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양남씨 世譜 先系古蹟(두채家)을 구글링한 텍스트 전문 : 남씨들은 필독을 바랍니다.
[문제점]
1. 시조 영의공 이하의 생몰년이, +120년을 더하여야 세대간 년차의 적용에 무리가 없다.
2. 단) 시조공과 2세간의 년차가 11년이라? 의문이 든다는 점???. (아들이 10세에 태어남)
3. 시조부터 20세 유손공까지 +120년을 더하여야 한다는 점.
4. 한때 논란이 되었던 시조공이 당대에, 신라국 표착설의 진실을 두고, 공방전이 재연될 수 있다.
5. 20세 유손공에 +120년을 더하여야, 21세 휘주공과의 년차에 무리가 없다는 점.
6. 고적보에는 직계만 기록하였고, 방계는 각각의 세대에 아들들만 기록한 점.
7. 당시의 방계의 자손들은 모두 직계에 흡수되었다는 말인가? 의문???.
8. 고적보에 의하면 1460~년대(을유년) 이후에 기록된것으로 보이며, 많은 문제점들이 보인다.
9. 관조이하 세대에 누락 세대(년차)가 보인다는 점.
10. 관조중에 영양 홍보공과 고성 광보공의 기록이 간략하다는 점 (삼관의 분관에 관한 기록).
각각의 관조분들의 기록을 종합하면, 관조분들의 세대(世代)가 16世(고적보)가 아니라는 점이 명확하다.
(고로 의령관 계유보(1693년) 이후에 작성한 고적보로 추정된다는 점).
11. 삼관이 논의를 하여 합리적인, 수긍(首肯)할 수 있는 답을 구할 수 있을 지, 염려와 기대가 됩니다.
12. 7世(之道)의 子에 1子 대수(大壽)가 있으나, 추가 언급이 없다.
선계고적 언해 (先系古蹟 諺解) 斗彩家(두채가) 世系牒(세계첩)
始祖:諱 南敏 英毅公 (시조:휘 남민 영의공) (712년~782년) +120(832~902)
字汝精 姓南氏 本姓金氏 諱忠 字士誠 皇唐鳳陽府汝南人也 仕於唐玄宗朝
자여정 성남씨 본성김씨 휘충 자사성 황당봉양부여남인야 사어당현종조
官至荊州刺史 唐明皇帝以公碩德重望 使於日本 將遠至海島中
관지형주자사 당명황제이공석덕중망 사어일본 장원지해도중
遇疾風標泊 至有鄰地 以漂泊事聞新羅景德王 王以其事聞干天子 天子詔曰
우질풍표박 지유린지 이표박사문신라경덕왕 왕이기사문간천자 천자조왈
十生九死之臣 不可以臣禮招之 從其所願使處之 景德王以此詔問干公
십생구사지신 불가이신예초지 종기소원사처지 경덕왕이차조문간공
公掩涕曰 普天之下 莫非王土 願居之 王哀其漂泊之狀 對英毅公而因卜居英陽縣
공엄체왈 보천지하 막비왕토 원거지 왕애기표박지장 대영의공이이복거영양현
王召公語之曰 君旣爲子之臣 宜可賜姓 君自南來 宜以南字爲姓 又觀君之儀
왕소공어지왈 군기위자지신 의가사성 군자남래 의이남자위성 우관군지의
聽君之言 敏捷和容 皆可爲法 可以敏字爲名 因改姓曰南 名曰敏 字曰汝精
청군지언 민첩화용 개가위법 가이민자위명 인개성왈남 명왈민 자왈여정
因以英陽爲貫 英陽南氏之南 自此始 此以上皆金氏也 蓋公之以按廉使
인이영양위관 영양남씨지남 자차시 차이상개김씨야 개공지이안렴사
使於日本之時 乃唐明皇天寶十四載也
사어일본지시 내당명황천보14재야.
O公生於唐睿宗太極元年 壬子十月一日 卒干唐德宗建中四年 壬戌九月九日 享年七十一.
공생어당예종태극원년 임자10월1일 졸우당덕종건중4년 임술9월9일 향년71세.
墓在有隣地日月山 南麓子坐之原.
묘재유린지일월산 남록자좌지원.
公生而異人 能知天地日月曰 天尊地卑 日往月來云云
공생이이인 능지천지일월왈 천존지비 일왕월래운운
兩耳三寸餘 雙眼皆重瞳 鬕 業鬕綠美 鬕幾至八九寸 長身八九尺
양이3촌여 쌍안개중동 마 업마록미 마기지8~9촌 장신8~9척.
在唐之時 與 郭子儀.顔杲卿.相為金蘭之交 在羅之時 與 徐文彦.蔡益吉.相好
재당지시 여 곽자의.안고경.상위금난지교 재라지시 여 서문언.채익길.상호
聞顔杲卿.之死於綠山之亂 為之艳涕作文 向唐而祭
문안고경.지사어록산지난 위지염체작문 향당이재
O配唐相國張九齡女 生於唐中宗景龍三年戊申十月二十一
배당상국장구령여 생어당중종경룡3년무신10월21일
卒於玄宗天寶十年 辛卯正月十七日 享年四十四 生一子 倜.
졸어현종천보10년 신묘정월17일 향년44세 생일자 척
O後配新羅軍尹金遠女 生三女皆早歿
후배신라군윤김원여 생3녀개조몰
[시조 휘 민 1세 : 712~782] +120(832~902)
자는 여정(汝情)이다. 성은 남씨인데 본래의 성은 김씨(金氏)이고 이름은 충(忠)이며
자는 사성(士誠)이었다.
당나라 봉양부 여남(汝南) 사람이다. 당나라 현종 때 벼슬하여 형주자사에 이르렀다.
당 명황제(현종)가 공이 석덕과 중망을 갖추었다고 하여 일본에 사신으로 보냈는데,
귀국할 때 바다 가운데 섬에 이르렀다가 태풍을 만나 표류하다
유린(有隣, 지금의 寧海) 땅에 닿았다. 이 일이 신라 경덕왕에게 보고되니,
경덕왕이 이 사실을 천자에게 알렸다. 천자가 조서를 내려 죽을 고비를 넘기고 겨우 살아난 신하를, 신하의 예로 불러올 수는 없으니 그가 원하는 대로 살게 하라." 하였다.
경덕왕이 이 조서에 따라 공에게 물으니, 공이 울면서 "온 천하가 왕의 땅이 아닌 곳이 없으며 온 천하에 왕의 신하가 아닌 자가 없다." 하고서 신라에 살기를 원하자.
경덕왕이 그가 표류하다가 정박한 정상을 슬피 여겨,
영의공에 봉하고서 인하여 영양현에 정착해 살게 하였다.
경덕왕이 공을 불러 '그대는 이미 나의 신하이니 성씨를 내리는 것이 마땅하다. 또
그대가 남쪽에서 왔으므로 '남(南)'자로 성을 내림이 마땅하다. 또
그대의 거동을 보고 그대의 말을 듣자니 민첩(敏捷)하고 화용(和容)하여 모두 본보기로 삼을 만한 바, '민(敏)'자로 이름을 삼는 것이 좋겠다.” 하고서 성을 '남'으로 바꾸고 이름을 '민'이라 하였고, 인하여 영양을 관향으로 삼았으니, 영양남씨의 '南'이 이로부터 시작되었고,
이(南敏) 이상은 모두 김씨이다.
공이 안렴사로 일본에 사신으로 갔을 때는 당명황제 천보 14년(755)이다.
○공은 당 예종 태극 원년 임자(712년) 10월 1일에 태어나
당 덕종 건중 4년 임술(782) 9월 9일에 돌아가시니 향년 71세이다.
묘는 유린 땅 일월산 남쪽 자좌 언덕에 있다.
공은 나면서부터 남들보다 뛰어나서 천지와 일월을 알아 하늘은 높고 땅이 낮으며 해가 가면 달이 온다..."라고 하였다. 양쪽 귀가 3치 남짓이고, 양눈에 모두 눈동자가 두개씩이었으며,
살색이 붉고 구레나룻이 푸르고 아름다우며 수염이 거의 8~9치였고 신장이 8~9자였다.
당나라에 있을 때는 곽자의·안고경(당 현 종 때 충신)과 교분이 두터웠고, 신라에 있을 때는 서문언· 채익길과
가까이 교유하였다. 안고경이 안녹산의 난에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그를 위한 글을 지어 당나라를 향해 제사지냈다.
○배위는 당나라 상국 장구령(張九齡)의 따님으로, 당 중종 경룡 3년 무신(709년) 10월 20일에 태어나
현종 천보 10년 신묘(751년) 정월 17일에 돌아가시니 향년 44세이다. 아들은 척(倜)이다.
○후배위는 신라 군윤(軍尹) 김원 (金源)의 따님으로 딸 셋을 두었는데 모두 일찍 죽었다.
2세 : 子 척(倜) (723~795) +120(843~915)
字正夫 在唐爲紫微令同平章事 在新羅景德王朝 爲門下侍中兼尙書右僕射
자정부 재당위자미령동평장사 재신라경덕왕조 위문하시중겸상서우복야
生於唐玄宗開元十一年 癸亥正月十六 卒於唐德宗貞元十年 甲戌五月十八 享年七十二
생어당현종개원11년 계해정월16일 졸어당덕종정원10년 갑술5월18일 향년72세
公文翰如流 風彩動人 有王考之風 人以爲公家必生公 卿家必生卿 平生篤行孝敬
공문한여류 풍채동인 유왕고지풍 인이위공가필생공 경가필생경 평생독행효경
每過鯉庭 輒拱手鞠躬冀如而超 雖急遂之間 不發敬客 而室如對 文人高老
매과리정 첩공수국궁기여이초 수급수지간 불발경객 이실여대 문인고노
溫客申申 未甞有一言之先發 而惟對文老之所言而己 平居暇日 不發講學
온객신신 미상유일언지선발 이유대문노지소언이기 평거가일 불발강학
O配阿干李日躋女 生四子 世俊. 世英. 世豪. 世傑. 皆顯於世 生於玄宗開元十二年 甲子二月七日
배가간이일제여 생4자 세준. 세영. 세호. 세걸. 개현어세 생어현종개원12년 갑자2월7일
卒干德宗興元二年 甲子二月八日 享年六十一. ( 此以上 司馬公所記)
졸우덕종흥원2년 갑자2월8일 향년61세. (차이상 사마공소기) (3세).
[자 척 2세]
자는 정부(正夫)이다. 당나라에 있을 때 자미령 동평장사를 지냈고 신라 경덕왕 때 문하시중 겸 상서우복야였다. 당나라 현종 개원 11년 계해(723년) 정월 16일에 태어나 당 덕종 정원 10년 갑술(794년) 5월 18일에 돌아가시니 향년 72세이다.
