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룡산아래 신도안은 그대로 있다2.
三神堂을 찾아서
계룡산의 신도안에 삼군본부가 들어설 때 주변의 모든 종교시설물이 철거되었거나 이주를 하게 되었는데 서릿발 같은 강압분위기 에서도 유독 두개의 건물이 철거되지 않고 남아 있다.
그 중에서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한 삼신당이라는 건물이 그 하나인데, 이곳이 어떠한 장소이기에 그렇게 살아남게 되었을까?
‘천생팔자가 누룽밥이라’ 내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다른 사람은 대단하게 여기지 않는 누릉밥 정도라도 하찮은 것에도 의미를 달고 찾아보는 것 그 것이 진정 기쁨을 누리는 여정의 백미인 것이 아닐까?
‘찰찰察察이 不察이니’ 무엇에 한번 맛을 붙이면 끈덕지게 떨어지기 싫어함으로 알기에 노력하고 아는 것만큼 보인다고 했지만 그 보는 재미란 것이 야릇한 것을 살짝 보는 것만큼이나 짜릿한 것을 어찌하랴!
삼신당을 찾아보기 전에 잠시 약간의 사전지식이 필요한 것 같다.
우리 주위에는 애 3이라는 숫자가 그렇게 많이 보일까?
흔히 하는 삼세번으로 시작해서 자식을 점지해 준다는 삼신할매, 서울의 삼각산, 우리나라 대표적기업인 삼성그룹, 삼강오륜, 삼위일체, 삼세석불, 삼정승, 삼태극 그리고 석삼극 등......
여기에 한 부분은 알고가야 재미가 있을 것 같아 보인다.
남대문이 불타고 국보1호로 지정하자는 움직임이 보이는 천부경天符經 81자.
그 속에 유명한 석삼극무진본析三極無盡本이라는 글이 나오는데 여기서도 3자가 나오는데 이 부분에 대해 좀 알아볼 필요가 있다.
어려운 부분이라 해석도 다양하지만 김일훈옹 이 분은 민의학에 대가이신 분으로 이 분이 생전에 강연하신 내용이 용어는 어려워도 재미있게 되어 있어 여기서 인용해본다.
“천부경의 석삼극무진본에 대해서 삼극론(三極論)이 여기서 나와 시작하는데, 그래 왜 이걸 우리도 알게 쓰지 않았느냐 하는 사람도 없어요.
그럼 거기에 3종류로 나눠 놓고 뭣이 나오느냐?
거 많은 3종류인데 천지인삼재지도(天地人三才之道)에 들어가 3종류는 삼생만물(三生萬物)까지 천개어자(天開於子), 지벽어축(地闢於丑), 인생어인(人生於寅). 그래 그 3종류를 내내 따져 나가면 수천억이 나와요.
거기 뭣이 있느냐?
사람은 흙에서 생긴 물체이기 때문에 황색이 제일 먼저 주인공이라.
황색이 주인공인데.
황색에서 따라서 변하는 건 토생금(土生金)의 원리로 백색이 나오기로 돼 있어.
백색은 금기(金氣)라, 황색은 토기(土氣)이고. 토색 왈 황(黃)이요, 금색 왈 백(白)인데. 그래 토생금은 자연의 원리기 때문에 백인종이 나오기로 돼 있고.
황인종은 인의(仁義)도덕이 근본이고 백인종은 의리는 있어도 그 사람들은 용맹을 세워. 그래서 무기까지 개발해, 선구자야.
그러면 금생수 하는 원리로 백색에서 변해서 흑색이 또 나와, 그럼 흑인종이라. 흑인종은 뭐이냐?
이건 힘이 있는 걸 자랑으로 여기고, 우리도 상고(上古)엔 그랬지요.
흑인종은 오늘까지 힘이 앞서는 걸 자랑으로 여긴다.
그런가 하면 또 욕심이 또 많아.
그래 강욕자 왈(强慾者曰) 흑인(黑人)이라 하는 거거든, 이런데.
이건 인간의 삼종(三種)도 사실에서 벗어날 수 없는 거.
그러면 초목(草木)의 삼종도 마찬가지라.
초목의 조상은 버들나무[버드나무]인데, 거 물에 이끼 끼는 거 있어요, 청태(靑苔)라고.
