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시작(詩作)의 시작.
등단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선물이 아니다. 집안 내력과 환경, 문화적 사회적 만남과 독서, 습작과 집필 동기와 투고 등등의 과정을 거쳐 이루어내는 전인적 결과물이다.
초계정씨의 집성촌인 화성군송산면 지화리에서 아버지는 태어나셨다. 서울200리 길을 새벽 네 시에 출발하여 오후 5시경에 서울 행촌동에 당도하는 건각이셨다고 한다. 그러나 알 수 없는 원인으로 발뒤꿈치에 종기가 나서 시골서는 치료가 안 되어 지금의 서울대학병원에 입원 3개월 만에 발목을 절단하는 불구자가 되셨다. 불구의 몸으로 농사일을 할 수 없어 인근 서당에 훈장이 되어 한문을 가르치게 되셨는데, 당시 일제강점기에 학동들이 소학교로 빠져나가 서당은 문을 닫고 생계가 막막한 판에 어머니께서 결단을 내리셨다. 어린 나를 둘러업고 우리 가족은 서울 서대문구 홍제천 변에 작은 방을 얻어 이주를 하셨던 것이다. 그리고 어머니는 장사를 하셨다. 떡장수며 비단장수며 물건을 외상으로 받아다가 팔아 갚아가며 근검절약, 낮엔 장사를 나가시고 밤엔 인왕산 기슭에서 솔가리를 긁어다가 연료로 사용하시고 배급 나온 구공탄은 모아서 되파는 등 이렇게 저렇게 목돈을 마련해 해방되던 해 봄 소개(일제가 강제로 주민을 이주시킴) 바람에 고향에 가대와 전답을 사서 낙향하여 연약한 몸으로 손수 농사를 지으셨다.
어머니 밀양박씨는 초정공의 후예로 어머니 자신도 어머니의 어머니 아버지를 기억 못 할 아주 어린 나이에 양친을 잃은 천애고아. 박씨 문중에서 데려다가 키웠다고 한다. 헌데 어려서부터 어머니는 총명이 출중하여 언년이로 불리던 어머니가 기특한 여아라는 뜻의 기녀(奇女)라는 이름으로 호적에 올랐다. 5세 이전에 어깨너머로 한글을 깨쳤고 책 읽는 초성도 좋아 해마다 추야장 가을밤과 깊은 삼동 내내 문중 안방에 불려 다니며 집안 어른들에게 춘향전 심청전 장화홍련전 유충열전 소대성전 등등 각가지 얘기책을 읽어드리다가 19세 때 두 살 연하 나의 아버지에게 시집와서 40세에 막내로 나를 낳으셨다. (상세한 내용은 <한국현대시인의초상> (시와정신사간행, 2012년) p279~290. <한국시학> 2016년 여름호 p47~78에 있음)
나의 등단작은 [나의 친구 우철동씨]다. <대한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작이다. ‘사강우체국장 우철동씨는 나의 친구’로 시작하는 우철동씨는 나의 서울문리사대 동기다. 실명이다. 그는 경남 밀양사람으로 부산 경남중을 거쳐 서울 체신고를 졸업했고 나는 경기 화성사람으로 송산고등공민학교 2학년 때 고입 검정고시를 거쳐 인천고 상과를 졸업했다. 우리 두 사람의 만남은 필연적이었다. 당시 엇비슷하게 어려운 가정환경과 문학에 대한 취미(욕구)가 일치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빨리 취직하여 가정 살림을 도우며 문학 취미를 살리겠다는 생각으로 2년제 사범대 야간부 국문학과를 지망했을 것이다. 휴전 직후 모든 산업시설이 파괴되어 대학을 나와도 일자리가 전무 하다시피 한 현실에서 사대계열은 그나마 일자리에 가망성이 높았던 때다. (그래서 당시 사범대는 인기가 높았다) 이렇게 만난 우철동씨와 나는 의기투합하여 같이 자취를 했다. 마포구 도화동에서 그의 동생 우소동과 함께, 우철동씨와 나는 밥을 함께 해 먹고 한 방에서 함께 잠을 자고 한 대문을 나와 그는 청량리우체국(직원)으로 향했고 나는 남대문 시장(과일 노점상)으로 장사하러 나갔다. 그리고 오후 5시에 남대문 옆 같은 강의실에서 같은 강의를 함께 들었다. 하지만 밥을 짓고 빨래를 하고 집안 치우는 일은 그들 형제가 분담했고 나는 그냥 공으로 얹혀 지내는 몸에 불과했다. 미안한 마음에 나는 현상 공모한 대학신문에 ‘쏟아지게 하라 총총한 밤하늘의 별’로 시작되는 [실내등의 무게]가 당선되어(동창 홍옥표(서울시장학관)가 보관) 그 상금으로 쌀 한 가마니와 감자 두 자루를 사서 들여 놓기도 했다. 그 뒤 나는 입주 가정교사 자리를 얻어 그들 형제의 신세를 덜었고 2학년 봄학기부터 주간강의를 들었다.
