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순간을 살아라 4-1편] 무심과 평상심 | 생각하지 않을 때(36:23)
인사동 선방 옮기고 이 자리에서 첫 법회네요.
네 감사합니다.
자, 그러면
진도를 계속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31페이지 중간부터 시작하겠습니다.
데카르트는,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라는 명제를 만들어 놓고
스스로 가장 근본적인 진리를 발견했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사실 가장 기본적인 오류를 범한 셈입니다.
생각을 자기 존재라고 착각한 것이지요.
네, 여기까지 보겠습니다.
뭐 데카르트의 유명한 전제지요.
사실은 이 말로 비롯해서 근대가 시작되었다고 하는,
근대의 시작은 생각하는 나가 주인이 된 시대라고 말을 합니다, 실제로.
그래서 나는 생각한다.
'I think, therefore I am.'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이게 가장 근본적인 진리라고 믿었는데
지금 톨레의 이야기는 그는 가장 기본적인 오류를 범했다.
왜냐!
생각을 자기 존재라고 착각한 것이다.
그러면
이 말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이런 말을 덧붙일 수가 있어요.
'I think, therefore I am.'
이 말에다가' I don't think' ,
난 생각하지 않는다.
'therefore I am not'
그러므로 에고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렇게 되는 거죠.
이때 'l'는 참나가 아니고 에고인 거죠.
생각하는 나 생각하는 나가 에고예요
여기서 지금 에고의 정의가 아주 또렷하게 나오네요.
에고란 무엇인가? 생각하는 나다.
그러니까 나라는 것도 생각으로 이루어져 있어요.
에고라는 것도.
자,
따라서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얼마나 좋아~ 하하하하
생각하는 나가 모든 문제의 근원인데
생각하는 나가 정말 모든 문제의 근원인데, 그 나가 없어지면 얼마나 좋아요.
그 나가 없어진 상황을 부처님은 뭐라고 했느냐 하면
이렇게, 이렇게 표현했어요.
부처님은,
부처님이 하신 말씀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 중에 하나일 거예요.
'상황만 있고 작자는 없다'
이때 작자는 이제 에고가 되겠죠.
그러니까 진실은 뭐냐면
인간이 한 생각을 멈추면 상황만 있고,
거기에 나라고 하는 것은 없다는 거예요.
여기에 지금 우리가 공부를 통해서,
요거를 우리가 납득할 수 있으면 매사에 생각하는 나 없이 상황을 파악하는..
거기서 이제 지혜가 생각을 거치지 않고 나오는 지혜!
그게 정말 중요한 거지요.
그래서 기왕 적었으니까 상황을 불교에서는 뭐라고 부르냐 하면,
상황을 불교에서는 업보라 그래요.
그래서 한 인간이, 한 인간이 지금 처한 상황,
이거는 그 사람의 업보에요.
그 사람의 업보가 만들어 낸
그 사람의 몸과 생각 감정과 그리고 그것이 반응하는이 세상,
이걸 이제 업보라고 부를 수 있어요.
그러면
자, 제일 좋은 화두 중에 하나가
육조 스님이 오조 스님에게 깨달음을 인가 받고
의발 (衣鉢 )을 전수 받았는데,
아직 행자라서
머리도 깎지 않은 행자가 스승의 법을 받으니까
700명의 선배들이 질투해 가지고
인정할 수 없다. 그래서 그 의발을 뺏으려고 했죠.
그래서 이제 도망갔는데 따라 잡힌 곳이
대유령이라고 하는 고개였거든요.
그러니까 고향으로 가서 숨으려고 도망가는데
거기서 따라 잡혔다.
그러니까 양자강의 북쪽인 황매현이라고 있습니다.
황매에 지금 오조사가 있어요.
오조 스님이 살았던 오조 공인,지금도 오조사에요.
달마로부터 내려오는 그 의발을 받아서
도망가다가 따라 잡혔는데 대유령 고개에서 따라 잡혔어요.
황매현 양자강에서 (육조스님의 고향은 최남단 바닷가거든요.해남에~)
그 중간에 대유령 고개가 있어요.
그래서 고개 아래를 영남이라 그래요.
한국도 영남지방 있죠?
그게 그 중국에서 따온 거예요.
