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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마이너리그에는 유망주들이 정말 많습니다. 150km가 넘는 강속구를 던지는 투수들이 한 팀에도 서너 명씩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에 성공하는 경우는 극히 드뭅니다. 재능이 떨어져서 그런 것보다는 실력 발휘의 기회를 갖지 못해서 그런 경우도 많습니다.
삼성의 외국인 선수 크루세타도 최고 구속 158km를 던지던 유망주였지만 빅리그에서 이렇다할 기회를 잡지 못했습니다. 2007년에는 의사의 처방전에 따라 약을 먹었다가 스테로이드가 검출돼 50경기 출전 정지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다시 재기해 작년에는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의 마운드에 서기도 했지만 결국 빅리그 정착에는 실패했습니다.
삼성에서는 초반에는 쉽지 않았지만 이제는 가장 믿을만한 선발 투수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프란시스코 알베르토 크루세타의 야구 생애를 들어봅니다.
-처음 다저스와 계약을 한 것이 언제였나.
▶1999년에 내가 만 17살 때 다저스와 계약을 했다. 18살 때부터 프로리그에서 뛰었다.
-그런데 마이너리그 기록은 2002년부터 시작되는데.
▶첫 두 해는 도미니칸 서머리그에서 뛰었다. 당시 다저스 도미니칸 스쿨에서는 내가 최고 유망주였다. 거기서 마지막 시즌에 평균자책점이 1.50이었다. 그리고 2002년에 미국으로 가서 싱글A에서 미국 프로 생활을 시작했다. 그런데 그 해에 클리블랜드로 트레이드됐다.
-잘 나가는 유망주였는데 트레이드가 됐다.
▶다저스는 당시 마무리가 필요했다. 그래서 인디언스에서 밥 슈이를 받았는데 클리블랜드가 나를 지목했다. 나와 리카르도 로드리게스가 인디언스로 갔다.(당시 크루세타는 8승5패에 2.80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하고 있었고, 인디언스로 가서는 하이 싱글A에서 2승 무패로 시즌을 마쳤습니다. 리카르도는 당시 1번 유망주로 후에 레인저스에서 뛰었습니다.)
-그리고 발전이 상당히 빨랐는데.
▶2003년에는 더블A에서 뛰었고, 2004년에는 더블A에서 시작해 트리플A로 갔다가 마지막에는 빅리그까지 올라갔다. 9월에 빅리그에 올라가 2경기 선발로 나가서 1패를 했다.
-그런데 다음 해에 또 팀을 옮기게 된다.
▶2005년에 인디언스 트리플A에서 뛰고 있는데(7승5패) 구단 관계자가 40인 로스터에 자리가 필요해 나를 뺄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웨이버 공시가 됐는데 시애틀이 나를 데려갔다. 그래서 다시 팀을 옮겨 타코마(시애틀 트리플A)로 갔다.
-그럼 혹시 추신수나 백차승과 함께 뛰었나. 그들에 대한 기억이 있나.
▶두 선수 모두 트리플A에서 함께 뛰었다. 기억이 생생하다. 두 선수 모두와 친했다. 추와 백차승과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특히 삼성 라이온스와 접촉을 하게 되면서 백차승에게 한국 야구에 대해 물었고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같은 팀에 있을 때도 둘 다 선발 투수였기 때문에 참 이야기를 많이 했었다.
추신수와는 재미있는 일화도 있다. 당시 추는 스폰서에서 배팅 글러브와 스파이크 등 장비를 많이 지원받고 있었다. 그런데 배팅 글러브들이 아주 좋았다. 그래서 내가 연습할 때 쓰게 몇 개 달라고 했더니 30개를 주더라. 둘 다 정말 좋은 친구들이었고, 아주 가깝게 지냈다.
-아퀼리노 로페스와도 타코마에서 함께 뛰었나.
▶로페스는 나보다 앞서 타코마에서 뛰었다. 그러나 도미니칸 윈터리그에서는 같은 팀에서 뛰었다. 로페스와도 항상 피칭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좋은 친구로 지냈다.
-그 후에도 두 번이나 팀을 옮겼는데.
▶2006시즌이 끝나자 시애틀이 나를 웨이버에 올렸고 텍사스에서 지명해 데리고 갔다. 그리고 다시 트리플A에서 한 시즌을 뛰고는 웨이버에 올라 디트로이트 타이거스로 갔다. 타이거스에서는 구원 투수로 13경기를 뛰었지만 대부분 트리플A에서 보냈다.
