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군총의 비밀 광개토왕·장수왕 묘가 아니라 고구려 시조 모신 신전(神殿)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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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만주라고 일컫는 지역은 필자에겐 우리가 살고 있는 한반도보다도 더 애착이 가고 가슴 뭉클한 곳이다. 잃어버린 땅이요 강제로 잊힌 역사를 품은 곳이라 생물학적 회귀본능이 그곳을 돌아다보게 만드는 모양이다. 만주 땅이 시작되는 곳, 지금의 중국 지린성 지안(集安)시에 고구려는 서기 3년에 도읍하고 국내성이라 이름하였다. 이후 420여 년 동안 이곳은 한민족의 핵, 동아시아의 핵 역할을 수행했다. 이곳에서는 시내 한복판에 있었던, 둘레가 2.7km인 사다리꼴 성을 고구려의 수도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는 궁성(宮城)과 도성(都城) 행성(行城)을 구분하지 않은 탓에 나온 오류다. 국내성은 남쪽으로는 압록강, 서쪽으로는 통구하(通溝河)가 흐르고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동서 10km, 남북 5km에 달하는 분지 전체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지안 시내에서 발견된 둘레 2.7km의 사다리꼴 성터는 궁성이었을 것이다.
궁궐의 동쪽 문으로 나서면 산으로 둘러싸인 가운데 압록강이 흐르는 그다지 넓지 않은 들판 한가운데,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장중한 모습으로 앉아 있는 돌 건축물을 볼 수 있다. 윗부분은 잘려나간 듯 편평하지만 전체적으로는 피라미드 모양을 닮아 중국인들은 ‘동방의 금자탑’이라고 부른다. 고구려의 옛터를 찾는 사람들은 장군총을 보는 순간 놀라워하다 금방 의문에 휩싸인다. 신비스러운 분위기와 특이한 모양, 색다른 의미를 지닌 듯한 위치, 복잡한 구조 때문이거나 혹은 망해버린, 격파당한 역사의 상처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오기가 작용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말했다. “이 건축물은 왕의 무덤이다”라고. 규모나 크기 위치로 보아 특별한 임금의 무덤임이 틀림없다. 주몽의 묘, 고국원왕의 묘, 광개토태왕의 묘, 장수왕의 묘라는 설이 난무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장수왕릉으로 부르는 사람이 늘어났다. 정말 그럴까? 이 독특하고 복합적인 형태의 기념물이 그저 임금의 묘일 뿐일까?
고구려의 神市? 고대사회에서는 공공성이 강한 건축물에 집단의 시원이나 가치관, 자연과 만나는 태도, 조상을 맞이하는 방식, 백성들에게 전하는 정책, 후손들에게 전하는 메시지 등을 상징과 은유로 담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다면 건축물에 숨은 코드를 추적해보면 장군총의 주인뿐 아니라 이 건축물에 담긴 논리와 시대정신, 지향성 등을 알 수도 있다. 장군총을 축조한 사람들은 그 위치에 어떠한 의미를 두었을까.
