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서 안의 여성 :
(사라, 리브가, 라헬)
1. 사라
고대에 있어 첫 족장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보다 더 자유로운 여인은 없다. 그녀는 남편에게 동등하게 대우받았고, 이사악의 어머니가 되고, 에사오와 야곱의 할머니가 되었다. 야곱에 의해 사라는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를 이룬 시조들의 증조모가 되었다. 사라는 아브라함의 동반자로서 항상 곁에 있었고, 함께 길을 갔다. 아브라함과 함께 사라는 하란에서 남쪽으로 가기도 하고, 유프라테스 강의 평평한 뚝을 따라 걷기도 하고, 나일 강의 아름다운 계곡을 지나기도 하며, 긴 여행을 걸쳐 마침내 가나안의 땅에 정착하였다. 사라는 너무나 아름다워 아빌멜렉 왕은 그를 후궁으로 삼으려 했으나 사라는 기적적으로 탈출하고 아브라함과 함께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파라오의 궁에서 사라를 구출한 것은 바로 야훼 하느님이셨고 그것은 곧 이스라엘에 대한 야훼 하느님의 첫 번째 구원 행위였다. 다시 말해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신 야훼 하느님의 구원 대상이 곧 이스라엘 여인 사라였던 것이다.
사라는 모든 면에서 자유인이었으나, 수십 년 동안 꼭 한가지 자유가 없었다. 그는 임신을 할 수 없었고, 아이를 출산한다는 일은 거의 절망적이었다. 마침내 그는 아브라함에게 자신의 몸종 하갈을 소실로 받아들일 것을 요구했고 그로 인해 사라는 임신한 몸종 하갈에게 멸시받게 되었다. 이에 화가 난 사라는 하갈을 심하게 다루었고 하갈은 그의 곁을 피해 도망쳤다. 그러나 하갈은 천사의 도움으로 다시 돌아와 아들 이스마엘을 낳았다. 후에 사라가 나이 먹고, 늙어서 기적적으로 이사악을 출산했을 때, 하갈은 점점 더 그의 상전에게 오만하게 굴었다. 이스마엘도, 그의 어머니와 같이 사라의 아들을 조롱하고 비웃었다. - 이 가정적 불화는 지금까지도 히브리 인과 아랍 인 사이의 분쟁거리가 되어 있다. 사라의 아들 이스마엘의 사라가 거의 90세가 되어서 태어났다. 바오로는 이 일은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사라는 믿음의 어머니이다.
사라는 고대 히브리 인 중에서 가장 슬기로운 여인들 중의 하나이다. 그는 그의 결혼 생활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그는 정당한 적자로 이사악을 낳았다. 그는 다른 여인에 의해 파괴될 뻔한 가정을 지켰고, 동시에 그의 남편의 사랑을 계속해서 확보할 수 있었다. 그는 어떤 어려운 환경에서도 도피하려 하지 않았고, 그 어려움에 걸려 넘어지지도 않았다. 그는 꿋꿋하게 공기를 가지고 어떤 일이 닥쳐와도 이겨냈다. 사라는 강하고 고집 세고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려고 자신의 신분을 마음껏 이용하는 여인이고 또 자기보다 낮은 신분의 하갈을 박대하고 추방하기까지 한 여성이다. 가부장적 제도 속에서 그녀는 스스로 억압당하기도 하면서 또 가족을 위해 스스로 주도권을 휘두르는 의지를 보이는 그리고 심지어는 자신보다 낮은 신분의 사람을 학대하고 추방한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라야말로 아브라함 언약의 실제적인 수령자였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네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많을 것이라고 하신 약속은 사실상 사라에게 주신 약속이었고, 사라를 통해서만 이루어진 약속이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의 첫 아들이 이스라엘의 조상이 된 것이 아니고 사라의 아들이 이스라엘의 조상이 된 것이다.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영웅들의 대열에서 제일 먼저 등장하는 여인이 사라이다. 그녀는 그녀의 실패 때문이 아니라, 그녀가 가졌던 믿음 때문에 명예롭게 기록되었다. 이사악의 출생에서 훌륭하게 나타났던 그녀의 믿음은 그녀의 긴 생애동안 성장한 것이었다. 삶은 사라에게 많은 희생을 요구했다. 그녀느 자기가 사랑했고 원했던 많은 것을 억제해야만 했따. 이것으로 그녀는 이스라엘의 조상이며 위대한 왕녀라고 불려질 수 있었다.
2. 리브가
창세기를 살펴보면 하느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신 축복에 이어가는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 그리고 요셉으로 이어지는 계승자들이 나온다. 성서에서는 이사악에서 야곱으로 이어지는 축복과정을 매우 극적으로 묘사한다. 대부분 에사오와 야곱 중 야곱을 지나치게 편애하여 형제 간의 갈등을 일으킨 불공평한 어머니로, 남편 이사악까지 속여 장자권을 야곱에게 넘긴 인정머니 어머니로 리브라를 판단한다. 즉, 남편과 자식간의 갈등을 일으킨 장본인, 지혜는 있으나 수단을 가리지 않고 목적을 달성하는 권모술수의 대변자로 보아 온 것이다. 리브가는 반목과 질시의 유혹자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리브가를 바라봄에 편견이 아닌 새로운 모습으로 그녀를 만나야한다.
