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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교가 '한 덩치'로 몰려 온댄다... 우리는 졌다
"큰일났다" 이슬람교가 한국으로 거대하게 들어온댄다
최근 SBS의 기독교를 폄훼한 방송 프로그램인 '신의 길 인간의 길'은
예수를 신화적 존재로 결론지었다. 반면 이슬람교에 대해서는 호의적
시각을 드러내 물의를 빚었다.
이러한 방송에 대해 교계는 이슬람이 한국을 포교하기 위한 차원에서
SBS를 이용해 기독교를 비하하고 상대적으로 이슬람을 우월한 종교로
포장한 것으로 보고 있다. 즉 이슬람 홍보용 방송물 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이슬람이 대한민국을 이슬람화하기 위한 포교전략이 갈수록
다양하면서도 거세지고 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그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이에 대해 한국이란인교회 담임 이만석 목사는
"한-아랍소사이어티(KAS)를 통해 이슬람은 한국 정부를 등에 업고 엄청난
규모의 오일 달러를 들여와서 한국 경제의 주도권을 쥐고 중동 유학생들을
대량으로 보내 대학을 점령할 것" 이라는 점과 "많은 이슬람권 근로자들이
한국 여성들과 결혼하여 자녀들을 대량 출산하고 매스컴에서는 이슬람의
긍정적인 면만 홍보하게 된다면 한국교회는 어떻게 대응할 수 있는가" 라며
한국교회의 이슬람 대책마련을 촉구했다.
'이슬람 대책 홍보 영상물'도 만들었다...그야말로 홍보다
http://www.youtube.com/watch?v=zdNg8Dotovc
카톡으로 이 동영상을 올려주면서 홍보해주고 기도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기라성 같은 거대한 주의 종들도 하나가 되지 못해 이기지도 못할 싸움을
조무래기 성도가 기도한들 먹히겠나 싶었다.
이러한 가운데 '이슬람이 몰려 온다' 라는 이슬람 대책 홍보영상물이
한기총을 통해 각 교단 총회에 배부됐다. 오는 2020년까지 한국을
이슬람의 거점화로 삼으려는 이슬람권의 포교전략이 심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교회에 그 심각성을 제기하고 대안을 마련하게 하는
측면에서 이 영상물 제작 배부는 바람직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영상물이 한기총의 이름하에 각 교단 총회에 배부해 전국
교회에 그 심각성을 홍보하는데 활용되도록 했지만, 이 홍보영상은
이슬람권이 한국을 2020년까지 이슬람 화 한다는 계획과,
한국 내 무슬림 인구가 15만 명이며, 해외근로자까지 포함하면 40여만
명에 이른다는 것을 소개하고 있다. 또 목회자의 10%와 평신도 27%가
이슬람에 대한 이해부족으로 현재의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사실들을 지적하고 있다.
이밖에도 이 영상물에는 10년 후에 국내의 무슬림 인구가 100만 명으로
될 것을 경고하고 있다. 또 이 영상자료에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부정과
비 이슬람인들에 대한 폭력의 정당화, 911사건과 각종 테러행위 국내에서의
이슬람 화 전략으로 국내 곳곳에 막대한 석유자본으로 이슬람 사원 확대 개편,
사우디아라비아의 후원을 통한 2009년부터 국제 이슬람학교 설립 추진,
이슬람문화센터 건립, 꾸란 번역위원회 통해 꾸란의 현대 국어화 진행,
이슬람 대학 건립 추진 경기도 용인 8개 학과 800명 규모 수재들 무슬림
개종 유도, 이슬람 서적 출판위원회 통해 문서선교, 한국여성들과 결혼과
출산 통한 이슬람 화 등의 전략들을 공개하고 있다.
수백개 지푸라기가 큰 돌덩이를 어떻게 막을 것인가?
따라서 이미 국내에 심각하게 퍼져 있는 이슬람 세력과 국내의 이슬람
포교활동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한국교회가 알고 이에 한국교회 전체가
대응전략을 통해 막아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또 이 자료에서는 급격히 무슬림 화 된 유럽 국가들의 상황을 소개하는
한편, 한 국가를 이슬람 화하는 그들의 단계별 전략을 소개하고 있다.
한 국가에서의 무슬림 인구 분포에 따라 시행되는 그들의 포교전략과,
전체 인구의 20%가 될 때 테러단을 조직한 폭동이 시작되며 40%
이상일 때 본격적인 학살이 시작되며 이러한 현상들이 한국이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영상물에서는 국내 이슬람 화에 대한 대책방안으로 한국교회의
눈물의 기도와 아울러, 초교파적으로 이슬람 대책 사무실을 두고, 각 총회
마다 이슬람 대책특별위원회를 구성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또 각 교단 이단대책위에서 이슬람에 대한 특별위원회 조직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한국도 처음엔 단일장로교회로 설립됐다
한국장로교회가 독로회 형식으로 조직된 것은 평양신학교의 졸업생
7명이 안수를 받은 1907년 9월 17일을 기해서였는데, 이 때 네 장로교
선교부가 한국에서의 단일장로교회설립에 합의하여 그 통일을 성취할
수가 있었다. 초대 독로회장에는 모페트가 선출되었다.
독로회 창립 당시의 교세는 선교사 32명, 한국인 목사 7명, 세례교인
1만 7890명이었고, 교회 수는 1,022개 소, 각급 학교 402개 소에 달하였다.
그 뒤 각 도내에 노회가 계속 조직되어 1912년 9월 1일에는 평양 여자
성경학교에서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소집되어 처음으로 장로교회는
총회를 조직하게 되었다.
이 총회에는 전국 각지에서 선교사, 한국인 목사와 장로 등 모두 221명이
총대로 참석하여 총회장에 언더우드, 회계에 블레어(Blair,W.N.)를 선출하고,
그 밖의 임원에는 한국인 회원이 선출되었다.
총회는 각 노회에서 총대로 피선된 목사와 장로로써 구성하되, 목사와 장로의
회원 수는 동수인데, 총회는 장로교회의 최고 치리기관으로 매년 소집된다.
이 창립총회를 기념해 한국장로교회는 중국 산둥성 라이양(萊陽)에 한국인
선교사를 파견함으로써 선교하는 교회로 발돋움하였다. 장로교회의 한국
선교는 의료선교와 학교교육에서도 큰 공헌을 하였다.
교회가 처음엔 교육사업과 의료사업에 정진했었다
1885년에 이미 서울에 고종의 윤허로 광혜원을 설립한 바 있는데,
이것이 뒤에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으로 발전되었고, 그 밖에도 평양에
기홀병원, 부산·대구·여수의 나병원, 세브란스의 결핵병원 등을 설립하여
병고에 시달리는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과 함께 구제 사업을 펴나갔으며,
교육 사업으로는 경신학교·정신학교·숭실학교와 평양신학교를 설립하여
민족교육에 정진하였다.
이 결과 1909년 당시 장로교계 학교 수는 이미 600개가 넘어섰고,
학생수도 1만 5000명에 달하고 있었다. 한국장로교회는 이와 같은
의료사업과 교육 사업을 통해 신앙의 보존과 민족정신의 함양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일제는 기독교회가 그들에게 암적 존재임을 깨닫고 교회에 대한 탄압을
가중시켜 이른바 ‘105인 사건’을 날조했는데, 105인의 실형자 가운데
97명이 장로 교인이었다. 이는 장로교회의 민족주의적 배경을 보여주는
것이다.
사회운동에도 참여해 일제민족말살정책에도 대항했다
이러한 배경은 3·1운동으로 이어져, 수많은 교회지도자와 교인들이
참가하여 일제통치에 항거함으로써 교회의 전통과 민족정신을 세계
만방에 과시하였다.
그 뒤 교회성장과 함께 점차 토착적 민족교회 지향의 종파운동이 싹트기
시작하여, 대구 이만집의 조선기독교회, 봉산 김장호의 기독교회, 차학연
(車學淵)의 자유교회, 함태영·전필순의 적극신앙단(積極信仰團) 등
종파운동도 일어났다.
1920년대부터 사회풍조의 변천과 농촌의 피폐라는 현실에 직면한 교회는
사회운동에 참여함으로써 일제의 민족정신말살정책에 대항하였다.
즉, 전국적인 규모의 농촌강습소를 통하여 농민들의 경각심을 일으켜
농촌부흥을 도모하였고, 협동조합운동으로 소작인의 권익옹호에 앞장
섰으며, 유곽폐지와 단연금주운동(斷煙禁酒運動)을 적극적으로 추진해
나갔다.
나라가 '해방'이 되자 교회는 '내분'이 일어났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말에 이르러 일제의 탄압은 더욱 극심해져,
이러한 사회운동마저 마비되고, 만주로의 강제이민으로 인한 농민의
격감은 점차 교회의 누출현상을 가져와 문을 닫는 교회가 속출하였다.
그러다가 마침내는 신사참배를 강요당해 교회의 신성은 더럽혀지고,
교회당은 가마니공장이나 헌병대로 징발되었으며, 선교사들은 국외로
추방되었고, 주기철을 비롯한 수많은 교인들이 순교 또는 투옥당하는
박해를 겪었다.
8·15광복이 되자 교회는 재건과 부흥에 힘썼다.
그러나 곧 장로교회 안에서는 내분이 일어나기 시작하여 분열이 생겼다.
원인은 복합적인 것이기는 하나 대체로 신학적인 면과 정치적인 면으로
집약된다.
신학적인 원인은 광복 이전의 보수단일신학(保守單一神學)과 거기에
수반된 보수적 교권이 광복 후에 진보적인 새 신학사상과 충돌한 데
있었으며, 정치면에서는 표면상으로는 신학사상을 앞세웠지만 실제는
교권장악을 위한 분쟁에 있었다.
이러한 분열은 특히 보수파 장로교회 안에서 주로 생겨났다.
그 첫 번째로 나타난 분파가 고신파(高神派)의 분립인데, 일제 말기에
신사참배에 항거한 장로교인들 가운데 투옥되었다가 석방된 목사·장로·
전도사들이 경상남도에서 목사 한상동을 중심으로 교회재건을 위하여
고려신학교(高麗神學校)를 설립하였다.
한국이 '신학'을 알면 얼마나 알까?
그리고 일제치하 때의 전향문제, 신앙보수의 문제들이 엇갈려 경남노회
내에서 분쟁이 일어났고, 이것이 총회로 비화되어 1952년 총회에서
고려신학교 중심의 교회들이 이탈, 독립적으로 노회와 총회를 조직함
으로써 완전 분립되었다. 고신파 교회의 신학은 칼뱅주의신학 중에서
전통주의신학을 표방하고, 네덜란드의 개혁교회와 선교적 유대를
가지고 있다.
두 번째가 기독교장로회의 분립이다. 이는 1947년 봄에 서울역 앞 동자동에
있던 장로교의 조선신학교에서 일부 학생들이 목사 김재준의 성서관(聖書觀)을
반대하여 일으킨 신학적 문제가 발단이 되어서 생긴 분립이다.
1935년에 평양 장로회신학교가 신사참배 사건으로 폐교당한 뒤 우리 나라의
목회자 양성을 위해 교회지도자들이 한국교회 자력으로 1940년 4월 서울에
세운 신학교가 조선신학교였다.
그러므로 광복 직후 남한에서는 장로교의 유일한 총회 직영 신학교였는데,
김재준의 성서관을 반대하고 나선 학생들이 총회와 요로에 성명서를 발송함
으로써 신학논쟁이 벌어졌다.
이것은 결국 보수주의신학자 박형룡과 신 신학자 김재준 사이의 신학논쟁
으로 확대되고, 이어 장로교 총회가 김재준의 신학, 특히 성서관을 조사하게
되었으나, 총회는 그를 이단으로 단죄하지는 않았다.
조선왕조 당파싸움이 교회 내에서도 시작됐다
그러나 조선신학교와 박형룡의 남산신학교와의 합동은 실현되지 못하였고,
김재준을 제명하려는 보수세력은 1·4후퇴 후 월남한 서북지방의 목사들에
의해 더욱 강화되었으므로, 1952년 봄에 열린 장로회 총회에서 조선신학교의
총회직영이 취소되었다.