아무튼 따라 잡혔을 때 그 따라잡은 사람이
의발을 뺏으러 갔다가 마음을 바꿔 가지고
그래도 오조스님이 육조에게
이 법을 물려준데에는 무슨 까닭이 있지 않을까?
그래도 자기 스승이잖아요. 오조가~
그래서 생각을 고쳐먹고
"행자님, 행자님~~"
굉장히 자기는 스님인데 행자, 자기보다 나이도 어리고
까마득한 후배, 절에 들어가서 아직 머리도 안 깎은 상태,
그런데 깨달았다 이거예요.
그래서 "행자님, 저는 의발을 뺏으러 온게 아니고
법을 물으러 왔으니까 법을 나에게 알려주세요."하니까
숨어 있다가 이제 나온 거예요.
그러니까 의발은 길 옆에 바위에 보이도록 가져가라고
이렇게 놓고 몸은 숨겼는데
이제 그 의발을 보고 마음이 바뀌어 가지고 그러니까
나와서 제가 행자님께 비록 선배고 스님이지만
법을 묻고 싶다고 그러니까
그때 육조 스님을 그 쫓아온 (그의 이름이 혜명상좌예요.)
그 혜명상좌에게
"선도 생각하지 않고, 악도 생각하지 않을 때
당신의 본래면목이 무엇인가?" 이렇게 물은 거예요.
그러니까 선도 생각하지 않고 악도 생각하지 않을 때
당신의 본래면목은 무엇입니까? 하는 이 말을 듣고
그 쫓아온 혜명상자가 그 말대로 해본 거죠.
선도 생각하지 않고 악도 생각하지 않을 때
생각은 항상 상대를 생각하니까 상대를 생각하지 않을 때
당신 본래면목이 뭡니까? 하는 그 말에
진짜로 생각을 안해본 거예요.
그 말에 진짜로 생각을 안 해봤더니
생각이 없으면 여러분,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하는건 생각이죠?
생각하지 않으면 생각이 없으면 내가 죽었나요?
생각 안 해도 죽지 않지요?
그때의 그 상황, 나의 의식 상황,
생각하지 않을 때 나의 의식 상황이 있지요?
고게 우리들의 본성이다. 이거예요.
그래서 그 말에 혜명상좌가..
육조스님이 그 행자 시절에 도망가면서도
한큐를 그렇게 날린게 참 대단한 것 같아요.
지금 화두에요. 이게~
"선도 생각하지 않고 악도 생각하지 않을 때
당신의 본래 면목은 무엇인가?"
줄여 가지고 "이 뭣고!"에요. 줄이면,
그래서 육조 혜능을 쫓아온 혜명상좌가 그 말을 듣고
그 자리에서 진짜 생각을 안 해봤더니
자기 의식 상태가 스스로 확인이 되더라 이거예요.
생각을 안 해봤더니 "아, 이거구나!" 하고 깨달은 거예요.
그래서 참 재미있는게 "겨우 이겁니까?"
이래서 깨닫고 "겨우 이겁니까?"
그래서 뭐라고 했냐면
"이것 말고 뭐 좀 신통한 거 없나요?"이랬어요.
그러니까 참 우리들이 여러분, 우리들이
본성을 깨달으려고 하고 있는데
막상 깨달은 사람은 "아이, 너무 시시해~"
그러니까 참 우리들이 여러분 우리들이 본성을 깨달으려고 하고 있는데
막상 깨달은 사람은 아이 너무 시시해 시시하다기보다
그냥 너무 당연해 겨우 이겁니까?
그래서 유명한 대목이에요.
이것 말고 뭐 또 없나요? 그렇게 물었던 거예요.
그니까 없나요? 하니까
있긴 있는데 바로 너한테 있는 그거야 그랬더니
확실하게 이제 확인사살을 한 거죠.
그래서 혜명은 <도명>으로 이름을 바꾸고
왜냐하면 육조 혜능인데 혜능스님한테서 자기가 비록 선배지만
혜능에게 도를 이제 깨쳤으니까
스승하고 이름을 같이 안할려고 혜자를 도자로 바꿨어요.
그래서 도명이라고 이름을 바꾸어서
<몽산도명> 이렇게 됐네요.
