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교정은 제가 했습니다. 베로니카씨 2차 교정 부탁합니다.
망태기/3학년 박복희(미카엘라)
레지오 회합 때 수녀님께서 해 주신 훈화 말씀이 떠오릅니다.
어느 시골에 할머니와 손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영성이 깊으신 분으로서 매일 미사를 열심히 다녔답니다. 날만 새면 성당에 다녀오시는 할머니를 어린 손자는 못마땅하였습니다. 함께 놀아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할머니는 여느 날과 다름없이 그 시간에 성당에 다녀오셨습니다. 그런 할머니를 손자는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할매는 성당에 가면 그렇게 재미가 좋아”라고 물었습니다. 할머니는 “응, 아주 재미있고 즐겁단다. 신부님께서 좋은 말씀도 많이 해주시고 기쁘게 해 주신단다.”
그러자 손자는 “그럼 할매는 성당에서 무엇을 배우고 그렇게 재미있고 즐거운지 말해 봐.” 하였습니다. 할머니는 갑자기 말문이 막혀 답변을 못했습니다. 무어라고 말을 하기는 해야 하는데 성당에서 신부님께 들은 말씀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잠시 생각한 할머니는 손자에게 망태기를 들려주며 냇가에 가서 물을 가득 담아 오라고 시켰습니다. 손자는 냇가로 가서 열심히 물을 담았습니다. 하지만, 망태기 안에는 물이 고이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해도 안 되어 저물녘에 그냥 터덜대며 집으로 와서 “할매야, 아무리 담아도 망태기에 물이 담기지 않아요.”했데요.
그러자 할머니께서 그 속에 무엇이 남았는지 보아라고 하셨데요. 손자는 빈 망태기를 이리저리 둘러보고선 “아무것도 없는데 망태기만 깨끗해 졌네요.”하였습니다. 그러자 할머니께서 “바로 그것이야, 내가 매일 성당에 가는 것도 이 망태기와 같단다. 하느님의 말씀을 자꾸자꾸 듣고 기도를 열심히 하면 우리의 몸도 깨끗이 정화된단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를 돌아봤습니다. 내 주변의 친구나 신앙을 모르는 사람들이 왜 성당에 열성적으로 다니는지 물을 때마다 변변히 답변을 못해서 그저 성당에 가면 마음이 편해서 좋다고 밖에 말을 못했습니다. 이제는 꼭 집어서 설명할 수 있어서 너무 기쁘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성당에서 미사를 통해 주님의 은총이 말로는 표현 할 수 없었던 감동과 가슴 뿌듯한 뭔가가 내면에 흐르고 있어 행복합니다. 그래서 매일 복음 말씀을 들으면서 내면을 정화하는데 더 힘쓰리라 다짐해 봅니다.
길손 발간에 즈음하여/졸업생 윤봉중(베드로)
’83년도 신암동 수녀원 내에서 시작한 ‘어머니 성서모임’은 ’85년도에 그 명칭을 ‘어버이 성서모임’으로 바꾸었고 ’87년도에 ‘아버지 성서모임’이 개설되어 남성들도 성경을 배울 수 있었으며 ’89년도에는 신약반이 개설되었다. 나는 구약 3기생으로 입학하여 ’91년도에 구약과정을 수료하면서 구약 졸업생 2, 3기생을 합쳐 신약 2기생으로 진급하였다. ’89년도 입학 할 때는 지원자가 많아 집사람이 파티마병원 교육관 앞에서 밤새워 줄을 서고 번호표를 받아 등록할 정도로 경쟁률이 높았다. 그 당시 대구·경북 인근에는 성경공부를 체계적으로 가르치는 곳이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우리 학년에는 대전과 서울에서 기차를 타고 오신 형제분도 있었다.
’91년도 봄, 신약과정을 지도하던 김 라파엘라 수녀(제3대 책임)님이 ‘성서모임’을 통해 나눈 신앙체험과 성경을 배우고 각자의 삶이 어떻게 변화되고 있는지? 또 여러 자료와 학생들의 근황을 알려줄 ‘소식지’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하셨다. 몇 차례 의논 끝에 ‘회지’를 발간하기로 결정하였고 그 해 봄부터 시작한 회지는 10월에 가서 ‘길손’ 창간호가 발간되었다.
회지의 이름을「길손」으로 정한 김 라파엘라 수녀님은 아브라함에게 ‘길손’으로 모습으로 찾아와 말을 건네시고 힘을 주신 하느님(창세, 18)과 스승을 잃고 실망하며 귀향하는 엠마오의 제자들에게 숨은 ‘길손’의 모습으로 나타내신 주님(루가 24)을 뜻하고, 또 우리 자신도 인생의 ‘길손’으로 우리는 신·구약 성경을 통하여 ‘길손’으로 나타나신 주님을 따라 그분과 함께 광야의 나그네 길을 힘차게 걸어가야 하는 ‘길손’이기 때문에 회지의 이름을 두 가지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길손」으로 지었다고 그 배경을 말씀하셨다.
