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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위 시기리야(스리랑카)
'스기리아'는 스리랑카를 대표하는 유적이다.
그만큼 시기리아는 경이롭고 신비로운 곳이다.
스리랑카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세계 10대 불가사의로 꼽히기는 시기리아는 '사자의 언덕' 또는 '사자의 목구멍'이란 뜻이다.
AD5세기 스리랑카의 강력한 왕이었던 마하세나왕이 죽자 인도 남부에서 타밀족의 침입이 시작되었
다.
결국 수도 아누라다푸라가 함락이 되는 와중에 '다투세나'라는 인물이 나타나 타밀을 쫓아내고 아누
라다푸라를 되찾는다.
왕이 되어 왕조를 계승한 그에게는 2명의 아내가 있었다.
첫째 아내는 왕이 되기전의 아내였고 평범한 신분의 여자였지만 두번째 아내는 왕이 된 후 결혼한
여자로 왕족출신의 귀한 신분이었다.
2명의 아내에게서 각각 한명의 아들들이 있었는데 두명의 왕자는 성격이 판이하게 달랐다.
후계문제가 수면위로 떠오르자 왕은 두번째 아내에게서 태어난 왕자에게 왕위를 물려줄려고 했지만
첫번째 아들이 이 사실을 알고 반란을 일으킨다.
장남은 왕궁을 급습해 왕위를 자신에게 물려줄것을 요구하지만 거절당하자 아버지를 암살한다.
이때 동생은 남인도로 망명을 떠나게 되었다.
왕위에 오른 첫번째 아들은 그 후 심각한 정신분열에 시달리며 잠을 제대로 잘 수도 없고 음식을 먹
을 수고 없었다.
누가 독을 타지 않았을까. 동생이 암살자를 보내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에 아무도 믿지않고 심각한 정
신이상 증세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콜롬보에서 170km 정도 떨어져있는 시기리야는 콜롬보에서 버스로 5시간 정도 걸린다.
장엄한 바위산을 올라 가는데는 가파른 계단을 30분 정도 올라 가야 하기 때문에 매우 힘들다.
시기리야의 바위산에는 5세기에 신할리왕조 제65대 왕 카사파 1세가 건설한 성채도시 유적이 있고
산기슭에는 정원과 담장들로 둘러싸인 시가지 유적이 있다.
높이 약 200m, 넓이 약 2㏊인 평평한 산 정상에는 좁은 계단과 작은 길을 연결하여 궁전·저수지·정
원 등을 세웠으나, 지금은 벽돌로 된 기단만 남아 있다.
산 북쪽 중턱에는 성문 유적이 남아 있는데, 문 양쪽 옆에는 날카로운 발톱을 가진 거대한 동물의
앞발 조각상이 있다.
문 중앙에는 왕궁으로 오르는 계단이 설치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일부만 남아 있다.
1982년 유네스코에서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다.
42위 방콕(태국)
타이의 수도이자 제1의 항구도시.
소도시와 촌락들로 이루어진 국가 타이에서 하나뿐인 세계적 거대 도시이며 문화·상업의 중심지이다.
타이 만에서 약 40㎞ 떨어진 지점, 차오프라야 강 삼각주에 자리잡고 있다.
1971년 원래의 시(市)가 차오프라야 강 서쪽 연안에 있는 옛 자치시 톤부리와 통합되었고 1972년 또
다른 외곽지대들과 통합되면서 하나의 시로만 구성되어 있는 군(郡)으로서 방콕 대 도시권(크릉테프
마하나콘)을 형성했다.
기후는 1년 내내 덥고 습도도 높다.
연간 1,520㎜의 비가 내리는 차오프라야 강 삼각주 지대의 배수를 위해 전통적으로 인공수로 체계에
의존해왔다.
삼각주 지대가 점차 늘어나는 수로로 가득 차게 되자 차츰 가라앉는 현상이 나타나 가장 시급한 도
시문제가 되고 있다.
방콕의 경제는 타이의 거의 모든 수출입이 이루어지는 방콕 항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주로 상업 및 공업에 집중되어 있는데, 식품가공·섬유·건축자재 생산 등이 주요산업이다.
이 도시는 또한 타이의 금융 중심지이며 여러 보험회사들의 기지로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시의 영역은 주변의 농업지대로 점차 확장되고 있다.
옛날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던 도시 내부는 오늘날 공공기관과 상업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산업 및
주택 지대는 항구와 교외 쪽으로 옮겨가고 있다.
정부 청사들이 18세기에 지은 거대한 궁전 주위에 자리잡고 있으며, 국제연합 아시아 태평양경제사
회위원회(ESCAP) 본부를 비롯한 여러 국제기구들도 있다.
중국인 거주지구인 삼펭은 주요상업지역이다.
타이인이 주민 대부분을 차지하지만 다른 아시아인들과 서유럽인들의 소집단도 있다.
수많은 와트, 곧 불교사원들은 타이의 고전건축양식을 보여주는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국립박물관에는 고대의 미술품과 왕실에서 사용하던 물건들이 소장되어 있다.
타이의 전통적인 저택 여러 채가 합쳐진 짐 톰슨의 타이 하우스에는 미국 견직업계의 거물이자 미술
품 수집가인 짐 톰슨이 수집한 중요한 타이 종교화가 소장되어 있다.
국립도서관과 타이 국립문서보관소도 있으며, 출랄롱코른대학교(1917)·카세트사르트대학교(1943)를 비
롯한 여러 대학교들이 있다.
3륜 택시, 자가용, 버스로 이루어지는 도심 교통은 매우 혼잡하며, 과거 방콕 시에서 많이 이용되던
수상수송체계의 잔유물로서 운하가 아직도 몇몇 남아 있다.