공은 문장이 뛰어나고 풍채가 사람을 감동시켜 왕고의 풍모가 있었으니, 사람들이 "공(公)의 집에 반드시 공이 나고, 경(卿)의 집에 반드시 경이 난다.” 하였다. 평생 행실이 돈독하고 효도하고 공정하였으며, 집의 뜰을 지날 때마다 항상 공수하고 몸을 숙여 새가 날개를 편 듯이 종종걸음으로 지나서 아무리 급박한 때라도 공경스러운 용모를 폐하지 않았다. 어른과 노인을 대할 적에는 온화한 모습으로 낯빛을 폈고 한마디도 먼저 발언한 적이 없었고, 오직 장로들의 말에 대답할 적에만 말을 꺼냈다. 평상시에 틈이 나는 날에는 강학을 폐하지 않았다.
○배위는 아간 이일제(李日躋)의 따님이다.
네 아들 세준 (世俊), 세영(世英), 세호(世豪), 세걸(世傑)을 낳았는데, 모두 세상에 이름을 날렸다.
현 종 개원 12년 갑자(724년) 2월 7일에 태어나
덕종 흥원 2년 갑자(784년) 2월 8일에 돌아가시니 향년 61세이다.
(이상은 사마공이 기록한 바이다.)
3세 : 子 세준(世俊) (759~804) +120(879~924)
字元雄 官至新羅司空司馬阿干等職 生於唐肅宗乾元二年 乙亥三月三十日
자원웅 관지신라사공사마아간등직 생어당숙종건원2년 을해3월30일
卒於德宗貞元二年 甲申十月八日 享年四十六 墓在英陽縣西五里許
졸어덕종정원2년 갑신10월8일 향년46세 묘재영양현서오리허
公性仁贊茶自少時至白首永歸之日 不廢書史之譲謴 老而益篤
공성인찬차자소시지백수영귀지일 불폐서사지양곤 노이익독
公甞寓巳作時曰, 世上奇男子 因書成大才 悠悠千古聖
공상우사작시왈, 세상기남자 인서성대재 유유천고성
獨截胸中肺 邈邈大宇宙 列視眼欲開 敬身受人責 孰能毁吾巳
독절흉중폐 막막대우주 열시안욕개 경신수인책 숙능훼오사
O密直副使金萬都女 生於唐代宗廣德二年 甲辰正月二十一日
밀직부사김만도녀 생어당대종광덕2년 갑진정월21일
卒干憲宗元和九年 甲午三月二日 享年五十一 生二子 允哲. 仲哲早卒
졸우헌종원화9년 갑오3월2일 향년51세 생2자 윤철. 중철조졸
[자 세준 3세]
자는 원웅(元雄)이다. 벼슬은 신라의 사공.사마.아간 등을 지냈다.
당 숙종 건원 2년 기해(759년) 3월 30일에 태어나
덕종 정원 2년 갑신(804년) 10월 8일에 돌아가시니 향년 46세이다.
묘는 영양현 서쪽 5리쯤에 있다.
공은 성품이 어질고 자질이 유순하였다. 어릴 때부터 늙어 돌아가시는 날까지 서적을 강독하는 일을 폐하지 않았고 늙어서도 더욱 독실하게 하였다.
공이 일찍이 뜻을 붙여 이런 시를 지었다.
世上奇男子 세상의 비범한 남자
因書成大才 글을 읽어 큰 재주 이루나니
悠悠千古聖 아득한 저 옛날의 성인
獨藏胸中肺 홀로 가슴속에 갈무리했지
邈邈大宇宙 멀고도 먼 광대한 우주
列說眼欲開 바라봄에 눈이 번쩍 뜨이네
敬身受人青 공경스레 남의 책망 수용하면
敦能毀善己 누가 내 몸을 훼손하리오
○배위는 밀직부사 김만도(金萬郁)의 따님으로 당 대중 광덕 2년 갑진(764년) 정월 21일에 태어나
헌종 원화 9년 갑오(814년) 3월 2일에 돌아가시니 향년 51세이다.
윤철(允哲) 중철(仲哲) 두 아들을 두었는데, 중철은 일찍 죽었다.
4세 : 子 윤철(允哲) (780~820) +120(900~940)
字仁叔 蘊德不顯於世 生於德宗建中元年 庚申三月二日
자인숙 온덕불현어세 생어덕종건중원년 경신 3월 2일
卒於憲宗元和十六年 庚子八月十七日 享年四十一
졸어헌종원화 16년 경자 8월 17일 향년 41세
公性嚴毅 不拘小籂 舆明友交 言語無禮 舉趾悖慢者 則軌爲曰 明友之除 禮敬為貴
공성엄의 불구소식 여명우교 언어무예 거지패만자 칙궤위왈 명우지제 예경위귀
吾子何為禽獸之行云云
오자하위금수지행운운
以是人多畏服 甞舆人趙明天金摮振相和詩曰 人間策利非吾願 碧浑丹丘盤桓 朝吟聖書養吾體
이시인다외복 상여인조명천금오진상화시왈 인간책리비오원 벽혼단구반환 조음성서양오체
暮諱賢傅飽葛豢 守歸一生能幾許 秘述山窓鹿為羣
모휘현부포갈환 수귀일생능기허 비술산창록위군
公有大度 累徵不仕而卒 彶上擐其才德
공유대도 루징불사이졸 급상환기재덕
贈 檢校太子詹事門下侍中 諡 望德公 號 月坡
증 검교태자첨사문하시중 시 망덕공 호 월파
O配侍中朴鳴天女 生四子 霽雲與雲會雲輔雲 皆至顯官
배시중박조천여 생4자 제운흥운회운보운 개지현관
生於德宗建中二年 辛酉九月十日
생어덕종건중 2년 신유 9월10일
卒于穆宗長慶二年壬寅三月三日 享年四十二
졸우목종장경 2년 임인 3월3일 향년 42세
(此以上 僕射公 所記, 차이상 복야공 소기)
[자 윤철 4세]
자는 인숙(仁叔)이다. 덕을 온축한 채 세상에 드러내지 않았다.
덕종 건중 원년 경신(780년) 3월 2일에 태어나서
헌종 원화 16년 경자(820년) 8월 17일에 돌아가시니 향년 41세이다.
공은 성품이 엄하고 굳세어 사소한 일에 구애되지 않았고, 벗과 사귀면서 말이 무례하거나 행동이 오만한 자가 있으면 번번이 꾸짖기를 "붕우가 교제할 적에 예경(禮敬)이 귀한 법인데,
자네는 어찌하여 금수처럼 행동하는가......"라고 하니, 이 때문에 사람들이 대부분 경외하여 감복하였다.
일찍이 벗 조명천·김성진과 서로 창화하는 시를 지었는 데 다음과 같다.
人間榮利非吾願 사람들의 영리는 내가 원하는 바 아니고
碧溪丹丘庶盤桓 푸른 물결 붉은 언덕에서 서성일 뿐이네
朝吟聖書養吾體 아침에 성서를 읽으니 내 몸이 길러지고
暮講賢傳飽蒻豢 저녁에 현전을 익히니 고기 음식 배부르네
寄歸一生能幾許 세상에 사는 기간이 능히 얼마나 되랴
秘迹山窓鹿為羣 산속 집에 자취 감춰 사슴과 무리 되네
공은 큰 국량을 가지고도 여러 차례의 부름에 출사하지 않은 채 생을 마쳤다.
나중에 임금이 재능과 덕성을 기려 검교첨사 문하시중에 증직하였고
시호는 망덕공 (望德公)이라 하였다. 호는 월파(月坡)이다.
○배위는 시중 박명천(朴鳴天)의 따님이다. 아들 넷을 낳았으니 제운(霽雲)· 흥운(興雲)· 회운(會雲)· 보운(輔雲)
으로 모두 높은 벼슬에 이르렀다.
덕종 건중 2년 신유(781년) 9월 10일에 태어나, 목종 장경2년 임인(822년) 3월 3일에 돌아가시니 향년 42세이다. (이상은 복야공(霽雲)의 기록이다.)
5세 : 子 제운(霽雲) (803~854) +120(923~974)
字明仲 力行篤學官至 尚書右僕射 公之將生也紅氣豆天 俄而生公
자명중 역행독학관지 상서우복야 공지장생야홍기두천 아이생공
公之將歿 白光宣公寢室 公曰 吾將死矣 俄而卒
공지장몰 백광두공침실 공왈 오장사의 아이졸
生於德宗貞元十九年癸未十一月四日 卒於宣宗太中八年 甲戌十二月二十日 享年五十二
생어덕종정원19년 계미11월 4일 졸어선종태중8년 갑술 12월 20일 향년 52세
文輸絶世 講理論學 世無敵倚
문수절세 강리론학 세무적의
公甞歎曰 吾南氏托迹異城 令㡬五世 以異國之人 夊為王家之臣子 為一世之大官
공상탄왈 오남씨탁적이성 령기오세 이이국지인 쇠위왕가지신자 위일세지대관
是日称然有懷古望鄕之懷矣 公待以誠 事君以忠 終身行世 人無怨惡.
시일칭연유회고망향지회의 공대이감 사군이충 종신행세 인무원악
〇 配府院君金達遠女 生於德宗貞元 十七年 辛巳五月二日
배부원군김달원여 생어덕종정원 17년 신사 5월2일
卒於懿宗咸通一年 庚辰八月十九日 享年六十
졸어의종함통1년 경진 8월19일 향년60.세
生三子 紹, 纘, 繹, 皆為一代聞望之君子 墓在青松仰德村 西十里許子坐之原
생3자 소, 찬, 역, 개위일대문망지군자 묘재청송양덕촌 서40리허자좌지원
[자 제운 5세]
자는 명중(明仲)이다. 힘써 실행하고 학문에 독실하여 벼슬이 상서우복야에 이르렀다.
공이 태어날 즈음에 붉은 기운이 하늘에 뻗쳤고 잠시 뒤에 공이 태어나셨다.
공이 돌아가실 때 흰빛이 공의 침실에 비치니, 공이 "내가 곧 죽겠구나."라고 하신 뒤에 잠시 뒤 돌아가셨다.
덕종 정원 19년 개미(803년) 11월 4일에 태어나
선종 태중 8년 갑술(854년) 12월 20일에 돌아가시니 향년 52세이다.
문장이 아주 뛰어났고, 의리를 강하고 학문을 논함에 세상에 맞설 자가 없었다.
공이 일찍이 탄식하기를 "우리 남씨가 이역(신라)에 의탁하여 산지 지금 거의 5대가 되었구나.
다른 나라 사람이 되어 오래도록 국가의 신하가 되고 한 시대의 높은 벼슬에 올랐구나.
오늘 갑자기 옛날을 생각하고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이는 구나.”라고 하였다.
