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 방편으로서의 소리
3.이근의 성품
불교에서 소리는 진리 체득의 수행과 중생교화의 매체이자 방편이다. 불교에서 논하는 인간의 감각기관인 육근(六根) 가운데 청각인 이근은 가장 예민한 기관으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통로이다. 천태지의(天台智顗, 538∼597)는 『법화경현의(法華經玄義)』에서 '다른 국토는 다른 근이 모두 날카로워 육경에 따라 이를 일으켜 타인으로 하여금 이익을 얻게 하고, 우리가 사는 이 국토는 이근이 날카로워서 성진(聲塵)만을 치우쳐 사용한다'라고 하면서 소리를 인식하는 청각[耳根]의 중요성을 언급한다.
소리 수행이 왜 다른 수행의 방편에 비해서 최상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은 『능엄경』의 이근원통장(耳根圓通章)에 언급되어 있다. 이근원통장에서는 25위(位)의 대보살들이 깨달음 얻을 수 있었던 원통방편을 열거한다. 부처님께서 문수보살에게 수행 방편의 시비를 가려보라고 주문하자, 그 수행법을 평가하면서 관세음보살의 이근원통을 최상의 방편이라고 찬탄한다. 이근원통은 '이근을 닦으면 완전한 깨달음에 이른다'는 뜻이다. 눈(眼)은 멀거나 담장이 있으면 볼 수 없고 코(鼻)도 마찬가지다. 이처럼 다른 기관들은 접촉[觸]해야 대상을 제대로 알 수 있는데, 귀(耳)는 접촉하지 않고도 소리를 체(體)로 하는 이근의 '듣는 성품[聞性]'을 통해 바로 깨달음에 이르게 되므로 가장 수승한 것이다.
1)원진실
원진실(圓眞實)은 소리를 들을 때 공간적 제한이 없는 이근의 본성을 의미한다. 사방에서 동시에 여러 북을 치더라도 우리가 그 소리를 한자리에서 전부 들을 수 있는 것과 같다. 이근의 문성(聞性)은 일체의 시간에 걸쳐 두루 하고, 일체의 장소에 두루하며, 듣는 경계가 무한하게 광대하여 횡으로는 시방에 두루 하고, 삼세에 두루하다. 이는 소리의 성품이 진여의 원담성(圓湛性)을 잘 드러내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원진실에 대해 문수보살은 다음과 같이 찬탄한다.
제가 지금 여래께 사룁니다. 관세음보살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사람들이 고요히 머물고 있을 때, 시방에서 한꺼번에 북을 치면 열 곳 소리를 한꺼번에 다 듣게 되므로 이를 원진실이라 합니다.
완전한 관음이란 소리의 모양에 따라 분별을 일으키지 않고 모든 일어나는 소리에서 자성을 보는 반문문성의 길이다. 따라서 들음을 돌이켜 자성을 들어 분별하지 않는다는 뜻에서 원(圓)이라 하고, 모든 것이 실상이라는 뜻에서 진실(眞實)이라 표현한다.
2)통진실
통진실(通眞實)은 어떤 조건이라도 걸림 없이 통하는 이근의 본래 성품을 말한다. 눈은 우리가 머무는 공간 밖의 대상을 보지 못한다. 그러나 이근은 장애물이 있거나 없거나 대상의 멀고 가까움에 관계없이 인식할 수 있다. 이러한 이근의 작용은 소리가 육경 중에서 가장 전달이 잘되기 때문이다. 육근 중에서 이근을 제외한 나머지 오근[眼鼻舌身意]으로는 진실한 원통을 깨달을 수 없다.
눈으로는 담장 밖의 것[障外色]을 보지 못하고, 입과 코로도 역시 그러하다. 몸으로는 접촉하는 대상과 합해야 앎이 생기고, 마음과 생각은 분잡하여 단서가 없는 것이다. 이근은 담장에 막혀도 음향을 듣고, 멀거나 가깝거나 모두 들을 수 있으니, 오근과는 같지 않으므로 이것이 통진실이다.