국도와 철도가 북쪽·동쪽·남쪽으로 라오스·캄보디아·말레이시아에까지 뻗어 있다.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활기찬 공항으로 손꼽히는 돈무앙 공항이 있다.
면적:방콕 대도시권 1,565㎢,
시내에는 대소 300의 사원이 있을 만큼 일찍이 불교의 꽃을 피워 온 도시이다.
왕궁에 인접해 있는 왓 프라깨오에는 약 60cm 높이의 에메랄드 불상이 있어서 일명 에메랄드 사원
이라고 부르는 가장 유명한 사원이다.
그 밖에 대리석으로 만든 대리석사원, 누운 석가상이 있는 왓포, 방콕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왓 아룬 등이 있다.
43위 서인도제도(바베이도스)
카리브 해 섬들 가운데 동쪽 끝에 있는 서인도제도의 독립 섬 국가.
윈드워드 제도에서 동쪽으로 약 160km, 베네수엘라에서 북동쪽으로 약 430km 지점에 있다.
3각형 모양을 하고 있으며 북서에서 남동 방향으로 최대 약 34km, 동서 방향으로 약 23km 뻗어 있
다.
면적 430㎢, 인구 272,000(2003 추계
주변의 섬들이 대부분 화산섬이나, 바베이도스는 석회암섬이다.
약 335m 높이의 힐러바이산(山:374m)이 솟아있고 계곡에는 많은 토종 식물상과 동물군이 서식한다.
섬 주위에는 산호초가 있다.
일년 내내 햇볕이 비쳐 따뜻하여 '태양 속의 섬'이라고도 한다.
바베이도스는 지질학적으로 퇴적암이며 두께 90m가 넘는 산호퇴적물이 덮여 형성된 낮고 평평한 지
형이다.
그러나 해발 336m 높이의 힐라비 산이 있는 중북부는 예외이다.
섬 서쪽은 낮은 단구지형이며 동부와 남부는 크게 경사져 있다.
섬 대부분이 산호초에 둘러싸여 있다.
하천이나 호수 같은 지표수는 거의 없지만 석회암층에 축적된 지하수가 천연샘 몇 군데를 통해 솟아
나온다.
바베이도스는 12∼5월의 건기와 6∼11월의 우기 두 계절의 온화한 열대기후권에 속하는 곳으로 평균
기온은 2월에 24℃, 9월에 28℃이다.
강우량은 해안에서 1,000㎜, 중부 구릉지대에서 2,300㎜이며 평균강우량은 약 1,525㎜이다.
카리브 해의 허리케인 영향권에 속하는 지대이기도 하다.
마호가니, 종려나무, 카수아리나속(屬)의 관목, 붉은플루메리아, 포인시아나와 같은 열대나무가 자라며
카네이션, 백합, 여러 종류의 선인장 등 꽃이 피는 관목들이 널리 퍼져 있다.
평평한 대지에서는 주로 사탕수수를 재배하고 과수원에서는 망고·아보카도·감귤류·번석류(藩石榴) 등
을 재배한다.
산토끼·몽구스·원숭이 같은 야생동물 몇 종이 서식하며 벌새·참새·비둘기 및 지빠귀과의 명금(鳴禽) 조
류도 발견된다.
천연 가스 및 원유가 남동쪽에 조금 매장되어 있으며 점토·석회암·모래 등도 약간 채석된다.
바베이도스의 문화는 민속예술과 전통에 바탕을 두고 있다.
연극회·무용학교·미술전시관 등이 있으며, 국제적으로는 크리켓 경기가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바베이도스의 초기 역사는 분명하지 않지만 남아메리카에서 온 아라와크 인디언들이 거주했을 것으
로 추측된다.
1518년경 스페인인이 상륙했다는 몇 가지 증거가 남아 있으며, 1536년 무렵 이 섬에는 인디언이 한
사람도 남아 있지 않았다는 사실도 뚜렷이 확인할 수 있다.
1624년 또는 1625년초에 존 포웰이 이 섬을 탐험했으며, 1627년에는 그의 동생 헨리 포웰 선장이
영국인 거주자 한 무리를 이끌고 왔다.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데려와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게 했는데, 1834년 대영제국에서 노예제가 폐지
되고 1838년 바베이도스의 노예가 해방된 후 경제적 타격을 입기는 했지만 완전히 몰락할 정도는
아니었다.
1937∼38년 바베이도스와 영국령 서인도제도에서는 급속한 인구성장, 이주통로 봉쇄 및 경제침체 등
으로 촉발된 대규모 폭동과 소요가 일어났다.
그뒤 영국식민복지개발기구가 잇달아 설립되어 바베이도스를 비롯한 여러 식민지에 많은 돈을 제공
하기 시작했고, 흑인 개혁가들의 정치참여도 활발해졌다.
1958년 바베이도스는 서인도연방에 가입했고 바베이도스 섬을 통치하던 그랜틀리 애덤스 경(卿)이
연방의 첫번째 총리가 되었다.
1962년 서인도연방이 와해되자 바베이도스는 1966년 영연방 내에서 독립을 획득하게 되었다.
첫번째 선거에서 DLP가 하원의 다수 의석을 차지했으며 이 당의 지도자인 에롤 배로가 최초의 총리
가 되었다.
44위 아이슬란드
공식 이름은 아이슬란드 공화국(Republic of Iceland/ Lydhveldidh Ísland).
노르웨이와 그린란드 사이에 있는 북대서양의 섬나라.
아이슬란드는 북위63°15'∼66°30'(북극권)에 걸친 남북길이가 약 350km이며, 서경 13°45'∼24°15'에
걸친 동서길이가 약 540km이다.
아이슬란드의 섬은 남북길이 340km, 동서길이 530km의 계란형을 이루고 있다.