장군총은 북으로 우산(禹山)을 바라보며 동북으로 약간 기울어진 용산(龍山)에서 흘러 내려오는 줄기가 낮아지는 편평한 언덕에 있다. 산골 분지답지 않은 너른 터에 서남쪽으로 통구평야와 이어지면서 지안분지 전체를 내려다보는 곳이다. 또한 멀지 않은 곳에선 압록강이 묘실 입구의 방향과 거의 동일한 각도를 이루며 서남 방향으로 흐른다. 자연경관은 물론이고 풍수상으로도 생기가 넘치는 명당으로 혈(穴)자리에 가까워 보인다. 주몽신화에는 천손이 강림한 장소에 의미를 두려는 ‘중심’ 사상이 있다. 단군신화도 유사하다. 천상에 살던 환웅이 인간세계를 구하려는 의지를 강력히 표방했다. 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무리(徒) 3000명과 함께 하늘을 모방한 ‘신시(神市)’라는 중심공간을 창조한다. 고구려는 여러 면에서 (고)조선 계승을 표방한 나라다. 그렇다면 고구려의 수도에는 신시에 해당하는 신성 구역이 있어야 한다. 궁궐의 동문으로 빠져나가면 장군총을 비롯해서 광개토태왕릉, 임강총(臨江塚) 등의 대형 적석계단묘와 무용총, 각저총, 5회분 등 벽화를 담고 있는 고분을 만나게 된다. 장수왕이 414년에 세운 광개토태왕릉비문에서는 추모(주몽)를 ‘부란강세(剖卵降世)’한 존재로 표현했다. 여기서 ‘알(卵)’은 해를 상징한다.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모두루총(牟頭婁塚)의 묘지석에서는 추모를 ‘일월지자(日月之子)’라고 했다. ‘삼국사기’는 어두운 공간에 유폐된 유화부인이 햇빛을 받아(感應) 임신했다고 적어놓았다. 단군신화에 등장하는 ‘태백산(太伯山)’의 ‘백(伯)’과, 환인(桓因) 환웅(桓雄)의 ‘환(桓)’자는 태양을 상징한다. 고구려도 해와 관련이 깊어서, 하늘(天)이란 곧 일월(日月)을 의미했다. 부여의 천제가 해모수(解慕漱) 또는 해부루(解夫婁)였듯이, 고구려 2대인 유리왕의 이름은 ‘해유(解孺)’, 왕이 되지 못한 그의 아들은 ‘해명(解明)’, 3대 대무신왕은 ‘대해주류왕(大解朱留王)’, 4대 민중왕은 ‘해색주(解色朱)’, 5대 모본왕은 ‘해우(解憂)’란 이름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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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직선으로 이어진 세 건축물 모두 ‘해(解)’를 성으로 쓰는데, 여기서 해는 태양을 가리키는 우리말을 한자로 적은 것이다(실제로 ‘삼국유사’는 성을 해씨로 삼았다고 기술했다). 해와 관련이 깊은 고구려에서, 궁궐 동쪽에 있는 무덤들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존재가 된다. 장군총은 국내성의 동문과 거의 오차가 없는 직선으로 연결돼 있는데, 이는 동쪽 또는 해(日)와 관련해 의도적으로 배치한 것임에 틀림없다. 장군총에서 광개토태왕릉비까지는 일직선으로 1650m, 광개토태왕릉까지는 2050m인데, 이 세 구조물은 자로 잰 듯이 일직선으로 이어져 있다. 이러한 인위적인 구도 속에 우리가 풀어야 할 또 다른 코드가 숨어 있다. 장군총은 보통 무덤과 모양 자체가 다르다. 메소포타미아에서 보는 지규랫(ziggurat)처럼 화강암을 계단식으로 쌓아올려 완성한 조적식(組積式) 형태다. 높이는 12.4m이고 네 밑변의 길이는 35.6m인 정방형의 사각뿔인데, 네 측면의 사선을 이으면 경사는 대체로 45도가 나온다. 정면에서 보면 1:1:1의 배율로 삼각형을 이루는 무한 상승구조다. 이러한 형태는 이전의 무덤들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광개토태왕릉도 형태상으로는 유사한 9층의 무덤이지만 기하학적으로는 완벽하지 않다. 왜 고구려인들은 유연성과 절제미를 갖춘 이러한 건축물을 만들었을까.