위의 전거는 염부제 중생에게 귀의 감각이 다른 기관에 비해서 가장 밝게 열려 있음을 강조한다. 시력이 좋더라도 장애물 뒤의 사물을 확인할 수 없으며, 입이나 코 등도 직접 닿지 않으면 어떠한 감각인지 알 수 없다. 하지만 귀는 눈, 코 등의 다른 감각기관보다도 월등해서 다른 감각기관에 비해 그 자성을 관찰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따라서 두루 통하여 진실할 수 있다는 뜻에서 통진실이라 한다.
관음법문의 특징[明眞選三]을 통진실이라 하는데, 강조하고자 하는 특징에 따라 원진실이나 상진실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모든 소리를 분별하지 않는다는 뜻에서 원(圓)이라 하고, 멀고 가까움에 차별이 없으므로 통(通)이라 한다. 그리고 조건에 따라 실상이 변하지 않고 유지되므로 상(常)이라 한다. 이것이 바로 소리 자성의 특징인 것이다.
3)상진실
상진실(常眞實)은 소리의 있음과 없음에 관계없이 듣는 성품을 돌이켜 본다는 것이며, 모든 분별을 떠나 일정하게 유지되는 이근의 성품을 뜻한다.
소리의 성질은 움직이고 고요해서 듣는 가운데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소리가 없으면 듣는 것이 없다고 하지만, 실제로 듣는 성질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근은 꿈속에서도 소리를 들을 수 있으며, '소리 들음'을 인식하지 못한다고 해서 소리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소리가 없을 때도 문성은 없어지지 않고, 소리가 있을 때도 생기지 않아서 생(生)과 멸(滅) 두 가지를 원만히 떠난다. 이를 상진실이라 한다.
음성[소리의 성품]은 움직이기도 하고 고요하기도 해서, 듣는 가운데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소리가 없을 때는 들음도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진실로 듣는 성품은 없는 것이 아니고, 소리가 없더라도 그 성품이 없어진 것도 아니다. 소리가 있어도 생긴 것이 아니어서, 생멸의 두 가지를 멀리 떠나 있으니, 이것은 틀림없는 상진실이다.
소리의 있고 없음에 따라 듣고, 듣지 못하고가 아니라 항상 그것을 듣는 성품을 돌이켜 본다는 것이다. 성품은 소리가 있고, 없음에 따라 생기하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항상 참답게 밝으므로 상진실이라 표현한다. 물론 그렇다고 영원하다는 뜻은 아니다. 상(常)은 허무와 영원, 생성과 소멸을 벗어난 중도의 자리를 표현하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의미하는 소리의 동정(動靜)에 대한 이근의 성품에 대하여 개운화상은 '움직이고 고요하여 있고 없음은 모두가 대상인 소리에 소속하니, 귀는 원만하게 여의어서 나고 멸함을 따르지 아니하나니 이는 곧 성품의 진실'이라 설명하고 있다.
비록 꿈을 꾸고 있더라도 생각이 있는 것도 없는 것이 아니므로, 각관이 사유를 떠나서 몸과 마음으로 미치지 못한다.
위 게송은 이근의 성품은 꿈에서도 작동하므로 오근보다 수승함을 밝히고 있다. 오근은 항상 의식을 의지하기 때문에 분별되거나 의식이 있고 없음에 따라 생하고 멸함이 있다. 하지만 이근은 꿈꾸면서도 들을 수 있고, 또 사유하지 않아도 들을 수 있으므로[聞性] 항상 깨어 있다.