리브가아 이사악의 만남과 결혼은 매우 신비롭고 극적이다. 아브라함의 명령을 받은 늙은 종 엘리어젤은 이사악의 아내 될 사람을 만나도록 하느님께 기도드리고 나름대로 아브라함의 며느리감 기준을 정한다. 그것은 자신에게 뿐 아니라 낙타에게도 물을 주는 아가씨가 이사악의 아내가 되는 것이었다. 리브가는 우물가에서 만난 엘리어절과 그의 낙타에게 물을 주고 그에게 선물을 받는다. 엘리어젤은 리브가의 오빠 라반과 어머니의 승낙을 얻은 후 리브가에게 선택을 위임한다. 이때 리브가의 선택은 수동적인 형태가 아니라 적극적인 형태로 나타난다. 그것은, 집안에서 결정했기 때문에 순종한 것이 아니라, 우물가에서의 만남과 선물을 받은 행동에 대한 일련의 주체적 행동으로 나타난다.
리브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새로운 세계를 향해 도전하는 여성이었으며, 자신의 삶을 결단하고 머뭇거리지 않고 곧장 실행에 옮기는 적극적인 여성이었다. 결혼 20년 만에 임신한 리브가는 "너의 태중에 두 민족이 들어있다. 태에서 나오기 전 두 부족으로 갈라졌는데 한 부족이 다른 한 부족을 억누를 것이다. 형이 동생을 섬기게 될 것이다."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고 태어날 아이에 대한 분명한 원칙을 제시한다. 리브가는 쌍둥이 아들을 낳았다. 큰아들은 피부가 붉고 털이 많은 에사오였고 작은아들은 조용한 성격의 얌전한 야곱이었다. 그런데 이사악은 에사오를, 리브가는 야곱을 더 사랑했다.
리브가의 적극적인 성격은 야곱이 장차 축복받을 때 잘 나타난다. 이사악은 나이가 들어 시력도 약해졌다. 어느날 에사오를 불러 사냥을 해 별미를 만들어오면 죽기 전에 정성을 쏟아 복을 빌어주겠다고 약속했다. 부자간의 약속의 말을 엿듣고 야곱에게 알려준 이는 바로 어머니 리브가였다. 리브가는 야곱의 등을 떠밀어 결국 아버지의 축복을 형 대신 받아내게 했다. 교활하고 비사한 방법으로 에사오의 축복을 가로챈 것이었다. 그러나 그 이유는 리브가가 임신중에 들려주신 하느님의 말씀을 절대적으로 신뢰하였기 때문이며, 서로 공생할 수 없는 긴장관계에 있는 두 아들 중 어머니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을 약자, 힘없는 자 야곱이었다는 점이다. 이는 이스라엘 역사에 개입하시는 하느님의 선택과도 동일하다. 하느님은 항상 고통받는 자, 약자 편에서 행동하시는 분으로 이집트에서 고통당하는 이스라엘을 편야하셨다. 선택해야 할 곳에서 편애하는 근거는 바로 약자, 힘없는 자와 함께하는 것이다. 이런 리브가의 편애는 약자의 편에 선 사랑이었다. 우리는 리브가를 바라봄에 교활하고 아버지를 속이도록 자식을 잘못 인도하는 여성으로서가 아닌, 결단역 있고 적극적으로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이루어가는 여성으로 리브가를 재조명해야 할 것이다.
리브가의 헌신은 야곱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공동체의 아버지로서 야곱을 위한 것이었다. 공동체보다는 개인을 우선하는 오늘의 모습에서 리브가의 결단과 헌신은 우리에게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다. 강자보다는 약자를 사랑하고, 개인의 생각보다는 하느님의 말씀에 기초한 리브가의 모습에서 여성들이 추구해야 할 원칙을 발견할 수 있다.
3. 라헬
라반에게는 두 딸, 레아와 라헬이 있었다. 레아는 시력이 약했다. 시력이 약하거나 분명하지 않은 것은 당시 근동지방의 미(美)의 기준에서 큰 결점이었다. 라헬은 곱고 아리따운 자태를 지니고 있었다. 곱고 아름다운 여성이 남성의 더 큰 관심을 끄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형의 위협으로부터 도주한 야곱은 라반의 집에 머물러 있었는데 라반의 품삯제의에 라헬과의 결혼을 요구했다. 그러나 야곱은 라반에게 속아 라헬보다 먼저 레아를 부인으로 얻게 되고, 그 다음 비로소 라헬을 부인으로 얻었다. 이스라엘에서는 한 남자가 같은 자매에게 동시에 장가 들 수 없기 때문에 이런 이중 결혼의 결과 두 부인 라헬과 레아가 벌이는 신경전과 경쟁은 극심할 수 밖에 없었다. 야곱은 너무나 곱고 아름다운 아내 라헬을 너무나 사랑했다.
야곱의 열정적이고 끊임없는 사랑을 독차지했던 라헬은 어떤 여성이었을까? 라헬은 겸손하고 순종적인 여성은 아니었던 것 같다. 오히려 활달하고 자신감에 넘쳐흐르는 여성이었다. 일반적으로 미모가 뛰어나 사랑을 독차지하는 여성은 자신의 매력과 아름다움에 자신감과 자부심이 지나쳐 교만해 보이는 모습을 띠기도 한다. 그녀는 야곱의 사랑에 고마워하는 마음을 지니지 않았다. 라헬은 강하고 열정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 야곱의 어머니 리브가와 비슷한 점이 많았다. 라헬은 야곱과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지 못하자 언니 레아를 심하게 질투했다. 그러나 야곱의 사랑하는 아내 라헬은 아이를 낳지 못해 실망했고 평생 동안 자녀 없는 생을 보낼 것만 같았다.