아무튼 지금 생각하지 않는다, 이 말이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다, 이거에요.
그러니까 여러분도 정말로 생각을 안 해보면 안 죽었다, 이거예요.
생각을 안하면 안 죽었다, 그때 나는 누구냐 이거예요. 그때 의식 상태에요.
그때 누구라는 것은 특별한게 아니고 그때 나의 의식 상태를 확인하면
그것이 본성이다. 그게 견성이다 이거예요. 견성이다.
견성의 조건은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생각을 구름이라 그래요.
그리고 이 본성을 하늘이라고 해요.
보통 때는 하늘은 있지만 생각이라는 구름에 가려있다.
그 구름이 걷혔을 때 저절로 하늘을 보잖아요.
깨달음도 그와 같아요.
지금 생각 하나가 멈추어지면 바로 하늘이 드러난다.
그래서 깨닫는 거예요. 견성이란 것이~
돌아와서 부처님의 이 말도 여러분 지금 재미있죠~
(자, 그러면 지금 생각이라는 문제를 가지고 말 난 김에
아, 요 다음에 나오니까 거기서 제가 말씀 드릴게요.)
자, 계속 이어서 보겠습니다.
우리들 대부분이 그렇지만 머릿속 헤아림, 머릿속 헤아림을
불교에서는 분별사량(分別思量)이라고 정확하게 헤아림은 사량이에요.
사(思), 생각한다. 량(量), 양을 생각한다 양을 헤아린다.
분별사량을 쫓아가다 보면 문제와 갈등이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사량분별(思量分別) :
복잡한 생각으로 헤아리는 것과 사념망상(邪念妄想)으로 계교하는 것.
사량분별은 진리를 깨치는데 방해가 된다. (원불교대사전)
이 문제와 갈등이 일어나는 이것을 12연기로
계속 부처님은 설명을 해줬지요~
지금 요 대목을 촉(觸) 하자마자 주관이 있고 객관이 있고
주관이 객관을 이렇게 헤아리면 접촉하자마자 촉,수(受),
좋다 나쁘다가 생기고
수는 바로 좋다 나쁘다는 사랑하고 미워하는 것으로 넘어가고
사랑하고 미워하는 것은 취(取)하고 버리는 걸로 또 이어지고
취하고 버리는데 마음대로 안 된다.
그럼 갈등이 일어나서 생로병사의 고통이 끊임없이 돌아간다.
지금 그게 12연기잖아요~
지금 요 문제와 머릿속 헤아림을 쫓아가다 보면
문제와 갈등이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그 결과 미친 듯이 복잡한 세상에 휩쓸리게 됩니다.
참 요즘 참 미친듯이 복잡한 세상이에요.
그리고 세상은 조각조각 부서진 우리들
마음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습니다.
참 재미있는게 만약에 내가 괴로운 세상에서 살고 있다 그러면
나의 의식의 상태가 불교에서는 식(識)이라고 하는데,
의식의 상태가 계속 그 세계를 만들어내고 있는 거예요.
요즘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말로 쓰면 불러오고 있는 거예요.
자기의 의식, 자기의 마음이 현상세계를 불러오고 있다.
이게 하나의 법칙이에요.
이것을 12연기에서는 무명(無明),
지금 미혹한 거, 모르는거 이거,
무명이 행(行), 행업, 계속 행업을 쌓아간다. 무명이,
어리석음이 행업을 쌓아가면 식, 식(識)은 또 업식이거든요
그 업이 정보화 되어서 인간한테 저장되는 거예요.
그러면 저장된 정보에 의해서 명색(名色),
이름을 붙여서 색에다가 이 물질 세계에다가 명,
이름을 붙여 가지고 식이 만들어내는 명색 세계를 살아요.
이게 인간이 살고 있는 법칙이예요.
그래서 인간의 식이, 이 업식이 돼지 눈이면 명색은 돼지 세계가 펼쳐지고
인간의 업식이 부처 눈이면 이 세계는 불국토가 펼쳐지는거지.
그러니까 식이 명색을 만드는 지금 12연기에서
무명, 무명은 어리석음.
행, 행은 행업, 행동이 계속 반복되는 거.
그러면 업식, 업식이 그 업에 의한 식, 정보가 잘못된 정보죠.
