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포엠 2024 신년호 이달의 작가]
나는 있고 내가 없는데
김부회
간이역의 가락국수와
주전부리 카트를 밀고 다니던 홍익회 아저씨
국밥에 막걸리를 걸친 왁자한 소리들
어느 시절, 아무 역이나 내려 소읍의 풍경에 스며들다
집으로 돌아가기를 되풀이하던
겨울 개찰구
눈발에 젖은 머리를 털며 들어서는 대합실에
쉼표처럼 놓여있는 난롯가
서성거리는 사연들이 불쏘시개가 된 채
추스르다 남은 기다림의 근처에
잠시 머문 여정의 볼을 빨갛게 만들던 온기
혼자 떠나도 여럿이 되는
나의 삼등 완행열차는 이제 없다
별표 전파사가 별 속으로 사라지고
연탄가게가 하나둘 문을 닫도록
간이역에 버리고 간 우산과
내게서 분절된 내가 오랫동안 같이 있다
돌아오는 열차 창밖 어둑한 가로등이
마지막 담배 한 개비를 끝내 피우게 하는
그 기억이 나를 버리고
마른 기침만 속절없이 폐를 찌를 때
그때처럼 눈이 오는데
내게서 표절된 위안을 기다리며
출구를 더듬거리는 차가운 계절의 음습한 온도와
광장을 노려보는 길고양이의 눈이
둥근 삼각형을 만드는 어떤 날
입김 위에 써놓은 내 이름이 흘러내리듯
녹슨 철로 위에 나는 있고
내가 없는데
https://www.youtube.com/watch?v=eh9-A25M4TU
원룸 옆에 원룸
김부회
달빛조차 비집고 들어올 창窓 없는 방
싱크대 옆에 변기, 변기 옆에 책상, 책상 옆에 단두대, 아니 단족대
하루를 공친 옆방이 코를 곤다
돌아와야 할 사람과 다시 나가야 할 사람
간밤에 잘린 발목 어림이 도마뱀 꼬리처럼 다시 붙는 새벽
마흔 넘은 아이, 일흔 넘은 아이
전유專有는 그들만의 특권
천형을 짊어진 도비왈라*의 어깨는 바지랑대에 걸린 나일론 셔츠처럼 질기다
이 벌집의 네모반듯한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그 속에 도무지 용서할 수 없는 대물림된 가난이
배송된 날로부터
네모는 키 낮은 책상, 다리조차 못 펼 밥상, 무릎까지만 허용하는
부재의 기도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수만 번을 낙방한 그가 소리 없이 울었다
어머니가 들으면 안 되는 울음
기린 새끼의 접힌 다리를 다신 못 펴는 소릴 조련사가 보면 안 된다
조련사가 침대를 무자비하게 내다 버린 날
하얀 천으로 덮인 옆방을 본 트라우마가 있다
간밤, 그가 내민 정답지에는 꾹꾹 눌러쓴 흔적이 또렷한 공백만 꽉 차 있다
‘하필, 재수 업게스리!’