이끼 끼는 이끼, 버들이 돼요. 건 내가 눈으로 본 일도 있고, 건 사실이고, 이런데.
이치만 가지고 확실하다는 건 자연에 있어서는 사실이나 그건 과학적으론 증명자료가 돼야, 그래서 나는 본 일이 있어요.
금강산 묘향산에 오래 살았기 때문에, 그런데.
거기에 버들나무도 세 종류라, 삼형제라.
소낙비가 오는 것도 하루 세 번 오는데, 걸 삼형제라고 그러지? 이런데.
버들나무가 있고, 고 다음 번에 생긴 놈이 수양버들, 고 다음 번에 생긴 놈이 백양(白楊),
거기서 생긴 소나무가 있는데. 소나무도, 소나무에 잣나무 있고 전나무가 있다.
그럼 그 다음에 생기는 향나무가 있어. 향나무엔 참향나무가 있는데,
고 다음엔 넉 줄이 뻗는 묘향나무가 있고.
고 다음엔 노가지향나무(노간주향나무), 두향나무라고 해요. 그것도 삼형제라.
그래서 거기 쪽 가면서 삼형제에서 삼형제를 두게 되면 몇 만으로 변할 수 있어요.
그래서 복숭아도 몇 백 종류가 될 수 있고, 포도나 이런 것도 그래요. 머루까지 나가면 상당한 종류가 있어요.
그러기 때문에 이 삼극에 가게 되면 무진본(無盡本)이야. 그 근본이 끝날 수가 없어.
이래서 내가 천부경에, 왜 젊어서 머리 좋을 적에 붓을 안 드느냐?
천부경을 써 놓게 되면 세상에 글이 없어져. 어떤 경전이고 다 없어져.
천부경은 천지가 생긴 이후에 그 이상의 글이 나올 수가 없어. 만약 석삼극무진본 하나 끝나는 덴 주역 같은 책이 천 권이 넘을 거요.
내가 그걸 죄다 밝히면 천부경을, 여든하나 천부경을 다 끝내는 날이면 지
구엔 글이 없어져 버려. 그래서 죽은 후에 후세에 참고자료로 전할 순 있어도 살아서 그걸 글이라고 세상에 자랑할 거리는 못돼요.
너무 좋아요, 너무 좋은데. 내가 이야기하는 건, 그게 지금 삼극론에 들어가서 무진본이기 때문에 우리의 가장 필요한 얘기가 거기 전부가 있다 이거요.“(김인훈저 신의원초에서)
결국 하나의 근본이 형상으로 나타날때는 세가지로 보인다는 것을 읨하는 것으로 하나가 셋이요 셋이 하난라는 말씀이니 조금 생소한 이야기 일 수 있지만 엄청나게 중요한 글인지라 이러한 짤막한 배경이 있어야 삼신당을 찾아가는 산행길이 가벼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
태조이성계와 무학 대사는 국가의 새로운 터를 잡기위하여 전국의 유명산천을 다니면서 천일기도를 하게 되는데 그 대표적인 남해에 있는 보리암 근처에서 기도를 하게된다. 여기에는 이성계의 기도처인 태조기단이 있다.
이성계는 기도에 보답하는 차원에서 보광산을 금산이라 개명했다.
“이성계가 조선 건국을 기원하는 100일 기도를 올리며 매달린 절대자 셋은 한인桓因과 한웅桓雄 그리고 단군, 이렇게 3대다.
이성계 영가는 “그렇지만 단군 할아버지와 석가모니가 반목한 것은 결코 아니다”고 강조하면서 조선 태조 기단 위쪽의 삼불암三佛巖을 보기로 들었다.
바위 셋 중 하나는 누워 있고, 둘은 서 있다.
이 바위 셋의 모습이 꼭 앉아 있는 부처 같다.
이성계 영가가 100일 기도를 하기 전까지 바위 셋은 죄다 누워 있었다.
기도를 마치자 바위 둘이 일어나 앉았다.
나머지 하나는 끝까지 일어나지 않았다.
셋이 다 일어났다면 이성계는 조선의 국왕을 넘어설 수 있었다.
중국까지 손아귀에 쥔 황제가 될 수 있었다.
단군과 석가가 각자 평가, 추후 맞춰 보고 공감한 이성계의 그릇 크기는 그러나 조선까지였다.”