-95마일(153km)의 강속구를 지녔고, 구원으로 뛸 때는 최고 98마일(158km)까지 던졌다고 들었는데 빅리그에서 정착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나를 입증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한 두 경기 못하면 곧바로 마이너리그로 갔다. 꾸준한 기회를 주지 않으니 내 실력을 보여줄 수가 없었다.(크루세타는 마이너리그에서 58승44패에 평균자책점 3.82의 준수한 성적을 남겼습니다.)
-그런데 2007년 시즌을 시작하면서 50경기 출전 정지를 당한 기록이 있다. 약물 검사에서 스테로이드가 나왔었는데.
▶참 어이없는 일이었다. 그 겨울에도 난 도미니칸 윈터리그에서 뛰었다. 그런데 무릎이 좀 아팠다. 그래서 그곳의 의사에게 진단을 받고 의사가 준 처방전으로 약을 받아먹었다.
그리고 스프링 캠프에 가서 누구나 받는 검사를 받았는데 금지약물이 나왔다는 것이었다. 설명을 했지만 일단 그렇게 되면 선수의 책임이 되고 만다. 그 후로는 약을 먹을 때도 정말 조심했다. 그 사건 이후로 마이너와 메이저에서 10번 이상 검사를 받았지만 한번도 (양성 반응이)나오지 않았고 지난 5월에 문학 구장 경기가 끝나고도 검사를 받았지만 이상이 없었다. 야구를 하면서 스테로이드를 사용한 적은 한번도 없는데 그렇게 적발돼서 너무 힘들고 속상했지만 그 후로 더 조심하고, 또 더욱 열심히 운동을 하게 됐다.
시즌 초반 고전하던 크루세타는 조계현 코치 등의 도움으로 새구질을 배우고 투구동작을 가다듬으면서 삼성의 믿을만한 선발로 거듭났습니다.
-한국행은 어떻게 결정하게 됐나. 미국 야구에서는 더 이상 희망이 없었나.
▶올 초까지도 많은 팀들이 마이너리그 계약을 하자고 연락이 왔었다. 그러나 메이저리그의 보장은 없었다. 그런데 에이전트가 한국 팀과 협상을 한다고 했다. 한국이나 아시아에 와본 적은 없었다. 그러나 이곳이 기회가 있다고 생각했다. 마이너리그보다는 연봉도 많고 그리고 무엇보다 선발 투수로 자리 잡을 기회는 주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언어, 음식, 풍습, 야구, 그 모든 것이 달랐을 텐데 적응은 어려움이 없었나.
▶처음에는 음식 때문에 아주 힘들었다. 그러나 갈수록 적응이 됐다. 김치는 아직도 맵지만 생선 요리와 갈비를 아주 좋아한다. 그리고 동료들이 모두 너무 잘 해줘서 적응하는데 문제가 없었다. 내게 자신감을 심어준 것은 동료들이었다.
-성격이 아주 조용한 편이라던데.
▶그건 아니다. 내가 한국말을 못해서 그렇지 평소에는 아주 말도 많이 하고 활달한 성격이다. 한국말을 잘 하면 아주 많이 떠들 것이다.(웃음) 동료들 중에 윤성환, 채태인, 차우찬 등과는 아주 친하게 지낸다. 모두 잘 해준다.
-한국 야구는 어떤가, 많이 다를텐데.
▶진짜 많이 다르다. 스몰볼을 한다. 기본기가 철저하게 잘 돼 있고, 미국처럼 타자들이 무조건 공격적으로 휘두르지는 않는다. 선구안도 좋고 타자들이 아주 까다롭다. 스트라이크존도 어떤 때는 조금 좁다. 그래서 적응이 필요했다.
-4월에 고전한 것은 그런 적응에 힘들었기 때문인가.
▶꼭 그런 것은 아니다. 스프링 때도 나는 잘 했다. 4월에는 내가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에 고전했다. 패스트볼도 커브도 스트라이크존을 찾지 못했다. 투구 동작에 문제가 있었다.
-어떻게 문제를 잡았나.
▶조계현 코치, 전병호 코치와 함께 문제점들을 고쳐나갔다. 왼발의 킥을 조금 더 높게 했고, 템포도 빨리 가져갔다. 그러자 구위도 훨씬 살아나고 타자들과 적극적으로 상대할 수 있었다. 제구력도 훨씬 좋아졌다.
-새로운 구질도 배웠다던데.
▶조계현 코치에게 체인지업과 싱커를 배웠다. 예전에도 던졌지만 미국에서 불펜 투수로 뛸 때는 거의 사용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조 코치님에게서 아주 효과적인 체인지업과 싱커를 배웠다.
-외국인 선수들은 투입되자마자 실력발휘를 해야 한다. 그런데 4월에 안 좋았으니 걱정도 많았겠다.
