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 33:1-18
계시의 역할
유교와 불교, 그리고 일반적인 철학들은 한결같이 인간의 이성에다 그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유일신, 즉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있는 우리 기독교는 계시에 그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계시란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사람들에게 열어 보이신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한 마디만 들어봐도 우리가 믿고 있는 하나님은 어떤 정적인 존재가 아니라 친히 말씀하시면서도, 부단히 활동하고 계시는 분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욥은 한때 부르짖어도 아무런 응답이 없으신 하나님께 불만을 토로하였습니다. 그러자 여기에 대하여 엘리후는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당신의 백성을 위하여 계시를 통해 활동하고 계신다고 강조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런 계시의 역할이 무엇인가도 정확히 밝히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계시의 역할은 과연 무엇일까요?
##### 1.계시는 사람의 꾀를 버리게 합니다
본문 17절...<이는 사람으로 그 꾀를 버리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솔로몬도 전도서 7:29절에서 <나의 깨달은 것이 이것이라. 곧 하나님이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은 많은 꾀를 낸 것이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사람의 <꾀>라는 것은 좁은 의미로 보면 사람들의 비뚤어진 의도를 말합니다. 그렇기에 사람의 꾀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안목으로 보면 모두 빗나간 생각들입니다. 그리고 이런 빗나간 생각들이 행악에 빠른 죄악의 사상들을 만들어 냅니다. 이 땅을 어지럽히고 있는 수많은 이념 전쟁은 그래서 생겨난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 계시를 통하여 인간의 바른 삶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신 것은 자기 꾀를 버리도록 하려는 데 있습니다. 자기의 꾀로 살려고 하는 자는 결국 자기가 파놓은 함정에 빠져서 파멸로 몰고 가는 속임수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구주로 섬기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고백하는 교인이라면 자기 생각에 의존하여 삶을 결정하기보다는, 우리에게 풍성한 삶을 약속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이는 소중한 인생을 후회없이 보람으로 정리하도록 이끌어 줄 것입니다.
--나의 주장과 나의 생각만을 앞세우지 말자. 나의 얄팍한 꾀는 하나님이 징계하심을 기억하며 살자.
##### 2.계시는 사람의 교만을 막습니다
엘리후는 본문 17절에서 <사람들에게 교만을 막으려 하심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사람이 저지르고 있는 죄가 수없이 많지만 그 중에서도 자기를 높이는 교만처럼 그 뿌리가 깊은 것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를 억지로 낯주어 놓고선 그것으로 다른 이들의 칭찬을 들으려고까지 합니다. 이것이 사람이 갖는 교만의 실상입니다.
--대체적으로 성경 학자들은 광명의 천사 하나가 하나님보다 자기를 더 높이려 했다가 타락하여 그만 사단이 되고 말았다는 견해에 일치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땅의 모든 죄는 그 근본이 교만이었던 것입니다.
어쨌든 사람에게 있어 교만처럼 추악한 범죄는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그런 죄를 가리켜 디모데후서 2:17절에서 <창질의 썩어짐 같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계시를 통하여 당신의 교훈을 들려주신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런 교만을 버리도록 하려는 데에 있습니다. 그렇기에 계시의 완성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심지어 죽기까지 당신을 낮추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는 누구도 자기 교만을 던져 버리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항상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 3.계시는 사람을 멸망에서 구원합니다
본문 18절...<그는 사람의 혼으로 구덩이에 빠지지 않게 하시며 그 생명으로 칼에 멸망치 않게 하시느니라.>
사람의 꾀나 교만은 자신을 결국 파멸로 몰고 갑니다. 얼핏 생각하면 꾀나 교만은 자기를 위한 것들처럼 보이지만 그것이 가져다주는 댓가는 쓰라린 죽음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구약시대에 있어 하나님의 계시적 활동은 특정인에게만 나타났지만, 신약시대에 이르러선 그리스도와 그분의 말씀을 통하여 계시가 보다 보편화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계시의 전체를 일목연하게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기독교는 인간의 이성에 근거하지 않고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계시에 근거한 종교입니다. 그리고 이 계시의 역할은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의 꾀를 버리게 만들고, 절대로 교만할 수 없도록 만들며, 종국에는 사람의 영혼을 파멸에서 구원하는 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보편적인 계시의 말씀을 직접 듣는 자세를 가지고 성경을 늘 읽고 묵상해야 할 것입니다.
--전에 미시간 호수에 배 한 척이 침몰했을 때, 노스웨스트 대학의 학생 한 명이 물에 뛰어 들어가 빠져 죽게 된 사람 23명을 구출해 주었습니다. 수십 년 후에토레이 목사님이 설교하면서 그 청년의 용기를 칭찬했는데, 마침 그때의 청년이 백발 노인이 되어 앉아 있는 것을 발견하고 깜짝 놀라면서 <그 사건을 통해 가장 인상에 남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노인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단 한 사람도 고맙단 말을 한일이 없었던 것입니다.>
<원수는 돌에 새기고 은혜는 물에 새긴다.>는 말이 옳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가 형님 밑에서 개만큼도 대접을 받지 못하고 지냈다고 불평하니까, <당신은 개 만큼도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이다.>라고 책망했다고 합니다.
