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성(秋姓)과 추계(秋溪) 본관(本貫)에 대하여 추태호 성(姓)은 혈족관계를 위하여 발생된 것이라 한다. 성씨의 역사가 가장 오래된 민족은 중국(中國) 민족으로 하(夏), 은(殷), 주(周) 시대에서부터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추씨(秋氏)문중의 사적을 살펴보면 추씨는 성씨의 근원을 중국에서 찾고 있다. 중국의 역사를 보면 삼황(복희, 여와, 신농)오제(황제, 전욱, 제곡, 요, 순)에서 하, 은(상), 주(서주와 동주시대로 구분하고 동주는 다시 춘추시대와 전국시대로 구분한다)를 거쳐 진시황의 진나라, 한나라(전한과 신나라 그리고 후한), 삼국시대를 거쳐 동진과 서진, 16국시대, 남북조, 수, 당, 오대십국, 북송, 남송, 요, 금, 원, 명, 청, 중화민국, 중화인민공화국 등으로 이어져 왔다 일설에 의하면 추성(秋姓)은 중화의 시조로 기원전 2679년에 제왕이 된 헌원(軒轅) 황제(皇帝)의 직계후손이라 하였다. 황제로부터 황제의 둘째아들 후손인 전욱, 황제의 장남 후손인 제곡, 그 뒤를 이은 소호 의 후손으로 동주(東周-기원전 770년~ 476년) 시대에 백(伯)이라는 분이 계셨다. 이분의 관직은 사구(司寇)이셨는데 현세의 법무부장관쯤에 해당한 대부(大夫)급의 벼슬이었다. 이는 형벌을 관리하는 형부(刑部)라 할 수 있는데 추관(秋官)이라고도 하였다. 조선시대 예조판서를 춘관(春官)이라 한 것과 같이 형조판서에 해당하여 사법과 형옥을 관리하였다. 공자께서도 사구벼슬을 한 적이 있음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역사의 기록이다. 성씨의 기원을 살펴보면 벼슬이름 즉 관직명이 성씨로 된 경우가 많은데 추씨 성도 이 추관(秋官)에 의해 그 후손들이 추씨로 성을 쓰게 되었다 하였다. 중국에서 가장 많은 이씨(李氏) 성의 경우 그 직접적인 기원을 상조(商朝-은나라)의 관명(官名)인 대리(大理)에서 비롯된 이관(理官)이라 하였다. 고자(古字) 이(理)는 이(李)와 상통(相通)하는 글자로 관직명이 성씨로 된 경우로 설명이 되어 지는데 이를 볼 때 추관(秋官)이 추성(秋姓)으로 되었다는 주장에는 상당한 설득력이 있다고 보겠다. 중국 역사에 나타나는 추씨의 기록을 보면 역시 춘추시대에 노나라 대부로 추호(秋胡)라는 분이 있으며 이분에 대한 소개는 추호자(秋胡子)로 많이 소개되는데 이름 뒤에 선생의 칭호인 자(子)를 붙였다. 공자나 맹자라 할 때의 자(子)이다. 우리나라에도 연산조에 추호자의 시(詩)를 승정원에 뜻을 풀이하란 전교가 있음이 조선왕조실록에 그 기록이 있다. 한(漢)나라 시대인 기원 20~ 220년 사이에 동한(東漢)에 추군(秋君)이라는 분이 회계수(會稽守)라는 벼슬을 한 바가 있으며, 중국의 기록에는 이 분이 추씨의 시조로 보고 있다. 그 이유로 이분이 감숙천수(甘肅天水-중국 감숙성의 천수군-今甘肅通渭西北)에 거주를 정하였다 하였고 중국의 추씨 본관의 연원을 천수(天水)로 소개하고 있는 문헌들이 많이 있다. 그 전거(典據)로는 명나라 이일화(李日華)의 성씨보찬, 청나라 웅준운(熊峻運)의 증보고금성씨족보전역 등이 있다. 