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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챙김 & 소마틱스 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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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사랑방-서로 소식을 나누기 스크랩 현대 균형 요가의 필요성
아모레퍼시픽 추천 0 조회 60 09.01.22 17:01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사람이 행복하게 잘 사는 길(성장의 지혜와 그 기쁨)은 새로운 것에 대한 느낌을 강화시키고 새로운 방향의 행동을 연습하여 과거의 불균형적 행동의 습관이나, 과거의 편협한 체험의 편견과 비체험적이고 비현상적인 관념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능력을 확보해 가는 것 뿐이다.

요가는 자신과 사물에 대한 새로운 느낌을 개척하기(마음열기 명상처방)와 새로운 방향의 행동을 개척하기(몸짓열기 균형회복처방)이다.
다시 말하면 마음이 열려 지혜롭고 몸의 능력이 발달되어 실천력과 면역력이 높아지므로서 전체성이 열리고 어떤 문제로부터도 자유로워 질 수 있는 능력을 확보하기(全知全能:Atman의 본성, OM, 平和)가 요가이다. 그러니까 잘 느끼기(Well feeling)와 잘 행동하기(Well doing)를 통해 잘 존재하기(Well being)가 요가이므로 행복(기쁨)의 길이란 심신에 전체성을 실현하기이다.
전체성이란 음양의 조화, 상대와 절대 그리고 상생과 상극의 조화, 생과 사의 조화, 물질(有)과 공간(無)의 조화, 진화와 퇴화의 조화, 냉온의 조화, 명암의 조화, 수직과 수평의 조화, 공통성과 차별성의 조화등과 같은 수많은 상대성의 균형적 화합을 뜻한다.
따라서 불균형적 치우친 성향을 찾아내고 새롭게 조절하는 것이 요가이다.
개체속의 조직과 조직이 그 모양이나 기능면에서 조화롭고, 개체와 개체간의 관계에 있어서도 서로의 형태, 기능의 조화가 있어야 한다. 즉 부분과 전체의 조화가 요구된다.
전체성을 질 높게 실현하려면 한사람의 조직들이 공통으로 요구하거나 개체들간에 공통으로 요구하는 생명요소에 있어서는 공평하게 균형을 이루는 수평적 조화(平)가 진리이고, 신체의 조직간이나 개체들간의 그 형태와 기능의 질적가치 때문에 선후, 본말, 인과와 같은 차별적 요구의 생명요소에서는 불공평한 차별의 수직적 조화(和)가 진리이다.
이 같은 수평과 수직의 전체적 조화가 균형적 화합의 평화(平和)이다. 따라서 요가는 자신과 주변에 대한 심신의 평화(平和)를 구체적으로 연습하는 문화이다.
공평과 공통이 균형이고 수평의 평(平)이라면 불공평과 차별이 불균형이고 수직의 화(和)이다. 자연은 이 두 가지의 진리를 통해 개체들이 스스로 선택하여 자기성장을 하도록 쉬지않고 일하고 있으며 수많은 아침과 봄을 반복하면서 평(平)과 화(和)를 조절(自制:요가)할 수 있도록 새로운 기회를 주면서 시간의 흐름을 제공하고 있다.
좁은 문(공간이 준 제한성) 때문에 여러 사람이 동시(平)에 들어갈 수가 없다면 시차를 두어 줄을 서서 선후 방식(和)으로 들어가는 것이 이 자연과 존재의 질서이고 진리이다. 모두가 문을 통과 할 수 있도록하는 공평성(平)을 위해서는 선후차별의 시차성(和)이 쓰일 수 밖에 없다. 어머니속으로 다시 들어 갈 수 없는 것은 자연과 생명의 절대 법칙이고 위계질서(和)이다. 사람과 만물이 각자의 특성이 있으나 그 능력들이 한계가 있어서 여러 가지로 제한적이다. 사람이 동시에 앞뒤좌우상하를 볼 수가 없고 동시에 그렇게 움직일 수도 없다.
그래서 인간은 자연존재들의 한계성을 넘어선 조건을 꿈꾸고 상상을 통해 신(神)이란 개념을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인간의 현실은 다르다. 시차를 두고 좌우전후상하를 공평하게 관찰 할 수 밖에 없다. 그렇듯 차별적 화(和)를 통해 다각적 안목의 공평한 균형성(平)을 깨치고 실현해야 함이 생명의 진리이다.
즉 어느 한쪽으로 치우친 다음에 그 반대쪽으로 접근하므로써 불균형능력(和)과 균형회복능력(平)을 조화시켜 평화(平和)를 조절해야한다. 불균형적 접근이 자기를 소비하는 창조적 사회활동이라면 균형회복은 자기를 수습하여 사회적 창조활동을 다시 할 수 있도록 활동에너지를 자기에게나 주변에 다시 비축하는 작용이다.
개체가 갖추어야 할 삶의 기술은 불균형적 일의 기술(和)과 그 불균형을 찾아내어 균형을 회복시켜야 하는 휴식 또는 여가의 자기 정립적 기술(平)로 나누어진다. 하나의 개체뿐만 아니라 여러 개체들 간에도 평과 화의 법칙이 진리이다.
개인이나 사회적 병리현상은 삶에 있어서 수평(平)과 수직(和)처럼 서로 다른 성질이 균형적인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불균형이 점차 심화될 때 생긴다.
요가와 참나(Atman)를 대변하고 있는 것이 옴(OM)이다. 옴(OM)이란 전체성을 상징하는 말로써 여러방향(方位, 전후좌우상하의 6方)의 이해와 몸짓을 확보하라는 뜻이며 신성하고 자유로우며 질 높은 지혜의 삶을 뜻한다.


1. 행복이란 무엇인가 ?

