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동 코스에, 호랑이와 까치 로고가 상징인 ‘통인가게’가 올해로 100주년을 맞이하였다.
개인적으로도 통인에 대해서 아무런 지식도 없던 시절에 집 이사 갈 때 통인을 이용했고, 직장에서 총무 담당을
하면서 문서 보관.관리를 위해 파주의 문서보관 사무실을 수 없이 드나들던 생각도 난다.
통인가게는 1924년 현재 대표인 김완규(78)씨의 아버지인 고 김정환씨가 설립했는데, 서촌 통인동의 ‘통인가구점’에서 출발하여 지금까지 2대에 걸쳐 운영되고 있다.
통인동에서 1961년에 현재 위치로 이전, 그리고 1973년 통인빌딩으로 사옥을 신축한 이후, 국내 최초 공예 전문과
미술 작품을 전시하는 통인 갤러리(통인화랑), 포장 이사를 처음으로 도입한 ‘통인 인터내셔날’, 그리고 국내 최대 규모의 문서 보관 회사인 ‘통인안전보관’ 등21 개의 계열사를 거느린 ‘통인그룹’을 이루며 시대의 조류에 맞춰 변화하면서 지금에 이르고 있다.
창업자 김정환씨는 한양도성 안에서 12대를 살며 벼슬살이를 한 안동 김씨 집안 자손이었으나,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기자, 살아가기 위해 일본 여자들에게 구슬 장신구를 팔기 위해 구슬을 사서 모아 가공하여 팔기 시작하였다.
시대 변화로, 포마이카(합성수지 도료), 플라스틱이 등장하면서, 가구와 함께 도자기나 패물 같은 물건들은 가치가 없게 되자 내다 파는 가구 등을 취급하는 골동품 가게의 주 거래 품목이 되었다.
1960년대 초 인사동 일대는 대학, 방송사, 개인병원, 고전음악 감상실 등 복합문화지구로 바뀌고 ‘통문관’과 같은
고서점, 일본인들이 두고 떠난 표구점 등이 골동품상들을 끌어들였다.
또한 인사동은 양반 자재가 많은 곳이라 보물이나 패물을 내놓으며 술값으로 바꾸기도 하였다.
현재의 김완규 대표는 중 3때부터 가게에 나와 숙직, 잔심부름, 청소를 하다가 문화재 전문위원이었던 예용해(1929~1995)를 만나 영어의 필요성을 듣고 영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덕분에 후일에는 미국MoMA 회장,
체이스맨해튼 총재 등 외국 거물들을 단골로 만들 수 있었다.
1973년에 세워진 현재의 통인가게 건물은 당시 인사동에서 가장 높고, 최초로 수세식 화장실이 설치된 현대식
건물로, 개관하자마자 랜드마크로 자리매김했다. 청와대에 외국인 VIP가 오면 보내는 단골 명소이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미술·공예 작가들과 이병철 회장 등의 컬렉터와, 문인, 기자들이 드나드는 문화·예술 사랑방이 되기도 했다. 재벌가.명문가 며느리들이 즐겨 찾았고 미술 공부가 이들 집안의 신부 수업 코스가 됐다는 말이 있기도 했다.
천경자 같은 화가들은 그림과 골동품을 바꿔갔는데 지금도 김대표 사무실에는 옥인동 천경자 작업실에 반닫이와 백자를 갔다 주고 받은 천경자의 1972년 작품 ‘꽃과 항아리’가 놓여있다.
한국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박서보 화백이 1976년 묘법 화풍으로 첫 개인전을 연 장소도 이곳이다. 외교 사절과
명사들을 초청해 사교의 장을 만들어 준 ‘통인오페라’와 판소리를 소개하는 ‘조선풍류감상’ 공연도 100회 넘게
열렸다. 현재 통인가게 지하1층~ 5층은 전통.공예.고미술.현대미술 등의 전시 그리고 카페로 사용되고 있다.
통인인터내셔날은 록펠러씨의 권유로, 골동품 포장을 위해 미군 기지에 미국에서 온 포장지로 포장을 하기 시작하면서 출발하게 됐다.
또한 입주나 집 이전이 늦어지는 경우 그 짐을 보관하기 위한 ‘통인안전보관’을 세웠다. 이렇게 통인가게는 이용하는 이들의 필요에 따른 관련 회사가 설립하게 되었다.
앞으로 통인가게는 강화도에 있는 통인도자연구소를 작은 규모의 ‘통인미술관’으로 짓고 도자기, 고가구, 백자, 고려청자, 의상, 서책, 다리미 등 각각 다른 걸 보여줄 예정이라고 한다.
또한 영종도에 3300만 평 규모와 30만 명 상주의 미래 도시를 개발하고, 노인들이 즐거움을 느끼면서 오래 살기 위한 연구소도 만들 계획이라고 한다.
1) * “아무 가르침 없던 아버지, 절대 사지 말라 한 골동품 두가지는” (chosun.com) 기사 등을 참고로 정리
2) tonginstore (imweb.me)
첫댓글 좋은 글 감사합니다. 희망의 상징 청룡의 해에 좋은 소망 세우시고 이루시길 축원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