조선시대 1591년 초간 권문해의 대동운부군옥이나 조선씨족통보에도 추씨는 본래 중국의 천수 사람이라고 하였고, 휘어운(彙語韻)에서는 중국의 농서(隴西- 롱서는 현 감숙성의 서남부에 실존한 지명- 今甘肅臨洮南)인 이라 하였다. 천수와 농서는 감숙성 내에 인근하여 한수(漢水)를 끼고 있는 군(郡)의 명칭이다. 남북조시대의 송나라 무제(劉義隆-기원 424년~ 453년) 시 추당(秋當)이란 분이 있었다. 이 분의 관직은 서사인(書舍人)인데 조명(詔命)을 작성하고 전달하는 오늘날 장관급의 벼슬이다. 이분을 중국에서는 추씨의 중시조쯤으로 보고 있다. 추씨구백년사(秋氏九百年史)에서는 송(宋)나라와 추당(秋當)이라는 분을 오대십국에 이어지는 960~ 1277년 사이의 송나라(북송 960~ 1126 과 남송 1127~ 1277)로 보고 또한 이름을 추부(秋富)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 분야에 대한 추후 식견 있는 후손들의 연구가 필요하다. 이후 추씨들은 송나라가 1126년 정강(靖康)의 변(變)으로 강남(江南)으로 옮겨 임안(臨安-杭州)에 천도할 당시 감숙천수로부터 다른 지방으로 가솔을 이끌고 이거를 하였는데 도중의 금나라(여진족) 군대에 쫓겨 사방으로 흩어지게 되었다. 이때 동쪽 고려국으로 유입된 추씨를 한국의 추씨로 보고 있는 설과 당시 남송으로 가 송 고종 소흥 11년 1141년 신유에 문과 급제하여 적부라 벼슬을 한 후 고려 인종조(재위1123~ 1146)에 동래하여 고려 함흥 연화도로 이거 하였다(추계추씨 기사보)는 양설이 있다. 추씨들의 선조의 원류를 중국에서 찾을 때 우리나라의 가을 추(秋)자를 쓰는 추성(秋姓)은 본관(本貫)을 달리 쓴다 하여도 모두 같은 일족(一族)이라 할 수 있다. 시조 추엽(秋饁)의 후손이며 추씨 3세인 중시조 노당 추적(秋適)의 추계(秋溪) 본관 또는 세심당 추수경(秋水鏡)장군의 전주(全州)본관으로 크게 분류하여 본관으로 후손들이 정하였고, 세심당의 다섯 아들 노(蘆), 적(荻), (菊), 지(芝), 란(蘭)의 은거소인 나주(羅州)를 본관으로 하기도 하였으나 기타지역은 거개 집성촌을 본관으로 분류한 것이다. 한편 1960년 경자년에 대구지역에서 발간한 족보에서는 추씨의 시조를 신라 박혁거세왕 53년 건평2년인 기원전 5년 신라 개국공신으로 대사도인 추자평(秋子平)으로 세계(世系)를 정하였다. 이는 1904년에 편찬된 신라박씨선원대보(新羅朴氏璿源大譜)에 근거한 것인데 박씨족보상의 개국공신 기록이나 군부인(郡夫人)으로 추씨의 기록이 보인다 하여 박씨족보상의 2000년전의 기록을 근거로 혈통을 연결지어 시조로 설정한다는 것은 실로 무리 있다 할 것이다. 그러나 이 경자보에서도 1세조를 중국에서 동래한 추엽(秋饁)으로 세계를 정한 것을 볼 때 추씨 선조가 중국으로부터 왔다는 인식에는 일반적으로 추씨들의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다 하겠다. 추계(秋溪)가 추씨의 본관으로 사용하게 된 최초의 금석문(金石文)은 1864년 고종원년 갑자년 대구 인흥서원(仁興書院)의 노당(露堂)추적(秋適)선생 신도비(神道碑)에 나타나는데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 근거한다 하였다. 