요가는 잘 사는 원리이다. 잘 산다함은 행복하기이고 행복하기란 스스로가 자신과 주변이 더 좋아지는 것을 통해서 오므로 지혜로워야 한다. 자신과 주변이 모두 잘 사는 지혜가 참된 지혜고 그 지혜를 바르게 실천할 때 가장 큰 기쁨이 온다.
행복한 삶이란 소량의 질 높은 에너지를 섭취하여 고부가가치를 창출하는 방향으로 에너지의 소비(사름)를 지속하기이다.
질 높은 에너지란 인간이 부자연하게 변형시켜 재배하거나 만들어 낸것들도 일부 있을 수 있으나 대체로 자연이 자기 물질과 정신의 원리에 의해 요리하여 산출한 제철식품과 물과 공기와 햇?과 어두움 등등을 뜻한다. 고부가가치의 창출이란 자신과 주변의 존재들이 기존의 삶보다 더 질 높은 삶을 향유할 수 있도록 시간도 단축시키고 노력도 절감시키는 발전을 지속적으로 이룩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유형적 물질의 기술과 무형의 정신적 이해력을 발전시킴으로서, 심신의 능력을 높이는 것이 고부가가치의 창출이다.
이 같은 일(지혜로운 실행)을 스스로가 자기에게 할 수 있을 때와 주변이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자기가 도울 때에만 자기가 삶의 기쁨(행복)을 느낄 수 있도록 된 것이 존재의 근본법칙이다.
요가경전 바가바드?기타(BG)8-3에 의하면 ‘만물의 본성(atman)은 새롭게 거듭날 꿈의 실천력(창조적 성장력:Visarga)이다.’라고 하여 스스로가 자신과 주변을 위해 일(성장력 발휘)하는 기쁨이 온전한 행복의 바탕임을 가르치고 있다.
따라서 행복의 지혜가 무엇으로부터 시작되는지를 깨치는 것이 마음열기의 첫번째 명상처방이다. 그러니까 무엇이 불행의 시작인가를 알면 행복의 지혜를 알 수 있다. 불행을 만든 요소들을 바르게 파악하고 그것들에 집착했음을 깨치면 그 반대 요소들을 놓쳐버렸음을 알게 된다.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고려되어야 할 전체적 요소들을 모두 동원해야한다. 분해와 종합이 모두 쓰여야 한다. 부분과 전체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과거와 미래가 현재를 중심으로 하여 바른 성장이 이룩되도록 서로 만나야 한다. 과거세대의 성장 방식과 미래세대의 성장방식이 현재세대의 성장방식 속에서 종합되어야 한다.
밑돌이 없이는 윗돌이 있을 수 없고 밑돌의 모든 부분들은 공동노력을 통해 서로 균형적인 조화를 이루어 윗돌이 바르고 튼튼하게 올라탈 수 있도록 일하여 수직과 수평의 전체적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그러한 만남을 요가라하며 그것은 자연의 질높은 존재를 위한 절대적 진리이다.
우리가 자신과 주변을 잘못알기(無明:Avidya)로 출발하여, 자신과 주변이 지속적으로 행복한 삶(Ananda)을 살수 없게 만든다면, 그것이 괴로움(불행 또는 번뇌: Dhukha 또는 Klesa)의 시작이다.




2. 지혜란 무엇인가 ?

