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위일체(Trinitas)
이해에서 고백으로(Trinity에서 Homousion으로)
1. 들어가는 말
최근 삼위일체에 대한 연구 저서가 출판되면서, 삼위일체에 대해서 관심이 좀 더 늘었다. 김용준, 『삼위일체 하나님』(무안: 정행출판사, 2018), 박재은, 『삼위일체가 알고싶다』(서울: 넥서스, 2018), 라치드 보캄 외, 『삼위일체』, 신호섭 역(서울: 이레서원, 2018) 등이다. 이 외에도 백충현,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서울: 새물결출판사, 2015), 임태웅, 『간추린 신격화 교리』(서울: CLC, 2019) 등이 다수가 있다. “삼위일체”는 쉽지 않은 주제이지만, 연구자들이 끊임없이 연구 결과를 출판하고 있다. 많은 연구가 되고 있다는 것은 중요한 분야라는 증거이다. 그러나 많은 연구는 독자들에게 혼란을 갖게 하는 미로를 제공할 수 있다. 우리의 목적은 삼위일체 교리에서 혼돈이 아닌 고백을 갖도록 정보를 정리하는 것을 돕는 것이다.
2. “삼위일체” 이해에서 혼돈이 발생한 이유
“삼위일체 하나님”은 기독교가 믿는 신(神)이다. 기독교는 신을 믿음의 대상으로 한다. 16세기 종교개혁 전까지 직접 신을 대상으로 신학했다. 비록 교회가 있었지만 직접 신을 대상으로 할 수 있었다. 왕권신수설(王權神授說, Divine Right of Kings)이 상식 범주에 있었다. 그러나 종교개혁이 되면서 신학은 신을 직접 대상으로 하지 않고 “성경 본문 해석”을 통해서 신의 인도를 받는 구조로 전환한 진영이 발생했다. 성경으로 신을 아는 지식을 구축시켰다. 첫째, 예수 믿음으로 복음을 전도하던 교회가 기독교 사회를 이루면서 신 존재를 이성으로 증명하려 했다. 안셀름(Anselm of Canterbury, 1033-1109)이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Credo ut intelligam)”으로 전환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crede, ut intelligas(믿는다면 이해할 수 있다)"를 변형시킨 것이다. Fides quaerens intellectum(Faith seeking understanding)은 아우구스티누스에서 중세 시대를 관통하는 어휘이다. 이 이해와 관련된 철학자가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 B.C. 384-322)이다. 이 시기에 헬라 철학 용어와 방법론이 신학에 유입되었다. 스콜라 신학(Scholasticism) 시기이다. 중세 시대는 보에티우스(Boethius, 475?-525?)가 제기한 이후에 발생한 보편 논쟁(普遍論爭, controversy of universal)이 대표적으로 생각되지만, 삼위일체를 정의하려고 다양한 시도를 했다. 삼위일체를 정의할 때도 아리스토텔레스의 개념과 어휘를 사용했다. 둘째 내재적, 경세적 어휘의 함정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18세기의 우를스페르거(Johann August Urlsperger, 1728-1806)가 trinitas oeconomica und trinitas essentialis (Wesensdreyeinigkeit, Offenbarungsdreyeinigkeit)를 제언하면서 본격적으로 신학에 유입되었다. 경세적삼위일체(Economy Trinity, God does)와 내재적삼위일체(Immanent Trinity, God is)가 함정인 것은 가정에 의해서 형성시킨 언어 개념이기 때문이다. ‘경세론적’ 어휘가 고대부터 있었다고 하기 때문에 고대부터 있는 것으로 착각할 수 있도록 유도했다. 그래서 많은 연구자들은 경세론적 삼위일체 제안자를 에이레나이오스로 주장하기도 했다. 셋째, 페리코레시스(Perichoresis)이다.