문리사대 졸업과 동시(1956년)에 2급 정교사 자격증을 가지고 나는 나의 모교인 송산중학교(남녀공학)에 국어교사가 되었다. 내가 원하던 일이라 나는 20리 산길 들길 신작로 길을 도보 출퇴근을 하며 사시의 변화가 뚜렷한 농촌 정서를 몸소 느끼고 나뭇지게도 똥지게도 지고 어머니를 도와 밭일도 해 가며 열과 성을 다해 교실에서 아이들과 함께 공부하고(시도 짓고) 운동장에서 아이들과 함께 뛰어 놀며 친근하게 접촉했다. 가정방문도 자주 다니며 부형과 대화도 나누고 때로는 그 집에서 학생과 함께 자고 함께 등교하기도 했다. 피곤도 몰랐고 정대구선생은 누구랑 연애를 한다는 둥 뒷소문 같은 게 있었지만 두렵거나 의식하지도 않고 마냥 보람도 있고 재미도 있었다. 우철동씨와의 인연은 이 무렵 다시 이어진다. 어느 봄날 느닷없이 우철동씨가 나타났다. 자원해서 ‘사강우체국장’이 되어 나의 곁으로 내려왔다는 것이다. 전기도 없고 책방 하나 없는 문화시설이 전무한 오지인데, 오직 나 하나만을 바라보고. 오, 우철동씨 우리 둘은 자주 만나 만남의 인연과 시대와 문학과 인생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우연한 만남이 [나의 친구 우철동씨]를 쓰게 되는 동기가 된다.
내가 교과서 외에 책을 접한 것은 초교 5학년 때 벽초 홍명희의 <임꺽정>이 처음이다. 고개 너머 큰댁 (남양홍씨)할머니께서 넘어오셔서 홍 면장댁에 가서 <임꺽정>전을 빌려다 읽어달라고 하시어 읽게 되었는데 너무 재미있어 할머니가 졸고 계시는 동안에도 스토리에 빠져 밤새워 책을 읽고 다시 할머니를 위해 또 한 번 읽어, 재차 재독을 한 대하 역사소설<임꺽정>은 지금도 그 장면 장면이 눈에 선하다. 그 다음 6.25를 겪고 고공(高公) 1학년 때 사강장터에 길거리 난전으로 펼쳐놓은 여러 책 중에서 제목에 이끌려 김내성의 <청춘극장> 1권을 빌려 밤새워 읽고 2권을 빨리 읽고 싶은데 장날(5일장)을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도 길었던 기억이 새롭다.
내가 시를 처음 접한 것은 내 기억으로는 중학교 1학년 때다. 나는 교과서를 타오는 날 그날로 국어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고 그 중에서 ‘시’를 모두 외웠다. ‘빛을 찾아가는 길의 나의 노래는/ 슬픈 구름 걷어가는 바람이 되리’로 끝나는 조지훈의 [빛을 찾아가는 길] ,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로 시작되는 박목월의 [나그네] 등등. 그리고 내가 시집을 처음 내 손에 넣게 된 것은 신석정의 <슬픈 목가>.(인고 2학년 때 대건중 1년생 김영웅의 입주 가정교사가 되어 지도할 때 그 집 누나에게서 선물 받음) 내가 처음 글짓기를 한 것은 5학년 때 [저축]을 내용으로 한 산문으로 담임선생님(류지면)께서 서울 어느 학생잡지에 보냈다고 하셨는데 바로 6.25가 터져, 종무소식. 그리고 인고 교지<율림>에 시[바닷가에서], 수필[거울].(동창 심재기교수(서울대)가 보관)
송산중고 재직 17년간 나는 <현대문학>지를 연간구독 해서 보았다. 주로 소설을 읽었지만, 학생들과 함께 시를 지어 합평회를 갖기도 하고 시낭송회도 열었다. 이렇듯 <현대문학>지를 구독하고, 국어교사로서 학생들과 함께 시를 쓰는 것이 나의 시작의 시작이었다. 이러기를 십 수 년, 많은 습작 중에서 몇 편을 골라 들고 용기를 내어 원효로 4가 목월선생님을 찾아가 뵈었다. 선생께서는 시를 재밌게 썼다면서 묵시적으로 긍정평가를 해주셨다. 그 다음해 12월에 [시계수리공] [소금사장 권태호씨] [나의 친구 우철동씨] 등 5편을 목월선생과 박재삼시인이 심사하는 <대한일보>에 응모하여 당선되어 72년 1월 뒤늦은 나이에 시의 등용문을 통과한 시인이 되었다. 지금도 온새미로 시동인들과 같은 주제로 작시하여, 한 달에 두 번 합평회를 열어 시가 녹슬지 않도록 꾸준히 워밍업중이다.
첫댓글 선생님의 자서전 글 잘 읽었습니다. 여기에 좀 더 자세한 내용의 살을 붙여 한 권의 완성 본을 만들어 보세요.
안녕하십니까?
오늘 아침 일찍 출근하여 업무 시작전에~
[ 詩作의 시작]을 차분하게 읽었습니다.
선생님은 지금도 여전히 컴퓨터를 다루시고 타이핑을 하시고
이메일을 보내시고 여전한 현역이십니다.
그 힘과 의지 원동력은 詩사랑 人사랑 고향사랑 아닌가 싶습니다.
선생님의 시사랑 문학사랑이 여러 사람들을 풍요롭게 감염시켜주고 있습니다.
또 뵙겠습니다.
솔향님
읽어보았군요
브끄러운 글인데 좋게 보아 주시니 고맙습니다.
언제고 만나고 싶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