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조의 중학생들 중, 한 개 조가 말리는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웹 툰 보기’를 6개월 공부로 결정하고, 강풀로 범위를 좁히더니, ‘강풀만화에서 본 우리사회’를 주제로 삼았다.
만화라는 것이 몰입도가 심해 이 아이들이 조금 떨어져 작품을 볼 수 있을지 궁금하다.
늘 필요하다 하면서도 나도 웹 툰을 보고 감상문을 적는다든지 비평을 해보진 않았다. 아이들 문화생활에서 아주 큰 자리를 차지하는데, ‘어린이문화’를 생각한다는 사람이 여직 그러지 못하고 있음을 안타까워하면서도 내가 만화를 잘 모른다는 생각과 함께 미루어 두던 참이었다.
누군가 좀 해주길 바라면서....
이제 아이들이 함께 하자하니 망설이면서 적극 말리진 않고 함께 해본다.
9월 15일 마무리 한 강풀 <무빙>이 무료일 때 폰을 이용, 먼저 보기로 하고 책도 나오길 기다려보기로 했다.
그리고 나머진 모두 가능한 발표순을 고려하며 책을 보기로 했다. (모모를 읽으며, 강풀의 작품이 기기처럼 거짓말로 되고 있는지 시간이 갈수록 풍부해지고 있는지 보자는 이야기를 했다.)
비용이 너무 많아 서로 돌려 읽기와 틈틈이 메모를 해서 모아 이야기 나누기 계획을 하고 헤어졌는데, 수요일 아이들과 모임을 끝내고 그날 밤에 바로 폰을 들고 <무빙>을 시작했다.
이미 아파트, 26년, 당신의 모든 순간, 이웃사람, 그대를 사랑 합니다는 만화나 영화로 봐서 강풀에 대한 느낌이 있는 편이다.
이 작가의 작품이 범죄, 살인, 폭력이 포함된 사건전개라 걱정은 되지만, 작가가 사람과 사회를 보는 시선은 중1아이들도 배울 점이 있으리라 믿고 시작한다.
대신, 그 외의 책들을 좀 더 보기로 했다.
만화를 보는 관점이나 만화와 사회학 같은 책들... 그리고 필요에 따라 우리사회를 들여다보는 책을 찾아보기로 했다.
무빙 ~
제목을 보니 ‘가만있어라’고 했던 일이 생각난다.
봉석의 엄마가
‘어른은 아이를 보호할 의무가 있어!’
‘누구든 좀 도와줘요!’
하고 외치는데, 지금 우리 옆에서 그렇게 소리치고 있는 이들 목소리이다.
희수아버지와 강훈아버지가
‘내가 지킨다, 우리 아들! 딸!’
‘괴물이 다시 될 수 있는 것도 나는 아버지니까, 또 괴물이 될 수 없는 것도 아버지니까!’
하는 그들 행동 역시 누군가에게 조정당하고 이용당하는 것, 이제 그만하겠다는 각오였다.
그들 역시 지금 우리 곁에 있다.
그리고 더 많아져야 한다. 아버지들!
마지막 장면,
봉석이 노란 비옷을 입고 날아다니며 생명을 구하는 장면에선 노란리본의 물결이 우리 사회를 구원하는 기회여야 한단 바램이 오버랩 되었다.
슈퍼맨에게 맡기는 그런 사회가 아니라...
무빙! 이 제목을 나는 ‘한 순간도 가만있지 마라!’ 는 말로 읽었다.
봉석은 ‘아기 장수 우투리’로 태어난다.
여전히 우투리를 기다리는 세상이어야 하는가 하며 우울한 감정으로 손가락을 놀리기 시작했다.
(하룻밤에 정주행을 했는데 검지손가락이 꽤 아프다. 엄지로 대체해야 할 정도로... 전체 45화인데 1화도 꽤 분량이 긴 편이다. 아이들 말로는 웹툰은 위로 넘기는 속도감들이 느낌이 다르다는데... 아직 정확히 그 차이는 모르겠다. 감정이 좀 넘쳐버리는 단점이 있긴 하지만 음악을 들으며 읽는 웹 툰 형식도 좋다. 아직 보진 않았는데 애니와 음향효과를 주는 것도 있다고 한다. 옆으로 넘기거나 콕 찍는 터치를 해야 넘어가는 것도 있고 나름 작품의 느낌을 살리려고 작가들이 선택을 하나 보다. 종이만화하고는 차별화 할 수 있는 지점들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놓쳐 버리는 문장들 때문에 여전히 난 책을 선호하게 된다. 역시 내가 좋아하는 건 문장이다. 그래서 웹 툰 중에서 미생과 송곳이 재밌다. 놓치고 싶지 않은 문장들이 있다.)