라헬은 자신의 몸종 빌하를 통해 두 명의 아들을 낳았다. 그리고 그 후 언니 레아는 아들이 이미 넷이나 있었는데도 그의 몸종 질바를 야곱의 소실로 들여 아들 둘을 낳았다. 그래서 아들이 모두 여덟이 되었다. 레아가 후에 또 아들 둘을 야곱에게 낳아주었다. 마침내 라헬이 야곱에게 그들의 아들 요셉을 낳아주니, 야곱의 평생 기쁨이 되고 야곱이 늙은 후에도 위로가 되었다.
야곱의 가족이 하란을 떠나 가나안으로 돌아간 후 하느님께서는 라헬의 기도를 이뤄주셨다. 베냐민이 탄생한 것이다. 이로 야곱은 열 두 명의 아들을 가지게 되었고, 그들은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의 족장들이 되었다. 그러나 라헬은 베냐민을 낳은 후 숨을 거두었고 베들레험으로 가는 길에 묻혔다. 라헬이 오랜 동안 아들을 기다리면서 어떻게 느꼇던 간에 라헬은 야곱을 처음 만난 날부터 야곱의 열열한 사랑을 받은 축복받은 여인이었다. 야곱은 아름답고 사랑한 아내를 잃은 슬픔을 영원히 잊지 못했었다.
1. 미리암
성서는 미리암에 대해 이스라엘의 이집트의 억압에서 탈출하여 가나안을 향해 가는 해방과정에서 활동한 인물로 간략하게 언급한다(출애 15,20-21). 우리는 이스라엘의 해방 과정에서 미리암의 노래를 통해 해방자이신 야훼 하느님을 찬양하는 적극적인 여예언자 미리암을 만날 수 있다.1) 모세의 유력한 동반자인 미리암과 아론은 모세를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도록 이끌어 냈다. 아론은 모세의 대변자로서 이스라엘과 모세를 중재했으며 미리암은 어린 아기 모세를 살려낼 때부터 그가 지도자로 성장하기까지 예언자로서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준비하고 있었다.(출애 4,14; 27) 성서는 미리암을 예언자로 평가하고 있다(출애 15,20) 이집트 탈출을 기념하는 갈대바다의 노래(출애 1,1-18)에서 미리암의 노래(출애 15,1)를 선창으로 찬양이 이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성서학자들은 미리암의 노래(15,21)가 앞의 갈대 바다 노래의 모태였을 것으로 추측한다. 그것은 미리암이 해방과정에서 큰 역할을 했음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미리암의 노래의 전승과정을 추적하면 그 노래가 전쟁 후의 승전가이며 찬송시임을 알 수 있다.2)
미리암은 억압 아래에서 해방의 꿈을 키워 온 민중들의 상징이었다. 즉, 이름 없는 민중들의 대표로서 미리암은 앞서 나가 야훼를 찬양하는 인물로 부각된 것이다. 미리암의 노래는 찬양문의 전형으로서 이스라엘의 집단적 힘을 대표하는 인물이며 구체적인 예언가로서 야훼 하느님의 약속을 충실하게 따른 미리암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미리암의 노래는 마리아의 찬가(루가 1,46-56)로 그 맥이 이어진다. 1세기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의 역사 개입의 궁극적 실현인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의 입에 담아서 노래했다. 즉, 보잘 것 없는 처녀 마리아가 예수의 어머니로서 선택되었음을 알아채고 그 기쁨을 노래하는 것이다. 미리암의 노래와 마리아의 노래에서 우리는 야훼 하느님의 역사적 개입이 언제나 민중에게 궁극적 기쁨이 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3)
한편 성서에는 미리암에 대한 부정적인 면모가 나온다. 광야에서 모세의 권위에 도전하여 하느님의 진노를 받고 문둥병에 걸렸다고 소개된다 (민수 12,1-6). 이때 온유한 성격의 모세가 하느님께 간청해서 미리암의 병을 낫게 해주었다는 이야기가 있다(민수 12,3-4). 그러나 성서 전승을 거슬러 살펴보면 미리암이 문둥병에 걸렸다는 사실과 그가 모세의 권위에 도전했다는 원인 설정은 별개의 전승이 합쳐진 것임을 알 수 있다. 미리암의 문둥병은 7일 간의 격리 기간이 지난 후에 치유된 미미한 것이었다 (민수 12,5). 광야생활 동안 돌았던 전염병이었을 수도 있고 병든 사람들의 고통에 동참하다가 걸린 병일 수도 있다.
2. 드보라
구약의 여성상 중 가장 의미있는 행위를 한 위대한 여성으로 드보라는 등장한다. 남성중심의 사회상을 드러내는 구약에서조차 드보라에 관한 한 어떤 비하도 찾아볼 수 없이 있는 그대로 담담하게 기술되어 있다. 드보라는 민족을 구원한 예언자인 동시에 백성들의 상담자요 지혜와 영적 통찰력을 지닌 판관이었다. 판관시대 가나안은 도시국가로서 봉건영주들이 지배하는 체제였고 소외계층인 하비루가 있었다. 드보라 시대에도 이스라엘은 20여년 간 가나안의 왕 야빈에게 심한 억압을 받아 왔다(판관 4,3). 판관들은 이런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선택된 지도자들이었고 그들은 야훼로부터 평등공동체를 지켜나갈 임무를 부여받았다.