사진과 원고를 모으고 성서모임의 여러 소식을 정리하는 등 세심한 일은 라파엘라 수녀님이 거의 맡아 주어 발간에 큰 어려움이 없었다. 나는 창간호부터 10호까지 편집책임을 맡아 ‘길손’ 발간을 도왔다. 특히 ’93년도에 ‘어버이 성서모임’ 창립 10주년을 맞아 졸업생 2,500여 명, 재학생 1,100여 명을 대상으로 실태조사를 하였다. 많은 시간과 힘이 들었지만 성서모임이 하느님의 말씀을 통한 평신도 봉사자 육성에 어느 정도 이바지하였으며, 또 학생들의 인적사항, 교회활동, 신앙생활 등을 소상히 파악함으로써 성서모임이 교구 내 신심단체로서의 위치나 역할을 재조명하는 데 도움이 되어 보람이 있었다.
성서모임 교육관이 ’95년도에 현 경산으로 옮긴 후에도 많은 봉사자들이 먼 거리까지 오시어 길손 발간을 위해 많은 시간을 희생하면서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던 것이 특별히 기억에 남는다. 나는 그 후 직장 근무지가 상주로 발령 나면서 10년 간 애정을 쏟았던 ‘길손’ 편집을 후배들에게 부탁을 하였는데 그 후 두 차례 더 발간되다가 여러 가지 사정으로 중단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몹시 아쉬워했다. ‘길손’은 책임수녀님들의 관심과 편집 봉사자들의 희생 없이는 발간이 어려웠다. 이제 창립 30주년을 앞두고 ‘어버이 성서모임’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유능한 봉사자가 모이면 다시 ‘길손’이 속간될 것이라는 희망을 가져본다.
신앙 여정/3학년 학생회장 김상석(아우구스티노)
2011년 여름휴가를 하느님과 함께 떠나는 3박4일의 신앙 여정을 다녀왔습니다.
어린 시절, 소풍을 가기 전 설렘과 즐거움으로 가득 찬 것과는 달리 하느님과 떠나는 여행은 긴장과 두려움으로 가득 찼습니다. 교육 내용 및 일정은 전혀 모른 채 참석한다는 것이 더욱더 긴장되게 했습니다.
제 나름대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무언가 부족하다는 생각을 했고, 과연 나의 신앙생활은 올바른가? 라는 의문을 품게 되면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에 대한 혼란이 오게 되었습니다. 그런 고민 중에 ‘꾸르실료’교육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교육은 저에게 영적인 센세이션을 준 교육이며 참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방향과 목표를 제시 해 준 체험이었습니다. 아집과 교만으로 가득 찬 세속적인 삶,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우월적인 삶, 가장이라는 이유로 호통만 치는 권위적인 삶, 물질 만능주의적인 삶, 이 모든 세속적인 매너리즘에서 벗어나 영적인 자유를 얻은 것 같아 너무나 행복했습니다. 저의 행복은 곧 가정의 화목과 평화로움으로 이어졌으며 진정한 성가정의 모습으로 변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저의 꾸르실료 교육은 한 마디로 눈물의 체험이었습니다. 눈물이 이렇게 아름답고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지 미처 몰랐습니다. 하느님과 친교 하는 시간에 드디어 말라있던 눈물샘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어깨를 들썩이며 통곡하였으며 아직도 그 날 그 시간은 잊지 못할 소중한 체험이 되어 가슴 깊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 눈물은 하느님께 회개하고 통회하는 눈물이었고, 매사에 감사드리지 못한 죄인의 눈물이었으며, 가족들에게 권위만 내세운 못난 가장의 눈물이었습니다.
교육 수료 시 마중 나온 큰아들을 안고 눈물을 흘렸으며, 성질 더러운 신랑 만나 마음 고생한 아내를 안아 주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 눈물은 진정한 나의 참회의 눈물이 아닌가 싶습니다. 저의 이런 모습에 아들과 아내는 놀랐으며 저의 눈물을 보고 용서했으리라 생각합니다.
본당 ‘꾸르실리스따’ 선배님들의 환영식에서는 바보같이 울면서 이렇게 말 했답니다. "하느님 아버지 품에 안겨서 우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습니다."라고 말입니다.
부모님 세대는"남자는 태어나서 세 번 울어야 한다."라고 강하게만 키우려고 했지만, 저는 이제부터 부드러움을 가미한 여유로움으로 조화를 이루려고 합니다. 자녀들 성적 나쁘다고 성적표를 찢는 일도 없으며, 아들이 머리 길다고 이발기로 미는 일도 없으며 공부하라, 복장 단정히 하고 다녀라 등 잔소리하는 것이 자식을 사랑하고 바르게 키우는 것이라 여겼는데 잘못된 생각임을 깨우쳐 주었습니다.
그래서 자식들을 독립된 인격체로 사랑으로 대화하며 이해하니 닫혀있던 마음의 문이 조금씩 열려, 어린 시절 마냥 좋아하고 사랑하는 아빠로 다가가고 있습니다.