공은 사람을 대할적에 정성을 다하고 임금을 섬길적에 충성을 다했으며,
종신토록 행세함에 사람들이 원망하거나 미워하지 않았다.
○배위는 부원군 김달원(金達)의 따님이다. 덕종 정원 17년 신사 (801년) 5월 2일에 태어나
의종 함통 1년 경진(860년) 8월 9일에 돌아가시니 향년 60 세이다.
세 아들 소(紹)· 찬(纘). 역(繹)은 모두 한 시대에 추앙받는 군자였다.
묘는 청송 양덕촌 서쪽 10리쯤의 자좌 언덕에 있다.
6세 : 子 소(紹) (821~891) +120(941~1011)
字繼聖 官至中書令判中書 諡 忠宣公 生於唐穆宗 長慶一年 辛丑 八月十八日
자요성 관지중서령판중서 증 충선공 생어당목종 장경일년 신축 8월18일
卒於 昭宗大順 庚戌 正月二十四日 享年七十
졸어 소종대순 경술 정월24일 향년70세
生而英藗碓略 能廠千百人 二十轉入皇朝 討比越有勳 天子甚嘉之
생이영속대략 능창천백인 이십전입황조 토비월유훈 천자심가지
特授公同平章事日 汝之先世 万此國之人也 汝其知之平
특수공동평장사왈 여지선세 만차국지인야 여기지지평
公稽首百拜日 臣豊忘之 臣之先壠 皆在扵此 親戚皆在扵此 臣豈忘之云云
공계수백배왈 신풍망지 신지선롱 개재어차 친척개재어차 신기망지운운
皇宰特鴞弓矢善馬 旣而撤甲捲旗 還至鷝綠江 題詩 層岩 以昔日先祖之遺德 令日平越之大 書而歸
황재특효궁시선마 기이철갑권기 환지필록강 제시 층암 이석일선조지유덕 령일평월지대 서이귀
O配大將軍張萬女 生於憲宗元和十年 癸卯十月十三日
배대장군장만여 생어현종원화10년 계묘10월13일
卒于昭宗景福一年 壬子十二月一日 享年八十四
졸우소종경복1년 임자12월 1일 향년84세
兩位墓俱在英陽注谷 先右麓 壬坐 生一子之道 (此以上 彰義公 所記. 차이상 창의공 소기)
양위묘구재영양주곡 선우록 임좌 생 1자지도
[자 소 6세]
자는 요성(耀聖)이다. 벼슬은 중서령 판중서에 이르렀고, 시호는 충선공이다.
당 목종 장경 1년 신축(821년) 8월 18일에 태어나 소종 대순 경술(890년) 1월24일에 돌아가시니 향년 70세이다.
나면서부터 영민하고 웅대한 지략이 있어 혼자서 천명 백명을 대적할 수 있었다.
20세에 당나라에 들어가 북월을 토벌하여 공을 세우자,
천지가 매우 가상하게 여겨 공에게 동평장사를 특별히 제수하면서 "너의 선조는 당나라 사람이다.
너는 그것을 아느냐?"라고 하였다.
공이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기를 '신이 어찌 잊겠습니까? 신의 선영이 모두 이곳에 있고 친척 또한 모두 여기에 있는데 신이 어찌 잊겠습니까?...'라고 하니,
황제가 활과 화살과 좋은 말을 특별히 하사하였다.
조금 있다가 병장기를 치우고 깃발을 걷고서 돌아오다가 압록강에 이르렀을 때
층암의 바위에 시를 짓고 '옛날 선조가 끼친 덕으로 오늘 북월을 평정한 공적이 크다.'는
글씨를 써 놓고서 돌아왔다.
O배위는 대장군 장만(張萬)의 따님으로 현종 원화 10년 병신(816년) 10월 13일에 태어나
소종 경복 1년 임자(892년) 12월 1일에 돌아가시니 향년 84세이다.
양위의 묘는 영양 주곡(영양군 일월면) 선영 오른쪽 기슭 임좌에 있다.
외아들 지도(之道)를 낳았다.
(이상은 창의공 (之道)의 기록이다.)
***헌종 원화 10년은 을미(815년)이다. 배위 장씨의 향년 84세라면 906년(병인년)인데
[註] 소종의 재위 (888~904년)기간과 비교하면 향년은 오기로 보인다. 몰년이 소종 경복1년
(892년, 임자)이라면 향년은 70세가 타당하다.
7세 : 子 지도(之道) (837~907) +120(957~1027)
字述夫 官至會寧都護府使兼門下侍中 英山府院君 諡 彰義公
자술부 관지회령도호부사겸문하시중 영산부원군 시 창의공
公天性柔順正直仕扵朝 不禕言觪 以直言之 不顧其身 以是不客於朝 羣少多莗悪之
공천성유순정직사어조 불의언성 이직언지 불고기신 이시불객어조 군소다차악지
早辭官 退居英陽縣西綠皮洞以終
조사관 퇴거영양현서록피동이종
生於文宗開成二年壬戌十月十七日 卒於昭宣天佑四年 丙午八月二十日 享年七十
생어문종개성2년 임술10월 17일 졸어소선천우4년 병오8월20일 향년70세
O配制中書林春正女 生於武宗會昌一年 辛西十月八日
배판중서임춘정녀 생어무종회창1년 신유10월8일
卒於昭宣天佑後 癸未四月五日 享年八十三
졸어소선천우후 계미4월5일 향년80세
墓在有隣日月山西麓雙肩 生二子 大壽. 永壽
묘재유린일월산서록쌍견 생2자 대수. 영수.
[자 지도 7세]
자는 述夫(술부)이다. 벼슬은 회령도호부사 겸 문하시중 영산부원군에 이르렀다.
시호는 창의공이다.
공은 천성이 유순 정직하였다. 조정에서 벼슬할 적에 언사를 가리지않고 직언을 하여 제 몸을 돌아보지 않았다. 이 때문에 조정에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소인배들이 매우 미워하였다.
일찍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나 영양현 서쪽 녹파동에서 지내다가 생을 마쳤다.
문종 개성 2년(837년) 임술(842년) 10월 17일에 태어나
소선 천우 4년(907년) 병오(886년) 8월 20일에 돌아가시니 향년 70세이다.
○배위는 판중서 임춘정(林春正)의 따님으로 무종 회창 1년 신유(841년) 10월 8일에 태어나
소선 천우 후 계미(923년) 4월 5일에 돌아가시니 향년 83세이다.
묘는 유린 일월산 서쪽 줄기에 쌍분이다.
아들 둘은 대수(大壽)· 영수(永壽)이다.
***[공의 출생년인 문종 개성2년은 837년이고 임술년은 842년으로 둘 중에 하나는 오기로 보인다.
공의 몰년도 소선 천우4년은 907년이고 병오년은 886년이다.
당 연호로 보면 향년 70세이고, 간지로 보면 향년 45세이다.
졸년 역시 연호와 간지가 일치하지 않는다.
8세 : 子 영수(永壽) (875~936) +120(995~1056)
字子— 官至備巡衛中部將 贈崇祿大夫
자자일 관지비순위중부장 증숭록대부
生於唐僖宗乾符二年 乙未二月三日 卒於丙申十月八日 享年六十二
생어당희종건부2년 을미2월3일 졸어병신10월8일 향년62세
公天赋溫順 無意扵世 什則升 沉則沉 小無自白之意 時人語曰 南子一正如柳下惠之和云云
공천부온순 무의어세 십칙승 침칙침 소무자백지의 시인어왈 남자일정여류하혜지화운운
O配太原金氏 金紫光祿大夫致韶女 生於唐僖宗 乾符四年 二月四日
배태원김씨 금자광록대부치소녀 생어당희종 건부4년 2월4일
歿于昭室天佑二年 乙丑三月十五日 無子女
몰우소실천우2년 을축3월15일 무자녀
○后配完山李氏 司空春明女 生一子弼午 生二女金章李績 生於唐昭宗龍 紀二年己西十月二十日
후배완산이씨 사공춘명녀 생1자필오 생2녀김장이적 생어당소종룡 기2년 을서10월20일.
歿于庚戌三月三十日 享年六十二. 몰우경술3월30일 향년62.
墓俱在英陽注谷亥坐. 묘구재영양주곡해좌.
(此以上 樂節公 所記. 차이상 낙절공 소기)
[자 영수 8세]
자는 자일(子一)이다. 벼슬이 비순위중부랑에 이르렀고 숭록대부에 증직되었다.
당 희종 건부 2년 을미(875년) 2월 3일에 태어나
병신(936년) 10월 8일에 돌아가시니 향 년 62세이다.
공은 천부적으로 온순하여 세상에 뜻을 두지 않아 벼슬이 오르면 오르는 대로,
깎이면 깎이는 대로 처하며 스스로 고백하는 뜻이 없었다.
당시 사람들이 이를 두고 말하기를 "남자일은 유하혜(柳下惠)의 화(和)를 그대로 실천한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O배위는 대원 김씨(金氏)로 금자광록대부 치소(致韶)의 따님이며, 당 희종 건부 4년 정유(877년) 2월 4일에
태어나 소선 천우 2년 을축(905년) 3월 15일에 돌아 가셨다. 슬하에 자녀가 없었다.
O후배위는 완산이씨 사공 춘명의 따님이다. 아들은 필오(弼午)이고
딸 둘은 김장(金章)과 이적(李積)에게 시집갔다.
당 소종 용기 2년(890년) 기유(889년) 10월 20일에 태어나 경술(950년) 3월 30일에 돌아 가시니 향년 62세이다. 묘는 모두 영양 주곡 해좌에 있다.
(이상은 모두 낙절공(弼午)의 기록이다.)
***생년이 소종용기2년은 서기로 890년이나 연호 용기(龍氣)는 1년만 사용되어
후배의 890년은 대순1년이고, 기유년은 889년으로 1년의 차이가 있다.
9세 : 子 필오(弼午) (907~948) +120(1027~1068)
字夢之 官至金紫光祿大夫 諡樂節公 生於唐昭宣天佑四年 丁卯正月二十二日
자몽지 관지금자광록대부 증낙절공 생어당소선천우4년 정묘정월22일
卒於丁未十月一日 享年四十一
졸어정미10월1일 향년41세
公嚴偉 長身大體 手指一振 口容大手
공엄위 장신대체 수지일진 구용대수
O配金紫光祿大夫白萬章女 生於唐昭宣天佑 甲子三月二十二日 歿于唐朝後 戊辰九月 一日
배금자광록대부백만장여 생어당소선천우 갑자3월22일 몰우당조후 무진9월1일
享年六十五 生三子 翼.翌.習. 生一女 適 府院君全勝玉 墓在順與美洞西麓 壬坐
향년65새 생3자 익,입,습. 생1여 적 부원군전승옥 묘재순흥미동서록 임좌
[자 필오 9세]
자는 몽지(夢之)이다. 벼슬은 금자광록대부이고, 시호는 낙절공(樂節公)이다.