증보문헌비고에서는 추씨의 시조를 노당 추적으로 보았고 추적선생의 본관을 추계로 기록하였다. 이후 조선 고종 2년 1865년 전국의 추씨들의 대표들이 인흥서원에 모여 수십여 추씨 본관을 추계(秋溪)단본으로 이른 바 합관(合貫)을 추진하여 예조(禮曺)의 승인을 1865년 을축년 3월 18일에 받았다. 그 판결내용을 보면 이름이 나고 어진 모든 명현들의 후손들이 멀어지고 흩어져서 뭉치지 못하다 보면 본관 역시 흩어지게 됨이 크나 큰 잘못이거니와, 문헌비고에서 노당선생의 추계본관이 나왔음이 비석 고증으로도 분명하고 정확하게 뒷받침된다 하겠다. 한 조상의 자손으로 한 족보를 갖는다는 논리 또한 사리에 합당하니, 황단 참반의 은혜로운 명령을 받들어 한 일가의 참석자답게 본관을 각각으로 쓰지 말고 한결같이 추계로써 통일본관 쓰게 하라고 제사(판결문)하였다. 문헌비고의 씨족고를 보면 추계(양지구호)추씨 시조 추적은 고려 충렬왕때 좌복야를 지냈다(秋溪秋氏始祖秋適高麗忠烈王時左僕射)라고 기록하였고, 예조판서 해장 신석우가 찬한 문헌공 노당 추적선생 신도비문 중의 본관 관련 기록에는 그 본관을 밀성, 경산, 영순(지금의 문경, 상주지역), 추계 등으로 써왔던 것은 대개 자손들이 사방에 흩어져 살게 됨으로 인해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동국문헌씨족고를 살펴보면 공의 본관을 추계로 하였은즉 대개 공의 후손들도 추계로 본관을 써 온지가 오래 되었다고 보겠다(貫籍則曰密城曰慶山曰永順曰秋溪盖因子孫之散居焉按東國文獻氏族考公之貫謂之秋溪則凡爲公之後者以秋溪爲籍舊矣)라고 찬하였다. 그러나 당시에도 본관을 추계(秋溪)로 전국적으로 일치시키지는 못하였으며 일제시대 호적제도를 시행할 때 본관을 거소지 별로 기록하면서 다시 여러 본관으로의 결과가 초래되었다고 보는 것이 정설인 듯 하다. 때문으로 해방 이후 1984년 10월 1일 경제기획원 통계에도 추씨가 18본관으로 되어 있었다. 1865년 합관 이전 증보문헌비고 제53권의 씨족편에 나타나는 추씨를 보면 개성(開城)추씨, 강(江華)추씨, 파평(坡平,파주)추씨, 금천(衿川,시흥)추씨, 충원(忠原,충주)추씨, 서원(西原,청주)추씨, 단양(丹陽)추씨, 태안(泰安)추씨, 홍산(鴻山)추씨, 직산(稷山)추씨, 해미(海美)추씨, 예안(禮安)추씨, 영춘(永春)추씨, 아산(牙山)추씨, 전주(全州)추씨, 나주(羅州)추씨, 능주(綾州)추씨, 순천(順天)추씨, 고부(古阜)추씨, 낙안(樂安)추씨, 임피(臨陂)추씨, 강진(康津)추씨, 흥양(興陽)추씨, 해남(海南)추씨, 경주(慶州)추씨, 안동(安東)추씨, 주(尙州)추씨, 진주(晉州)추씨, 구(大邱)추씨, 김해(金海)추씨, 밀양(密陽)추씨, 하동(河東)추씨, 개령(開寧)추씨, 령(高靈)추씨, 하산(夏山,창녕)추씨, 원주(原州)추씨, 평창(平昌)추씨, 평강(平康)추씨, 횡성(橫城)추씨, 해주(海州)추씨, 풍천(豊川)추씨, 수안(遂安)추씨, 길주(吉州)추씨, 등주(登州,안변)추씨, 철산(鐵山)추씨, 순천(順川)추씨가 있고, 1984. 10. 