이제 저는 감사의 눈물로 살려고 합니다. 주님을 알게 되어 감사드리고, 성가정으로 살 수 있어 감사드리고, 가족 모두가 건강하고 바르게 커가는 애들을 보면서 감사드리고, 그 외 모든 것에 감사드리며 눈물을 흘리겠습니다. 눈물을 흘리는 것이 무슨 자랑이라고 할지 모르겠으나 눈물은 어떠한 말보다도 저의 감정을 여과 없이 진솔하게 전달되리라 믿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오롯이 받아드리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또한 내면으로부터 흐르는 눈물은 영적인 정화의 눈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성직자들은 저희의 삶을 살 수 없고, 저희도 성직자처럼 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제 안에는 제가 없고 그리스도로 가득 채우기 위해 기도드리겠습니다. 하느님을 바르게 알고, 하느님을 바로 믿고, 하느님 말씀대로 행동하는 것이 참 그리스도인 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내 가슴속 깊이 그리스도의 불씨가 자리 잡아 이 불씨를 잘 살려서 성령으로 활활 타오르게 하겠습니다.
저는 이제 꾸르실료 교육의 예찬론자가 되어 만나는 형제자매님들에게 하느님의 은총을 체험 해 보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저의 변화된 모습을 보고 하느님과 함께 떠나는 여행에 다섯 분이 동참할려고 하고 있습니다.
꾸르실료 교육의 값진 체험을 많은 형제자매님들과 함께 나누고 싶으며, 이상, 순종, 사랑으로 그리스도 복음화에 전진하겠습니다. 또한 겸손하고 겸허한 자세로 주님께 영광 돌리는 "꾸르실리스따"가 되도록 늘 기도 드리겠습니다.
‘주님!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라고…….
2013년 입학식 축사
찬미 예수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명문 어버이성경학교에 입학하심을 진심으로 축하드리며 환영합니다. 하느님 말씀을 갈망하여 입학하였으나 즐겁고 기쁜 가운데 염려가 되는 부분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리 길지 않은 시간에 그런 염려는 해소되리라 확신하며 어버이성경학교에 입학한 것은 주님의 인도하심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 어버이성경학교는 30년의 역사와 전통을 가진 학교입니다. 이곳을 졸업한 선배님들은 본당에서 사도직을 봉사와 헌신적으로 수행하며 열심히 살아가고 또 말씀을 전하는 일꾼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경학교는 우수한 강사진으로 구성된 수녀님들의 열정과 사랑으로 하느님 말씀을 전해왔기 때문에 명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신앙생활을 하시면서 영적갈증을 느낀 적이 있을 것입니다. 어버이성경학교는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하느님 말씀에서 영적생명을 키우기 위해 공부하는 곳입니다. 말씀 속에 주님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학년이 거듭될수록 하느님을 바로알고, 바로 믿고 ,하느님 말씀대로 행하는 우리가 될 것입니다.
오늘 입학하시는 형제자매님들께서는 한 분도 낙오자 없이 자랑스러운 명문 어버이성경학교의 졸업생이 되시어 그리스도 복음화를 위해 함께 노력합시다.
2013년 3월 2일 재학생 대표 김 상석 아우구스티노
여행지에서 받은 은총/4학년 이명자(엘리사벳)
지난 10월 우리 부부가 6박 7일 예정으로 제주도로 여행을 가기로 했다.
막상 떠나려고 하니 걱정이 되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 중에서도 성경학교 출석이 문제가 되었다. 한 번 빠지는 것이지만 반의 봉사자의 일을 맡고 있어서 쉽게 빠질 수가 없으니 더욱 그랬다. 반의 자매님에게 일일 봉사 일을 부탁하고 마음 가볍게 떠날 수 있었다. 평소에 배우는 것이 몇 가지 있어도, 주님을 따르는 일이 신자로서 가장 핵심적인 일이지만,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는 여행을 좋아하는 남편의 청을 듣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나도 남편보다 더 가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우리 승용차를 타고 전남 장흥군 노력도 항에 가서 배에 승용차를 싣고 가서 제주도 성산포 항으로 갈 계획이었다. 그리고 엿새 동안의 계획을 치밀하게 세우고 인터넷으로 제주도에서 우리가 머물러야 할 곳과 관광해야 할 곳을 연계해서 가까운 민박할 집을 열심히 찾았다. 수많은 민박집의 명단이 있는 가운데 몇 곳에 전화를 해서 예약을 하려니 사흘씩 따로 예약을 해야 할 형편이었다.
며칠 동안 여행준비를 했다. 주일 미사참례 후, 오후에 노력도 항을 출발하는 오렌지호를 이용하여 여행지로 가기 위해 집에서 출발했다. 열심히 달려 출발시각에 충분히 여유를 두고 도착했는데도 줄지어 승선을 기다리는 승용차들과 승객이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많았다.
오렌지호가 노력도 항에서 자기를 기다리고 있던 모든 것을 품에 싣고 거대한 몸집으로 바다 위를 미끄러지듯 항해를 했다. 창 너머 지는 해를 바라보는 내 마음은 여행의 즐거움에 설레었다. 손에 들려진 묵주로 뜻있는 여행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나도 모르게 기도를 바쳤다. 풍랑도 가라앉힐 수 있는 능력을 가지신 주님이시기에 모든 것을 주님께 의탁했다. 바다는 의외로 잔잔했다.