당 소선 천우 4년 정묘(907년) 정월 22일에 태어나, 정미(947년) 10월 1일에 돌아가시니, 향년 41세이다.
공은 위엄이 있고 키가 크고 몸집이 크며 손가락이 한 줌이나 되었고, 입에 큰 손이 들어갈 정도였다.
○배위는 금자광록대부 백만장(白萬章)의 따님으로
당 소선 천우 갑자(904년) 3월 23일에 태어나
당조 후 부진(968년) 9월 1일에 돌아가시니 향년 65세이다.
세 아들은 익(翼), 입(翌), 습(習)이고, 그 딸은 부원군 전승옥(全勝玉)에게 시집 갔다.
묘는 순흥 미동 서쪽 기슭의 임좌에 있다.
10세 : 子 익(翼) (928~1004) +120(1048~1124)
字己成 官至尚書檢校太子詹事 英陽君 生於後唐天成三年 戊子八月十九日
자기성 관지상서검교태자첨사 영양군 생어후당천성3년 무자8월19일
卒于甲辰九月二十一日 享年七十七
졸우갑진9월21일 향년77세세
公甞以詩諷世人曰 蒼蝇之世 寒暑之勢 令無級黰 但有邻功 吁嗟乎 世孰知之云云
공상이시풍세인왈 창승지세 한서지세 령무급진 단유린공 우차호 세숙지지운운
又甞以詩守弟習曰 賢祖緖業恐墜荒 窹寐慎心未遑 弱子癸孫其無怠
우상이시수제습왈 현조서업공추황 오매신심미황 약자계손기무태
不肖後生志全彺 時肴聖書滿家笥 又觀遺經盋竹筐 日日惕若心似水 夜夜愁腦不看
불초후생지전왕 시효성서만가사 우관유경발죽광 일 일척약심사수 야야수뇌불간
(缺) 公甞曰 男兒生世 得志於時 則出忠於君易行道於世 不得志於時 則人孝於親而修道於身
공상왈 남아색세 득지어세 직출충어군이행도어세 불득지어시 칙인효어친이수도어신
摠是男兒之事業 矣可枉道而倖求也云云
총시남아지사업 의가왕도이행구야운운
墓在禮安北樹谷西原子坐 考妣上下墳 村名溫溪
묘재예안북위곡서원자좌 고비상하분 촌명온계
O配中書令 王汝聖女 生三子 殿琴. 舜琴. 泰琴
배중서령 왕여성녀 생3자 전금. 순금. 태금
[자 익 10세]
자는 기성(己成)이다. 벼슬은 상서 겸 검교태자첨사 영양군에 이르렀다.
후당 천성 3년 무자(928년) 8월 19일에 태어나
갑진(1004년) 9월 21일에 돌아가시니 향년 77세이다.
공이 일찍이 시를 지어 세상 사람들을 풍자하였다.
蒼繩之世 쉬파리가 사는 세상이라
寒署之勢 계절은 변함없이 바뀌네
今無汲黯 지금 급암(제: 한나라 충신)은 없고
但有合巧 아부하는 무리만 있으니
吁嗟乎 오호라
世孰知之 세상에서 누가 이를 알리오
또 일찍이 시를 지어 아우 습(習)에게 보내어
賢組精業恐墜荒 어진 조상이 남긴 업적 황폐해질까 두려워
寤寐敬慎心未遑 자나깨나 경신 지키느라 마음이 거를이 없네
弱子殘孫其無息 잔약한 자손들이 나태한 자세 없을까
不肯後生意全鈺 불초 후생은 완전히 미치광이 되었구나
時看聖書滿家筒 때로 상자 가득한 성인을 책을 읽고
又觀遺經盈竹筐 또한 광주리 그득한 경전을 본다네
日日惕若心似水 날마다 조심하자니 마음이 물과 같고
夜夜愁惱不看回 밤마다 고뇌에 빠져 보지 않네
공이 일찍이 말하기를
"남아가 살면서 세상에 뜻을 얻으면 출사하여 임금에게 충성 하고 세상에 도를 행하며,
세상에 뜻을 얻지 못하면 들어와서 부모에게 효도하고 자신의 도를 닦으니,
이것이 모두 남아의 사업이라 어찌 도를 굽혀 요행을 구하겠는가. .”라고 하였다.
묘는 예안 북쪽 수곡(樹谷) 서쪽 언덕의 자좌에 있는데, 고위가 상에 비위가 아래에 있으니,
마을 이름은 온계(溫溪)이다.
O배위는 중서령 왕여성(王汝聖)의 따님으로
슬하에 3남(男)을 두었으니 전금(殿琴), 순금(舜琴), 태금(泰琴)이다.
11세 : 子 전금(殿琴) (958~1020) +120(1078~1140)
字聖和 官至密直副使 太宰 公性剛正嚴肅 有怒氣則人驚眼彩
자성화 관지밀직부사 태재 공성강정엄숙 유노기칙인경안채
生於戊午 二月二十九日 卒於庚申八月 二十日 享年六十三
생어무오 2월 29일 졸어경신8월 20일 향년63세
O配雲岩先生趙謝世女 生於戊午 八月二十日 歿干辛西九月初八日 享年六十四
배운암선생조사세녀 생어무오 8월20일 몰우신유9월8일 향년64세
生二子 陽葵. 陽蘭. 皆至金紫光祿大夫 墓俱在 青松府 北十四里
생2자 양규. 양란. 개지금자광록대부 묘구재 청송부 북14리
[자 전금 11세]
자는 성화(聖和)이다. 벼슬이 밀직부사에 이르렀고 대재에 증직되었다.
공의 성품이 굳세고 올곧았으며 엄하고 정중하여, 노한 기운을 드러내면 사람들이 눈빛이 놀랐다.
무오(958년) 2월 29일에 태어나 경신(1020년) 8월 20일에 돌아가시니 향년 63세이다.
○배위는 운암 선생 조사세(趙謝世) 따님이다.
무오(958년) 8월 20일에 태어나 신유(1021년) 9월 8일에 돌아가시니 향년 64세이다.
아들 둘을 두시니 양규(陽葵)와 양란 (陽蘭)으로 모두 금자광록대부에 이르렀다.
묘는 모두 청송부 북쪽 14리에 있다.
12세 : 子 양규(陽葵) (980~1046) +120(1100~1166)
字丹若 官至金紫光祿大夫 生於庚辰八月五日 卒於丙成九月二十日 享年六十七
자단약 관지금자광록대부 생어경진 8월5일 졸어병술 9월20일 향년67세
公風神浻潔 器度高明 小無塵態 範洛其胸 洋洋其文 脫歲退休 家西園而有 優停終為之意
공풍신형결 기도고명 소무진태 범락기흉 양양기문 탈세퇴휴 가서원이유 우정종위지의
作鳥褄赋 因歸故山 自諕曰退憂翁 後上嘉慕之 陽 號曰 忠慕公 (司空公 所記)
작조처부 인귀고산 자하왈퇴우옹 후상가모지 양 호왈 충모공 (사공공 소기)
○配完山李氏太宰明達女 生於辛巳十一月十一日 歿於庚辰四月十七日 享年 六十
배완산이씨태재명달녀 생어신사11월11일 몰어경진4월17일 향년60세
墓俱在先塋西麓 묘구재성영서록.
生一子 懷碩 生一女 適 門下侍中兼太子詹事 石道哲 (此以上 司空公 所記 차이상 사공공 소기 )
생1자 회석 생1녀 적 문화시중겸태자첨사 석도철
[자 양규 12세]
자는 단약(丹若)이다. 벼슬은 금자광록대부에 이르렀다.
정진(980년) 8월 5일에 태어나 병술(1046년) 9월 20일에 돌아가시니, 향년 67세이다.
공은 풍채가 밝고 맑았으며 기국 도량은 높고 맑아 진의 대가 조금도 없어,
그 흉중은 쇄락하고 그 문장은 양양 하였다.
만년에 관직에서 물러나 서쪽 동산에 집을 짓고 여유롭게 살면서 세상을 마칠 뜻이 있었다.
조서부(鳥棲賦) 글을 짓고, 인하여 고향으로 돌아와 자호를 퇴우옹 (退憂翁)이라 하였다.
후에 임금이 사모하여 충모공(忠慕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O 배위는 완산 이씨 (태재 명달)의 따님으로 신사(981년) 11월 11일에 태어나
경진(1040년) 4월 17일에 돌아가시니 향년 60세이다.
묘는 모두 선영의 서쪽 기슭에 있다.
슬하의 아들은 회석(懷碩)이고, 딸은 문하시중 겸 태자첨사 석도철(石道哲)에게 출가하였다.
(이상은 사공공(懷碩)의 기록이다.)
13세 : 子 회석(懷碩) (1004~1074) +120(1124~1294)
字士德 官至司空 生於甲辰五月十五日 卒於甲寅九月十三日 享年七十一
자사덕 관지사공 생어갑진5월15일 졸어갑인9월13일 향년 71세.
墓在 (英陽縣東二十五里 許子坐)
묘재 영양현동25리 허자좌
公平生以溫順之質 不作鴇態 早辭官歸家 一時䦎望之士 多越扵其門 仰望公之文章
공평생이온순지질 불작보태 조사관귀가 일시관망지사 다월어기문 앙망공지문장
四處諸生如雲集 骁 竹溪 又號松奄 眼光如杕 月影脫江水
사처제생여운집 효 죽계 우호송엄 안광여체 월영탈강수
O 配軍尹金陸義女 生於辛丑正月二十六日 歿于乙巳五月三十日 享年六十五
배군윤김육의녀 생어신축 정월26일 몰우을사5월30일. 향년65세.
墓在縣西十五里許飛谷子坐 生五子 大器. 大叔. 大宇. 大明. 大允. 皆至大官
묘재현서15리 허비곡자좌 생 5자 대기. 대숙. 대우. 대명. 대윤. 개지대관
[자 회석 13세]
자는 사덕(士德)이다. 벼슬은 사공에 이르렀다.
갑진(1004년) 5월 15일에 태어나, 갑인(1074년) 9월 13일에 돌아가시니 향년 71세이다.
묘는 영양현 동쪽 25리쯤의 자좌 에 있다.
공은 평생 온순한 자질로 화내는 법이 없었다. 일찍 벼슬을 사양하고 집으로 돌아오니
당시 명망있는 선비들이 그 문하에 모였고, 공의 문장에 앙망하여 사방에서 유생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공의 호는 죽계 또는 송암이고, 안광은 가을 달이 강물에 비친 것 같았다.
O배위는 군윤 김육의(金陸義)의 따님으로 신축(1001년) 정월 26일에 태어나
을사년(1065년) 5월 30일에 돌아가시니, 향년 65세이다.