골목에 네모난 전단이 붙었다
‘투숙객 구함, 화장실, 싱크대, 책상, 침대 완벽 구비 초 저렴’
나일론 민소매를 걸친 전사戰士가 냉큼 떼어갔다
수인번호를
어깨 위에 코끼리 하나쯤은 매달고 사는 나와 너와,
*도비왈라 : 인도의 천민 계급 중 하나, 빨래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
**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 도둑이 잡아 온 사람의 다리를 철 침대에 맞춰 잘라냈다고 하는 그리스 신화
강서 복집
김부회
P형의 주선으로
삼 십여 년 만에 만난 선배와 동기
잠시의 어색함은 이내 사라지고
살아온 이야기와 질곡의 시절이 잘 다듬은 활복이 되어
펄펄 냄비를 끓인다
전철을 타고 오거나
서울 따릉이를 타고 오거나
중형 세단을 타고 오거나, 모두
오가는 길이 다르기에 목적지도 다를 줄 알았는데
도착지는 다 같은 강서 복집
무엇을 했고, 지금 무엇을 하는지는 중요한 것이 아닌
아무개와 아무개로 활짝 웃을 수 있는 지금,
세월에 묻어온 색감은 모두 회색빛
가족과 가장이라는 무게를
등짐처럼 걸머지고 살다 때론 넘어지기도
때론, 양화대교를 흐르는 까만 강물의 유혹에
나를 던지고 싶었던 한때의 좌절도
다 지나간 일
남은 일은, 이제껏 그런 것처럼 살아가는 일
해야 할 일은 다 한 것 같고
하고 싶은 것, 할 수 있는 것을 하며 사는 일
보태거나 곱하는 셈법은 버리고
빼는 셈법을 공부하는 일
한참을 웃다 헤어지며
- 자주 보자구
몸에 밴 인사를 나누다 문득
강서 복집, 네온사인이 눈에 멈춘다
등이 따듯한 사람들, 어둠이 덩그러니 남아
냄비의 온기를 더듬고 있다
다소 우울한 협연
김부회
마무리되지 않는 문장의 쉼표 앞
빈자리를 유령처럼 겉도는 행간과 행간 사이
마침표를 찍는다
빈자리였는지 애초부터 비어있는 자리였는지
흐릿해지는 아버지의 잔상
브람스의 머릿속에 있는 왈츠를 불러온다
밥상을 물리고 돌아선 새벽 지나
왕뚜껑 비닐을 벗기고 있는 거실에 벗어 두고 간 몸뻬
어머니 질감이 푸석하다
꿈속에서 꿈을 깨우는 사고의 인셉션
건물을 부수고 집을 세우고 꿈을 깨우거나 재우고
시력이 건조한 붓끝으로 물감을 흩뿌리는 아득한 안갯속
이명이 귓속 바다를 격랑으로 숨차게 한다
누구도 옆자리에 타기 전, 93.1 메가헤르츠를 틀곤 했다
계절을 피처링하는 나의 단순에
건들거리는 랩의 반복된 마디 후렴부처럼
어김없이 등장하는 불안정한 음계들
어머니가 자지러지게 전활 했다
그 밤에 귓속 바다는 먼 곳으로 쓸려나가고
입술 가장자리에 문신처럼 박혀 파르르 떨리는 지느러미 끝에서
‘운명하셨습니다.’
배를 드러낸 채 둥둥 떠 있는 금붕어들이
미아리에서 점집 찾듯 청중 없는 협연을 하고 있다
어항 속에 비는 내리고, 밤 비는 내리고
술 덜 깬 대갈통을 후드려갈기는 봄비
모자와 모자
김부회
상갓집에서 오랜만에 친구를 만났다
춥지 않은 날씨에도 모자를 푹 눌러쓴 친구
직업군인으로 구 년, 공사장 인부로 이십여 년
모자 속에 숨어있던 그의 시간이
대머리를 만들었다
숱이 많은 나와 그의 모자가 겸상한다
지나간 말투들이 서로에게 존댓말을 한다
그의 모자帽子속엔
절반쯤 감추고 살아온 시간과
모발이 풍성했던 생의 한 지점에서 만나
더불어 끈끈하게 살아온 아내와 아들
안온하게 살아온 그들이 있다
돌아가는 길
우린 또 누군가의 상갓집에서
마지막 인사를 나눌 것을 예감한다
그땐 그도 모자를 벗겠지
존댓말도 벗어야겠지
몇 가닥 남지 않은 그의 머리 위로
비는 내리고
비는 내리고
이마에 닿는 한 방울 빗물이
강물이 될 것을 이미 알고 있기에,
이듬해,
그가 두고 간 모자母子를 만났다
영정 사진 속엔 풍성한 모발의 그가 나를 보며
환하게 웃고 있다
비는 내리고 여전히 비는 내리고,
먼저 떠난 친구 고 이동일에게/* 帽子와 母子
김부회 프로필
월간 모던포엠 편집위원, 계간 문예바다 편집부주간, 김포신문 시 전문 해설위원, 중봉문학상 외 다수 수상, 시집 (시, 답지 않은 소리)(러시안 룰렛), 평론집 (시는 물이다) 공저 시집 (사람과 시 그 두 번째 앤솔로지), 디카시집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츨근길) 외 다수
첫댓글 우리 모두 그때 그 시절을 잊지 못하여 잠시 간이역에서 움출거렸던 그 시절의 추억이 눈 앞에 선합니다. 아름다운 추억의 그림같은 시 잘 감상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