과거 우투리 설화와 다른 점은 봉석은 부모도 엑스맨(돌연변이) 이었다는 거다.
그러나 부모들이 누구나 그렇듯 내 아이가 특별하길, 또 한편으론 그렇지 않길 바란다.
그 바탕마음은 똑같이 사랑인데 참으로 일은 어찌 될지 모른다.
봉석 엄마 역시 봉석이에게
‘하지마!’
‘날지마!’
한다.
자기도 살아봐서 부모 뜻대로 안 될 거란 것도 알지만, 모래주머니를 채우고 신발을 신을 때마다 팔짱을 끼고 뒤에서 감시하듯 보며 잔소리를 해대는 모습은 대부분의 사랑 때문에 어리석어지는 부모들과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부모가 생각하는 왜곡된 아이의 행복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고3까지 아이를 누르고 누른다. 그래도 마지막 순간에 봉석을 믿는다.
자기 삶을 믿는 자이기에 부모의 어리석음이 무장 해제 될 수 있었다.
그러나 봉석이 처지는 또 좀 다른 측면이 있긴 하다.
우투리를 죽이려는 왕들처럼 누군가가 그냥 두질 않는다는 걸 봉석이 부모는 안다는 것이다.
이제 이 세상은 한 인간을 존재 자체로 봐 주지 않고 ‘쓸모’로 재단하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테스트를 하고 훈련을 시킨다.
그것이 (국)정원고등학교, 안기부, 국정원, 9427 부대로 표현된다.
테스트를 하러 왔다는 9427부대원의 말을 듣고 신경질적으로 희수가 하는 말,
‘고3은 지겹도록 테스트를 받는다!’
이다.
그러고 보면 양측이 다르지 않고 다 마찬가지인 것 같다.
봉석부모가 그런 측면을 확실히 안다는 것이지.
‘등급을 매겨라. 등급 외 등급을 찾아내라’ 하고 선생질을 시킨 아이들의 담임(국정원요원)은 어느새 아이들에게 선생님으로 남아 아이들을 지킨다.
그래야 한다고 작가는 절규한다.
현실에서 이렇게 아이들을 지켜내는 선생님은 정말 귀하다.
작 중에선 자기의 원래 임무를 버리고
‘아이들의 기록은 담임만 볼 수 있다’
며 목숨 걸고 아이들 기록을 내놓지 않는다.
누구나 자기를 뒤집을 수 있다는 희망을 본다.
세월호에서 함께 죽은 선생님들을 작가는 생각했을까?
그 힘은 아이들이 있어서 가능하다.
그러나 국정원의 냉혈한 남실장(차장)은 화를 낸다.
‘선생질 하랬더니 선생님 하고 자빠졌다고...’
이런 인간도 뒤집기가 가능할 진 일생의 의문이다.
이들 주변에도 아이는 있을텐데 말이다.
그래 봉석엄마가 그러지.
강훈을 붙잡고 있는 북 공작원을 향해 총을 겨루고는
‘내 아이라고 생각하면 내가 무엇을 할까? 내 아이랑 같다!’
이게 되는 사람과 되지 않는 사람의 차이는 크리라!
작가는 현재 우리 교육실정을 이렇게 비판한다.
목표는 쓸모 있는 인간, 방법은 등급을 매기는 교육,
그럼에도 뛰어난 인간이 자칫 더 빨리 자기 삶을 소외시킬 수 있는
그런 조건 속에 처한 우리를 돌아보라고
단순히 학원물이 아닌 폭력과 액션물로 말한다.
그걸 교육현실만 따로 떼서 생각할 수 없다고,
그것은 우리가 사는 이 땅의 총체적인 문제와 이어져있다고 말하고 싶기 때문이다.
북의 공작원 9427부대원이 학교로 들어왔을 때 왜 아이들을 데려가려하는지 봉석이 엄마는 묻는다.
그러니 북파공작원은
‘너희가 자꾸 준비를 하니 우리도 차세대를 준비해야 할 것 아닌가? 다 너희 때문이야!’
한다.
이 같은 끝없는 경쟁체제, 적대체제가 개인의 삶에도 똑같이 적용되고
이제 우리 사회 전반에 뿌리 깊게 박혀,
그런 생활이 비정상적이란 의심조차 해보지 않고
오히려 적응하려고 발버둥치고 있는 것이다.
‘고3이니까’
라는 무서운 말로 지켜야 할 크고 작은
수많은 가치들을 내려놓고 만다.
그리고 또 작가는 묻는다.
진정 통일을 원하는 세력이 진짜 있는가?