가장 가까운 서쪽의 그린란드까지는 278km, 남동쪽의 영국의 스코틀랜드까지는 708km, 동쪽의 노르
웨이까지는 970km 떨어져 있다.
동해안과 북해안에는 홍적세(洪積世)에 섬 전체를 뒤덮었던 빙하가 만든 피오르드가 많다.
섬의 북부 중앙에서 남서부 일대에 걸쳐 재4가 현무암, 파라고나이트 지대이며, 나머지 반인 동부와
북서부는 제3기 현무암 지대이다.
동부에는 1,100년 동안 헤클라·카틀라·아스캬·쉬르트세이· 베스트만 등 30여 개의 활화산이 있으며, 온
천과 간헐천(間歇泉)도 260개 지역에 달하여 훌륭한 관광자원이 된다.
이 섬나라의 4,800km 이상 되는 울퉁불퉁한 해안선은 북쪽으로 그린란드 해와 북극권, 동쪽으로 노
르웨이 해, 남쪽과 서쪽으로 대서양, 북서쪽으로 덴마크 해협(320km 정도되는 이 해협에 의하여 이
섬나라는 그린란드와 분리됨)과 접한다. 면적 120,819㎢,
아이슬란드는 기후와 해안의 특성에 의해 4개 지역으로 구분할 수 있다.
북부의 3개 지역은 대체로 춥고 건조한 기후조건을 가졌으며 해안선은 협만들로 만입되어 꼬불꼬불
하다.
남부지역은 강수량이 많고 기온도 높으며, 해안선은 완만하고 넓은 연안 사주에 의해 형성된 석호들
과 백사장으로 이루어졌다.
북부지역들 중에서 북서부지역은 가파른 골짜기들로 깊이 패어 있는 반도 모양의 고원이며, 중북부
지역은 넓은 골짜기들과 풀이 많은 저지대이다.
북동부지역에는 수많은 협만들 덕분에 우수한 조건의 항구들이 있다.
남부지역의 지형은 매우 다양해 광활한 저지대로부터 아이슬란드에서 가장 높은 흐반나달시누퀴르
산(2,119m)까지를 포함한다.
이 봉우리는 바트나이와퀴틀(바트나 빙하)의 남쪽 가장자리에 자리잡고 있는데, 이 빙하는 아이슬란
드에서 가장 클 뿐 아니라 유럽 대륙의 모든 빙하를 합한 넓이와 맞먹는 크기(8,390㎢)이다.
약 200개에 달하는 아이슬란드의 화산들 중 최소한 30개가 섬에 사람들이 정착한 이래 폭발했으며,
그 횟수는 합쳐서 150번 이상이다.
지진이 자주 발생하지만 심각한 피해를 주는 경우는 거의 없다.
아이슬란드에서 가장 긴 트외르스 강(230km)은 유역면적(7,530㎢) 또한 가장 넓다.
이 강은 아이슬란드의 다른 많은 강들처럼 암설이 섞인 빙하가 녹은 물에서 발원한다.
아이슬란드는 개발 가능한 발전수력의 1/10 정도만을 이용한다.
전국적으로 250여 개 지역에 온천이 있는데, 이들은 아이슬란드의 주요 천연자원들 중의 하나이다.
예를 들어 레이캬비크는 근처의 지열 온천에서 파이프로 공급되는 뜨거운 물을 이용해 난방을 한다.
기후는 열대성·북극성 기류, 그리고 멕시코 만류와 동(東)그린란드 극해류의 영향을 받는다.
동그린란드 극해류를 따라 때때로 북극 유빙이 이 섬나라로 밀려오지만, 멕시코 만류가 그 영향을
완화시키기 때문에 같은 위도상의 다른 나라보다 훨씬 기후가 따뜻하다.
내륙 산악지역을 제외한 7월평균기온은 11℃ 정도이며 1월평균기온은 0℃이다.
연평균강수량은 남동지역의 4,100㎜ 이상으로부터 중북부지역의 406㎜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전체 육지면적 중 1% 미만의 지역만이 경작가능하며, 1960∼70년대의 재식림사업 후에도 삼림은 전
체 육지면적의 1%를 약간 넘는 정도에 불과하다.
그러나 방목지는 사실상 모든 연안유역에 있으며 육지면적의 1/5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나머지 대부분 지역은 이탄지로 덮여 빙결되어(약 12%) 있거나 용암사막이다.
45위 진시황 병마용갱(중국)
서안 시내에서 동북쪽으로 약 30km, 진시황릉에서 북동쪽으로 1.5㎞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1974년 이래 발굴이 시작되어 현재 총면적 25,380m2에 달하는 4개의 갱이 발굴되었으나 그 중 4호
갱은 완성되기 전에 폐기된 빈 갱도였다.
아직 완전히 발굴되지 않은 1호갱은 길이 210m, 너비60m, 깊이 4.5~6.5m의 총면적 12,000m2로서,
본래 이 갱 위에는 길이 210m, 넓이 9칸의 회랑식 건축이 있었으나 불타 없어졌다고 한다.
매장된 전체 도용은 약 6,000개로 추정되며, 도용의 크기는 1.75~1.86m, 도마용은 높이 1.5m, 길이
2m의 실물대이며, 갑옷을 입고 무장한 무사의 엄격한 표정이 모두 상이하다.
1호갱의 동북에 위치한 약 6,000m2의 2호갱 역시 부분적으로 발굴되어 다량의 목제 전차와 이를 끄
는 마용 356건, 기병용 116건, 안마 116건, 보병용 562건이 매장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완전 발굴된 520m2의 3호갱은 지휘부로 추정되는데, 장군의 것으로 보이는 채색된 전차 1량과 갑옷
입은 보병용 64건, 마용 4건이 출토되었다.