이게 쌓여가지고 그것이 명색을 만들어내고,
이 세계에다 이름 붙여가지고 관념을 붙여놓는다 이거죠.
그러면 이제 접촉하자마자
좋다 나쁘다, 사랑한다 미워한다, 취하고 버리고,
이런 일들이 벌어져서 고통이 벌어진다.
이게 지금 인간의 실상이다 이거죠.
여기 부처님께서 깨닫고 가르친 아주 골수다 이거죠.
제일 먼저 초전법륜, 깨닫고 제일 먼저 가르친 게 이거다 이거죠.
이게 인간의 실상이다.
이거를 바로잡으려면
지금 나는 생각하는 나를
나로 알고 있는 이 잘못을 바로잡는 것이 핵심이다.
지금 그런 의미에서 이렇게 나오고 있습니다.
세상은 조각조각 부서진 우리들 마음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깨달음이라는 것은 만물의 배경을 이루는
만물의 배경, 배경을 바탕이라고 불러요.
불교에서는 배경 혹은 바탕,
여러분, 온갖 바다에 파도가 치고 있는데 파도의 배경은 뭐예요?
파도의 바탕은 뭐예요? 바닷물이죠.
지금 온갖 파도가 치는 파도의 모습이 이 삼라만상이에요.
그리고 이 삼라만상을 이루는 것의 배경 바탕을 이루는 하나,
그건 하나다, 언제나.
여러분 바다는 하나죠. 그렇죠.
바다는 하나예요.
그 하나의 상태에 머물러 깨달음이라는 것은
만물의 배경을 이루는 하나의 상태에 머물러
전체성으로 살아가는 것이고 따라서 평화로운 상태입니다.
깨달음은 지금 톨레의 입장에서
이런 식으로 깨달음을 정의를 한 것은~
여러분 음미해 보세요.
제가 이 책을 교재로 선택한 이유 중에 하나가
이런 식의 깨달음의 정의가 좋다 이거예요.
톨레가 나름대로 서구적인 언어를 가지고
깨달음을 이런 식으로 딱 정의해 놓고 하는 이런 것들이 훌륭하다.
우리가 굉장히 배울 만하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지금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이것을 한번 항상 저는 여러분하고 공부하면서
항상 자초지종을 좋아해요.
자초지종이 무슨 말이냐면
자는 뭐 뭐~부터예요. 초 처음부터, 지 이른다. 종은 끝이에요.
자초지종은 처음부터 끝까지 어떻게 흘러가는가를
한번 지금 깨달음을 톨레는 이런 식으로 표현했지만
한번 저는 항상 자초지종을 좋아해서
이 대목에서 소위 말하는 동양에서는 그러면 깨달음을 어떻게 보는가를
간단하게 한번 자초지종을 설명을 드려볼게요.
지금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요거하고 연결돼 있어요.
깨달음의 과정을 가장 정교하게 압축해서 해놓은 것은
대승불교를 출발시킨 대승기신론이라고 하는 마명조사의 책이 있어요.
거기에 깨달음을 이렇게 설명했어요.
( 本覺 - 不覺 - 始覺 - 究竟覺 )(본각 - 불각 - 시각 - 구경각 )
우리의 이 깨달음의 과정이 본각에서 불각( 不覺),
우리가 지금 불각 상태예요.
그러니까 모든 인간이 처음 태어났을 때는 본각 상태로
본래는 본각에 본래 깨달아 있어요.
사실은 모든 사람이 본래 깨달아 있어요.
그런데 생각의 구름에 덮여 가지고
생각의 구름에 덮여서 지금 불각 상태에요.
지금 우리는 일반 인간의 지금 상태가 불각 상태에요.
자 여기서 이렇게 보세요.
톨레는 본각은 말하지 않아요.
원시인에서 진화해 가지고 현재 우리가 생각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불각 상태에 살고 있다고 톨레는 이야기하죠.
그래서 진화론자에요.
말하자면 서구인들은 기본적으로 진화론적인 입장을 가지고 말을 하기 때문에
본각은 이야기 안하고 불각부터 이야기를 해요.
불각도 원시인부터 현대인까지 진화해 와서 지금
에고의 상태, 불각이 에고의 상태입니다.