주위에 어둠이 깔려질 쯤, 제주도 성산포 항에 도착했기에 곧장 예약된 민박집을 향해 달렸다. 한 시간 넘게 달려가니, 제주도의 집들이 다 그렇듯이 야트막한 언덕 같은 곳 좁은 길로 올라갔더니, 아담하게 지어진 3층 양옥집으로 경관이 좋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60대로 보이는 안주인님이 웃음 띤 얼굴로 반갑게 맞아주셨다. 우리가 머무를 방으로 안내를 해 주셨다. 방에 비치된 여러 가지 소품이 모두 아주 깔끔하고 아주 특별하여, 안주인님의 센스가 훌륭하다고 생각되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우리는 한라산 등반을 하기로 했는데, 주인아주머니께서 오셔서
“내일 아침식사는 우리하고 같이 합시다,”
만류도 해 보았지만 막무가내라, 우리의 여행 계획을 바꾸면서 호의에 응했다.
다음 날 아침 주인집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면서 깜짝 놀랐다. 옆방에 손님인 여자 분이 와 계셨는데, 첫 눈에 그분은 십여 년 전 같은 직장의 동료이면서 선배였다. 서로가 첫 눈에 알아보고 반갑게 인사를 했다. 그 선배님은 혼자 여행을 왔다고 했다. 그것도 작가와 독자로서 알게 되어 이곳에 연락이 닿아서 이틀 전에 왔다고 했다.
주인아저씨와 아주머니와 선배와 같이 식사를 하면서 담소를 나누다가 그 선배님도 교우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주인 내외분도 신실한 믿음을 가진 교우이셨다. 그 때부터 우리는 호칭도 ‘형제님, 자매님’으로 바뀌면서 서먹함도 사라지고 마치 오랫만에 만난 친척 같은 분위기로 변해갔다. 안주인인 자매님이 글을 쓰시는 작가로서 등단을 했다고 했다. 단행본도 내시고, 지금도 글을 써서 잡지사로 보내기도 한다고 했다. 우리는 오래된 친척들 같이 맛있게 식사를 했다.
형제님께서 올레 길로 가거든 김대건 신부님 기념관이 잘 조성되어 있으니 꼭 한번 가보라고 하셨다. 그곳에는 김대건 신부님이 중국에서 신부 서품을 받고 라파엘호를 타고 돌아오시다가 풍랑으로 인해 제주도 해안에 표착하신 것을 기념하는 곳이라고 했다.
사흘 밤을 지내고 다른 민박으로 옮기면서도 신부님 기념관에 꼭 가 보기로
마음먹었다. 다섯째 날에 제주올레길 축제 11코스 걷기에 참가하고 ,여섯째 되는 날에는 올레길 12코스 걷기에 참석해서 거의 종점에 도착했을 때, 뜻하지 않게 우리 앞에 형제님이 소개하셨던 김대건 신부님 표착기념 성당, 실물크기의 라파엘호가 전시되어 있다는 유물기념관이 나타났다. 마음 같아서는 그곳에 들어가 찬찬히 살펴보고 묵상도 하고 싶었으나, 시간에 쫓기어, 성당에만 들어가 잠시 묵상하고, 다음에 다시 오기로 결심했다. 기념으로 묵주만 구입해서 아쉬움을 간직하고 기념관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해는 벌써 서산으로 뉘엿뉘엿 넘어가고 그림자를 길게 드리웠다.
제주도의 수많은 민박집 중에서 우리가 어떻게 이곳을 선택했으며, 하느님을 따르는 교우 분들과 만나서 며칠 동안이나 이웃할 수 있었다는 것은 주님의 뜻이었다. 여행하는 동안 내내 즐겁고 행복했다. 나의 기도를 주님께서 들어 주시고 은총을 내려주셨기에 하느님의 품에서 하나 되는 분들을 만나 과분한 대접도 받았다는 생각으로 주님께 정말 감사드렸다. 남편에게도 고마워하면서.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루카 21,34)
나는 어디쯤 와 있을까?/ 4학년 오옥희(안젤라)
인생 오십 대 초반의 나이를 흔히들 태양과 비유해서 여름 해가 길 때는 오후 7시 경의 시간과 비교하고 겨울 해가 짧을 때는 오후 4시경에 비교한다. 사람의 평균 수명이 칠팔십이라 해도 많은 세월을 살아왔음에는 틀림이 없다. 요즘 사람들은 70세가 환갑이라고 하면서 61세의 환갑잔치를 기피한다. 외형은 70이라 해도 옛날 61세의 환갑 모습이니 말이다. 그렇다 해도 의학의 혜택이나 철저한 건강관리로 생명을 연장시킬 수는 있지만 죽음을 피해 갈수는 없다.
그러나 신앙인들은 영원한 삶을 믿는다. 우리 주님이신 그리스도를 뵙게 됨도 믿는다. 그렇게 믿고 지금까지 살아온 나는 주님을 뵈올 때, 주님이 물으시면 어떻게 살았다고 대답할까 하고 깊은 생각에 잠기면서 대답이 궁색함을 느낀다.