이 밖에도 진시황릉 서북측에서 동마용과 동용이 딸린 대형 동전차가 1대 발견되었다.
세계의 8대 경이 중의 하나로 꼽히기도 하는 이 병마용들은 하나하나가 모두 훌륭한 예술품으로 평
가되고 있다.
또 이 병마용들은 진시황 친위군단의 강력한 위용을 과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진나라의 군사편제 ·
갑옷 ·무기 등의 연구에도 구체적인 자료를 제공하고 있으며, 이와 아울러 일부 도용에서 확인되는
북방 민족의 두발형식은 친위군단의 민족적 구성을 짐작하게 한다.
병마용이란 흙으로 빚어 구운 병사와 말을 가리키는데, 불멸의 생을 꿈꿨던 진시황이 사후에 자신의
무덤을 지키게 하려는 목적으로 어마어마한 규모로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세계 8대 불가사의로 꼽힐 만큼 거대한 규모와 정교함을 갖추고 있다.
이곳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1974년 중국의 한 농부가 우물을 파다가 우연히 발견했고, 그제서야 세상에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으며 현재에도 발굴이 진행중이다.
현재까지 3개의 갱이 발견되었으며 700여개의 실물 크기의 도용(陶俑)과 100개가 넘는 전차, 40여필
의 말, 10만여개의 병기가 발굴되었다.
병기들 대부분이 실제무기이며 현재는 창고에 보관 중으로 일반인들에게 공개되지 않고 있다.
도용들은 모두 제각기 다른 자세와 표정, 복장, 헤어 스타일을 갖고 있어 그 섬세함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병마용갱은 총 3개의 전시관으로 이루어져 있다.
1호갱은 당시 농민이 처음 발견한 것이고, 후에 2, 3호갱이 발견되었다.
1호갱은 세 곳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며, 동서 길이가 약 230m, 남북으로 약 62m로 총 면적이 12㎢
정도이다.
1호갱은 동서 쪽을 향한 긴 모양으로 장군과 병사가 배열되어있고, 2호갱은 면적이 약 6000㎡이며,
보병과 기병으로 구성되어 있다.
현재 2호갱은 발굴이 되고 있는 상태에서 전시되어 있다.
3호갱은 면적이 520㎡으로 凹모양이며, 병마용들은 양쪽으로 늘어서 있다.
역시 현재까지도 발굴 작업이 진행중이다.
학자들은 발견된 3개의 갱 외에도 진시황릉 근처에 아직 발굴되지 않은 더 많은 병마용갱이 묻혀 있
을 거라고 보고있다.
46위 마터호른봉(스위스)
높이 4,478m. 프랑스어로는 몽세르뱅(Mont Cervin), 이탈리아어로는 몬테체르비노(Monte Cervino)라
한다.
몬테로사산맥의 주봉으로, 스위스 쪽의 등산기지 체르마트의 남서쪽 10km 지점에 위치한다.
피라미드형의 특이한 산봉우리를 가진 빙식첨봉(氷蝕尖峰)으로, 평균경사 45° 안팎의 급한 암벽이 1,5
00m 이상의 높이로 솟아 있다.
특히 스위스 쪽의 조망이 수려하다.
천하의 독수리봉인 마터호른봉이 있는 체르맛은 알프스관광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다.
환경에 대한 배려로 휘발유 차량의 출입이 금지된다.
등산철도로 리페르알프와 고르너그라트, 공중케이블을 타고 클라인 마터호른을 오른다.
알프스의 진수, 곧 서 알프스를 둘러보려면 대략 세개의 그룹으로 지역을 나눌 수 있다.
최고봉들이 몰려있는 몽블랑 지역, 마터호른봉이 고산 가운데서도 피라미드처럼 고고한 모습을 자랑
하는 체르마트 지역 그리고 아이거, 뮌히, 융프라우 봉들이 몰려있는 융프라우 지역이다.
고도 4478m 마테호른 정상이 보이는 계곡의 초입에 위치한 체르마트(Zermatt)는 고도 1600m의 스
위스 남부 도시로 4000m가 넘는 산들이 둘러싸고 있는 계곡에 둥지처럼 위치해 있다.
체르마트 주위엔 Dent Blanche (4356m), Weisshorn (4505m), Dom (4545m), Gabelhorn (4062m), Zi
nal-Rothorn (4221m), Monte Rosa (4634m)와 같은 그림같은 풍경의 산들이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산악지대인 알프스의 심장부를 이루고 있다.
이곳은 또한 알프스에서 스키 시즌이 가장 길어 스키어들의 천국으로 최상의 슬로프에서 스키를 즐
길 수 있어 연중 많은 스키광들이 모이는 곳이기도 하다.
신선한 알프스의 공기가 느껴지는 체르마트에서는 이곳에 사는 사람들뿐 아니라 이곳을 방문한 관광
객 모두 차없이 걸어 다닌다.
다른 여느 관광지에서 볼 수 있는 관광버스를 찾아볼 수 없는 도시로 전기 자동차와 말이 끄는 썰매
마차가 이곳의 교통수단이다.
복잡한 교통에 시달리지 않아도 돼, 여행이 더욱 즐거우며 상쾌한 알프스의 공기를 느낄 수 있는 저
녁의 산책은 생활을 활기있게 한다.
오래되어 햇볕에 그을린 헛간와 스위스 전통가옥인 샬레 사이로 난 마을의 자갈길을 따라서 걸으면
마테호른의 기운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기차를 이용하면 취리히에서 약 5시간, 제네바에서 약 4시간, 밀라노에서 약 4시간 거리로 유럽 서,
남, 북부 어디에서나 교통이 편리하다.