(2006년3월6일자 주간조선)
그리고 여러 산에 기도를 거쳐 마이산에서 천신으로부터 보검을 하사받게 되는데 이곳 마이산에 있는 은수사에는 팔각정이 있다.
사람들이 이곳을 찾으면 마이산과 돌탑만 보고 지나치게 되는데 이곳 팔각정에는 단군화상이 있고 태조 이성계가 도검을 하사받는 그림이 남아 있다.
이곳에는 태조 이성계가 기도를 하고 그 증표로 씨앗을 심었는데 그것이 싹터 자란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는 청실돌배나무가 은수사 절 안에서 자라고 있다.
그렇다면 이성계와 무학은 계룡산에서도 많은 기도를 하지 않았을까?
바로 기도를 드린 장소가 ‘제석사(帝釋寺)’와 ‘삼신당(三神堂’)이 있는 장소이다.
아쉽게도 이곳 제석사와 삼신당은 일반인들의 출입이 통제되는 군부대내에 위치하고 있어 찿아 보기가 어렵다.
6·20사업으로 신도 안 계룡대에 있는 모든 종교단체들이 철거되었음에도 이곳 2곳만 건재하고 있으니 무엇이 이들을 지켜보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그러나 이곳 특히 삼신당이 20년간 독립운동을 지원한 애국운동의 살아있는 장소라는 것을 안다면 자연히 숙연해 질 것이다.
우연한 기회에 이곳을 방문해보았는데 바로 그 유명한 암용추를 지나 200여 미터 산중턱에 자리 잡고 있었다. 삼신당은 큰 나무들이 많은 것을 보면 경치가 무척 빼어난 곳이다.
삼신을 모신 천단天壇인 대전각大殿閣이 있고 뒤에는 그리 깊지는 않지만 천연 동굴이 있는 데 이곳은 태조 이성계가 임금이 되려 할 때 이 동굴에 와서 얼마간 기도를 올린 곳이라고 한다.
삼신당을 전각이라 부르는 것도 그런 뜻인 것 같다.
옛날 중원대륙의 구년홍수때 우임금이 이곳에 와서 산제를 지냈다고 하는 산제당 터가 있고 우임금이 다녀갔다고 하여 이 골짜기를 우禹자에 자취 跡자를 써서 禹跡골이라고 불리고 있으니 이로 미루어 단군시대에도 이 곳을 중요시 하였던 것 같다.
고려 때 목화가 들어오기 전에 옷감으로 많이 쓰였던 삼(麻)이 이산에 많았다는 기록이 있고 껍질을 벗긴 삼대를 겨릅'이라 하기 때문에 겨릅산이라 했다.
이는 계룡산 주변이 삼을 짜는 직녀를 의미하는 마고麻姑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鷄라는 말은 해를 의미하고 龍은 별을 의미하는데 산의 서쪽을 上月 또는 月午라 하여 유난히 달을 의미하는 표현으로 미루어 계룡산이 해와 달과 북두칠성의 천부天符를 가진 산이라 보인다.
그리고 수도장 시설로 적 벽돌 양옥 이층의 태상전(太上殿) 대강당이 있다.
관리자가 바꾸었는지 문에 굳게 시건장치를 해놓았는데 안을 볼 수는 없었다.
이곳을 본 분의 말씀으로는 전각에는 태극 문양이 아름다웠고, 천정에는 중앙에서 사방으로 뻗어나간 무지개 색의 찬란하고 아름다운 그림으로 장식돼 있었고 이것은 삼태극(三太極)으로, 그것은 한국이 중앙이 되어 세계를 향해서 뻗어나간다는 뜻이라고 했다.
아마 이곳에는 누군가에 의해 무속이 행해지는 것 같은데 진정 뜻이 있는 자라면 이 삼신당을 그렇게 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이곳에 있는 커다란 넙적한 돌인 만복암(萬福岩)은 이태조가 백일기도를 한자리로 알려져 있었기에 유명하기도 하다.
그리고 바위동굴은 무학 대사가 기도 한 곳이라 한다.
삼신당은 1983년에 이곳을 내주고 장태산 휴양림 근처에 이곳 모습을 그대로 재연하여 이주하고 있는데 한번 찾아가 보니 아담한 모습을 잘 재현해 놓았다.