인간은 본래는 부처였다는 거예요,
근데 지금 에고, 중생의 상태로 지금 살아간다.
근데 공부를 해서 시각은 시작할 때 시(始)인데 비로소 시자예요.
시각은 비로소 다시 각을 찾는다는 거예요.
시각은 비로소 다시 각의 세계로 들어와서
구경각은 그 깨달음이 완성되는 구경, 마지막이란 말이잖아요.
구경각, 그래서 대승기신론에서는 인간의 깨달음의 단계는
본각, 불각, 시각, 구경각, 그리고 이 각의 세계를
법화경이라고 하는 불교 경전이 있는데 법화경에서
뭘 말하고 있나, 할 때 제일 중요한 말은 일대사인연 (一大事因緣)이라는 말이
법화경에서 제일 중요한 말이에요.
일대사인연 (一大事因緣), 하나의 큰일,
그 인연 ,그러니까 석가모니 부처라고 하는 분이 2500년 전에 세상에 나왔는데
왜 나왔는가 하는 설명이 법화경이에요.
그럼 법화경에서는 왜 나오셨는가, 일대사인연 때문에 나왔다.
일대사 인연은 뭐냐 지금 인류의 상태가 불각인데
시각 구경각으로 만들려고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오셨다, 이거예요.
그게 일대사입니다.
부처가 이 세상에 출현한 이유는 인간의 상태가 본각인데 그걸 까먹고
불각으로 고통 속에서 사니까 그 사람들을 시각 구경각으로 완성시키려고 나왔다.
그러면 각이라고 하는 것은 네가지가 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해요.
법화경에 나오는 말이에요.
각에는 4단계 개(開) 시(示) 오(悟) 입(入), 네 가지 단계가 있다.
그래서 부처님이 뭘 했느냐, 불각인 중생들에게
깨달음을
개,(열어서), 시,(보여주고), 오,(깨닫게 해서), 입,(부처의 세계로 들어오게끔)
이끌기 위해서 부처님이 나오셨고
평생 사신 것이
깨달음을 개, 시, 오, 입,을 한 것이 부처님의 일생이었다.
여기에 법화경의 전체 내용이에요
그러면 이렇게 해서 이런 지금 부처님도 그러셨고
지금 톨레도 나름대로 깨달음을 얻고
이런 책을 써서 우리에게 조곤조곤 이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어서
우리는 이런 공부를 통해서 결국에는 어떻게 하자는 거냐,
깨달음은 결국은 뭐냐 할 때
시각이 깨달아서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이 과연 무엇인가 할 때
시각과 구경각이 하나가 된 것, 시각 비로소 깨닫고 그리고
깨달음을 완성하는 이것이 하나가 된 것을 중도(中道)라고 불러요.
젊은 분들을 위해서..
중도를 연기(緣起)라고도 하고 그리고 불이(不二)
둘이 아니다,
이것을 반야심경에서는 ‘둘이 아니다’를 ‘즉(卽)’이라고도, ‘즉(卽)’.
색즉(卽)시공, 공즉(卽)시색.
그래서 ‘색(色)’과 ‘공(空)’이 반야심경의 주제지만,
제일 중요한 말은 ‘즉(卽)’이에요.
‘색(色)’과 ‘공(空)’이 하나라는 거. ‘중도(中道)’라는 거.
그리고 이걸 또 다른 말로는
‘동시(同時)’라고도 표현해요. ‘동시(同時)’다.
그러면,
‘본각(本覺)’이었는데 ‘불각(不覺)’ 상태에 살다가 ‘시각(始覺)’이 된 것을,
처음 우리가 ‘시각(始覺)’이 된 것을,
어떤 상태가 ‘시각(始覺)’이 되었느냐 할 때,
아까 혜명 상좌가 의발을 뺏으러 왔다가 마음을 바꿔 먹고
“진리가 무엇입니까?” “도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을 때
‘생각하지 않을 때,’ ‘네가 누구냐 할 때,’
생각이 사라지면 여러분, ‘생각이 사라진 우리의 마음,’
다시, 생각이 평소에는 생각이 많아요, 그죠?
분별사량(分別思量)이 많아요, 헤아림이 많아.
근데 그런 ‘생각하지 마!’ 진짜 생각 안 할 때,
그때 우리의 상태가 어떻게 되느냐? 그거를 ‘무심(無心)’이라고 불러요.