클라인 마터호른(Klein Matterhorn, 3883m) 전망대
체르마트에는 3개의 전망대가 있다.
그 중 마터호른을 가장 가까이서 볼 수 있는 전망대가 '클라인 마터호른'(Klein Matterhorn, 3883m)
전망대, 애칭으로 '마터호른 글라시아 파라다이스'(Matterhorn Glacier Paradise)라고 부른다. '클라인'
은 '작은'이라는 의미이고, 클라인 마터호른은 작은 마터호른이라는 의미가 되겠다.
그리고 matter가 '초원', horn이 '뿔'이라는 의미이기에 Matterhorn은 '초원의 뿔'이라는의미다.
마터호른 전망대는 높이가 3883m로 세계에서 케이블카로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전망대이고, 세계
에서 2번째로 높은 전망대가 샤모니에 있는 에귀뒤미디(3842m) 전망대이다.
47위 엔젤폭포(앙헬폭포)(베네주엘라)
베네주엘라의 수도 카라카스에서 동쪽으로 333km 떨어진 곳에 있다.
베네주엘라의 카나이마(Canaima) 국립공원, 테피우스 고원에 위치한, 세계에서 가장 길고 높은 폭포
(낙차 979m), 폭포수가 다른 곳에 부딛치지 않고 자유 낙하하는 높이만도 807m에 달하는 폭포이다.
폭포 아래는 악마의 계곡이 있다.
폭포의 길이가 너무 길기 때문에 폭포수가 악마의 계곡에 이르기 훨씬 전, 물방울들이 고운 안개로
흩어진다.
그러나 이 폭포는 1935년까지 외부 세계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1937년 제임스 지미 크로포드 엔젤이라는 미국의 한 항공 탐험가 및 금광업자가 카라오강을 따라서
금광을 찾아 나섰다가 자신의 비행기인 엔젤호를 타고 비행중 고장으로 인해 약 11일 동안 케레파쿠
파이 폭포 인근에서 사투를 벌이다 구조 되었는데 이때 처음으로 이 폭포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남미의 베네수엘라에는 거대한 메사 고원 지대가 여러 곳 있다.
이 고원 지대들은 가장자리는 깍아지른 낭떠러지지만 전체적으로 평평한 지대를 이루고 있다.
이 고원 지대들은 인적이 없는 깊은 숲 속에 있으므로 배를 타고 4시간 이상 가야한다.
그 중의 하나가'아유안-테퓨'라고 하는 곳인데 '악마의 산'이란 뜻을 지니고 있다.
이 고원 지대는 다른 지대보다 800 m 이상 높다.
열대의 비가 내리면 이 곳 지대에 큰 호수가 생겨 약 900 m 아래의 카라오강 하류로 곧장 폭포를
이루며 낙하한다.
이 폭포가 바로 세계에서 가장 낙차가 큰 천사의 폭포이다.
기아나 고지에서 발원하는 오리노코강(江)의 지류 카로니강이 기아나 고지로부터 1,490m의 높이를
도중에서 막힘없이낙하하여 형성된 폭포이다.
낙차 979m로 세계 최고이며 부수된 폭포를 포함하면 높이 1,000∼1,600m에 이른다.
하부일대가 떨어지는 포말에 의하여 안개가 낌으로써 폭포의 흐름이 장엄하다 하여 ‘천사의 폭포’라
고 명명하였다.
폭포는 미국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2개 또는 63빌딩 3개를 이어 세워도 남을 정도라고 한다.
48위 아부심벨(이집트)
카이로에서 나일강을 따라 남쪽으로 약 890㎞ 가면 아스완이란 도시가 나온다.
예전에는 누비아 광산에서 캐낸 엄청난 금과 아프리카에서 생산된 목재, 동물의 가죽, 상아 등 진귀
한 물품들이 집결되던 곳이었지만 오늘날은 거대한 아스완 댐으로 유명하다.
여기서 차를 타고 나일강 상류를 향해 사막 길을 서너 시간 달리면 아부심벨이 나온다.
누비아 지방의 아부심벨에 있으며 제19왕조의 람세스 2세(재위 BC 1301∼BC 1235)가 천연의 사암층
(沙岩層)을 뚫어서 건립했다.
왕 자신을 위한 대신전과 왕비 네페러타리를 위한 소신전으로 되어 있다.
대신전은 정면 높이 32m, 너비 38m, 안쪽 길이 63m이며 입구에 높이 22m의 람세스 2세의 상(像)
4개가 있다.
제1실에는 람세스 2세를 오시리스 신을 본떠 만든 8체의 상과 6면의 넓은 전쟁화(戰爭畵)와 명문(銘
文)이 있다.
고대 이집트 왕 람세스 2세(BC 1279~1213 재위)가 지은 2개의 신전 유적.
주신전 앞에 있는 4개의 거대한 람세스 좌상은 고대 이집트 미술에서 가장 장대한 작품 가운데 하나
이다.
이 신전은 1960년대의 복잡한 토목공사에 의해 나일 강의 수위가 상승했을 때 수몰 위험을 모면하
고 구제되었다.
이집트 아스완 행정구 코로스코(지금의 쿠루스쿠)의 남쪽, 나일 강 서안의 사암절벽을 깎아 만든 이
신전은 1813년 재발견됨으로써 비로소 외부세계에 알려졌고, 1817년 이집트학 전문가 조반니 바티스
타 벨초니에 의해 처음으로 조사되었다.
20m나 되는 람세스 좌상은 움푹 들어간 절벽을 등지고 있으며 2개는 주신전 입구 양쪽에 하나씩 놓
여 있다.
이 좌상의 발 둘레에는 람세스의 왕비 네페르타리와 자식들을 상징하는 작은 상이 조각되어 있다.