지혜의 참뜻을 깨우쳐야 보다 질 높은 삶의 길을 찾을 수 있고 문제의 괴로움으로부터 자유(yukta:요가로 해탈)를 얻어 행복(ananda)해 질 수 있다.
과거의 지식만이 현재나 미래의 지혜라고 할 수는 없다.
비록 지식이 그것 그대로 지혜로 쓰일 때도 있고, 지식이 지혜를 내는 일에 크고 작게 도움이 될 때도 있으나, 지식에 집착한 것 때문에 우리가 사물의 현상적 변화에 대한 새로운 특수성과 보편성을 바르게 알지 못하게 될 수 있다. 그렇게 잘못 아는 것(avidya) 때문에 우리는 보다 질 높은 삶의 참 지혜를 내지 못하고 삶의 불행에 빠지게 된다.
지식이란 과거에 자신이 경험한 것이나 들어서 안 것 또는 다른 사람들이 과거 당시의 상황에 맞는 삶의 지혜를 냈던 사실을 기록이나 이야기를 통해 간접적으로 우리가 알게 된 것들을 뜻한다. 따라서 지식이란 과거의 상황을 토대로 한 것이므로 현재의 상황과는 다소의 차이를 갖고 있다.
다소의 차이란 사물의 공통적 보편성에서는 과거와 현재가 같다하더라도 그 사물의 차별적 특수성에서는 다를 수 있고 사물의 특수성에서는 같다하더라도 보편성에서는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만물은 변화를 진행하면서 새롭게 성장, 진화하거나 퇴화되기 때문에, 현재와 미래의 상황파악에는 지혜로운 눈이 요구된다. 더구나 사물을 보는 인식의 차이가 개인별로 생길 수 있기 때문에 과거의 지식만으로는 현재와 미래의 전개 상황을 바르게 예측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지식에만 의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대상에 대한 다각적 안목의 새로운 이해가 끝난 삼매(Samadhi)가 진리의 지혜를 내는 문이라고 요가는 가르친다. 그 다각적 안목의 이해가 명상이고 삼매이며 그것에서 지혜가 오므로 명상의 수단과 목적은 지혜내기이다.
과거 삶의 희비나 성패의 감정에 젖어 그러한 지식으로 삶을 반복하거나 두려워한다면 의식의 성장이 멈추어 과거 그때에 죽은 결과가 된다.
삶의 과거란 오직 하나의 경우에만 그 가치가 있을 뿐이다. 즉 과거의 경험이나 지식들은 앞으로 새롭게 나아갈 길을 깨치는 동기가 되어줄 때에만 가치가 있는 것이다.
과거란 배움을 위해서만 써야하는 것이다.
과거의 어떤 걸림돌도 새롭게 나아갈 디딤돌이 되게 수정해야 한다. 그래서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인 것이다.
자연은 늘 새로운 봄과 새로운 아침을 주면서 거듭날 기회를 끝없이 제공하고 있다. 그래서 미숙은 성숙으로 나아갈 문의 방향을 암시하고 지혜를 준다. 따라서 미숙을 비난하거나 자책하기 보다는 그것을 통해 성숙으로 나아갈 길(지혜)을 자신과 주변이 찾아낼 수 있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그때에만 미숙에서도 깨치는 기쁨을 맛볼 수 있어서 도리어 미숙을 긍정적으로 대접할 수 있게 되고 가능성을 유도하는 사랑을 실천할 수 있게 된다. 자신과 주변의 미숙을 보다 구체적으로 이해하여 음미하고 성숙으로의 변형을 부드럽게 이끌어 가야한다. 그것이 서로에게 큰 기쁨을 만드는 행복의 지혜이다.
우리의 본성 중에서 최고의 것이 행복(Ananda)인데 그것을 가능케 할 첫 번째 조건이 새롭게 거듭날 꿈의 실현(Visarga:창조적 성장력)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모든 종류의 행복감(Well feeling)을 도출시키는 공식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거의 자기 삶을 회상(YS 8지요가의 5단계 회시)해보고 남들의 그것과 옛날 성자들의 삶에 대한 기록들을 음미해 보면서 그때 상황에서 놓쳐버린 생각과 행동 또는 그때 집착된 생각과 행동을 다각적 안목으로 찾아내어, 이제 막 다가설 현재와 미래에 대처하기 즉 새롭게 거듭날 길을 찾아내기(智慧)를 하는 것이 마음열기 명상처방의 요체인 것이다.
요가는 지혜의 문(門)이다.
바가바드-기타 2-48은 [평등심(平等心 : Samatvam)을 요가라 한다]고 했다. 과거나 현재의 괴로움(Dhukha)에서 놓친 생각과 행동의 방향을 찾아내어 바꿈으로서 새롭게 나아갈 길(지혜)을 깨치는 기쁨(ananda : 영원한 순수 행복)을 맛보고, 과거나 현재의 일시적 즐거움(Sukha)에서도 놓친 생각과 행동을 찾아내어 새롭게 거듭날 길(질 높은 지혜)을 깨치는 기쁨을 맛보는 것을 평등심이라 한다.
즉 새롭게 이해(공부)의 기쁨을 맛보는 것을 뜻한다.
파탄잘리 요가경 1-2에 의하면 [요가란 (집착된 질 낮은 편견의) 마음에서 생긴 불안함을 자제(自制 : 질 낮은 마음을 동기로 삼아 질 높은 새로운 길을 스스로 선택하여 조절하는 것) 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지혜의 방법을 두 경전이 같은 내용을 다른 용어로 표현하고 있다. 모든 존재들의 형태(形)에는 그 만큼 크기의 공간(空)이 있고 숨을 통해 들어온 공기(風)가 있으며, 음식을 통해 들어온 영양의 에너지(火)가 있고, 물(水)과 재질(地)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형태의 과거 습관을 찾아내어 그 반대적 새로운 공간으로 움직이게 하는 운동처방은 최고로 가치 있는 지혜이다. 그리고 균형회복운동을 실천하는 것은 최고의 선행이고 기쁨이며 행복의 지혜를 완성한 것이다.




3. 마음 열기 명상은 무명(無明 : 잘못 알기)을 수정할 혜안(慧眼)열기이다.

1) 무명은 왜 생길까?

인간과 다른 동물들도 다음의 세대에게 사냥하는 방법을 어미가 시범을 보이면 새끼가 스스로 배우고 있다. 단지 동물들은 자연의 보다 깊은 존재의 원리를 인간보다 더 많이 탐구하여 새로운 삶의 방식을 개척하지 못한다. 그래서 하등하다.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생활 체험들을 기록으로 남기면서 다음 세대들에게 전달하지 못한다.
인간은 기록을 통해 많은 지식들을 전승시켜 다음 세대들에게 새로운 삶의 지혜를 내는데 참고하도록 하고 있다. 그래서 동물에게는 없는 이성기관(뇌의 전두엽)이 인간에게만 발달되어 있다.
요가는 질 높은 이성(Sattva Buddhi)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이른자를 붇다(Buddha : 중국 음택으로 부처)라 한다. 질 높은 이성을 갖지 못하면 잘못된 판단으로 오만해지고 과거의 습관적 행동과 관습에 얽매여 새로운 것에 대한 흥미가 없는 무딘 마음이 된다. 그것이 무명의 원인이다.

2) 질 높은 이성의 혜안열기.

이세상의 모든 것들은 성장진화하여 변화하고 있으나 그 새로운 것에 대한 흥미와 감탄의 기술이 부족한 것이 무명을 낳는다.
모든 것들 속에는 성스럽게 살아 숨쉬는 진실(Satyam)과 관대함과 새로운 창의력이 있다.
즉 모든 존재들은 각기 천부적인 형태의 오묘한 조화력과 그 기능적 재능을 갖추고 주변의 성장을 위해 일하고 있는 희생적 관대함과 사랑의 가치를 지니고 있으므로, 그것들의 진행과정을 주시하여 통찰(명상)할 때에만 그것들이 우리에게 영감을 주고 질 높은 이성의 길을 열어준다.
우리 스스로가 자신과 주변의 새로움을 느끼고 새롭게 나아갈 때에만 우리의 이성 능력도 번성해간다.
어떤 것이든 그 것이 보여준 모양(形)과 그 내용의 기운(氣能)을 존중하고 음미하여 받아들이고 그들의 질적 가치의 질서를 알아차리어 스스로를 새롭게 변형시키는 것이 질 높은 이성의 길이고 행복의 길이며 혜안의 길이다.
자신과 주변의 어떤 실패도 그것을 비난하기보다는 그것이 스스로 새롭게 나아가도록 손짓하고 기다리며 사랑하고 그 성장을 기뻐하는것이 질 높은 이성의 길이고 지혜의 길이다.
대상의 자발적 성장을 기다려야한다. 그 대상과 함께 자기가 참여하지 못하고 속단하여 칼같이 끊고 맺어 심판해 버리는 것은 대상이 스스로 새롭게 성장하거나 주변이 대상을 성장시키는 사랑의 기회를 버린 것이 된다. 이것은 이기적 집착이 개입한 것이기 때문에 질 높은 이성의 길이 아니다.

