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혜결사를 넘어 정혜결사의 창조적 계승을 위한 모색
- 부처님 생애를 통해 본 ‘정혜결사’의 창조적 계승과 시대적 구현 -
도 법 (인드라망 생명공동체 상임대표, 실상사 주지)
▶ 글싣는 순서 ◀
1. 머리글
2. 결사를 해야 하는 이유와 목적
3. 지눌의 정혜결사
1) 정혜결사의 탄생배경
2) 정혜결사를 위한 지눌의 활동과정과 태도
3) 정혜결사의 성격
4. 부처님 생애와 정혜결사
1) 부처님 생애와 결사
2) 부처님 생애에 비추어 본 정혜결사
5. 정혜결사의 시대적 구현
1) 정혜결사의 현대적 의미
2) 정혜결사의 정신으로 본 오늘의 사회와 승단의 현실
3) 현대적 결사운동의 방향모색
6. 맺는글
1.머리글
오늘을 살고 있는 한국불교 수행자들에게 보조는 과연 누구인가?
자신과 교단과 사회현실의 문제에 대하여 가슴 저리게 고뇌하는 오늘의 불교 수행자들에게 진정 보조는 어떤 존재인가?
“여기에 한사람이 있다. 그는 들뜨고 거짓된 속스러움을 등지고 바르고 참된 종지를 사모하였다. 처음에는 언어에 의지하여 진리를 이해하고 다음에는 선정을 닦아 지혜를 발휘하였다. 이미 (진리를) 몸소 체득하시고 아울러 여타의 모든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베풀어 잠들어 있는 선풍을 다시 떨치셨으며 캄캄한 조사의 달을 다시 밝히셨다. 만일 이런 분이 계시다면 분명 가섭의 적손이며 달마의 종자로서 잘 이어 받고 잘 알아 펼친 사람이라고 할만하다 할 것이다. ---- 국사는 오직 도에 자신을 맡길 뿐 사람들의 칭찬이나 헐뜯음에 마음이 동요하지 않으셨다. 성품 또한 자비로우시고 인내심이 깊어 후학들을 잘 인도하셨고 혹 성질이 들뜨고 거친 사람이 있어 뜻을 거슬리더라도 그를 가엾이 여겨 껴안아 다잡아 주는 등 끊임없는 정리가 마치 사랑스러운 자식을 대하는 어머니와 같았다.--- 또 위의를 잘 거두셨으니 牛行과 虎視로 혼자 있을 때에도 신중하게 경계하여 몸가짐에 게으름이 없었으며 운력하는데 이르기까지 항상 대중의 앞장을 서셨다. ”
-보조국사 비명 간추림-
보조에 관계된 자료를 보면 비교적 다른 스님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그 행로가 소상하다. 출가 수행자로서의 고뇌, 깨달음을 향한 수행과정, 깨달음에 대한 종교적 체험, 당시 승가사회가 안고있는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치열한 몸짓들이 매우 구체적이다. 대부분 비슷하리라고 여겨지는데 보조의 행장을 접할 때마다 느끼는 건 수행자로서의 고뇌와 방황과 모색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참으로 진지하고도 인간적인 좋은 도반을 만난 기분에 젖게된다.
다른 한편으로는 높은 안목과 깊은 애정으로 실천적 모범을 보여주고 나아가 따뜻하고 자상하지만 분명하고 확고한 입장에서 나아가야 할 바른길을 잘 제시하고 이끌어 주는 훌륭한 스승을 모시게 되었다는 기쁨을 느낀다. 이 정도면 보조가 오늘의 우리들에게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설명은 더하지 않아도 충분 할 것으로 여겨진다. 이와 함께 짚어보아야 할 것이 한가지 더 있다. 현실적으로 모순과 혼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오늘의 승단 입장에서 정혜결사는 과연 무엇인가? 세상으로부터 불신과 조소를 받고 사부대중들이 스스로 절망하고 있는 한국불교 현실에서 정혜결사는 과연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인가.
“보조국사 지눌은 고려시대의 불교계를 대표하는 승여이었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오늘까지 한국불교 종조의 한사람으로 크게 추앙받고 있다. 그리고 그가 창시한 수선사는 당대 불교계 혁신운동의 중심체였을 뿐 아니라 그 뒤에도 면면히 이어져서 오늘날까지 한국불교의 큰 흐름의 하나를 이루고 있다.”
-수련결사의 사상사적 의의 ( 최병헌)-
“지눌의 정혜결사는 그 사상적인 토대나 체계, 한국불교에 미친 영향으로 보아 대표적인 결사의 예라고 할 것이다. 원효로부터 기초한 한국불교의 회통적 전통은 선과교, 지혜와 자비, 깨침과 닦음, 선정과 지혜를 함께 아우르는 지눌의 정혜결사를 통하여 한국불교의 굳건한 사상적 전통으로 자리잡게 되었고 오늘날까지 전승되고 있다.
-현대결사운동에 미친 지눌의 정혜결사 (강건기)-
“결사운동의 전개는 고려 후반기에 있었던 불교 수행의 한 실천운동으로서 이 시대의 일은 아니다. 그러나 시대는 바뀌지만 인간의 근본적 문제는 그때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다.---
8백여년 전에 지눌에 의해서 창조되었던 결사 운동이 현대에 있어서도 큰 의미를 갖는 것은 그 시대의 문제가 오늘의 문제로 상존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의 한국불교에는 지눌의 결사정신이 재구현 되어야 할 것이며 제2의 정혜결사운동이 전개되어야 한다. 따라서 결사 운동의 현대적 의미란 결사운동의 계승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정혜결사의 현대적 의의 (권기종)-
인용문에 군더더기 설명을 더 붙이지 않더라도 천년 가까운 세월이지만 오늘 우리가 보조 지눌과 정혜결사를 논의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 것인지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여 보조국사는 모범적 수행자요. 존경하고 따라야 할 스승임에 틀림이 없다. 정혜결사는 그 사상과 정신을 잘 계승하고 실현해야 할 훌륭한 전통임에 틀림없는 사실이다. 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세상일들이 늘 그렇듯이 정혜결사도 면밀하게 살펴보면 내용과 사실에 있어서 부족하고 미흡한 점들이 있을 것으로 사료된다. 보는 관점에 따라 전혀 다른 한계점이 파악되는 경우도 비일비재 한 것이 우리의 경험이다. 이에 우리의 영원한 수행자상이요. 인간상이신 부처님이라는 거울에 정혜결사를 비추어 봄으로써 정혜결사의 전통을 창조적으로 계승하여 오늘에 구현하는 길을 찾을수 있도록 하고자 한다.
2. 결사를 해야 하는 이유와 목적
먼저 ‘결사’ 에 대한 어의적 해명이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 현재 보편적으로 볼 수 있는 결사의 사전적 정의는 “여러 사람이 공동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사회적인 결합관계를 맺음 또는 그 단체” “ 2인 이상의 동지가 공동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합의하여 조합을 만듦 또는 그 단체 ” 등이다. -결사운동을 통해본 불교개혁의 성격 (김상영)-
“다수인 이 공동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상설단체를 결성함 또는 그 단체” -국어사전-
사전적 의미의 결사가 불교라는 종교적 의미의 결사로 나타나는 경우는 어떤 것이 있을까. “다함께 正因을 맺고 다함께 선정과 지혜를 닦으며 다함께 행원을 수행하고 다함께 佛地에 태어나며 다함께 보리를 증득하는 등 이와 같은 일체를 모두 다함께 배워서 미래세가 다할 때까지 자유자재롭게 시방세계에 유희하며 서로 主와 伴이 되어서 함께 서로 도와 이루며 정법의 수레를 굴려서 널리 중생들을 제도하여 모든 부처님의 막대한 은혜를 갚으려 하오니----” -정혜결사문-
인용문 자체만으로도 불교신앙 결사가 어떤 것인지 짐작하는데 별다른 어려움이 없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제 결사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짚어 볼 차례이다.
“ 첫째는 국가 (외부세력) 로부터 탄압 받아 불교의 운명이 풍전등화같이 될 때---
둘째는 교단이 부패하고 승여가 타락하여 사회로부터 종교의 권위를 상실하고 지탄의 대상이 되었을 때---” -신앙결사의 성립배경에 관한 연구 (한보광)-
“불교가 각종 폐단을 극명하게 노출시키고 있을 때 이 같은 상황을 개혁하고자 했던 불교인들의 노력이 여러 형태로 전개되었다. 교단 개혁을 통한 전면적 개혁을 시도하는 경우가 있었던 반면 수행가풍의 회복과 진작을 위해 自淨的 개혁의 시도도 있었다. 특히 불교가 어려운 상황에 처할 때마다 형성되었던 결사운동은 자정적 개혁의 시도라는 측면에서 주목되는 사례이다. -결사운동을 통해본 불교개혁의 성격 (김상영)-
“불교 본래의 생명을 상실한 교단은 일반대중으로부터 외면 당하게 되며 타락한 승려들은 사회로부터 비난받기 마련이다. 이러한 현상에 대한 반성 없이 장기간 지속될 경우 불교는 새로운 탄압의 시기를 맞이하거나 혹은 완전히 그 땅에서 소멸 되어버린 예를 우린 역사적으로 많이 보아왔다---자성의 소리와 반성운동을 전개하는 계층이 형성되어---이들이 신앙결사의 형태로 나타나며 이들은 부패한 교단과 문란하고 타락한 승풍에 대하여 청량제 역할을 하게된다” -신앙결사의 성립배경에 관한 연구 (한보광)-
김상영은 “결사운동을 통해본 불교개혁의 성격” 에서 결사의 성립배경을 세 가지로 정리하고 있다. 첫째, 극심한 사회적 혼란 둘째, 불교계에 대한 외부의 압력 셋째, 불교계 자체의 타락상 등이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여 역사적으로 다양하게 나타났던 불교 결사들을 종합해볼 때 첫 번째의 사회적 혼란에 대한 대응으로 불교결사를 한 경우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물론 광의적으로 해석하면 사회혼란에 대한 대응이라고 할 수도 없지는 않지만 직접적으로 볼때 외부의 탄압과 내부의 타락이 결사를 하지 않으면 안되는 주요 원인이라고 봄이 타당하다고 하겠다. 결사의 원인이 외부의 압력이든 내부의 타락이든 결사를 해서 하려고 하는 것과 얻으려고 하는 내용은 무엇일까?
“불교의 근본정신을 회복하여 정법의 혜명을 계승하고 출가본연의 정신에 투철함으로써 출가의 본분을 다하고자 하는 집단적인 비장한 결의의 실천이 결사운동으로 나타났다.--- 집단적인 결의와 실천을 통해서 교단과 각자의 활로를 찾으려는 작업이 결사라고 하겠다.”
