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계절의 시| 신기섭
묘한 대비 외 1편
-계동, 창덕궁을 지나며
흑호랑이해 임인년 정월 어느 날,
한복 패딩복 입은 청춘남녀들
옥타브 높여 웃으며 러시아어, 영어 뒤섞여
손잡고 오가는 고궁 뜨락,
시간의 역사 고여있는 창덕궁
왕의 위용 뽐내던 인정전仁政殿 뒤켠
왕의 침전이기도 한 희정전熙政殿,
한일합방 서명 치욕의 현장임을 저들은 알고 있을까.
2층 누각 위엄 서린 왕의 길 양 켠
정1품 종1품, 정9품 이르기까지
저마다 직분에 충실했다면 나라가 망했을까.
창덕궁 담 너머 우뚝 키 돋운 현대빌딩,
세계건설 조선중공업 석권한 시절 영광이
창립자 아들 의문의 자살로
남북교류 어두운 그림자 상흔 안고
주연, 조연 누군지도 알지 못하는
역사의 아이러니에 묻힌 채
오늘도 계동길 청춘남녀, 희희낙락이다.
--------------------------------------------------
설악산 마지막 짐꾼 임기종씨
‘저 자그마한 체구에 85kg 냉장고 울러 매고
울산바위 암자까지 올랐다니!’
초로(初老) 사내, 영상으로 대면하며 믿기지 않아 눈을 비볐다.
평생 그를 설악에 오르내리게 한 놀라운 힘의 원천은
무엇일까?
돌보아주어야 할 어리숙한 아내에 대한 사랑일까.
오늘도 사내는 위태로운 벼랑 건너뛰는 산양 되어
나뭇잎 질겅질겅 씹으며 계곡물로 허기 달래며
공룡능선 오른다.
설악 등에 지고
드넓은 동해바다 품고
거친 바람, 파도 다스리며
만산萬山 발아래 거느린
숨막히는 절경 바위산 봉우리,
하느님이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산 만들려
내로라 자부하는 산들을 불러 모았는데
그만 일만이천봉 다 차버려
설악산에서 멈추고 말았다는 울산바위.
그는 금강산보다 더 잘 생긴 설악산 울산바위 닮았다.
-------------------------------------------
신기섭
울산 출생.
1983년 《심상》으로 등단.
시집 『수부의 깊은 잠』, 『그대 꿈꾸던 세상 눈떠 오는가』, 『해무경보』
영한시집 『사막의 장미석(Rose Stone in Arabian Sand)』
자전소설 『매, 세계를 날다』. 정치경제칼럼집 『정책은 선택이다』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