압제당하던 이스라엘 민중들은 야훼께 고통을 호소한다. 그러자 야훼께서는 예언자 드보라를 판관으로 세워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할 책임을 명하신다. 드보라는 바락을 불러 이스라엘의 하느님 야훼의 신탁을 전하고 이스라엘을 구하기 위해 세밀한 작전을 짠다(판관 4,4-7). 그런데 뜻밖에도 바락은 드보라에게 함께 동행할 것을 간청한다. "만일 당신이 저와 함께 가신다면 가겠지만 함께 가시지 않는다면 못 가겠습니다"(판관 4,8). 이것은 그 당시 드보라가 이스라엘 민중들에게 받는 절대적인 지지를 암시하는 것이다. 곧 이어 승리의 영광이 결코 바락에게 돌아가지 않을 것임과 야훼께서 적장 시스라도 여인의 손에 넘기실 것이라고 드보라가 예언함으로써 이스라엘을 가나안의 압제로부터 구하는 해방전쟁의 주체가 바로 여성들이었다는 것을 분명하게 한다(판관 4,8-9). 드보라는 직접 군대를 지휘하지는 않았지만 군사상의 결정을 내렸다. 미리암이 가장 높은 지도자인 모세에게 복종해야 하는 중간 지도자였던 데 비해 드보라는 남성을 통솔하는 최고 지도자였다. 그녀는 전쟁 중에 구조자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용기와 자신감으로 하느님께 전적으로 의지했다.4)
드보라의 승리는 판관기 5장 드보라의 노래에서 두드러지는데 시의 끊어진 문맥과 문맥 사이에 배열된 구조 속에서 드보라의 위대성을 표현하려는 작가의 의도를 볼 수 있다. 이 노래는 드보라가 떨쳐 일어나 이스라엘을 구하기까지 이스라엘은 죽어 있었다고 노래한다. 이 시의 뒷부분은 위대한 여성인 드보라와 시스라를 죽인 야엘과 대조를 이루는 여성들이 등장한다. 시스라의 어미의 기다림은 한편으로 측은해 보이지만 그 무지함이 돋보인다. 동시대의 여성인 드보라와 야엘이 나라와 민족을 구할 때 그녀들은 같은 여성이 전리품으로 돌아올 것을 무심코 기다리며 옷과 장식품 따위에만 관심을 보인다. 드보라의 노래는 압제자의 고난에서 해방된 민중들의 승전가일 뿐 아니라 자신들의 운명을 숙명적으로 받아들이고 남성 중심적인 문화에 길들여진 여성 자신들이 굴레를 벗고 이미 해방의 기쁨과 자유를 만끽하고있는 드보라와 야엘에게로 달려 나오기를 바라는 것이다. 5)
3. 한나
잉태하지 못하는 여인들이 야훼로 말미암아 아이를 갖게 되는 이야기는 성서에 몇 군데 나온다. 이사악의 어머니 사라는 기다리다 지쳐서 하느님의 천사가 아이를 잉태하리라고 했을 때 비웃었고 어머니 라헬은 남편에게 죽어버리겠다고 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한나는 기도에 매달려 사무엘을 얻는 사람이다. 한나를 기억할 때 우리는 자식을 얻기 위해 기도하고 응답을 받은 신앙인과 지극한 모성의 어머니상을 떠올린다. 사무엘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선지자이면서 이스라엘 초기의 왕인 사울과 다윗에게 기름을 붓기 전까지 실질적인 통치를 맡은 판관이었고 제사장이었다. 모세로부터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 선지자, 판관, 제사장의 세 직분을 이행했던 인물은 사무엘 뿐이다.6)
성서는 한나의 남편 엘카나에게 또다른 아내 브닌나가 있었다고 한다(2절). 아마도 한나가 아이를 낳지 못했기 때문에 엘카나는 다른 여자를 아내로 맞고 자식을 두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전통적인 입장의 해석은 엘카나가 두 아내를 두었기에 가정불화가 생겼고 브닌나를 매우 심술 사나운 여자로 평가한다. 한나는 계속해서 기도했고 그 간절함의 응답으로 아들을 얻게 되었다. 자녀양육이 여성의 특권인 동시에 여성의 역할이었던 당시에 한나는 그 아들을 하느님께 바친다. 모세의 어머니가 모세에게 야훼신앙을 가르쳤듯이(출애 1,9-10), 한나는 4년 간의 수유기간 동안 충분한 사랑을 주면서 사무엘의 신앙습관을 가르친다(1사무 3,10-18). 사무엘이 이스라엘의 새로운 지도자로 활동했던 배경에는 그 시대의 요구에 적합한 자식을 키워낸 한나의 모성과 교육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한나는 야훼께 서약했던 대로 사무엘을 성전에 바침으로써(1사무 1,24-25) 아들에 대한 가족 중심적 기대를 포기했다. 한나는 비로소 자식에 대한 소유를 포기함으로서 브닌나와의 경쟁관계를 극복하고 자식을 통해 남은 생을 보장받을 수 있는 가부장적 질서를 넘어선다. 이는 가족중심적 이기주의를 극복하고 이스라엘 전체의 미래를 위해 자신을 헌신하는 모성을 발휘한 것이다. 한나는 사무엘을 성전에 바침으로써 야훼와 맺은 계약을 실행했다. 결국 한나는 어린 사무엘을 올바로 교육하여 이스라엘의 혼란기를 극복하고 안정된 왕권체제를 이루는 데 큰 역할을 하게 한 것이다. 7)
한나가 눈물로 기도해서 얻은 자식 사무엘을 야훼께 봉헌하며 부른 찬미가(1사무 2,1-11)의 주제가 성모님의 '마니피캇'(루가 1,46-55) 속에서 다시 반복된다. 온갖 수모 끝에 얻은 아들을 '야훼께서 주셨으니 야훼께 다시 바친' 한나나 외아들 예수님을 인류의 속죄양으로 야훼께 봉헌한 성모 마리아는 그 잉태와 출산과 봉헌에서 서로 이미 일치되어 있는 것이다.8) 어린 아들을 엘리 제사장 앞에 떼어놓고 돌아오면서 드린 이 찬양 속에는 한나의 신앙고백이 드러나 있다. 이 찬가는 한 약한 여인이 하느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얼마나 강해져 있었는가를 보여준다.