-결사의 필요성과 그 방향 (도법)-
“결사운동은 수행자를 수행자답게 하고 승단을 승단답게 하며 불교를 불교답게 하는데 청량제 역할을 함으로써 불교역사의 전통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한국불교 제일의 명제와 대중적 결사 운동의 필요성 (도법)-
일찍이 성철스님은 ‘부처님 법대로 살자’ 고 했다. 늘 우리는 부처님 가르침에 의지하여 여법하게 수행해야 된다고 가르친다. 또는 ‘부처님 당시로 돌아가자’ 라고 하기도 한다. 결론적으로 불교의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 또는 불교의 제모습찾기의 몸짓이 바로 결사인 것이다.
3. 지눌의 정혜결사
1) 정혜결사의 탄생배경
“1173년(명종3)에 김포당이 군사를 일으켜 정중부 등을 치고 전왕복위를 꾀하려다 좌절되고 다음해에는 귀법사, 중광사, 홍조사 등의 승려 2천명이 이의방을 치려다 실패하는 사건이 터졌다. 1176년(명종6)에는 공주 명학소에서 망이.망소이 등의 난이 일어났고 1179년(명종9) 에는 경대승이 정중부를 죽이고 실권을 장악하였으나 3년후에는 전주에서 군인과 관노들이 난을 일으키고 1193년(명종23)에는 김사미, 효심의 난이 일어나 민란의 형태로 발전하였다. 1196년(명종26)에는 최충헌이 이의민을 죽이고 집권하므로 써 최씨무인정권이 막을 열었다.---부석사, 부인사의 승도들이 모반을 계획하다가 유배되기도 했다. 그야말로 숨돌릴 사이도 없는 난리의 연속이었다.”
진성규의 “고려후기 수선사의 결사운동” 에서 당시 격변하는 사회적 상황과 나아가 격변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있는 불교계의 추악한 모습을 읽을 수 있는 부분만 옮겨 놓았다.
“ 화엄종과 법상종은 무인세력과 항쟁하는 과정에서 점차 그 교단의 세력이 약화되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 화엄종에서는 의천 직계의 법손인 흥왕사의 요일. 영통사의 각훈 등에서 균여의 계통인 개태사의 수기.천기등으로 교체되면서 화엄학의 내용이나 성격이 바뀌어 의천에게 비판받았던 균여의 화엄학이 재평가되고 있었다. 그리고 천태종에서도 역시 의천직계의 덕소등에서 백련사의 요세로 법계가 바뀌면서 선과 구분되어 법화의 실천신앙이 강조되고 있었다. 그 다음에 선종교단은 의천의 천태종 창립으로 인하여 크게 타격을 받고 한때 위축되었으나 예종대 이후 중앙 불교계에 다시 대두하면서 천태종과 구분되어 조계종으로 칭하여지고 있었다”
최병헌의 “수선결사의 사상사적의의” 에서 불교계의 분열과 대립 그리고 교계내의 변화에 관한 부분만 인용했다.
“외적으로는 무신정권의 쿠데타에 의한 정권찬탈 과정에서 불교가 정치적 소용돌이에 휩쓸려 종교 본연의 자세를 잃게 되었다. 즉 고려불교는 초기부터 왕권과 밀접한 왕실불교로 출발하였기 때문에 왕실의 변화와 불안정은 불교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왕실의 비호를 받던 불교계는 경제적 신분적으로 받은 혜택으로 인하여 승려기강이 해이되고 물질적 풍요 속에 타락되었다는 것이다. 내적으로는 불교내의 분열을 들 수 있는데 선종과 교종이 심한 반목으로 대립하고 있었으며 각 파벌간에 심한 갈등을 표출하고 있었다.” 김방룡의 “지눌의 결사운동과 소태산의 불교개혁운동의 의의” 에서 정권과 결탁된 불교계의 남루한 모습과 그에 관련한 불교계의 타락상 그리고 분열과 대립상을 나타내는 내용만을 골라 보았다. 인용한 자료에 근거하여 정혜결사의 탄생배경을 간단하게 정리하면 첫째 사회적 혼란. 둘째 불교계의 분열과 대립. 셋째 승단의 타락. 넷째 불교계의 위기의식이라고 요약 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2) 정혜결사를 위한 지눌의 활동 과정과 태도
“배움에는 일정한 스승이 없었고 오로지 道만을 추종했으며 지조는 고매하여 헌헌장부이었다. 스물다섯살 때 승선에 합격하였고 창평 청원사에서 우연히 육조단경을 읽다가 불가사의한 경계를 체득하였는바 이로부터 실질적으로 명예와 이익을 싫어하고 항상 힘써 도를 탐구하고자 했다. 그 뒤 보문사에서 화엄합론을 얻어보고 거듭 신심을 내어 탐구하여 견해가 나날이 더욱 분명해졌다. 마침 득재의 청을 받고 거조사에서 지내다 지리산 상무주앞으로 옮겨 지내면서 대혜보각선사의 어록을 보고 계합하여 바로 그 자리에서 안락하였다.---송광산 길상사로 옮겨 지낼 때에도 한결같이 부처님 계율에 의지하였다.”
-보조국사 비문을 간추렸음 -
“지눌이 소년시절부터 몸을 조사 문에 던져서 두루 선방을 찾아다니며 부처님과 조사들께서 자비로 중생을 위해 배푸신 법문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요점은 우리로 하여금 모든 반연을 쉬어 마음을 비우고 그윽히 계합하여 밖으로 추구하지 않게 하는 것이었다.---그러나 우리들의 아침 저녁으로 하고 있는 자취들을 돌이켜보건대 불법을 빙자하여 아상과 인상만 장식하고 이익과 편리만을 쫓으며 세속적 욕망에 골몰하여 도덕은 닦지 않고 의식만 허비하고 있다. 비록 다시 출가한들 무슨 덕이 있을까 ---슬프다 삼계를 여이고자 하나 번뇌를 끊는 행이 없으니 한갖 몸만 남자일 뿐 그 뜻은 장부가 아니로다. 위로는 대도를 어기고 아래로는 중생을 이롭게 하지 못하며 가운데로는 사은을 저버리는 것이니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로다---마땅히 명리를 버리고 뜻을 함께 하여 항상 선정을 익히고 지혜를 고르게 닦는데 힘쓰며, 예불하고, 경읽으며, 나아가 운력하는 것까지 각각 맡은 소임에 따라 생활하면서 인연 따라 성품을 수양하며 멀리 달관의 안목을 지닌 참사람의 고매한 행을 추구한다면 어찌 통쾌하지 않으랴---
다른 때에 지금의 약속을 지켜 결사를 하게될때에는 ‘정혜’ 라 이름하기로 하고 맹세하는 글을 만들어 결의했다. 그 뒤 우연하게도 도량을 마련하지 못함으로 인하여 사방으로 흩어지는 바람에 아름다운 기약을 이루지 못한 체 지난 세월이 벌써 십여년이 되었다---지난번에 뜻을 함께 하기로 했던 재공선백이 팔공산 거조사에 있으면서 예전에 약속했던 대로 하가산 보문사로 옮겨 정혜결사를 하자는 청을 받아 그 뜻에 따라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옛날에 뜻을 함께 했던 도반들을 찾아보니 혹은 죽고 혹은 명리에 빠져 있었다. 부득불 남은 도반 겨우 삼사인과 함께 법석을 마련하여 본래의 서원에 부응하고자 하니 선과교, 출가와 재가, 승과 속을 막론하고 도에 뜻을 둔 이라면 옛날 결연한 것과는 관계없이 함께 동참하길 권하고 바라는 바이다” -정혜결사문 간추림-
정혜결사를 위한 지눌의 활동과정과 태도를 몇 가닥으로 정리하기 위해 당시 사회와 불교계와 승단의 상황 그리고 지눌 자신의 행적을 다루고 있는 비문과 결사문을 종합적으로 살펴보면서 가닥을 잡아보고자 한다.
첫째, 앞에서 살펴본바에의할 때 혼란스러운 사회, 분열 대립하는 불교계, 타락한 승단의 현실에 직면한 청년 지눌이 고뇌와 방황과 몸부림의 과정에서 결사운동의 전통과 새로운 모색을 위한 결사운동의 움직임을 깊은 관심으로 주목하고 있었음을 읽을 수 있다.
둘째, 담선법회 참석당시 지눌의 나이 25세이었고 그이후 단경과 화엄합론과 대혜어록을 통해 안목과 사상과 이론이 새롭게 열리고 확립되는 것으로 보아 아직 자기 정립이 제대로 되어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담선법회에서 정혜결사를 제안결의하고 있음을 볼 때 지눌의 고뇌와 열정이 어느 정도이었는지를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듯하다.
셋째, 결사를 함께 하기로 뜻을 모았지만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후일을 기약하며 흩어진지 10여년만에 다시 모였는데 삼사인 밖에 모이지 못했다. 이런 점으로 볼 때 그간의 과정이 절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음이 틀림이 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흔들림 없이 그 뜻을 꾸준히 밀고 나가는 것을 보면 지눌의 문제의식과 의지가 얼마나 투철했는지를 온몸으로 느끼게 한다.
넷째, 절망적 상황과 도반들의 나약함을 비난하거나 탓하지 않고 법에 대한 올바른 안목을 확립하고 그 체험을 심화시키기 위한 줄기찬 정진과 인간의 원초적 고뇌를 해결하는 길인 올바른 수행의 길과 당시 불교계의 문제를 근원적으로 함께 풀어가기위한 이론화 작업을 꾸준하게 진행하고 있는 것을 보면 지눌이 결사를 위해 얼마나 치밀하게 준비했는지를 잘 알 수 있게 한다.
다섯째, 선과교등의 종파, 출가와 재가의 승속에 구애받지 않고 결사에 뜻을 함께 할 사람이라면 누구나 함께 하려는 탈속하고 활달한 태도 그리고 일정기간을 정함 없이 지속사업으로 추진하고 있음을 볼 때 지눌이 결사에 바치는 관심과 열정과 노력이 대단했음을 실감케 한다.
여섯째, 끊임없이 배우고 익히고 거듭된 향상을 위해 줄기차게 노력하는 지눌의 수학과 수행과정에 나타난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좋은 모범이다. 지눌의 모범적 태도가 수선사 청규인 誡初心學人文에 법을듣는 기본태도로 ‘너무 어렵다고 포기하거나, 너무 쉽다고 가볍게 여기는 태도’ 를 경계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배움과 익힘, 연구와 탁마, 가르침과 실천을 중요한 가치로 삼는 절집풍토를 가꾸어 내려고 애쓰고 있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일곱째, 예불, 간경, 운력등 바람직한 전통을 잘 계승하는 바탕 위에 선정과 지혜로 표현되고 있는 정법불교의 구현과 교리와 실천을 일치시키는 수행체계 확립과 출가승단의 도덕성을 회복하려는 입장을 확고히 하고 있음을 볼 때 지눌의 문제의식과 관점이 분명하고 탁월했음을 볼 수 있게 한다.