삼신당(三神堂)현판은 정원강 선생이 직접 쓰신 것이라고 하는데 당 안에 모셔진 것이 특이 했다.
지금은 정원강선생의 며느리인 박영숙 여사가 이곳을 지키고 계시는데 80이 넘으신 분이 자세하나 흐트러지지 않고 삼신당의 유래를 설명하시는데 말씀하시는 것이 또렷하면서도 소리의 굴곡이 없으신 것을 보니 많은 지혜를 받은 분 같았다.
삼신당 법칙은 천지인 (天地人)삼신인데 천(天)은 하늘이요. 지(地)는 땅이요. 인(人)은 사람이라 천지인 삼라만사 만물이 생(生)하고 사(死)하고 하는데 세상만물 중에 사람이 최고 귀하니, 첫째 내 영을 닦아 불심을 길러야 하고, 둘째 삼강오륜을 지켜 유를 길러야 하고, 셋째 연구조화선법을 길러야 하나니 그래서 유불선삼교니라.
어쨌든 3가지 중 하나만 빼놓으면 코끼리 하나놓고 세 사람이 더듬어 보고 다투는 격이라고 한다.
박영숙 여사가 오래전에 구술예언을 한 것이 있는데 참 흥미롭다.
“송도 3백년 운은 씨를 뿌리는 격으로 사람들이 어둔하고, 삼각산 한양 오백년은 싹을 가꾸는 격으로 사람들이 삼강오륜을 숭상하고 예를 바로 잡아 지킨다.
계룡산 8백년 도읍에는 이미 다 배울 대로 다 배워서 머리가 비상하고 깨칠 대로 깨쳐서 사람들이 미련한 사람이 없으며 밝고 맑아지며 가을열매를 거두는 시기라.
가야산 천년도읍에는 편안하게 사는 시절로 밥도 안 해 먹고 약만 먹으면서 사는 시대로 겨울에 저장하는 시기이라.
삼백년 도읍시절에는 40살이 종명(終命: 인간수명)이고, 그러므로 10세나 12세에 결혼을 함이 적절하고, 삼각산 오백년 시절에는 60살이 종명으로 15세나 18세에 결혼함이 적절하고, 계룡산 8백년 시절에는 80살이 종명으로 30세나 32세 또는 33세에 결혼함이 적절하며, 가야산 도읍에는 100살이 종명이니35세나 40세에 혼례를 갖출 것이다.
앞으로는 앉아서 천리, 서서 만리를 볼 것이다.
또 빨래를 안 하고 꼬매지도 않는다.
두드리지도 않고 밥하는 사람은 밥만 하고 떡 하는 사람은 떡 만 하고 바느질하는 사람은 바느질만 할 것이고 양반 상하가 다 없어지고, 어른 아이를 몰라보고 남녀가 구별이 없고 부자지간에도 재판하고 형제지간에도 재판한다.“
한 40분 그늘 아래에서 어른의 말씀이신지라 움직이지도 못하고 강연을 들고 안내를 받아 삼신당 안을 보게 되었다.
그 흔한 조각성물도 없었고 탱화도 없었다.
마치 초현대식 화랑에 온 것 같은 착각이 들었는데, 울긋불긋 알 수 없는 색깔로 그려진 문양이 천정에서부터 벽면까지 그려져 있었다.
우리 민족이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삼신(三神)사상을 나타내고 있는 장소이다.
천정에는 천단(天壇)을 상징하는 삼태극(三太極)의 팔괘문양을 그려놓았다.
오른쪽부터 하늘을 상징하는 천(天: 元天上帝), 가운데는 인간을 상징하는 인(人: 人皇)을 그리고 맨 왼쪽으로 땅을 상징하는 지(地: 元始地皇)의 단을 모시고 있다.
천을 상징하는 둥근 원은 검은색으로 칠해져 있고 지를 상징하는 둥근 원은 황색으로 칠해져 있으며 인을 상징하는 원은 검은색과 황색의 두 원으로 그려져 있었다.
천자문에서 읖조리던 하늘 천, 땅 지, 검을 현, 누를 황.......하늘은 위에 있어 그 빛이 검고 땅은 아래 있어 그 빛이 누렇다.
딱 맞는 표현이다.
그 어떤 형상으로 만들지지 않고 채색으로 그려져 있으니 한마디로 환상적인 그림이다.