삼위일체 이해를 위해서, 이해를 시도하는 것을 거부해야 한다.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us, 160?-220?)가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Credo quia absurdum)”고 했다. 테르툴리아누스의 명언은 기독교 안에 너무나 유명하다. 불합리기 하기 때문에 믿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인간은 절대로 불합리하면 믿을 수 없다. 불합리하게 보이는 것이 합리적으로 수납될 수 있는 것이 중생된 이성(ratio renata)이다. 인간은 비합리적이면 절대로 믿을 수 없다. 혹 믿는다면 잠재적 신앙(implicit faith)에 불과하다. 테르툴리아누스가 200년경 trinitas(삼위일체)를 최초로 도입시켰다고 한다. 테르툴리아누스가 substantia와 persona를 사용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테르툴리아누스는 성자종속설(Subordinationism)을 벗어나지 못했다. 성자종속설은 동방 지역의 오리게네스(Origenes, 185~254)에게도 있었으며, 아리우스가 계승했다. 오리게네스는 사후에 이단으로 정죄되었지만, 그에게는 정통도 나오기도 했다. 우리는 테르툴리아누스도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은 상태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성경과 부합시키려 했다고 파악할 수 있다. 이성 기능으로 불합리한 것을 믿을 수 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는 이해로 펼치려는 태도는 바람직하지 않다.
3. 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 이해 방식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기원전 384-322년)는 세계 지성사에서 가장 밝히 드러나게 연관을 갖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자이지만, 신학계에도 깊은 영향을 주었다. 중세 철학(스콜라 신학)과 개혁파 후기 신학에서도 아리스토텔레스의 방법론과 개념을 피할 수 없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과 『형이상학』이 신학에서 신 존재를 이해하는 방편으로 도입되었다.
신학(Theologia)이란 용어는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Metaphysica)에서 등장한다(Theologia Aristotelis).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신학과 다른 신학을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종교 체계에 수용한 집단은 이슬람이다. 이슬람은 신학을 “학문으로 신에 관한(Divine Science)”이라고 규정했다(“The Theology of Aristotle”. 2008). 기독교에서 ‘신학’이라는 용어는 12세기 아벨라르두스(Petrus Abaelardus, 1079-1142/ 아벨라르)에서 구체적으로 시작되었다. 학문으로 신학이 자리 잡게 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개별자(있음, Einai, ousia, to on)를 첫째 실체(prote ousia)와 둘째 실체(deutera ousia)로 구분하면서 논리를 세웠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개별자(실체)를 어떤 이것(tode it)과 무엇임(ti esti)으로 이중적 실체로 제시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러한 구도에서 존재자(ens)를 일차적 실체(substantia), 이차적 우유(accidens)로 제시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참회록> 4권 16절을 보면, 그가 20살 때, 아리스토텔레스의 <십범주>를 읽었는데, 그 당시에 이 책은 카르타고에서 지성인들이 읽고 이야기하는 필독서라고 제시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19세에 마니교에 들어갔고, 29세에 마니교에 의심을 갖았다(373-386년). 31세에 회심하면서는 신플라톤주의자가 되었다고 하는데 견해가 일치하지는 않는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론> 1권 14장 23절에서 헬라어 배우는 것을 몹시 싫어했다고 밝히며, 라틴어는 자연스럽게 익혔다고 제시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헬라어 배우는 것을 싫어했다”, “나는 헬라어를 단 한 단어도 알지 못하였는데~” 등의 표현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헬라어 실력이 거의 없던 것으로 평가한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의 학문 방법에도 아리스토텔레스의 방법론이 있음은 부정할 수 없다.