여덟째, 처음에는 언어에 의지하여 진리를 이해하고 그에 근거하여 선정을 닦아 지혜를 빛나게 하며 부처님 계율에 의지하는 윤리적 실천을 투철하게 하는 것으로 볼 때 요새 말을 빌리자면 매우 실질적이고 과학적 태도로 불교수행의 길을 모색하고 있음을 볼수 있다. 자료상으로 볼 때 지눌의 삶을 출가이후 혼란스러운 불교계의 현실과 승여들의 타락상을 경험하면서 깊은 회의와 고뇌를 시작으로 입멸 할 때까지 관심이 결사에 집중되어 있었던 건으로 판단되어진다.
3) 정혜결사의 성격
지금까지 정혜결사의 탄생배경과 지눌이 결사를 추진하는 과정에 대하여 거칠게나마 짚어 보았다. 앞에서 살펴 본바와 같이 정혜결사가 단순히 보조 지눌이라는 특출한 인물에 의하여 이루어졌다기 보다는 총체적이고도 복합적인 시대상황과 보조의 만남으로 이루어 졌던 것이다. 분열과 대립, 모순과 혼란, 세속화와 부패로 인한 시대대중들의 절망 과 방황, 고통과 불행을 바라보며 양심적으로 고뇌하는 뜻들이 모여 활로를 찾고자 하는 몸짓으로 나타난 것이 정혜결사인 것이다. 물론 그 중심에는 언제나 보조 지눌이 있었고 그분의 고뇌와 열정과 헌신적 노력이 뒷받침되었으므로 가능한 일이었다. 같은 선상에서 보조 지눌과 시대상황의 만남이라는 과정을 거쳐 이루어진 정혜결사의 성격을 어떻게 파악하고 이해 할 수 있을 까? 쉽게 이해 할수 있도록 한다는 차원에서 몇 가지 단락으로 정리해보는 것도 괜찮을 듯하다.
첫째, 사회와 불교계의 현실을 주의깊게 관찰하고 진단한 것을 근거하여 비판하고 반성하고 대안을 마련하고자 하고 있다.
둘째, 출가수행자로서의 어리석음인 권위의식과 배타적 이기심, 선과교등의 종파주의적 분열과 대립을 극복하고 출가수행자의 본연의 모습과 선과 교를 위시로 한 종파간의 융화를 이끌어내고자 하고 있다.
셋째, 중앙이 아니면 길이 없다는 식으로 중앙에 집중되어있는 불교계의 흐름을 다양한 지역에 뿌리를 내려야 아름다운 꽃이 피어 날수 있다는 입장에 서있다.
넷째, 유위법적 정토발원을 위시로 한 기복불교의 혼탁한 흐름을 정혜쌍수로 표현되고있는 정법불교. 정통수행불교의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고자 하고 있다.
다섯째, 체제와 결합 옹호하는 것을 비롯한 왕실귀족등 신분이 높고 부유한 상류층에 의존하는 불교에서 서민대중 또는 만인에게 열려있고 그들과 고락을 함께하는 대중불교를 모색하고자 하고 있다.
여섯째, 권력과 명예와 세력과 권위와 재산을 쫓는 세속화된 비불교, 반승가적 풍토를 청정과 화합, 정법과 수행불교로 구현하기위해 온몸으로 헌신하는 승가를 회복하고자 하고 있다.
일곱째, 미혹과 혼란, 탐욕과 집착, 조직과 허위, 의존과 예속에 빠질 위험이 늘상 도사리고 있는 도시중심의 불교에서 자립적 생활을 통한 청정과 화합, 정법과 수행을 원활히 실천할 수 있는 좋은 조건인 지역을 기반으로 한 불교를 가꾸고자 하고 있다.
여덟째, 수량과 규모와 세력과 재산에만 의지하는 물량적 가치에서 진실, 성실, 올바름, 순수, 청빈등 불교사상과 정신의 내용을 중심가치로 삼고자 하고 있다.
아홉째, 앞뒤와 안팎의 정황들을 고려해볼 때 의존과 통제의 상황에 파묻혀 있는 불교 현실의 부작용을 극복하고 자립적이고도 자율적인 건강한 불교로 태어나게 하고자 하고 있다.
열째, 제정일치에 가까운 성격의 불교, 획일적인 불교의 위험성과 문제성을 극복하고자 주체성과 자립성과 다양성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불교로 나아가고자 하고 있다.
사실 정혜결사에 관한 어떤 자료에도 승가내부에 대한 문제제기와 반성과 대안모색 말고 사회현실의 문제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관심을 표명한 경우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현실적으로 무모하다고 여겨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의 연구자료들을 종합하여 정혜결사의 성격을 광의적으로 정리해본 것은 정혜결사에 대한 우리의 관심과 이해를 더욱 풍부하게 하고 현실문제와 연결시키는데 도움되도록 하는데 필요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4. 부처님 생애와 정혜결사
1) 부처님 생애의 기본틀
불교의 교주는 부처님이시다.
부처님은 불교 수행자들이 본받고 따라야 할 영원한 스승이요. 수행자상이다. 모든 불교 사상과 정신이 부처님에게서부터 싹트고 무성하게 자라났다. 불교인들이 실현해야 할 불교의 궁극적 이상과 가치도 부처님에게서 비롯되었다. 무궁무진한 팔만대장경도 부처님 삶의 내용을 언어로 기록해낸 것이다. 이 세상 그 어디에도 부처님을 떠난 불교는 존재하지 않는다. 부처님과 무관하게 논할 수 있는 불교는 본래부터 있지 않았다. 언제 어디에서나 불교 수행자들이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볼 하나의 큰 거울은 오직 역사현장에 살아 계셨던 부처님의 일생이다. 부처님의 생애는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불교 수행자들이 자신을 비추어 보아야 할 영원한 거울이다. 오늘의 중심 주제인 정혜결사도 부처님 생애의 거울에 비추어 보면서 살펴 볼 때 바람직한 창조적 계승과 시대적 구현의 길을 마련해 갈 수 있을 것이다. 이에 정혜결사를 비추어 볼 거울인 부처님 생애의 기본 틀이 어떤 것인지 정리하고자 한다.
부처님 생애를 어떤 관점으로 바라볼 것인가? 또는 부처님 생애를 어떻게 이해 해야 할 것인가. 아마도 바라보는 관점과 이해하는 틀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고 본다. 허나 분명 한 것은 부처님 생애를 어떻게 보고 이해하느냐 하는 문제와 불교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바람직하게 수행하는길을 마련하는일 하고는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이다. 특히 불교역사의 전개과정에서 어렵고 중요한 고비마다 시대적 대안으로 등장하는 결사운동을 비추어 보는 거울로 삼으려고 할 경우 부처님 생애를 어떤 성격과 틀로 이해하느냐 하는 점은 대단히 중요하다고 본다. 관점 따라 다르겠지만 필자의 견해로는 부처님 생애도 하나의 결사로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다. 어차피 결사의 시조로 보고 있는 혜원의 백련결사도 후대에 와서 결사로 규정되었다고 본다면 좀더 포괄적 관점으로 볼 때 부처님이 깨달음 이후 승가를 구성한 것은 중생사적 문제의식에 의한 역사현장의 결사운동이라고 정의 해 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싶다. 덧붙여서 좀더 불교적 의미를 분명히 한다고 할 경우 연기법의 세계관과 철학 그리고 그 사상과 정신에 입각한 이상과 가치를 실현하고자 하는 결사운동 이라고 할 수 있을 것으로 사료된다. 이와 같은 문제의식으로 부처님생애의 기본틀을 간추려 볼까한다.
“天上天下 唯我獨尊. 三界皆苦 我當安之”
부처님의 탄생게이다. 대단히 간단해 보이지만 사실 부처님의 탄생이유, 一生 하실 일, 불교의 존재이유, 불교가 역사현장에서 해야할 일이 온전히 담겨있다. 달리 표현하면 연기무아의 철학과 同體大悲의 실천 또는 지혜와 자비의 실현인 것이다. 이 길을 제대로 가면 불교의 길을 제대로 가는 것이고 이 길에서 벗어나면 평생 법당에 있든, 선방에 있든 이미 부처님이 뜻한 불교의 길은 아닌 것이다.
“나는 반드시 출가한다. 나는 반드시 돌아온다.”
부처님 생애를 다루는 ‘불본행집경’ 에 나오는 구절이다. 주변에서 싯달타를 원망하며 출가를 비난하고 만류할 때 싯달타가 절규하듯이 외친 말이다. 앞뒤를 연결시켜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다. ‘내가 지극히 사랑하는 부모, 형제 등 온 세상이 고통받고 있다. 그들이 해탈 할수 있는 길을 찾기 위해 나는 반드시 출가한다. 나는 부모, 형제 등을 지극히 사랑한다. 그들에게 해탈의 길을 가르쳐 주어야 하기 때문에 나는 반드시 돌아온다.’ 한마디로 모든 살아있는 것에 대한 뜨거운 연민심으로 그들의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자신의 전존재를 바치는 同體大悲心인 것이다. 일반적으로 싯달타의 출가를 ‘위대한 포기, 떠남, 버림’ 으로 설명하는데 그 안에 본질적 핵심은 동체대비임을 놓쳐선 안될 것이다. 경전 어디에서도 싯달타가 자신의 고통 때문에 무엇을 한다는 식의 표현은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탄생․출가․전법․열반등 시종일관 오로지 중생을 위하는 大慈大悲心 때문이라는 입장이다. 이점을 직시하지 않고서는 부처님을 제대로 알고 믿고 따를 수 없다는 사실을 명심할 것을 강조하고 넘어가야 하겠다. 같은 선상에서 너무나 당연시 되어있는 부처님의 수행과 전법에 대한 인용과 설명은 생략하고 그 동안 간과해온 역사현장에서의 부처님 삶의 모습을 몇 가지 간추려 볼까한다. 잘 알고 있는 바와같이 부처님은 당시 인도 전체를 지배하고 있었던 梵我一如 사상과 62종의 주의주장 모두가 중생들의 미혹과 고통을 더욱 가중시킬 뿐이라며 그 전부를 근본적으로 비판 부정하고 당신이 터득한 연기무아의 길을 제시하였다. 연기무아의 길만이 참다운 진리이며 이 길만이 해탈의 길이요. 희망의 길이라고 천명한 것이다. 그릇된 세계관과 철학에 의해 형성된 제도와 관습인 남녀 불평등과 계급제도를 비판 부정했다. 강대국의 패권주의를 견제하고 공화제의 약소국들을 보호하고 돕는 입장을 취했다. 사람목숨을 위태롭게 하는 물싸움의 현장인 물 싸움판, 살인마와의 직접대면, 국가간의 전쟁터를 직접 찾아가 연기무아의 철학과 방법으로 현장의 문제를 다루었다. 80년이라는 한 생애를 늘 역사현장에서 현장의 문제와 마주했고 늘 고통받는 중생과 고락을 함께 했다. 부처님의 일생은 언제 어디에서나 수행과 전법과 참여를 통일적으로 자유자재하게 균형과 조화를 이루는 역동적 삶이었다. 세간과 출세간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삶, 세간과 출세간을 하나로 통일시켜 살아간 삶이 부처님의 일생이었다.
