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16. 05. 08
■ 우봉 도리촌(牛峰桃李村) 선대묘소 답사 자료 - 귤산 이유원
[1]34世 귤산 이유원「橘山 李裕元 1814년(순조 14) ~ 1888년(고종 25)」 壽 75歲 25世 백사 항복(白沙 恒福)의 九代孫으로 이조판서
(吏曹判書) 동천(桐泉) 계조『啓朝 : 1793년(정조 17) ~ 1856년(철종 7)』의 아들이다.
[2]우봉 도리촌의 지명 변화
◇고려시대 : 우봉현 도리촌(牛峰縣 桃李村)
◇1945년 11월 이전 : 황해도 금천군 소남면 지금리 도리촌(黃海道 金川郡 小南面 知琴里 院村)
◇일명 : 우봉 도리촌(牛峰桃李村)
◇1954년 : 황해북도 장풍군 십탄리(黃海北道 張豐郡 十灘里 院村)
◇1960년 : 개성직할시 장풍군 십탄리(開城直割市 張豐郡 十灘里 院村)
◇1967년 일부지역의 편입 분리에 따라 다시 황해북도 장풍군 십탄리 서원촌(黃海北道 張豐郡 十灘里 書院村)으로 불리어진다.
●17世 익재 이재현(益齋 李齋賢) 선생의 묘소(墓所)와 그의 자제 밀직사「密直使 : 중추원의 從 2품 벼슬』 창로(彰路)의 묘소가 현재 마
을 가운데 있어 자손들이 대대로 지켜 왔다.
1) 16世 동암공 이진(東菴公 李瑱) 묘소(墓所)는 계좌(癸坐).
◇1244년(고종 31) ~ 1321년(충숙왕 8)
2) 17世 익재공(益齋公)의 묘소(墓所)는 자좌(子坐).
◇1287(충렬 13) ~ 1367(공민왕 16)
3) 18世 밀직공 창로(密直公 彰路)의 묘소(墓所)는 계좌(癸坐)
4) 30世 통덕랑 인식(通德郞 寅烒)의 묘소(墓所)는 익재공 묘소 외록(外麓) 건좌(乾坐)로, 만정당(晩靜堂) 서종태「1652년(효종 3) ~
1719년(숙종 45)」선생이 찬(撰)한 묘지명(墓誌銘)과 비석(墓表陰記)이 있음.
◇31世 인천부사(仁川府使) 성곤(成坤 : 통덕랑 인식의 長子).
◇통덕랑 인식(通德郞 寅烒)의 아들. 성곤(成坤)-태곤(泰坤)-원곤(元坤)-진곤(震坤)-춘곤(春坤)-경곤(敬坤)
[3]그 위에 선조의 묘소라고 하는 것이 틀림없다.
1) 족보에 태복야 열헌공 핵(太僕射 悅軒公 翮) 15世
2) 동암공 진(東菴公 瑱-익재공의 父) 16世
3) 송암공 세기(松岩公 世基) 16世
◇長子 : 국당공 천((菊堂公 蒨)
◇次子 : 부정공(副政公 邁)
◇三子 : 상서공 과(尙書公 薖
4) 상서공 과(尙書公 薖 : 송암공의 3男) 17世
[4]관직해설
중추원(中樞院) : 고려 시대에, 왕명의 출납(出納)·군기(軍機)·숙위(宿衛) 따위의 일을 맡아보던 관아. 성종 10년(991년)에 설치한 것
으로, 뒤에 추밀원·밀직사 등으로 여러 차례 고쳤다.
◇태복야(太僕射) : 고려·조선 시대에, 궁중의 수레와 말을 관리하는 일을 맡아보던 관아. 명칭이 사복시(司僕寺)와 번갈아 여러 번 바
뀌었다.
◇검교첨의정승(檢校僉議政丞) : 명예정승직
◇밀직사(密直使) : 고려 시대에, 왕명의 출납(出納)과 궁궐의 경호 및 군사 기밀 따위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아. 충렬왕 1년(1275)
에 추밀원을 고친 것으로, 공민왕 5년(1356)에는 다시 추밀원으로 바꾸었다가 뒤에 또 이이름으로 고쳤다.
◇부정(副正) : 고려 때 종4품 벼슬 : 전의시(典醫寺), 내알시(內謁寺). 전농시(典農寺), 사복시(司僕寺) 등. 司와 寺가 붙는 관청에 소
속 하였다.
[5]나 유원이 익재 묘소를 성묘하고 두루 두루 여러 선대의 묘소를 찾아보았더니, 익재 묘소위에 무덤이 둘있고, 밀직사(密直使) 묘소위에
또 큰 무덤이 둘 있었다.
【6】무진(戊辰) 1868년 봄. 우봉 도리촌 선영 묘단 비 건립(牛峰桃李村先塋墓壇碑建立)에 함께 도모한 사람.
◇국당공파(菊堂公波) : 판서 이현직(判書 李顯稷), 승지 이학영(承旨 李鶴榮), 부총관 이용상(副總管 李容象),
◇상서공파(尙書公派) : 좌의정 이유원(左議政 李裕元), 참판 이유응(參判 李裕應), 응교 이유승(應敎 李裕承), 이상 6명이 감독 하
였고...
◇익재공파(益齋公派) : 익재(益齋) 후손 정언 이용우(正言 李龍雨)는 맏파로서 실상 주관 하였다.
무진(戊辰) 1868년 봄 후손(後孫) 유원(裕元)이 묘단 비(墓壇碑)에 기록하였다.
[7]뒤이어 족질(族姪) 이민영(李民榮)으로 하여금 다시 파서 징험하여 보았더니, 밀직공(密直公) 묘소위의 첫 분묘(墳墓 : 무덤)에 다만,
유기(鍮器 : 놋쇠) 수저하나와 쇠못 4개가 나왔는데, 너덧 댓 치 되었다.
◇훗날 밝혀진 내용으로는 동암공 산소임. 제일 위의 분묘에는 석곽(石槨: 돌로 만든 곽) 앞에 조그만 한 돌이 하나 서있었는데, 길이가
몇 자 되었다. 또 석곽 위에는 큰 돌을 세 개 얹어 놓았는데, 천판(天板) 같았다.
밑에 돌이 이지러진 데가 있어서 십여 명이 조금열고 살펴보았더니, 황토(黃土)만 가득 차있고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곧 개봉하여 전과 같이 하여 가토(加土) 하고 나무뿌리와 풀 덩 쿨을 제거한 후, 익재공 묘직(墓直)에게 수호하였다.
고려 때는 관에다 쇠못을 사용하고 밥 수저를 넣어주었다. 예장에는 석곽을 사용 하였고 한 반석(限半石 : 대문 역활을하는 조그만 돌)
을 넣었다. 따라서 밀직공 위의 첫 무덤은 예장(禮葬)인 것을 가히 알 수 있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