4)육근호용
육근호용(六根互用)은 하나의 근으로써 허망한 분별이 모두 소멸하면, 본연과 원통을 이루게 되고 육근이 모두 풀어져 일시에 청청해짐을 의미한다. 이근이 본래의 성품으로 돌아가 육근의 해탈을 이룬다는 육근호용에 대한 『능엄경』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듣는 것은 저절로 발생하지 않고 '소리'로 인하여 이름이 있게 되었다. 듣는 것을 돌이켜서 소리에서 벗어나면, 이미 해탈이므로 다시 무엇이라고 이름하겠는가. 하나의 감각기관[根]을 돌이켜서 근원으로 돌아가면, 여섯 가지 감각[六根] 또한 해탈을 이루게 된다.
즉 육근 가운데서 이근에 집중하여 수행하면 나머지 오근도 동시에 초월한다는 것이 이근원통의 교설이다. 이근 하나로 나머지 오근도 다 같이 통해서 육근호용되면, 비로소 마음이 오온(五蘊)의 굴레에서 벗어나 대자유와 대자재를 성취하는 것이다.
그리고 세존이 하나의 문(門)에 깊이 들어가서 허망이 없어지면 육지근(六知根)이 일시에 청정해진다고 밝힌 것에 대해 아난이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세존은 육근의 근본원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지금 너는 먼저 눈앞의 육근이 하나인지, 여섯으로 나누어져 있는지 살펴봐야 한다. 아난아! 만일 하나라면 귀로는 왜 보지 못하고, 눈으로는 왜 듣지 못하며, 머리는 왜 다니지 못하며, 발은 왜 말하지 못하느냐? 만일 이 육근이 분명히 여섯이라면 내가 지금 이 모임에서 너희들과 함께 미묘한 법문을 설할 때, 너의 육근 중에서 어느 것이 이를 받아들이느냐? …(중략)… 너의 귀가 스스로 듣는다면, 너의 몸과 입은 무슨 관계가 있어서 입으로 나에게 의미를 묻고 몸은 또 일어서서 공경히 받들겠느냐? 그러므로 마땅히 하나가 아니라 여섯이며 여섯이 아니라 하나이니, 결국 너의 육근은 원래 하나도 아니고 여섯도 아니다.
육근의 본바탕은 일심(一心)이다. 일심은 하나의 마음자리로 여래장의 묘진여성에서 육근이 이루어진 것이다. 하나의 마음이 시각・청각・후각・미각・촉각・지각을 형성하기 때문에 여섯도 아니고, 하나도 아니다. 이것은 육근의 근본 핵심으로 '원래 비일비육(非一非六)이다'라고 밝힌 뜻과 같다. 육근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여 하나에 깊이 들어가 번뇌가 사라지면, 다른 것도 일시에 전부 사라진다는 것을 밝히고자 함이다.
이 근은 하나도 아니고 여섯도 아니지만, 시작이 없는 옛날부터 전도(顚倒)되어 빠지고 잠겨있기 때문에 본래 원만하고 고요한 가운데 하나이니 여섯이니 하는 의론(議論)이 생겼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아난아) 너는 수다원으로 비록 육결(六結)은 소멸하였으나 아직 하나를 없애지 못한 것이다. 마치 태허공(太虛空)을 여러 가지 다른 그릇에 담아 놓으면 그릇의 모양이 다르다 해서 '허공이 다르다'고 하다가, 그릇을 치우고 빈 공간을 보면 '허공은 하나구나'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저 태허공이 어떻게 너 때문에 같기도 하고 같지 않기도 하겠으며, 어떻게 '하나다, 하나가 아니다'라고 하겠는가? 네가 깨닫고 알아 여섯 가지로 수용하는 근[六受用根]도 이와 같다.
『능엄경』에서는 육근이 하나도 아닌 이유를 허공을 그릇에 담는 것에 비유하여 설명하기도 한다. 위의 인용문에서 '여섯 가지로 수용하는 근도 이와 같다'라고 하는 비유는, 『능엄경정맥소』에서 더 자세하게 설명된다.