장군총에 실현된 우주산 고대 건축물에서 삼각형이나 정사각의 뿔은 보통 ‘우주산(宇宙山)’을 상징한다. 정사각뿔의 중심점을 통해 하늘과 땅과 지옥이 연결된다. 인간과 천계(天界)가 결합한다. 이러한 우주산 개념은 세계 곳곳에 구현되었다. 인도의 메루산이나 예루살렘의 시온산, 그리스의 올림포스산, 일본의 후지산, 미국의 올리브산이 그런 곳이다. 산이 많은 우리나라에서는 더욱 강렬하게 나타났다. 환웅이 하늘에서 내려온 태백산 꼭대기가 우주산이다. 주몽신화에서 해모수가 하늘에서 오룡거(五龍車)를 타고 흰 고니(鵠)를 탄 100여 명과 함께 내려온 곳으로 묘사된 웅신산(熊神山)도 우주산이다. 그렇다면 산 모양을 이룬 장군총은 단군신화의 태백산 혹은 주몽신화의 웅신산이나 용산(龍山)을 상징한 것일 수 있다. 고구려는 고조선을 계승한 나라이고, 주몽신화는 단군신화를 이었으므로, 국내성 근처에는 주몽신화뿐 아니라 단군신화와 연관된 기념물도 있어야 한다. 장군총이 그러한 기념물에 걸맞은 조건을 갖추고 있는 것 같다. 장군총은 7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략 1200여 개의 화강암 석재로 이루어졌는데, 큰 것은 길이가 5m가 넘는다. 사각뿔의 장군총은 개정석(蓋頂石) 위의 사라진 부분까지 포함해 몸체, 현실(묘실), 신전(墓頂)의 세 부분으로 정확히 등분되어 있다. 단군신화에서도 공간은 셋으로 구성돼 있다. 첫 번째는 환인 등이 사는 천계, 두 번째는 환웅이 가화(假化)하여 웅녀와 결합해 건설한 새로운 질서인 인간계, 세 번째는 곰과 호랑이로 상징되는 동물계다. 이러한 공간 분할 구조는 주몽신화에서도 나타난다. 맨 아래층인 제 1층은 4계단으로 되어있고, 나머지 6개 층은 3계단씩이므로 합하면 22계단이다. 그런데 단군신화와 주몽신화는 3수론을 따르므로 계단은 21개가 되는 것이 합당하다. 그런데 1층에서 밑돌로 보이는 계단을 기단부의 상대석(上臺石)으로 본다면, 1층도 3계단이 된다. 7층×3계단=21계단으로 단군신화와 같은 수리구조를 이루게 된다. 고대에서 수(數)는 단순한 부호를 넘어 사상을 지배한 존재였다. ‘하도(河圖)’와 ‘낙서(洛書)’는 물론이고 ‘천부경(天符經)’ 등에서도 수는 현상을 나타내고 본체를 규명하는 데 사용되었다. 샤머니즘 세계에서 3은 우주성(宇宙性)을 상징하고 신비한 힘을 가진 숫자다. ‘3×7=21’이 이뤄진 곳
‘3’은 고구려의 건국신화에도 자주 나타난다. 주몽신화에서 해모수가 웅심연(熊心淵)에서 만난 하백의 딸은 유화를 비롯해 셋이었다. 주몽이 부여를 떠날 때 거느린 신하도 오이 마리 협보 세 명이었고, 모둔곡(毛屯谷)에 도착해서는 이상한 옷차림을 한 세 사람을 만나 나라를 건국(生)한다. 유리도 세 명의 신하와 함께 아버지를 찾아 졸본부여로 온다. 고구려에는 삼종의 신보(神寶)가 있었다. ‘삼국사기’와 ‘수서’ ‘북사’에는 고구려인들은 가족이 죽으면 고인의 시신을 사망 후 3년까지 집에 마련한 특별한 방에 모셔놓았다가 길일을 택해 매장했다고 밝히고 있다. 부모와 남편이 죽었을 때에는 3년간 상복을 입으나 형제들을 위해서는 석 달만 입었다고 한다. 7이란 숫자도 3 못지않게 중요시했다. 샤머니즘의 세계에서 우주목은 칠혹성(七惑星)의 하늘과 동일시된다. 우리 문화에서 7은 북두칠성과 관계가 깊다. 벽화가 그려진 고구려 고분은 95기가 넘는데, 이 가운데 22기의 고분에 750개 이상의 별이 그려져 있다. 몇몇 고분벽화에서는 일월과 북두칠성이 함께 그려져 있다. 주몽이 유리에게 신표로 남긴 단도를 숨긴 곳도 ‘일곱 고개와 일곱 골짜기가 있는 돌 위의 소나무(七嶺七谷 石上之松)’였다(동국이상국집의 동명왕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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