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장 35~51절/제자를 부르시는 방법
35-51절까지는 예수님이 다섯 제자를 부르시는 모습이 나옵니다. 처음에는 침례 요한의 제자였던 두 제자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일이 있고, 그 중의 하나인 안드레가 그의 형 베드로를 불러오는 사건이 있고 빌립은 예수님께 부름 받은 이후 나다나엘을 데려오는 등 다섯 명의 부름이 있습니다. 이 다섯 명의 부름은 각기 형태별로 나누면 네 가지가 됩니다. 첫째, 침례 요한의 제자였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받고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둘째의 경우는 이미 제자 된 사람들의 인도를 받아서 부름 받는 경우로서 베드로와 나다나엘의 경우가 있습니다. 셋째는 예수님께서 직접 부르심으로 제자가 된 경우로 빌립과 같은 경우가 있으며, 그리고 마지막으로 같은 초대함을 받아도 좀 특이한 경우로서 나다나엘의 경우가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다양한 방식으로 주님을 만났고 주님께서도 이들을 다 다르게 다루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만나게 되는 것도 너무나 다양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아시기에 우리를 다루시는 것도 우리에게 가장 적합한 방식으로 다루십니다.1. 예수님께 오는 길은 다양하다.본문에 나온 것만 보더라도 예수님을 다섯 명의 제자에게 네 가지 방법이 있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첫째, 침례요한의 메시지를 통해서(29,36)침례 요한의 제자 출신들로서 두 제자의 경우입니다. 침례 요한은 이미 전날에 예수님을 보고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했는데(29), 이튿날 다시 예수님이 지나시는 것을 보고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했습니다(35). 분명히 많은 사람들이 그 말을 들었을 것인데, 여기 그의 두 제자가 반응을 보여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어떻게 이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의 말을 듣고’(36). 침례 요한의 말을 듣고서 그들은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어떻게 나아오는가 하면 설교자의 설교를 통해서 나아옵니다. 여기 이 두 제자는 바로 이런 경우라고 볼 수 있습니다.둘째, 제자들의 전도활동을 통해서(41)이 두 제자는 주님과 함께 그 날 저녁 혹은 밤을 함께 보냈습니다. 이 둘 중 한 사람이 안드레였는데, 그는 주님을 만나고 나서 자기 형제 베드로에게 가서 자기들이 메시야를 만났다고 말하고 그를 예수님께 데리고 갑니다(41). 베드로는 형제인 안드레의 열심 있는 전도를 통해서 주님을 만나게 된 경우입니다. 우리 가운데도 적지 않은 분들이 어떤 분의 전도를 통해서 주님을 만나게 되었을 것입니다. 한 사람이 예수님께 인도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어떤 신자들의 열심있는 전도와 또는 배후에서 기도하게 하는 일을 사용하십니다.셋째, 예수님의 직접적인 부르심을 통해서(43)이들과는 달리 예수님의 직접적인 부르심을 받은 사람도 있습니다. 빌립의 경우입니다. 주님은 갈릴리로 행하시다가 직접 빌립을 보시고 ‘나를 쫒으라.’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아마 빌립은 그에게 전도할만한 형제가 없었고, 주님께 인도해줄 수 있는 영적 지도자도 또 그를 위해서 기도해 줄 수 있는 아무도 없었던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정말 아무 인간적인 수단의 도움이 없이 직접 하나님을 믿게 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넷째, 제자의 전도활동과 주님의 직접적인 부르심을 통해서(45, 47)나다나엘 같은 사람은 베드로처럼 신자의 전도활동을 통해서 주님을 만날 기회를 가지지만, 또 빌립처럼 직접 주님께서 그를 상대하셔서 주님을 알게 되는 경우입니다. 그는 친구인 빌립의 전도를 받아서 그리스도께 인도함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그는 베드로와는 달리 그 마음속에 많은 의심을 안고 있습니다. 그는 가나 사람인데, 나사렛에서 매우 가까운 지역입니다. 그는 나사렛에서 선한 것이 나올 수 없고 메시야가 거기서 나왔다면 한 지역이나 마찬가지인 가나에 사는 자기가 모를 리가 없었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46).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가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며 이르시기를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47절) 하시면서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48절) 하니까 나다나엘이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이스라엘의 임그이로소이다(49절) 하고 따릅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시는 방법이 네 가지 방법뿐이겠습니까? 