한편, 김재준의 파직을 그가 속하여 있던 경기노회에 지시하였고,
또한 이 신학교 졸업생에게는 목사후보자격을 부여하지 않기로
결의하였다.
이러한 결의가 장로교헌법에 위배됨을 지적하고, 이의 시정을 호소한
호헌운동이 일어났으나 총회는 호헌운동을 묵살하였으므로, 결국 조선
신학교 측과 호헌파가 합류되어 1953년 6월에 분립 총회를 열고 새
교단의 발족을 보았다.
이렇게 하여 생긴 한국기독교장로회는 복음과 학문과 양심의 자유,
노예적 의존사상의 배격, 세계교회운동인 에큐메니컬 정신의 선양 및
그리스도의 전적인 복음을 인간생활 전면에서 살리는 사회적 관심을
표명하였다.
이와 같이 하여 고신파 장로교는 교회의 재건을 부르짖고 기성교회를
단죄하면서 도전하다가 총회로부터 배격을 받아 분립되었으며,
조선신학교 측, 즉 기독교장로회는 신신학 또는 이단으로 몰려
총회로부터 분립되어 나왔다.
그리고, 남아 있던 장로교회는 박형룡을 중심으로 총회신학교를 세워
옛날 평양신학교의 재건을 실현하였으나, 신학교기지 매입문제를 둘러싼
사건과 세계기독교협의회(WCC) 탈퇴문제 등이 얽혀 다시금 분열을
일으키게 되었다.
즉, 교회기지 매입을 위해 선교부로부터 받은 3,000만 환이 대지구입도
하지 못한 채 흐지부지 없어진 데 대해 끝내는 박형룡이 책임을 지고
신학교에서 사임을 하게 되자, 박형룡의 옹호파와 반대파 사이에
갈등이 더욱 깊어졌다.
'합동파' '통합파'는 무엇이고 '옹호파'는 무엇일까?
이 무렵 미국에서 조직된 NAE(National Association of Evangelism)라는
보수적 복음주의운동이 세계교회협의회의 에큐메니컬운동을 반대하고
있었는데, 박형룡 옹호파는 현재의 WCC가 자유주의신학과 용공(容共)을
견지하고 있다고 공격하면서, 교단이 WCC로부터 탈퇴할 것을 강요하고
나왔다.
그들이 국내에서 1952년에 NAE를 조직하여 하나의 정치세력으로 키우자,
마침내 1960년에 교단은 둘로 분열되어 박형룡 측은 NAE파라고 불리고,
그 반대파는 에큐메니컬파라고 불렸는데, 이러한 명칭이 후에 합동파와
통합파라는 말로 바뀌었다.
이렇게 하여 합동파는 박형룡을 교장으로 하여 총회신학교를 세웠고,
통합파는 장로회신학교를 세웠다. 그런데 보수주의를 표방한 합동파에서는
계속 자체 내에서 신학적 분쟁이 생겼고, 그 분쟁은 으레 교권주의자들의
이용물이 되어 신학논쟁이 교회분열을 유발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즉, 총회신학교의 소장파 교수들의 신학은 반드시 박형룡의 신학사상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었고, 이러한 견해차이는 박형룡의 사망 후 더욱 심화
되어 신학논쟁을 불러 일으켰는데, 이 논쟁의 새로운 술어는 이제까지의
전통주의라는 말을 대신하여 '복음주의'와 '신복음주의'라는 말로 논쟁을
일삼았다.
그리하여 박형룡과 같은 정통주의자로서 그의 동역자였던 박윤선(朴允善)도
종국에는 총회신학교를 빠져나와 다른 신학교를 세웠다.
설립인가도 없는 신학교가 '우후죽순' 처럼 생겨났다
그 뒤에도 합동측 장로교 안의 분열은 가속화되어 1980년에는 대한예수교
장로회 합동측 아래에 주류측 총회와 교단, 중립노회측·비주류측이 있고,
비주류측 아래에는 통암동측 총회와 교단, 방배동측 총회와 교단, 그리고
합동진리측이 있었으며, 방배동측 아래에는 다시 합동계승측 총회와 교단,
연합노회 총회와 교단이 있었고, 그 뒤에도 분열작용은 계속되었는데,
이러한 혼란 속에서 신학교는 난립되어 당국의 설립인가 없이 우후죽순
처럼 생겨났다.
한국장로교회의 분열은 다른 교파들의 분열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극심하고도 계속적인 것이었다. 한국기독교장로회를 제외하고는 모든
장로교교단들이 한결 같이 교단명칭을 대한예수교장로회라 표기하고,
그 총회횟수도 같아 일반신도에게 주는 혼란은 극심하였다.
그러므로 1978년부터 분열된 장로교의 재 일치를 모색하기 위한 노력이
계속되어 협의회 내지는 연맹형식의 접근이 강력하게 추진되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1981년 2월에 기독교장로회·통합측 장로회·합동측
장로교, 고신측 및 대신측 장로교회들이 한국장로교협의회 창립총회를
새문안교회에서 개최하고 협의회규약을 통과시켜, 그 해 9월에 소집된
5개 교단의 총회에서 채택됨으로써 그 뒤 5개 교단들 사이의 친교와
협력이 가속화되었다.
이 협의회의 목적은 지난 날의 쓰라린 분열의 상처를 치유하고 앞으로는
협력과 협동단계로 들어가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기운은
1983년 미국의 연합장로교와 남장로교와의 일치에 자극을 받아 더욱
진지하게 추진되어가고 있다. <인터넷 글>
'신학적 성서고등비평'은 무엇이고 '신사참배'는 무엇일까?
장로교의 경우 너무 많이 나뉘어서 그 수를 다 파악하기는 힘이 듭니다.
왜 나뉘게 되었는지는 한국교회사 책을 참조하시면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첫 번째 갈라진 것이 ‘대한 예수교 장로회’와 ‘한국 기독교 장로회’로
갈라진 것입니다. 신학적으로 성서고등비평을 받아들이는 문제에서 비롯
되었습니다.
기독교 장로회가 자유주의 신학과 성서고등비평을 받아들인 측입니다.
두 번째가 고신 측의 분리입니다.
고신은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옥고를 치루신 분들이 중심이 되어
신사참배를 가결 또는 참여한 분들과의 분열입니다.
세 번째는 통합 측과 합동 측의 분리입니다.
wcc(ncc) 참여문제로 분리한 것인데 통합측은 에큐메니컬운동의 일환인
wcc에 참여하는 입장이라서 통합 측이라고 부르고, 합동측은 고신과
합동총회를 열어 합동 측이라고 하였는데 고신측이 대부분 분리하여
나가게 되었습니다.
평신도가 교회사를 알아봐라 교회 못 다닌다
고신은 교회 문제를 세상 법정에 세우는 문제로 고소 측과 반고소 측으로
분리되어서 고소측은 현 고신 측이고, 반고소 측에 속하시던 분들은 고려,
계신, 총 공회로 분리되었습니다. 합동측은 가장 많이 분리되어 합동, 합신,
합동정통, 대신 등 수없이 많이 분리가 되었습니다.
간단하게 정리하려니 평신도가 보기에 복잡할 수 있습니다.
한국교회사를 보시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각자 자신이 속한 교단의 입장에서 썼으니 여러권을 보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저도 평신도인데 평신도도 교회사도 알고 교회 정치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물론 성경 많이 읽고 기도하고 교제, 봉사 전도도 많이 해야 함은 물론이고요.
이 둘의 차이는 그냥 교회 다니시는 분들에게는 큰 차이가 없습니다.
장로교와 감리교의 어원적 의미와 교리, 교회조직, 그리고 실질적인
차이에 대해서 이야기 하겠습니다(참고로 저는 장로교에서 학부,
감리교에서 대학원에서 공부했습니다).
'예정론'이든 '구원론'이든 사람에게는 아무 권한이 없다
◆어원적 의미
장로교 - 칼빈에 의해서 창시 되었고, 신약성서에 나타나는 장로 older 와
같은 의미로 장로교는 이러한 장로들이 이끌어 나가는 교회를 말합니다.
감리교 - 존 웨슬리 신성클럽이란 것을 만들었는데 이 클럽은 아주 규칙적이고
조직적인 것이어서 주변에서 Methodist 즉, 규칙쟁이 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이것이 감리교의 어원이 됩니다.
◆교리적 차이
감리교와 장로교의 중요한 차이는 예정론과 구원론입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문제는 모두 "구원" 이라는 관점에서 이루어집니다.
예정론은 구원받을 자는 이미 하나님이 예정해 놓으셨다는 것으로
여기에도 몇 가지 종류의 예정론이 있습니다. 웨슬리는 예정을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후대에 와서 감리교에서는 예정론을 거론하지 않았습니다.
장로교(칼빈)의 구원론은 바로 예정론입니다.
그리고 구원의 시점은 인간이 예수를 영접한 그때, 예수를 믿는 그때에
완전한 구원이 이루어지고, 이 구원받은 사람이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선한 행실을 한다..... 입니다.
즉, 믿음과 구원은 동시 발생적인 사건입니다.
그리고 한 사람이 믿음을 가지고 구원받는 것은 하나님의 예정에 의해서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인간이 자신의 노력(공로)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한 일방적으로 일어나는 은혜이자 사랑의 표현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으로 부터 주어지는 은혜의 선물인 것입니다.
반면, 감리교(웨슬리)는 성화의 과정을 강조합니다.
구원은 믿는 순간에 일어나지만 그것은 완전한 구원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성화의 과정을 통해서 완전한 구원을 향해 나아갑니다.
그러나 완전한 구원이 어디가 끝인지 알 수 없으므로 결국 인간의 믿음을
통해 구원을 얻고 그것을 완성하기 위해서 계속해서 성화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화란 인간이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과정을 뜻하는데요
선한행실.. 정도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웨슬리는 이 성화의 과정으로
개인적 성화와, 사회적 성화,등 을 중요시 했습니다.
간단하게 장로교, 감리교의 구원의 차이는
바로 구원이 언제 이루어지는가 라는 것입니다.
한국인은 "누가 교회 내에서 '실권'이 있냐?"가 중요
◆교회조직
장로교는 장로회에 의해서 교회가 좌지우지 됩니다. 교회의 실질적은
행정권은 장로에게 있으며 목사는 목회적인 부분만 담당합니다.
장로교 헌법에 보면 장로에는 치리장로, 시무장로 두 가지가 있는데요.
치리장로가 목사이고 시무장로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장로입니다.
총회-노회-개교회 이런 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사실상 총회나 노회에서
개 교회에 그다지 큰 영향은 미치지 않습니다. 장로교는 개교회주의가
좀 강한 편입니다.
감리교는 주로 목사에 의해서 교회가 좌지우지 됩니다. 감리교에도
장로는 있습니다. 요즘은 장로교처럼 되어가는 분위기지만 원칙적으로는
목사가 많은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장로교에는 없는 감독이라는 제도가 있는데 이것은 장로교의 총회장
정도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총감독-감독-감리사-개교회 이런 구조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장로교와는 달리 감독이나 감리사가 개 교회에 많은 영향을 끼칩니다.
◆실질적인 차이
교회조직이나 신학적 견해 등의 차이입니다. 예배형식도 약간을 다른데요
그것은 각 교회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는 것이니 그다지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예를 들면 감리교에서는 사회자와 설교자, 기도자, 성경봉독자 등을 다
따루 두는데요 장로교에서는 그냥 담임목사가 다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교회마다 다 다르니까 꼭 그렇지 않을 수 있습니다.
장로교는 '보수적' 이고 감리교는 '개방적' 이란다
장로교는 보수적이고 감리교는 개방적입니다. 장로교의 신학은 칼빈을
고수하고 있고, 감리교는 웨슬리의 신학에 현대의 신학을 가미하고 있습니다.
