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 평화를 빕니다.
오늘은 연중시기의 마지막 주일인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왕 대축일입니다.
이 축일의 핵심 단어인 ‘온 누리’와 ‘왕’에 대해서
함께 묵상해보고자 합니다.
먼저 온 누리(The Universe)란?
말 그대로 내가 살고 있는 나라에 한정되지 않고
전 세계로 확장되고, 더 나아가 우주를 포함하여
심지어 시공간을 뛰어넘어 천상으로 까지 확장되는 개념입니다.
온 누리를 다스리시는 예수님이시기에
우리 모두는 지상과 천상의 시민권을 가진 이중국적자입니다.
땅을 밟고 살아가면서도 하늘나라를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은
신자들에게 주어진 크나큰 은총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오늘날 우리는 어디서든 인터넷이 연결되는
유비쿼터스(Ubiquitas)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물론 일부 사각지대도 존재했지만,
이제는 인공위성을 통해서 지구촌 대부분의 지역이
인터넷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즉, 어디에 있든지 누구와든 소통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편리한 인터넷이 나오기 훨씬 전에도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하느님과의 소통이 가능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무소부재(無所不在)하시기 때문이지요.
즉, 하느님께서는 아니 계신 곳이 없습니다.
사실, 유비쿼터스(Ubiquitas)라는 라틴어는
하느님의 무소부재를 의미하는 종교적 단어였지만,
현대에 와서는 언제 어디서나 편리하게
네트워크와 연결된다는 과학적 의미로 변용되어 사용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늘 인터넷과 강력하게 연결되어 있기를 바라듯이
온 누리에 계신 하느님과 연결된
우리의 신앙 시그널의 세기는 얼마나 될까요?
모바일 화면에 나오는 안테나의 크기가
인터넷과 내가 연결되어 있는 정도를 나타낸다면,
하느님과 연결되어 있는 정도를 신앙의 감각(Sensus Fidei)이라고 말 수 있습니다.
신앙의 감각은 태초부터 모든 인간 안에 내제되어 있는
능력이기는 하지만,
일상의 아주 사소한 행위를 통해서도
점차 계발시켜 나갈 수 있습니다.
몇 주전, 사제 연피정에서
스위스 출신이신 폴 힌더 주교님께서
당신의 유년시절의 기억을 나누어 주셨는데요.
어릴 적에 어머니가 빵을 굽기 위해 반죽을 만든 후,
마지막엔 항상 반죽에 칼로 십자가를 그어
빵을 굽곤 하셨다고 합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우크라이나 신부님께서도
자신의 고향에서도 여전히 똑같은 방식으로 빵을 굽는다고
저에게 귓속말로 속삭이시더군요.
한국 수도원에도 주방담당 수사가
밥이 다 되면, 밥을 뒤섞기 전에 먼저
밥주걱으로 먼저 십자가를 긋곤 했습니다.
이처럼 일상 안에서 일어나는 이 자그마한 신앙의 행위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를 강력하게 연결시켜 주곤 합니다.
신앙의 감각과 더불어 신앙의 언어도 중요합니다.
어떤 교우들은 영어를 잘 못 알아 듣더라도
영어미사에 가는 것을 주저하지 않습니다.
분명 언어장벽이 있기는 하지만,
신앙인은 전례 안에서
인간의 언어를 통해서만 이해하지 않고
성령의 언어로 알아듣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로마 가톨릭 전례는 온 누리 안에서 일치되어 있기에
어떤 언어의 미사든지 한국어 매일미사 앱만 있으면
알아듣는데 큰 지장이 없습니다.
다른 나라에게 가든
하늘 나라에 가든
가톨릭 전례는 온 누리에서 모두 같습니다.
때문에, 한국말이 아니면 신앙생활을 하기 어렵다고 말하는
그럴듯한 주장은 성령 안에서 공허한 외침이 되어
사라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무엇보다 먼저 하느님과 연결되어 있는
내 신앙의 안테나 세기가 얼마나 되는지를
체크해봐야 하겠습니다.
따라서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자그마한 신심 가진다면
우리의 신앙의 수준을 크게 향상시켜 줄 것입니다.
우리가 어디에 살든지, 무엇을 하든지,
어떠한 언어를 사용하든지,
하느님께서는 어디에나 계시다는 믿음은
천주교의 4대 교리 중 하나인
천주존재(天主存在)를 믿는 것과 같습니다.
이 축일의 또 하나의 중요한 메시지는
‘왕’이라는 단어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기존의 권력과 지배를 상징하는 왕이라는 개념은
예수님의 등장으로 인하여 완전히 해체됩니다.