여러분은 어디에 속하셨습니까? 만인에게 만 가지 방법을 사용하여 주님께 불러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전능하신 은혜입니다.2. 예수님께서 사람을 부르실 때 그들을 대하시는 다양한 방법들이 내용을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주님께서는 사람들을 당신께로 인도하실 때, 그들을 대하시는 방식이 다 다르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첫째는 동기를 확인하신다(38).먼저 침례 요한의 두 제자를 살펴보십시오. 그들이 자기들의 선생의 증언을 듣고 예수님께 나아가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그냥 ‘잘 왔다’고 하시지 않으시고 ‘무엇을 구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38). 두 사람은 대답하기를, ‘랍비여, 어디 계십니까?’ 라고 묻습니다(38). 주님께서 이것을 물으신 의도는 예수님을 좇는 동기 혹은 목적이 무엇인지를 단도직입적으로 물으시는 것입니다. 돈이나 명성이나 안락함이나 보다 나은 삶이나 무엇을 얻기 위해서 내게 오느냐고 주님은 물으신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도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왜 주님을 좇으십니까? 정말 주님을 좇고 계시는 것입니까? 무엇을 얻기 위함입니까? ‘어디 계시느냐’고 제자들의 되묻는 질문은 주님의 주소를 알고 싶어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주님과 함께 있고 싶다는 그들의 마음을 표현하는 대답이었습니다. 주님과 교제하고 싶다는 말입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얻고자 하기 보다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신 주님과 함께 있고 싶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허락하시면서 ‘와 보라’고 하십니다(39). 그 두 사람은 그래서 그날 저녁 혹은 밤새 내내 주님과 함께 교제하는 축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성경이 그 시간을 ‘제 십시쯤(오후 4시) 되었다’고 기록한 것은 그 날이 거의 다 저물었다는 뜻입니다(39).둘째, 장래의 은혜를 약속하신다(42).이 두 사람은 그 날 주님과 함께 보낸 후에 큰 만족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자기들이 메시야를 만났다는 확신으로 그 흥분을 가눌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여기 두 제자의 이름 중 한 사람이 안드레인데, 베드로가 그의 형제입니다. 그는 당장 형제인 베드로에게 가서 자기들이 ‘메시야를 만났다’고 말하고 그를 예수님께로 데리고 갔습니다(41). 그런데 주님께서는 베드로를 보시자 마자, 말씀하시기를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말씀하십니다(42). 그의 본래 이름은 시몬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를 보시지 마자 그가 장래에 반석을 의미하는 게바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을 자세히 읽어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름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 말씀은 단지 이름이 바뀔 것이라는 것이 아니라 게바와 같이 흔들리지 않는 반석이 될 것이라는 매우 중대한 축복을 그에게 주신 것입니다. 이는 주님께서 처음보신 베드로를 다 알고 계신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행동입니다. 너는 지금은 흔들림이 많은 사람이지만 장차 흔들리지 않는 반석이 되리라는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고 나서도 흔들려서 떠날 수 있는 베드로의 성품에는 너무나 절실한 축복된 예언이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이 주신 게바라는 아람어의 헬라어번역입니다.셋째로 단호한 명령만 하신다(43).이들과는 아주 다르게, 빌립에게는 주님이 그냥 단순하게 명령만 주셨습니다. “나를 쫒으라.”는 것입니다(43). 어떤 설명이나 예언이나 다른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빌립은 그 명령 하나를 듣고는 주님을 쫒아 나섭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대하시는 경우도 있다는 것입니다.넷째, 편견을 제거해주시고 설득하신다(46~50).조금 복잡한 경우가 나다나엘의 경우입니다. 빌립이 주님을 만나고 가서 나다나엘에게 한 말은 이것입니다.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더라”는 것입니다(45). 주님의 인간적인 면이 여기에 나타납니다.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즉각적으로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는 선한 것이 날 수 없다고 말을 자릅니다(46). 