2) 부처님 생애에 비추어 본 정혜결사
앞에서 언급한 바 있듯이 한국불교에 있어서 정혜결사는 늘상 본받아야 할 위대한 전통으로 존중되어 왔다. 문제의 상황이 장기화 되려면 의례이 모범답안처럼 평가되고 있는 것이 바로 정혜결사이다. 대부분의 연구들도 거의 공통적으로 정혜결사의 긍정성과 위대함을 강조하는 경향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비판적 입장에서 정혜결사의 한계나 문제점을 짚어내려는 시도는 거의 없는 것처럼 보인다.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하지만 이 세상 어떤 일도 허점과 미비점이 없는 경우는 찾아보기 어렵다. 심지어는 교주이신 부처님에게도 비판되고 보완되고 넘어서야 할 아쉬운 문제들이 있을 수 있는 법이다. 사실이 이러함으로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은 문제점을 적당히 덮어버리고 긍정성만을 내세우려는 아전인수격의 사고와 태도를 극복하는 일이 아닌가 한다. 가능한 한 문제점을 다각적으로 짚어보면서 문제와 한계를 비판하고 보완하고 넘어서기 위한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올바르고 바람직하다고 사료된다. 같은 맥락에서 이번에는 영원한 수행자상인 부처님이라는 거울에 정혜결사를 비추어 보면서 어떤 아쉬운 점과 보완해야 할 점들이 있는지 들어냄으로써 정혜결사의 창조적 계승과 시대적 구현의 단초를 열어 갔으면 한다.
첫째, “삼계를 여의고자 하면서도 번뇌 끊는 수행을 하지 않으니 남자로 태어났지만 장부의 뜻이 없도다---선정을 익히고 지혜를 고르게 하며 예불에서 운력에 이르기까지 수행자의 일상을 성실하게 운영하면---” -정혜결사문 간추림-
정혜결사는 출가 수행과 운둔 수행자로서의 도리를 충실하게 다하면 된다는 입장으로 일관되고 있다. “삼계의 고통을 내가 반드시 편안케 하리라” 고 하신 부처님의 대비원력의 거울에 비추어 볼 때 뭔가 허전하고 외소함을 떨칠 수가 없다.
둘째, 사람들로 하여금 미혹과 탐욕의 늪으로 매몰되게 하는 인도사회를 지배했던 그릇된 세계관과 철학인 梵我一如 사상을 비롯한 당시 이교도의 주장들을 근본적으로 비판하고 부정함으로써 파사현정의 대비원력을 실천하고 있는 부처님 거울에 비추어 볼 때 정혜결사 어디에도 불교와 승단의 울타리를 넘어서서 역사와 시대를 짊어지고 가려는 대비원력의 의지가 미약하게 느껴진다.
셋째, 인간을 억압하고 불행하게 만드는 그릇된 세계관에 의해 형성된 비인간적인 제도와 관습인 사성계급제도 등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극복하려는 부처님 거울에 비추어 볼 때 당시에 비인간, 비불교, 비승가적인 사찰의 노비문제 등에 대하여 어떤 입장을 취했는지 알 수 없는 정혜결사는 지나치게 관념적이기도 하고 기성체제의 범주 안에 안주하는 소극적 태도에 머물러 있다는 아쉬움을 떨쳐 낼 수가 없다.
넷째, 무지와 탐욕과 분노로 인하여 생명이 위협받는 너무나 극한적인 역사현장 즉 물 싸움판이나 전쟁을 위한 작전 현장을 직접 찾아가 당신의 신념과 방법으로 당당하게 문제를 다루는 부처님 태도에 비해 사회현실의 문제에 눈감은 체 출세간의 울타리 안에만 운둔 하는 것은 불교 연기론의 세계관으로 볼 때 극복하고 넘어야 할 점이 아닌가 한다.
다섯째, 삿된 견해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는 삼가섭형제, 비극적 불행에 빠져있는 앙굴마라를 직접 찾아가 정법의 길로 돌아오게 하는 부처님의 깊고 깊은 인류애로 볼 때 승단안에만 시선이 집중되어있고 수행에만 강조점이 모아져 있는 정혜결사는 그 내용으로 볼 때 더욱 인간다워져야 하고 더욱 풍부해지지 않으면 안 되는 한계를 안고 있지 않는가 한다.
여섯째, 불멸의 법, 쇠퇴하지 않는 법을 설하신 경우에서 알 수 있듯이 패권주의에 빠져있는 강대국들을 깨우침으로써 강대국의 패권주의를 견제하고 공화제의 작은 나라들을 높이 평가하고 격려해주는 부처님의 당당한 태도에 비해 볼 때 국내외의 시대적 문제에 대해 관심을 끊고 운둔 수행만을 강조하는 정혜결사는 虎染常凈의 대승불교정신을 너무 축소시키고 나약하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된다. 전체적으로 정리해보면 정혜결사는 세간과 출세간을 구분하는 입장에서 승단의 울타리 안에만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삼계를 내 집으로 삼는 구세대비의 불교정신으로 인류사의 문제를 책임지려는 큰 가슴과 힘찬 몸짓이 보이지 않고 있어 많은 아쉬움을 느끼게 한다고 할 수 있겠다.
5. 정혜결사의 시대적 구현
21세기, 세계화, 정보화 등으로 표현되고 있는 현대사회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우리 모두가 가고 싶은 곳을 향하여 제대로 가고 있는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다. 복잡하게 이렇쿵 저렇쿵 따질 것 없이 흐름에 맡겨놓고 있어도 괜찮을 것인지 난감하기만 하다. 무엇인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지금 우리가 와 있는 곳이 가슴깊이 그리워하던 그곳이 아닌 것만큼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지금 우리에게 돌아온 현실이 간절히 얻고자 했던 결과가 아닌 것만큼은 틀림이 없는 듯 하다. 현실의 상황이 이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을 진지하게 진단하려고는 하지 않고 서둘러 남보다 먼저 앞으로 나아가려고만 야단들이다. 문제가 무엇인지 제대로 파악하려는 노력에는 관심이 없고 앞장서서 달려가려고만 든다. 마치 너도나도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보장이라도 받은 사람들처럼 의기양양하다. 이곳저곳 할 것 없이 경쟁에서 이기기만 하면 만사형통 이라고 하느님으로부터 약속이라도 받은 것처럼 주저함이 없다. 종잡을 수도 없고 걷잡을 수도 없는 거대하고도 급격한 흐름에 휩쓸려가고 있는 점은 불교계도 예외가 아니다. 어쩌면 오히려 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곳이 불교계라고 보는 것이 정확할듯하다. 사회의 변화 바람과 맞물려 돌아가는 불교계 내부의 사정은 정말로 복잡하고 어렵게 되어있다. 총체적이고도 광폭스럽게 휘몰아치는 변화의 바람 앞에 아무 대책없이 맨몸으로 서 있는 곳이 불교계의 현주소라고 봄이 타당하지 않을까 한다. 어디에서 어떻게 손을 써야 할지 가늠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여겨지고 있는 곳이 오늘의 불교계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듯하다.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오늘의 상황에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태도는 어떤 것일까? 혼돈과 혼란의 짙은 안개 속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손내밀어 도움을 청할 곳이 어디에 있을까? 무엇에 기대어 실마리를 풀어 가면 되는 것일까?
어찌해야 좋을지 모를 때 우리의 시선은 본능적으로 근본을 향하게 된다. 살아오면서 경험해온 역사를 향하여 ‘처음 또는 옛날엔 어떻게 했느냐’ 고 묻게 되는 것이 人之常情이다 오늘의 불교현실에서 역사적 경험에 의지하여 어떤 단초를 열어가려고 할 경우 제일 먼저 떠오르는 대상이 정혜결사이다. 한국불교 수 백년 역사에서 문제가 있을 때마다 어두움을 밝히는 등불처럼 여겨온 것이 정혜결사임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정혜결사 정신이야말로 절망의 늪에서 벗어나게 하는 희망의 나침반이라고 믿어 왔다. 기대하는 바와 같이 정혜결사 정신으로 현재 한국불교의 활로를 열어가려고 한다면 정혜결사가 갖는 현대적 의미를 잘 짚어보는 일이 우선되어야 마땅 할 것이다.
1) 정혜결사의 현대적 의미
“현자는 자신의 행동을 다스리고
현자는 자신의 언어를 다스리고
현자는 자신의 마음과 생각을 다스리나니
그는 완전하게 자신을 다스리는 사람이라네 -법구경-
일반적으로 역사는 발전과 변화를 거듭한다고 믿고 있다. 역사를 되짚어 보면 그 변화와 발전현상은 참으로 놀라웁다. 놀라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변화와 발전을 거듭해온 것이 사실이다. 결과가 분명함으로 너나없이 역사의 발전과 변화에 희망을 걸게 된다. 현실이 아무리 암울하더라도 발전과 변화에 대한 믿음이 있기 때문에 절망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견디어 온 것이 그간의 사정이었다. 역사가 변화와 발전을 거듭해온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그만큼 문제도 해결되었는지는 대단히 회의적이다. 나타나는 현상들을 보면 해결은커녕 오히려 모순과 혼란과 위험성이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 희망의 길이라고 믿어왔던 변화와 발전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재기하지 않을 수 없도록 되고 있는 것이 현재의 경향이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무엇이 문제인가.