한나의 노래는 개인적 차원을 넘어서서 이스라엘의 고통과 기쁨을 드러낸다. 이는 역사적 격동기에 살았던 가련한 한 여성이 자신의 고통 속에서 민족의 고통을 담아내고 있다. 한나의 태도는 동시에 피동적이고 순종적인 여성의 모습을 극복하여 기도라는 울부짖음의 호소를 적극적으로 보여주며 행동으로도 표출하고 있다. 이는 진정한 모성의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며 민족의 고통을 해결하기 위한 헌신이라는 면에서 헌신의 맹목성을 깨뜨린 것이다.
성서의 여성과 한국의 여성 :
(사라&웅녀, 미리암&강완숙)
1. 사라 - 웅녀
이스라엘 민족의 어머니이며 믿음의 조상인 사라와 마찬가지로 우리에겐 우리 민족의 모태인 웅녀가 있다. 사라를 통해 이사악이 태어나고 이사악을 통해 이스라엘은 큰 민족을 이루게 된다. 만약 사라의 믿음이 없었다면 이스라엘은 큰 민족을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 역사의 시작에는 곰에서 사람이 된 웅녀가 있다.
그때 곰 한 마리와 범 한 마리가 같은 굴에서 살며 항상 환웅에게 빌기를 "원컨대 사람이 되게 해주십시오." 하였다. 한번은 환웅이 신령한 쑥 한 자루와 마늘 20개를 주고 이르기를 "너희들이 이것을 먹고 백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곧 사람이 되리라." 하였다. 곰과 범이 이것을 받아서 먹고 금하기를 삼칠일만에 곰은 여자의 몸이 되고 범은 그것을 지키지 못하여 사람이 되지 못하였다. 웅녀는 그와 혼인할 사람이 없으므로 항상 신단수 밑에서 아이를 배게 해달라고 축원하였다. 이에 환웅이 잠깐 변하여 혼인하여 아들을 낳으니 이름을 단군왕검이라 하였다. 단군이 조선을 세웠다. (<<삼국유사>> 권1, 기이 고조선)
숲에 사는 존재로 환웅에게 인간이 되게 해달라고 한 곰과 범은 환웅과 약속한 금기를 지킨다. 그러나 결국 범은 약속의 끝까지 가지 못하고 곰만 약속을 완전히 이행하게 된다. 곰은 인내로 결국 사람인 웅녀로 탄생하게 되고 환웅과 결합하여 단군을 낳게 된다. 그리고 단군은 현재의 우리 민족을 이루게 되었다. 단군신화에서 웅녀는 천신의 자손이자 국조인 단군을 낳는 신모적 존재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 민족의 어머니인 웅녀와 이스라엘 민족의 어머니인 사라는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2. 미리암 - 강완숙 골롬바
미리암은 모세의 누이로서 모세의 유력한 동반자인 동시에 모세가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도록 이끌었다. 그녀는 어린 아기 모세를 살려 낼 때부터 그가 지도자로 성장하기까지 예언자로서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모세가 에집트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탈출할 때 항상 그의 곁에서 함께 해 주었던 훌륭한 동반자였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그리고 구약 속 하느님의 역사 중 가장 큰 사건이었던 출애굽 사건은 물론 하느님의 뜻에 따라 하느님께서 함께 했기에 가능했고, 이미 예정되어 있었지만, 하느님께서 모세를 선택하고 또 그 옆에서 항상 미리암이 있게 함은 그만큼 그들이 중요한 존재이고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이들이 아닐까 생각된다. 미리암은 위에서의 언급처럼 하느님이 선택한 일꾼의 협력자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미리암과 비슷한 우리 역사 속 인물은 강완숙 골롬바가 아닌가 생각된다.
'가장 간특한 사학(邪學) 여인'으로 지목 받은 강완숙은 홍지영의 후처로 1971년(정조 15년) 신앙활동을 위해 전처 아들인 홍필주와 시어머니를 모시고 충청도 내포에서 상경했다. 그녀는 1795년(정조 19년)에 주문모 신부의 피신과 은둔을 주선했고, 1796년부터는 실질적으로 신부 보호인 역할을 담당했다. 그녀의 보호 아래 주문모 신부는 계속 선교활동을 할 수 있었다. 강완숙은 주문모 신부가 비밀조직으로 결성한 명도회의 여회장직을 맡으면서 동정녀와 과부를 많이 모아 지도했다. 강완숙의 활약으로 많은 여성들이 하느님을 알 게 되었다.