‘무심(無心),’ ‘무심(無心)’이란 말은
내 마음에서 생각이 고요해질 때,
그걸 ‘무심(無心)’이라고 불러요.
그러면 무심(無心)된 마음,
그게 우리들의 본성이에요. 무심(無心).
근데 인간은 그게 끝이 아니고,
무심(無心)에서 이제 지혜가 나와.
무심(無心)에서 지혜가 나와서 지혜의 마음.
지혜, 여러분, 무심(無心) 상태에서 살아야 돼요.
지혜의 마음을 쓰며 살아야 돼요.
무심(無心)으로는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 같아.
그러니까 그거는 공부의 단계에요. ‘시각(始覺)’이에요.
근데 ‘구경각(究竟覺)‘은 무엇이 ‘구경각(究竟覺)‘인가?
‘평상심(平常心)‘이 ‘구경각(究竟覺)‘이에요.
여기서 ‘무심(無心),’ ‘평상심(平常心)‘이
‘중도(中道)’고 ‘연기(緣起)‘고 ‘불이(不二)‘고 ‘즉(卽)’이고 ‘동시(同時)’에요.
그러니까 우리 마음이 ‘무심(無心)’과 ‘평상심(平常心)’을,
평소에는 생각이 고요한 ‘무심(無心)’으로 살다가,
일이 생기면 즉각 거기에 맞춰서 지혜가 생각으로 왜곡되지 않고,
이때 생각은 뭐냐면 여러분, 한 가지로 딱.
생각은 뭐냐? 한마디로 ‘사심(私心),’ 사(私)적인 이익이 붙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私)적인 이익이 붙지 않는 마음이 ‘무심(無心)’이고,
그 ‘무심(無心)’에서 사(私)적인 이익이 떨어진 상태에서
있는 그대로 나오는 마음이 ‘평상심(平常心)’이에요.
요게 ‘지혜’에요.
‘무심(無心)’을 ‘선정(禪定)’이라고 부르고, ‘선정(禪定)!’
‘평상심(平常心)’을 ‘지혜’라고도 불러요.
그러면 여기서 ‘심(心)’ 자를 가지고 이야기해 본다면,
‘본각(本覺)’은 뭐냐면 ‘본각(本覺)’은 ‘초심(初心)’이에요.
‘본각(本覺)’은 ‘초심(初心)’이다.
여러분 ‘선심(禪心)은 초심(初心)이다!’
이런 말 들어보신 적 있죠? 책 제목에.
샌프란시스코에 스티브 잡스가
젊을 때 선(禪) 센터에서 수행했어요.
그 선(禪) 센터에 과수원이 있었는데 거기서 울력을 했어요.
<울력 - ‘여러 사람들이 힘을 합해 하는 일’이라는 순수한 우리말>
스티브 잡스가 젊을 때 샌프란시스코 선(禪) 센터에서 수행하면서 울력을,
울력 알죠? 시간 날 때 노동을 하는 거지요.
울력을 한 과수원이 이게 사과밭이었어요.
그래서 ‘애플’이라는 상호가 거기서 나왔어요.
여러분, 애플 핸드폰 지금 쓰시는 분 있죠?
그러니까 그 샌프란시스코에 참선했던
그 수도원을 세운 사람이 스즈키 순류라고 하는 일본 묵조선사에요.
그분이 쓴 책 이름이 "선심초심"이에요.
영어로는 " Zen Mind, Beginner's Mind"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선에서는 불각이 시작이 아니고
처음에는 누구나 본각이다.
본각을 다른 말로 하면 초심(初心)이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우리 수행의 목표는
본각과 구경각의 전체가 하나가 되는 거거든요.
다시 말하자면, 본래 상태로 돌아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빼기다, 내려놓기다, 쉬는 공부다,
이런 말을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어요.
그래서 본각은 초심이다.
불각은 유심(有心)이라고 할 수 있어요.
마음이 있다. 어떤 마음이 있는가?
여러분, 마음이 있다 할 때 사심(私心)이 있는 거죠.
그렇지 않나요? 에고의 마음이 있다, 이거예요.
초심이었는데 살다 보면 유심이 되었다, 이거예요.
