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길 따라 떠나는 남도 섬여행
칠천도, 이수도, 대덕도를 가다
남도 가는 길은 여전히 멀다. 멀고 먼 길을 봄길 따라 남으로 간다. 남녘에는 봄소식이 완연하다고 한다. 통영인뉴스의 김상현 기자는 거제 공곶이의 수선화 개화소식을 수시로 알려준다.
주말을 이용, 1박2일 일정으로 남녘 섬들을 찾아 떠났다. 남부터미널에서 6시 40분 출발, 거의 6시간 가까이 걸려 거제도 장목항에 도착했다. 장목항에는 ‘그리운 바다 성산포’ 시집으로 유명한 이생진 시인 등이 먼저 와 필자 일행을 기다린다. 이생진 시인은 우리나라 섬 1,000개 이상을 섭렵한 한국의 독보적 섬시인이시다. 섬관련 단행본 시집만 30 여 권 내셨고, 이러한 점 때문에 제주도에서는 명예제주도민, 신안군에서는 명예신안군민으로 추대하기도 했다. 제주도 성산포에는 이생진시비공원도 만들어져 있다. 장목항 선창식당에서 참가자미, 키조개무침, 개조개탕 등으로 점심식사. 여행 다닐 때 마다 느끼지만 남도음식들은 참으로 맛깔스럽고 푸짐하다. 식당 앞 위판장에 가득한 개조개 및 키조개들이 여행객들의 호주머니를 유혹한다.
식사 후 제일 먼저 방문한 곳은 칠천도. 이 섬은 연육교로 이어져 있어 이제는 섬이라고 할 수 없지만 임진왜란 당시 우리 수군이 왜군에게 유일하게 패한 한서린 격전지이다. 칠천량 해전은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이 도도 다카토라 등이 지휘하는 일본 수군에 의해 1597년 7월 16일(음력) 새벽 칠천도 앞바다에서 전멸에 가까운 패배를 당한 사건이다. 임진왜란 내내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았던 조선 수군은 이 때 처음으로 충격적인 패배를 겪는다. 이로 인해 임진왜란의 전체적인 흐름이 뒤집어졌으며, 조선 민중은 일본군이 저지르는 학살과 약탈 등 온갖 만행에 무방비로 노출되고 만다.
원균(1540-1597)은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뒤 수군을 이끌고 일본군과 싸우라는 선조의 명을 받게 된다. 원균도 통제사가 되기 전에는 선조에게 장계를 올려 수군이 단독으로 바다에 나아가 일본군을 제압해야 한다고 주장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원균은 통제사가 되고 난 뒤 수군 단독으로 일본군을 제압하는 것이 무리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원균은 조선 육군을 동원하여 앞세우고 수군이 그 뒤를 따라 진격하자는 제안을 한다. 하지만 선조는 원균에게 계속 수군이 단독으로 나아가 싸울 것을 요구한다. 결국 원균은 조선 수군을 이끌고 바다로 나아가 싸우다가 지고 만다. 칠천도에는 칠천량해전공원전시관이 세워져 있어 전시자료와 영상물로 당시의 패전상황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전시관 전망대에 올라 칠천량 바다를 내려다 본다. 참으로 아름다운 섬과 바다. 그런데 이곳에서 그토록 처참한 해전이 있었다니 가슴 아프기 그지없다. 우리 수군들의 울부짖음이 귀에 생생하게 들리는 듯 하다. 바닷길 양쪽 입구가 좁아 이곳에서 수세에 몰리면 빠져나갈 길도 없이 몰살당하기 십상이다. 이순신 장군은 난중일기에서 칠천량 해전에서의 참패소식을 듣고 통곡을 금치못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칠천도를 돌아본 후 우리 일행이 하룻밤을 머물 이수도(利水島)를 향한다. 이수도는 거제도 북동쪽 바다 위에 떠 있는 조그만 섬이다. 김영삼 대통령 생가 및 기록전시관이 가깝고 흥남해수욕장 인근 시방마을에서 배를 탄다.
시방마을 근처에는 또 하나의 볼거리인 ‘매미성(城)’이 있다. 바닷가에 세워진 우람한 성벽. 마치 중세유럽의 어느 고성을 연상시키는 성벽이다. 처음엔 임진왜란 때 왜적을 방어하기 위해 만들어진 성벽이 아닌가 착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다.
