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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추노>에서 한성 좌포청의 오포교(이한위 역)는 관아에 접수된 추노(推奴) 건수를 저자거리의 추노꾼에게 의뢰하여 도망노비들을 잡아들인다. 노비 소유주가 내건 포상금을 관졸과 추노꾼이 일정 비율로 나눠가지며 공생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의 노비들은 사람이 아니라 ‘재산’이었기에 잃어버린 노비를 찾아주는 이에게는 소정의 댓가를 지불했다. 노비는 토지와 달리 ‘살아 움직이는 재산’이기에 출생, 사망, 도망 등 변수가 많았는데, 특히 도망가서 종적을 감추면 주인은 골머리를 앓을 수밖에 없었다. 그랬기에 늘 노비 단속에 신경을 썼고, 도망간 노비를 찾아준 데 대한 포상금을 지불했던 것이다.
도망간 노비를 찾는 일은 전적으로 노비를 소유한 ‘주인’의 몫이었다. 국가 소유의 ‘공노비’가 도망가면 관청에서 대대적인 수색 작업에 나섰고, 개인 소유의 ‘사노비’가 도망가면 해당 소유주가 알아서 찾을 수밖에 없었다.
■ 도망간 공노비 찾기 : 전담기구 ‘추쇄도감(推刷都監)’
1400년대 후반 성종대에는 공노비가 35만여 명이었으나, 1600년대 중반 효종대에 이르면 공노비 19만여 명 중 2만7천여 명만 몸값을 바치는 실정에 이르렀다. 이에 효종은 전국에 흩어져있는 공노비들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한편 도망간 노비들을 찾을 수 있는 전담기구로 ‘추쇄도감(推刷都監)’을 설치하였다. 추쇄(推刷)는 노비의 출산․사망․도망․소유권 등에 대한 일제 조사를 뜻하며, 추쇄도감은 이같은 일을 담당하는 임시위원회였다. 추쇄(推刷)는 노비의 생산․사망․신분․소유권에 대한 일제 조사를 말하며, 추쇄도감은 이를 위한 임시위원회였다.
『효종실록』 효종6년 정월 27일 기사
효종 14권, 6년(1655 을미 / 청 순치(順治) 12년) 1월 27일(임자) 1번째기사
대신·비국의 신하들과 강화에 진을 설치하는 일과 노비 추쇄에 관해 의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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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이 대신과 비국(備局)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이시백(李時白)이 아뢰기를,
“강화(江華)에 진을 설치하는 일은 뭇 의논이 여러 가지입니다마는, 신의 생각으로는 근방 각 고을에 대하여 연변(沿邊)에 신지(信地)를 나누어 정하여 변란에 임하여 들어가 지킬 곳을 미리 알게 하고 집과 자량(資糧)을 각각 조치하며, 해마다 바꾸어 개비(改備)하는 것도 스스로 하게 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일이 번거롭지 않고 편리합니다. 백성을 모아 들어가 살게 하는 것도 참으로 쉽지 않으나, 속오(束伍)를 면한다면 반드시 즐거이 따를 자가 있을 것이니, 여느 때에는 신지를 지키고 세상이 어지러우면 곧 주인이 되게 하는 것이 어찌 좋지 않겠습니까.”
하니, 상이 언짢아서 이르기를,
“주인이라 하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뭇 의논이 무엇 때문에 불편하게 여기는가?”
하였다. 우의정 심지원(沈之源)이 아뢰기를,
“바깥의 의논들은 다 불편하게 여깁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각 고을에 신지를 미리 정하게 하면 다들 국가가 강도로 들어갈 것이라고 생각하여 소문을 번거롭게 할 뿐이고 도리어 소요를 더하게 할 것이다. 자급(資給)하는 것이 없이 사람을 모으게 한다면 어찌 쉽게 얻을 수 있겠는가. 이는 심히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진보(鎭堡)에서 베를 거두는 것은 국법이 아닐지라도 그 관례가 이미 오래 되었거니와, 육군의 체번(遞番)은 여러 진 아래에 사는 사람에 비하면 이익과 손해, 생소하고 익숙한 것이 절로 매우 다르니, 육군에게서 베를 거두어 진졸(鎭卒)에게 주면 또한 괜찮지 않겠는가. 이렇게 하면 이로운 것이 네 가지가 있다. 백성을 모아 진 아래에 늘 머무르게 하면 익숙한 군졸을 만들 수 있으니, 이것이 첫째 이로운 것이다. 빈 섬에 백성을 옮겨서 채우니, 이것이 둘째 이로운 것이다. 육지의 군사가 거두는 베만 내고 왕래하는 괴로움이 없으니, 이것이 세째 이로운 것이다. 춥고 굶주리는 백성이 그 주는 베에 힘입어 처자를 거느리고 즐거이 가니, 이것이 네째 이로운 것이다.”