이 둘의 차이는 아주 많은 차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보수와 진보, 이렇게 나눕니다.
감리교와 장로교가 사이가 안 좋은 경우가 많은데요 이것은 신학적인
차이도 있겠지만 일제 시대 때 신사참배의 문제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아직도 서로 오해와 반목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좋은 모습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 둘이 서로를 헐뜯고 싸우는 것이 아니라 그냥 냉전정도
입니다.(화해할 날이 어서 오길)
장로교회와 달리 감리교회는 오히려 두개의 파 (북 감리회와 남 감리회)로
들어왔다가. 하나로 합쳐서 기독교 대한감리회(KMC)를 이루었습니다.
현재는 미국도 한국을 따라서 미연방연합감리회(UMC)가 되었습니다.
또한 UMC와 KMC도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이것이 사대주의적 어쩌구
비판 받기도 하지만),
암튼 그래서 감리교회는 하나입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감리교회도 하나가 아니더군요. 성결회 아시죠?
성결회도 Methodist입니다. 나사렛 성결회 역시 Methodist입니다.
연말마다 자선 남비 앞에서 종을 딸랑이는 구세군 역시 Methodist입니다.
물론 이는 한국에서 갈라진 것이 아니라 미국에서 이미 분열된 상태에서
한국에는 따로 따로 들어왔지요. 그러니 무조건 감리교회는 하나라고
주장하는 것도 좀..
무조건 이것저것 안 따지고 하나가 되는 것이 좋은 것일까요?
아님 아주 작은 교리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분열되는 것이 좋은 것일까요?
<인터넷 글>
주의 종들의 분열은 의롭고 성도의 분열은 죄인가?
만약 이렇게 교회 분열을 드러내서 많은 성도들이 알게되므로
신앙생활에 방해를 받는다고 치자 누구 잘못인가?
그게 성도들에게 '쉬쉬' 한다고 하나님께서도 속으실 줄 아나?
주의 종들은 하나님의 사자이니까 무슨 잘못을 하더라도 용서해 주고
이해해 주고 무조건 정죄하지 말고 덮어주라는 것인가?
하나님께서 주의 종들에게 그렇게 말씀하셨나?
주의 종들이 설교할 때 성도들에게는 죄를 지은 것을 남에게 밝히고
회개를 할 정도가 되어야 진정한 회개라고 소리치면서 정작 주의 종들의
실수가 드러나려고 하면 온갖 핑계를 대고 덮어주라고 한다.
자기들이 하는 일이 의로운 것인줄 착각하고 살고 있다.
그러면 우리 성도들은 덮어줄 지라도 주의 종들은 자신들의 죄를
드러내고 회개해야 하는 것 아닌가?
진심으로 주의 종들이 자기들의 개인적인 잘못과 교단적인 잘못과
기독교적인 잘못을 드러내기를 아주 싫어한다. 자신들의 위상이 땅에
곤두박질 칠까봐 그런가보다.
우리들의 잘못으로 하나님아버지의 영광이
땅에 곤두박질 치는 것은 생각을 안한다.
하루빨리 교단적인 잘못과 교회적인 잘못을 드러내고 정리를 하고
용서를 빌고 회개를 하고 성도들과 같이 기도드리는 것이 살 길이다.
하나님아버지께서는 왜 나를 신문사로 보내셨을까?
내가 처음 신문사를 들어간 곳이 '기독저널신문' 이라고 주간지였다.
나는 그때는 순진무구한 여 집사로 교회에서 주의 종을 섬기며 성가대를
봉사하며 합창단을 다니며 살다가 어찌어찌 하다가 직장을 구하려고 했는데,
하나님아버지께서 "신문사를 총무과로 들어가서 컴퓨터를 배우고
편집을 하면 되지 않겠니?" 라는 감동을 주셨다.
정말 하나님께서 주신 생각일 수밖에 없는 것은 그 때 당시는 '신문' 이라는
단어도 생각이 없었고, '편집' 이라는 단어는 더더욱 생각도 못하고 살았다.
왜냐하면 교회에서나 내 주위에 가족이나 친척 형제들 중에도
그런 사람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주간지에 들어갔다. 정말 내가 들어간 때는 '수 작업' 이었는데,
얼마 안 있다가 '매킨토시' 라는 편집용 컴퓨터가 미국 애플사에서 국내로
들어왔다.
회사에서도 내가 컴퓨터를 조금 다룰 줄 안다고 '맥'을 배우라고 시간을 주었다.
나는 '현대워드프로세서'를 혼자 배우고, '컴퓨터'도 거의 독학으로 배우게 됐고,
이 '매킨토시' 라는 것도 처음 들어왔기 때문에 누구에게 배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매킨토시 매장에서 매뉴얼 공부를 시켜주고 있었다.
퇴근 후에 매장으로 가서 배우고 집에 와서도 매킨토시가 없는 상황에서
책으로 배우고 비디오로 배웠다.
"너는 내 밥이다" 라는 마음으로 시작을 했다.
그리고 신문사가 전체적으로 '화상편집' 이라는 틀로 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화상편집'을 배웠다.
그리고 지금은 편집부국장으로 일하고 있다.
직업은 괜찮았는데 신앙에는 마이너스가 왔다
그렇게 해서 신문편집도 배우고 직장을 다녔지만 신앙에는 마이너스가 왔다.
그 곳에는 목사라는 존재들이 얼마나 신분증을 해달라고 쫓아다니고
어느 교단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는지 모르는 평집사가 보아도 부족해 보이는
주의 종들이 주재기자를 한다는 등 수도 없이 다녀갔다.
목사가 거의 하나님 같이 여겨졌던 그 때 당시 나로는 큰 충격이었다.
그래도 교회는 떠나지 않고 새벽예배며 주일예배며 성가대 봉사며
놓지 않고 꾸준히 했다.
충격적인 마음에서 다시 원래의 신앙의
마음으로 오기까지 세월이 많이 걸렸다.
정말 세상으로 나가니 '죄' 라는 것이 내 앞에 떡 하니 놓여져 있었다.
그때는 그런 것을 다스릴 줄도 몰랐고, 다스려야 되는 것인 줄도 몰랐고,
그냥 인생의 한 부분인줄 알고 살았다. 나가보니 사는 것이 주의 종들이나
성도들이나 불신자들이 다를 바가 없이 똑 같았다.
신문 작업을 해서 인쇄를 하고 나면 기독교 신문이었기 때문에
각 교단별로 주소로 신문을 보내는 작업을 했다.
교회가 많은 것이야 좋은 현상이겠지만 같은 장로교 안에서도 얼마나
많은 교단들이 있었는지... 처음에는 아무 것도 모르고 그냥 일을 했다.
갈수록 세상이 보이듯 기독교가 보이기 시작했다.
아뭇튼 수백 개였던 것 같다. 더 넘었을라나? 그래서 학교도 여러 곳에
여러 개가 있듯이 교회도 그렇게 여러 개로 나누어져 있는가보다 했다.
내가 다니기 편하고 나의 신앙사고와 맞고 나의 신앙 분위기와 맞는
곳으로 골라 다니라고 그렇게 나누어져 있나 했다.
기독교는 수백갈래... 이방종교는 하나의 바위덩어리
장로교에 침례교에 감리교에 순복음교에 성결교에...
장로교는 얼마나 많이 분리되어 있는지 최고였다.
그러다 뉴스를 접하고 신문기사를 접하면서 보니까,
총회나 교단이 만들어지는 것이 다 자기 권세와 위치가
못마땅해서 분리되는 경우였다.
신앙적으로 논쟁을 벌이다가 나랑 맞지 않으니 나랑 뜻이 맞는
몇 목사와 그 곳을 빠져나와서 내가 총회장이 되면서 교단이
하나 만들어지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상전에게 순종하라는 것은 교회 내에서는 아닐까?
주의 종끼리는 아니고, 성도만 주의 종에게 순종하는 것일까?
(로마서 13:1)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아멘.
(에베소서 6:5)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 아멘.
(디도서 2:9) "종들은 자기 상전들에게 범사에 순종하여 기쁘게
하고 거슬러 말하지 말며" 아멘.
총회장을 뽑았을 때는 투표를 해서 과반수로 뽑았을 것이다.
그런데 무언가 내가 보기에 못 마땅하다. 교리를 만들면서
신학적인 개념을 만들면서 무언가 틀어졌나보다.
그래서 그곳에서 분리되어서 나왔다.
하나님께서 그 주의 종을 총회장으로 뽑으신 것은 실수하신 것이다.
나는 참 당당하다.
어떤 행사에서도 어느 주의 종이 '설교'를 맡냐?가 관건
모토는 '장로교'에 두고 있으나 이름은 요기 조기 바꿔서
애매모호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나면 자기네 교단에서 배출되는 목사가 있어야 했기에
자체 내에서 비인가 신학교를 세우고 목사안수를 주고 목사를
배출해야만 했기에 비인가 신학교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게
된 것이다.
어떤 행사에서도 "어느 주의 종이 '설교'를 맡냐?"가 관건이다.
'설교' 라는 것을 하는 설교자리가 '상석' 이라서 좋은가보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설교는 내가 지키고 남도 지키라고
말해줘야 하는 것이고, 그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이시기 때문에 전하는
주의 종도 자기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들어야 하고 지켜야 하고,
듣는 주의 종이나 성도들도 그 말씀을 들어야 하고 지켜야 하는
것이라고 하신다.
어느 날 교회에서 성경공부를 하다가 이런 종류의 말을 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이 되어서 내가 무언가 기독교가 분열되어 있다고 주장
하려고 하는데 우리 목사님이 말을 막았다.
물론 교회 성도들이 알면 좋지 않겠지만 성도들은 아무리 그런 이야기를
들려줘도 그런가보다 한다. "그래? 그럼 교회를 다니지 말아야지"
"그래? 그럼 다른 교회로 옮겨야지" 하지 않는다. 거의가 그렇다.
그러니 성도들이 잘못되는 것은 무조건 주의 종들 책임이다.
그럴지라도 나는 죽어라고 교회는 떠나지 않고 다녔다.
하나님아버지와의 만남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최고이고 싶은 '양반기질 마귀'를 죽여 버려라
평신도인 내가 보아도 교회가 얼마나 분리되어 있는지 무슨 게임을 해도
지겠다 싶다. 오히려 우리가 이단이라고 정죄하는 곳은 하나로 뭉쳐서 온다.
여호와의 증인이나 통일교나 전도관이나 불교나 천주교나 이슬람교나
이런 곳은 내분은 얼마나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겉으로 느끼기에
거대한 한 덩치로 존재하고 있다.
기독교는 통째로 하나 같지만 전혀 하나가 아니다.
하나가 될 전망이 보이지를 않는다.
내가 최고이고 싶고, 내가 높은 자리에 있고 싶고,
내 파가 아닌 파는 다 죽여 버려야 하는 양반기질이 강한
한국에서는 더더욱 합해지지를 못할 것 같다.
하나님께서는 기독교라고 해서 무조건 승승장구 하도록 내버려 두실까?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 뜻대로 살지 못했을 때 블레셋이나 바벨론이나
앗수르에게 넘겨 버리셨는데, 바사와 로마에도 넘겨버리셨는데,
포로로 넘겨버리셨는데, 눈을 뽑고 멧돌을 돌리고 할지라도.
(열왕기하 23:27)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이스라엘을 물리친 것 같이
유다도 내 앞에서 물리치며 내가 택한 이 성 예루살렘과 내 이름을 거기에
두리라 한 이 성전을 버리리라 하셨더라" 아멘.
적이 거대해져서 나를 공격할 때는 '하나님의 징계'
(열왕기상 11:14) "여호와께서 에돔 사람 하닷을 일으켜 솔로몬의
대적이 되게 하시니" 아멘.
적군을 거대하게 만드셔서 나를 공격해 오는 것도 다 하나님아버지의
뜻인데, 내가 잘못해서 징계를 내리시는 것인데, 하나님을 믿는 내가
적에게 넘김을 당한 것일지라도 그것 조차 하나님의 징계로 이루어진
것인데, 절대로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그러실 분이 아니라고
반항하는 것은 하나님의 징계의 명령을 안 듣겠다는 것이다.