▶진짜 걱정을 많이 했었다. 당시에 어머니와 집사람, 그리고 6개월 된 어린 딸 브리아나까지 모두 한국에 왔었다. 그런데 제대로 해내지 못하니 정말 미칠 지경이었다. 그때 쫓겨나면 모든 것이 끝이었다. 그래서 단장님과 감독님에게 정말 감사드린다. 내가 실력을 발휘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주신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그리고 투수 코치가 도와주셔서 내 길을 찾을 수 있었다. 그래서 더욱 열심히 운동을 한다.
-이젠 한국 야구에 완전히 적응했는가.
▶반 시즌을 보냈고 이제 타자들도 많이 안다. 내 공에 대한 자신감도 높고 또 타자들 공부도 많이 한다. 스카우팅 리포트가 많은 도움을 준다.
-유독 어려운 팀이 있는지.
▶한국 야구는 모든 팀들과 타자들이 상당히 까다롭다. 그런데 그 중에도 내게 가장 큰 어려움을 주는 팀은 ‘두산’이었다. 스윙을 많이 하지 않고 컨택트하면서 많은 피칭을 하게 만든다. 그러나 최근 대결에서는 승리를 했다. 이젠 이길 때가 됐던 것 같다.(웃음) 네 번째 만에 승리했다.
-타자들 이름도 기억하나.
▶김현수, 김동주, 그리고 최준석.(발음이 의외로 정확했습니다.) 늘 내게 어려움을 주는 타자들이었다. 특히 10번 최준석은 문제였는데 지난번 대결에서는 분명히 달랐다. 이제 나는 또 다른 투수로 발전했다. 오히려 외국 선수들은 미국 스타일 야구를 하기 때문에 내겐 쉽다. 그러나 한국의 좋은 타자들이 더 까다롭다.
-어린 시절 얘기를 해 달라. 라 베가에서 태어났는데.
▶라 베가는 산토도밍고에서 차로 두 시간 정도 떨어진 도시다. 나는 어려서부터 길가에서 친구들과 야구를 했다. 도미니칸의 모든 남자애들을 야구를 한다. 오렌지 쥬스 박스로 글러브를 만들고 나무 막대기와 종이를 뭉쳐서 만든 공으로 야구를 했다. 그리고 10살 때 처음 리틀리그에서 야구를 했다.
-언제 프로 선수가 될 결심을 했나.
▶16살 때쯤 된 것 같다. 나는 1루수를 보다가 우익수로 바꿨다. 그런데 내가 외야에서 3루로 송구를 하는 것을 보고는 투수를 할 수 있겠다고 했다. 그래서 1년 동안 연습을 하고 17살 때부터 투수를 했다. 그때 다저스가 곧바로 나를 사인했다. 그때 나는 어리고 깡말라서 130km 정도 겨우 던졌다. 그런데 다저스 아카데미에서 잘 먹고 계속 운동을 하면서 키도 크고 몸도 커지면서 계속 구속이 늘어 2년 후에는 150km가 넘는 빠른 공을 던지게 됐다.
-아퀼리노 로페스는 어려서 아주 어렵게 살았다고 했는데 가정은 어땠나.
▶우리는 부자는 아니었지만 아주 가난하지도 않은 중산층 집안이었다. 누나와 3형제가 있는데 부모님은 교육을 강조하셨다. 그래서 고등학교까지는 공부도 열심히 해야 했다. 2시까지 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그 후에 깜깜해질 때까지 야구를 했다. 동생 둘이 있는데 바로 밑의 동생 호세도 야구를 아주 잘 했다. 외야수였는데 휴스턴 애스트로스와 계약을 맺고 마이너리그에서 뛰었는데 발목을 크게 다쳐 수술을 받았지만 운동을 계속할 수 없었다. 막내 동생은 야구보다는 공부에 소질이 있어 지금은 대학에 다닌다. 누나는 결혼을 했다.
-한국 생활은 어떤가. 휴일에는 무엇을 하나.
▶아주 편하고 좋다. 오직 야구만 할 수 있어서 좋다. 가족들은 모두 도미니칸으로 돌아갔고 나는 야구만 한다. 그래서 혼자 지내는 휴일이 싫을 때도 있다. 혼자 대구 중심가에 나가기도 하지만 대부분 집에 있다. 쉬고 싶을 때도 있지만 때로는 휴일 없이 계속 야구만 했으면 좋겠다.(웃음)
-오직 야구가 전부인 것 같은데 야구가 그렇게 좋은가.
▶야구는 정말 재미있다. 그리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다.(함께 했던 엄홍 과장은 크루세타가 늘 야구와 산다고 설명합니다. 던지지 않는 날에도 항상 캐치볼을 하면서 구질을 연습하고 훈련을 대단히 열심히 하는 선수입니다.) 빨리 배우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 빨리 배우려면 자나 깨나 운동하고 구질을 연습하고 항상 달리고 그래야만 생존할 수 있다.