묘소는 현의 서쪽 15리쯤의 비 있다.
슬하에 다섯 아들을 두니, 대기(大器), 대숙(大叔), 대우(大宇), 대명(大明), 대윤(大允)으로
모두 높은 관직에 이르렀다.
14세 :子 대기(大器) (1025~1094) +120(1145~1214)
字濟安 官至中書令 生於乙丑五月十四日 殁于甲戌九月二十日 享年七十
자제안 관지중서령 생어을축 5월14일 몰우갑술9월20일 향년70세
公節檢爲行 不與世溷昏 知風塵之始起 隱而不見 自號 松坡 又號智齊
공절검위행 불여세혼혼 지풍진지시기 은이불견 자호 송파 우호지제
O配尙書右僕射門下待中 王時大女 生於甲子三月二日 歿于甲子九月二十日 享年六十一
배상서우복야문하시중 왕시대녀 생어갑자3월2일 몰우갑자9월20일 향년61세
墓在榮川北 生二子 元良. 元聖. 一女 適 朴道
묘재영천북 생2자 원량. 원망 1녀 적 박도
【缺】墓在家後子坐 묘재가후자좌
【缺】平生不皺眉事 身前身後孰侮予 此兩句 公平生行狀
평생불추미사 신전신후숙모자 차량구 공평생행장
[자 대기 14세]
자는 제안(濟安)이다. 벼슬은 중서령에 이르렀다.
을축(1025년) 5월 14일에 태어나 갑술(1094년) 9월 20일에 돌아가시니 향년 70세이다.
공은 검소하고 행실이 돈독하였으며 세상과 어지러이 섞이지 않고 풍진이 비로소 일어나는 것을 알고서
은거하여 드러내지 않았다.
자호는 송파(松坡)이고 지재(智齋)라고도 했다.
○배위는 상서우복야 문하시중 왕시대(王時大)의 따님으로 갑자(1024년) 3월 2일에 태어나
갑자(1084년) 9월 20일에 돌아가시니, 향년 61세이다.
묘소는 영천(영주) 북쪽에 있다.
슬하의 아들 둘은 원량(元良)과 원성(元聖)이고, 딸 하나는 박도(朴道)에게 시집갔다.
묘소는 집 뒤쪽 자좌이다.
공은 '평생토록 눈썹 찌푸릴 일을 하지 않으면서, 살아서나 죽어서나 누가 나를 업신여기랴'는
두 구절이 공의 평소의 행실이었다. (행장에 나온다.)
15세 : 子 원량(元良) (1045~1105) +120(1165~1225)
字經國 官至三重大匡司徒兼尚書右僕射 生於丙戌十二月九日
자느경국 관지삼중대광사도겸상서우복야 생어병술12월9일
卒於乙酉三月 十八日 享年六十
졸어을유3월18일 향년60세
公枉被军少之誣 (以下缺) ㅡ.공왕피군소지무 (이하결)
O配完山李氏侍中女 生於甲申正月一日 歿于丙申八月十八日 享年七十三
배완산이씨시중녀 생어갑신정월1일 몰우병신8월18일 향년73세
墓在家後先下 生三子長曰洪甫為宜寧君 仲曰君甫為英陽君 季曰匡甫為固城君
묘재가후선하 생3자 장왈홍보위의령군 중왈군보위의령군 계왈광보위고성군
此以上皆同祖之孫 而以下 始分為 宜寧南 英陽南 固城南
차이상개동소지손 이이하 시분위 의령남 영양남 고성남
然其先乃英毅公 一體之孫也 然則雖代遠世逖 若有仁人孝子之心 則不可以代遠世逖而視之也
연기선내영의공 일체지손야 연칙수대원세질 약유인인효자지심 칙불가이대원세질이친지야
(此以上 栢川公 所記, 차이상 백천공 소기)
[자 원량 15세]
자는 경국(國)이다. 벼슬은 삼중대광사도 겸 상서우복야에 이르렀다.
병술(1046 년) 12월 9일에 태어나, 을유(1105년) 3월 8일에 돌아가시니 향년 60세이다.
공은 소인 배들의 모함을 받아서 【이하 원문 빠짐】
○배위는 완산이씨 시중 정(棟)의 따님으로, 갑신(1044년) 정월 1일에 태어나
병신(1116년) 8월 18일에 돌아가시니 향년 73세이다.
묘는 집 뒤쪽 선영 아래에 있다.
슬하에 아들 셋을 두었는데
맏아들 홍보(洪甫)는 의령군(君)이고,
둘째 아들 군보(君甫)는 영양군(英陽君)이며,
막내아들 광보(匡甫) 는 고성군(固城君)이 되었다.
이상은 모두 한 조상의 자손이며 이후부터 비로소 의령남. 영양남. 고성남으로 나누어졌다.
그러나 그 선조는 영의공 한분의 후손이다.
그렇다면 세대가 멀어져도 만약 인인과 효자의 마음이 있으면 세대가 멀어졌다는 이유로 소원하게 보아서는
안 될 것이다. (이상은 백천공(栢川公, 君甫)의 기록이다.)
[編輯者註] 삼관 분관 당시 광보(匡甫)공만 고성군(固城君)으로 봉군(君)되었고,
홍보(洪甫)공은 중대광(重大匡)공으로, 군보(君甫)공은 밀직공(密直公)으로 관명(官名)이
기록되었고 군(君)으로 봉해졌다는 기록은 없다.
세분 모두 봉군받았다는 일부 기록들은 분관 후에 후손들의 기록이다.
의령부원군으로 봉군받은 후손은 을(乙)4세, 재(在)5세). 은(誾)5세,
또 위 내용은 홍보(洪甫)는 영양남英陽南), 군보(君甫)는 의령남(宜南)을,
두채가에서 기록을 등사(寫)할 때에 오기(誤記)였을 것으로 보인다.
**長曰 洪甫 宜寧君, 仲曰 君甫 英陽君, 季曰 匡甫 固城君 (기록의 오류로 보임)
16세 : 子 군보(君甫) (1066~1144) +120(1186年~1264年)
字大宇 官至通憲大夫密直副使 號栢川 生於丙午五月五日 卒于甲子六月十八日 享年七十九
자대우 관지통헌대부밀직부사 호백천 생어병오5월5일 졸우갑자6월18일 향년77세
公性優餘寬弘 平生無害人之事.
공성우여관필 평생무해인지사.
O配羅州羅氏 中郎將 萬宇女 生於 壬寅八月二十七日
배나주나시 중랑장 만우녀 생어 임인8월27일
歿于 庚戌二月十九日 享年六十九 生三子 公若. 公赫. 公益.
몰우 경술2월19일 향년69세 생3자 공약. 공혁. 공익.
O后配 父 金國賢 女, (배 부 김국현 녀)
生一17世, 子 鎭勇 登 武科, 官至 大將軍. (宜寧君) (同正公 所記, 동정공 소기)
생ㅡ17세 자 진용 등 무과 관지 대장군 (의령군)
鎭勇 生三子 備巡郎 赫胝. 儲倉使 益胝. 侍中 義胝. 有武功 又封宜寧府院君 自英毅公至此
진용 생3자 비순랑 혁지. 저창사 익지. 시중 의지 유무공 우봉의령부원군 자영의공지차
凡十六世 十六世之間 分為三貫之南 (此以上 同正公 所記 . 차이상 동정공 소기)
범16세 16세지간 분위삼관지남
[子 君甫 16세] (1066~1144) +120(1186年~1264年)
자는 대우(大字)이다. 벼슬은 통헌대부 밀직부사에 이르렀다. 호는 백천(川)이다.
병오(1066년) 5월 5일에 태어나 갑자(1144년) 6월 18일에 돌아가시니, 향년 79세이다.
공은 성품이 넉넉하고 너그러워서 평생토록 남을 해하는 일이 없었다.
○배위는 나주 나씨 중랑장 만우(宇)의 따님으로 임인(1062년) 8월 27일에 태어나
경술 氏) (1130년) 2월 19일에 돌아가시니, 향년 89세이다.
슬하에 세 아들을 두시니 공약(公若), 공혁(公赫), 공익(公益)이다.
O후배위는 김국현(金國賢)의 따님으로 아들 진용(鎭勇)을 낳으시니
무과에 올라 대장군에 이르렀다. 진용이 세 아들을 두었는데
비순랑 혁지(赫胝), 저장사 익지(益胝), 시중 의지(義胝)는 무공이 있어 의령부원군에 봉해졌다.
영의공으로 부터 여기까지 모두 16세인데,
16세 사이에서 남씨의 관향이 셋으로 나누어 졌다. (이상은 동정공 (同正公)의 기록이다.)
[編輯者註]
1정유대동보의 상계도에는 군보공(1세)의 아들로는 공약, 혁지, 익지, 효윤(이상 2세) 으로 기록되어 있고,
2 의령보에는 군보공(1세)의 아들로 혁지, 익지, 효윤(이상 2세)만 이 기록되어 있음.
3 판서 휘주 6세)의 묘지(墓誌)는 사위 안원이 찬했는데 휘주는 군보의 5세손으로하고 군보는 공약을 낳았다.'고 기록하고 있음.
4 참판공 민생 (生7세)의 안동부 호적에 군보의 자 공약이라 연서되어 있음.
5 영해구보도(영조 정 미보 1727년)는 군보공의 아들에 공약공을 '영양파'로 기록하고
같은 대(代)에 의령파를 두었다.
6 안동구보도(숙조 임진보 1712년)에는 군보의 아들 공약공과 진용공(의령파)을 같은 대에 두었다.
7 의령구보 (숙종 계유보 1693년)는 진용의 세아들을 홍보 군보 광보로 기록하고 있음.
8 몽뢰보에도 군보의 두 아들로 공약과 진용을 적고
진용에는 '거의령잉봉의령군(居宜寧仍封 宜寧君)'으로 기록하였다.
9 이 자료에 나타난 생몰연도는 후보들의 내용이나 공증된 후손의 생몰년대와 비교할 때
상이한 것은 육십갑자 년표의 인용오류로 추정된다.