장목면 복항마을 해안에 자리한 ‘매미성’이 만들어진 배경은 2003년 거제지역을 할퀴고 간 태풍 ‘매미’다. 이 성을 쌓은 성주(城主)는 백순삼(62)씨. 그는 10여 년째 지금도 주말과 쉬는 날이면 어김없이 장목면 복항마을 해안가를 찾아 홀로 성을 쌓고 있다.
새거제신문 2013년 9월 12일자 기사에 의하면, 백 씨는 처음부터 성을 쌓을 생각은 아니었단다. 자신이 가꾸던 텃밭이 2003년 추석날 불어 닥친 태풍 ‘매미’로 인해 폐허가 된 뒤부터 텃밭을 보호하는 축대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문득 성을 쌓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축성을 시작했고 태풍 ‘매미’로 인해 만들어진 탓에 성 이름도 ‘매미성’이라 붙였다.
누구의 도움도 없이 10여 년 동안 쌓은 성은 높이 8m에 길이는 110m가 넘는다. 50kg이 넘는 화강암을 매주 30개 가까이 쌓아 올려 지금은 1만개가 훨씬 넘는 화강암이 성을 이루고 있다. 지금은 자신만의 노하우가 생겨 축성엔 ‘달인 수준’이 된 백 씨지만 처음에는 주말마다 되풀이 된 힘든 노동에 주말 밤이면 ‘몸살’을 앓는 일이 많았단다.
새거제신문은 백 씨와의 인터뷰 기사에서,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어떻게 이 성을 만들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이게 주어진 사명이나 운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요.” 라고 소개한다. 백 씨는 매미성 축성에 오랜 시간 공들인 만큼 애착이나 소유의식이 강할 법한데, 그렇지도 않단다. 오히려 매미성은 자신의 것이 아닌 매미성을 찾는 사람 모두의 소유물이라는 게 백 씨의 생각이다. 처음엔 밭을 지킬 축대를, 그 다음은 자신이 만족할 만한 어엿한 성을 짓겠다는 그의 생각은 최근 매미성을 찾고 자신을 격려해주는 사람들에게 작은 희망을 줬으면 하는 것으로 진화하고 있다. 특히 아이들이나 젊은이들이 매미성을 통해 동심을 키우거나 목표에 도전하고 희망을 위해 노력이 필요하다는 교훈을 일깨워 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성 쌓기는 자신의 생활 중 자연스런 일부분이고, 마무리 지어야 할 과제일 뿐 더 이상 취미생활이나 특별한 의미로 여겨지지 않기 때문이다. 백 씨가 생각하는 매미성의 완공은 공정률의 개념이 아니다. 어떤 자연재해가 와도 굳건히 버텨내는 매미성이 되는 것이다. 안 무너지게 튼튼하게 짓는 것이 가장 중요한 부분인데 10여 년 동안 매미만큼 강력한 태풍이 없어서 매미성이 잘 지어졌는지 잘 모르겠다는 게 백 씨의 설명이다.
매미성 바로 앞바다에는 이수도가 지척이다. 시방선착장에서 불과 10분 정도면 건너간다. 한 송이 꽃봉오리처럼 아름다운 섬 이수도. 면적 0.384㎢, 해안선 길이 3.7km, 인구는 43세대 78명(2012년 기준)이다.
진해에 살고 있다는 이수도 출신 향우회장 윤찬식 씨가 직접 내려와 친절하게 우리 일행을 안내해 준다. 윤찬식 씨 역시 ‘섬으로’ 카페 회원이다. 윤찬식 씨는 해군에 오랫동안 몸담았던 간부 출신이다.
이수도는 이물도(利勿島) 또는 학섬이라고도 부른다. 멸치잡이 권혁망(權現網)이 들어와 마을이 부유해지자 바닷물이 이롭다 하여 ‘이수도’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섬의 형태가 학을 닮았으며, 구릉이 많고 평지는 1% 정도에 불과하다. 물이 풍부하여 농사를 많이 지었다고 한다.
마을이 이루어진 지역 나머지 해안은 모두 암석해안으로 곳곳에 해식애가 발달되어 있다. 해식애는 큰 파도에 의한 침식작용으로 해안가에 나타나는 급경사의 해안절벽을 말한다. 이곳에서 갯바위 낚시를 많이 한다.
