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디사커]한국축구도 '반갑다, 여자감독'
기사입력 2008-04-22 15:25 |최종수정2008-04-22 15:35
한국 축구사상 첫 실업팀 여성감독인 상무 이미연 감독. |
지난해 중국 여자월드컵 결승전이 떠오른다. 독일을 우승으로 이끌고 선수들에 둘러싸여 우승컵을 들어올린 이는 금발의 40대 여성 실비아 나이트(44) 감독이었다. 4년 전 19세 이하 여자청소년월드컵을 우승으로 이끈 뒤 이듬해부터 성인대표팀 지휘봉을 잡았고, 2007 여자월드컵에서 독일 여자 전차군단을 정상으로 이끈 그는 2008 베이징올림픽에서 자신의 세 번째 세계제패를 노리는 국제축구계의 '여자 명장'이다.
한국 축구계에서 '여자가 무슨 축구를 하냐'는 편견은 이제 어느 정도 없어진 것 같다. 그렇다면 이제는 '여자가 어떻게 축구 감독을 하겠느냐'에 대한 편견과 대면할 때가 아닐까. 현역에서 은퇴한 국내 여자축구선수들이 대학, 실업팀에서 여자팀 코치로 변신하는 일은 어느덧 익숙한 일이 됐지만, 아직 여성 지도자들은 남자 감독을 보좌하면서 선수들을 다독이는 '살림꾼' 역할의 지도자에 머물러왔던 게 현실이기 때문이다.
◇국내 실업팀 첫 '여자 감독'탄생
최근 국내에서도 사상 첫 여성 실업팀 감독이 탄생했다. 부산 상무 여자축구단의 이미연(33) 감독이다. 국내 여자축구 6개 실업팀, 6개 대학팀을 통틀어 여성 사령탑은 처음이다. 창단 첫해인 지난해 코치였던 이 감독은 지난 3월 30일 감독으로 정식 선임됐다. 남자축구 광주 상무 2군 감독과 여자 축구단 창단 사령탑을 겸직하던 이수철 감독으로부터 비로소 '지휘봉'을 넘겨받았다.
가장 보수적이라는 '군(軍)'이 이번에는 국내축구계에서 유례가 없던 개혁의 첫 발을 내디딘 셈이 됐다. 국군체육부대 이영찬 공보실장은 "팀이 어느 정도 자리잡을 때까지는 이수철 감독이 맡을 예정이었는데 이미연 감독이 한 시즌 코치로서 보여준 지도력은 충분한 믿음과 신뢰감이 갔다. 그래서 전임감독 선임 시기가 앞당겨졌다"고 말했다.
◇여자 코치는 선수관리만 한다?
국가대표 출신 이 감독은 지도자 8년차로 탄탄한 지도 경력을 자랑한다. 고교(인천 디자인고), 실업팀(대교), 대학(울산과학대)에서 두루 지도자 수업을 쌓았다. 특히 2004~2007년 울산과학대 코치 시절에는 뇌졸중으로 쓰러진 김수길 감독 대신 1년 넘게 사실상 감독 역할을 하면서 보좌역 아닌 '사령탑'을 간접 경험을 했다.
이 감독은 2005년 아시아축구연맹(AFC) A급 지도자 자격증도 따낸 '학구파'인 동시에 2003년 미국여자월드컵 때는 KBS방송해설위원도 맡는 등 다방면에서 활동했다.
그는 "그동안 여자 코치들에게는 감독을 보좌하는 역할만 주어지다보니 막상 기회가 주어졌을 때는 당황하고 버겁더라"면서 "대학 코치 시절 감독님 대신 1년 동안 벤치에 앉고 훈련을 이끌면서 나도 시행착오가 많았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이제는 여성 지도자들도 스스로 확실한 리더십을 준비할 때다. 한달 전만해도 여자가 성인팀 감독이 된다는 것이 아직은 때이른, 무리한 상상이었지만 분위기는 서서히 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스포츠 성폭력? 여성 지도자 필요성 높아졌다.
