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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1월 30일 열린 해태 타이거즈 구단 창단식. 주장 김봉연이 단기를 들고 있다. 당시 해태 선수단은 선수 자격에 논란이 있는 이상윤, 방수원을 제외하면 14명에 불과했다. 누구도 이 팀이 미래에 한국 프로야구 최고의 명문 구단이 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출처: KB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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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 원년인 1982년 해태 선수단 단체 사진. 왼쪽 아래에 초대 감독인 고 김동엽이 보인다. 해태는 영국 근위병의 복장을 본떠 만든 붉은색 상의-검정 하의 유니폼을 착용했다. 이 ‘검빨’ 유니폼은 상대팀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1982년에는 아니었다. <출처: KB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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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태 김응룡 감독(오른쪽)과 MBC 김동엽 감독이 1987년 올스타전 행사에서 마주보고 있다. 김동엽 감독은 원년인 1982년 해태 창단 감독을 맡았지만 한 달 만에 총감독으로 일선에서 물러나야 했다. <출처: KB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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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프로야구 사상 첫 노히트노런을 기록한 방수원의 투구 모습. 광주 지역에서 리틀야구단 감독을 맡고 있는 방수원은 “등판 당일 끝까지 던지게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며 “기록을 의식하지 않고 당장 상대하는 타자를 잡는 데만 집중한 것이 대기록으로 이어진 것 같다”고 회고했다. <출처: KB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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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야구 초창기 해태 타이거즈의 마스코트. 팀의 상징인 ‘호랑이’는 삼성의 ‘사자’, 롯데의 ‘거인’과 함께 30년 동안 변하지 않고 유지되고 있다. <출처: KB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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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한국시리즈 5차전에서 우승을 확정짓는 순간, 해태 선동열이 펄쩍 뛰어오르며 환호하고 있다. 이 우승을 시작으로 해태는 4년 연속 한국시리즈 우승이라는 전무후무한 대기록을 달성하며 ‘왕조’를 수립했다. <출처: KBO> |
동열이도 없고, 종범이도 없고
1989년 한국시리즈 우승 뒤 광주에서 열린 환영 행사에 참석한 해태 선수단. 그 당시 해태의 한국시리즈 우승은 목이 마르면 물을 마시는 것처럼 당연한 일이었다. <출처: KB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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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7월 26일, KIA 선수단은 오랜만에 해태 시절의 ‘검빨’ 유니폼을 입고 삼성전에 나섰다. 결과는 KIA의 2-5 패배. 2000년대 이후로는 삼성과 KIA의 위치가 뒤바뀐 듯했다. 하지만 KIA 선수단은 '검빨' 유니폼을 입고 상대를 두려움에 떨게 하던 해태 시절의 영광을 되살리기 위해 애쓰고 있다. 구단도 최근에는 인프라 투자에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팀의 미래를 준비하고 있다. KIA의 미래는 지금보다 훨씬 밝다. <출처: KIA 타이거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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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11.09.22
첫댓글 야구의 룰은 정말 짜릿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