이게 불각 상태다, 깨달음을 놓친 상태다.
그러면 초심에서 유심으로 가서,
인간은 무심이 한번 되어야 되는 거죠.
무심이라는 말은 그 에고의 마음이 한번 떨어지는 거죠.
요거 하기 위해서 우리가 지금 이렇게 모여서 공부하지요.
그리고 무심 상태가 끝이 아니고
이 사심이, 유심이 무심이 된 사적인 에고의 마음이 떨어진
그 상태에서는 직심(直心)이 나와요 직심.
직심은 사심이 아니고, 사심의 왜곡된 마음이 아니고,
그대로 무심에서 이 상황에 그대로 나오는 것.
다시 말하면, '상황만 있고 작자는 없다.'에서,
진짜 작자는 없고 상황만 있는 거에서
상황에 맞춰서 그대로 마음이 작용하는 것,
그게 직심, 평상심 이런 식으로 표현을 하는 거예요.
지금 깨달음은 무엇인가? 하면,
중도다, 혹은 연기다, 불이다, 즉이다, 동시다,
이렇게 하는 것이 대승불교의 기본 입장이에요.
그러면 이것에 중도 연기의 내용은 무엇인가?
시각과 구경각, 무심과 평상심을 자유자재로 쓰는 거예요.
그래서 이 유심의 선에서는
유심이 떨어져 나가는 것을 살(殺)이라 그래요.
할 수 없이 지금 한자를 써야 되네, 뜻 때문에. 이해하세요~
살, 죽인다. 사심을 죽인다.
평상심은 활(活), 살린다. 죽고 산다.
여기 기독교인 계시니까,
살활, 동시라는 말은 또 다른 말로 자재(自在),
살활자재, 자유자재, 살활을 자유자재하는 게 깨달음이에요.
선에서 딱 깨달음을 정의한다면 살활자재,
죽였다 살리는 거를 자유자재로 한다.
뭘 죽이느냐? 유심을 죽여서 무심으로 가고,
뭘 살리느냐? 무심을 평상심으로 살립니다.
그래서 살활자재(殺活自在).
기독교에서는 살을 뭐라고 하느냐? 십자가라고.
스스로 자기의 에고를 스스로 죽는 가장 모범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린 것 그게 살이고,
십자가에 달려서 어떻게 되지요?
평상심은 부활을 한거다, 이거예요.
십자가와 부활, 요게 기독교의 핵심이잖아요?
그러니까 십자가와 부활이란 말이나,
살활자재란 말이나,
무심 평상심의 중도란 말이나,
지금 시각 구경각을 자유자재로 하나가 된다.
동시다, 즉(卽)이다.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이다.
이런 말이 전부 다 지금 같은 말이다.
깨달음이 뭐냐?
이렇게 중도 = 연기 = 불이 = 즉 = 동시 = 자재,
이렇게 딱 떨어지면 훨씬 더 여러분, 자초지종이 되지 않나요?
내가 지금 어느 단계에 있느냐 자기를 돌아봐서
내가 지금 유심이냐? 그러면 내가 무심이 먼저 돼야 되는구나!
무심을 발견해야 돼요. 자기 안에서 무심을 발견해야 돼요.
어떻게 발견하는가? 방법은,
‘생각하지 말라.’
‘그러면 넌 뭐냐?’
이게 무심의 발견하는 가장, 가장 지름길.
‘생각하지 말라. 그럼 너는 뭐냐?’
그때에 나는 무심이다 이거예요.
무심을 발견하고 거기서 그 무심이 확립되면
에고는 현재의 힘이 빠져 가지고 이제는 맥을 못 춘다.
그러면 에고가 사라진 상태에서는
상황만 있고 에고는 없기 때문에
상황에 맞는 지혜가 인간한테는 튀어나온다.
그러면 전광석화처럼 금강왕의 보검을 빼서
일을 처리하고 일 끝나면 칼집에 잘 넣어둔다.
보검이 칼집에 넣어둔 상태는 무심,
꺼내서 쓰는 상태는 평상심,
무심, 평상심, 살활자재를 하는 삶이 깨달음의 삶이다.
여러분 조금 더 명료하게
우리가 지금 요 대목에서 한번 돌아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