그러니 더 혼날 수밖에 없다.
(예레미야 27:8)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을
섬기지 아니하며 그 목으로 바벨론의 왕의 멍에를 메지 아니하는
백성과 나라는 내가 그들이 멸망하기까지 칼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그 민족을 벌하리라" 아멘.
(예레미야 27:11) "그러나 그 목으로 바벨론의 왕의 멍에를 메고 그를
섬기는 나라는 내가 그들을 그 땅에 머물러 밭을 갈며 거기서 살게
하리라 하셨다 하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시니라" 아멘.
우리는 기독교니까 하나님을 믿으니까 하나님의 자녀이니까
우리를 적에게 넘기시지 않겠지, 그런 하나님이 아니시지,
하면서 안일한 생각을 하는 것은
북 이스라엘 왕이나 남 유다 왕이나 우리 기독교나 같은 것 같다.
(신명기 9:5) "네가 가서 그 땅을 차지함은 네 공의로 말미암음도 아니며
네 마음이 정직함으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이 민족들이 악함으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라" 아멘.
(예레미야 27:9) "너희는 너희 선지자나 복술가나 꿈꾸는 자나 술사나
요술자가 이르기를 너희가 바벨론의 왕을 섬기게 되지 아니하리라
하여도 너희는 듣지 말라" 아멘.
그래서 우리 나라를 포로로 넘기신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고 하는
예언자들을 잡아 가두고 죽이려고 했었다.
(예레미야 20:1~2) "임멜의 아들 제사장 바스훌은 여호와의 성전의 총
감독이라, 그가 예레미야의 이 일 예언함을 들은지라, 이에 바스훌이
선지자 예레미야를 때리고 여호와의 성전에 있는 베냐민 문 위층에
목에 씌우는 나무 고랑으로 채워 두었더니" 아멘.
(예레미야 26:8) "예레미야가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말씀을 모든 백성에게
전하기를 마치매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모든 백성이 그를 붙잡고 이르되
네가 반드시 죽어야 하리라" 아멘.
사탄이 쳐들어 오게 하고, 하나님께서는 막아주시나?
과연 이슬람교가 거대한 집단으로 몰려오는 것이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루시퍼 사탄'이 전략을 세우고 하나님을 대적하기 위해서 몰려오는 것일까?
착각하고 살지 말자. 전부 하나님께서 결정하시고 징계를 내리시는 것이다.
사탄이 방해를 하고 하나님께서는 도와주시고,
사탄이 질병을 주고 하나님께서 고쳐주시고,
사탄이 귀신을 넣어주고 하나님께서 쫓아주시고,
사탄이 교회가 부흥이 멈추게 하고 하나님께서 부흥케 하시고,
사탄이 사업을 망하게 하고 하나님께서 흥하게 하시고,
사탄이 시험 들게 하고 하나님께서 풀어주시고,
사탄이 사고를 내고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시고,
사탄이 죽이고 하나님께서 살려주시고 하시는 것이 아니다.
사탄이 적군을 부하게 하고 나에게 쳐들어오게 하고
하나님께서 막아주시고 전쟁에서 이기게 하시고 하시는 것이 아니다.
만약 이런 일이 나에게, 내 교회에, 우리 나라에 생겼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이시고 징계이시다.
(예레미야 18:7~10) "내가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뽑거나 부수거나
멸하려 할 때에, 만일 내가 말한 그 민족이 그의 악에서 돌이키면
내가 그에게 내리기로 생각하였던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겠고,
내가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건설하거나 심으려 할 때에, 만일 그들이
나 보기에 악한 것을 행하여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하면 내가
그에게 유익하게 하리라고 한 복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리라" 아멘.
하나로 통폐합해서 살지 못하는 한국 기독교에 하나님께서 정면도전을
해오도록 허락하신 하나님의 이 큰 막대기 '이슬람교'를 어떻게 이길 것인가?
이슬람의 조상 '이스마엘'이 태어난 것이 이스마엘 잘못일까?
이슬람의 원 조상은 '이스마엘' 이라고 한다.
이스마엘이 왜 태어났을까?
이스마엘이 태어난 것이 이스마엘의 잘못일까?
아브라함 아내인 '사라' 잘못이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씨'를 주신다고
하셨는데 너무 오래 걸리니까 기다리지 못하고 여종 하갈을 아브라함에게
첩으로 준다. 옛날 우리나라도 첩을 많이 두었다.
하갈이 임신을 하고 나니 한국도 그랬듯이 본처를 우습게 알고 멸시하게 됐다.
사라가 하갈 때문에 속상해서 죽겠다고 하니까 아브라함이 사라에게 당신의
여종이니 당신 좋을 대로 하라고 한다. 그리고 사라가 하갈을 학대한다.
조신한 것 같고 얼굴도 예쁜 사라가 얼마나 어떻게 학대를 했나?
결국엔 하갈이 도망갔다가 하나님을 만나고 "너의 상전에게 순복하라"는
하나님의 명을 받들고 다시 사라에게로 온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신대로 아들을 낳고
'이스마엘' 이라고 이름을 짓는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스마엘을 버리셨을까? 사람이 버린 것이다.
이번에는 이스마엘이 어린 이삭을 괴롭히는 것을 보고 사라가 하도
못살겠다고 하니까 하나님께서도 아브라함에게 사라의 말대로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보내라고 하신다.
이스마엘이 성품이 괴팍해서 괴롭힌 것인지 나이가 사춘기 정도
된 것 같은데 청소년 이라서 장난기가 있었던 것인지 모르겠지만
사라의 눈에는 예뻐보이지가 않았다.
안그래도 미운 하갈의 자식이니.
사라도 이제 보니 성격이 장난이 아니고 얼굴만 예뻤구나.
'네 씨로' 는 "네 씨에서 용서의 열매가 태어날 것이다"
(창세기 17:20) "이스마엘에 대하여는 내가 네 말을 들었나니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매우 크게 생육하고 번성하게 할지라 그가 '열두 두령'을
낳으리니 내가 그를 큰 나라가 되게 하려니와" 아멘.
(창세기 21:12~13)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이나 네
여종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지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부를 것임이니라, 그러나 여종의
아들도 '네 씨'니 내가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신지라" 아멘.
여자들의 자녀 싸움일까? '내 씨로' 라는 족보싸움일까?
어쨌든 그 여자들의 싸움이 지금 이런 상황까지 불러온 것인지?
한국은 일본의 적이고 일본은 한국의 적인 것과 비슷하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이 야곱과 에서를 낳았는데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씨를 선택하셨다. 그 야곱에게 12자녀를 낳게 하시고 '12지파'
라는 명분을 주셨는데, 이스마엘에게도 '12두령'을 낳게 하신다고 하신다.
이스마엘도 상당히 큰 세력을 얻는다는 것일까? 현재 그렇다.
"네 씨로" 라는 것도 이제 깨닫게 해주신다.
천국에 "네 씨만 보내주시겠다"가 아닌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간들의 죄에 대해 몇 년형을 선포하셨는지 모르겠다.
어느 때에 인간들의 죄를 용서해 주시겠다는 계획을 세우셨다.
그리고 계속 어느 씨를 선택하셔서 용서의 반열로 삼으셨다.
최고로 악이 성행했을 때도 용서의 반열로 '노아'를 선택하시고
그 가족을 살려주심으로서 용서의 반열이 계속 이어지게 하셨다.
계속적인 인류의 번성을 이룰 때는 성경은 또 침묵하신다.
하지만 하나님의 눈길은 용서의 반열 씨를 주시하시고 계신다.
하나님께서 용서의 반열로 '아브라함' 선택
그러다 하나님께서 그 용서의 반열로 '아브라함'을 선택하셨고,
아브라함의 정통 씨에서 '용서의 열매'가 태어나게 하시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씨가 우리가 말하는 족보를 이어갈 장자 씨로만 생각하고
기다리다 못해 사라의 잘못으로 서자 '이스마엘'이 태어나게 된다.
'용서의 열매'가 '예수' 라는 제물인데 아브라함의 믿음의 반열에서
'예수'가 태어날 것이라는 것이다. 그 씨라는 것이 '용서'의 씨였다.
이 용서의 반열에 쓰임 받을 사람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셨다.
'이삭'을 선택하신 것이고, 야곱과 에서 중에서 '야곱'을 선택하셨고,
야곱의 12아들 중에서 '유다'를 선택하신 것이다.
그리고 유대민족 계열에서 '예수' 라는 '제물' 이 태어나셨다.
하나님께서 "네 씨로" 쓰시겠다고 선택하신 것은 네 씨만 천국
구원이 아니라 '용서의 제물'이 너의 후손에서 나올 것이다
라는 말씀이시다.
우리가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라고 외치면서 죽어서 천국에
가는 자들은 아브라함의 영적 자녀들만 이라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이 아브라함의 반열은 '용서'의 직분을 담당하는 반열일 뿐이다.
구약의 '레위족' 이 온전히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겼듯이,
신약에서 '영적 레위인'이 성전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고 있다.
구약에서는 '동물제사법'으로 신약에서는 '예배와 기도'로
구약에서는 이스라엘 민족이 '동물제사법'을 담당하면서 용서를 구했고,
신약에서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예배'를 드리면서 '기도'를 드리면서
용서를 구하는 직무를 담당하는 것이다.
'예수' 라는 '용서의 제물'이 하나님아버지께 십자가의 죽음으로 단번에
'죄 값'을 치룸으로 그 두려운 휘장을 반으로 가르시고 누구나 지성소에
들어가게 하셨다.
그것은 이제 누구든지 하나님께 예배 드릴 수 있도록 하셨다는 것이고
누구든지 기도를 드릴 수 있도록 하신 것이다. 어느 특정인이 없이 이제는
'예수'라는 '제물'의 희생으로 인해 구약의 '동물제사법'이 끝나버리고,
선민이든 이방인이든 누구든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면
이 땅에서의 힘들고 어려운 삶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직접 받을 수가
있게 됐다.
그리고 선지자에게만 말씀하셨던 하나님도 직접 만날 수가 있게 됐다.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선민만 구원을 받겠다고 웅크리고 있는
이스라엘 민족을 하나님께서 때리시면서 흩으셨다. 그래도 아직도
뜻을 알지 못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전적으로 '사울' 이라는
청년을 선택하셔서 예수님의 뜻을 전하는 이방인 선교사로 세우신다.
이제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예배'를 드리면서 '기도'를 드리면서
용서를 구하는 직무를 맡은 것이다. '용서의 반열'을 이어가는 것이다.
예배드리기와 찬양 드리기와 기도드리기와 성전 봉사생활 직무를
감당하기 위해서는 세상의 즐거움, 볼거리, 놀거리, 먹거리 등
문명을 즐기는 것을 삼가 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집중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문맹인이 되라는 것은 아니다.
그 즐거움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주의 종과 성도의 부르심은 오직 '하나님의 선택'
성도의 부르심은,
육의세계에서 볼 때는 누구든지 부르심에 응하기만 하면
이 직무를 감당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영의세계에서 하나님께서 선택하신다.
들로 산으로 나가 악인이든 선인이든 데려다가 앉혀놓아라.
하지만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자가 아니면 "너는 나가라" 하신다.
그러면 세상이 좋아서 다시 나가든 시험이 크게 들어서 나가든
하게 된다.
성도로 부르시고 교인으로 부르셨다고 다 열심히 하나?
수십년이 지나도 어린아이처럼 봉사도 할 줄 모르고 예배만
간신히 드리고 가는 교인도 있고, 목사님이 시키시니까 마지
못해 하는 교인도 있고, 봉사만 시키면 시험이 들어서 나가
떨어지는 교인도 있고, 처음 왔어도 원래 있었던 성도처럼
열심히 적극적으로 나서는 교인도 있고,
자기 자랑을 좀 하고 싶어서 나대는 교인도 있고,
하나님께서 정말 감동을 주시고 몸을 움직여서라도
봉사의 직분을 감당하게 하시는 교인도 있다.