3) 괴로움이 생기는 세 가지 無明을 벗어나야 혜안이 열린다.

첫째는 타마스(Tamas)적 무명이다. 질 낮은 방식의 습관에 물들어 즉 과거 방식에 얽매여 새로운 변화의 질 높은 방식을 모르거나 두려워한 무지인데, 이 경우는 다각적 이해의 안목을 열고자 하는 희망이 없어서 공부하기를 꺼려하므로 둔감하고 무겁게 어두운 상태가 되어 괴로움이 점차 더 커지는 것이다. 지금 여기까지 읽으면서 공부하고자 노력하는 당신이 있으니 저에게 희망이 있군요. 그래서 공부하는 당신을 사랑하고 존중합니다.
둘째는 라자스(Rajas)적 무명이다.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는 변화의 운동성은 있으나 이기적 집착 때문에 자기 내면의 관계나 주변과의 관계에서 갈등이 빈발하여 이쪽으로 갈 때는 저쪽을 비난하고, 다시 이쪽을 비난하면서 저쪽을 좋다고 하는 등등 우왕좌왕(방일)하는 불안에 빠진 무지이다.
셋째는 사뜨바(Sattva)적 무명이다. 이 경우는 이기적인 라자스적 무지와는 다르게 이타적(利他的)인 선량함(Sattva)은 있으나, 타마스적 무지를 벗지 못하여 새롭게 거듭날 길을 향한 용기와 실천의 능력이 부족한 것이다.
가치의 높낮이를 구분하는 능력이 약하여 질 낮은 차원에 대한 의리와 희생에 빠진 멍청한 선량함이다. 이때에는 집착된 친족사랑, 개인적 이기주의는 아니지만 집단적 이기주의, 무사안일의 침체와 무성장주의, 의타적이고 종교적 관념에 안주하기, 새로운 세계에 대한 모험적 공부를 불안하게 생각하기 등등의 성향을 낳는다. 지멸, 무욕, 정지, 정적, 탈 세속, 청결, 무심, 공(空) 등등은 삶의 흐름을 끊어서 생각하고 결론적 분석에 의존한 것이므로 임기응변적이고 도피적인 처방이 되어 새로운 얽매임이 된다.
따라서 기존의 전통 명상법들이 지혜를 내기위한 준비수준이나 분위기 조성의 작은 시작에 머물러버리고 성장의 본론에 이르지 못했다. 오직 새롭게 더 잘 나아가는 길(질 높은 성장의 지혜와 선행)을 통해서만 과거의 미숙함이 자기 속에 내포되어 잠들게 된다.
과거는 지울 수 가 없는 것이므로 새롭게 나아가야 한다. 지멸, 무욕, 정지, 호흡, 정적, 탈세속, 청결, 무심, 공, 형이상학적 초월 등은 인스탄트 명상이고 임시요법이다, 절대로 참된 삶의 새로운 지혜가 올 수 없다. 요가경전인 바가바드?기타는 아리주나가 위에서 말한 세 가지의 무지에 젖어 있는 것을 스승인 크리슈나가 가르치어 아리주나가 깨쳐가는 과정을 기록한 것이다.



4) 편안함과 행복함(지혜의 기쁨과 선행의 기쁨)은 서로 다르다.

모든 마음의 작용을 없애는 지멸(止滅), 모든 욕구와 욕망을 벗어나는 이욕(離欲: Vairagya)의 무욕 또는 금욕, 모든 행동의 정지, 고요한 정적(靜寂), 탈세속적, 심신의 청정(淸淨), 무심(無心), 무아(無我), 결과론적이거나 원초적 접근으로의 현상 도피적 공(空), 형이상학적 초월, 대상을 바꾸기, 태허(太虛), 무(無), 형이상학적 이(理)나 도(道) 등등은 현실적 삶의 괴로움(지혜롭지 못함)을 일으키는 원인에 대한 직접적인 개선의 길이 아니고 임시 덮어버리는 도피심리이다.
그러니까 위에서 말한 접근법들이 현상의 욕구 불만에 대한 일시적 위안이 되어 마음의 편안함은 얻을 수도 있지만, 이 경우의 편안함은 일시적인 자기합리화이고 자기 최면일 수 있어서 문제의 근본적 해결은 아니다. 현상 속의 삶이란 그 진행과정이 요구하는 조건들을 지혜롭게 대처해야함이 먼저 요구된다. 태초의 시작이나 최후의 결과로 문제해결의 시각을 바꾸는 것은 참고할 수는 있으나 최초나 최후의 존재원리 자체가 상상에 의한 개념들이므로 불확실성을 면할 수가 없다.