과연 나는 주님의 모습대로 살았다고 할 수 있을까. 주님이 가르쳐 주신대로 사랑하면서 살았다고 할 수 있을지, 많은 날들을 봉사하면서 남들을 위해서 살았다고 할 수 있을지. 나의 명예와 치부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엄청난 노력을 했다고 말씀드릴까. 그렇게 해서 얻은 부는 다른 죄를 짓게 하고 조그만 명예는 교만함과 남을 업신여기는 죄로 이끌지 않는가. 이렇게 살아온 인생이 석양에 와 있다면 소스라쳐 정신을 가다듬어야 하지 않을까?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재조명해야 할 것 같다. 고해 성사 때 매번 외우는 통회의 기도를 되풀이하면서 깊이 반성할 때 죄를 짓지 않고 사는 것이 어쩌면 가능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니 일상생활의 가벼운 말다툼이나 흔히 저지를 수 있는 죄 이상의 죄는 안 지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세상에서 잘 살았다고 주님께 말씀 드릴 수가 있을까에 대해서도 깊이 묵상케 한다. 우리 주위에서 사는 사람들의 모습은 천태만상이다. 어떤 이는 자기의 모든 것을 주님께 봉헌하고 주님만을 위하여 사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헐벗고 굶주린 이들을 위해 헌신하며 그들과 함께 사는 이들도 있다.
일생을 먹지도 입지도 못하면서 모은 재물, 자기 생명 같은 재물을 하느님 사업에 봉헌하거나 사회에 환원하는 이들도 있다. 외롭고 고독한 이들과 같이 하면서 이들을 위로하며 사는 이들도 있다. 이들의 세상사는 모습은 하느님 보시기에 좋고 모든 사람에게 표양이 되는 삶의 모습이다.
나의 삶의 모습은 이들의 사는 모습 어디에도 해당되지 않는다. 그렇게 살 수 있기 위해 내 삶을 재조명하고 재평가해본다. 내가 살아온 모습이 이렇지 못했더라도 석양에서 내 생활을 재정비한다면 아침 해처럼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어디쯤 와 있을까?
제 십자가를 지고/졸업생 정환수(바실리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코 8,34) 10년 전 어버이성경학교 신약 반 강의실을 울림으로 가득 메우던 말씀입니다. 그것은 충격이었고, 강의 시간은 온통 그 말씀만으로 채워져 메아리로 제 귓가를 맴돌았습니다.
제가 세례를 받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입니다. 저희 가족은 부모님과 두 애들 그리고 저희 부부, 3대가 함께 세례를 받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 당시 저는 세례를 받는 것에 별로 관심이 없었습니다. 가족회의 결과 성당에 가면 된다기에 그 정도는 할 수 있다는 생각에 형식적으로 신자가 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런데 세례를 받고 얼마 뒤에 생각지고 않은 공안사건에 휘말려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만약 재판 결과가 잘못된다면 다니던 직장도 잃게 되는 상당히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그러한 일을 알게 된 대부님과 본당의 수녀님, 그리고 가까운 교우들이 많이 걱정과 기도에 힘입어 저희 부부는 재판이 진행되는 6개월 정도를 하루도 거르지 않고 미사에 참례하며 묵주를 손에서 놓지 않았습니다.
또 1년 뒤에 큰 교통사고가 일어나 많이 놀랐고 걱정하였으나 주변 교우들의 기도와 지인들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합의를 보고 생활에 안정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저희에게 새로운 시련이 왔습니다. 둘째 애에게 어려운 병이 생겼습니다. 정말 감당하지 못할 시련이었고 눈물밖에 나지 않았습니다. 도저히 감당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전에 읽었던 성경‘욥기’가 생각났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저한테서 모든 것을 빼앗아 가는 것 같았습니다.
가깝게 지내는 교우들은 안타까움에 함께 울었고, 같이 기도해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하느님께서 바실리오 너희 부부를 정말 사랑하신다. 주님 십자가의 은총이 정말 크시다.’라며 위로하여 주었습니다. 솔직히 그때는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미웠습니다. 무슨 하느님의 사랑이 이렇습니까? 이런 것이 하느님의 사랑이라면 정말 받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런 가운데 신앙은 식어가고 믿음은 흔들렸습니다. 다니던 어버이성경학교도 흥미를 잃어갔습니다. 나눔 시간에는 핑계를 대고 참석하지 않을 때가 많았고 같이 다니던 아내가 가방만 나눔 실에 놓아둔다고 하여 가방만 출석하는 사람이라는 말도 들었습니다.
사실 제가 하느님을 알게 되기 전까지는 철저한 무신론자였습니다. 최소한 이념적으로는 그랬습니다.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그래야만 제가 가지고 있는 생각이 논리적으로 맞았습니다.
그러나 ‘제 십자가를 지고’라는 주님의 말씀이 저의 뇌리를 강타한 3학년 어느 날, 그때까지도 하느님을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논리적으로만 해석하려 했던 제 생각의 어리석음과 교만과 아집에서 출발되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후부터 변화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시작합니다. 인간의 힘은 무한하며 인간의 협동과 단결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확신하던 제 생각이 잘못된 것임을 인식하고, 인간은 신앙 안에서만이 참다운 사랑과 행복을 누릴 수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깨달음은 저에게 찾아온 시련 또한 그것을 받아들이는 생각이 달라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저는 분명히 믿고 확신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절대로 제가 지지 못할 십자가는 주지 않으신다.’ 그것은 저에게 크나큰 힘이었습니다. 자칫 주님 십자가의 무게를 못 이겨 팽개쳐 버리거나 주일이나 적당히 지키며 하느님의 일보다 세상일에 더 관심을 가지는 엉터리 신자가 될 번한 저에게 하느님께서는 말씀을 통하여 기회를 주셨던 것입니다.