우리도 삼위일체를 전개하는 기본 구조는 일체(ousia)와 삼위(person)이다. 일체를 설명하지 않고, 삼위를 설명한다. 마치 아리스토텔레스의 10범주를 설명함으로 존재를 이해하려는 구도의 방법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4. 서방교회 전통에서 삼위일체 이해
서방교회는 라틴어 활용지역으로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us, 160-220)와 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us, 354-430)를 근거한다. 테르툴리아누스는 『마르키온에 대항하여』(Against Marcion)와 프락세아스의 양태론(樣態論, mldalism)적 삼위일체를 비판했다. 그러나 몬타누스(Montanus)의 몬타니즘(Montanism)에 가담했다. 몬타누스는 두 명의 여선지자를 세워서 급진적 그리스도의 재림과 천년왕국의 시한부 종말론을 유포했다. 부패한 교회를 비판하며 엄격한 경건생활을 주장했다. 몬타누스의 열광주의는 사도 시대 연속(nova prophetia)을 주장했다. 삼위일체에서 테르툴리아누스의 위치는 빠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몬타누스주의로 경도됨을 민감하게 여겨야 한다. 테르툴리아누스의 용어는 서방교회를 주도했는데, 아우구스티누스는 『삼위일체론』 De Trinitate를 집필했는데, 테르툴리아누스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이전 교부들이 갖고 있던 성자종속설에서 벗어났다. 아우구스티누스는 381년 이후에 신학을 했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존재 비유(analogia entis)로서 삼위일체를 설명하고자 하였는데 그 실례로서, 기억(memory), 이해(understanding), 의지(will) 등이라든지, 아니면 좀더 잘 알려진 사랑하는 자(lover), 사랑 받는 자(loved), 사랑(love) 등을 들 수 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에 사색이 강하기 때문에 16세기 칼빈은 아우구스티누스를 경계선으로 제언했다. 그런데 20세기 칼 바르트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존재 비유를 비판하며 보다 더 과격한 믿음 비유(analogia fidei)를 제언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은 중세 시대를 지배했다. 보에티우스(Boethius, 475?-525?)에 의해서 아리스토텔레스와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이 결합되며 중세 시대의 보편 논쟁이 시작되었다. 질베르(Gilbert de la Porre, 1076-1154)는 보에티우스(Boethius)의 『삼위일체론 주석』(Commentaria in Librum de trinitate)을 썼다. 사물 영역에서 추상적인 형상들(quo est)과 구체적인 대상들(quod est) 사이의 보에티우스의 구별을 제시했다. 13세기 중엽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4-1274)는 『신학대전』(질문 27-43)에서 삼위일체론을 정리했다. 그는 삼위일체를 존재(an sit), 본성(quid sit), 그것의 방법(de modo eius) 세 가지로 제시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통신학의 삼위일체론을 준수하려고 했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방법론을 적극 활용했다. 중세 스콜라는 정통 교리를 합리적 사고 체계로 증명하며 확립하려고 했다. 그 과정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언어분석이 주요하게 사용되었다. 결국 윌리엄 오캄(William Ockham, 1285-1349)에 의한 유명론으로 말미암아, 존재론적 이해에서 인식론적 이해로 전환되었다. 칼빈은 정통교리 위에 교회를 개혁하면서, 삼위일체 교리를 성경의 근거 위에 굳건하게 확립했다.
5. 종교개혁 후 삼위일체 이해
종교개혁 시대에 칼빈은 정통 신학 사상을 『기독교강요』와 주석과 설교 사역을 통해서 체계적으로 집대성하여 확립했다. 칼빈 이후 개혁파는 칼빈의 범주에 아리스토텔레스의 방법론을 도입해서 사유(思惟)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 방법론은 중세 로마와 유럽에서 떠나지 않았다.
18세기 계몽철학이 유럽을 주도할 때에 기독교를 변증한다던 슐라이어마허(Schleiermacher, 1716-1834)는 삼위일체론을 신학의 자리에서 제외시켰다. 자유주의는 신학 체계에서 기독교 실천과 성경 해석을 분리시켰다. 제믈러(Johann Salomo Semler, 1725-1791), 가블러( Johann Philipp Gabler, 1753-1826) 등이 분리된 성경신학을 주도했다. 성경 이해에 성경비평학이 도입되면서 정통 교리는 제외되었다. 그런데 자유주의를 현대신학으로 승화시킨 칼 바르트가 있었다. 칼 바르트는 슐라이어마허에서 제외된 삼위일체를 복원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우리는 칼 바르트는 인식 훈련 체계에서 전통적 삼위일체(Trinitas, Trinity)를 일신론적 체계, 삼중일신(Gottes Dreieinigkeit, Triune God)으로 전환시켰다. Gottes Dreieinigkeit는 칼 바르트가 전통적인 삼위일체를 부정하고 정립한 어휘이다. 바르트는 전통적인 삼위일체를 정확하게 거부하고 일신론적 신 체계로 종교 체계를 구축했다. 바르트에게 삼위일체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Gottes Dreieinigkeit, Triune God을 “삼위일체”로 번역하기 때문이다. 칼 바르트 이후 서구 사회는 종교다원주의 시대가 열렸다. 칼 바르트 신학에 근거해서 1948년 WCC가 출범했고, 1962년 로마 교회는 2차 바티칸 공회의를 주도했다. 칼 바르트에 의해서 삼위일체 부활한 것이 아니라, 칼 바르트에 의해서 삼위일체 논의는 존재론이 아닌 인식론 세계로 귀결되었다. 서철원 박사는 칼 바르트, 현대신학에서 하나님의 존재(the Being of God)가 없다고 규정했다(참고, 김성삼, 행위하시는 하나님과 자존하시는 하나님: 바르트와 칼빈의 하나님론”(총신대 박사논문, 2005년)). 칼 바르트는 하나님의 존재를 하나님의 행동으로 전환했다. 바르트는 전통적인 삼위일체를 삼신론으로 치부하며 부정했다. 삼위일체를 계시(Offenbarung) 방식으로 전환하여 설명했다. 계시자, 계시내용, 계시사건(Offenbarer - Offenbarwerden – Offenbarsein)으로 제안했다. 바르트는 하나님의 존재를 사건과 행동으로 규정하였다(김성삼, 2005). 2018년 5월에 개최된 공개세미나에서 오영석은 “바르트는 삼위일체 교리를 부정했다”는 요지는 왜곡된 사상이라고 주장했다. 소강석 목사도 “몰트만의 후반기 저서까지를 살펴본다면 그의 삼위일체론에 자존하는 하나님이 없다고 100% 단정 짓기는 어렵다고 본다”고 제시했다(참고 뉴스앤넷). 현대신학에서 삼위일체는 없고 일신론적 신관으로 체계화되었다.