1 경제기획원 통계 추씨 18 본관으로는 추계(秋溪), 전주(全州), 수안(遂安), 안동(安東), 영천(永川), 평강(平康), 교하(交河), 양지(陽智), 경주(慶州), 함흥(咸興), 횡성(橫城), 초계(草溪), 나주(羅州), 개성(開城), 해남(海南), 성주(星州), 완산(完山), 김해(金海) 등이 있다. 근세에 와서 추씨들은 추계(秋溪)본관을 시조가 정착한 곳인 함흥(咸興)으로 합관(合貫)해야 바르다면서 주장하기도하여 경상남도 일부 지역에서는 법원의 판결로 함흥으로 바꾼 사례도 있으며, 완산부원군 추수경장군의 은거소이며 묘소가 있는 완주(完州) 즉 전주(全州) 본관이 바른 본관이라고 주장하는 종친들을 비롯하여 추계(秋溪)가 아닌 다른 본관으로 다시 결정하여 합관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강력히 주장하기도 한다. 추계(秋溪)라는 지역의 역사성과 문헌비고의 저자 이만운(李萬運 1723∼1797)에 대한 비난으로 향(鄕). 소(所). 부곡(部曲)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추계라는 지역이 옛 천민(賤民) 거주 집단지역인 향, 소, 부곡에 해당된다 하여, 노당선생과 같은 명현(名賢)의 본관으로는 부적하며 이만운이라는 사람의 역사 인식 오류라는 시각으로 추계(秋溪)본관에 대한 부정적인 여러 견해들을 피력하는 등 추문(秋門)내에서도 상당히 논란이 많은 부분이다. 그러나 이만운 이전 1591년에 편찬된 초간 권문해의 대동운부군옥에도 노당선생의 본관이 추계라는 사실의 기록이 있으며, 이만운이 증보문헌비고를 완료한 시점인 1790년 이전인 건융27년(1762년), 건륭36년(1771년)의 상주목사의 직인이 날인된 호적문서에 추씨의 본관을 양지(陽智)라고 표시되어 있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이 문서는 이만운이 문헌비고 보수를 완료한 시점보다 38년이나 앞서는 것으로서 대동운부군옥이나 상주지방의 양지본관 사용 등을 미루어 볼 때 그의 잘못으로 탓할 수는 없는 듯 하다. 정조의 문집인 홍재전서(弘齋全書) 군서표기(群書標記)의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조에, "마침 음관 이만운이 동국전고(東國全故)에 익숙하다는 것을 듣고 이 사람에게 문헌비고 보수의 일을 맡겼다." 라고 하였다 하였고, 정조임금이 이만운이 증보문헌비고를 완료하였다는 보고를 받고, 당시의 좌의정 김종수(金鍾秀), 우의정 채재공(蔡濟恭)에게 교열을 명하자 당시 두 대신은 말하기를 , "이만운의 박학다식(博學多識)한 것은 당세에 비할 사람이 없는데, 그가 편찬한 것을 신(臣)등이 어찌 감히 논의하겠습니까?" 하고 사양한 것을 보면, 이만운은 당시에 비할 만한 사람이 없는 큰 학자였던 것이 명백하나, 아직 그 전기를 발견하지 못하였다. 추계(秋溪)는 경기도 양지(陽智)의 고호(古號) 즉 옛날 이름이다. 