이제 분명히 압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저와 함께 계시며 세상 무엇보다 사랑하십니다.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어려울 때 언제든지 저의 손을 잡아 주셨습니다. 재판을 받을 때도 교통사고가 났을 때도, 그리고 저희 애가 아플 때에도 극단까지 내몰지 않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저에게 십자가를 주심으로 저로 하여금 모든 죄악의 근원인 교만을 깨닫게 하셨으며 끊임없이 자신을 채찍질하여 주님 십자가의 참된 의미를 깨달을 수 있도록 저를 사랑으로 돌보아 주셨고 세심하게 배려하셨던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있으며, 하느님께서는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1요한 4,16)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 자신을 내놓으셨습니다. 십자가는 무서운 것도 무거운 것도 아닌 예수님의 인간에 대한 크신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현존하고 계십니다. 저는 세상 이치가 모두 성경 안에 있음을 알게 되었고 또한 성경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들이 어쩌면 하나같이 이 천년 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 모습과 똑같은지 놀라웠습니다. 이 모든 것이 어버이성경학교로 불러주신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그 후 ‘길손’의 편집장을 맡고 교지를 편집하면서 또 본당의 어떤 일을 함에 있어서 먼저 하느님의 뜻을 찾게 되었고 성령께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심을 믿게 되었습니다. 주님 십자가의 참된 의미를 깨닫고 흔들리던 제 신앙을 바로잡아 주신 하느님과 어버이성경학교 수녀님들께 감사드립니다.
돌아보니 은총이었네/4학년 위한칠(베드로)
군 입대 전 서울에서 시작한 직장생활은 서투름과 외로움의 연속이었다. 낯설고 외롭던 겨울 어느 날, 성수동 성당 마당 고목에 모셔진 성모님 상을 바라보며 성당 밖 인도에 서서 외로운 나를 지켜 달라고 기도를 드렸다. 당시 외갓집과 엄마와 여동생들은 장로교회에 다니고 있었는데 왜 나는 성모님께 기도 드렸는지…….
제대를 하고 울산에 있는 대기업에 다니던 친구의 권유로 입사 시험을 보게 되었는데 엄마와 큰 여동생은 나를 위해 장로교회에서 새벽기도를 드리곤 했었다. 그 덕분인지 입사 시험에 합격하고 어설픈 신입사원 생활을 시작했었다. 직장생활에서 안정을 찾아가고 있을 때 직장 선배에게서 맞선을 보라고 했다. 집은 대구에 있고 성당에 다니는 아가씨라고 하기에 우리 집은 장로교회에 다니기 때문에 어렵겠다고 했다. 직장 상사는 이런 사정을 알고 천주교와 개신교의 종교적 뿌리에 대해 설명해주었으며 하느님을 믿는다는 점에서 다르지 않다고 했다. 이에 용기를 얻어 선을 보았고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아내는 어려서 세례를 받고 천주교 집안에서 자랐고 성당을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관면혼배를 통해 가정을 이루었다. 결혼 후 가톨릭신문을 통해 통신교리를 이수했고 신부님께 ‘결혼 때 약속을 지키려고 통신교리를 이수했으니 세례를 달라.’고 청했다. 그러자 신부님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이 신앙인데 인간적인 약속을 위해 세례를 받으려 하는 것은 마음의 자세가 틀렸다.’고 했다. 그때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 그저 세례를 빨리 받고 싶은 마음이 커서였다.
그 후 예수님을 배반하였으나 되돌아온 베드로 사도를 본받아 세상살이가 힘들어 흔들리더라도 주님께 돌아오겠다는 결심으로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 결혼 후 세례를 받았지만 신앙생활은 쉽지 않았다. 개신교 신자였던 형제들은 천주교 신자가 된 나를 배신했다고 말했고, 아내는 따가운 시선을 받아야 했다.
직장생활과 신앙생활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것도 어려운 일이었다. 일요일에 미사 참례를 하니까 직장 모임에 빠지게 되자 성당에 다니더니 사람이 변했다는 동료들의 비아냥거리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이런 갈등 때문에 나는 아내가 성당 활동을 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며 아내의 성당 활동까지 힘들게 만들었다.
이런 방황을 하는 동안 하느님께서는 두 딸을 주셔서 생활의 안정을 찾게 해 주셨다. 아내와 나는 레지오 활동을 시작했다. 아이들과 함께 야트막한 좁은 숲길을 지나서 성당까지 걸어가곤 했었다. 그때의 생활은 너무나 행복했고 참으로 은혜로운 시간이었다.
하지만 살던 동네를 떠나 회사사택에 들어가면서 신앙생활은 위기를 맞게 되었다. 회사 간부급 중에서 천주교 신자들이 있었는데 그 간부에게 잘 보이는 것이 싫다는 구실로 성당을 멀리 했고, 겨우 주일만 지키는 신자로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아내가 미사시간을 함께 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레지오는 그만두고 성당생활에는 소극적인 나와는 달리 아내는 꾸준히 신앙생활을 이어갔다. 덕분에 가끔 아내와 함께 성지순례를 다니기도 했었다. 그러나 점점 신앙생활과 반비례하여 등산이나 낚시와 운동에 빠져들었다. 살면서 힘들 때는 주님께 매달리면서 돌아서면 잊어 버렸다. 주일 미사에만 의무적으로 참석하는 신자가 되었다.