섬 내에서 고려시대 토기편 다수와 신석기 시대 토기편 1점이 발굴되었고, 8.15광복 직전에 앞바다에 가라앉았다는 일본의 보물 수송선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수도에서는 특히 ‘방시만노순석(防矢萬弩循石)’ 전설이 유명하다.
이수도와 마주해 있는 언덕 마을은 시방(矢方) 흔히 살방이라고 부르는 데 마치 활을 쏘는 것 같은 형상을 하고 있다. 이처럼 이수도와 시방은 학과 활의 모양을 하고 있어 풍수지리로 볼 때 서로 겨누고, 막아야만 하는 운명 속에 놓여 있었다고 전한다. 그래서 두 곳을 이야기할 때면 으레 비석에 얽힌 사연부터 등장한다.
이야기는 조선 말엽 쯤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원래 이수도는 주변이 황금어장이고, 물도 풍부하여 시방보다 헐씬 살기좋은 마을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건너마을 시방에 비해 고기도 덜 잡히고 살기가 어려워진 것이다. 여건을 보자면 이수도가 더 잘 살아야 하는데 그렇지못하자 이수도 사람들은 시방을 질시했고 시방보다 잘 살기 위한 대책 마련에 나섰다. 때마침 풍수지리에 능한 도사가 나타나 말하기를 이수도의 학이 시방의 화살에 맞아 죽는 형국이라 방패에 해당하는 비석을 세워 막으면 잘 살 수 있다고 알려주었다. 그 말대로 이수도 사람들은 시방의 화살을 막는 방시순석(防矢循石)을 마을 뒷산에 세웠다. 그러자 정말 이수도는 부자가 되었고 이번에는 시방 마을이 쇠락해져 가는 것이었다. 이에 시방 사람들은 이수도의 비석을 부수려 했으나 이수도 사람들이 시방 사람들을 섬에 얼씬도 못하게 막았다. 그동안 다정하게 지내오던 두 마을은 이때부터 원수지간이 되었다. 고심 끝에 시방에서는 이수도의 비석을 뚫을 수 있는 쇠화살을 쏜다는 뜻의 비석을 세웠다. 이것이 지금도 남아 있는 방시만노석(防矢萬弩石)이다. ‘만노’란 쇠로 된 화살을 말한다. 이렇게 되자 형세는 다시 바뀌었다. 결국 이수도에서는 쇠화살을 막을 수 있는 비석인 방시만노순석(防矢萬弩循石)을 원래의 방시순석 위에 세운 이후, 더 이상 어리석은 싸움을 되풀이하지 않고 두 마을 간에 화해가 이루어졌다고 전해온다. 지금도 이수도 마을에는 방시만노순석이 세워져 있다.
섬에 다녀보면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그 섬 만의 고유한 말씨나 지명이름들을 만날 수 있다. 이수도 역시 마찬가지. 이수도 출신 윤찬식 씨는 '방시순석' 사진과 함께 이수도의 옛이름들을 재정리한 지도를 보여줬다. 도시화와 현대화에 밀려 점점 사라져가는 섬 사람들 만의 토박이 말씨와 이름들. 후손들이 소중히 보존해나가야 할 값진 자료들이다.
민박집에 짐을 풀고 이수도 섬 산책에 나선다. 섬마을답게 골목길이 아기자기하고 이쁘다. 벽 곳곳에는 벽화들이 그려져 있어 운치를 더 한다.
골목길을 따라 좌측으로 조금 가면 이수도분교터를 만난다. 이곳은 과거 총 568명의 졸업생을 배출한 학교였는데 지금은 학생이 없어 어촌체험마을로 이용되고 있다. 자망체험, 문어잡이체험, 선상낚시 등 어업체험을 할 수 있는 다양한 체험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마을에서 유일한 초등학생은 남학생 한 명 뿐인데 매일 배를 타고 시방마을 쪽 학교로 건너다닌다고 한다.
선착장 공터에서는 마을사람들이 그물손질하기에 바쁘다. 주변해역은 대구의 산란해역으로 겨울철 대구잡이와 도다리, 전어, 병어, 오도리, 문어, 장어, 멸치 등 사계절 다양한 어종이 잡힌다. 겨울철 돔낚시로 낚시애호가들의 발길이 끊이지않는 섬이다.