주의 종의 선택은,
들로 산으로 나가 골라와라는 것이 아니라 영의세계에서
하나님께서 직접 지명하여 부르신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부르시는 지는 안 겪어봐서 모르겠지만, 선배 주의 종에게서
신학을 하라고 종용 받기도 하고, 부모의 선약으로 하는 경우도
있고, 본인이 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하는 경우도 있고,
'주의 종'이 되라는 강력한 감동을 받고 사업하는 것이 더 좋다고
돈 많이 벌어서 헌금 많이 하겠다고 교회 많이 세우겠다고 싫다고
싫다고 도망 다니다 사고나고 병들고 고침 받고 죽기 직전에
돌이켜서 주의 종이 되는 경우도 있다.
직업상 돈 벌기 위해 하는 주의 종도 있을 것이고, 여 성도들이
쭉 따라다니고 목사님 하면서 받들어 모시는 것이 보기 좋고
자기도 그렇게 대우받고 싶어서 주의 종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아주 다양하다.
어느 것이 하나님께서 직접 선택하신 주의 종인지 사람이 보아서는
잘 모르겠다. 본인이 알 것이고 열정이 있냐나 하나님께서 지혜를
어떻게 얼마큼 주셔서 부흥되는 것을 보아서 알 것이고 여러가지
모양새로 체크는 해 볼 수 있겠다.
믿는자들의 예배와 기도는 "하나님, 무지개를 기억해주세요"
하나님의 '무지개 약속'과 같은 것이다.
우리 믿는 자들의 예배와 기도의 행함으로 하나님께
'영적 무지개'를 기억하시도록 하는 직책인 것이다.
(창세기 9:14~15) "내가 구름으로 땅을 덮을 때에 '무지개'가 구름 속에
나타나면 내가 나와 너희와 및 육체를 가진 모든 생물 사이에 내 언약을
'기억'하리니 다시는 물이 모든 육체를 멸하는 홍수가 되지 아니할지라"
아멘.
나만 천국간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괘씸한 것이다.
'예수'라는 '제물'이 죽은 것은 '온 세상의 죄'를 위해서다.
(요한일서 2:2)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만
위할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아멘.
하나님께서 죽으신 것은 온 세상의 죄를 위해서인데
용서를 받아야 하는 인간들이 패를 가르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가족을 사랑하고, 형제지간에 서로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도 사랑하고, 나라도 사랑하고 세계도
사랑하라 하시는데 우리는 언제까지 "내가 진짜 하나님의 자녀"이고
"너는 서자" 라고 싸움을 할까?
나는 하나님의 진짜 자녀이니까 나는 천국 가야하고,
너는 하나님의 가짜 자녀이니까 너는 지옥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그 주장 때문에 지금까지 싸우고 있다.
죽어서 천국 가는 것은 오직 하나님아버지의 주권이시라
하나님아버지의 뜻에 달려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끼리 "나만 천국 가겠다" 주장을 하니 싸움밖에 안 일어난다.
싸우는 녀석들은 둘 다 영창에 집어넣으면 된다
인류 전체가 죽어서도 지옥 갈 것을 하나님께서 직접 '예수' 라는
사람으로 오셔서 '제물' 되어서 죽음으로 하나님아버지께 '죄 값'을
청산하셨으니, 이제 너희들은 하나님께도 죄를 짓지 말고,
사람끼리도 죄를 짓지 말고, 서로 용서해 주면서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살다가 오라고 하시는데도 그렇게 싸우는 녀석들은
둘 다 영창에 집어넣으면 된다.
총이 먼저인 나라 말고, 힘 있는 사람이 대장인 나라 말고,
'법'이 있는 나라에서 지금도 싸워봐라 둘 다 붙들려가고,
둘이 화해를 하고 합의를 보던지, 둘 다 영창 가던지,
둘 다 벌금을 내던지 하지. 약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하나님은 '법' 이 있으신 분이시다.
우리 종교를 안 받아들이고 우리 종교를 안 믿는다고 정말 총을
들이대고 죽이고 하는 싸움을 하지 말고, 인격적으로 훌륭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고, 자기가 믿는 신께 기도드리는
영적인 기도 싸움을 하기를 바란다.
이제 한국도 '아브라함의 서자' 와의 전쟁인가?
우리는 하나님 앞에 한 형제 자매라는데 왜 싸워야 할까?
이스마엘은 적이라서? 한국과 무슨 원수지간이길래?
오줌을 피하려다 똥을 밟을 것인가?
우리는 북한에서 전쟁을 벌일까봐 신경을 곤두세웠었다.
그런데 이게 모지? 이슬람교가 몰려 온댄다.
오줌 피하려다 똥을 밟은 것인가?
마티즈 피하려다 밴츠를 들이 받는 것일까?
사이드에서 이렇게 공격해올줄 몰랐다.
(예레미야 38:18) "네가 만일 나가서 바벨론의 왕의 고관들에게
항복하지 아니하면 이 성이 갈대아인의 손에 넘어가리니 그들이
이 성을 불사를 것이며 너는 그들의 손을 벗어나지 못하리라
하셨나이다" 아멘.
유대 민족이 하나님께 징계를 받아 바벨론으로 넘기신다고
예언하시는데 곧이 듣지를 않는다. 아무리 그런들 바벨론을
피하려다 앗수르를 만날 것인데 그들은 더 사납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바벨론에 징계로 넘기시더라도 그곳에서 먹고 살 수
있도록 하시겠다는데 말을 듣지 않으면 앗수르에게 넘기셔서
죽음을 당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북한에 항복하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아직도 회개를 하지 않으니 생각도 못한 '이슬람교'를 통해
혼내시겠다는 것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시는 하나님께 대들지 말고 납작히 엎드리자.
하갈과 이스마엘의 '한'이 지금까지 계속되나?
그런데 이 '서자' 들은 어떤 한이 맺혔는지 목숨 걸고 달려든다.
누군가 목숨 걸고 달려들 때는 이쪽에서도 목숨 걸고 달려들어야 하는데
기독교에서는 목숨 걸고 달려들 만한 주의 종이 안 보인다.
조폭세계에서도 목숨 걸고 달려드는 사람이 결국에는
조폭 우두머리가 되는 것을 본다.
어린 다윗도 '골리앗'에게 목숨 걸고 달려들었을 때 이기고
왕도 된 것이다.
아브라함도 남자로서 너무했다. 그때 당시 아브라함이 얼마나
가난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리 하갈이 여종이었어도 그렇지
'이스마엘' 아들을 낳은 첩인데, 내보낼 때 어떻게 거처할 곳도
마련해주지 않고, 어디로 가서 살라고 해주지도 않고 떡과 물만
주냐? 그거 다 떨어지면 죽으라는 것인가?
(창세기 21:14)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떡과 물 한
가죽부대를 가져다가 하갈의 어깨에 메워 주고 그 아이를 데리고
가게 하니 하갈이 나가서 브엘세바 광야에서 방황하더니" 아멘.
하나님께서는 이스마엘도 "네 씨니" 라고 말씀하시는데. 누구든
하갈과 입장을 바꿔 생각해보면 기가 막히는 장면인 것이다.
하갈이 이스마엘과 어디로 갈지 모르고 가다가 브엘세바 광야에서
방황을 했다. 그러다 가죽부대의 물도 다 떨어지고 이스마엘도
목이 말라 죽으려고 하는 것을 보다 못해 하갈이 통곡을 하고 운다.
(창세기 21:16) "이르되 아이가 죽는 것을 차마 보지 못 하겠다 하고
화살 한바탕 거리 떨어져 마주 앉아 바라보며 소리 내어 우니" 아멘.
하나님께서 그 하갈의 울음소리와 이스마엘의 신음소리를 들으시고
오셔서 샘물을 보게 하시고, 물을 먹게 해서 살려주신다.
(창세기 21:14) "일어나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라
그가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시니라" 아멘.
그 뒤로 하나님께서 그들이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셨다.
그러면서 이스마엘은 광야에서 활을 쏘는 자가 된다.
활을 쏜다는 것은 짐승을 잡으며 살았다는 것이고 잘못하면
사람도 죽이면서 살았다는 것이다.
포악하고 사나운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집에서 온순하게 키우던
가축도 야생으로 나가면 포악해지는 것을 본다.
어려서 아버지의 집에서 쫓겨나고 광야에서 목이 말라 죽을 뻔
했던 것은 아기 때가 아니라 많이 커서다.
'한' 맺히고 죽으면 이 땅에서는 '한'이 '한'을 푼다
하갈도 '한'이 맺혔을 것이고, 이스마엘도 '한'이 맺혔을 것이다.
우리나라 말에도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
라는 말이 있다. 다른 나라는 모르겠고, 우리나라에서 한을 품고
죽은 사람은 그 영이 귀신이 되어서 나타난다고 알고 있는 상황도
있다.
나의 세째 오빠도 결핵으로 몇 년을 고생하다가 공주병원에서
혼자 죽었는데, 자기를 이렇게 죽게 내버려둔 원인 제공자가
형수라고 생각하고 작은 오빠에게 귀신으로 들어갔다고 했다.
눈이 시퍼래지면서 새언니를 죽인다고 칼을 들고 쫓아다녔다고 했다.
그러다 어떻게 소문을 듣고 절에 가서 돈 몇 백을 주고 한을 풀어주고
나니 그 귀신이 없어졌다고 했다.
그 귀신은 오빠의 영이 아니다.
사람은 개나 소나 누구든지 일단 죽으면 육체는 썩어서 없어져 버리고,
생각이나 의식은 영의세계로 하나님 앞에 들어가게 되어 있다.
그리고 나서는 자기는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았든 간에 자기의 존재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동물처럼 아웅다웅 살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자기의 존재가 원래는 무엇이었는지 자세히 알게 된다. 자동으로.
하지만 이 땅에서는 누군가 '깊은 한'을 품고 죽으면 그 '한' 이라는
자체가 형상화 되는데 그것이 사람의 눈으로 볼 때는 그 사람의
모습인 귀신으로 보이는 것이다.
사람이 죄를 지으면 그 '죄' 라는 것 자체가 귀신의 형상으로 조성이 된다.
그리고 그 죄 자체가 나를 때린다.
그 '한' 이라는 것 자체가 '한'을 풀러 간다.
하나님의 자동 시스템이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는 먼지만한 것도 움직인다.
'사람' 이라는 형상이 조성되기 위해서 정자라는 세포, 난자라는 세포는
보이지도 않는 작은 세포지만 스스로 움직이고 자기의 임무를 하도록
창조되어 있다. 그런 것과 원리가 비슷하다.
나의 아들과 나로 입장으로 바꿔 놓고 생각하니 나 같아도 한이
맺혔을 것 같다. 그 한의 깊이는 아주 깊다. 처녀의 한도 아니고
자녀가 있는 모성애의 한의 깊이는 측량할 수 없겠다.
그 이스라엘 땡볕 광야에서 아들과 함께 떡과 물만 가지고
쫓겨나서 죽기 직전까지 갔는데 어떻게 한이 안 맺히나?
그렇게 조상들이 잘못하고 가고 후손들이 고초를 겪고 있다.
다 조상의 죄를 회개하지 않고 후손이 사과를 하지 않아서
벌어지는 일들이다. 그리고 싸우자고 벼르고 있다.
(예레미야애가 5:7) “우리의 조상들은 범죄하고 없어졌으며
우리는 그들의 죄악을 담당하였나이다” 아멘.
'이슬람이 몰려온다 동영상'을 보는 순간 "우리는 졌다"
'이슬람이 몰려온다 동영상'을 보는 순간 "수도 없이 분열되어 있는
우리 기독교는 졌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적군이 한 덩치로 몰려오면 대응하는 쪽에서도 한 덩치로 몰려가야
이기든 비기든 할 것이 아닌가? 그런데 대응하는 쪽이 수백갈래로
갈라져 있다면 당연히 지지 않나?