인도의 최고 고전인 리그베다(Rig-Veda) 10-72-2에서 「무(無)에서 유(有)가 왔다」고 했으나 파탄잘리 요가경(YS) 4-11에 의하면「원인과 결과가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원인이 존재하지 않으면 결과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여 인중유과론(因中有果論)의 입장이 요가이므로 무에서 유가 왔다는 리그베다의 주장을 부정하는 입장이 본연의 요가정신이다.
바가바드˙기타 2-16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부터 존재가 생겨날 수 없고 존재하는 것으로부터 비존재가 생겨날 수 없다.」고 했다. 삶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새로운 조건들이 요구된다.
아침에 잠이 깨이면 기지개를 켜고, 수직으로 몸을 세워 이를 닦는 세면을 한 후 아침식사를 하고 소대 변도 본다. 신문이나 뉴스도 보고 출근을 하여 일과를 보낸 후 집에 돌아오며, 몸을 씻고 저녁식사를 한 후 수평으로 누워 수면을 취한다. 이렇게 반복되는 삶의 요소들 속에서 보다 새롭게 성장 진화하는 것이 인생이다.
잔잔해 보인 호수도 표면이 미세하게 움직이는 것이지 완전한 정지란 불가능하다. 물위에 바람이 지나가고 물속에서는 여러 가지 생명체들이 움직여 표면에까지 흔들림이 미세하게 조성된다.
감각이 작용되는 동안에는 무심(無心)이란 불가능하고 고요한 정적도 불가능하며 텅 비우고 청결이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삶은 끊어짐이 없는 흐름이므로 연속적인 작용이 있을 뿐이다. 단지 새롭게 솟나는 방향의 지혜를 깨치어 행복한 기쁨을 느끼는 것만이 질 높은 삶의 길이다.
마음을 비우면 지혜가 온다는 것도 논리적 비약이다. 행동과 사고의 균형을 이루면 편안함이 오지만 그것 자체가 큰 행복은 아니다. 왜냐하면 균형회복을 통해 얻어진 안정이나 편안함은 삶의 연속적 진행과정에서 느껴지는 한 순간의 결과적 표현일 뿐이다.

깊은 잠에 들면 자신을 망각하지만 그것 자체가 행복은 아니다. 깊은 잠에서 깨어났을 때 몸과 마음의 피로가 없고 개운함을 느껴 새로운 하루의 일과들을 잘 실천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 때문에 행복할 수 있는 것이고 그 삶의 진행과정에서 행복이 올 수 있을 뿐이다. 깨어있는 의식에 의해 한쪽에 치우친 습관적 또는 직업적 자세를 발견했다면 신체의 피로나 고통의 원인을 알게 되어 정신적 기쁨(행복)이 있고, 그 반대로의 전환적 행동을 통해 균형을 회복하려고 노력하면 시원함과 만족의 즐거움이 있는데 그것도 일시적 기쁨(행복)이다. 그리하여 자세의 특정방향과 그 반대방향에서 균형이 회복되면 고통도 없고 즐거움도 없는 무고락(無苦樂)을 느낄 수 있으나 편안함도 일시적 기쁨(행복)일 뿐이다. 그 상태에 좀 더 머물면 새로운 방향의 자세쏠림을 찾아내지 못하게 되어 불안이 느껴지므로 새로운 방향의 불균형을 찾아내어 균형회복의 노력으로 나아가야한다.
즉, 편안함에 머물고 있음은 새로운 방향의 접근능력을 둔화시켜 게으르고 무사안일에 머물고자 함으로써 진화가 아닌 퇴화의 길이 된다.
괴로움을 주는 자세의 한쪽 쏠림이 그 반대적 자세의 전환을 통해 즐거움이 왔다 하더라도 계속 그 자세에 머물러 새롭게 치우치면 즐거움을 주던 방식이 새로운 괴로움의 길이 되는 것과 같다.
따라서 즐거움이나 편안함은 참된 행복의 길이 아니다.
참된 행복의 길은 고통의 원인인 치우침을 발견하는 기쁨, 그 반대로의 균형회복의 지혜를 내는 기쁨과 그 지혜를 실천하는 선행의 기쁨 그리고 특정조건의 균형회복에 의한 편안함이 주는 기쁨, 그 편안함의 다음에 발견해야할 자세의 쏠림을 알아차리는 기쁨, 등등으로 연속되는 삶의 진행과정에서 알아차리는 앎의 지혜와 선행의 기쁨이 모두 행복의 대상이다.
따라서 편안함과 행복(Ananda)은 서로 다른 차원이다.

요가명상은 참된 행복의 길을 찾는 작업이다. 요가철학 속에도 여러 가지 형이상학적인 접근이 있으며 괴로움의 직접적인 원인을 덮어버리기 등이 개입하고 있으나 인도에서 여러 가지 신앙요소들과 조화를 이루어 오는 과정에 편입된 것들이라고 보아야하므로 제거되어야 할 것들이다.
왜냐하면 요가는 현실속의 사실적 진리를 지혜로 깨치고 그것을 실행하는 실천철학임이 그 본색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거짓과 진실이 만나려는 시도는 퇴화가 있을 뿐이고 허상과 진상의 만남은 참된 조화가 아니고 진화가 없다. 실존한 자연의 사실적 성질이 서로 다른 음양일 때 그것들은 서로 만나야 할 균형유지의 작용이므로 사실성이 아닌 것과 어떤 사실이 만나는 것이 점차 줄어지는 것이 진화의 길이다.
진실한 사실이 될 수 없는 추상적 개념들을 사실로 인정하고 다른 동유의 사실과 결합시키는 것은 오해와 무명을 낳아 무지에 빠진 괴로움을 산출한다. 존재한 것(有)이 점유한 공간에서 다른 공간으로 이동되어 그 존재가 처음의 공간에는 없는 것을 나타낸 무(無)와 존재의 유(有)는 자연의 진실한 사실이므로 이러한 유와 무는 서로 만날 수 있는 조화로운 현상이지만 추상적으로 만든 개념의 무(無)는 허구이기 때문에 사실적 존재의 유(有)와 만날 수 없다. 결국 이 세상이 곧 하늘이다. 하늘나라가 지금 여기에 이미 와 있다는 것을 알자. 이 세상 속에서는 천국과 극락의 가능태와 악마와 지옥의 가능태가 함께 있다. 자신이 어떻게 선택하느냐가 자신의 진화와 퇴화를 결정하므로 자제(自制:yoga)가 관건이다. 과거의 처음도 미래의 끝도 지금여기에 함축되어 있다.


5) 잘못된 판단의 선입견을 벗어나야 혜안이 열린다.