[子 公若 17世) (1098~1164) +120(1218~1284)
字子順 官至衛尉同正兼門下侍中 生於戊寅八月十一日 卒於甲申三月二十四日 享年六十七
자자순 관지위위동정겸문화시중 생어무인8월11일 졸어갑신 3월24일 향년67세
公身長僅五尺 身大如棟 雖武士 不能小動 幼而力學 不撤晝夜 勤讀者三十有餘年 文章發越
공신장근5척 신대여동 수무사 불능소동 유이력학 불철주야 근독자30유여년 문장발월
道理通明 為一代砥柱之君子 公性嚴厲 小不忌憚 雷霆之下 必盡胸中之言 不畏奸邪 故人多畏之
도리통명 위일대지주지군자 공성엄려 소불기탄 뢰정지하 필진흉중지언 불외간사 고인다외지
公當曰 男兒 死則死矣 生則生矣 何必以苟倖而圖生耶 必盡吾正言而不為邪鬼云云 時人論公曰
공당왈 남아 사칙사의 생칙생의 하필이구행이도생야 필진오정언이불위사귀운운 시인논공왈
鐵中之金 雪上之付 公性情簡篤 無間斷之心 有如此之約 則必為如此之事而無宿 常戒子弟
철중지금 설상지부 공성정간독 무간단지심 유여차지약 칙필위여차지사이무숙 상계자제
曰: 汝曹無意萬卷書 孔夫子一部論語 力而為業 則無往而不可焉 往而不適
왈: 여조무의만권서 공부자일부논어 력이위업 칙무왕이불가언 왕이불적
【映】 美哉美哉 魯聖之為書 吁嗟汝會盡力乎此云云
영 미재미재 노성지위서 우차여회진력호차운운
O配韓山李氏 【缺】 墓在慶州王山 西十里 許坐之原
배한산이씨 결 묘재경주왕산 서10리 허자지원
[자 공약 17세]
자는 자손 벼슬은 위위동정 겸 문하시중에 이르렀다.
무인(1098년) 8월 이다. 11일에 태어나 갑신(1164년) 3월 24일에 돌아가시니 향년이 67세이다.
공은 키가 겨우 5척이지만 몸집이 대들보 같아서 비록 무사라도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
어릴 때 부터 배움에 힘써 불철주야로 부지런하게 읽은 지 30여년이 되자 문장이 뛰어나고
도리가 밝게 통하여 한 시대의 우뚝한 군자가 되었다.
공은 성품이 엄격하여 조금도 꺼리지 않았으며 임금이 계신 자리에서도 반드시 홍중에 있는 말을 다하고,
간사한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대부분 두려워하였다.
공이 일찍이 말하기를 "남아는 죽으면 죽고 살게 되면 사니 하필이면 요행을 구하여 삶을 도모하라. 반드시 나의 바른 말을 다함으로써 간사한 귀신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당시 사람들이 공을 논하여 "쇠 중에 금과 같고 눈속의 대나무와 같다."라고 하였다.
공은 성정이 '고 했다. 공의 성정이 간략하고 독실하여 중단하는 마음이 없었으므로 이와 같은 약속을 하면
반드시 이와 같은 일을 행하여 묵히는 일이 없었다.
항상 자제들에게 훈계하기를 "너희들은 많은 책을 읽으려고 하지말고, 공자의 『논어』 하나에 힘을 쏟아 공부한다면 어디를 가더라도 불가할게 없고 어디를 가더라도 맞지않는 것이 없으리니
[원문 빠짐] 아름답고 아름답도다.
노나라 성인의 책이여. 아! 너희들이 어찌 이 책을 힘써 읽지 않아서야 되겠느냐"라고 하였다.
O배위는 한산이씨 [원문 빠짐] 묘는 경주 왕산 서쪽 14리쯤의 해좌 언덕에 있다.
[編輯者註]이 자료에 나타난 생몰연도는 후보(後譜)들의 내용이나 공증된 후손의 생몰년대와 비교할 때
상이한 것은 육십갑자 년표의 인용오류로 추정된다.
[子 備 18世] (1130~1190) +120(1250~1310)
字行百 製巡官至金紫光祿大夫判中書門下侍中 上護軍
자행백 제순관지금자광록대부판중서문화시중 상호군
生於庚戌八月十五日 卒於庚戌九月二十五日 享年六十一
생어경술8월15일 졸어경술 9월25일 향년61세
公天性純一無雜 忠君孝親四字 於公俱存矣 公之孝行出於天 衛尉公嘗病 忽思新稻 公時年僅十餘
공천성순일무잡 충군효친4자 어공구존의 공지효행출어천 위위공상병 홀사신도 공시년근10여
伏地呼哭曰 天乎天乎 新稻將安得云云. 叩頭於地庭際 忽有一束新稻幾至數斗 公百拜于天而起
복지호곡왈 천호천호 신도장안득운운. 고두어지정제 홀유일속신도기지수두 공백배우천이기
供進之 是日 病怨據 時人以為萬古所無之孝子 鄉人為之立 孝子碑於松京道上 曰
공진지 시일 병원거 시인이위만고소무지효자 향인위지립 효자비어송경도상 왈
絕天之孝南某之碑云云
절천지효남모지비운운.
O配禮安金氏 注簿同正承佑女 生四子星老.仲老.仁老.乙老. 公仲子仲老 以文章力行 封英昌君金氏
배예안김씨 주부동정승우녀 생4자 성노.중노.인노.을노 공중자중노 이문장력행 봉영창군김씨
生於辛亥十二月一日 歿于癸丑 三月十日 享年六十三 墓俱在先下 (此以上 判書公所記)
생어신해12월1일 몰우계축 3월10일 향년63세 묘구제선하 (차이상 판서공소기)
[자 비 18세]
자는 행(行)이다. 제술업에 급제하여 벼슬이 금자광록대부 판중서문하시중 상호군에 이르렀다. 정순(1130년)에 태어나 정술(1190년) 9월 25일에 돌아가시니 향년이 61세이다.
공은 천성이 잡스러움 없이 순수하고 '충군효진(忠君孝親)' 4자를 모두 갖추었다.
공의 효성은 하늘이 내렸다. 위위공이 편찮으실 때 햅쌀을 드시고 싶어 했다.
공은 그때 겨우 10여세로 땅에 엎드려 울부짖으며
'하늘이시여 하늘이시여 맵쌀을 어떻게 얻을 수 있단 말입니까....."라고 하고서 땅에 머리를 두드릴 즈음에
갑자기 몇 말이나 될 정도의 볏단 한 묶음이 나타났다.
공이 하늘에 백배하고 일어나서 밥을 차려 드리자. 그날 바로 병이 나았으니,
당시 사람들이 '만고에 없던 효자'라고 칭송하였고
마을 사람들이 개경 도로가에 효자비를 세워 '천하 으뜸의 효자, 남 아무개의 비'라고 하였다.
O배위는 예안김씨로 주부 동장 승우(承佑)의 따님이다.
아들 넷을 두었으니 성 로(星考)·중로(仲老)·인로(仁老).을로(乙老)이다.
둘째 아들 중로는 문장에 뛰어나 영창군(英昌君)에 봉해졌다.
배위 김씨는 신해(1131년)에 태어나 계축(1193년) 3월 10일에 돌아가시니 향년 69세이다.
묘는 모두 선영 아래에 있다. (이상은 판서공(星老)의 기록이다.)
[編輯者註] 이 자료에 나타난 생몰연도는 후보(後譜)들의 내용이나 공증된 후손의 생몰년대와
비교할 때 상이한 것은 육십갑자 년표의 인용오류로 추정된다.
[子 星老 19世] (1152~1223) +120(1272~1343)
字天翁 官至奉翊大夫 典兵列書上護軍 遼東指揮使
자천옹 관지봉익대부 전병렬서상호군 요동지휘사
生於壬申九月十日 卒於癸未 三月十七日 享年七十二 墓在安東惠日西壬坐
생어임신9월10일 졸어계미 3월17일 향년72세 묘재안동혜일서임좌
公嘗以詩寄從姪乙番回 男兒天地 不虛老
공상이시기종질을번회 남아천지 불허노
【映】拳一揮雲霧生 壯頭四眄日月 【缺】層層紅霞千萬文【映】
영 권일휘운무생 장두4면일월 결 층층홍화천만문 영
〇配木川馬氏 左右衛保勝郎將 仲良女 生於乙亥三月十二
배목천마씨 좌우위보승랑장 중량녀 생어을해3월12일
【缺】大享年七十一, 生二子 有孫 有智 四女 適 馬懷才 李忠善 侍中 金鳴 [缺] 門下侍中 金固
결 대정년71 생2자 유손 유지 4녀 적 마회재 이충선 시중 김명 결 문화시중 김고.
【缺】太宰金門下侍中 墓在禮安搴芝山南麓雙墳 公曰 孝友信 是我之事 此外何求
결 태재금문화시중 묘재예안건지산남록쌍분 공왈 이우신 시아지사 차외하구
吾雖不足 於此四者 竊欲終身行之云云 行狀
오수불족 어차4자 절욕종신행지운운 행장
[자 성노 19세]
자는 전용이다. 벼슬은 봉익대부 전병판서 상호군 요동지휘사에 이르렀다.
임신(1152 년)에 태어나 계미(1223년) 3월 17일에 돌아가시니 향년 72세이다.
묘는 안동 혜일 서쪽의 임좌에 있다.
공이 일찍이 종질 을번(乙番)에게 시를 보내 이렇게 읊었다.
男兒天地不虛老 남아라면 천지에서 헛되이 늙지 않아야지
缺拳一揮雲生 【구빠짐】 주먹 한 번 휘두르자 운무가 생기고
壯頭四眄日月缺 【원문 빠짐】 머리 들어 돌아보니 해와 달이
層層紅霞千萬丈 층층의 붉은 노을 쳔길 만길 뻗쳤고, 이하 [구빠짐]
○배위는 목천마씨(木川馬氏)로 좌우위보승낭장 중량(仲良)의 따님이다.
을해(1155 년) 3월 12일에 태어나 [원문 빠짐] 향년 71세이다.
두 아들은 유손(有孫)과 유지(有智)이고,
딸들은 마회재(馬懷才)와 시중 이충선(李忠善)과 태재 김명(金鳴), 문하시중 김고(金固)에게 시집갔다. 묘는 예안 건지산 남쪽 기슭에 쌍분으로 있다. 공이 말하기를 "효·우·간·신이 나의 일이니 그 외에 무엇을 더 구하겠는가?
내게 비록 이 네 가지가 부족하나 종신토록 하고 싶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행장에 나온다.)
[編輯者註] 이 자료에 나타난 생몰연도는 후보들의 내용이나 공증된 후손의 생몰년대와 비교 할 때
상이한 것은 육십갑자 년표의 인용오류로 추정된다.
남을번은 1320(충숙왕 7)~1395(태조 4)의 인물이다.