하였다. 심지원이 아뢰기를,
“신도 이를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마는, 강도의 백성이 새 진에 옮겨 들어 가니, 이 때문에 불가하게 여깁니다. 또 모아 들여보내는 사람에게 거둔 베를 주더라도 두어 필의 베에 지나지 않으니, 누가 처자를 거느리고 가려 하겠습니까. 끝내 해본다면 김익희의 말처럼 사노를 들어가 살게 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베를 거두지 않고 사노를 옮겨 들여보내는 것은 또한 쉽겠는가.”
하였다. 병조 판서 원두표(元斗杓)가 아뢰기를,
“거둔 베를 두루 주는 것은 형세가 쉽지 않은 것이니, 둔전을 갈라 주어 의지하여 살게 하는 것이 또한 괜찮겠습니다. 지난번 성상의 뜻을 듣건대, 내노비(內奴婢)·각사노비(各司奴婢)를 헤아리지 않고 옮겨 들여보내려고까지 하셨으니, 매우 성대한 뜻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제 장례원(掌隷院)이 경기의 노비를 살펴 아뢴 것을 보니, 어린 것까지 모두 3백 구(口)뿐이었다. 시노비(寺奴婢)는 어찌 낳은 것이 없는가?”
하고, 또 하교하기를,
“경기 화량(花梁)을 옮겨 들여보내어 한 진을 만들고, 또 해서의 변보(邊堡)를 옮겨서 한 진을 만들고, 본부의 속오(束伍)로 한 진을 만들고, 시노(寺奴)로 한 진을 만들어, 모두 네 진을 만든다. 들어가기를 바라는 자는 들여보내고 바라지 않는 자는 베를 거두어서 모집하여 들여보내는 군졸에게 주면, 폐단이 없이 일이 쉽게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호조 판서 이시방이 아뢰기를,
“각사노비안(各司奴婢案)에 등록된 자는 19만인데 신공(身貢)을 거두는 수는 2만 7천뿐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접때 영돈녕 김육(金堉)이 한가히 노는 사람들에게서 베를 거두려 하였다. 이 일은 참으로 어려운데도 또한 하려 하였다. 19만의 노비에게서는 어찌 그 신공을 죄다 거두어 군수(軍需)를 보충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조정이 으레 행해야 할 일을 행하지 못하여 나라의 형세가 날로 줄어드니, 어찌 한심하지 않겠는가. 따로 도감(都監)을 세워서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원두표가 아뢰기를,
“추쇄관(推刷官)을 정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추쇄관을 차정(差定)한 뒤에 꼴찌에 해당한 자는 사율(死律)로 논하라. 명나라 태조(太祖)는 뭇 신하 중에서 죄를 범한 자는 조금도 용서하지 않았다. 국가가 어찌 한낱 추쇄관을 죽이지 못하겠는가.”
하고, 또 이르기를,
“이제 어느 관원으로 추쇄를 맡게 할 것인가?”
하였다. 원두표가 아뢰기를,
“음관(蔭官) 또는 문관(文官)으로 하되 삼조(三曹)의 낭관(郞官)인 자로 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하고, 심지원이 아뢰기를,
“장례원·형조가 맡되 이조를 시켜 극진히 가리게 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하고, 대사헌 김익희(金益熙)가 아뢰기를,
“신의 생각으로는 형조·장례원은 맡을 수 없겠습니다. 따로 도감을 설치하고 어사(御史)를 보내야 하겠습니다. 빨리 결단해야 하고 머뭇거려서는 안 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사람들이 경의 이 말을 비웃고 욕하겠으나, 이제 경의 말을 들으니, 내 마음이 후련하다. 추쇄는 모두 대사헌의 말대로 시행하되 대신 한 사람이 통괄하여 살피는 것이 옳겠으니, 우상이 맡게 하고 어사는 명관(名官)을 차출하여 보내라. 국가에 이익이 있다면 내가 모발이나 피부같은 것을 아끼지 않겠다. 분의(分義)가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대사헌의 말은 자기를 이롭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명예를 바라는 것도 아니며 국가를 위한 것이다.”
하고, 이어서 이조 참판 홍명하(洪命夏)에게 이르기를,
“추쇄관은 명관을 차출하되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조가 중벌을 받을 것이다. 사노비는 달아났거나 죽었거나 잡탈이거나를 막론하고 해원(該院)을 시켜 사실대로 초록(抄錄)하여 들이도록 하라. 또, 연미(燕尾)와 갑곶에는 첨사(僉使)를 두고 그 나머지 두 곳에는 만호(萬戶)를 두도록 하라.”
하고, 또 이시방에게 이르기를,
“국가에 일이 있으면 경이 수어사(守禦使)로서 남한(南漢)에 들어가야 할 것이니, 무장(武將) 한 사람을 경이 자벽(自辟)하여 중군(中軍)으로 삼아야 한다.”
하였다. 심지원이 아뢰기를,
“들어가 지킬 군사도 미리 정해야 하겠습니다. 영동(嶺東)의 군사는 남한에서 매우 멀리 떨어져 있으니, 급할 때에 어찌 올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영동 군사도 남한에 속하였는가?”