그러니까 여기서도 빌립은 자기 실력으로 하려고 하지 않고 그냥 ‘와 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다나엘이 거부하지 않고 예수님께 가게 되는데 그의 마음에는 여전히 의심이, 믿지 못할 증거가 많습니다. 그것을 아시는 주님은 그가 자기에게로 오시는 것을 보시고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47) 라고 그를 공개적으로 칭찬하십니다. 나다나엘로서는 당황되는 일이 아닐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를 데려간 빌립도 주님이 나다나엘을 전에 만나셨나 하고 의구심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나다나엘은 자기를 아시느냐고 묻습니다.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48)라고 하는 말씀은 나다나엘로서는 더욱 놀라운 말씀입니다. 아마 나다나엘은 자기가 혼자 율법을 묵상하고 있었던 그 순간을 들킨 것 같은, 그리고 그 시간에 아무도 그곳을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그는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십니다.”(49)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직접 나다나엘처럼 쉽게 믿지 못하는 사람을 대하시면서 그의 편견을 제거해주시고 주님을 믿을 수 있는 증거를 주셔서 그를 설득하셨습니다.3. 예수님께서 부르시는 다양한 유형, 기질의 사람들우리가 본 바와 같이 예수님의 부름을 받은 사람들은 다 기질과 유형이 다른 사람들입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어떤 기질의 사람만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의지가 약한 사람, 그래서 무엇인가 기댈 곳이 필요한 사람만 주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천성적으로 무엇이든지 남의 말을 그리고 사람을 쉽게 잘 믿는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을 한 사람씩 한 번 살펴보십시오.첫째, 요한(야고보): 한 성질 하는 사람? 우뢰의 아들(막 3:17; 눅 9:53~54)오늘 본문에 예수님의 제자 요한은 등장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마는, 침례 요한의 제자 두 사람 중 한 사람의 이름이 안드레였고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제자는 누군가하면 바로 요한이라는 데에는 거의 모든 성경학자들이 일치된 견해를 가집니다. 왜냐하면 요한복음을 기록한 요한은 의도적으로 자기 이름을 한 군데에도 기록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안드레가 주님을 만나자마자 자기 형제 베드로를 주님께 인도한 것을 읽는데, 그럼 요한은 그 때 무엇을 했느냐? 요한도 자기 형제인 야고보를 찾아서 그를 예수님께 인도했을 것이라는 암시가 여기에는 깔려 있습니다. 단지 요한은 자기 이야기를 의도적으로 다 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이 요한과 야고보, 이 두 사람은 어떤 사람들인가? 성경이 보여주는 그들의 성품에 대한 묘사는 그들이 주님께로부터 얻는 별명과 관계가 있습니다. ‘보아너게’, 우뢰의 아들이란 뜻입니다(막 3:17). 왜 이 별명을 얻었는가는 누가복음 9:53~54에 나옵니다. 예수님과 함께 사마리아의 어떤 촌에 갔는데 그들이 예수님을 영접하지를 않자, 이 두 형제에게서 나온 말이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게 해서 이들을 죽여 버리자’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불같은 성격을 가진, 한 성질 하는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이것을 기록한 이유가 있습니다. 후에 요한은 어떤 사람이 되었습니까? 우리가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사랑의 사도’라는 별명으로 불리운 자가 되었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당신의 육신의 어머니를 그에게 부탁하셨습니다. 과거에 그가 이런 사람이었는가 하는 의심을 품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형제 야고보는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제일 먼저 순교의 제물이 된 인물입니다. 한 번은 예수님께 이 두 형제가 자기들의 어머니와 함께 나아와서 나중에 영광을 얻으시게 되면 자기들 중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해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정말 얄미운 일이고, 이기적인 청탁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하나는 사랑의 사도로, 하나는 좌우편의 영광이 아니라 순교의 영광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을 성경은 보여줍니다.둘째, 안드레: 계산적이고 실제적인 사람(요 6:8,9)안드레를 보십시오. 그는 조금은 계산적이고 현실적인 사람의 성격을 보여줍니다. 