기독교가 하나로 뭉치면 얼마나 거대한 집단이 될 것인지나 알까?
우리나라는 불교는 정부에서 지원금이 나가는데, 기독교는 없다.
그래도 기독교는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시면 그런 지원금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전도서 2:26) "하나님은 그가 기뻐하시는 자에게는 지혜와 지식과
희락을 주시나 죄인에게는 노고를 주시고 그가 모아 쌓게 하사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에게 그가 주게 하시지만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로다" 아멘.
기독교가 '하나' 되면 하나님아버지께서 살려주실까?
기독교가 '하나가 되는 것이 살 길'인 것 같다.
(에베소서 4:3~6)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주도 한 분이시오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아멘.
성령도 하나이시니 '하나' 되라고 하신 것은 각 교회 내에서만 일까?
전체 기독교는 수백갈래로 갈라져 있어도 되고 각 교회만 하나 되면
되는 것인가?
하나님도 한 분이시고 예수님도 한 분이시고 성령님도 한 분이신데
우리는 무슨 교리를 그렇게 복잡하게 만들어 놓고 내가 만든 교리가
진짜 교리라고 우기고 하나로 합쳐지지를 못하고 물과 기름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인지 일반 성도가 보아도 답답하다.
다른 교회 잘 되게 해주면 내 교회는 망할까?
지역에서 '노인 대접하기' 나 '장학 제도'나 '어려운 이웃 돕기' 같은
좋은 일을 하는 것도 내 교회 단독으로 하는 것보다 그 지역에 있는
몇 교회가 서로 힘을 합치고 마음을 합치고 재정도 합쳐서 일을 하면
일을 더 크게 할 수가 있고 더 많은 사람들을 도울 수가 있고 교회가
더 좋게 소문이 날 수가 있는데도, 내 교회만 명성을 날려야 하고,
우리 목사님만 명성을 날려야 하고, 우리 교회로만 성도들이 몰려와야
하고, 서로 손익계산을 하고, 사해바다 같이 일을 하니 서로 죽겠다고 한다.
주의 종이 설교할 때는 남을 잘 되게 해주려고 하면 나는 더 잘 되게
해주신다는 하나님을 전하면서, 교회적으로는 절대로 남의 교회가
잘 되도록 해주지를 않는다.
어느 교회가 문을 닫았다고 해도 끄덕도 않는다.
그 문 닫은 교회 성도들이 우리 교회로 왔으면 좋겠나?
성도들은 자존심을 버려야 하고 욕심을 내려 놓아야 하지만,
주의 종들은 자존심을 하늘 높이 세워야 하고,
욕심을 내려 놓으면 안 된다.
그래놓고 이단더러 물러가라고 외치고 타종파는 물러가라고 외친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더 부하게 만드신다. 우리를 때리기 위해서라도.
하나님께서는 두 세 사람이 모인 곳에 함께 계신다는데
하나님께서는 두 세 사람이 모인 곳에 함께 계신다고 하셨는데,
조무래기 성도들이 모여서 기도드리는 것도 좋지만,
기라성 같은 주의 종들이 모여서 기도를 드린다면 그 기도 기둥이
얼마나 크게 뭉쳐서 하나님께로 올라갈까? 얼마나 멋있을까?
그런 기도의 모습이 영의세계에서는 '아들'의 형상으로 보인다.
이런 기도는 얼마나 애쓰는 강력한 기도인지 '여자의 해산'의
고통으로 비유하신다(계시록 12:1~5).
그 '아들의 형상' 으로 이루어진 기도의 결정체는 하늘에
'죄의 법'으로 형성된 '용'의 형상을 부셔버리는 철장권세다.
'죄의 법' 으로 형성이 되었다는 것은, 우리가 죄를 지은 것이
회개가 안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징계거리가 쌓였다는 것이다.
그런 징계거리를 부셔버릴 정도면 이 땅에서는 회개기도의
기둥이 하늘로 올라가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징계하시려고
하시던 마음을 돌리시고 '죄의 법'의 형상을 없애버리시는 것이다.
그런 것이 결국은 '미가엘 천사장' 이 '용'이라는
사탄을 이기는 것이다(계시록 12:7~9).
그것이 하늘의 전쟁 모습이다. 영의세계의 일이다.
주의 종들이 시간을 정하고 기도드린다면?
물론 기도를 드리는 주의 종도 있겠지. 처음 개척할 때는 한 명의
성도들이라도 오게 해달라고 매달리고 기도를 드리고 경제적으로
힘들어 하면서 울고불고 기도드릴 수도 있겠지만 조금 교회가 커지고
성도들이 들어오고 조금 배불러지면 나태해지면서, 그 성도들만 관리
하려고 한다든지, 성도 귀한 줄 모르고 부리는 종으로 생각한다든지,
성도 하나쯤 시험 들어서 나가든 말든 신경 쓰지도 않는다든지,
자기 공화국을 세운다든지 하게 되는 것을 본다.
처음부터 끝까지 초지일관으로 기도드리는 주의 종이 있을까?
목회가 가난해서 울고 불고 기도드리는 것 말고, 정말 등 따습고 배부른
목회자인데도 기독교 영성을 위해 울고불고 기도드리는 주의 종이 있을까?
성도들도 그렇지만 주의 종들도 정말 하나님 앞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들을 하고 사나 싶을 때가 많다. 말로만 하나님 앞일 때가 많다.
참 힘들 것 같다. 하나님께 딱 붙어있지 않으면 너무 힘들다.
그래도 아직 영적으로 살아 있는 교회도 있다.
주의 종들이 얼마나 기도를 드리고 사는지 모르겠지만 성도들이
기뻐 뛰도록, 같이 기도드리고 싶을 정도로 기도드리고 있다는
소문이 퍼진다면 좋으련만, 들리는 소리는 거북한 소리들만 들리고
자기 위세만 떨치고 싶어 하는 소리만 들리고 하니, 영적으로 무슨
일이 벌어진다고 하면 우리는 벌써 기가 꺾여버린다.
기도에 목숨 거는 겸손한 리더자가 있을까?
주의 종들이 총회 적으로, 전국적으로 매일 몇 시에 모여서 기도드릴 수
있으면 모여서 기도드리고, 모이지 못하면 따로 있는 장소에서 같은 기도
제목을 놓고 기도드린다면 안 될 일이 있을까 싶다.
이렇게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드리는 약속은 사람과의 약속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약속이어야 한다. 그래야 사람이 보던지 안 보던지 할 수가 있다.
그러려면 누군가 기도에 목숨 걸고 나서는 리더자가 있어야 하는데.
기독교가 하나로 되려면 총 대장이 되어야 하는
주의 종은 누구든 정말 겸손해야 한다.
누가 기독교를 하나로 이끌어 갈만큼 겸손할까?
천주교의 교황 자리가 얼마나 거대한 자리인가?
그 교황이 얼마나 겸손한지 어떤지 우리는 모른다.
기독교도 누군가 총 대장이 되었을 때 얼마나 겸손해야 할까?
오직 기독교가 부흥되기 위해서, 교회가 부흥되기 위해서,
주의 종들이 목회를 잘하도록 하기 위해서,
성도들이 신앙생활을 잘하도록 인도하기 위해서,
오직 그 마음에 중심을 두려면
얼마나 겸손한 주의 종이 총 대장이 되어야 할까?
정말 그 마음에 하나님아버지께서 계시지 않고
예수님이 계시지 않으면 절대로 이루어 질 수
없는 총 대장의 자리이다.
기독교는 도대체 어디다 신경 쓰고 살고 있나?
하나님아버지께서는 얼마나 인내심이 강하신지 모른다.
우리가 잘못하였을 때 바로바로 징계하시면 살아날 사람들이 없다.
특히 기독교를 다 치셨다가는 뼈도 못 추린다.
그래도 기독교는 나름대로 하나님아버지를 섬기며 믿으려고
애를 쓰고 예수님이 하나님 이심을 전하면서 살려고 애쓰는
것을 보아서라도 정상참작을 해주시나? 할 정도다.
이스라엘도 아닌 한국이 하나님을 알면 얼마나 알까?
'예수' 라는 제물 청년에 대해서 알면 얼마나 알까?
성경을 알면 얼마나 알까?
구원을 알면 얼마나 알고 천국을 알면 얼마나 알까?
사탄 마귀 귀신에 대해서 알면 얼마나 알까?
하나님께서는 누구든 바르고 착하고 정직하고 정의롭고
도덕적이고 진실하고 속마음과 겉이 같고, 구제와 선행과
기도에 뛰어나라고 하시는데도 불구하고
왜 사람이 만들어 놓은 교리를 가지고 그렇게 죽이네 살리네 할까?
왜들 그렇게 주의 종들은 성경을 지킨다는 것보다, 성명말씀대로
산다는 것보다, 내가 성경을 많이 알고 있다고 자랑들을 하는지.
신학은 이런 것이다 저런 것이다 자랑들을 하는지.
단기선교든 선교든 제대로 해라
선교라는 것도 그렇다. 구제와 선행으로 선교를 해야지 말로만 일삼고
절 앞에 가서 찬양을 불러댄다고 해서 전도가 되고 선교가 되는 것이 아니다.
착각에서 빨리 벗어났으면 좋겠다.
불교자가 교회 앞에 와서 불교를 전한다고 목탁을 두드리고 불찬양을
부른다고 해봐라. 기독교에서 가만있겠나.
그 사람들이 다 교회에 나와야 할 사람인 것 같으면 당신이 기타치고
찬양 부르고 안 해도 하나님께서 알아서 교회화 시키실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그런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만 부르신 것처럼
소수만 선택하시고 하나님을 알게 하시는 것인데, 네가 부름을 받았으면
그냥 참 기독교인 답게 살아서 행함으로 삶으로 보여주라고 하시는 것이다.
잘못된 선교라는 것으로 인해 핍박을 받고 기독교가 제재를 받게 되면
또 그때는 사탄이 핍박을 하고 박해를 하는 것이라고 한다. 아니다.
당신이 잘못해서 대가를 받는 것이다.
기독교인이 잘못해서 핍박을 받고 박해를 받는 것이지 참 의로운데
제재를 받고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에 처음 어떻게 기독교가 들어왔는지를 연구해 봐라.
성경도 들어오고 교회도 들어왔지만 병원이 세워지고 학교가 세워지고
치료해주고, 가르쳐 주고, 먹을 것을 주고, 문명을 발달 시키고 했지,
아무 것도 안 해주고, 손 하나 까닥도 안하고 예수만 믿으라고 소리쳐
외치고 기타치고 찬양을 부르고 했던 것이 아니다.
그러니 단기선교든 무엇이든 제대로 해라 그렇지 않으면 오히려
선교의 문이 닫히게 될 것이다.
내가 듣기 싫으면 남도 듣기 싫은 것이고, 내가 좋아도 남은 싫을 수도 있고,
내가 싫어도 남은 좋을 수가 있다. 역지사지라는 단어를 만드신 하나님은
무조건 기독교인이 최고다 하시지 않으신다. 막무가내의 하나님이 아니시다.
기독교인이 잘 못하면 더 혼날 수가 있는데,
하나님 백 믿고 아무 칼이나 막 휘두르기 때문이다.
드럼치고 마이크에다 대고 큰 소리로 찬양을 부르고 소리쳐 기도를 드리고
하는 것이 기독교인들이 볼 때는 은혜스럽고 자랑스러울 수 있다.
하지만 주변에서 시끄럽다고 하면 자제를 해야 하는데,
자제하기 힘들 때는 깊은 지하로 예배당을 내려가라.
우리만 좋은 것이지 남들은 시끄러운 것이다. 그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그런 것 저런 것 신경 쓰시지 않으시고 기독교만 최고라고
하시는 하나님이 절대로 아니시다.