남쪽에 있는 1쌍의 좌상에 새겨진 낙서들은 BC 6세기에 이집트 용병으로 복무하던 그리스인들이 새
긴 것으로 초기 그리스 문자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준다.
이 신전 자체는 태양신인 아몬 레와 레 호라흐테에게 바쳐진 것이며 절벽 안쪽으로 56m를 파서 만
든 3개의 연속된 홀로 이루어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전 내부는 왕의 여러 조상과 함께 왕의 생애와 업적을 보여주는 여러 채색부조로 장식되어 있다.
이 신전은 1년에 어느 특정한 며칠간은 하루의 첫번째 햇살이 신전 전체를 꿰뚫으며 들어와 가장 안
쪽에 있는 성소 제단까지 비치도록 지어졌다.
주신전의 바로 북쪽에 있는 작은 신전은 여신 하토르를 경배하기 위해 왕비인 네페르타리에게 바쳐
진 것이며 10.5m 크기의 왕과 왕비의 조상으로 장식되어 있다.
1960년대초 이 근처의 아스완 하이 댐 건설로 저수지가 생겨 아부 심벨 유적이 수몰당할 위험에 처
하자 유네스코와 이집트 정부가 주관하여 이 유적을 보호할 방법을 찾았다.
1964~1966년에 세계 50여 개국에서 자금을 지원받아 기사·과학자 들로 이루어진 국제적인 팀과 노
동자들이 절벽 꼭대기를 파서 2개의 신전을 완전히 들어내 강바닥에서 60m 높은 지점에 복구해 놓
았다.
람세스 2세는 가장 오랜 기간 동안 이집트를 통치한 파라오다.
신왕국 18왕조 말기의 유약한 투탕카멘(기원전 1340∼1331)이 죽고, 늙은 대신 ‘아이’와 호렘헵 장군
이 짧게 통치하다가 전차 지휘관이었던 람세스 1세가 제19왕조를 연다.
그의 아들 세티 1세(기원전 1294∼1279)가 19왕조의 초석을 다진 후, 이집트의 영광을 크게 떨친 이
가 바로 그의 젊은 아들 람세스 2세(기원전 1279∼1212)로, 약 67년간이나 나라를 다스리며 자신의
흔적을 온 이집트 신전에 남겼다.
그 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곳은 아부심벨 신전이다.
이곳의 황량한 돌산에 람세스 2세가 세운 아부심벨 대신전과 소신전이 있다.
아부심벨 대신전 앞에는 높이가 약 20m인 거대한 람세스 2세의 조각 4개가 있어, 이미 피라미드를
본 사람들도 그 장엄함에 감탄사를 연발한다.
안으로 들어가면 거대한 기둥들과 람세스 2세의 입상 8점이 늘어서 있으며, 벽에는 수많은 부조가
새겨져 있다.
이 부조들은 람세스 2세가 주도한 카데쉬 전투의 승리를 묘사한 것이다.
카데시 전투는 현재 시리아 영토에서 벌어진 이집트와 히타이트 왕국 간의 대규모 전투다. 이집트는
기원전 13세기쯤 아나톨리아 반도의 하투샤(현재 터키 중부의 보아즈칼레)를 중심으로 세력을 떨치
던 히타이트 왕국과 근동 지방을 중간에 두고 다투고 있었는데, 람세스 2세는 기원전 1274년 4월 카
데쉬를 향해 약 50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원정을 떠난다.
람세스 2세는 한 달 뒤 적군의 속임수에 걸려 위기에 처한다.
히타이트군의 공격에 이집트 병사들은 모두 달아나고 홀로 싸운 람세스 2세는 아문신의 도움을 받아
승리했다고 이집트의 기록은 전한다.
그러나 후일 밝혀진 히타이트 측의 기록과 객관적인 정세로 볼 때 람세스 2세는 필사적으로 탈출했
을지언정 승리하지는 못했고, 카데시도 여전히 히타이트 왕국의 땅으로 남아 있었다.
그럼에도 람세스 2세는 룩소르의 카르나크 신전, 아부심벨 신전 등에 자신의 승리를 대대적으로 기
념하는 부조들을 새겨 놓았다.
후대 학자들은 이런 람세스 2세를 자기현시욕이 매우 강하고 진실을 왜곡하면서까지 기록을 이용해
현실을 지배한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다.
시기적으로 보아 람세스 2세 치하에서 모세가 유대인들을 이끌고 대탈출을 한 것으로 보이는데, 약
66년간 고대 이집트를 연구해 온 크리스티안 데로슈 노블쿠르에 의하면, 이집트의 역사 기록에서 그
같은 흔적은 전혀 발견할 수 없다고 한다.
그 시절 많은 유대인들이 왕릉이나 신전을 건설하는 데 동원되었는데, 아마도 이집트인들에게는 사
소한 사건을 나중에 유대인들이 기념비적인 사건으로 탈바꿈시켰다고 그는 추측하기도 한다.
아부심벨 대신전 제일 안쪽의 지성소에는 오른쪽에서부터 떠오르는 태양의 신인 라 하라크티신, 신
격화한 람세스 2세, 테베의 주신이며 땅의 생식 본능을 지배하는 아몬신, 어둠을 솟아나게 하는 프타
신의 좌상이 나란히 서 있다.
동굴 안의 신상들은 매우 정교하게 배치되어 2월 20일쯤에는 동굴 깊숙이 들어온 햇살이 약 20분
동안 오른쪽으로 이동하며 아몬신, 람세스 2세, 라 하라크티신을 차례로 비췄다.
10월 20일쯤에는 반대로 햇살이 가장 오른쪽의 라 하라크티신을 비춘 후 차차 왼쪽으로 옮겨졌는데,
어둠의 신인 프타신 상은 왼쪽 어깨에만 살짝 햇살이 머물다 간다고 한다.