현재의 행정구역은 경기도 용인시 양지면 추계리이며, "양지읍지(1899)"에 의하면 양지군은 고려 때 등원군수를 지낸 사람이 터를 잡고 등촌(藤村)이라 하였다 하는데, 1914년에 용인군과 통폐합시 주동면(朱東面)의 산매(山梅), 공세(貢稅), 평촌(坪村), 도창(都倉), 식송(植松), 금곡(金谷), 추계(秋溪)의 7개 동리, 주북면(朱北面)의 정수(定水),대대(大垈), 계장(桂庄), 임원(林院), 박성(朴成), 갈현(葛峴)의 6개 동리, 주서면(朱西面)의 반정(盤亭), 정문(旌門), 송동(松洞)의 일부, 읍내면(邑內面)의 교동(校洞), 암곡(岩谷), 서촌(西村), 등촌(藤村), 월곡(月谷), 남촌(南村), 용곡(龍谷)의 7개 동리 등 4개 면을 합하여 내사면(內四面)이라 하였다. 1996년 용인시로 승격되면서 내사면은 다시 양지면으로 개칭되었다. 현재 용인시에는 양지리(陽智里), 남곡리(南谷里), 평창리(坪倉里), 제일리(霽日里), 추계리(秋溪里), 식금리(植金里), 대대리(大垈里), 주북리(朱北里), 송문리(松門里), 정수리(定水里) 등 10개리가 있다. 추계 지명의 유래를 추정하건대 추계가 양지의 옛 이름이라 하였고 양지읍지에 양지의 이름이 고려 때 처음 등촌(藤村)이라 하였다면 고려 중후기(中後期) 노당 추적선생이 향, 소, 부곡에 해당하는 이 고을을 다스리는 관리(官吏)로 부임하셨거나 추적선생이 고려 조정(朝廷)으로 부터 받은 사패지지(賜牌之地)에 기인되어 추씨 성을 가진 관리가 다스렸던 치소(治所)로서 고을이름이 추계(秋溪)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하겠다. 우리나라에서 중국으로부터 온 성씨를 제외하고 본관을 이야기 할 때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를 참고하지 아니할 수 없다고 일반적으로 이야기 한다. 세종실록지리지상의 토성(土姓)의 문제인데 우리나라 각 지역별 토성으로 분류된 성씨가 바로 본관이라는 것이다. 토성이란 그 지역에서 행세(行勢)하는 성씨를 의미한다고 볼 때 추씨의 경우 황해도 금천, 경기도 시흥, 강원도 횡성, 평창 등지를 추씨의 토성지역으로 분류하고 있는데, 이 지역명이 추씨의 본관으로 분류한다는 보학자들의 시각도 있다. 그러나 이들 지역은 고려말엽 운심재(雲心齋) 추유(秋濡)께서 중국으로 들어 가셔서 200여년 후 그 후손인 추수경장군이 임진왜란(壬辰倭亂)시 조선으로 다시 돌아 올 때까지 우리나라에 남았던 잔류 추씨들의 세거지로 보는 것이 추씨 문중 내에서 지배적 시각이다. 이제까지의 추성(秋姓)과 추계(秋溪)본관의 내력을 종합해 볼 때, 추씨는 추관(秋官-刑曹)이라는 관직명칭에서 득성 유래 되었다는 주장에 설득력이 있고, 추씨(秋氏) 본관의 원류는 중국 감숙성(甘肅省) 천수(天水)나 농서(隴西)로 인식되고 있으며, 우리나라에서의 추씨 본관은 추씨들의 중시조인 노당 추적(秋適)선생이나 추씨들의 치소지(治所地)가 지명화(地名化)가 된 고려조 추계향(秋溪鄕)의 추계(秋溪)로, 조선조 1591년의 대동운부군옥이나 1762년의 호적문서, 1790년 증보문헌비고, 1864년 노당추적선생의 신도비명, 1865년 합관문 등에 의해서 정착되었고 오늘날 2000년 인구 통계에 의하면 80%정도가 추계로 관(貫)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첫댓글 추태호 종친님의 연구와 열정에 대하여 깊이 존경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