6. 삼위일체 이해를 위한 제언
우리는 삼위일체(하나님의 존재) 이해는 불가능하다고 제시했다. 그럼에도 “이해”라는 어휘를 사용한다. 그것은 중생된 이성이 진행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삼위일체를 이해할 수 없는데, 이해할 수 있는 방편은 교회의 고백을 살피는 것이다. 그래서 교리는 이해가 아니라 믿음과 고백임을 확증해야 한다. 삼위일체는 믿음 고백의 역사이다. 믿음을 고백하면 지식이 형성되고, 지식이 깊어지면 믿음이 확장되기 때문에, 믿음으로 삼위일체를 이해할 수 있다. 삼위일체를 이해할 수 있는 믿음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기 때문에 삼위일체가 고백으로 합의될 수 밖에 없었다. 우리는 성자종속설이 부당함을 피력했다. 그것은 삼위일체 교리를 근거해서 판정한 것이다.
그런데 필자는 ‘삼위일체(三位一體)’란 단어로 교리를 결정한 일은 없다고 제시한다. 우리는 통상 삼위일체 교리가 325년 니케야 공의회와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 결정되었다고 표현한다. 그러나 두 공의회에서는 “삼위일체 교리”를 결정하지 않았다. 두 공의회에서 결정하고 확정한 것은 “아버지와 아들의 동일실체(同一實體, honoousion)”이다. 위격(person, hypostasis) 문제는 교리에서 논의하지 않았다. 교리에서는 실체에 관련된 것만 논의하고 결의했다. 그것은 믿음의 대상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성경의 가르침은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신 6:4)이다. 하나님이 한 분인 것은 성경이 명확하게 계시한 것이다. 기독교가 구약성경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한 믿음은 믿음의 대상도 한 분이 되어야만 한다. 우리가 앞에서 제시한 성자종속설은 믿음의 대상이 차등(差等)으로 둘이 된다. 믿음의 대상이 차등이 가능하면, 곧 성자숭배, 성물숭배까지 가능하게 된다. 그러나 기독교는 믿음의 대상, 경배의 대상은 오직 한 분 하나님이시다. 이 한 믿음 대상을 놓고 교회가 격돌한 것이 정통과 이단의 논쟁이다.
정통과 이단이지만, 시간적으로는 이단과 정통이다. 언제나 이단이 먼저 등장하고 후일에 정통이 확립된다. 정통은 이단을 찾아 헤매는 일을 하지 않고, 이단이 공격하는 것을 변호하면서 형성된다. 교회를 허무는 이단이 있을지라도 성도들에게 권면하고 이단(거짓 교사)를 대적하라고 가르친다. 그럼에도 이단으로 정죄된 이유는 복음을 훼방하고 폄훼하고 멸절시키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패턴이 4세기 알렉산드리아에서 발생했다.