대신전 옆에는 아부심벨 소신전이 있다.
사랑과 음악과 춤의 여신인 하토르 여신(호루스신의 아내)과 람세스 2세의 부인 네페르타리 왕비를
기리는 작은 신전인데, 이 신전들의 원래 위치는 이곳이 아니다.
1950년대 후반, 이집트의 지도자 나세르가 나일강을 막아 아스완에 댐을 건설하려 하자, 아부심벨 신
전이 수몰될 것을 염려한 유네스코의 도움으로 1963년부터 약 10년 동안 해체해 원래 위치보다 약
210m 뒤쪽, 650m 더 높은 지역으로 옮기게 된 것이다.
아스완에서 아부심벨까지는 미니버스를 이용하면 편리하다.
아스완의 숙소에 신청하면 된다. 새벽 4시에 출발해 오전 7시 30분에 도착. 9시까지 구경한 후 돌아
오다 아스완 댐을 구경한다.
대중 버스도 있다는데 매우 불편하고 시간이 걸린다.
아부심벨 마을에도 호텔은 있지만 대개 여행자들은 아스완에서 묵는다.
아스완에는 싼 게스트 하우스부터 고급호텔까지 다양하게 있다.
아부심벨 신전 근처에는 매점이나 식당이 없으므로 각자 빵과 음료수를 준비해 가야 한다
49위 발리(인도네시아)
인도네시아 소(小)순다 열도에 있는 섬과 주.
자바 섬 동쪽 1.6km 지점에 자리잡고 있다.
면적은 5,561㎢, 인구는 약 277만 8천 명(1990)이다.
발리해(海)를 사이에 두고 자바섬의 동부와 대하고 있다.
이슬람화된 인도네시아 중에서 아직도 힌두 문화의 전통을 남기고 있는 섬으로 유명하다.
발리섬은 이미 오래 전부터 관광지로 주목되어 왔으며, 현재도 세계 각국에서 많은 관광객이 찾아든
다.
대부분 지역이 자바 섬 중부산맥의 연장 부분인 산악지대로 이루어져 있으며 최고봉은 해발 3,142m
현지에서 '세계의 배꼽'이라고 표현되기도 하는 이 산은 활화산으로 1963년 3월에 폭발해 1,500명
이상의 사망자와 수천 명의 이재민을 내기도 했다.
남동계절풍이 부는 시기인 5월에서 11월까지가 건기이다.
16세기 자바 섬에서 이슬람교 세력이 힌두교 세력을 제압했을 때 수많은 귀족·성직자·지식인들의 도
피처가 되었던 곳으로 오늘날 소순다 열도에서 유일한 힌두교의 거점이다.
주민들의 생활은 힌두교(특히 시바파), 불교, 말레이 조상숭배, 애니미즘 및 주술 신앙, 관습 등이 혼
합되어 있는 종교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인도만큼 엄격하지는 않지만 카스트 제도가 지금까지 남아 있다.
주민의 9/10가 가장 낮은 계급인 수드라에 속하고 그 상위 계급은 성직자(브라만), 군인과 귀족(크샤
트리아), 상인(바이샤)으로 나누어진다. 북부와 서부에는 이슬람교도와 중국 사람들이 약간 살고 있으
며 그리스도교 신자는 거의 없다.
발리어(語)는 자바 동부의 언어와는 뚜렷이 구별되지만 상류계급이 쓰는 말에는 자바어와 산스크리트
어휘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상가라자와 주도 덴파사르가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며 그밖에도 클룽쿵·기아니아르·쿠타·우부드 등이
주요도시로 꼽힌다.
쿨룽쿵은 목공업과 금은 산업의 중심지로, 기아니아르는 거래가 활발한 시장으로, 쿠타는 관광업의
중심지로 서서히 발전하고 있으며 산기슭의 언덕에 자리잡은 우부드는 유럽과 미국 예술가들의 활동
중심지로서 훌륭한 미술박물관이 들어서 있다.
벼농사를 주로 하며 농부들은 수리조합(水利組合) 조직에 속해 있다.
농가의 평균 농지면적은 1ha이다. 농지면적의 약 1/4가량에 관개가 가능하며 나머지 농지에서는 얌·
카사바·옥수수·코코넛·과일 등의 작물과 기네아 기름야자 및 커피를 재배한다.
관광업과 수공예품 판매가 경제에 중요한 몫을 한다.
덴파사르 근처 중남부 해안에 공항이 있다.
발리 주민들은 음악·시·춤·축제를 즐기며 예술과 공예에 뛰어난 솜씨를 가지고 있다.
여러 가지 타악기, 2개의 현으로 된 바이올린 하나, 플루트 하나로 구성되는 발리 특유의 오케스트라
인 가믈란(gamelan:주로 타악기로 연주하는 인도네시아의 기악합주)이 성행하여 마을마다 가믈란
클럽이 있을 정도이다.
발리 사람들의 예술적 기질은 조각·그림·은세공·목각술·골각술 등에서 뚜렷하게 나타나며 죽은 사람의
시체를 담아 화장터로 운반하는 동물 모양의 목관에서도 엿볼 수 있다.
중국 상인들과 인도 지식인들이 자주 왕래했기 때문에 7세기쯤에는 이미 힌두교가 들어와 있었다.
1019~49년경까지 자바를 다스린 아이르랑가의 어머니 마헨드라다타는 발리 왕 우다야나와 결혼했고
자바의 힌두교도 상당수가 발리 섬으로 이주해왔다.
1284년 싱가사리 왕국시대에 투마펠 왕조의 마지막 왕인 케르타나가라에게 점령되었다가 1292년 그
가 죽은 후 다시 독립했다.