첫째는 과거 경험과 듣고 알게 된 지식을 통해 자신감, 거만함과 같은 선입견이 생기면 새로운 상황의 지각력이 약화되어 오판을 낳는다.

둘째는 심각하고 권위적이며 엄한 태도는 선입견 때문이며 새로운 것을 감지하고 그것에 맞게 생각을 일으키는 유연성이 없어서 오판하기 쉽다.

셋째는 문제 해결을 위해 자신을 바꾸려는 것보다 주변을 바꾸어 자기에게 맞게 하려는 태도의 선입견이다.
자기가 변하여 남에게 맞추는 것이 덕(德)이고 주변을 비난하고 규칙을 세워 자기에게 맞추려는 것이 오랜 통치자들의 법(法)이고 선입견이다.
덕치로 바꾸어 가는 것이 질 높은 이성이고 지혜의 길이다.

넷째는 먼저 계획하고 결정한 후에 그것에 맞추어 생각하는 것은 선입견의 오판을 낳기 쉽다. 상황의 구체적이고 연속적인 체험을 통해 일시적 상황과 장기적 상황에 꼭 맞게 즉시적인 수정을 하는 것이 지혜의 길이다.

다섯째는 성급함은 선입견 때문에 생긴다.
마음의 자제가 요가인데, 대상에 대한 과거 요소에 만족하고 집착하거나 비판하여 단죄하는 것은 성급하고 깊이가 없는 손쉬운 판단의 길이며 오판의 길이다.

여섯째는 비교방식의 가치구분은 부분에 치우치거나 외형에 치우친 선입견이 되어 불안정한 비교행복에 빠진다. 대상과 비교하여 쉽게 판단한 것도 자신과 대상의 새로운 가능성과 질적 가치를 보기 어려운 오판의 선입견이 되기 쉽다.

일곱째 질 낮은 선입견은 질 높은 이해가 없기 때문이므로 질 높은 갈망의 이해가 열릴 때에 질 낮은 선입견은 질 높은 것 속에 내포하여 조절된다. 마치 밀도가 높은 것이 밀고 들어가 밀도 낮은 것의 자리를 차지한 것과 같다. 그 이외의 방법으로는 절대로 질 낮은 선입견이나 편견을 벗어날 수 없다. 더구나 정신의 원리에서 볼 때는 과거의 질 낮은 체험을 지워버리고 없었던 것으로 할 수가 없다. 따라서 마음으로 잊고 싶어도 기억을 없앨 수가 없다.
마음의 정화도 과거에 있었거나 미래에 있을 느낌을 없애는 것이 아니고 질 높은 마음을 담는 것으로 보아야한다. 질 낮은 마음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질 높은 마음속에 내포되어 도리어 질 높은 마음을 더 튼튼하게 하는 결과를 만든다. 따라서 미숙한 고생 끝에 깨친 성숙한 정신이 더 지혜롭고 기쁘며 튼튼한 정신이 된다.


4. 현대의 명상방향

1) 크리슈나 무르티 (1895~1986. 인도)는 진리의 길이 종교조직이 아니고 자기혁명을 통한 세상의 변화에 있다고 했으며 다음과 같이 그의 명상록에서 말했다.

① 참된 명상이란 의도적 특정개념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고, 자신과 주변에서 현재 진행 중인 삶의 흐름을 다각적 시각의 이해로 자각(깨어있음)하므로써 어떤 걸림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지혜를 내는 것이다.
이렇게 하기를 언제 어디에서나 하루 종일 할 수 있을 때 온전한 평화(平和:Santi)를 스스로가 이룰 수 있다. 그래서 참된 명상은 자신과 주변에 대한 사랑이고 아름다움이며, 참된 예술이고 자기성장의 실현이며 집착적 욕망의 충족이 아닌 더 큰 행복이다.

② 참된 명상은 전통으로 전제된 어떤 관념에 물들이기가 아니다. 그리고 고고한 전통관념과의 통일을 위해 세속을 떠나 고요한 정지 또는 과거 지우기와 같은 정화를 연습하는것은 더구나 아니다.
참된 명상은 일상적인 세속적 삶, 서로다툼, 아픔과 덧없고 허망한 만족... 등등의 일상적 흐름에 참여하여 관찰하므로서 스스로가 질 높은 삶의 조화를 위해 그것들을 그대로 놓아 둘 것인지 아니면 취할 것인지 또는 수정할 것인지를 정하기(지혜내기)이다.
따라서 이 세상의 많은 것들과의 부정적 접근인 배타적 고립이 아니고 긍정적 차원의 성장을 위한 협력(yoga)이 명상의 기본정신이다.
즉 마음의 작용을 없애는 것이 아니고 바른 마음의 작용을 활성화시키는 것이다. 그러니까 과거의 편협한 체험에 의한 편견 때문에 생긴 마음의 충동, 오해로 인한 거부 또는 애착의 마음작용, 집착된 욕망에 의한 마음의 충동, 무지로 인한 우둔한 마음상태, 남의 얘기를 토대로 판단해버린 마음의 작용, 새로운 성장이 멈추어 버리고 큰 의리는 잃고 작은 의리에 얽매인 어리석은 선량심, 부정적이고 배타적인 불안의 마음작용 등등이 바른 마음의 작용에 장애물이므로 그것들을 수정하여 질 높은 성장의 긍정적 차원이 되도록 바른 마음의 지혜를 내야한다. 그렇게 심작용을 자제(自制 : 자발적 조절)하는 것이 명상이다.

