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시민연대 - 모범투병 일기를 옮깁니다
먼지 쌓인 앨범속 기억
에어컨과 외제 냉장고가 비닐을 벗고 내 키보다 훌쩍 긴 쇼파가 장정 네 사람에 의해 실려왔다. 우리 식구는 그렇게 이사를 왔고 드디어 집이란 고유명사를 언제든지 들먹일 수 있었다. 창문을 열면 맞은편 집과 같은 키였고 현관은 다른 사람이 준 열쇠가 아닌 버튼식 자동잠금장치로 번호를 외워야 했다. 곱게 깔린 거실바닥을 쓸고 쓸었다. 식탁과 쇼파가 다리저림의 눈물과 고생을 위로하는 듯 했다.
나는 예비 대학원생이었고, 동생은 미대생이 되었다. 정말이지 화창하다못해 노곤함이 밀려오는 날이었다. 대학원생의 일상은 태반이 한가함이다. 기침으로 밤이 낮이 되었던 엄마는 실상 쑤시는 손가락으로 고생하고 계셨다. 흔한 가래침 한번 뱉은 적이 없으셨다. 오한이 오신다싶으면 소금으로 가글까지 하셨던 바지런한 분이셨다. 그래서 사무직으로 볼펜자리가 두텁게 자리잡은 엄마의 집게손가락이 이제 파업을 시작하는가보다, 식구 모두 그렇게 여긴 것은 의료보험증 엄마의 무자취 덕이 컸다
서너달 뒤였다. 커튼을 뚫고 노을빛이 스며들기 전, 시간 많은 큰 딸인 나는 더이상 잦은 기침와 손을 주무르는 엄마를 놔둘 수 없었다. 아니 실제로는 기침소리와 끄응 소리가 연신 귀를 맴도는 일상에서 벗어나고픈 소망이었다. 손사래를 치며 누우려는 엄마를 그렇게 힘껏 안아 일으킨적도 없다.
간신히 병원문까지 오니 기특하단 생각까지 들어 뿌듯함이 벅찼다. 정형외과는 이비인후과나 내과보다 어린 환자들이 적어 대기시간이 짧을 것같다는 나름 대학원생의 잔머리를 굴려 와서는 시큰한 손가락에 위중함을 엄마에게 설파하고 있던 차였다. 대수롭지 않은 듯 , 모든 병원이 그렇지만, 쉬이 처방전 한장 고스란히 받고 약국에 들러 오면서 모든 것이 그날 하루에 지워지고 있었다.
사진을 꺼내어
약 봉지로 학을 접거나 거북이를 접어도 인스턴트 커피병이 모자르게 되었지만 기침과 손 마디마디의 불편함은 모자르지 않았다. 육감이란 것이 정말 있는 것인지 단언할 수 없지만 그때의 나는 분명 왠지 모를 두려움에 귀가시간이 빨라졌었다. 그렇다고 집안일이나 살림에 눈을 뜬 것은 아니지만 친하지도 않은 의대생 친구에게 문자도 아닌 전화를 걸곤 했었다. 인턴도 아닌 의대생은 꼭 하루가 지나야 답을 줄 수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뜻하지 않게 걸려온 친구의 X-RAY 촬영 권유에 그간의 불신은 잊혀지고 또다시 생각도 없는 엄마에게 X-RAY 촬영을 해보게 되었다. 흉부외과 접수대가 이렇게 길고 막막한 일이었는지 조금만 서둘렀으면, 태연한 생활에 화가 나 어느 것도 할 수 없었다.
발병이 아니라 발견이었다. 크기로 보면 5년에서 그 이상 오래부터 자란 것이라 했다. 의사는 몇 期라는 설명에는 꼭 그래도 직접 수술해 봐야 아는 겁니다. 라는 겁을 주곤 했다. 어머니는 내게 그렇게 처음 눈물을 보이셨다. 안양의 수재답게 언제나 정확하고 꼿꼿했던 엄마는 침대 곁, 밤이 되도록 흐느끼셨다. 나는 대학원생이었고, 동생은 재료비를 내야 했다. 남 사돈의 팔촌까지 뒤지고 헤집어 병원 간호사와 의사를 찾아 병실을 잡는 데 온 진이 이미 깜빡거리고 있었다. 3기라는 숫자는 의미가 없었다. 분명 정도의 차이를 보이는 숫자이기는 하지만 수술 후 중환자실이나 병실의 다른 환자 모두 차고 늘어진 손을 봐서는 그저 숫자임이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빈 사진 자리를 만지면
병실로 올라온 엄마는 수술 직후 중환자실 이불의 무게가 산더미였으며 면회시간 동동 구르며 달려들던 가족들의 보다듬도 무척 버거우셨다 했다. 춥고 까라지는 거북함에 외로웠던 엄마. 하지만 강단있고 바른 자세로 앉아만 있던 엄마는 눕고 기대어 싫다라는 말을 좋아하게 된 어머니가 되셨다. 그래서 인지 두번째 수술에서 그리도 담담하셨는지 모른다.
