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대 독립운동 5인배출로 유명한 정재 류치명 종택의 이야기는 선대로 가면 기봉 류복기가 학봉 김성일 외삼촌에게 글을 배웠고 의성김씨와의 통혼으로 안동에 정착하게 된다.
전주류씨는 시조 류습 ~ 9세 기봉 류복기~ 10세 휘 우잠 (장남) ~ 11세 휘 숙 ~ 12세 휘 진휘 ~ 이하 ( 표 첨부 )
용와 류승현과 양파 류관현 형제의 학문 이야기와 용와종택 3대에 걸친 학문 계승 이야기 충절의 정재종택 이야기는 작년 2018년 문중 행사로 국학진흥원에서 학술대회를 개최되었다.
정재 류치명이 자식이 없어서 세산 류지호가 출가하여 계보를 이었다.
표에서 알 수 있듯이 세산 류지호는 용와 류승현이 자식이 없어 양파 류관현의 차남 노애 류도원이 출가하여 용와 류승현의 계를 이었고 노애 류도원의 후손이 세산 류지호이다.
나의 5대조 의금부도사 대은공 이수영(형) 또한 어릴때는 백부 신암공 이병하에게 배웠고 정재 류치명 지헌 최효술의 제자였다.
긍암 이돈우와 안동 길안 용담사에서 정재 류치명의 정재집을 손수 마지막 교정하였고 만사 제문 상향문등을 남겼다.
제자라는 타이틀도 있지만 표에서 알수 있듯 백부 신암공 이병하는 삼산 류정원 삼산종택( 독립의병운동 배출)의 후손 할머니가 배위이며 나의 6대조 설죽공 이병하의 배위는 의성김씨 큰종가 청계 김진의 장남 약봉가 장손 표은 김시온의 7대 종손 몽헌재 김곤수의 따님이며 몽헌재 김곤수의 부인이 바로 용와 류승현의 자 노애 류도원의 따님이니 노애 류도원의 사위이다.
이로인해 나의 6대조 설죽공 이병은의 배위 할머님은 몽헌재 김곤수의 둘째 따님이며 나의 할머니가 되신다. 부친이 의성김씨 중시조 청계 김진 청계종택후손 종손 몽헌재 김곤수이며 모친이 전주류씨 용와종택 종손 노애 류도원의 따님이다.
이로 나의 6대조 백부 신암공 이병하와 설죽공 이병은은 전주류씨 수곡파 문중을 매일 드나들었고 처가 외가에 수없이 많은 날을 보내었고 이로 인해 5대조 대은공 이수영(형)은 책자에 세산 류지호 등등 알고 보면 외가의 기록을 많이 남겼다.
또한 나의 6대조 설죽공 이병은은 어린시절 양파 류관현 ( 노애 류도원의 생부)에게 글을 배웠다는 것이 대은유고 유사에 나오며 정재 류치명과 오랜 친구이자 친척인 관계로 인해 정재 류치명이 현재 서울에 있을때 나의 백부 신암공 이병하에게 금전을 신암공 이병하가 빌려주었던 이야기도 정재 류치명 행장에 나올 정도로 수많은 기록을 남겼다.
나의 6대조 고모부 전주류씨 류치상 이만우(진성이씨)의 자 이중명도 표에 보이는 곳과 통혼하였고 몇겹으로 통혼한 것이 이곳이며 그 영향인지 몰라도 항일독립운동 이야기 안해도 아래 기사를 보면 더욱 잘알수 있을것이다.
나의 선조의 의병 항일독립운동의 기록 역사이다.
정재 류치명의 후손과 관련 자료
정재종택은 1861년에 정재선생이 별세한 이후 류지호,류연박, 류동시, 류택번,류광준,류성호(현 종손)로 종손이 이어졌다.
특히 류치명의 아들 세산 류지호(1825~1904), 장손 류연박(1844~1925)과 차손 류연성(1857~1919), 증손자 류동시(1886~1961)와 류동저(1892~1948)의 3대는 의병항쟁에서부터 1919년 3. 1운동 등 독립운동에 참가하였다.
류지호의 자는 원좌 호는 세산이다. 생부는 류치명의 삼종제 류치검이며,9살 때 입후되었다. 그는 1873년에 음보로 감역監役에 제수되어 사헌부감찰,종묘서령 등을 지냈으며, 외직으로 신창현감,간성현감,연천군수, 장기현감 등을 지냈다. 1902년에는 2품에 올라 중추원칙임관을 역임했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 등으로 전국적으로 의병 항쟁이 일어나자 70세의 류지호는 김흥락,김도화,류도성 등과 의병을 일으키고 의병장을 뽑는 일에 참여하여 권세연을 의병장으로 선발하고 향교에 진영을 설치하였다.
류연박의 자는 경심,호는 수촌이다. 김흥락의 문인으로 1882년 과거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다.
그는 항상 청렴하고 근검절약하면서 자녀교육과 조상을 섬기면서 평생을 지냈다. 1895년 안동의진에 참여하였고 1912년 안동 계몽운동을 주도했던 협동학교가 한들로 옮겨왔을 때 장소를 제공하였다.
1919년 3월 제1차 유림단의거인 ‘파리장서’에 서명하여 그해 4월 12일 체포되었으며, 1995년에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류연박의 동생 류연성은 1919년 3.1 운동 당시 임동장터에서 군중들에게 독립만세 운동의 당위성을 설명하고 앞장서서 만세를 불렀다. 이로 인해 7년형을 선고받고 1919년 9월 25일에 대구감옥에서 순국하였다.
정재의 증손자이자 류연박의 아들인 류동시는 고종의 장례때 상경하여 3.1 운동을 목격하고 안동에 내려와 삼촌인 류연성과 함께 안동의 만세운동을 이끌었다.
류동시의 아들 류택번이 요절하자 정재종택의 대를 이은 류광준은 성산이씨와 결혼하여 현 종손인 류성호를 두었다. 현 종손인 류성호는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조부가 조졸하였고 3살 때 아버지마저 조졸하여 증조부 류동시의 슬하에서 가르침을 받으면서 어려서부터 종손의 책무를 맡으면서 현재까지 정재종택을 이끌고 있다.
아래 출처) 국학진흥원 전주류씨 수곡파 문중 학술대회 책자에서 발췌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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