강완숙 골롬바는 미리암이 모세의 곁에서 그의 협조자로 함께 했던 것처럼 주문모 신부가 한국에서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알리는 일을 함에 적극적인 협조자가 되었다. 주문모 신부의 선교에 있어 강완숙이 없었다면 선교활동이 이뤄지기 어렵고 힘들었을 것이다. 그의 곁에는 항상 그의 하느님 사업의 실행에 도움을 주었던 강완숙 골롬바의 협조와 도움이 있었다
성서의 여성과 한국의 여성 :
(사라&웅녀, 미리암&강완숙)
. 유딧
유딧서를 보면 '유딧'이라는 미모의 한 유대인 과부가 민족의 위급함을 구하기 위하여 미모를 이용하여 베툴리아를 완전히 포위하고 있는 아시리아군의 적진속에 들어가 적장 홀로페르네스를 죽임으로써 이스라엘을 구하고 동족에게 용기를 북돋아 준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유딧의 족보: 사라사대-사라마엘-나다니엘-엘리암-힐키야-엘리야-아히툽-라피임-기드온-아나니아-엘키아-오지엘-요셉-옥스-므라리. '유딧'은 므라리의 딸)
2. 에스델
페르시아의 왕 크세르크세스1세 제위시에 신하 하만이 페르시아에 있는 유대인들을 몰살시키려고 기도하였다. 그런데 유대인인 에스델이 왕비가 되어 양부이자 사촌 오빠인 모르드개와 협력하여 하만의 음모로부터 유대인들을 구출해냈다. 그 결과 하만은 모르드개에 의해 처형되고 도리어 음모에 가담햇던 자들은 유대인의 손에 죽었다. 유대인들은 이 날의 승리를 기념하여 매년 푸림절을 지키고 있다. (에스델이라는 여성이 유대민족을 큰 위기에서 구해낸 이야기로 에스델서는 1장~16장까지로 구성되어 있다)
3. 마리아
가톨릭과 동방교회 등에서는 '성모' 또는 '성모 마리아'라고 존칭한다. 신약성서에 의하면 마리아는 갈릴리 지방 나자렛 마을에서 살았고 목수인 요셉과 혼약하였으나 천사의 계시를 받아 처녀 잉태하였다. 출산이 임박하였을 무렵 헤로데왕이 호적 일제조사 명령을 내려 그것을 피하러 베들레헴으로 갔으나 숙소를 잡을 수 없어 교외에 있는 한 마굿간에서 예수를 낳았다. 그런데 헤로데가 베들레헴에 장차 왕이 될 아기가 태어났다고 찾아온 동방 박사들의 이야기를 그대로 믿고, 갓 태어난 영아들을 모두 죽이려 했기 때문에 화를 면하기 위해 이집트로 피신했다가 후에 나자렛으로 돌아와 그리스도가 공생활을 시작하는 30세 무렵까지 그곳에서 조용한 생활을 하며 보냈고 그리스도가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다가 붙잡혀 마지막 십자가에 처형되자 그 십자가 곁에서 끝까지 그리스도와 함께 고통을 나누었다.
현재 가톨릭의 교의에 의하면 마리아는 죽은 후 부활하여 하늘로 올라갔는데 이것을 '성모승천'이라고 한다. 성모 마리아에 대한 신심(信心)은 초대교회 때부터 널리 퍼졌으며 구세주의 어머니로서 그리고 은총의 중재자로도 존경의 대상이 되고 있다. 따라서 마리아를 기리는 축일도 많은데, '주의 봉헌축일' (2월 2일), 성모승천대축일(8월 15일), '성모의 원죄 없으신 잉태' (12월 8일)이 그 주된 것이다. 예로부터 마리아는 회화, 조각, 음악 등의 소재가 되었으며 화제(畵題)로는 [성모영보(聖母領報)] [성모자(聖母子)] '피에타'등이 알려져 있으며 조각이라고 할 만한 작품도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음악으로는 아르카델트나 구노의 가곡 [아베 마리아]가 유명하다.
한국 역사 속의 여성 :(김만덕, 윤희순)
1. 김만덕(1739~1812) : 굶주린 백성을 살린 사업가
2 백년 전에 이 땅에서 사업을 한 여성이 있다면 믿을 수 있을까. 장옷으로 얼굴을 가리고서야 바깥 출입하던 시대에 왕에게 벼슬을 받고 왕비를 만난 평민 출신의 여성. 그가 바로 우리 나라 최초의 여성사업가 김만덕(金萬德)이다. 정조 때 문신 채제공이 지은 「번암집」에 기록된 선행(善行)의 제주 여인 만덕은 아버지 김응열(金應悅), 어머니 고씨에게서 태어났다. 1750년 전국을 휩쓴 전염병으로 부모를 잃고 기녀의 수양딸로 갔다. 만덕이 일도 잘 하고 노래와 춤과 거문고도 잘 하자 기녀는 만덕을 역시 기녀로 만들려고 하였다.
부모 잃고 기생으로 전락
기생 김만덕. 그러나 그녀는 몸가짐을 단정히 하고 이야기를 좋아하는 천성을 버리지 못했다. 생활에 여유가 생기자 만덕은 자신으로 인해 집안이 천민으로 대우받는 것이 괴로웠다. 관가에 나가 본래 양가 출신으로 부모를 잃고 가난으로 부득이 기녀가 되었으나 위로 조상에게 부끄러우니 다시 양녀(良女)로 환원시켜 줄 것을 호소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그래도 뜻을 굽히지 않고 목사인 신광익과 판관 한유추를 찾아가 만일 양녀로 환원시켜준다면 집안을 다시 일으키고 특히 불쌍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돌보겠다고 약속하였다. 이에 목사와 판관은 그 진정을 받아들여 명단에서 제명해주었다. 그러자 지체 있는 집안에서 청혼이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허나 만덕은 일찍이 결심한 바가 있어서 결혼하지 않고 그동안 모아 두었던 약간의 돈으로 객주집을 차렸다.