거룩하시고 공의로우시고 공평하신 하나님 이시고
개나 소나 다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처음 단일 교회로 돌아가 의료・교육 사업에 정진하자
한국도 이젠 처음으로 돌아가자. 처음 장로교 하나로 시작했던 것처럼
단일 교회로 가고, 의료사업과 교육 사업에 정진해서 많은 학교를 세우고
학생들을 배출했던 것처럼,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고, 병원을 세우고
치료해 주었던 것처럼 그 때로 돌아가자.
교회가 하나로 뭉치면 얼마나 거대할 것이며 가난한 교회가 없이 가난한
자들이 없이 살 수 있을텐데, 얼마나 자기교회만 커야 하고, 몇 백억을
들여서 자기 교회 건물을 지어야 하고, 가난한 교회는 문을 닫아야 하는지.
얼마나 자기 이권다툼을 위해서 목회를 하는지. 내가 얼마나 큰 교회 건물을
가진 주의 종인지, 내가 얼마나 많은 사례비를 받고 사는지, 나를 따르고
지지하는 성도가 얼마나 많은지 자랑하는 것을 다 내려놓아야 한다.
하나님께 더 혼나기 전에 주의 종들이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는
자기 권세나 교회 건물이나 경제나 성도 수나 다 내려놓아야 한다.
이슬람교는 하나 통째로 온다는데 우리는 다 분리되어 있어서 아무리
초교파적으로 대책사무실을 만들면 또 뭐하나, 그 중에 대장이 있어야
하는데, 또 조직이 필요할텐데, 경비는 누가 댈 것이며, 누가 나서서
이슬람교와 맞 붙어서 싸울 계획을 세우고 싸울 때 목숨을 걸 것인가?
인해전술은 누가 죽고 나면 내가 그 죽을 자리로 서슴없이 들어가야
인해전술이 되는 것이다. 이슬람교는 그렇게 인해전술로 나온다.
그들은 목숨 걸고 테러로 밀고 나오는데, 사람을 마구 죽인다는데.
이슬람은 목숨을 내놓았는데 기독교는 목숨을 내놓을까?
테러가 자꾸 일어난다면 그러면 한국 정부에서 나서서 이슬람교를
내보내려 해야 하는데 순순히 나가주면 좋으련만 싫다고 한다면
그 땐 전면전으로 붙을 수도 있겠다.
그러면 전쟁이 일어나야 하나?
그 때 미국이 도와주려나? 북한이 도와주려나?
우리는 총을 쏠 줄도 모르고. 사랑으로 대하려면
그냥 다 죽어줘야 하는데.
그렇게 죽고 나면 한국은 금새 이슬람교 나라가 되는데.
어느 주의 종부터 내려놓을까?
전 대통령들이 착취했다고 하는 재산들을 지금은 다시 거둬들이고 있다.
주의 종들이 교회 재산을 다 먹었다는 것은 아니다.
권세를 이제는 내려놓아야 한다. 자기의 높은 자리를 내려놓아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하지 않고 목회자들의 권세타령만 했던 것을
철저하게 회개해야 내려놓게 될 것이다.
그러면 내려놓고 나면 무엇을 할 것인가?
그때는 아마 하나님께서 나서셔서 일을 하실 것이다.
누군가에게 지혜를 주셔서라도 이끌어 가실 것이다.
지금 분리되어 있는 이 상태에서 일하시라고 하지 말자.
하나님의 징계가 임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교회가 하나로 뭉치라는 것이다.
주의 종이든 장로들이든 제발 '회의 자리' 라는 곳에서 잘난 척들 좀
하지 말자. 쓸데 없는 안건에 핏대 세우고 목숨 걸지 말고 그 열정으로
쓸데 있는 것에 목숨을 내놓자.
이슬람교의 '목숨 거는 교리' 앞에 우리의 신학개념 지식이나,
신학적 성서고등비평이나, 장로교리나 감리교리나 순복음교리나
성결교리나 침례교리나 등등 말만 앞세우는 이론 교리가
다 필요 없다.
하나님은 너의 똑똑한 교리와 신학개념 지식 "관심 없다"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노력하는 것도 얼마나 힘든데,
성경말씀 대로 산다는 것도 얼마나 힘든데,
그런 것 보다 교리와 신학개념에 목숨 걸고 있다.
능력 행함만 쫓아다녀도 "나는 너를 도무지 모른다" 라고
하신다고 하시는 대도 그렇게 사는 주의 종들도 많다.
하나님 무서운 줄 모르고 사는 주의 종들이 너무 많다.
기라성 같이 거대하게 서 있는 주의 종을 보면 저 목사님은 정말
하나님을 알까? 정말 예수님을 알까? 정말 성경을 알까? 싶다.
성도들은 그런 주의 종에게라도 까불지 말고 덤비지 말고
테클 걸지 말고, 하나님 같이 섬겨야 된다고 배워서
그런 주의 종들 따라 같이 지옥에들 갈까봐 두렵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아버지께 있다.
우리가 예정론이 맞냐 구원론이 맞냐 아무리 논쟁을 벌여도
우리에게는 구원에 관한 어떤 것도 나불거릴 권한이
1%도 없다. 말할 자격이 아예 없다.
그냥 "네가 성경말씀 대로 사냐? 못 사냐?" 이다.
가난한 이웃 집에 파 한뿌리 주냐 안 주냐이다.
하나님아버지께서는 너의 똑똑한 교리와 신학개념 지식은
관심 없으시다.
오직 성경말씀 대로 사느냐? 그것을 계산하신다.
목사들이 제일 진실하고 속과 겉이 같은 줄 알았다
나도 지금까지는 교회 목사님들이 제일 진실한 줄 알았다.
속과 겉이 완전 같으신 줄 알았다. 그러나 같은 것이 아니었다.
진실한 척 했을 수도 있고, 경건한 척 했을 수도 있다.
이것은 뭐라고 할 수 없는 것이 사람은 누구나 그렇게 완벽하게
진실할 수가 없고 경건할 수가 없기 때문에 막무가내 보다는
그런 척이라도 잘하는 것이 낫다.
과거에는 목사님들이 설교를 하는 사람인 줄 알았다.
집례자인 줄 알았다. 교회 주인인 줄 알았다.
목사님들도 '예배자' 라는 생각을 못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주의 종의 모습은 '집례자' 로서의
모습이 아니라 '예배자' 로서의 모습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설교'는 목사님이 성도들을 책망하고 가르치고 깨닫게 하고
혼내기도 하는 말씀인줄 알았다. 하지만 그 '설교'를 전하는 자나
듣는 자나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둘 다 듣고 지켜야 한다고
하신다. '설교'를 자신의 '막대기'로 사용하지 말라신다.
'말씀' 자체가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어 그 말씀을 듣는 자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깨닫게 하는 일을 '말씀' 자체가 하시는 것이지,
주의 종이 설교를 통해 소리소리 질러서 성도들의 귓속에 넣어주고,
머리 속에 박히게 해주고, 깨닫게 해주려고 애쓰고 책망하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고 하신다.
"이 연사 외칩니다!" 하지 말고 너는 그냥 너도 지키면서
조용히 전하기만 하라고 하신다.
진심으로 본인이 '에스라' 처럼 먼저 재단에 엎드려서 울면서
죄를 회개하고 자복할 때에 성도들도 울고 자복하게 되고
백성들이 성전으로 몰려온다고 하신다.
(에스라 10:1) "에스라가 하나님의 성전 앞에 엎드려 울며 기도하여
죄를 자복할 때에 많은 백성이 크게 통곡하매 이스라엘 중에서
백성의 남녀와 어린 아이의 큰 무리가 그 앞에 모인지라" 아멘.
주의 종이 '주의 종의 권좌' 에서 내려와야 한다
주의 종들이 '주의 종의 권좌' 에서 내려와야 한다고 하신다.
자신들은 하나님의 종이라고 하면서 섬기는 자라고 하면서 속내로
들어가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살고 있다.
우리 교회에 무슨 문제가 있느냐고 하나님께 여쭤보았을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의 교회 교인들이 너의 설교에 은혜를 못 받고 있다" 말씀하셨다고 한다.
그러면 납작히 엎드려서 자기의 잘못을 회개하고 모르겠으면 무엇이
잘못 된 것인지 지혜를 달라고, 어떻게 설교를 해야 되는지, 왜 성도들이
자신의 설교에 은혜를 못 받는지 알려달라고 기도를 드려야 하는데
반감을 산다. 물론 하나님께 아닌 성도들에게다.
얼마나 고집불통으로 묶여 있는지 하나님의 말씀도 무시한다.
그래서 측근들에게 전화를 한다.
"니들이 지금 나의 설교에 은혜를 못 받고 있다고 하나님께서 알려
주셨는데 사실이냐?" "나 같은 영성 있는 설교를 다른 교회에서 하면
얼마나 은혜를 받고 난리를 치는데 우리 교인들은 왜 은혜를 못 받냐?"
라고.
"그래서 그렇게 기독교 방송에서 설교하는 목사님들의 설교만 듣고 사냐?"
"철야는 왜 안 나오냐?" "새벽예배는 왜 안 나오냐?" 전화로 닦달만 한다.
어쩌라는 것인지.
누구든 내가 맡은 기관 인원 수가 주는 것은 '내 책임'
내가 성가대 지휘를 하는데 성가대원들이 시무룩하고 재미없어하고
잘 안 나오고 흥도 안 나고 인원수가 줄거들랑 그 대원들이 은혜가
없어서 그러는 것이라고 치부하지 말고, 내가 도대체 어떻게 준비하고
있는지, 내가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지 모니터링을 해야 한다.
나를 고쳐야 한다.
내가 주일학교 부장을 하고 주일학교 선생을 하고, 학생부 선생을 하고
전도사를 하고 무엇을 하든 애들이 재미없어 하고 흥이 안 나고 인원이
줄거들랑 그 애들이 은혜가 없고 애들이 몰라서 그런다고 탓 하지 말고
나를 탓해야 한다.
내가 준비를 덜하던지, 하나님을 만나보지도 못해놓고 공과만 전하든지
말로만 전하든지 할 것이다. 제발 나를 돌아보자.
사탄이 나만 공격하고 나만 열매를 못 맺게 하려고 하는 것이라고
치부하지 말자. 성경말씀을 다 뒤집어 엎는다 해도 그런 것 없다.
나를 고쳐야 한다.
내가 설교를 하는데 성도들이 재미없어 하고, 흥도 안 나고, 아멘도 잘
안하고, 웃지도 않고, 게다가 잘 안 나오고 하거들랑 그 성도들이 은혜가
없고 모이기를 폐하는 성도라고 치부하지 말고, 제발 나를 돌아보자.
내가 도대체 설교를 어떻게 하고 있는지, 체험한 것이 아닌 지식으로
아는 것을 전하는지, 하나님을 알아도 지식으로 아는 것을 전하는 것인지,
칭찬에 인색하면서 웃지도 않으면서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면서 꾸중만
일삼고 있는지, 나는 통성기도 시간에 졸면서 성도들만 기도 크게 하라고
하는지 제발 나를 돌아보았으면 좋겠다.
자신의 자녀에게 칭찬도 없이 꾸중만 해서 얼굴이 굳어지게 키워놓고,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귀하게 보지도 않으면서, 성도들에게 자기 자녀의
흠이 드러나도록 자녀에 관련한 일을 성도가 알도록 시키는 일을 삼가면
좋겠는데 그런 것도 아랑곳 하지 않고 부끄러움을 모르는 주의 종 부부가
있는 것을 보면 같은 부모로서 좀 안타깝다.
그래놓고 성도가 사랑스럽다든지 귀하다든지 아낀다든지 한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면 정말 진심인가? 싶다.
어떻게 내 자녀가 사랑스럽지도 않고 웬수 같고, 귀하지도 않은데
남인 성도가 귀하고 사랑스럽고 아껴질까?
나를 고쳐야 한다.
주의 종의 삶 '의인의 고난?' 아니다...나를 고쳐라
개 줄이 목에 묶여 있듯이 빠져나가지도 못하고 그렇게 신앙 생활하는
성도들이 불쌍하다. 인간적인 생각으로 그 교회 남아있어야 하는
성도들이 불쌍하다.