엄밀히 말하면,
해체라기 보다는 원래의 정신으로 회복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즉, 근본적으로 왕의 직분은
오로지 백성들을 위한 봉사의 직분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봉사 외의 다른 것들은 모두 부차적일 것입니다.
이 역시 천주교의 4대 교리 중 하나인
강생구속(降生救贖)에 해당합니다.
인간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 백성을 어떻게 섬기셨는지를 회상해 봅시다.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로 오신 예수님은
지도자로써 참되고 완전한 모델을 제시해 줍니다.
마치 전장에서 장군이 선봉에 서야 하듯이
사랑에 있어서도 예수님께서 선봉을 서신 것이지요.
오늘날의 수많은 거짓 지도자들이 전쟁을 시작하고
무고한 청년들이 피를 흘리게 만드는 엉터리 통치가 아니라
평화의 깃발을 들고 선봉에 서시는 예수님께서 진정한
하느님 나라의 통치권을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세상을 편협한 자기의 기준과
자기 중심으로 갈라치기 하는 이들은 거짓된 지도자들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지도자들을 충분하게 많이 보아왔습니다.
그들의 말로는 최후의 심판 때 가려질 것임이 분명합니다.
오늘 복음은 바로 그 최후의 법정이 열리는 곳으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그날,
예수님께서 왕좌에 좌정하시고,
목자가 양떼와 염소떼를 둘로 가르듯
의인과 죄인이 가려집니다.
이 심판의 기준은 모두가 잘 알고 있듯이
남들이 보기에 얼마나 성공적인 삶을 살았느냐?
얼마나 많은 권력을 행사했느냐?
얼마나 즐기며 살았느냐?
또는 얼마나 많은 재산을 모았느냐?가 아닙니다.
하늘나라의 기준은
굶주린 이들, 목마른 이들, 집없는 이들, 헐벗은 이들,
병든이들 그리고 갇혀 사는 이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돌보아 왔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이 대목에서
예수님의 독특한 자기인식도 함께 드러납니다.
예수님 자신이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이들과
자신을 동일한 존재로 표현하십니다.
저 역시 그동안 외면한 수많은 이들과
그 수 많았던 순간에
바로 내가 예수님을 외면하고 있었던 것에 화들짝 놀났습니다.
내가 속단하는 것과 같이 심판의 기준이
선행을 더 많이 했느냐,
악행을 더 많이 했느냐의
단순한 대조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놀랍게도 하느님과 이웃에 관심을 가지고 살았느냐?
무관심하게 방관하며 살았느냐?가 그 기준이 되고 있습니다.
사랑의 반대말은 무관심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무관심은 애정이 없고 냉담한 상태입니다.
물론, 심리적으로 의도적인 무관심이나
자기보호 본능으로써의 일시적인 무관심도 있습니다.
그 보다 더 위험하고 경계해야할 무관심은
자기중심적 세계관(Self-centered universe)에 갇혀있는 무관심입니다.
근본적으로 자기 자신과 타인을 구분하지 못하기에
모든 것을 자기화하곤 합니다.
예를들면,
내가 배부를 땐, 배고픈 이들의 굶주림을 알지 못합니다.
내가 편안할 땐, 고된 일을 하는 이들의 고통을 알지 못합니다.
모두가 나와 같은 줄로 착각하게 되어
타인의 고통을 공감을 하지 못합니다.
단식을 왜 해야하는지?
절제를 왜 해야하는지?
기도는 왜 해야하는지?
아직 모르고 있다면 내가 바로 그러한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은 아닌지 점검해 봐야 할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만 사랑하게 됩니다.
이것은 욕구에만 점철된 동물적인 사랑과 거의 비슷합니다.
결국, 최후의 심판의 결과는
인간적인 것과 동물적인 것이 분리될 것입니다.
여기서 인간적이라는 의미는
하느님의 모상(Imago Dei)에 따라 창조된
참된 인간성의 본질을 일컫고,
동물적이라는 의미는
인간 본연의 모습을 점차 상실해가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창세기의 카인처럼 말입니다(창 4:1-16).
결국, 하느님을 잊고 살아갈 때, 인간성도 잃게됩니다.
그러므로 참된 인간적 본성을 되찾기 위해서
언제나 어디에 있든 무소부재하시는
하느님을 늘 인식하며 그분의 통치 안에서 살아가도록
기도와 절제와 자선을 꾸준히 실천해 나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