객주집 차려 큰 돈 벌어
명기였던 만덕이 객주집을 차렸다는 소문이 퍼지자 육지 상인들이 즐겨 찾아왔다. 상인 뿐 아니라 관원들까지 투숙하여 객주집은 날로 번창하였다. 만덕은 세 가지 원칙을 세웠다. 첫째, 이익을 적게 남기고 많이 파는 것, 둘째, 적정한 가격 매매, 셋째, 정직한 신용본위가 그것이었다. 만덕은 기녀시절의 경험을 바탕으로 양반층부녀자의 옷감, 장신구, 화장품 등을 염가로 공급했고 나아가서 관가의 물품까지도 조달하는 방법을 연구하여 육지 상인들에게 부탁하기도 하였다. 자연 만덕의 객주집은 큰 규모의무역 거래소가 되었다. 몇 년만에 만덕은 제주의 거상(巨商)이 되었다. 이처럼 사업에 성공하여 돈을 많이 벌었으나 만덕의 일상생활은 언제나 검소하여 화려한옷을 입지 않았다. "풍년에는 흉년을 생각하여 절약하고, 편안히 살 수 있는 사람은 하늘의 은덕에 감사하며 어렵게 고생하는 사람을 생각하여 검소하게 생활해야 한다." 이런 말을 입버릇처럼 하였다. 1792년(정조 16년)에서 1795년(정조 19년)까지 제주에는 계속 흉년이 들어 식량 사정이 매우 좋지 않았다. 특히 1795년에는 국가에서 보낸 구호식량마저 풍랑으로 바다에 빠지자 제주 백성들의 곤궁한 처지는 말이 아니게 되었다. 이 때에 만덕은 '바로 지금이 자신이 나서야 할 때'라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가까운 사람들에게 부탁하였다. "보릿고개까지 굶주린 사람들을 먹여야 하니 육지로 나가서 되는 대로 양곡을 사오세요."
흉년에 가장 많은 곡식을 헌납
만덕은 곡물의10분의 1을 친척과 은혜를 입은 사람들에게 주었다. 나머지 450석은 모두 관가에 보내어서 구호곡으로 쓰게 하였다. 당시 관가에서는 한양에서 구호곡이 오기만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의 목숨은 만덕이 살렸으니 만덕은 우리 생명의 은인이다."사람들은 만덕의 후덕함을 칭송하였다. 제주 목사 이우현(李禹鉉)은 한양에 장계를 올렸다. "제주의 김만덕 여인이 곡식을 사서 450석을 냈고, 고한록(高漢祿)은 300석을, 홍삼필 (洪三弼)과 양성범(梁聖範)은 각각 100석을 내었으니 지극히 가상합니다." 정조는 목사에게 다음과 같이 명을 내렸다. "김만덕에게는 불러서 그 소원을 물어보고 어려운 일이더라고 특별히 시행하라. 그리고 고한록은 대정현으로 임명하고, 홍상필과 양성범은 모두 순장으로 승진 임명하라." 아마도 김만덕이 남자였다면 꽤 높은 관직에 나아갈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목사는 만덕에게 왕의 뜻을 전하고 소원을 물었다. "다른 소원은 없사오나 오직 한 가지, 한양에 가서 임금님 계시는 궁궐을 우러러 보고 천하 명산인 금강산 1만 2천봉을 구경하는 것입니다." 이루기 어려운 소원이었다. 백성은 육지로 나가는 것이 통제되고 특히 여자의 육지행은 법으로 금지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유는 제주도가 척박하여 인구 유지가 쉽지 않아서였다.그러나 만덕의 소원은 그대로 왕에게 보고되었다. 왕은 쾌히 허락하고 말을 하사하였다. 오는 지역의 관사에서는 만덕에게 숙식과 편의를 제공하라고 분부하였다.
의지의 자선사업가
제주로 돌아온 후에도 만덕은 전과 다름없이 장사를 계속하였다. 검소한 생활로 자선사업에 주력하여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만덕은 74세로 세상을 떠났다. 유언에 따라 무덤은 동문 밖, 성안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으로 했다. 판관 이국표는 만덕의 행적을 오륜(五倫)의 바탕이라며 비문(碑文)을 지어주었다. 여성의 사회활동조차 드문 시대에 신분에 구애 받지 않고 자유로이 활동했다는 점에서 만덕은 특기할 만한 여성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상업의 원리를 잘 파악하고 이를 적절히 활용한 점이다. 그리고 개인의 사리사욕을 떠나 나라를 위해 재산을 헌납했다는 사실이 더욱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김만덕은 요즘도 보기 드문 자선가이며 성공한 사업가로서 당당히 자리매김 되어야 할 인물이다.
2. 윤희순(1860~1935) : 여성 의병 노래지어 항일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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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왜놈들이 강성한들
우리들도 뭉쳐지면 왜놈잡기 쉬울세라.
아무리 여자인들 나라사랑 모를쏘냐.
아무리 남녀가 유별한 나라 없이 소용 있나.
우리도 의병하러 나가보세.
의병대를 도와주세.
금수에게 붙잡히면 왜놈시정 받들소냐.
우리 의병 도와 주세.
우리 나라 성공하면 우리 나리 만세로다.
우리 안사람 만만세로다.