아무리 설교에 영성이 있는 주의 종이라고 해도, 하나님의 말씀 자체를
나의 막대기로 삼고 전해버릇하면 성도들이 반감을 사게 되는데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리게 된다든지 말씀을 판단하게 된다.
"목사님은 그렇게 살지도 못하시자나요?" "목사님의 자녀들은 성도들
자녀 중에서도 제일 안됐는데요?" "나가면 미친 녀석, 사람도 아닌 녀석,
목사 아들만 아니면 패주고 싶다" 고 욕을 먹고 살아도 주의 종만 모른다.
주의 종들도 하나님께서 징계하시는데, 교회도 하나님께서 징계하시는데,
내가 어떤 나쁜 일이 있다든지, 나의 교회에 안 좋은 일이 생긴다든지,
마음들이 엉킨다든지 하면 하나님의 징계로 생각을 해야 하는데
"의인의 고난" 이라고 생각만 하고, 사탄의 어떤 핍박이나 역경도
이겨야 한다고, 그래야 하나님께서 칭찬하신다고 알고 있고,
사탄이나 마귀가 자기만, 자기 교회만 방해를 하고, 무너뜨리려고
공격하려고 해서 그런다고 생각하고 있어서 나를 고칠 생각을
전혀 하고 있지 않다.
이것은 성도는 하나님께서 생사화복 생로병사 흥망성쇠 빈부귀천을
다스리시고, 불신자는 사탄이 생사화복 생로병사 흥망성쇠 빈부귀천을
다스리고 있다고 알아서 그러는 것인가?
그러면 도대체 누가 하나님이신 것인지.
하나님도 하나님이시고, 사탄도 하나님이라는 것인지.
주의 종은 성도들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다리 역할'
나는 함부로 교회를 옮기지는 못한다.
하지만 정말 편하게 옮길 수 있는 상황이 있고, 남편은 옮기자고 하고
나는 은혜생활을 할 때는 기도를 드리고 응답을 받고 움직이려고 했다.
그러면 그 교회로 응답을 받고 왔다고 하면 그 주의 종은 좋아라 한다.
먼저 교회에서는 미쳤다는 등 욕을 바가지로 한다. 교회가 그렇다.
회칠한 무덤처럼 하얗게 페인트 칠 좀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 교회가 또 좋지 않은 상황이 왔을 때 기도 응답을 받고
떠난다고 하면 그 때는 마귀라고 몰아붙이기도 한다.
그것은 ‘욕심’일 뿐이다.
성도들만 어린 양에서 여우가 되고 장닭이 된다고만 생각했지,
주의 종들도 어린 양 대장에서 여우 대장이 되고 장닭 대장이
된다는 생각은 못했다.
하지만 사람은 개나 소나 다 변질이 된다.
그래서 성도들이 이 교회 저 교회 옮겨 다니는 것이다.
주의 종이 변했기 때문에.
내가 맡은 일도 있지만 하나님께서 옮기라고 허락하실 때
옮기려고 기도 중에 있다.
만약 전국에 있는 목사님들이 다 똑 같다고 했을 때, 기라성 같이
서 있기를 바라고, 자기 위치가 높기를 바라고, 상석에 앉아 있고 싶고,
설교를 하고 싶고, 성도 수에 배부르고 자기 공화국을 세우고 싶고 한다고
했을 때, 그럴지라도 나는 교회를 떠나지 못한다.
하나님아버지를 떠나지 못한다. 지옥에 가기 싫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아버지를 떠나고 싶지 않고, 하나님아버지를 떠나서는
살 수가 없기 때문이다.
주의 종이 이래서, 누가 이래서 모가 못 마땅해서, 다른 교회로
옮기는 것 말고, 교회를 안 나오고 떠나고 하는 것은 아직
하나님아버지를 못 만나서 그러는 것이다.
성도들에게 하나님아버지를 만날 수 있도록 '다리 역할'을 해주는 일을
주의 종들이 하는 것이다. 그것은 설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진심어린 마음과, 진실 된 언행으로 하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정말
함께 하신다는 모습과 기도응답 받는 생활을 모범적으로 보여주면서
하는 것이다.
그것은 단기간에 하는 것이 아니라
주의 종들 인생을 통해서 보여주어야 한다.
주의 종이 집례자가 아닌 '예배자'의 모습을 보고 싶다
이제는 주의 종들이 '예배자'로 서 있는 교회를 가고 싶다.
주의 종이 '맨 앞자리'에 앉아서 예배를 드리고, 매 예배시간에도
앞장서서 하나님께 전심으로 찬양을 드리는 '어린 아이'와 같은
그 모습을 보고 싶다.
자기만 설교 잘 한다 소리 듣지 않고 자기만 높아지기를 바라지 않고,
어린 부교역자 일지라도 계속 세워주고 조언해주고 키워주고,
어느 성도가 하나님께 깊은 영성 있는 은혜를 받았다고 했을 때는
그것을 인정해주고 체크해주고 조언해주고 키워주는 모습을 보고 싶다.
정말 하나님을 높이고 진정한 '예배자'로 서 있는 모습을 보고 싶다.
목사님의 '예배자' 로서의 얼굴이나 태도를 보면 '예수님' 보는 것
같았으면 좋겠다.
"나도 저렇게 저런 모습으로 예배를 드려야지"
"나도 저렇게 입을 크게 벌리고 웃는 얼굴로 힘차게 박수치면서
큰소리로 찬양을 불러야지"
"나도 저렇게 기도를 열심히 드려서 나도 하나님을 만나고
기도응답을 받으면서 살아야지"
"아하~ 하나님아버지는 그런 분이시구나, 나도 하나님아버지를
만나고 싶다" 라고 본을 받을 수 있는 목사님과 남은 신앙생활을
같이 하고 싶다.
분열은 '죄' 라면서 주의 종들이 당당하게 짓고 서있다
분열은 '죄' 라면서 주의 종들이 역사적으로 전국적으로 단체적으로
짓고 있으면서도 하나님 앞에 당당하게 서 있고 당당하게 살고 있다.
이 모든 상황들은 다 '정죄 죄' 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남을 정죄하다보니, 남이 주장하는 것을 정죄하다보니,
신사참배 한 것을 정죄하다보니, 남이 총회장이 되어서
잘 못하는 것을 정죄하다보니, 일어나는 일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사참배'를 가지고 정죄할 것이 전혀 못되는 것은
당신이 그 앞에 있었어도 똑 같은 상황이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너는 정죄 권한이 한 푼 어치도 없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남을 정죄하는 당신이 짓고 있는 '정죄 죄'는 '신사참배 죄' 보다
훨씬 크다.
신사참배가 '우상숭배 죄' 라고 한다면, 당신의 '정죄 죄'라는 것은
"내가 하나님이다" 라는 '참람죄' 이다.
우상숭배의 죄가 큰 것 같지만 '정죄 죄'는 하늘을 찌른다.
"너는 정죄할 권한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의 법칙에는 'Simile' 법이 있으신데
누구에게 대입을 시켜도 너도 똑같은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그러니 누구든 자랑하는 말과, 잘난척 하는 말과 교만한 말과
정죄하는 말을 삼가고 입 다물고 사는 것이 정말 살 길이다.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는다고 했는데
다들 욕심으로 기독교를 이끌어 가고 있다.
(잠언 17:19) "다툼을 좋아하는 자는 죄과를 좋아하는 자요
자기 문을 높이는 자는 파괴를 구하는 자니라" 아멘.
(잠언 21:4) "눈이 높은 것과 마음이 교만한 것과
악인이 형통한 것은 다 죄니라" 아멘.
'욕심' 이 가득 차니 '분열' 이 오는 구나!
욕심이 가득 차니 분열이 오는 것이다.
분열은 '죄' 라고 성도들에게는 당을 짓지 말고 분열시키지 말고
너도 분열의 대열에 끼지 말라고 그렇게 외치면서 정작 주의 종들은
욕심이 너무 많아 분열의 죄를 그렇게 당당하게 짓고도
성도들 앞에서도 당당하고 하나님 앞에서도 당당하게 서있다.
바로 안 죽이시니 '죄' 인지를 모르고 살고 있다.
왜 주의 종들은 하나님 앞에 설 것을 생각 안 하고 살까?
주의 종들은 죽으면 끝이고, 천국에는 성도들만 가나?
기독교의 존재를 위해서 주의 종들을 임시 살려주시는 것일까?
당신이 죽어서 하나님 앞에서 "나는 이렇게 목회했다"고 하나님 성전
앞에서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아도, 하나님 성전 앞에 가면
인간은 누구나 버러지 같이 죽은 존재 같이 되어 버린다.
주의 종이든, 이방 교주든, 성도든, 불신자든, 사람은 죄인이지
하나님 앞에 아무 것도 아니다. 전부 티끌과 먼지들이다.
기라성 같고 거대해 보이는 주의 종들이나, 기라성 같고 거대해 보이는
이슬람교나, 이방 종교나, 왕들이나, 정치가들이나, 세계적인 갑부들이나,
사탄이나 마귀나 귀신이나 용이나 뱀이나 짐승이나, 그 어떤 것도 전부
'전지전능' 하신 하나님 앞에서는 티끌과 먼지들이다.
니가 잘났다고 자랑하고 돌아다니고 난리치고 떠들지 않아도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전부 몽땅 다 알아서 하신다.
하나님의 세계는 완전 자동시스템이시다.
이렇게 한 구석에서 글을 쓰고 있는 나도 티끌의 소리일 뿐이다.
(이사야 29:4) "네가 낮아져서 땅에서 말하며 네 말소리가 나직이 티끌에서
날 것이라 네 목소리가 신접한 자의 목소리 같이 땅에서 나며 네 말소리가
티끌에서 지껄이리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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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 문 입구 앞에 서자, 기쁨 행복 만족감이 천국에서 흘러나왔다.
나는 그곳의 따뜻함을 느낄 수 있었고, 나의 사정을 아뢰려고 섰을 때
하나님의 엄청난 능력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대담하게도 나는 하나님의 보좌 앞에 서서, 먼저 하나님께 내가
얼마나 사랑과 경배와 희생의 위대한 삶을 살았는지 내가 한 일을 모두
말씀드렸다.
어린 나이에 주를 영접했으며, 경찰청을 퇴직하고 버림 받거나
학대 당하는 불우한 아이들을 32명이나 3년을 데리고 사역을 했으며,
평생 동안 주를 섬겨 왔다는 사실을 아뢰었다.
지금 내가 위험에 처해 있는데 오로지 하나님만이 나의 인생을
연장시켜 주실 수 있다고 말씀드렸다.
하나님은 내가 이야기할 동안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나의 청원이 끝났을 때...
진노의 음성이 내 얼굴을 때렸고 하나님은 내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보여 주셨다. 하나님은 나와 나처럼 행하는 자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계신지 말씀하셨다.
나의 믿음은 죽은 믿음이고, 나의 일은 하나님이 받으실 수 없는
것들이며 나는 결국 헛된 일을 해왔다고 지적하셨다.
그런 삶을 살면서 그 삶을 경배의 삶이라고 치부하는 것은
'가증' 스러운 일이라고 하셨다.
믿을 수가 없다. 지난 세월, 주를 위해 한 일이 얼마나 많은데,
그런데 지금, 그 일들은 모두 나 자신을 위한 일이었다는 것이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에 대해 설교하고 증언할 때에도
나는 오로지 나의 양심을 달래려는 것이었다고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쉽게 말해, 나의 첫 사랑과 첫 일은 모두 나 자신을 향한 것이었다.
나의 필요와 욕구가 충족된 이후에만, 나는 양심을 달래 위해 주님의
일을 하려고 나선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우선 순위는 잘못되어 있고
용잡될 수 없었다. 사실은 내가 나의 하나님이 되어 버린 것이다.
<하워드 피트만 목사의 '플라시보' 책 85~86 페이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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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글 잘 읽고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