온갖 진단과 대안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하지만 현대에도 예나 마찬가지로 삶의 주체인 인간자신의 문제는 여전히 간과되고 있다. 간혹 중요하다고 강조되기도 하지만 대부분 구색맞춤에 불과하다. 언제나 현실론에 밀려나거나 괜히 골치 아픈 물건 취급받는다. 역사현상으로 볼 때 외적 문제는 엄청나게 변화발전해 왔지만 그 주인인 인간 자신의 문제는 제자리이거나 오리무중이다. 문제가 반복 되풀이 되거나 더욱 왜곡 변질되고 있다. 맹목적 무지와 욕망의 존재인 인간(중생) 자신은 전혀 변화 발전 한바가 없다. 존재의 진실에 대한 인간의 무지와 이기적 욕망자체는 끝없이 극대화되어 왔을 따름이다. 역사의 주체인 인간 자신의 문제를 덮어놓고도 문제가 해결되길 기대하는 것은 나무에 올라 고기를 잡으려는 것과 다름이 없다. 변화와 발전의 원동력인 욕망의 문제를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놓아둔 채 역사가 희망적이길 바라는 것은 일층은 짓지 않고 삼층만 지으려는 어리석음이다. 논의해온 관점에서 살펴보면 천년전이나 지금이나 인간의 근원적 문제는 본질적으로 달라진 것이 없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자신 다스림을 중심가치로 삼고 있는 법구경의 가르침은 이천육백 년이 지난 오늘에도 옛날과 똑같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같은 논리의 연장선상에서 볼 때 천년 전의 정혜결사에도 현대적 의미를 갖고 있는 부분이 없지 않으리라고 본다. 이에 정혜결사의 어떤 내용들이 현대적 의미를 갖고 있는지 간추리고자 한다.
첫째, 정혜결사문을 위시로한 지눌의 자료 어디에도 당시 사회적 문제를 다루고 있지 않다. 오직 승단 내부 승려들의 무사 안일함과 세속화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 역사자료와 결사문에 나타난 문제재기등을 종합해 볼 때 지눌 자신이 두발을 딛고 서있는 직면한 역사현실을 냉철하게 직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직면한 현실과 정면으로 마주서서 문제를 다루려는 태도는 천년 전과 다름없이 오늘에도 여전히 적용되어야 할 중요한 일이다.
둘째, 자신이 몸담고 있는 집단에 대한 냉정한 진단을 통하여 확인되고 있는 여러 가지 폐단과 문제들을 겸허하게 인정하고 진솔하게 반성하며 정중하게 비판하고 진지하게 대안을 제시하는 태도는 현대에서도 절실히 요구되는 신념과 용기 있는 올바른 태도이다.
셋째, 종파적 갈등과 대립을 회통하고 선정과 지혜를 함께 수행해야 된다는 이론체계를 확립하고 실천하는 노력은 올바른 불교관과 수행전통을 잘 계승하고 발전시키는 일이다. 이론과 실천을 통일적으로 조화롭게 잘 가꾸어 가는 태도를 현대적으로 의미부여를 한다면 아마도 논리적이고도 과학적이라는 표현이 적절할 것으로 사료된다.
넷째, 절 집에 바보삼인이 모여 생각을 나누고 뜻을 모으면 문수지혜가 나온다는 말이 전해오고 있다. 정혜결사가 대중공의를 모으고 서로 탁마 하는 승가의 전통을 잘 살려내는 입장에서 뜻을 함께 할 사부대중들이 모여 추진된 점은 요새말로 개방적이고 대중적이며 과학적이고 민주적으로 운영되었다고 해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다섯째, 예불, 간경, 운력 등 승가의 일상적 생활전통을 기본으로 하고 그 토대위에 선정과 지혜를 함께 수행하는 정법불교, 수행불교를 확고히 하고 있다. 정법불교, 수행불교는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불교인이라면 반드시 붙잡고 가야 될 중심 가치임을 모르는 사람은 있지 않을 것이다.
여섯째, 가급적이면 외부의 힘에 의존하지 않고 자체적인 계획과 노력으로 흔연하게 자립적이고도 청빈한 삶을 살아가려고 하는 것은 본연의 승가다움을 회복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현대사회 승가가 꼭 실현해야 할 올바르고 바람직한 승가의 생활상이다.
일곱째, 패권주의와 물량적 가치가 지배하는 중앙을 버리고 지역에 자리 잡았으며, 정해진 기간만이 아니라 기한 없이 지속적으로 결사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현실적으로 서울 중심주의, 패권주의, 물량주의의 폐해와 즉흥적이고 졸속함이 야기하는 문제의 심각성으로 볼 때 지역을 근간으로 하는 지역화와 긴 호흡으로 준비하고 추진하는 태도는 오늘의 한국불교수행자들이 특별한 관심으로 주목해야 할 일이라 하겠다.
2) 정혜결사 정신으로 본 오늘의 사회와 승단의 현실
오늘의 사회와 승단의 현실을 비추어 볼 거울인 정혜결사의 모양이 어떻게 만들어져 있을까? 보조지눌을 연구해온 길희성 교수와 역사학자이신 이이화 선생께서 그려낸 정혜결사의 모양을 보는 것이 좋겠다.
“첫째는 보수적이고 소수 세력인 문벌귀족이 장악하여 모순이 심화된 불교계를 진보적인 지식인들과 지방토호세력이 자각 비판하여 개혁을 시도했다는 점이다.
둘째는 수행과 교화를 두수레바퀴로 삼아 조화와 균형을 찾았다는 점이다. 승려의 본분은 수행(?)이지만 교화를 소홀히 하면 실천적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셋째는 사상적 차원을 높였다는 점이다. 이들은 불교이론을 원효와 의상시대를 능가하는 수준으로 끌어올렸다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불교신문 (이이화)-
“지눌이 도반들에게 제시한 새로운 수행공동체의 이상을 명리추구로부터 정혜의 추구로, 도회지의(경쟁과 파괴의) 불교로부터 산림의 불교로, 세간적인 공덕불교로부터 출가지향적인 해탈지향의 불교로, 왕실국가의 평안을 비는 기복(예속)불교로부터 개인의 구원을 추구하는 수행불교(?)로, 귀족불교에서 서민불교로의 일대전환을 촉구하는 것이다.”
-지눌의 선사상(42쪽) (길희성)-
섬세하게 드러다보면 견해의 차이가 없지 않겠지만 정혜결사라는 거울의 문제의식과 성격과 모습은 인용한 두분의 글에 제시된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에 뜻한 바대로 올바른 불교관과 수행전통을 계승 발전하고자 했던 정혜결사라는 거울로 비추어본 오늘의 사회와 승단의 현실 문제들이 어떤 것인지 몇 가지로 추스려보고자 한다.
첫째, 자신들이 믿고 따라야 할 부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 부처님은 ‘이 세상 그 무엇도 진리보다 우선하는 가치는 존재하지 않는다. 국가, 민족, 교단, 문중보다 더 우선하는 가치가 진리이다. 진리밖의 그 어떤 길도 희망의 길이 되지 않는다’ 고 했다. 부처님은 진리의 길인 지혜와 자비를 전 재산으로 삼고 살아가셨는데 우리는 그 반대로 교단, 문중, 재산 따위를 더 중요하게 붙잡고 있다. 우리가 믿고 본받고 따라야 할 부처님이 인간적으로, 역사적으로, 종교적으로 어떤 분인지에 대하여 잘 모르거나 잘못 알고 있다.
둘째, 불교수행길의 안내도인 불교를 잘 모르고 있다. 나아가 스스로 잘못 또는 왜곡되게 알고 있고 오류에 빠져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다. 불교를 하는 사람들이 불교를 제대로 알지못하기 때문에 삶의 현실을 불교적으로 보지 못하고 문제를 불교적으로 다루지 않게된다. 무엇인가 열심히 하고 그만큼 이루어지긴 하지만 구체적으로 보면 불교적이지 않다.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한 만큼 분명 달라지긴 했는데 내용적으로는 또다른 문제가 되어있을뿐 해결은커녕 오히려 모순과 혼란만 깊어져 갈 따름이다.
셋째, 불교수행자로서의 진지한 자기성찰이 결여되어 있으므로 자신들이 얼마나 비불교, 비수행자적인지에 대하여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다. 지금 불교 수행자로서의 자신의 무엇이 잘못되었고 어떤 것이 부끄러운 것인지에 대하여 양심적으로 정직하게 돌아보지 않고 있다. 비록 선실에 앉아있고 법당에 기도하고 경전을 연구하고 있다손 치더라도 우리가 갖고 있는 사고와 삶의 태도가 불교의 기본사상과 정신에 어긋나 있다면 무슨 소용인가? 일반 대중들로부터 불신과 비난을 받을 만큼 세속화 되어있음에 대하여 부끄러워 할 줄 모르는 것은 수행자로서의 양심과 도덕성이 무너져 있음을 드러냄일 뿐인 것이다. 자신의 과오와 문제에 대하여 반성하거나 자기비판을 하지 않고 더하여 진지한 비판에 겸허하지 못하는 것은 수행자로서의 양심과 윤리의식이 마비되었거나 깊은 잠에 빠져있음을 잘 보여주는 현상인 것이다.
넷째, 답답하고 안타깝게도 역사에 대해 무관심을 넘어 무지하기까지 하다. 자신들의 삶과 수행이 사회역사 또는 불교역사와는 무관하게 따로 있거나 가능한 것으로 믿고 있다. 역사를 떠난 현실, 역사밖에 불교가 존재할 수 없음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불교수행의 방향과 내용이 엉뚱하게 빗나가게 되는 것을 피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불교 따로 삶따로의 불교, 수행따로 역사따로의 불교가 되고 나아가 무기력과 혼란과 부패의 늪속에서 허우적거리게 되는 것은 필연적 귀결이다.
다섯째, 자신이 두발을 딛고 서있는 현실을 직시하고 정확하게 알려고 하지 않는다. 현실을 올바르게 모르는데 어떻게 현실문제를 올바르게 다루어 갈 수 있겠는가?
삶이란 지금 여기 현실을 떠나서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은 불교의 기본이다. 문제는 여기에 직면해 있는 현실이지 다른 무엇이 아니다.
문제가 무엇인지 문제가 어디에 있는지를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 해답이 엉뚱할 수 밖에 없고 해답이라고 내놓더라도 그것은 또 다른 문제로 나타나게 마련이므로 악순환만 거듭될 뿐이다. 한국불교수행자들 대다수가 직면한 현실의 일상밖에 수행이 따로 있어야 되는 것처럼 여기고 있다. 수행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갖고 있으므로 현실을 외면, 도피 또는 두려움 나약함 비굴함 무력함을 보이게 되는 것이다.