남과 북의 기득권자들은 이 체제 속에서 자기들의 존재기반을 유지하려고 한다는 것을,
오히려 그 둘은 같은 목적을 가진 동지란 것을 말하고 싶어 한다.
그거야 만화에서 얘기하지 않아도
협상테이블이라고 앉아 있는 그들 태도를 보면 다 알지만 말이다.
픽션 이지만 정상회담을 앞두고 일으킨 김일성암살 장면은
평화체제를 바라지 않는 숨은 세력을 암시한다.
이들은 냉전체제의 고수를 위해 아군, 적군을 가리지 않고 무분별한 폭력을 행사한다.
우리가 교육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건강한 아이들 삶이 보장되고 그런 환경에서 안전하게 아이들을 돌보기 위해서
해결해야 할 첫 번째 과제가 평화체제 이기에
작가는 학교를 공간적 배경으로 삼고
남북의 싸움질과 국정원의 비인간성을
그 자리에서 격렬하게 폭로한다.
장르를 액션으로 구분 할 만큼 싸우는 장면의 컷 수가 많다.
누가 싸우는가?
국정원과 9427부대원 대 (vs) 부모와 선생님 그리고 아이들 이다.
(ㅋ천적 웹툰이 생각나네. 천적에서도 한 번 다룰만한 천적대결이군!)
후자의 무기는 무엇인가?
물론 이들은 뛰어난 능력의 소유자들이다.
날 수도 있고, 총상마저도 금방 아물기도 하고, 빠르기와 파워가 엄청나기도 한
그런 돌연변이들이다.
참, 소머즈 같은 감각을 가지고 정확한 사격술을 가진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런 힘은 상대도 가지고 있고
오히려 상대는 적의 힘을 이용할 수단(꼼수)도 부린다.
납치극을 벌이지 않는가?
그러나 후자가 이기는 해피엔딩을 작가는 역시 아주 보수적인 방법으로 끌어낸다.
사랑!
누군가 한 이야기를 기억한다.
혁명(revolution)이란 글자 속엔 사랑(love)이 있다고.
사랑 없는 혁명은 아무것도 아닐 것이고 사랑 없이는 이룰 수도 없는 것이 혁명이다.
모든 뒤집기는 사랑에서 비롯됨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진정한 자기애이든, 이성에 대한 사랑이든, 모성, 부성애이든 말이다.
그 사랑마저 무기로 이용해먹으려는 자들도 있지만
다행스레 작품 속에서 참된 방향으로 결말이 난다.
실제 우리 사회가 작 중에도 변한 건 한 가지도 없지만
인물들 속에서 희망을 본다.
우리 속에 들어있는 공통된 마음,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공통된 동기!
사랑이 누구에게나 있다는 것을.
우리는 다른 사람의 사랑으로 이렇게 살아간다는 것을.
아무리 거대하고 비겁하고 말이 안 되는 세력과 시스템에 속해 있어도
내 속에 든 사랑이라는 씨앗이 모여 그들을 균열시켜나가는,
아니 사랑으로 덮어씌우는 방법 밖에 달리 무기가 없다는 것을.
치킨집에서 일하는 남과 북의 흉터투성이 두 사나이 사이엔
그들이 사랑하고 그들을 사랑하는 어린 희수가 있다.
옥탑방에 사는 어머니와 북에 억류된 아버지 사이엔
이 고난을 이기고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주는 아들 봉석이 있다.
시장 과일, 채소가게엔 힘을 컨트롤하기 어려운 아버지가 자기를 누르고 죽어 사는 이유엔
강훈이 있다.
이들은 계속 이 한반도에서 살아내야 한다.
봉석의 엄마 말을 기억하는 자들이다.
‘괴물이 아닌 인간이려면 남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알아야 한다....'
내가 가진 능력은 남에게 이용되어도 안 되고, 내 잘 난 척을 위해서도 써선 안 된다.
우리에게 능력이 있는 이유를
봉석이 어릴 때,
이야기 초반에서
봉석엄마는 이렇게 알려주고 있다.
그런데 강훈은 희수와 봉석과 달리 다시 국정원에 취직한다.
아! 강훈이 가족이 깨닫기 위해 이 만화는 다시 되풀이 되어야 한다.
안타깝다!
‘국정원이나 북 공작원들의 액션과 전문성을 혹 멋있다고 생각하는 아이들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땜에 이런 작품을 볼 적이면 노파심이 일어나곤 한다.
소머즈, 엑스맨, 은밀하게 위대하게 따위의 영화들이 곳곳에서 보일 적엔
이 만화가 다소 유치해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에 드는 것은 제목이다.
‘무빙’
작가는 내 생각과 같을까?
달라도 상관없지만.
나는 그렇게 읽었으니까.
한 순간도 가만있지 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