아리우스(Arius, 250년 경∼334년 경)는 알렉산드리아 대교구의 중 가장 세력이 강한 바우칼리스(Baucalis) 교구를 담당하는 장로(감독)이었다. 아리우스는 오리게네스에게서부터 성자종속론을 유지했다. 그리고 아들이 영원에서 피조된 존재(프로토코스)로 골로새서 1장을 해석했다. 아리우스의 운동은 알렉산드리아를 소동케 할 정도로 반향을 일으켰다. 제국회의가 열릴 정도였으니 그 위력을 가름할 수 있겠다. 그것은 알렉산드리아 대교구장인 알렉산더(A.D. 250-328, Alexander Ⅰ Alexandrinus)가 아리우스의 주장을 수용하지 않고 거부했고 결국 파문시켰다. 319년 알렉산더 대주교는 아리우스의 소동을 다루기 위해 알렉산드리아에 이집트 주교들을 소집했고(알렉산드리아 회의), 아리우스를 파문시키고 알렉산드리아에서 추방했다. 그러나 아리우스는 포기하지 않고 소동을 제국 전체로 확장시켰다. 아리우스를 지지하는 유력한 교회지도자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결국 황제는 325년에 니케야 공의회를 개최했다.
325년 니케야 공의회를 주도한 위인은 알렉산더라고 보아야 한다. 간혹 아타나시우스를 말하는 분들이 있는데, 그것은 부당하다. 아타나시우스는 부제(deacon)으로 알렉산더를 수행했다. 공의회에 발언권이 있을 수 없다. 알렉산더는 니케야 공의회에서 “동일실체”를 주도했다. 아리우스가 주장한 "유사실체(類似一實體, homoiousion)"은 이단으로 정죄받았다(Anathema). 최초로 정통과 이단이 형성된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아타나시우스를 정통신학의 수호자, 교회의 기둥”(Columna Ecclesiae)이라고 부른다.
아타나시우스는 알렉산더가 328년에 임종하면서, 계승자 지목을 받아, 30세의 어린 나이에 제국에서 가장 강력한 대교구인 알렉산드리아 대교구장이 되었다. 그러나 아리우스는 자기주장을 결코 굽히지 않았고, 황제들도 아리우스를 옹호했다. 아타나시우스는 네 명의 황제(Constantine, Constantius II, Julian the Apostate and Valens)와 격돌하면서 니케야 공회의 문서의 정통성을 확보했다. 우리가 삼위일체를 믿고 있는 것은 아타나시우스의 변호 사역 때문이다. 그래서 아타나시우스의 별명은 세계를 대항해서 이긴 신학자(contra mundum)이다. 황제는 군대를 동원해서 아타나시우스의 사역을 금지시켰다. 아타나시우스는 15년 10개월을 유배와 도피 생활을 했다. 373년 알렉산드리아 교회가 봉기를 일으켜서 아타나시우스를 복직시켰다.
325년 니케야 공회의의 결정을 아리우스파는 순복하지 않고 저항했다. 황제의 지원을 받은 아리우스였지만 아타나시우스는 니케야 공의회 결정을 포기하지 않았다. 믿음과 정치적으로 공의회의 결정이 유효함을 피력했고, 폭압하는 황제도 아타나시우스의 변호를 거부할 수 없었다. 그리고 아레오스파와 마케도니안파(영항쟁자)에서 성령의 피조성을 주장했다. 그들은 성령을 ‘천사’라고 주장한 것이다. 아리우스가 죽고, 아타나시우스도 소천되고, 니케야 세대가 지나갔지만 다음 세대까지 325년 공회의 결정에 대해서 논란은 계속되었다. 콘스탄티노플 공회의에서 성령에 대한 구체적인 문장이 교회의 고백에 첨가되어 완전 문장으로 고백되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에 “성령을 믿는데 주시오 살리시는 자이시오 아버지에게서 나오셨고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동일한 경배와 영광을 받으신다(Et in Spiritum Sanctum, Dominum, et vivificantem qui ex Patre (Filioque) procedit. Qui cum Patre et Filio simul adoratur, et conglorificatur).
아리우스를 추종하는 세력은 “유사실체” 이외에 “성령의 피조성”도 주장했다. 그것에 대해서 아타나시우스는 강력하게 성령이 하나님의 동일실체로 아들과 하나라고 주장하였다(Epistula ad Serepionem I, 27). 성령이 다른 위격과 동일실체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아타나시우스는 성부와 성자의 동일실체를 변호했고, 성령의 피조성에 대항해서 성령도 하나님이신 동일실체를 주장했다. 아타나시우스가 제시한 원리는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은 하나님이다”이다. 아타나시우스에 의해서 아버지와 아들의 동일실체, 그리고 성령도 하나님이심이 결정되었다. 이 용어를 “삼위일체”라고 한다. 아타나시우스는 삼위일체를 공식화한 첫 신학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삼위일체”라는 단어는 사용하지 않는다.