③ 인도의 전통적인 명상개념들을 이제는 새롭게 발전시켜 해석해야한다. 삶의 폭 넓은 이해를 스스로 터득하라, 명상이란 삶의 일부이므로 세상의 여러 가지 방법들을 관철하고 이해를 열어 바른 행동을 위한 지혜를 내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것들이 그 만큼의 가치가 있으므로 그것들을 사랑하는 것이 명상이다. 즉, 그것들의 소중함과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순간순간의 진행과정에 자기가 직접 참여하여 모두를 위한 바른 행동이 무엇인지 찾아서 함께 경험하는 것이 명상이다.
빛과 어두움, 춥고더움, 바람과 물과 수많은 것들은 자연 그대로 일 뿐이다. 그것들이 자기를 선택하거나 거부하라는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내가 알아서 내 멋대로 사용해도 자연은 그것을 허락하며 관대하다.
이 세상의 광대하고 다양한 사랑을 느낄때에만 습관적 자만심이 사라지고 홀로임의 고독이 시작된다. 그때 자신의 능력을 성장시키려는 질 높은 갈망이 시작되며 새롭게 나아갈 공부(이해)가 시작된다.
그것이 명상의 시작이다. 그 뿐이 아니다.
명상이란 습관적인 것들의 멈춤이고 모르는 새로운 것들의 피어남이며 자유스러움이므로 어떠한 종류의 신화, 추상, 기도, 관념들로부터 벗어나 삶의 진실을 직접 경험하는 것이다.
명상의 목표는 이기적, 부정적, 비윤리적인 삶의 내용들을 관찰하여 자각하므로써 스스로 이전적, 긍정적, 윤리적 삶의 길을 여는 것이다.
마음의 고요함(平和적 安定)은 고행, 훈련, 자기억압의 통제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여러 가지 충동과 갈등을 일으킬 뿐이다. 마음의 고요함은 모든 것들의 진행과정에 대한 관찰과 순수이해의 자각을 통해서 온다.
고정관념이 새로운 느낌의 장애물이므로 사물의 진행과정을 다각적으로 관찰하여 늘 새로움을 느끼는 것이 명상의 시작이다.

2) 간디의 명상록에서

진리에 이르는 수단은 목적만큼 소중하므로, 바른 이해와 공손한 말씨 그리고 바른 행동(보다 질 높은 진리에는 협력하고 그렇지 못한 것에는 불복하기)이 요구되는데, 그것을 연습하는 것이 자기수련이고 자기 신뢰의 길이다. 삶은 기쁨이나 고통만도 아니고, 죽음은 슬픔이나 이별만도 아니다.
모든 것은 새로운 깨침의 기회이고 새로운 희망을 준다. 따라서 성패와 삶과 죽음도 언제나 축복으로 승화시킬 수 있다.
개체에게는 스스로 선택할 자유가 있으나 질 높은 것의 선택일 때가 짐승보다 낫고 그렇지 못할 때는 짐승만도 못하게 된다.
사람에게는 동물과는 달리 다각적 이해의 이성이 있기 때문에 질 높은 것으로 나아가는 것이 인간의 의무이고 그것이 인간의 존엄성이다. 금욕에 대한 노력보다는 질 높은 갈망을 가져라. 그때 질 낮은 것을 내포하여 다스리게 된다.’
‘기도란 이기적 욕망의 실현이 아닌 진리를 갈구하는 호소이어야 한다.’
‘자제(自制)적 조절은 자기 억압이 아니고 모든 관계를 끊는 것이 아니며, 스스로가 더 새로운 힘과 평화를 체험하려는 자발적이고 긍정적인 자기 수정이다.’

3) 간디가 감명 받아 기뻤다는 책이 월든(Worden)이라는 책인데 그 저자는 미국의 하바드 대학 출신의 소로우(Thoreau:1817~1862)이다. 그는 그 책에서 ‘과거로부터 시도해온 삶의 방식들을 관찰해 보고 새롭게 주체성을 창조하여 변화의 가능성을 만들어가자’고 했다.
‘자신의 문제를 기도를 통해 불확실성에다 맡기는 버릇을 바꾸어야 한다. 나는 논어 2-17 아는것은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하는 것이 참되게 아는 것이다 라는 가르침을 존중한다.’
‘아무리 오래된 사고와 행동방식이라도 고정관념을 버리고 현상적 사실로증명이 안된 것은 믿지말라’라고 했다. ‘자연에 대한 위대함을(새롭게) 느낄때 이기적 욕망도 부질 없는 인간의 고뇌도 사라졌다.’라고 했다.

4) 스와미 ‘마헤사난다’는 현존한 인물로 인도의 최초 요가대학인 카이발리아다마(1924년 개교)의 큰 스승이다.

그는 강의를 통해 다음과 같은 것을 가르치고 있다.
‘삶의 진리(being)에 맞는 느낌(feeling), 느낌에 맞는 행동(doing)을 연습하거나, 행동에 맞는 느낌과 느낌에 맞는 존재의 진리를 연습하는 것이 요가수련이다’라고 한다.
결국 well being의 수준은 well doing과 well feeling의 수준이 어떠하냐에 의해 결정된다. ‘명상이란 질 높은 삶의 지혜를 내기 위한 것이다.’ ‘자신과 주변의 어떤 조건에서도 새롭게 거듭날 지혜를 깨치는 기쁨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결국 자기만이 편안함을 만들 수도 잇고 깨뜨릴 수도 있을 뿐이다.
따라서 남에게 의존하거나 남을 탓하는 것은 남을 자신의 무지나 게으름 또는 자기 관념이나 습관에 맞도록 남을 바꾸려는 태도이다. 즉 이기적 발상의 자기 합리화이기 때문에 자신과 주변의 평화가 깨지는 것이다.’ ‘내가 행복할 때 남에게 그것을 주는 것이고 내가 짜증스러워 할 때 남에게도 불행을 주는 것이 된다.’ ‘자신이 자기를 어떻게 조절(自制)할 것인가가 관건이고 그것이 요가이다.’
‘어떤 집착된 생각과 행동이 괴로움으로 자각된다면 그 반대로의 전환은 시원하고 즐거움으로 자각된다.’
‘자신을 어떻게 조절할 것인가는 자기마음과 몸에서 느낌이 온다. 어떤 방식을 유지 할 것인지 아니면 놓아버릴 것인지의 갈등은 스트레스를 주어 다음으로 나아갈 길을 혼미하게 한다.
더 지속할 것인지 그 반대로 전환할 것인지를 몸이 알려준다. 따라서 몸을 느끼고 몸의 속삭임과 친숙해지는 연습을 해야한다.’
‘심신의 습관적 치우침이 누적 될수록 권태, 피로, 통증, 마비의 순서로 몸의 속삭임이오고, 치우침의 반대로 전환하면 시원하고 만족스러운 즐거움이 느껴지고 균형이 회복되면 고통이나 즐거움이 느껴지지 않는 편안함이 느껴진다. 이러한 속삭임을 토대로 자신을 조절하는 것이 요가이다.
‘질 낮은 마음의 충동을 동기로 삼아 질 높은 길을 깨침(평등심의 지혜)으로써 거듭날 행복감을 스스로 만드는 것이 자제의 요가이다.’라고 한다.