말씀을 통해 주시는 구원의 기쁨에 감사하며 주님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살아가자.
욥 33:19-33
회복의 복음
한 여인이 물동이에다 물을 가득히 길어 오다가 넘어지는 바람에 동이가 박살나고 물을 땅바닥에 다 쏟아 버렸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러면 박살난 물동이는 예전처럼 회복시킬 수가 없고, 땅바닥에 쏟아져 버린 물 역시 되담아 낼 수 없게 되어 버립니다. 그야말로 잠깐의 잘못으로 물동이와 물의 운명은 완전히 끝나 버리는 것입니다.
이처럼 이미 죽은 사람을 이전보다 더 완전한 사람으로 살려내는 복음의 힘이라고 하는 것은 정말 경이로운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무덤에서 나흘 동안이나 썩어가고 있던 나사로가 다시 살아난 사건이나, 예수님이 무덤을 깨치고 다시 일어난 것은 이런 회복의 복음을 증명해 주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한마디로 회복의 복음입니다.
그런데 엘리후는 본문을 통하여 파멸의 구덩이에 던져진 사람을 하나님께서 끌어 올리시는 장면을 극적으로 보여줌으로써 회복의 실상이 무엇인가를 명백히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그는 하나님께서 그런 일을 감행하시는 것은 대속물을 얻었기 때문이라는 지극히 신약적인 견해까지 덧붙여 주고 있습니다.
다시말해 엘리후는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을 알지 못하고 있었던 그 시대에, 자기도 모르게 예언적인 말을 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는 당신의 복음을 가지고 있는 우리에게서 무엇들을 회복시켜 주십니까? 엘리후가 본문에서 언급한 말을 통해 이러한 사실들을 생각하시면서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 1.복음은 처음 때를 회복시켜 줍니다
엘리후는 파멸의 구덩이에서 끌어 올려진 사람의 예를 들고 나서 먼저 본문 25절에서 <그런즉 그 살이 어린아이보다 연하여져서 소년 때를 회복할 것이요.>라고 말 합니다. 여기서 '소년 때'는 처음 때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처음 때>는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1) 하나님께서 처음에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셨던 떠를 말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과의 관계를 '소년 때의 우의와 결혼때의 사랑'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마치 이점을 염두해 두신 듯이 에베소 교회를 향하여 처음 사랑, 처음 행위을 가지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복음은 무엇보다도 우리에게서 처음 때를 회복시킵니다.
그러니까 예수께서는 당신의 복음을 통하여 처음 때와 같이 우리를 완전한 상태로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주의 복음을 받은 자는 처음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에덴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처음 사랑을 회복하는 우리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 2.복음은 기도를 회복시킵니다
본문 26절에서 엘리후는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므로 하나님이 자기의 얼굴을 즐거이 보게 하시고...>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한마디로 본래의 기도가 회복된다는 뜻입니다. 일상적인 기도는 영혼의 호흡과 같습니다. 기도는 육체의 코로 숨쉬는 일보다 더 중요합니다. 그래서 기도가 중단되는 것은 영혼의 숨통이 막히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기도를 멈춘 자는 죽은 자와 다름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복음은 바로 기도가 멈추어 영혼이 죽은 자들을 살려 냅니다. 복음은 기도가 멈추어진 자들이 다시 기도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줍니다.
주님께서는 마태복음 7:7절에서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라 찾을 것이요, 두드리라 열릴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도를 회복시키는 일에 대하여 이만큼 직설적으로 들려 준 말씀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께 입을 넓게 열어야 합니다.(시81:10) 기도해야 합니다. 복음을 받은 자는 기도가 회복되야 하는 것입니다.
##### 3.복음은 의를 회복시킵니다
본문 26절...<사람에게 그 의를 회복시킨다.>
의를 회복시키는 데에는 대속물의 역할이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바울이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과 그를 믿는 자에게 어떻게 하나님의 의가 입혀지게 되는가를 설명하였습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죄를 범하게 되지만 화목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믿음을 통하여서만 의롭다 함을 얻습니다. 불의한 자가 자기 행위로 의롭게 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어 놓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입니다. 복음의 핵심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깨어진 물동이는 예전대로 다시 끼워 맞출 수가 없고, 쏟아진 물도 예전대로 되담을 수가 없으나, 복음은 우리를 처음의 상태로 회복시켜 줍니다. 진정 원래의 모습으로 회복시키고 기도를 회복시키며 의를 회복시킵니다. 이러한 말은 평범한 것 같지만 거기에는 우리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굉장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살아야 합니다. 이제 복음이 곧 우리를 죽음에서 끌어올렸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바라기는 우리가 복음에 합당한 선한 열매를 맺으며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아름다운 생애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글쓴이: 옥련지침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