1343년부터는 자바 동부에 근거를 둔 마자파히트 제국의 지배 아래 들어가, 1478년 이 제국이 이슬
람교도들에게 정복될 때까지 통치를 받았다.
1597년 처음 네델란드인들이 들어왔을 때 발리 섬은 수많은 이슬람 국가들로 나누어져 서로 싸우고
있었다.
네덜란드는 1882년 발리 섬 북부에 있는 나라인 불렐렝과 젬브라나를 합병한 후 1894년 근처에 있
는 롬보크 섬을 침략, 발리 왕자 아나크 아궁 크투트를 살해했으며 1906년에는 덴파사르를 침공해
3,600명 가량 되는 발리인들을 학살하고 섬 전체를 점령했다.
1950년 인도네시아 공화국의 영토가 되었다. 면적:주 5,633㎢,
50위 폴리네시아 보라보라섬(프랑스령)
남태평양 중부 폴리네시아 소시에테제도의 프랑스령 섬으로, 타히티섬 북서쪽 약 240 km 떨어진 곳
에 있는 섬,
면적은 약 30㎢, 인구는 약5,300명 정도이다.
길이 10㎞, 너비 4㎞의 산호초로 둘러싸인 화산섬이며 32㎞에 이르는 섬 일주도로가 나 있다.
“투이바호라” 곶을 넘는 부분을 제외하면 평탄한 총 길이 약 29Km인 섬의 둘레는 자동차로 1시간
30분 정도면 일주 할 수 있다
보라보라는 폴리네시아에서도 역사가 가장 오랜 섬이다.
타히티의 섬들은 해저폭발로 3백만년 전 보라보라가 생겼고 그 뒤 다른 섬들이 생겨났다.
보라보라는 원래 '바우아바우'에서 나온 말로 원주민 말로 ‘어둠 속에서 솟아났다’는 뜻이다.
또 ‘마이 테 포라’라고도 하는데 '신께서 만들었다'는 의미라 한다.
보라보라가 서방세계에 알려진 것은 1767년 영국왕립함대 왈리스 함장에 의해서였고, 보라보라에
처음 상륙한 사람은 1768년 제임스 쿡 선장이다.
1842년에 프랑스의 보호국으로 지정되었다.
수온이 따뜻하고 수심이 얕아 휴양지로 개발되어 각종 해양스포츠가 활발하며 관광업이 발달하였다.
폴리네시아의 진주라 불리는 아름다운 곳이다.
바깥쪽 바다는 해저 산맥처럼 이어진 산호띠인 리프(Reef)로 이뤄져 있고 리프가 파도를 막아주는 까
닭에 큰 파도가 없이 바다는 늘 잔잔하다.
수온이 따뜻하고 수심이 얕아 휴양지로 각종 해양스포츠가 활발하며 관광업이 발달하였다.
섬에서 가장 이름난 해안가이며 주요 숙박시설이 몰려 있는 “마티라” 곶 부근은 청록색의 투명한 라
군과 백사장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어, '태평양의 진주'라고 일컬을 정도이다.
산호가루가 부서져 섬이 된 앞바다는 연하디 연한 푸른 빛이고 햇살이 해저 산호가루에 반사돼 물빛
도 눈부시다.
Matira 해변의 희고 고운 모래와 따뜻하고 얕은 물로 이루어진 Bora Bora의 석호(潟湖)는 세계적으로
유명하고, 형형색색의 물고기와 가오리, 청거북등 수중생물들로 가득하다.
항공편은 타히티에서 매일 4~8회 운행하는 에어 타히티의 정기편(ATR-42/46인승, ATR-72/66인승)이
있고, 소요 시간은 직행편이 45분, 모레아· 후아히네 등 이웃섬을 경유하면 1시간 30분 정도 소요된
다.
보라보라의 공항은 특이한 지형에 있는데, 입국하는 관광객은 본섬의 북쪽에 위치한 모투(작은섬)
“무테”에 있는 공항에 도착한 후 에어 타히티에서 운영하는 고속 셔틀 보트를 이용하여 보라보라 본
섬 마을인 “바이타페” 까지 갈 수 있다.
공항에서 선착장까지는 약 20분 소요되며 배에서 내리면 전통 운송수단인 “트럭”이나 미니 버스를
이용해 숙박지로 이동한다.
선박편은 타히티섬에서 고속 페리인 「오노오노 호」와 「라로마타이 페리」와 화물 여객선 「테메하니
2세호」와 「타포로 4세호」가 각각 주 2~3회 운행하고 있으나 섬 주민의 대중 교통수단으로, 체재 일
수가 한정된 관광객들은 사용하기 어렵다.
4월부터 10월은 건기, 12월부터 3월까지가 우기, 평균기온은 섭씨 25.9도. 무역풍 때문에 건기에도
적도상의 다른 섬과 달리 후덥지근하지 않다.
프랑스령인 까닭에 프랑스어가 쓰이지만, 호텔에서는 영어도 통용되고 시차는 한국보다 19시간 빠르
다.
보라보라섬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이라 불리는 또다른 매력은 일출부터 일몰까지 매시간 섬전
체의 색이 태양 고도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기 때문이다.
저녁노을이 질때면 섬전체가 온통 붉은 색으로 물든다.
섬의 중심부에 위치한 3개의 멋진 봉우리(Hue: 619m, Pahia : 661m, Otemanu: 727m)의 정상을 오
를 수 도 있다.
모래사장이 훤히 보일 정도로 투명하거나 원시림 같은 녹색 바다가 이어지고, 다시 연두색으로 변하
기도 한다.
이처럼 바다 빛깔이 다양한 것은 맑은 물 속의 산호 때문이다
|
첫댓글 감사합니다
앞으로 살아 있는 동안 열심히 다녀 볼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