그는 주님을 만나자 마자 형제 베드로를 주님께 데려가는 행동을 보여주었습니다. 주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실 때, 떡과 고기를 가진 소년을 찾아서 주님께 데려간 사람도 안드레입니다(요 6:8~9). 이 소년을 주님께 데리고 가면서도 이렇게 말합니다. “이게 있긴 하지만, 이것으로 되겠습니까?”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미숙한 사람이었지만, 결국 안드레도 전설에 의하면 아가야 지방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X자형의 십자가에 달려서 순교하였다고 전해집니다. 그는 사람들을 주님께로 데려가는 사명을 끝까지 감당하다가 자기의 주님과 같이 십자가에 달린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계산적인 행동도, 또는 실제적인 행동이 될 수도 없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는 모든 계산과 모든 습성을 내려놓고 십자가에 오르는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셋째, 베드로: 충동적이고 열정적인 사람베드로는 성경에서 특별한 비중을 가지고 등장합니다. 그의 성격이 어떤지를 아는 것은 비교적 쉬운 일입니다. 주님을 만났을 때부터도 주님께서는 그의 흔들리기 쉬운 성격에 대한 암시를 주신 바 있습니다. 그는 충동적이고 열정적인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순간 나서는 것은 언제나 그의 몫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형제 안드레와는 달리 계산적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오히려 이 사람을 반석이라고 하셨고 제자들 중에서도 리더십을 발휘하게 되는 역할을 하게 하셨습니다. 베드로전서와 후서를 쓴 베드로에게서 우리는 베드로의 충동적인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는 초대교회의 반석 같은 장로였고 사도였으며, 모든 성도들이 그에게 기댈만한 그런 지주가 되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마지막 순간까지 주님을 배신하는 부끄러운 일을 저지르게 되지만, 놀라운 은혜의 회복을 경험하고는 네로의 박해 때 로마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주님을 그의 성격 그대로 정말 단순하게 그리고 뜨겁게 사랑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모든 부족함은 주님을 만난 후에 점점 온전케 되어서 거룩한 사도로 그의 삶을 마감하는 영광을 얻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넷째, 빌립: 회의적이고 감각적인 사람(요 6:5~7)빌립은 사실 계산이 빠른 사람입니다. 주님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기 전에 그에게 얼마나 있어야 이 사람들을 다 먹일 수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요 6:5~7). 이는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그의 성격을 짐작하게 합니다. 그의 대답은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조금씩 나누어주어 먹게 해도 200 데나리온 어치의 떡이 필요합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또 그는 주님께서 떠나신다는 말씀을 하셨을 때, 빌립은 주님께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구합니다. 이제까지 아버지를 말씀하시는데 그 아버지를 자기도 보고 싶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감각적인 요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어쩌면 도마와 같이 보아야 믿겠다는 것입니다. 체험을 주면 믿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아마 주님의 직접적이고 단호한 명령이 필요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주님은 그렇게 그를 제자로 삼으셔서 결국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그는 히에라폴리스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를 하였다고 합니다. 아무리 회의적이고 감각적이고 계산적인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는 결국 주님께 모든 것을 드리게 되고 영광스러운 마무리를 하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인물입니다.다섯째, 나다나엘: 정직하며 명상을 즐기는 내성적인 사람이제 마지막으로 살필 인물은 나다나엘입니다. 그는 주님의 말씀대로 간사한 것이 없는 정직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율법을 묵상하기를 좋아하는 내성적인 사람인 것 같습니다. 다른 복음서에 그의 이름은 바돌로매로 기록이 되어있는 사람입니다. 그도 역시 다른 사도들과 마찬가지로 주님의 승천 후에 복음을 전하였는데, 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그는 아라비아와 인도 지방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껍질이 벗겨지는 고통 속에서 순교를 했다고 합니다.4. 