그러던 중 퇴직을 앞두고 여러 가지 시련을 거치게 되었고 인간의 힘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두려움과 고통 앞에서 하느님께 온전히 내 자신을 맡기고 매달리고 싶었다. 우선 성경 말씀을 듣기 위해 오디오 성경을 구입하고 읽으려고 노력했지만 쉽지 않았다. 하느님의 사랑과 은혜를 느끼기 위해서는 올바르게 말씀을 듣고 배워야 했는데 그 길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이때도 하느님과 성모님은 부족한 나와 함께하셨다. 새로운 신앙의 길을 열어주신 것이다.
퇴직 후 경산으로 이사를 한 후 우선 레지오 활동을 거의 15년 만에 다시 하게 되었다. 단원 선서를 한 날이 파티마 성모님 축일인 5월13일이었다. 돌이켜보면 결혼기념일이 파티마 성모님 축일이고 세례를 받은 날이 원죄 없으신 성모님 축일이었다. 미처 그런 사실을 까마득케 잊고 먼 길을 돌아서 여기까지 왔다.
새삼 성모님의 도우심으로 아내와 함께 어버이성경학교에 입학하여 배우고 있다.
구약은 율법과 예언서의 말씀이 중심이었고 신약은 그 말씀이 실제로 예수님을 통해 완성되는 것이다. 성경학교를 다니면서 꾸준히 성경쓰기를 하여 구약과 신약을 썼고 다시 모세 오경을 쓰고 있다. 쓰기를 통해 말씀을 더 가깝게 다가가고 가슴에 새길 수 있어서 다행이다.
하느님이 나를 선택해 주셨고 매순간 하느님이 함께해 주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앞으로는 이웃에게 봉사하고 내 마음에 사랑을 가꾸고 실천하는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노력할 것이다. 주님과 성모님께서 부족한 나의 손을 따뜻하게 잡아주심에 찬미와 감사를 드리며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본다.
함께 하시옵소서!/졸업생 박영정(사도요한)
어버이성경학교에 재학 중인 후배로부터 창립 30주년의 ‘길손 특집’을 발간하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옛 성경학교 시절을 더듬으며 그간에 있었던 우리들의 잔잔한 일상을 이야기해보는 것도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에 기억을 더듬어 봅니다.
2000년에 입학한 우리는 2001년 2학년을 올라가면서 나눔 시간 중에 성경공부와 병행하여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봉사를 같이 하게 되면 바로 알고 바로 믿고 바로 행하는 正知, 正信, 正行을 이루는 것이라는데 의견을 모았습니다. 즉석에서 성경학교 5반이라는 뜻의 ‘성오회’라는 회명을 정하고 매월 셋째 토요일에 루도비꼬집 봉사를 가기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후 십 수 년이 지난 지금까지 봉사와 나눔이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봉사 첫날, 장정 10명이 상기되어 봉사를 갔었고 힘든 하수도 공사를 맡아 하게 되었습니다. 결과가 원장 수녀님 마음에 들었는지 그 후 줄곧 도배, 잔디 깎기, 가시나무 전지, 인도블록 깔기 등 힘든 일만 전적으로 10년 이상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연말에는 어려운 살림을 위하여 십시일반 모은 100만 원씩 기부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인연으로 지난 2010년 9월에는 성오회장 정 베네딕도 형제께서 대표로 경상북도지사의 표창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현 회장인 최 가브리엘 형제님은 마침 이비인후과 전문의여서 같은 날 힘든 일 대신 의료봉사를 하고, 봉사 후에는 적당한 식당을 정하여 전회원이 친목 도모 월례회를 하고 있습니다.
일 년에 한두 번 정도는 단체 피정이나 성지순례를 겸한 야유회, 산이나 바다를 가기도 합니다. 재학 중 부산 베네딕도 수도원 피정, 수녀님의 지도로 와촌으로 1박 2일 피정을 갔었습니다. 어느 신심 깊은 교우님 가정집에서 신부님 모시고 조촐하게 미사를 드렸습니다.
제주도 구석구석 성지를 꼼꼼히 찾아 나서던 성지순례, 구룡포 바닷가를 갔던 것 등이 얼핏 생각납니다. 부산 피정과 제주도 성지순례 사진은 전에 우리 홈페이지에 올리기도 하였었는데 지금도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구룡포로 나들이를 갔을 때에는 구룡포 성당에서 미사를 보았는데 미사 후 신부님께서 안보이던 사람들이 여럿 보이니까 어디서 온 어느 본당 교우냐고 물으셨습니다. 본당은 각기 다르고 성경학교 같은 동기동창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성경학교는 공부를 몇 년 하느냐고 다시 물으셔서 4년간 공부하고 졸업한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전 신자들에게 “여기 4년 동안 성경공부를 졸업하신 대단한 분들이 오셨다.”고 과분한 칭찬을 해주셨고, 구룡포 성당 전체 교우들의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매우 부끄럽기는 하였지만 졸업생으로서 느끼는 긍지와 기쁨이기도 하였습니다.