아타나시우스는 아버지와 아들이 동일실체임을 고백하였고, 성령도 동일실체라는 것을 주장하였다. 그런데 그 존재방식이 어떻게 구성되었는지 설명하지는 못하였다. 아타나시우스가 소천된 뒤, 381년 콘스탄티노폴리스 공회의에서 존재방식까지 논의하면서 삼위일체 교리를 결정하였다. 삼위일체 교리를 완성시킨 신학자는 갑바도기아 신학자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 닛사의 그레고리우스, 바질이다. 교회에서 인정한 신학자는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이다. 감바도기아 학자들은 “우시아와 후포스타시스”를 구분하여 정립한 것이다. 우리는 이 구분법을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 방법으로 파악했다. 바실레우스(바실)는 한 공동신격을 가르쳤다. 성령까지 공동신격을 주장했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는 세 신격의 하나님이 동일실체로 존재한다고 설명했다. 그럼에도 그들의 설명은 삼신론으로 오해할 위험이 많았다. 이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서 다메섹 요한(670-750)은 ‘페리코레시스(περιχώρησιϛ)’를 개념을 도입했다.
7. 나가는 말
우리는 삼위일체에 대해서 간략하게 제시했다. “삼위일체”에 대한 논의는 수 없이 많지만, 서방 교회에서 확립한 전통을 벗어나지 못한다. 삼위일체는 325년 니케야 공회의와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회의에서 결정된 정통 교리이다. 그런데 우리의 신학 사유는 서방 교회의 사유를 따르고 있다. 그래서 정통 교리로 삼위일체가 자리 잡은 것을 제시했다.
우리는 교회가 이성으로 믿음 체계를 구축하려는 것은 지양(止揚)했다. 이성으로 신학을 전개하는 것은 교회를 미로에서 벗어나게 하지 못했고, 오히려 더 깊은 미로로 들어가게 했다고 분석했다. 이러한 실패 사례는 종교개혁 후 개혁파와 루터파에도 존재했다. 교회에 합리적 사고 체계가 필요한 곳이 아님을 역사가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는 교회의 머리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일에 전력해야 한다.
삼위일체 교리는 주 예수를 믿음에 문제로 발생한 것이다. 325년 니케야 공회의는 성자종속설을 거부하고, 성부와 성자가 한 실체임을 천명한 것이다. 성부와 성자께서 한 실체인 동일실체(homoousion)가 정통교리이다. 그래서 우리는 삼위일체를 사고하는 것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한 실체, 동일실체임을 고백하고 인식하도록 제언한다.
칼 바르트는 삼위일체를 부정하고 Gottes Dreieinigkeit(Triune God)로 전환했다. 우리는 Gottes Dreieinigkeit(Triune God)을 “삼중일신”으로 번역하면서, “삼위일체로 번역하는 것이 부당함”을 밝힌다. 현대신학에서 신 존재는 유일신 체계로 전환시켰다. 유일신에서 삼위일체를 논하는 것은 부당하다. 성자종속설보다 더 과격하게 세속화된 이론이다. 합리적인 이론은 경건 지식을 이룰 수 없을 수 있다. 경건한 지식은 이해가 아닌 믿음을 배양한다.
우리는 칼 바르트가 삼위일체는 Gottes Dreieinigkeit(Triune God)로 변경한 것에 대해서, 오히려 325년, 381년 보편교회가 결정한 homoousion(동일실체)를 회복해야 바른 교리를 형성할 수 있다고 제언한다.
[참고문헌]
The Theology of Aristotle, 2008년.
https://plato.stanford.edu/entries/theology-aristotle/
조덕영, “초대교회 오리겐은 어떤 인물이었는가?”, 크리스천투데이, 2017.03.15.
고경태 박사(한영대학교 조직신학)
http://blog.naver.com/PostList.nhn?blogId=davidycho&from=postList&categoryNo=19
|
출처: 대한 에스라 성서 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장기용(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