-이젠 삼성의 에이스 역할을 한다는 말도 나온다. 팀에 부상도 많다. 큰 의무감을 느끼는가.
▶나는 에이스는 아니다. 그저 팀의 우승에 도움을 주는 것이 가장 큰 목표다. 우리는 모두에게 주어진 의무가 있다. 선발은 선발대로, 구원은 구원대로, 타자는 타자대로 모두 팀에 의무가 있다. 우리 팀에는 12명의 투수가 있으면 우리 모두가 에이스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맡은 역할을 열심히 하면 우리는 충분히 플레이오프에 갈 기회가 있다고 생각한다.
-최근 페이스가 아주 좋다. 그런데 지난 2년간은 구원 투수로 뛰었는데, 후반기에도 선발로 계속 좋은 모습을 유지할 자신이 있나.
▶물론 구원 투수에서 선발로 전환하는 것이 더 어렵다. 그러나 이제 선발로 완전히 적응이 됐고 체력적으로도 전혀 문제가 없다. 등판일에 맞춰 어떤 식으로 준비하고, 또 던지고 나면 어떻게 운동을 하고 휴식을 취하고 다음 등판을 또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를 이젠 완전히 습관처럼 알고 있다.
그리고 이곳에서 나는 매일 배운다. 미국 마이너에서는 오직 유망주들 몇 명만 열심히 지도를 하고 나머지는 알아서 하라는 식이다. 그러나 한국에 와서는 정말 많이 배우고 있고, 야구를 즐겁게 하고 있다. 후반기에도 문제없다.
-미래에 대해 생각해 봤나. 메이저리그에 다시 도전하고 싶은 생각도 있나.
▶미래는 알 수 없다. 당장은 후반기에 잘 해서 팀이 플레이오프에 가는 것만 생각하려고 한다. 내 희망이라면 내년에도 삼성에서 뛰는 것이다. 아주 좋은 팀이고 도시도 마음에 들고, 그리고 코치진과 동료들도 너무 좋다. 메이저리그는 글쎄, 잘 모르겠다. 내게 기회를 주지 않은 곳이었다. 마이너로는 절대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나는 코리안 빅리그에서 뛰고 있다. 이곳에서 나의 남은 야구 생애를 보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유니폼이 아닌 사복을 입은 야구 선수를 대하면 늘 운동장과는 사뭇 다른 느낌을 줘서 놀랄 때가 많습니다. 늘 사람 좋은 웃음에 예상과는 달리 활달한 성격의 크루세타는 한국 야구에 제대로 적응을 하며 즐겁게 야구를 하고 있었습니다. 초반의 부진이 있었기에 주어진 기회를 더욱 소중하게 여기면서 운동을 항상 열심히 하는 프로였습니다.
조계현 코치는 “야구에 대한 정열과 의지가 대단한 친구다. 처음에는 한국 야구를 조금 얕보다가 벽에 부딪히기도 했지만 아주 열심히 해서 극복했다. 아직 나이도 어리고 가능성이 아주 높은 투수다. 기본적으로 빠른 공이 좋고 타점이 높아 변화구도 효과적이다.”라며 높은 평가를 했습니다.
미국 야구에서 주어지지 않았던 기회를 준 한국 야구와 삼성에 보답하겠다는 크루세타의 모습을 오래 보고 싶은 것은 삼성 팬들만의 바람은 아닌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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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파란 글로 된게 맘에 확 들와서 색바꺼바써엽 크루세타 삼성에서 은퇴할때까지 롱런 하는 브롬바 처럼 한국형 용병이 되길....
코리안 빅리그, 가슴에 확와닿는 말이긴한데 그에 반해 초라한 대구구장.. 어서 빅리그 다운 대구구장을 지었으면...
그러게요....범일이가 언제 지어줄가요;;;
그래도 조계현 코치도 밥값은 하는군요;;;;외국선수 전담 투코시키면 안될까용ㅜㅜ 양일환 투코 다시 불러오구 ㅠㅠ
아.. 크루세타선수.. 초반에 못할때 미워해 미안합니다.. ㅠ.ㅠ 오래오래 활약하는 좋은 선수가 되길 빕니다 ^^
올한해 좋은 성적 올려서 내년이고 내후년이고 계속 봤으면 하네요..용병 운이 지지리도 없는 삼성이었는데 좋은 보배가 되길 바랍니다..
오~~크루세타...개안네~~개안네~~실력보단 역시 인간이 먼저...
크루세타 좋아~~ 계속 그렇게만 해주라
브롬바 처럼 삼성유니폼입은 모습 오랬동안 보고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