10여 년이 흐르는 동안 직장 이동 등의 사유로 회원이 흩어져 줄기도 하였지만 우리 하는 일을 보고 자발적으로 봉사에 참여하신 분들도 계십니다. 우리 성경학교 3회 선배이신 성 클레멘스 형제님, 전에 루도비꼬집에 사회복지사로 근무하시면서 우리를 지시하고 감독하시던 김 요한 형제님, 매호성당 김 라우렌시오 형제님 같은 분들이 그런 분들입니다. 지난 봉사 일에는 매호성당 레지오 팀에서 다섯 분이 자발적으로 우리와 함께 동참하셔서 가시나무 전지작업에 땀 흘려주셨습니다.
하느님이 어디 계시냐. 는 물음에 마더 데레사 수녀님께서 주저 없이 “당신의 미소 짓는 그 얼굴이 바로 하느님 얼굴입니다.”라고 대답하셨듯이 형제님들께서 흘려주셨던 그 땀이 바로 하느님의 땀이었음을 알기에 우리 성오회는 매일 매일을 더불어 나누며 살아갈까 다짐합니다.
이렇게 늘 채워주시고 함께하심을 알게 하시는 주님. 주님을 더욱 가까이하는 계기가 된 성경학교에서의 성경공부. 주님을 향한 모든 절실함입니다.
성지 순례를 다녀와서/졸업생 장교숙(마리나)
2013년 1월15일~29일까지 터키, 로마, 파리로 성지순례를 다녀왔습니다. 지난해 5월 신청하고 공부하며 기도하면서 꼭 가겠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설렜습니다.
세례 받은 지 30년이 지났지만, 외인 가정에서의 결혼생활과 신앙생활은 참으로 힘들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냉담으로 이어져 한동안 교회를 멀리하였습니다. 저의 게으름과 교만이 더욱 컸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더 맞을 것입니다.
다시 교회로 발걸음을 돌렸고, ‘어떤 것이든 제게 주어진 일은 감사하게 받겠다.’며 기도드렸습니다. 이렇게 보잘것없는 저에게 본당 신부님께서는 구역장을 맡아달라고 하셨습니다. 참으로 난감해서 사양을 하였지만 제 마음 또한 편치 않아서 맡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3년이 지나고 저는 조금 지쳐 있었습니다. 이때 ‘성지순례’는 제게 희망을 주었습니다. ‘그래, 가자! 가보자! 다녀와서 더 신바람 나게 신앙생활 해보자.’다짐하면서 비행기를 타고 이스탄불에 도착해보니 과연 입이 딱 벌어졌습니다. 어마어마하게 큰 ‘성 소피아 성당’을 보는 순간 할 말을 잃었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행적을 따라 걷는 터키는 어느 곳 하나라도 소홀히 대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에게는 너무나 소중한 곳이기에 또한 마음 아픈 곳이기도 하였습니다. 땅속에 묻힌 많은 유물과 유적들이 세상의 빛을 보게 보는 날, 또 가고픈 터키가 될 것입니다.
다음으로 간 곳은 로마! 교황님이 계신 곳! 베드로 사도의 무덤위에 세워진 베드로 대성당, 바오로 대성당, 시스틴 성당, 라테란 대성당, 더 넓은 베드로 광장은 과연 가톨릭의 본산임이 틀림없었습니다. 바쁘게 오가는 수도자의 모습과 순례자의 모습들,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있는 제 자신이 너무도 자랑스럽고 뿌듯하였습니다.
‘아씨씨’는 프란치스코 성인을 만나는 곳,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고 가난한 삶을 택한 성인은 참으로 위대해 보였습니다. 청빈과 정결, 순명을 모태로 살아가는 수도회의 삶을 다시 한 번 되새겨 봅니다. 저 또한 그렇게 살 수 있겠지요?
마지막 행선지인 파리 루르드! 어린 벨라뎃따에게 나타나신 성모님은 마사비엘 동굴에서 우리들을 반가이 맞아 주셨지요. 미사 중에 성체를 영하고 하염없이 쏟아지는 눈물은 기쁨과 감사뿐이었습니다. 그 순간 분명 제게도 주님과 성모님이 함께 하셨음을 믿습니다. 우리 순례단 모두는 한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어느 분이 말씀하셨다지요. 신앙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고 가슴으로 한다고요. 성지순례를 한 번쯤 다녀와야겠다고 감히 말씀드립니다. 시간이 허락하면 또 다른 곳을 다녀볼 예정입니다.
오늘도 이렇게 따스한 햇볕을 주신 주님! 저의 모든 것이 주님 안에 있음을 깊이 감사드리며 기품 있는 신앙인이 되도록 오늘도 발걸음은 성당으로 향합니다.
첫댓글 편집위원장님께서 다 해 놓으신 것을 제가 어찌 외람되이 다시 보오리까...그저 작품 한 번 읽어 보는 여유를 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다가오는 일요일에 반가운 모습으로 만나 뵙겠습니다~♥
너무나 수고들 많이 하 셨어요. 나는 어디쯤 와 있을까?/ 4학년 오옥희(안젤라)가 아니라 이옥희(글라라)로
사진을 받았어요. 먼저 제가 잘못 받은 셈이군요. 죄송해요. 일요일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