교훈첫째, 중요한 것은 회심의 체험이나 방법이 아니라 지금 구원의 은혜를 누리고 사는 것이다.오늘 본문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중요한 것은 회심의 방법이나 체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모태신앙이 나으냐? 죽다 살아난 간증을 가지고 믿는 것이 좋으냐? 아무도 그 방법으로써 판단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지금 구원의 은혜를 누리고 살고 있으며,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체험이 없다고 너무 낙심하지 마십시오. 체험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내가 주님을 믿고 사랑하고 섬기고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아닙니까? 과거의 체험에만 머물지도 마십시오. 문제는 지금 그 체험 때문에 내가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께 헌신하여 그 구원의 은혜를 풍성하게 누리고 살아가는 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만 가지 방법으로 만인을 부르십니다.둘째, 예수님은 미숙한 사람들을 부르셔서 영광의 그릇으로 만드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예수님은 미숙한 사람들을 부르셔서 영광의 그릇으로 만들어내시는 전능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우리는 이 본문에서 또한 보게 됩니다. 처음에 제자들이 부름을 받을 때의 모습은 다 어설픈 모습들입니다. 심지어 복음서에서 우리가 만나게 되는 제자들의 모습도 만들어진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결국을 보십시오. 그들은 다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냈고 영광의 그릇으로 주님의 손에 붙들려서 부끄럽지 않게 드려졌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은혜를 그들에게 베푸셨습니다. 바로 성화의 은혜입니다. 이것이 오늘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 모두에게 동일하게 적용이 되는 것임을 아십니까? 비록 내가 오늘도 변하지 않는 것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좌절하기도 하고, 낙심하기도 하지만, 그러면서 ‘주님 제가 정말 주님을 믿는 것입니까’라고 물을 때도 있지만, 이런 연약한 우리들을 부르셔서 당신의 영광의 그릇으로 만드시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은혜, 은혜일뿐입니다.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부르실 때 ‘게바라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를 잠재력의 관점에서 보셨습니다. 그 잠재력은 실현될 수도 있고 될 수도 없는 개연성이 있는 잠재력이 아닙니다. 전능자가 보시는, 전능자께서 선언하시는 잠재력입니다. 그것은 장래의 은혜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하나님께서는 저를 오늘 실패하는 저의 모습으로 보시지 않고 말씀하십니다. “비록 네가 오늘도 실패했지만, 기억해라. 장차 네가 게바라 불리울 것이다”라고 말씀해주시는 것입니다. 감당할 수 없는 은혜입니다. 저는 명백한 죄인인데도, 심판장이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는 그리스도 안에 숨기어진 의인이다. 내 앞에서 너는 죄를 지은 적이 없는 사람이다”라고 말씀해주십니다.제자들의 마지막 모습을 보십시오. 어디서 그런 영광스러운 변화가 일어났습니까? 오늘 본문에 그 해답이 있습니다. 비록 방법은 달랐지만, 그들 모두를 예수님께서 부르셨다는 사실입니다. 그 부르심은 바로 전능자의 부르심이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그 부르심을 받으셨습니까? 오늘 여러분이 이 자리에 와 앉아 계시다는 것이 하나의 은혜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오래도록 변하지 않는 자신의 모습 때문에 절망하면서 주님께 나아가는 자들에게 주님은 장래의 은혜를 약속하십니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내 안에 이런 영적인 것들에 대한 고민과 안타까움과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5.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다!(요 6:44; 롬 8:28; 11:29)하나님의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끌지 않으시면 아무도 예수님께 나아올 자는 없습니다(요 6:44). 하나님은 부르신 자들을 의롭다고 하시고 의롭다고 하신 자들을 영화롭게 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여기에 우리의 구원의 근거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