하였다. 이시백이 아뢰기를,
“강릉(江陵) 군사를 소속시켰는데, 대개 경기는 호종(扈從)하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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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쇄도감에서는 전국의 노비들을 효율적으로 찾기 위하여 각 도의 수령들에게 자체적으로 노비 추쇄를 실시하여 그 결과를 보고하게 하였고, 각 도마다 추쇄어사(推刷御使)를 파견하여 추쇄한 노비들을 확인하는 한편 추쇄로 인한 폐해도 함께 조사하게 하였다. 그 결과 추쇄도감을 설치한 지 2년 6개월 만에 추쇄를 완료하여 8도는 297,164구, 제주도는 33,375구, 한성은 23,482구를 파악하였다.
☜『추쇄도감의궤(推刷都監儀軌)』
당시 추쇄도감에서 공노비를 찾는 과정 및 결과는『추쇄도감의궤(推刷都監儀軌)』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으며,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서 확인할 수 있다. 국가 재산인 공노비의 현황을 파악하기 위해 특별위원회 성격의 추쇄도감을 설치하고, 그 추쇄 과정 및 절차를 뒷날의 전범으로 삼기 위해 ‘의궤(儀軌)’의 형태로 정리하여 편찬한 것이다.
■ 도망간 사노비 찾기 : 사적인 조사와 관청 권력의 공조
개인이 소유한 ‘사노비’를 관리하는 것은 전적으로 소유주의 몫이었으므로, 도망간 노비를 찾는 일 또한 주인이 사적으로 해결해야만 했다. 도망간 노비의 소재를 파악하는 일은 다른 노비를 시켜 비교적 쉽게 해결할 수 있었으나 잡아오는 일이 만만치 않았다. 도망간 노비들은 대체로 독립적으로 살기 보다는 세력 있는 집안에 투탁하여 사는 경우가 많아 현주인과의 분쟁에 휘말릴 소지가 있었고, 혹은 노비가 거세게 저항하여 잡으러 간 양반이 오히려 봉변을 당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노비를 잡아오는 일만큼은 관청의 권력에 기대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1427년(세종 9) 경기도 양주에 살았던 장전(張戩)의 부인 신씨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계집종 4구를 잡기 위해 관아의 도움을 요청하는 문서를 올렸다. 신씨는 1404년(태종 4)에 의주목사(義州牧使)를 역임한 아버지 신익철(辛益哲)에게서 자신의 몫으로 계집종 양의덕(良衣德)을 물려받았고, 신씨의 여동생은 계집종 장장(長莊)과 금장(金莊)을 받았다. 그런데 양의덕이 사촌동생인 장장과 금장을 데리고 함께 도망쳐 이들을 찾고자 한 것이다.
신씨는 우선 도망간 양의덕 일행의 소재를 사적으로 조사하여 경상도 순흥에 살고 있으며 장장의 소생으로 계집종 연화(延花)가 있다는 사실까지 밝혀냈다. 그리고는 곧바로 계집종 4구에 대한 소유권을 증명하는 문서를 첨부하여 경상도 도관찰출척사에게 자신의 노비를 잡아달라는 내용으로 청원문서를 올렸다. 당시 신씨의 청원문서를 접수한 경상도 도관찰출척사는 해당 노비들이 살고 있는 경상도 순흥부에 문서를 다시 올려 해당 노비들에 대한 추쇄를 청하라고 명하였다.
☜보물 제1005-1호 장말손종손가소장고문서 소지(張末孫宗孫家所藏古文書 所志)
사노비의 추쇄는 기본적으로 소유주인 상전이 담당하였으나, 국가 곧 지방 수령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했다. 공노비뿐만 아니라 개인 소유의 노비를 추쇄하는 데 있어서도 관청의 권력이 절대적이었던 것이다.
양반 나라인 조선에서 양반의 이권을 국가적 차원에서 보호해주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므로 양반의 사유 재산인 노비를 찾아주는 일을 관청에서 적극적으로 지원해준 것은 ‘조선’이라는 나라의 기본 성향을 잘 보여준다고 하겠다.
■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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平木實, 『朝鮮後期 奴婢制 硏究』, 知識産業社,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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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安淑, 「孝宗朝 各司奴婢推刷都監設置의 背景과 性格 -17世紀初 民亂과 관련하여-」, 영남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84.
全炯澤, 『朝鮮後期 奴婢身分 變動 硏究』,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86.
金斗憲, 「朝鮮 孝宗代의 奴婢推刷에 대한 再檢討 -『推刷都監儀軌』分析을 중심으로-」, 전북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89.
安承俊, 「朝鮮時代 私奴婢 推刷와 그 實際-榮州 仁同張氏所藏 古文書를 中心으로-」, 『古文書硏究』第8號, 韓國古文書學會, 1996.
노명호 외, 『韓國古代中世古文書硏究』上․下, 서울대학교출판부, 2000.
朴盛鍾, 「張戩妻辛氏宣德二年所志의 復元」, 『古文書硏究』제23호, 韓國古文書學會, 2003.
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KBS드라마'추노'공식홈페이지(드라마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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