여섯째, 거의 대부분 불조께서 비불교, 비수행자의 태도라고 비판하고 부정한 집단이기에 사로잡혀 있다. 불교적으로 옳은지 수행자의 입장에서 타당한지 불자를 비롯한 전체대중들에게 유익한지는 중요하지 않다. 불교라는 집단이기, 승려라는 집단이기, 비구라는 집단이기, 비구니라는 집단이기, 선방이라는 집단이기, 승가대학(강원) 이라는 집단이기, 본사라는 집단이기에 맞고 맞지 않고가 가치판단의 기준이 되고 있다. 집단이기란 것이 무엇인가? 바로 문중이기이다. 문중이라는 집단이기가 무엇인가? 바로 세속화의 다른 이름이다. 오직 조직논리와 집단이기에 빠져 남루해지고 있는 것이 불교계의 오늘 모습이다.
일곱째, 물량의 규모와 숫자를 중요하게 여기는 물량적인 가치의식에 매몰되어 있다. 최대의 법당, 불상, 탑 등 큰 규모와 최대의 인파, 최대의 모금등 많은 숫자에 의해 가치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불공, 제사, 기도, 방생, 등불사도 온통 경제논리에 의해 좌우되고 있다. 큰스님, 강사, 수좌, 학인에 이르기까지 대접 잘하고 잘 모시는지의 여부를 결정하는 기준도 돈에 의하여 규정되고 있다. 선방, 강원, 절이 좋은가의 여부도 시설이 좋고 잘먹고 풍족하고, 보시많이 주는 등에 의하여 정의되고 있다. 정법이 살아 있는지, 좋은 스승과 도반이있는지, 청빈한 삶을 사는지, 성실하고 정직하게 사는지 불교수행의 내용 또는 세상에 유익한 내용이 어느 정도인지는 별관심이 없다. 대부분의 우리들은 물량적 가치 앞에 비굴하게 무릎꿇고 살아가고 있다.
여덟째, 그 까닭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는 확연하지 않은데 여하튼 불신과, 패배주의에 빠져 있는 게 불교승단의 현실이다. 불교를 제대로 알면 불신과 패배주의에 빠질리가 없는 법인데 불교수행자들이 불신과 패배주의에 빠져 한탄이나 하고 총무원, 큰스님, 본사주지들을 원망하고 비난이나 하는 나약하고 무력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아홉째, 대책 없는 개인주의, 무사안일주의가 판치고 있다. 혼자 조용히 잘하면 되지 뭐, 적당히 넘어가는 게 좋아, 중은 일이 없어야해, 집착 (끝까지 책임지면) 하면 중이 아니여. 중은 사람 노릇하면 안돼 등 불교사상과 정신으로 자신을 바쳐 책임지고 문제를 해결 하려는 경우가 드물다. 좋은 것이 좋지, 골치 아프게 그럴 것 없어, 하며 어려운 일이있어도 책임지고 나서서 처리하기보다는 적당히 피하려고만 한다. 개인의 편리함, 책임지지 않음, 무사 안일함이 만연되어가고 있다.
열째, 언제부터인지 우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중노릇이 직업화 상업화되어 버렸다. 출가수행자는 승단과 절이 내집이고 구성원 모두가 한식구이다. 생활이 한집안 한 식구로 이루어지고 있는 곳이 절 집인데 현실적으로는 직장논리로 문제를 다루려고 하고 있다. 절에 들어온 행자의 교육을 책임질 경우에도 학교에서 선생에게 월급 주듯이 돈을 주고받아야 된다고 한다. 불공, 재사를 지내도 당연히 돈을 주어야 된다고 한다. 마치 아버지가 아들을 교육시키면서 돈을 주어야 된다는 격이다. 집안에 제사가 있는데 돈을 주어야 참석하겠다는 식이다. 직업화, 상업화 현상은 우려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절 집을 병들게 하고 있다.
3) 한국불교 출가수행자의 바람직한 문제의식과 나아갈 방향
지금 여기에 싱그럽고 아름다운 꽃이 피어 나는 것은 꽃이 싱그럽고 아름답게 피어날 만한 인연의 과정이 잘 이루어진 결과이다. 지금 여기에 꽃이 피기는 했는데 병들고 볼품없다면 그것은 우연의 결과가 아니고 그 동안 진행 되어온 인연의 과정에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인 것이다. 지금 여기에 불교와 수행자들의 내용과 모습에 있어서 불교와 수행자답다고 한다면 그간의 불교와 수행자들이 만들어낸 인연의 과정이 올바르게 잘 가꾸어 진 결과인 것이다. 현재의 불교와 수행자들의 내용과 모습이 불교와 수행자답지 못하다고 한다면 그간의 불교와 수행자들이 가꾸어온 인연의 과정들이 비불교, 비수행자적 이었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인 것이다. 불교는 언제나 나타난 현재의 결과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 지금 나타난 오늘의 현실은 어제를 인연하에 나타난 오늘의 결과이고 오늘의 결과가 바로 내일을 낳게 하는 인연이기도 하다. 우리가 찾아야 할 진실은 바로 지금 여기 현실에 있다. 현실을 떠난 그 어디에도 진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진실을 찾아낼 곳은 구체적이고 직접적이고 가장 가까운 지금 여기 현실뿐이다. 일반적으로 현재의 진실을 존재의 실상이라고 표현하고 존재의 실상을 부처님은 연기무아 라고 했다. 불교의 기본입장은 緣起無我의 논리로 현실을 보고 현실에서 연기무아를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실을 떠나서 문제의 해답을 찾으려고 하는 것은 이미 불교의 태도가 아니다. 현실을 제대로 보려고 하지 않거나 현실을 떠난 별다른 곳에서 진리 또는 해결점을 찾으려는 것은 불교를 잘못 알고 잘못 실천하는 것이다. 철두철미하게 현실에 직면하여 현실을 정확하게 꿰뚫어 보고 문제를 다루는 것이 불교적으로 올바르고 바람직한 태도이다. 부처님은 길을 잘 닦아 놓으셨다. 당신이 하실 일을 제대로 다 하신 샘이다. 그분을 따르고자 하는 후학들이 할 일은 그분이 닦아놓은 길을 잘 가는 일이다. 그 길에서 이탈하지 않고 길을 제대로 가고자하는 몸짓이 불교역사이다. 늘 보아 왔듯이 불교 역사의 고비고비마다 정상궤도를 벗어나는 경우들이 생겼고 그때마다 부처님이 닦아놓은 길을 제대로 가도록 하려는 치열한 애씀이 있었으니 바로 대승불교, 선불교, 결사운동인 것이다.
오늘 이 시점에서 수행자의 바람직한 문제의식과 나아갈 방향을 논하는 이유는 따지고 보면 오늘의 한국불교와 수행자들이 부처님께서 닦아놓은 길에서 너무 많이 이탈했다고 보기 때문인 것이다. 정상궤도에서 더 멀리 벗어나도록 내버려 둘 경우 불교의 종자 자체가 멸종되지 않을까 하는 위기의식이 이런 논의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사실 제정신으로 보면 현재의 사정이 참으로 다급하고 절실하다. 이유인즉 정상궤도가 어디에 어떤 형태로 존재해 있는지 가물가물 할 정도로 너무 멀리 이탈해 버렸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더늦기전에 서둘러야 할 일은 아득히 잘 보이지 않는 부처님께서 닦아놓은 그 길을 분명하게 찾아내는 작업이다. 본래의길, 정상적인 길을 찾아내어 그 길을 활발하게 걸어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좋은 뜻으로 고민하는 사람들이 뜻과 힘을 모으는 일이 요구된다. 현대에서 이 문제를 다루어 가려고 할 때 기본적으로 반드시 전제되어야 할 것이 있다. 무엇보다도 명심하고 챙겨야 할 것은 불교전통의 근본 뿌리인 부처님의 사상과 삶을 본받는 수준을 넘어 그 내용이 현실에 살아 숨쉴 수 있도록 더욱 다양하고 풍부하게 하려는 열린 관점과 유연한 태도를 갖는 일이다. 그리하여 불교 사상과 정신으로 오늘의 현실문제를 적절하게 다루어 갈 수 있는 현실성과 힘차게 나아갈 수 있는 탄력성을 갖도록 하는 애씀이다. 이에 현대 한국불교 출가수행자의 나아갈 바람직한 방향모색 차원에서 몇 가지 안을 내놓을까 한다.
첫째, 역사에 대한 냉철하고도 겸허한 반성적 성찰에서 출발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몸담고 있는 21세기 현대사회를 불신과 비인간화와 생명위기의 사회라고 말하고 있다. 오늘의 결과를 낳게 한 20세기 인류역사를 “죽음으로 남긴 20세기의 증언” 이라고 표현한 퓰리쳐상 사진전도 있었다. 설명을 보태면 20세기라는 백년간의 인류역사의 성격을 잘 표현 했다고 풀리쳐상을 받은 사진전을 하면서 붙인 주제가 “죽음으로 남긴 20세기 증언” 이었다는 이야기이다. 기적이라고 표현할 만큼 눈부신 변화와 발전을 이룩해낸 20세기를 살상과 파괴의 역사로 정의한 것은 한마디로 실패의 역사이었음을 뜻한다. 원인과 책임이 어디에 있는지의 여부에 앞서 종교적 양심으로 생각하면 생명을 살상과 파괴의 수렁으로 끌어간 역사의 조류를 바로잡지 못한 것은 求世大悲의 불교가 책임을 통감해야 마땅할 일인 것이다. 그렇게 볼 때 자기구실을 제대로 하지 못한 불교역사에 대한 반성적 성찰과 냉철하게 자기비판을 하는 정직함과 성실함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자신들의 과오와 오류에 대한 솔직겸허한 인정과 반성에 입각할 때 비로소 바람직한 길을 열어갈수 있다는 역사의 진리를 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
둘째, 사회와 교단과 자신의 현실을 불교의 눈으로 똑바로 보고 적극적으로 응답하려는 투철한 사회 역사의식을 가져야 한다. 모든 생명을 향한 깊고 넓고 뜨거운 자비심으로 세상을 구제하려는 확고한 입장을 견지해야 한다. 비불교적 사상과 정신이 역사현실을 휩쓸고 있다. 승단현실도 비승가적 사고와 삶의 방식이 지배하고 있다. 출가 수행자와 일반대중을 더욱 미혹하게 하고 맹목적인 욕망의 논리에 빠지도록 하는 흐름이 도도하다. 출가와 재가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전도몽상의 의식에 매몰될 수밖에 없도록 하는 경향이 지배하고 있다. 중중무진 연기의 세계관을 갖고 살아가는 불교인 특히 수행자라면 사회와 교단의 현실을 자신의 문제로 짊어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무진연기의 세계관과 그 사상의 정신으로 볼 때 세상을 가꾸고 교단을 가꾸는 등의 일들이 어찌 자신을 가꾸는 일과 분리 될 수있는 일이겠는가. 삼계의 불길을 잡는 일을 자신의 일로 삼지 않는다면 올바른 불교인 또는 올바른 수행자라고 할 수 없다는 점을 깊이 인식하고 깨달아야 할 것이다.