5) 헤르만 헤세(Herman Hesse: 1877~1962:독일)는 그의 선배인 R.M.릴케에게서 인정받았고 ‘데미안’(1919)이란 작품으로 노벨 문학상을 1946년에 받았다.
그는 인도에서 다년간 동양의 고전사상(요가. 기타)을 연구하여 인간이 현실적 고뇌들을 벗어나는 길을 새롭게 찾으려 했다.
당시의 종교들이 서로간에 자만적으로 대결하는 것에 실망하여 그는 이렇게 말했다.
‘어느 종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인간이 그 존귀함과 자유로움을 생활화 하는 것이 참된 신앙이다’고 했다.
결국 기존의 전통관념에 안주한 습관이 더 큰 고뇌를 주므로 새롭게 느끼고 성장할 지혜를 내어 인간이 자유의 길을 스스로 찾아야 한다를 주장한 셈이다.

6) 쇼펜하우어(Schopenhauer:1788~1860: 독일철학자)
괴테, 헤겔 등과 동시대의 사람이며, 인도의 고전 우파니샤드(요가의 초기이론)를 연구했다.
칸트의 주관적 인식론에서 출발했으나 이 세계에 대한 인간의 주관적 인식이란 사물의 인과법칙에 의한 것이므로 현상은 나타난 표상일 뿐이고 그 배후에 실체가 있다고 했다.
즉 삶은 끝없는 욕구 때문에 결국 고통에 빠지게 되어 슬픈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무 욕구에 의해서만 실체를 보는 해탈의 열반에 이른다는 것이다.
무 욕구의 해탈이 타의 고통에 대해 모질 수 없는 윤리의 근본이라고 했다.
그리고 우파니샤드(요가사상)가 미래 인류의 신앙이 될 것이라고 했다.
쇼펜하우어의 사상은 기존의 절대적 진리와 윤리의 신(神)을 부정하는 니체의 니힐리즘(허무주의)으로 발전되고, 기존의 관념으로부터 자유로운 삶의 현실참여를 주장하는 프랑스 샤르트르의 무신적 실존주의가 오게 된다.
그리고 인간중심이 토대가 된 개체의 주관에 대한 해석이 소중히 취급되는 현대 포스트 모더니즘에 이르게 된다.



5. 자세의 균형회복 요가운동 처방이 삶의 선행(행복)을 위한 최고의 지혜이다.

삶은 두 가지 기술의 균형적 화합(Dvandva)이어야 한다.
살아가는 기술의 하나는 주변과 잘 어울려야 할 사회적인 직업의 기술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 속의 여러 기관들끼리 잘 어울려야 할 개인적인 여가 선용의 기술이다.
요가 수련이 직업기술 연습은 아니지만 직업기술능력의 기본 조건(심신의 근본원리)을 튼튼하게 만들려는 것이다.
직업적 신기술은 삶의 성장에 필요한 창의적 지혜인데 요가의 마음열기 명상이 다각적 안목의 이해를 통해서 삶의 성장을 위한 지혜 내기이므로, 요가수련이 새로운 직업기술의 기본조건을 닦는 일이 된다. 그런데 주변을 위해 무엇인가를 만들어 내는 사회적 직업 활동은 신체의 작용을 특정방향에 치우치게 만든다.
즉 창조적 작용이 심신의 불균형을 만든다. 불균형은 개체의 삶에 가장 큰 고통을 만들고 직업병을 만들며 그 신체적 불균형 때문에 면역이 약화되고 한 개인에 있어서 삶의 질을 약화시켜 사회적 문제를 야기 시킨다. 따라서 우리는 삶의 습관적이고 직업적인 불균형을 찾아내고 그 반대로의 전환을 위한 여가 문화(여가 선용의 기술)를 창조해야 한다.
부분적이고 편견적인 마음을 찾아내어 확장시키는 요가명상처방과 습관적이고 직업적인 자세의 불균형을 찾아내어 그 반대적 운동을 연습시키는 균형회복 요가운동처방은 삶의 행복을 위한 최고의 지혜이고 최고의 선행이다.
창조적 직업기술의 불균형적 요소와 그 불균형을 균형으로 회복시키는 역행적 요소는 더 큰 틀에서 균형적 화합(平和)이 되어야 한다.
현대인들은 일과시간 이외의 시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를 연구해야한다.
일 테크 방식으로 쉬는 시간을 보내려하면 삶의 불균형이 더욱 심화되어 개인이나 사회는 병리현상에 깊이 빠질 것이다. 여가 테크는 일 테크의 반대적 마음열기와 몸짓열기이므로 소중히 개발되어야한다.
요가는 여가 테크를 충실히 수련시키면서 동시에 일 테크가 새로운 차원으로 나아갈 기본지혜를 수련시킨다.
균형회복 요가운동처방은 본 사이트 「바른행동」부분(동영상보기)에서 이해를 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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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9.01.23 10:05

    첫댓글 글의 성격상 이곳에 어울리는 관계로 상의 없이 옮겼습니다 ^^ 넓은 양해 있으실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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