'안사람 의병가'
한말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고 독립하려는 운동은 크게 두 방향에서 전개되었다. 즉 의병 투쟁과 애국 계몽운동이었다. 의병투쟁은 주로 지방 유생과 농민을 중심으로 추진 전개되었다. 구국교육운동, 국채보상운동, 애국계몽운동 등의 민족운동에는 여성의 참여가 활발하였으나, 의병 투쟁은 죽음을 무릅쓰는 무력 투쟁이므로 여성의 참여는 불가한 것으로 믿었다. 게다가 의병의 지도자는 완고한 유생들이 주체를 이루고 있었다는 데서 여성의 참여는 더욱 기대할 수 없을 것으로 생각했었다. 이같은 그릇된 선입견으로 역사를 보고 해석한 우리에게 윤희순의 항일구국적 생애는 여성의 역사적 위상을 새롭게 인식하게 한다. 윤희순은 나라가 기우는 비상시국에 처하여 여성들이 전통적인 안사람일만을 고수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의병을 일으킨 시아버지를 따라 때로는 남장 의병이 되기도 하고, 또 "왜놈 잡는데 남녀의 구별이 있을 수 없다."고 안방 여인들에게 의병 참여를 독려하는 의병가를 지어 부르게하는 등 눈부신 활약을 하였던 여중군자(女中君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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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 전체가 의병 투쟁에 참여
윤희순은 1861년에 서울에서 윤익상의 딸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성품이 명민 효순하고 언행이 엄절하여 어른스러움이 있었다. 16세에 유제원과 결혼하였는데 그의 시아버지는 외당 유홍석이다. 외당은 을미의병(1895) 당시 유중악 유중락 등 춘천 유림과 더불어 이소응을 의병대장으로 추대, 일본에 부역한 춘천부 관철사 조인승을 사형에 처하는 등, 의병작전을 전개한 인물이다.
또한 윤희순은 타처의 의병들이 마을에 당도하면 식사 준비를 손수하여 주고, 마을 부인들을 모아놓고 의병을 돕도록 연설을 하였다. 그녀는 "구국의 의리에 남녀의 구별이 어디에 있는가." 라는 의식이 투철하여 구국 참여에 대한 철저한 남녀 평등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이름으로 왜장에게 경고문을 보내 국모 시해의 죄를 극렬히 책망하고, '안사람 의병가' 등의 구국적 여성의병 노래를 지어 각가정 부인에게 돌리면서 토적(討賊)을 위해 궐기할 것을 읍소(泣訴)하였다. 또 의병을 소탕하려는 관군에게도 '병정노래', '병정가' 등을지어 보내어 동족상잔의 부당성을 효유(曉諭)하였다.
여자 의병 모집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된 뒤 민종식, 최익현 등이 이끄는 의병들이 각지에서 일어나게 되고 1907년 해이그 밀사사건을 구실로 일제가 고종황제를 폐위시키고 이어 한국군을 해산시켰다. 그러자 해산된 군인들이 의병에 참여하여 격렬한 의병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때 윤희순도 여자의병 30여명을 모집하여 의병의 취사, 세탁을 맡아 하고 동리 남녀 노유를 모아 쇠똥과 찰흙 등을 섞어서 화승총에 쓸 화약을 만들고, 의병투쟁장에 직접 참여, 활약하였다. 외당은 주길리(珠吉里)전투에서 부상한 후 치료를 받고 다시 의병을 조직하고자 패잔 의병과 청년들을 새로 모으는 중 1910년의 국치(國恥)의 민족 비극을 당하게 되었다. 이에 외당은 왜적의 통치를 받을 수 없다면서 그녀의 남편과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윤희순도 떠나려 하였는데, 왜경이 갑자기 집으로 들이닥쳐 어린 아들을 매질하면서 시아버지와 남편의 행방을 캐어 물었다. 그때 윤희순은 당당한 태도로, "자식을 죽이고 내가 죽을지언정, 큰일하시는 시아버님을 죽게 알려줄 줄 아느냐? 만번 죽어도 말못하겠다."고 하였다. 왜경도 그의 의기에 눌리고 감화되어 그대로 돌아갔다. 이것으로 보아도 구국을 위한 그녀의 용기가 어떠한지 알 수 있다. 윤희순은 시아버지의 뒤를 따라 중국으로 갔다. 그러나 외당은 1913년에 사망하였고 1915년에는 시숙도 사망하고, 또 같은 해 10월 2일에도 남편이 왜경에게 잡혀 심한 고초 끝에 순사하는 비운을 당하였다. 그러나 윤희순의 구국 의지와 활동은 꺾이지 않았다. 시아버지와 남편의 장례를 손수 지내고, 곧 '의병군가', '부인의병가' 등을 지어 동분서주하면서 동지를 모아 병영을 도왔다.
애국투쟁 전하고자 '일생록' 저술
그녀의 눈부신 활약은 독립군에게 큰 용기를 주었으며, 왜병을 놀라게 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왜경의 야습(夜襲)을 받아 체포된 큰아들(敦相)이 왜병의 고문으로 1935년 7월 19일 사망하고 말았다. 3대에 걸친 의병활동을 뒷받침하고 또 스스로 참여했던 그녀의 가슴은 미어지는 듯 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선대의 이 의로운 애국정신을 자자손손에게 가르쳐야 함을 절실히 깨닫고 자신의 「일생록」을 저술하였다. 그리고 그 말미에, "매사는 자신이 알아서, 흐르는 시대를 따라 옳은 도리가 무엇인가를 생각하여 살아가길 바란다. 충효 정신은 결코 잊어서는 안되느니라." 고 하는 충효의 교훈을 남기었다.
1935년 8월 1일, 75세를 일기로 험난하며 위대한 일생을 마치었다. 그녀는 봉천성 해성현 묘관둔 북산에 묻히었다가 고국에 되돌아와 국군 묘지에 안장되었다. 그녀의 충성된 의기를 기려 1977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상에, 다시 1990년에 애국장에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