (태조6)에 김빈길 장군이 의병을 일으켜 토성을 쌓았다가 세종실록에 의하면 1424년에 석성으로 넓혀 쌓았고, 1626년(인조 4년) 임경업 장군이 이곳 낙안군수로 부임하면서 증축하였다고 한다.
보성 다원보성 다원으로 가는 길은, 찻잎 끝에 영롱한 아침이슬이 아직 맺혀 있을 때가 좋다. 그 때엔 율포해안을 뒤덮은 안개를 밀어내고 다향이 그득히 피어 올라 몸을 적신다.
보성 일대의 다원에서는 혀에 감도는 차맛을 음미하기 보다는 일상을 벗고 차밭에 몸을 던져 온몸으로 다향을 음미하는 곳이다. 차밭 고랑을 술래잡기 하다 허기가 들 때면 어느새 누렇던 얼굴에 꽃색이 돌고 상쾌한 피로감 속에 몸이 해독된다. 어디 그 뿐이랴, 출세욕에 사로 잡혀 이웃들 모두 적으로 내 몰아 꿈자리도 사납던 놀부욕심이 풀린다면 세상은 더욱 아름다워 지겠지.
보성에서 율포 쪽으로 활성산 봇재를 넘으면 녹색비단을 말아 쌓은 듯 계단식 다원이 펼쳐지는데 다향각에서 일대를 조망할 수 있다. 다음엔 하늘을 덮는 삼나무길이 운치를 더해 이국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대한다원에 가 보고, 세번 째로 다향각을 지나 웅치 쪽으로 비탈길 따라 우회전하면 최근 주유소 CF에 나오는 다원이 초원처럼 펼쳐진다. 이제 다원 답사 마지막 코스인 율포 해수녹차탕으로 가보자. 해저에서 뽑아 올린 해수와 녹차의 만남, 피부미용과 고혈압 치료에 탁월한 효과가 있다는 건강욕을 즐길 수 있어 전국 여행사가 추천해 반드시 들르는 관광코스로 자리잡고 있다.
보성다원은 보성읍과 회천면 일대에 600ha가 조성되어 있으며 연간 200여 톤의 차를 생산한다. 4월 중순부터 5월 초순 사이에 가장 아름다운 다원을 볼 수 있는데, 보성군에서는 봄 차 수확시기에 맞춰 ‘다향제’를 연다.
정응민 예적지(보성제)
영화 <서편제>가 실제 판소리의 본고장인 보성, 해남, 강진, 완도 등 남도의 아름다운 사계를 배경으로, 판소리에 실린 소리꾼 일가의 삶의 내력과 득음에 대한 집념을 그려 서편제 신드롬을 일으킨 바 있다. 서편제 시나리오는 장흥사람 이청준이 쓴 연작소설 「남도사람」을 장성사람 임권택 감독이 영화화 한 것이다. 그만큼 서편제 판소리와 남도의 정서를 보듯이 대변한 작품이라 할 것이다.
보성에 가면 판소리 소리꾼들의 애잔한 삶의 잔해가 켜켜히 묻어나고, 박유전, 정재근의 소리 맥을 이어 보성제를 이루어 낸 정응민의 생가와 예적이 도강마을에 남아 있다. 정응민은 1896년 도강마을에서 태어나 백부 정재근의 문하에서 소리를 배웠는데, 선비정신이 남달라 소리꾼이 하대를 받던 시대에도 당당하게 선생으로 불렸다고 한다.
보성제는 동편제와 서편제, 중고제까지 장점을 소화한 하나의 유파로서, 정응민이 고향에 은거하여 정권진, 조상현, 박춘성, 안채봉, 박기채, 성우향, 성창순, 안향련 등을 인간문화재로 길러냈다. 보성 다원에서 웅치 쪽으로 방향을 바꿔 구비길을 돌아 서면 도강마을에 닿는다.
능가사
벌교를 지나 남쪽 고흥반도로 진입하는 순간 소록도를 떠 올리며 무작정 달린다. 과역을 지나 삼거리에서 고흥읍이나 소록도 길을 외면하고 죄회전 하면 점암, 영남, 포두, 나로도로 가는 길이다. 또 삼거리에서 팔영산도립공원길로 접어 들어야 한다. 고흥사람들은 곧잘 고흥 땅에 첫발을 내딛는 사람들에게 “울고 들어 왔다가 웃고 나간다”면서 먼길을 온 나그네를 위로하거나, 자기네의 인심을 과시하려고 든다.
능가사는 고흥반도에서 가장 높은 팔영산 기슭에 자리한 절집인데, 옛날엔 보현사라 했으며 정유재란 때 모두 불타버려 폐찰되었다가, 1644년(인조 22년)에 정현대사가 중창하여 능가사라고 했다.
고흥에 가면 다도해해상국립공원 나로도와 도화 일대, 소록도와 녹도항, 팔영산일출 그리고 고흥만 제방에 올라 고흥반도 제일의 일몰을 감상하는 재미도 쏠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