셋째, 부처님을 온전히 알고 본받으려는 기본입장을 확고히 해야 한다. 부처님은 연기법의 세계관과 사상의 소유자이셨다. 연기법의 정신인 同體大悲를 당신의 목숨으로 삼고 살아가셨다. 중중무진한 연기법의 세계관으로 보면 세간과 출세간, 역사와 승단, 출가와 재가, 개인과 사회, 너와 나가 不一不二의 관계이다. 세상에 분리된 것은 어디에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음을 뜻하는 것이 無我의 가르침이다. 온 우주의 그 무엇도 나아님이 없음을 뜻하는 표현이 ‘天上天下 唯我獨尊’ 이다. 보살도의 실천 철학으로 자리잡고 있는 화엄사상과 정신인 무진 연기의 무애자재한 삶을 살아간 대표적인 인물을 역사 위에서 찾는다면 물어 볼 것도 없이 부처님 일 것이다. 불교의 정수라고 강조되는 선정신인 확철대오와 대기대용의 쾌활자재한 삶을 실현한 대표적 인물을 내세우려고 한다면 당연히 부처님일 것이다. 최고의 선사요. 최고의 강사요. 최고의 율사요. 최고의 보살행자인 부처님은 전도몽상의 원인이 되고 있는 그릇된 세계관과 철학을 비판했고 인간을 미혹과 고통으로 몰고 가는 나쁜 제도와 관습을 타파했으며, 생명을 위협하는 싸움과 전쟁터를 직접 찾아가 문제를 다루었고, 외롭고 나약한자를 감싸안는 등 언제나 역사현장에 두발을 딛고 살아가셨다. 정말 불교를 올바르게 하고 바람직한 수행자가 되려면 믿고 본받고 따라야 할 부처님을 인간적 측면과 역사적 측면과 종교적 측면을 종합하여 온전하게 파악하고 이해하는 일이 천리길의 첫걸음처럼 중요한 일 임을 깊이 새겨야한다.
넷째, 불교를 올바르고 제대로 알도록 해야 한다. 삶의 구체적 현실인 자신과 사회와 역사를 올바르게 보고 잘 가꿀 수 있도록 하는 안내도가 바로 부처님 가르침이다. 불교란 삶의 문제를 근원적으로 바람직하게 해결해 갈 수행길을 제시하는 길 안내의 지도인 것이다. 지금 직면한 현재의 진실(존재의 실상)을 꿰뚫어보고 그 진실에 근거하여 삶의 문제를 다루어 가도록 하는 것이 불교인 샘이다.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바와 같이 불교의 기본내용은 緣起法이다. 연기법의 사고로 현실존재를 보면 현실존재가 연기무아의 존재임을 알 수 있다. 연기무아의 존재이므로 연기무아적으로 살아야 하고 연기무아적으로 살아가면 연기무아의 삶이 실현된다는 의미이다. 설명한 바대로 불교의 기본 사상은 연기무아 사상이다. 연기무아사상에는 세간과 출세간, 불교와 사회, 국가와 민족, 출가와 재가, 개인과 집단등 이분법적이고도 대립적 사고가 발붙일 곳이 없다. 연기무아의 진리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실천해 가면 어떤 상황에서도 절망에 빠지지 않는다. 연기무아의 진리 정신에 일치하도록 실천해간다면 노력한 만큼 즉시 현전에서 이루어지므로 실망이나 절망할 일이 있을 수 없다. 현실적으로 불교집안 또는 수행자들에게서 이기적 행위와 무사안일주의적 생활 태도가 나타나고 일이 잘되고 안 됨에 따라 실망과 절망에 빠지는 것은 불교를 잘 모르고 수행을 잘못한 결과일 뿐이다. 실재 불교를 잘 모르니 올바른 불교사상과 정신이 확립될 수 없고 불교사상 확립이 안 되어 있으니 불교의 안목으로 현실을 보지 못하고 불교의 눈으로 현실을 보지 못하니 문제를 불교적으로 다루지 못 하게 되는 것은 필연적인 귀결일터이다. 그러므로 진정 솔직 겸허한 자세로 인생의길, 수행의길, 역사의길 안내도인 불교를 올바르게 알려고 하는 초발심의 자세가 절실하게 요구된다.
다섯째, 연기무아의 윤리의식과 연기무아의 삶인 청빈한 삶을 생활화 하는 것만이 세상을 위하는 길이며 승단과 사찰과 수행자가 사는 길이요. 自他가 함께 성불하는 길임을 확신하게 하는 작업을 해야 한다. 연기무아의 윤리의식이란 달리 표현하면 동체대비의 문제의식과 태도이다. 동체대비의 문제의식이란 바로 그 시대 역사현장의 대중과 고락을 함께 하는 삶이다. 대중과 고락을 함께 하는 최소한의 기본태도가 청빈의 삶이요. 적극적 태도가 일체중생의 고통을 대신 짊어지고 대신 받는 삶인 것이다. 화엄경에선 중중무진 연기의 사상과 정신으로 십선행을 생활화하면 自他가 일시에 성불한다고 설파하고 있다. 연기무아의 논리로 보면 내 것이 본래 없다. 내 것이 본래 없으므로 갖고 있는 것도 최소한의 것을 제외하고는 가급적이면 덜어내어야 할 터인데 조직, 권위, 세력, 재산, 명예 따위를 자꾸만 쌓아 모으는 것은 부처님 가르침에 어긋나는 일이다. 연기무아의 관점에서 보면 온 우주 그 무엇도 내 것 아님이 없다. 온 우주가 내 것이므로 부족할 것이 본래 없는 것인데도 자꾸 무엇인가를 구하고 쌓아올리려고 하는 것은 불교에 대한 무지와 부처님과 수행자에 대한 모독이다. 현실의 절 집은 너무 권위적이며 너무 부자이다. 오늘의 수행자들은 너무 귀족적이며 누리는 것이 너무 많다. 절 집 어디에도 시대 대중들의 아픔과 슬픔을 끌어안고 가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청빈의 모습으로 와 닿는 수행자들을 만나기가 어렵다. 최첨단을 달리고 최고급을 쓰는 것이 마치 고상한 수행자의 품격을 유지하는 일인 것처럼 여기는 안타까운 분위기가 만연해가고 있다. 이일은 단언해도 좋다고 본다. 역사대중의 고통과 문제를 자신의 것으로 짊어지려는 연기무아의 윤리의식인 동체대비의 문제의식으로 살아가지 않는 한 불교의 희망은 없다. 동체대비의 소극적 실천 형태인 청빈의 삶을 실천해가지 않는 한 종단과 절 집과 수행자가 우리 사회에 있어야 할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연기무아의 윤리의식인 동체대비의 정신과 그 구체적 실천인 청빈한 삶을 수행의 최고덕목으로 생활화 해가지 않는 한 깨달음과 정토실현은 공염불에 불과함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여섯째, 연기무아의 세계관과 연기무아의 윤리의식에 입각한 수행관을 확립 제시해야한다. 연기무아의 지혜와 연기무아의 자비를 기본으로 하는 수행관이 마련되지 않는 한 올바른 수행을 기대할 수 없다. 불교관계 책을 펼쳐보면 어디에서도 만나게 되는 것이 연기무아요. 중도실천이요. 지혜요. 자비이다. 이길 만이 깨달음의 길이요. 정토실현의 길이라고 되어있다. 스님 또는 불교인들도 입만 열면 연기무아, 중도실천, 지혜자비를 강조한다. 깨달음도 정토실현도 이 길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열변을 토한다. 과연 그렇겠구나 하는 마음으로 35년동안 지켜보았지만 연기무아의 지혜와 연기무아의 동체적 삶의 모습은 너무나 드물게만 볼 수 있었다. 종단운영, 사찰살림, 선방과 강원생활, 선사와 강사, 수좌와 학인, 이판과 사판들의 사상과 정신과 삶의 내용들이 대부분 연기무아의 정신과 대비의 윤리의식하고는 아득히 거리가 멀다. 대중으로부터 승단과 수행자들이 불신과 비난과 조소를 받게 되는 이유는 대비심의 윤리도덕성의 부재 때문이다. 승단과 수행자들이 대중으로부터 신뢰와 존경을 받지 못하는 까닭은 연기무아의 사상과 정신에 입각한 안목과 건강한 실천이 없기 때문이다. 승단이 혼란을 거듭하고 수행자와 불자들이 절망에 빠져 방황하는 원인도 찾아보면 올바른 수행관과 신앙관을 심어주지 못한데 있는 것이다. 어떤 명분과 논리로도 분별심 타파를 과제로 삼고 있는 불교 수행자들이 분별심의 덩어리인 권위의식, 자기중심의 이기성, 배타성, 자기도취, 독선적임이 더욱 굳어지고 일상생활에 표출되는 것은 잘못된 수행관으로 인해 수행을 잘못한 결과일 뿐 다른 이유나 변명이 있을 수 없다. 부처님 가르침의 본뜻인 연기무아의 지혜와 연기무아의 자비를 근본으로 하는 올바른 수행관을 확립할 때에만 세상 사람들이 존경하고 고맙게 여기는 불교, 승단, 사찰, 수행승이 될 수 있음을 깊이 헤아려야 할 것이다.
일곱째, 구세의 종교, 대비의 종교로서의 본래모습을 잘 살려 가려면 연기법의 세계관과 철학을 현대 한국사회와 인류사회가 지녀야 될 세계관과 철학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불교와 승단과 절과 수행자들은 무엇을 위해서 있는 것인가. 본래 고통 받는 중생의 이익과 안락을 위해 불교와 승단과 절과 스님들이 있게 되었다. 부처님이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깨달음의 법을 찾아낸 것은 고통속의 중생들에게 이익과 안락의 길인 깨달음의 진리를 가르침으로써 세상을 구제하고자 함이었고 그 일을 위해 승단과 절과 스님들이 있게 되었다는 말이다. 그러기 때문에 불교를 구세대비의 종교라고 불리어 왔던 것이다.