두 가지 문맥에서 분위기가 달라지고 있다. 첫 째는 정부가 앞장선 여성인력 고용확대 정책이고, 두 번째는 최근 논란이 불거진 스포츠 성폭력 문제다.
이영찬 실장은 이번에 최초로 여성 감독을 선임한 것을 다시 한번 옹호하면서 "변화가 요구되는 시점과 딱 맞았다. 여성인력 확대 측면에서 보건복지가족부와 국방부 병영문화정책팀에서도 호응을 얻고 있다"라고 말했다. 최근 불거진 성폭력 문제도 여성 지도자의 필요성을 다시 한번 강조하게 한다. 과거 한 여자축구 실업팀에서는 창단 감독이 선수를 성폭력하고, 바통을 이어받은 후임 감독도 다시 선수를 성추행해 불명예스럽게 물러난 적도 있다. 농구와 축구같은 종목에서 과거 남성 지도자들로 인한 성폭력 사례가 결코 적지 않은 것을 볼 때 여성 지도자들에게 기회의 문이 열려 있어야 한다는 논리가 충분히 설득력을 얻고 있다.
물론 여성 지도자들에게도 감독이라는 직책에 걸맞는 리더십과 전술적 역량이 필요하다. 국내에서 AFC A급 지도자 자격증을 가진 여성 지도자는 아직 4명이다. 이미연 감독 외에 이미애(35) 전 충남일화 코치, 윤수진(32) 대표팀 코치 겸 영진전문대 코치, 황인선(32) 서울시청 코치가 그들이다. 자격을 갖추고, 남들보다 먼저 지도자 수업을 충실하게 받은 이들의 향후 활약이 기대된다.
◇이미연 감독의 새로운 도전
'최초' 수식어를 달고 감독으로서 3주를 보냈다. 하루 하루가 여러가지 의욕과 책임감으로 가득 차 정신없이 흘러가다보니 성남의 국군체육부대 훈련장에서 만난 그는 왼쪽 눈이 붉게 충혈돼 있었다. 일단 다음달 네덜란드에서 열리는 세계군인체육대회(5월 25~6월 19일) 준비에 여념이 없다. 그는 "상무가 장점이 많다. 이 대회는 매년 열리는 종목별 세계대회인데 나도 그렇고, 선수들도 그렇고, 매년 국제경험을 쌓을 수 있다는 것에 고무돼 있다. 자기 개발과 노력에 큰 동기부여가 된다"고 말했다.
올해는 네덜란드에서, 내년에는 미국에서 대회가 열린다. 국군체육부대는 "요즘 스포츠를 통한 국방외교가 점점 더 큰 역할을 하고 있다. 맨처음엔 상무가 여자축구팀을 떠안는 분위기였지만 세계선수권대회 출전을 통해 여자축구팀이 국방외교에도 기여해줄 수 있을 것"이라면서 알뜰살뜰 지원하고 있다.
이 감독은 새로 지휘봉을 잡은 만큼 자신만의 축구색깔을 만들어가고자 하는 욕심도 많다. 4-4-2포메이션과 4-3-3포메이션을 병행하면서 빠르고 공격적인 축구를 하고 싶다고 한다. 특히 올시즌에는 대학랭킹 1순위로 꼽히던 공격수 이예은을 비롯해 최선진 등 공격수들이 보강돼 팀의 공격전술 구상에 대한 생각이 많다. 개인능력보다는 패스 위주의 팀 플레이, 섬세함이 있는 축구를 선보이고 싶다는 그다.
하지만 무엇보다 남자 지도자가 하지 못한, 여성 지도자이기에 가능한 장점을 최대한 살릴 생각이다. 이 감독은 "여자선수들은 작은 부분인 것 같지만 그 선수 마음을 이해해줬을 때 의욕이나 능력을 100% 발휘하는 그런 예민함이 있다"라면서 "운동장에서는 빠르고 공격적인 축구를 주문하지만 생활의 고민 같은 것을 헤아려주고, 섬세한 배려도 하면서 여자축구의 새로운 리더십을 만들어보고 싶다"고 말했다.
정가연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