[子 有孫 二十世] (1187~1242) +120(1307~1362)
字錫予 登癸酉科事 忠穆忠定恭愍三朝 官至奉翊大夫版圖判書
자석여 등계유과사 충목충정공민삼조 관지봉익대부판도판서
生於丁未九月 十六日 卒於壬寅十月十四日 享年五十六
생어정미9월16일 졸어임인10월14일 향년56세
後以子暉珠貴 追封匡靖大夫僉議參理 【缺】
후이자휘주귀 추봉광정대부첨의참리 [결]
O配安東權氏 匡靖大夫 僉議評理致仕 允明女
배안동권씨 광정대부 첨의평리치사 윤명녀
生於丙午二月十日 歿于丁巳十月十九日 享年五十二
생어병오2월10일 몰우정사10월19일 향년52세
墓在新堂谷後合窆 生三子 暉珠 暉璉 暉玉 聯登科第 皆至大官
묘재신당곡후합폄 생3자 휘주 휘련 휘옥 연등과제 개지대관
[자 유손 20세]
자는 석여(錫予)이다. 계유(1213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충목왕, 충정왕, 공민왕 세 조 정에서 벼슬하고
벼슬은 봉익대부 판도판서에 이르렀다.
정미(1187년) 9월 16일에 태어나 임인(1242년) 10월 14일에 돌아가시니 향년 56세이다.
뒤에 아들 휘주가 귀하게 되어 광정대부 첨의참리에 추봉되었다. [원문 빠짐]
○배위는 안동권씨(安東權氏)로 광정대부 첨의평리로 치사한 윤명(允明)의 따님이다.
병오(1186년) 2월 10일에 태어나 정사(1257년) 10월 19일에 돌아가시니 향년이 52세이다.
묘는 신당곡 뒤에 합폄하였다.
아들 셋은 휘주, 휘련, 휘옥으로 연이어 과거에 올라 모두 높은 관직에 이르렀다.
[編輯者註] 배위 안동권씨의 향년이 52세라면 정유년(1237년)이고,
위 3조시대에 벼슬하였다면 1344년 이후에 생존해야만 한다.
※충목왕(재위 1344~1348) 충정왕(재위 1349~1351) 공민왕(1352~1374)
※남을번: 1320(충숙왕 7)~1395(태조 4)
[子 暉珠 21世] (1326~1407) +120년 적용 제외(이하).
字岸明 登甲午科 官至奉翊大夫 典理判書
자안명 등갑오과 관지봉익대부 전리판서
生於丙寅三月十日 卒于大明太祖洪武四年(1371) 丁亥(1407)十月十五日 享年八十二
생어병인3월10일 졸우대명태조홍무4년 정해 10월15일 향년 82세
墓在安東府 東十五里 許南與山 (公壻 安瑗 撰壙記 )
묘재안동부 동15리 허남흥산 (공서 안원 찬광기)
○配丹山李氏 中正大夫 右司議進賢館直提學 知製敎元幹女
배단산이씨 중정대부 우사의진현관직제학 지제교원간녀
生於丁卯 二月十三日 歿于洪武十年 丁巳八月三十日 享年五十一
생어정묘2월13일 몰우홍무10년 정사8월30일 향년51세
墓在安東府北十五里 許松谷栗母山
묘재안동부북15리 허송곡율모산
生二子 敏生 約生 生三女 適 盧永吉 宋光彦牧使 安瑗 景質公
생2자 민생 약생 생3녀 적 노영길 송광언목사 안원 경질공
[자 휘주 21세]
자는 안명(岸明)이다. 갑오(1354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은 봉익대부 전리판서에 이르렀다.
병인(1326년) 3월 10일에 태어나
대명 태조 홍무 4년(1371년) 정해(1407년) 10월 15일에 돌아가시니 향년 82세이다.
묘는 안동부 동쪽 15리쯤의 남흥산에 있고,
(공의 사위인 안원이 광기를 찬했다.)
O배위는 단산이씨(山李氏)로 중정대부 사의 진현관직제학 지제교 원간(元幹)의 따님이다.
정묘(1327) 2월 13일에 태어나 홍무 10년 정사(1377년) 8월 30일에 돌아가시니 향년 51세이다.
묘는 안동부 북쪽 15리 종의 송곡 모산에 있다.
두아들은 민생(生)과 약생(生)이고, 딸셋은 노영길과 목사송광언(宋)과 경질공 안원에게 시집갔다.
[編輯者註] 판서공의 몰년인 명태조 홍무4년은 1371년 신해년인데
위 기록은 정해년이라 하였고, 판서공의 향년 82세라면 1407년(명 영락5년, 정해)이다.
경질공 안원은 생몰은 1346년(충목왕 2)~1411(태종 11)이다.
원주목사 송광언은 공민왕 10년 정미(음력 1361년)에 홍건적이 원주를 함락할 때 전사했다.
※ 1407년(명 영락5년, 정해)은 민생公의 몰년이기도 하다. 가첩의 등사시에 오기로 보인다.
[子 敏生 22世] (1348~1407)
字追遠 仕於麗朝 官至衛尉少尹 入我朝 拜工會參議
자주원 사어려조 관지위위소윤 입아조 배공회참의
生於戊子二月十六日 卒于大明太宗永樂五年丁亥七月十四日 享年六十
생어 무자2월16일 졸우대명태종영락5년 정해7월14일 향년60세
後以子佑良貴 贈嘉善大夫 戶曹參判 後自朝家加 贈領議政 墓在 南興先螢下
후이자우량귀 증가선대부 호조판서 후자조가가 증영의정 묘재 남흥선영하
公性溫雅 無自高之意與世俗浮沈 嘗題詩松京曰 今無首陽山 山河仙李春 黍離孰不愴 今來多有靦
공성온아 무자고지의여세속부침 상제시송경왈 금무수양산 산하선이춘 서리숙불창 금래다유전
心愧金烏士 顏慙社門人 此身非松栢 自知醜荊榛 恨之未由己 回首向雲間 云云….
심괴김오사 안참사문인 차신비송백 자지추형진 한지미유기 회수향운간 운운…..
平日吟 味許多 不能盡記
평일음 미허다 불능진기
O 配春川朴氏 領議政元變女
배춘천박씨 영의정원섭녀
生於甲申 正月二十七日 歿于乙亥七月七日 享年五十二
생어갑신 정월27일 몰우을해7월7일 향년52세
墓在南興先瑩下 生四子 富良 運良 義良 佑良 皆登武科 俱至大官
묘재남흥선영하 생4자 부량 운량 의량 우량 개등무과 구지대관
O后配宜寧余氏 左右衛保勝郎將文 靖女
후배의령서씨 좌우위보승랑장녀 정녀
生於己酉十月一日 歿于甲午三月二十五日 享年四十六
생어기유10월1일 몰우 갑오3월25일 향년46세
墓在南興先螢西 生一子 普良 且登武科 生二女 適 黃載文科縣監 裴南(楠)文科吏曹正郎
묘재남흥선영서 생1자 보량 차등무과 생2녀 적 황재문과현감 배남(남)문과이조정랑
自始祖英毅公 至此二十二世 自金氏始 祖凡九十八世 蓋累千年之大家云云
자시조영의공 지차22세 자김씨시 조범98세 개루천년지대가운운
[자 민생 22세: (1348~1407]
자는 주원이다. 고려 때 벼슬하여 위위소윤에 이르렀고
조선에 들어와서는 공조참의를 제수받았다.
무자(1348년) 2월 16일에 태어나 명태종 영락 5년 정해 (1407년)에 돌아가시니 향년 60세이다.
넷째 아들 우량이 귀하게 되어 가선대부 호조 참판에 증직되었고
후에 조정에서 영의정으로 가증하였다.
묘는 남홍 선영 아래에 있다.
공의 성품이 온순하고 단아하여 스스로 높이는 뜻이 없어 속세의 시류에 따랐다.
일찍이 「송경(松京)」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읊었다.
今無首陽山 지금 수양산은 없어졌고
山河仙李春 산하는 이씨네 봄이 되었네
本離戰不惜 나라 없어짐이 누군들 슬프지 아니하겠나
今來多有靦 지금 와서 많은 부끄러움이 있구나
心愧金烏士 마음속으로 금오산의 선비에게 부끄럽고
顏慙杜門人 얼굴은 두문동 사람에게 면목이 없네
此身非松佰 이 몸은 비록 송백은 아닐지라도
自知醜荊榛 스스로 잡목의 추함은 알고 있네
張之未由已 어쩔 수 없음을 한스러워하며
回首向雲間 머리를 구름 사이로 돌리는구나
평소에 읊은 시가 많지만 다 기록할 수 없다.
O배위는 춘천박씨(春川)로 영의정 원비(元斐)의 따님이다.
갑신(1344년) 정월 27일에 태어나 올해(1395년) 7월 7일에 돌아가시니 향년 52세이다.
묘는 남흥 선영 아래에 있다.
아들 4형제를 두시니, 부량 (富良)과 수량(遂良)과 의량(義良)과 우량(良良)으로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함께 높은 벼슬에 이르렀다.
O후배위는 의령여씨(金氏)로 좌우보숭낭장 문정(文靖)의 따님이다.
기유(1369년) 10월 1일에 태어나 갑오(1414년) 3월 25일에 돌아가시니 향년 46세이다.
묘는 남흥 선영 서쪽에 있다.
아들 보량(普良)은 무과에 급제하였고, 딸 둘은 문과에 급제하여 현감을 지낸 황재(黃載),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정랑을 지낸 배남(裵楠, 1384~?)에게 시집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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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영의공으로부터 여기까지 22세이고, 김씨 시조로 부터는
모두 98세에 이르니, 대개 누천년을 이어온 대가(大家巨家族)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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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編輯者註] 춘천박씨에 관한 변록
[ 아래 내용으로 봐 춘천박씨와 관련된 내용은 물론 의령여씨의 생몰년도와 묘지등은 잘못된 기록으로 보인다.
1. 배위의 부가 춘천박씨 박원비(朴元斐)라 하나 춘천박씨 시조 박항(1227~1281)의 아들 박원비(朴元庇는 판사를 지냈다고 하나 판사(判事)는 판서(判書)를 공양왕 원년(1389년)에 고쳐 부른 직명이므로 1389년 이후에 벼슬한 것으로 보이고 이름 자(字) 또한 다르다. 춘천시 북산면 청평리에 있는 박원비의 묘 신도비에는 '4남 1녀가 있었는데 딸은 안동권씨 권각)에게 시집갔다. (生男女 長光先直講二南 光佑生員三男 章事四 人) 적혀있다.
(公少尹)'라고 신북면에 있는 시조 박항의 신도비에도 같은 내용이 있다.
2 배위 춘천박씨의 생년이 1344년인데 비해 부 박원비는 충열왕조(1275~1308)에 등과했다하니
생년이 1250년 전후로 추정되므로 부녀간의 연대가 큰 차이가 있을 뿐만 아니라
민생公 (충목왕 4년. 1348~1407)과의 연대가 크게 어긋난다.
춘천박씨의 보책을 살펴보아도 시조 박항 이후 약 200여 년간 남씨(南氏)와 관련된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
3. 참판공 배위 정부인 의령여씨 묘표음기는 墓在判書墓後二步世代既遠子孫于繁延今至六代不可勝載 有明萬曆八年庚辰 富良五代孫 延福義良玄孫好學佑良會孫頊等相議立石
'묘는 판서공 묘의 이보 뒤쪽에 있다.