하지만 병원치료를 받으며 병원밥이 맛난 것을 알게 된 엄마는 순전히 남이 해준 밥이며 반찬이란 이유를 붙이고 직장도 살림도 싹 지우려 노력하셨다. 기분이 좋다는 느낌은 내가 다른 사람의 평안함을 느낄 때 젖어드는 감촉이란 것을 알게 된 계기이기도 하다. 엄마의 안정은 흔한 보약 한채 없이 항암치료를 견디며 진정한 힘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동생은 조각을 전공한 팔힘을 동원해 안마기 못지않은 괴력을 발산했으며 과외로 일주일을 살게 된 나는 선물공세로 옆 침대 아주머니들의 부러움을 거둘 수 있었다. 그 어느때 보다 재미있고 멋졌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까르르 떠들다보면 병실의 TV는 자연스레 꺼졌고 이리저리 두 딸과 돌아다니는 엄마는 병원 복도를 런닝머신삼고 있었다. 희망은 새로움이었으며 평화는 지금 이 순간이었다.
항암치료를 받을 때 지금도 가장 후회스러운 일은 미리 머리를 군대 입소때처럼 하지 못하고 치료를 시작한 것이다. 듬성 뭉텅 빠지는 머리는 머리카락 그 자체도 문제지만 엄마는 나날이 초라해지고 낯설어지는 자신의 모습에 빛을 잃기 직전이었다. 과감한 결단이 필요한 순간은 생각보다 강압이 아닌 따뜻함으로 다가서야 풀릴 수 있었다. 그 당시 동생의 친구가 유학을 가면서 잠시 맡겨둔 앵무새는 엄마의 드믄 드믄 머리위에 건방지게 오르곤 했다. 깜짝 놀라 떼어내려 했는데 어찌나 우습고 신기하던지 거울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엄마에게 보여드렸다. 그렇게 엄마는 다시 이를 보이고 목젖이 보이도록 웃게 되셨다.
새로 찍은 사진을 넣다
엄마는 다시 단발머리가 되셨고, 장을 보고 음식과 청소를 하신다. 5년 전이란 시간은 앞으로 4개월밖에 남지 않았지만 병원과의 인연이 가물거릴 만큼 소원해지진 못했다. 다음 상담날이 달력에 동그라미 쳐져 언제나 우리보다 빨리 공지해 주고 있으니. 그동안 바늘로 소를 잡은 격이었다. 잡다한 상식만 늘려 준 책장 한 줄의 온통 암관련 책과 온갖 화려한 식이요법,수련법은 낯이 벌게질 정도다.
하지만 정작 엄마의 기운에 가장 큰 도움을 준 것은 머리카락 손질에 부리를 희생한 앵무새와 조각하던 솜씨로 팔 근육을 자랑했던 동생 그리고 곰 같은 딸에서 여유같은 딸로 탈피한 나라고 믿고 싶다. 그렇지만 누구도 부인할 수 없고 무엇도 차지할 수 없는 1위는 바로 엄마 자신의 소망과 의지, 그리고 꺽이지 않고 타들지 않는 희망이다.
투병중 엄마의 낙서를 들추었다. 매일이 식구 걱정과 돈 타령인데 셀 수 없는 한 숨 속에 굵게 쓰신 한 줄. "난 산다. 내일도 모레도 아닌 바로 오늘 난 산다." 눈물을 흘리고 자국을 남기고 싶지 않았다. 마음과 온 바탕이 이미 젖었으니까. 모두를 위해 용감하게 한발 한발 내딛어준 엄마 감사합니다. 지금 이 순간은 모두가 아닌 엄마를 위해 빛나고 있습니다. 사랑합니다.
첫댓글 난 산다. 내일도 모레도 아닌 바로 오늘 난 산다. 이 말이 정답이네요.^^
딸들이 최고입니다..
좋은 투병일기 같네요^^
딸들 정말 화이팅 입니다
여기에 삶의 진정한 바탕이 보이는것 같습니다
사느이유가 도데체 뭘 까요.
풀도 아닌데.............
세상 많이 섭섭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