해안길을 돌다 보면 좌측으로 거가대교가 가까이 보이고 그 중간에 대통령 별장인 저도 역시 눈에 들어온다. 다랭이논도 여기저기 눈에 띈다. 섬에 물이 많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논두렁 사이로 물이 솟아내린다. 농사지을 노동력이 부족해서인지 지금은 풀밭으로 방치돼 있다.
능선 위에서 갑자기 수십마리의 사슴 떼들이 달려내려온다. 방사된 사슴들이라고 한다. 목가적인 풍경이다. 해안산책길이 참으로 고즈넉하고 아기자기하다. 마치 바다 위를 걷는 기분이다. 어제의 육지생활이 까마득하다.
선경(仙景)에 들어온 듯 아름다운 바다풍경에 취한다. 탄성이 절로 나온다. 중간에 전망데크도 세 개나 세워져 있어 잠시 쉬면서 경관을 즐기기에도 좋다. 멀리 거제도 대우조선소 건물들도 보인다. 마지막 전망데크에서 우측으로 비탈길을 오르면 섬 최고봉에 이른다. 최고봉이라고 해도 불과 77.8m 높이. 이곳에 오르면 사방이 훤히 트이면서 주변 바다와 섬들이 한 눈에 들어온다. 자리가 좋아서인지 이곳은 마을공동묘지로 조성되어 있다. 최고의 명당터임에 틀림없다. 해변길 및 마을 뒷산 산책로 약 4km 내외 걷는데 천천히 즐기면서 걷다보니 소요시간은 약 1시간 반 정도. 그러나 이런 산책에서는 시간은 별 의미가 없다. 주변 경치에 취하다 보면 몇시간이면 어떠랴. 쉬면서 걷고 걸으면서 즐기면 된다.
저녁식사 후 다시 산책에 나선다. 바다 야경을 보기 위해서다. 이 섬에서는 특히 거가대교 야경이 절경이다. 다리 위 점멸하는 불빛이 아름답기 그지없다. 산책로 전망데크나 뒷산 정상까지 가면 좋지만 어두운 밤길이라 가깝게 마을 뒤 새로 조성된 펜션단지 쪽으로 올라가 본다. 펜션 마당 데크에서 거가대교 야경을 즐긴다.
마을 뒷산은 일출조망의 명소이기도 하다. 다음 날 아침 6시경 일어나 뒷산을 오른다. 오늘 일출시간은 6시 40분 경. 바다 위에서 솟아오르는 해가 장관이다. 떠오르는 해를 가슴에 가득 안고 이수도에서 또 하루를 맞는다.
이수도는 지금 산책로 및 등산로 정비, 해안전망대 설치, 사슴먹이체험장, 마을벽화작업, 해안 낚시터 조성 등 ‘찾아가고싶은 섬 가꾸기 사업’이 한창이다. 행안부의 2013년 테마섬 발굴사업계획에 따라 전국의 19개 시·군·구 186개 도서 중 시·도에서 추천한 9개 섬 중에서 핵심테마의 독창성, 지역경제 파급효과 등을 심사해 총 5개소를 선정했는데 이중 경남에서는 거제시 이수도와 통영시 추도(楸島)가 '찾아가고 싶은 5개 섬' 사업 대상지로 최종 선정됐기 때문이다. 이들 2개섬은 사업기간중 국비 40억 원 등 53억 원의 사업비를 지원받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공사기간은 2017년 4월 10일까지이다.
아침식사 후 이수도를 떠나 수선화꽃밭 및 종려나무숲으로 유명한 거제도 ‘공곶이’로 향한다.
와현리 예구마을 근처 나즈막한 숲, 그리고 시원한 바람이 부는 산책로, 향기로운 꽃길을 지나면서 넓은 바다와 크고 작은 돌이 펼쳐진 해변이 나온다. 탁 트인 바다가 가슴을 시원하게 만든다. 공곶이 혹은 공고지라고 불리는 이곳의 이름에는 두 가지 유래가 있다. 하나는 이곳의 지형이 바다 쪽으로 엉덩이처럼 툭 튀어나와 있다고 하여 그런 지형을 뜻하는 곶(串)자를 붙였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엉덩이처럼 생겼다고 하여 엉덩이 고(尻)자를 붙였다는 것.
공고지는 사유지로서 이곳을 소유한 부부의 정성으로 꾸며진 공원이다. 봄이면 수선화가 만발하고 겨울이면 동백꽃으로 아름답게 물든다. 공곶이에 빼곡히 자라고 있는 종려나무는 이곳의 매력으로 2005년 개봉한 영화 <종려나무숲>의 촬영지가 되기도 했다.