지금 주위를 둘러보면 온 세상이 불안해하고 있다. 갈 길을 못 찾아 방황하고 있다. 발전과 변화에 희망을 걸었는데 발전과 변화를 거듭해온 현대인류사회가 어찌 할 바를 몰라 초조해 하고 있다. 원인은 간단하다. 잘못된 세계관과 철학으로 발전과 변화를 추구해 왔으므로 그 결과가 모순과 위기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우왕좌왕하고 있을 일이 아니다. 무작정 달려가서 될 일이 아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한국사회와 인류사회가 나아가야 할 올바른 방향과 길을 찾아내는 일이다. 인류의 원초적 염원, 민족의 절실한 바램이 실현될 수 있는 올바른 세계관과 철학을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다. 불교는 이천 육백년 전 중생들이 믿고 추구해가야 할 구원의 세계관과 철학으로 역사에 등장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불교의 세계관과 철학은 현대에도 구원의 세계관과 철학으로 설득력을 갖고 있고 그 어느 때 보다도 절실하게 요구되고 있다. 구세의 종교, 대비의 종교인 불교를 책임지고 있는 불교수행자들이라면 인류구원의 세계관과 철학인 연기무아의 세계관과 철학을 현대인류사회의 세계관과 철학으로 설득력있게 제시할 수 있도록 해야 마땅할 것이다.
여덟째, 연기무아의 세계관과 철학에 근거한 사부대중 사찰 공동체, 또는 사찰과 지역이 함께하는 지역공동체운동이 펼쳐져야 한다. 부처님은 연기무아의 이상과 가치를 역사현장에 실현하고자 하는 뜻에서 승가공동체 운동을 전개하셨다. 보편적 이상과 가치를 공유한다는 사방승가의 틀을, 몸담고 있는 자기 현장에 실현한다는 차원에서 현전승가의 틀을 제시하셨다. 사실 불교에서 사용하고 있는 승가라는 말이 공동체라는 말임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실은 연기무아의 세계관으로 볼 때 부처님의 본뜻은 온 우주생명들이 하나의 공동체 식구이므로 너나없이 함께 성불하는 길을 열고자 했고, 그 길을 중심에 서서 실현해 가는 중요책임을 맡기고자 만들어진 것이 승가라고 보는 것이 옳지 않을까 한다. 많은 사람들이 현대사회를 생명위기의 사회라고 한다. 공동체가 붕괴되어 가는 현상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계속 높아가고 있다. 고향을 잃어버리고, 농촌이 무너지고, 생태계 질서가 깨지고 자연이 병들어 가는 것에 대하여 너나없이 불안해하고 있다. 생명살림과 공동체 회복을 위한 모색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시대적 요구가 되고 있다. 고향과 농촌을 가꾸는 것이 인간의 공동체 회복이라면 생태계와 자연을 가꾸는 것은 생명공동체 회복이라고 할 것이다. 물론 인간과 자연을 분리시킬 수는 없다. 오히려 인간과 자연을 한몸․한생명으로 인식하는 연기적 세계관과 철학에 의한 생명살림의 공동체 운동이 옳다고 할 것이다. 중중무진 연기법을 근본으로 하는 집안에서 공동체 회복과 생명살림의 일을 하지 않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보편적으로는 연기무아의 사상과 정신을 공유하면서 현장에서는 그 사상과 정신으로 사부대중 사찰공동체 또는 사찰과 지역이 함께 하는 생명살림의 지역공동체 운동을 펼치는 일이야말로 불교와 승단과 사찰과 수행자와 대중이 함께 사는 길임을 확연하게 깨달아야 할 것이다.
아홉째, 승단과 사찰의 제도와 운영에 시방승가와 현전승가의 전통과 정신이 반영되어야 한다. 수행자들의 생활이 시방승가와 현전승가의 전통과 정신에 따라 이루어 져야한다. 시방승가가 만인의 수행자들에게 열려있는 보편성의 승가라면 현전승가는 현장의 대중이 주인으로 책임지고 역할하는 자립성을 갖는 승가이다. 시방승가는 현전승가에 토대하여 성립되고 현전승가는 시방승가의 정신에 기반할 때 승가의 의미를 갖는다. 현전승가에 토대하지 않는 시방승가가 성립될 수 없듯이 시방승가의 정신에 기반하지 않는 현전승가는 이미 승가가 아니다. 승가란 대중의 공의에 의해 투명하게 운영되고 대중이 함께 공평하게 수행하고 생활하는 곳이다. 솔직히 종단과 무수한 사찰이 있지만 승가라는 말에 깃든 본래의미의 승가가 지금 어디에 어떤 형태로 존재하고 있는지 의심스럽다. 승가의 본래 정신으로 보면 내절, 주지전횡, 독살이절, 문중절 따위가 성립될 수 없고 이판과 사판, 수행과 생활, 공부와 활동이 분리 대립될 수가 없다. 시방승가와 현전승가의 정신이 무너져 버린 결과가 내절, 독살이절, 문중절이며 이판따로 사판따로 수행따로 생활따로 공부따로 활동따로가 된다. 독살이절, 내절, 문중절이란 이미 승가의 도량인 절이 아니다. 이판과 사판, 수행과 생활, 공부와 활동이 분리 대립되고 있다면 이미 수행자라고 하기엔 문제가 심각하다. 출가승려에겐 본래부터 독살이절, 내절, 문중절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현재 몸담고 지내는 곳이 자신의 절이다.
살고 있는 현장이 자신의 절이므로 주인으로서의 권리와 의무가 주어진다. 주어진 권리와 의무를 다하는데 이판과 사판, 수행과 생활 공부와 활동이 분리 대립할수 있겠는가. 절은 본인, 소임자, 문중 등의 소유가 아니고 대중공유의 것이다. 대중공유의 것이므로 그 주인인 대중의 의견을 모아 운영하고 생활해야 한다. 대중공의를 존중하는데 어떻게 내절, 독살이절, 문중절이 성립될수 있겠는가? 시방승가의 정신이 없으니 내절, 주지전횡, 독살이, 문중절이 나타난다. 현전승가의 정신이 없으니 승여의 일상이 이판과 사판, 수행과 생활, 공부와 활동이 분리 대립되는 불성실과 무책임, 독선과 이기로 흐르게 된다. 종단과 사찰이 모순과 혼란과 세속화 경향의 물결을 타고 승여들의 회의와 방황, 권위와 이기, 독선과 배타, 불성실과 무책임의 심화를 피할수 없게 된다. 종단이 종단 다워지고, 절이 절 다워지며, 소임자가 소임자 다워지고, 승려가 승려다워지려면 시방승가와 현전승가의 전통과 정신을 현대에 맞게 살려내는 일이 절실하다.
열째, 화엄경 입법계품의 사상과 정신과 태도를 오늘의 현실에 실현하기 위한 고민과 모색이 있어야 한다.
사람이 사는 곳엔 시대와 지역에 따라 크고 작은 차이는 있겠지만 다양한 사상과 정신과 문화의 갈등과 대립의 문제가 늘상 있어왔다.
현대사회에선 그 문제가 거대하고 급격하게 총체적으로 전개되고 있다. 역사현실이 안고 있는 문제가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불교계는 아예 무지하거나 무관심하다. 뭔가 어떤 모색을 한다고 하더라도 불교계 내의 종파적 갈등과 대립에 대해서만 관심을 갖고 고민을 해 왔을 뿐이다. 불교의 기본인 연기법의 논리로 볼 때 이 세상 모두가 서로 영항을 주고 받는 관계속에 존재하는 만큼 불교와 사회, 세간과 출세간이 분리된 남남일수 없음은 너무나 자명한 일이다. 부처님 가르침의 참뜻을 존중하고 따른다는 차원에서라도 삼계를 자신의 집으로 삼고 삼계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삼는 救世宗敎의 큰 가슴을 가져야 옳다. 불교의 대표적 경전인 화엄경에는 그야말로 역사현장의 구체적인 내용과 현상인 비구, 비구니 , 장사꾼, 보살, 귀신, 기생, 폭군, 동자, 여자, 귀족, 외도 등이 온전히 담겨있다. 사고와 성격과 입장과 상황이 각각 임에도 불구하고 중중무진연기의 사상대로 통합과 통일의 삶이 펼쳐지고 있다. 법계연기의 무애자재한 정신대로 공존과 융화의 삶이 잘 어우러지고 있다. 불교가 진정 救世宗敎로서의 본령을 제대로 하려고 한다면 현대사회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려는 진지하고도 대범한 노력이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이다.
6. 맺는글
글이라고 하기엔 너무 제멋대로이다. 문헌에 근거하여 충실하게 쓰여 진 글이 아니다.
물론 경전, 어록, 연구논문 들을 참고 하기는 했지만 자료를 활용하는 것 자체도 자의적인 부분이 적지않다. 굳이 입장을 밝힌다면 문헌자료, 절집에 전해오는 옛말, 현실에 나타나는 현상, 새롭게 회자되는 이야기들을 자의적으로 종합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동시에 원론적 입장과 본인의 상상력을 갖고 문제를 자유롭게 생각해 보고 열린자세로 방향을 잡아보려고 한 것이 이글이다. 글을 쓰기전과 쓰기 시작과 끝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자신을 비아냥거리는 또 다른 나의 존재가 따라 다니고 있었다. ‘또 헛고생 하는구나! 한두번 해본것도 아닌데, 결론이 너무나 뻔한데 부질없는 짓 그만두지 못하겠나! 원론적이고도 희망적인 이야기 해봐야 누구 한사람 힘 모아 주기는커녕 되지도 않는 욕이나 얻어먹을 것이고 결국 한탄이나 하게 될 것이 뻔하다. 뭣 하러 그 바보 같은 짓을 하고 있느냐 말이다. 좋다. 혹시나 하는 기대대로 박수갈채가 나오고 칭찬이 자자하다고 치자 그래 과연 고양이 목에 방울 달 사람, 또는 대중의 힘을 모아서라도 그 일을 하기위해 나서는 사람들이 있어야 할 터인데 그게 과연 가능하기나 하겠느냐 말이다. ’
결론은 괴로움이다. 안타까움이다. 빈 메아리로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되지만 또다시 정직하게 물어보고 싶다. 정말 불교, 종단, 절, 중노릇을 올바르게 제대로 잘하고 싶은 뚯이 있긴 있는것인가. 어느 하루 그 누구도 불교 종단, 선방, 강원, 수행, 전법등을 걱정하지 않는 경우가 없는데 그것이 말뿐이 아닌 진실이라면 왜 고양이 목에 방울다는 일은 서로 내몰라라 하는 것인가. 끝으로 주최의 도량에 묻고자 한다. 정혜결사의 도량인 송광사의 오늘은 정혜결사의 정신에 부끄러움이 없도록 하고자 얼마나 애쓰고 있는가. 정혜결사를 논의하는 행사수준을 넘어 정혜결사를 오늘의 현장에 구체화할 의양은 없는가?
여전히 결론은 ‘고양이 목에 누가 방울을 달 것인가’ 로 내릴 수밖에 없을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