세대가 멀어지고 자손이 번성하여 지금 6대에 이르니 모두 기록할 수 없다.
명 만력8년 경진년(1581년)에 부량 5대손 연복, 의량 현손 호학, 우량 증손 욱 등이 상의하여 비석을 세우다.'
이 묘표의 음기는 1400년대에 돌아가신 의령여씨의 직계 후손들이 1581년에 세운 묘표이다.
180여년의 상계를 4~6대 후손들이 추정했을 가능성은 없고
선배위 조모의 묘에 대한 기록을 탈루시켰을 가능성은 더욱 없다. 또
「안평리 두채의 가첩」을 부록으로 실었던 을유보는 1765년에 발간된 보책으로서 묘표를 세운 때로 부터
180년이 지난 후의 기록이므로 360년전 당시의 일과 더욱 멀어진 때라
을유보에 실린 가첩의 내용은 신빙성이 떨어진다.
4. 고려~조선시대 외명부(外)의 자세한 자격요건은 확인된 바 없으나 춘천박씨의 존재가 확실하다면
정부인 봉호를 받았을 것이고 묘지와 묘표도 확인되었을 것이다.
가첩의 기록은 선영하에 있다고 하나 묘와 비석은 존재하지 않고, 현재 의령여씨의 묘와 묘표는 존재하고
그 묘표에는 '정부인'의 봉호가 기록되어 있다.
이 가첩에는 의령여씨 묘의 위치 또한
"남흥선영하 서쪽에 있다'라 기록되어 있으나 실재는 선영 묘의 뒤쪽(後)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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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보(1957년) 족보 오류편찬의 문제점* (변록)
O.66년 전 근대사 남씨 최초의 영양, 안동, 의령, 고성 3파의 대동보를 발행하였다.
정유보(1957년) 편찬에 주관은 남씨대종회 초대 회장을 역임한 의령관 남상철이다.
이분이 당시 자신의 권력으로 우리의 족보를 왜곡 편찬하였다. 영양, 안동에서 제출한 자료는 모조리 무시를 당하였고,
의령관의 최초 족보 남익훈이가 발행한 (1693년 계유보)를 근거로, 정유보(1957 년)가 편찬되었다.
의문점
1 남익훈 족보는 남진용의 아들 삼형제(홍보, 군보, 광보)로 시작하며, 시조 민의 7세라 했다.
7세로 한다면 불과(200~230년)인데 시조 남민께서는 755년도에 오셨다.
그러면 중시조로 기준을 한다면 400년이라 보아야 하므로 연대가 맞지 않는다.
2 남진용은 고려의 대장군이다. 한다.
높은 관직인데 불구하고 타성은 대장군이라 하면, 역사지, 유집, 인물 기록에 나오는데, 남진용은 나오지 않는다.
당시 남상철은 3관의 아버지인 남진용의 묘가 없다면 설단이라도 당시에 영의공 산소 밑에 설치를 마땅히 하여야 하나
차마 그것은 못 한 것 같다.
3 한국민족문화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기록에 남익훈의 아우 남치훈이가 경주분윤에 임명되자,
해운으로 경주로 옮겼고, 부윤직에서 해임되자, 다시 의령소재 남진용(현재 군보의 묘소로 추측)의 산소 아레로 옮긴 것을 진주목사로 부임한 막내동생 남지훈이 영구 보관을 위해 장판실을 지어 보존하였다고 한다. 기록되어 있다.
기록에 남척(南倜)으로, 계대가 미상이나
남진용을 기준하여 7세손 홍보, 군보, 광보로 표기하여 상계가 미비점이 많다고 기록한다.
남사고의 울평보(울진,평해) 족보가 영향을 미친점
1. 남사고(1,509-1,571)의 울평보는 영양남씨의 최초의 족보이나 애석하게 지금 세상에 나타나지 않고 있다.
남사고(1,509년생)께서는 영주시 소수서원에 1,555년에 입학을 하 였고,
당시 남몽구(1524년생) 남몽오(1528년생)는 나이는 남사고 보다 어리지만,
소수서원 입학은 (1,547년).(1,551)에 입학을 하여 남사고보다 앞서 입학을 하였지만 같이 수학을 하신 것으로 본다.
그 후 남치형, 남치리가 격암 선생의 소수서원의 후배가 된다.
치형, 치리는 남공약의 종가인 부사공파로서 남사고의 울평보를 접하였고,
이 울평보가 남두원(1655-?부사공파)이가 남종통기(南宗通 記) 5권을 편찬하였으나,
지금은 세상에 없지만 남제명(1668-1751 송정공파) 풍기 남두원을 찾아가서 족보 남종통기 2권을 필사하고,
보충 취동성변문 풍기 남두원과 신구보 세계변의문 풍기 남두원 문서도 필사하여
지금은 남제명의 자료가 안동국학진흥원에 보관중이다.
2. 그런데 남종통기의 자료 일부가 남명섭(1698-? 수의공파)이를 통하여 다시 한번 필사가 된 자료를
남두채(1715-? 부사공파 의성 봉 양면 안평리)를 찾아가 보니,
남명섭이가 남두채가 보관하고 있는 자료를 보고 놀라와 한 것이,
바로 남민 이후 실전되었다는 자료가 400년의 상계도가 나온 것이다.
1세 민 敏 영의공 (英毅公) (712-782) 755년 신라에 오심.
2세 척 倜 상서공(尙書公) (733-794) 당벼슬 평장사 신라벼슬 우복야 (생몰년 상이)
3세 세준世俊 사마공(司馬公) (759-804) 세영,세호,세걸
4세 윤철允哲 망덕공(望德公) (780-820) 중철
5세 제운霽雲 상서공(尙書公) (803-854) 흥운,회운,보운
6세 소 紹 충선공(忠宣公) (821-890) 찬,역
7세 지도之道 창의공(彰義公) (842-886) (생몰년 상이)
8세 영수永壽 중랑장공(中郞將公) (875-936) 대수(兄)
9세 필오弼午 낙절공(樂節公) (907-947) 매제 (김장.이적)
10세 익 翼 영양군(英陽君) (928-1004) 입,습, 매제 (김승옥)
11세 전금殿琴 부사공(副使公) (958-1020) 순금,태금.
12세 양규陽葵 충모공(忠慕公) (980-1046) 양란
13세 회석懷碩 사공공(司空公) (1004-1074) 매제 (석도철).
14세 대기大器 중서령(中書令公) (1025-1094) 대숙,대우,대명,대윤
15세 원량元良 대광공(大匡公) (1046-1105) 원성, 매제 (박도걸)
16세 홍보洪輔 중대광공(重大匡公) (1084-?) 군보?, 광보? (생년 상이)
17세 겸謙
3. 청선고(淸選考)1906년 편찬하여 1909년에 완성한 16권책에,
시호를 받은 분들 중 1세 민, 4세 윤철, 6세 소, 7세 지도, 9세 필오, 모두 영의공 빼고, 고려 초기 분들이다.
청선고는 국가에서 편찬한 문집으로, 규장각에 보관하고 있다.
결론:
의령관의 남익훈(1640-1693)의 막내 동생 남지훈(1647-?)이가 편찬한 족보는 미비한 점이 많다.
66년 전은 지금처럼 자료가 미약하고, 설상 당시에 자료가 있다 했어도,
의령관인 남상철의 주도로 안동, 영양, 울진, 청송, 영덕의 의견을 무시하고 진행한 것으로 본다.
우리 영양관은 울평보의 영향을 받아서 편찬한 남두원의 족보 남종통기,
그리고 그 것을 필사한 남두채의 1-15세 상계도와 송정공파 남제명, 두원에게 찾아가 필사해온 남종통기의 기록을
우리는 진실로 믿어야 한다. 이상.
*양정공파 카페지기(청돈)의 변*
[문제점]
1. 시조 영의공 이하의 생몰년이, +120년을 더하여야 세대간 년차의 적용에 무리가 없다.
2. 단) 시조공과 2세간의 년차가 11년이라? 의문이 든다는 점???. (아들이 10세에 태어남)
3. 시조부터 20세 유손공까지 +120년을 더하여야 한다는 점.
4. 한때 논란이 되었던 시조공이 당대에, 신라국 표착설의 진실을 두고, 공방전이 재연될 수 있다.
5. 20세 유손공에 +120년을 더하여야, 21세 휘주공과의 년차에 무리가 없다는 점.
6. 고적보에는 직계만 기록하였고, 방계는 각각의 세대에 아들들만 기록한 점.
7. 당시의 방계의 자손들은 모두 직계에 흡수되었다는 말인가? 의문???.
8. 고적보에 의하면 1460~년대(을유년) 이후에 기록된것으로 보이며, 많은 문제점들이 보인다.
9. 관조이하 세대에 누락 세대(년차)가 보인다는 점.
10. 관조중에 영양 홍보공과 고성 광보공의 기록이 간략하다는 점 (삼관의 분관에 관한 기록).
각각의 관조분들의 기록을 종합하면, 관조분들의 세대(世代)가 16世(고적보)가 아니라는 점이 명확하다.
(고로 의령관 계유보(1693년) 이후에 작성한 고적보로 추정된다는 점).
11. 삼관이 논의를 하여 합리적인, 수긍(首肯)할 수 있는 답을 구할 수 있을 지, 염려와 기대가 됩니다.
12. 7世(之道)의 子에 1子 대수(大壽)가 있으나, 추가 언급이 없다.
13. 2세와 7세와 16세의 생몰년이 원본과 상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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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청돈님 보내주신 자료 감사합니다. 무지하게 연구를 많이 하신 것 같은데, 남씨 대종회 차원에서 모여 설명과 토론이 있어야 할것같습니다. 경주 김씨 대종회에서도 최근 의아스런 부분을 보완한 족보가 나왔으나 대종회에서 인정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남씨 상계 역시 계유보에서 미흡한 부분이 남두채(1715~?)의 남민이후 400년의 상계도로 채워지기는 하지만 어느 인물도 출처가 역사적으로 인정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네이브카페로 소통이 안되고, 댓글이 길어 질 것고, 무엇보다 토론의 장을 마련하였으면 좋겠습니다.
관심에 감사합니다.
지금의 현실은 참으로 답답합니다.
묘비나 비석의 명문을 부정하는 내용들이고, 또 자기들의 치적들(선조포함)이 사라지는 것을 두려워하여, 무엇이라도 일단은 부정을 하고 보는, 현실이 개탄스럽습니다.(넋두리)...
너무 솔직한 글인가요???
삼관이 모여 논이의 장도 마련하지 못하는 지금의 대종회들이 한심할 뿐입니다.
서로를 인정하면 무엇이 손해이고, 이익인지 아리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