거제타임즈 기사에 의하면, 공곶이를 가꾼 분은 강명식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진주 문산이 고향이다. 1957년 1월 살을 에는 어느 날. 하루 종일 완행버스와 배를 갈아타고 밤늦게 예구마을에 첫 발을 디뎌놓는다. 지금 같이 살고 있는 할머니와 맞선을 보기 위해서다. 색시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한 채 양가의 승낙으로 한 달 만에 결혼식을 올렸다. 오전에 식을 마치고 오후에 산책을 나간 곳이 바로 공곶이. 그러니까 그때로서는 신혼여행이었던 셈이다. 그로부터 12년 후 1969년 4월 다시 거제도를 찾게 되고 공곶이에 정착하게 된다.
결혼 후 힘들게 번 돈으로 전답 7천여 ㎡와 임야 3만여㎡를 사게 된다. 돈을 벌어 농장을 가꿔보겠다는 희망으로 소득이 될 수 있는 작물이 뭔지를 고민하면서 종려나무와 수선화를 심기 시작했다. 종려나무는 꽃꽂이용으로, 수선화는 꽃시장 판매로, 지금의 농장을 만들게 해준 밑거름이 되었다. 현재 농사짓고 잇는 땅은 임야를 제외하고 3만 3천㎡.
동백터널을 이룬 300여 개의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나오는 해변에서는 바로 앞 바다에 내도(內島)가 손에 닿을 듯 가깝게 보인다. 내도는 상록수림과 해안바위가 조화를 이룬 아름다운 섬으로 서이말등대에서 바라보면 거북이가 외도를 향해 떠가는 형상을 하고 있어 거북섬이라고도 한다.
여름철에는 내도가 지척인 공곶이 해변에서 해수욕을 즐기는 사람도 많으며, 예구마을에서 공곶이에 이르는 1,17km, 약 35분 소요의 숲산책로 역시 아름다운 길이다.
이번 1박2일 일정의 마지막 코스는 무인도인 대덕도. 대포항에서 낚싯배로 10여 분 정도 가면 장사도를 지나 대덕도에 이른다. 대덕도는 무인도로 특정 개인의 사유지다. 대덕도에 입도하기 위해서는 섬 소유주로부터 입도 허락을 받아야 한다.
장구 모양의 섬에 도착하면 우측으로 먼저 동굴 모양의 해벽이 보이고, 비탈길을 조금 오르면 섬 중앙에 아담한 관리건물을 만난다. 관리건물 뒤쪽은 까마득한 절벽. 좌측으로 매물도와 소매물도, 갈매기섬 홍도, 중앙에는 자사리도, 국도, 소지도 등도 눈에 들어온다. 또, 뒤로 돌아보면 필자 일행이 들어온 대포항 방향으로 대소병대도, 가왕도도 시야에 잡힌다. 까마득한 절벽 아래 갯바위낚시를 즐기는 낚싯꾼의 모습도 보인다. 참 여유로운 모습이다.
섬 좌우 비탈언덕을 올라가 본다. 섬 모양이 웅장하다. 절벽 중간에 우람한 선돌바위도 보인다. 능선 곳곳에는 동백숲이 늘어서 있고 억새밭도 장관이다. 정상 부근에는 소나무 한 그루 외롭게 서 있다. 아무도 없이 홀로 풍파를 견디며 떠 있는 섬의 현실을 대변하는 듯 하다. 섬 비탈에는 묘지도 눈에 띈다. ‘학생경주이공지묘’라고 쓰여진 비석이 세워져 있다. 이곳에 살다 간 분의 묘지인가? 아뭇튼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다. 통영인뉴스 김상현 기자는 대덕도를 ‘별 기대없이 갔던 섬, 그러나 마음을 빼앗긴 섬’이라고 표현한다. 나도 그렇다.
약 1시간 정도 아름다운 대덕도를 둘러본 후 다시 육지로 돌아가면서 혼자 생각해본다. 섬에 가면 왜 마음이 설레고 그리움이 깊어질까? 이렇게 멀고 먼 고도(孤島)를 왜 그토록 가고싶어하는 것일까? 떠나고 싶어서가 아니라 누군가에게 더욱 가까이 가고 싶어 섬에 가는 건 아닐까?(글,사진/임윤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