첫째, 하나로부터 여섯을 이루는 비유를 대입한다. 원담성이 육근으로 맺히고 막혔다는 것이다. 근이 여섯이므로 육성(六性)이라고 하지만, 이는 근이 여섯인 것이 본래 원담과 무관함을 전혀 알지 못한 탓이다. 맺히고 막힘으로 인해 성이 여섯이라 한 것은 참으로 허망한 계교(計巧)이다. 둘째, 여섯을 제쳐놓고 하나라고 하는 비유를 대입하면, 육근을 소멸하여 하나의 성을 세운다는 것이다. 근이 맺히고 막히기 전에 어떻게 먼저 이유 없이 성이 하나라고 하겠으며, 지금 근을 녹인 뒤에는 무엇 때문에 하나를 세우는지를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또한 상대하여 허망하게 세운 것으로, 본래 진실이 아니다. 셋째, 진체는 무관하다는 비유를 대입하면 둘로 나눌 수 있다. 먼저 계교를 파함에 대입하면 근이 맺히고 막힘으로 인하여 성이 여섯이라 하고, 근을 녹였으니 성이 하나라 한다. 그러나 이것도 단지 언설일 뿐이다. 원담성(圓湛性)이 어떻게 언설로 인해 하나와 여섯의 다름을 세우겠냐는 것이니, 앞의 하나와 여섯을 아울러 버린 것이다. 끝에서 계속될 계교를 막음에 대입하면, 여섯을 녹임으로 인해 하나를 세운다면 하나와 여섯이 모두 허망에 떨어진다. 하물며 하나를 파함으로 인해 다시 하나가 아니라고 하겠는가. 그러니 하나와 하나가 아님은 더욱더 허망하여 그침이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말한 의도는 2승 열반을 파한 후에 다시 열반도 아니라고 헤아리는 사람이 있을까 염려한 나머지 거듭 버린 것이다. 그러나 근성이 '하나다, 여섯이다'하는 말이 모두 허망한데, 허공과 그릇과의 관계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근성에는 본래 '하나다, 여섯이다' 하는 것이 없으므로, 하나가 멸하면 여섯이 전부 없어진다. 이러한 원리는 근이 전도의 주요한 원인이자 중매자 역할이 될 수 있음을 뜻한다.
이근은 동(動)과 정(靜)으로 형성된다. 이근의 대상인 소리가 연기하여 유전문으로 들어가면, 티끌로 사람의 마음을 더럽히기에 티끌[塵]이라고 한다. 그리고 사람을 미망에 빠뜨려 망(妄)이라고도 하며, 선(善)을 쇠멸시키기에 쇠(衰)라고도 하고, 모든 선법(善法)을 핍박하기에 적(賊)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반대로 환멸문으로 흘러가는 인연을 접하게 되면 괴로움의 원인이 사라진다고 하는 불교의 근본적인 교리인 연기법은 대개 괴로움[老, 死, 憂, 悲, 苦, 惱]이 성립되는 과정을 나타내는 유전연기와 괴로움이 소멸되는 과정인 환멸연기라는 두 가지 방식으로 설해진다. 따라서 앞의 소리 수행은 환멸문에 가깝게 하는 매개가 될 것이다. 생멸심의 원인으로 불생불멸의 불성(佛性)을 겹겹이 가리는 오탁(五濁)을 들고 있다. 결국 수행의 과정은 이 오탁을 정화하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오탁의 개념은 『능엄경』에서 오음마(五陰魔)를 설하는 부분에서 각각의 오음에 배대하여 수행자가 경계에 현혹되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결국 수행의 목적은 생멸심을 소멸하는 것이며, 이는 오탁을 정화하고 오음마를 극복하는 과정이다. 이러한 수행의 단계성에 가장 충실한 원통이 이근원통이다. 또한 생멸심(生滅心)에 의지하는 염불원통과는 달리 생멸심에 의지하지 않고 처음부터 문성을 관(觀)하는 이근원통을 최상의 수행이다.
<불교에서 소리의 공능에 관한 연구/ 이태영 동국대학교 대학원 불교학과 박사학위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