천황天皇, 지황地皇, 인황人皇의 삼황三皇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는 천지인을 신격화하여 천황, 지황, 인황이라고 하였는데 우리 굿의 무가사설에 ‘천개어자天開於子하니 천황天皇씨 나겨시고, 지벽어축地闢於丑하니 지황地皇씨 나겨시고, 인생어인人生於寅하니 인황人皇씨 나겨시고’(칠성거리 머리부분 충청도 영동지역)라고 하는데
이는 천부경에서 밝힌 일석삼극의 원리를 창세의 원리로 풀어 쓴 것이다.
즉 일신상제께서 스스로 계셔 삼신이 되시니, 첫 신인 제일신은 북방의 하늘을 열어 양기를 태어나게 하시여 천황이라고 하고 두 번째 신인 제이신은 북동북방의 하늘을 열러 음기를 태어나게 하여 지황이라고 하고, 세번째 신인 제삼신은 동북방의 하늘을 열어 음기와 양기를 조화시키는 조화의 기로 인간을 태어나게 하여 인황이라고 한다.(노중평저 고조선의 종교혁명중에서)
천지인을 상징하는 문향이 특이해서 몇 번이고 쳐다보았는데 안정감을 주면서 신비감과 묘한 느낌을 주는 곳이다.
우리의 삼신사상을 재구성하고 여기에 사용되는 문향을 잘 재현해서 여러 군데 쓸 수 만 있다면 정말 어울릴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천정에는 천단을 상징하는 삼태극三太極의 팔괘문양을 그려 놓았다.
삼태극은 우리민족인 동이족이 고유하게 보존해온 문양으로 우리가 자주 보는 음양의 두가지 태극문양은 중국민족인 하화夏華족이 쓰는 문양이다.
우리는 조상들이 가지고 왔던 우리 정신세계를 함축한 이러한 삼태극을 소홀히 하고 있으니, 중국인과 인도인 그리고 서양인들은 음양의 대립에 의한 2분법적인 사고에 빠져 세상을 선과 악, 대립과 투쟁, 도전과 응전으로만 보고 있다.
이로 인하여 이를 조율하는 중간자가 없고 심지어는 천당에 보낸다거나 지옥에 보낸다는 2분법적인 사고로 사람을 위협하기에 이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에 반하여 삼태극은 선과 악의 모순적인 대립구조가 나오지 아니하고 잘못이 있을 때 부정을 탓다고 하여 이러한 부정을 풀어주는 행위를 축제속에서 같이하였을 뿐이다.
우리가 본래 가지고 있는 정신세계는 선과 악이 존재하지 않았다.
후에 외래종교가 들어오면서 이러한 선악의 색깔이 덧 씌어진 것이다.
계룡산에 있는 삼신당을 종교를 떠나 새로운 시대를 여는 패러다임으로 이용할 수는 없는지 뜻있는 분들의 마음자세가 아쉽다.
그렇지만 이러한 문향을 알고 쓰더라도 선조들의 뜻이 무엇인지 그 가르침을 정확히 알고 써야 하는 법이거늘 우리나라는 태극기 하나도 잘못 만들어져 쓰고 있으니 상징하는 그것을 잘못 그려서 얼마나 혼란이 오는지 알기나 하는가?
나라를 상징하는 한韓은 반란,쿠테타, 분열을 의미하는 한자임에도 어찌 된 이유인지 이러한 문자를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하게 되었는지
사소하다고 보여 지는 이러한 것들이 바로 국운과 직결되는 것임을 누가 알겠는가?
잘못된 것을 알아도 고치지 않는 우리의 자세가 잘못된 것이다.
그러니 강한 근성도 안보이고 외국에만 빌붙어 사는 무리들만 양산해내고 있으니 진정한 호연지기浩然之氣가 무엇인지
그 옆에 가면 칠성단七星壇이라고 하는 전각이 보인다.
보통 일반 절에 가면 대웅전위에 외톨이로 남아있는 이곳
바로 우리민족의 고유종교인 북두칠성신앙이 불교가 들어오면서 이를 불교화하여 이용하게 된 것이니 북두칠성의 별자리를 부처형태의 탱화로 그려놓고 있다.
그러나 이곳의 칠성단 문을 여는 순간 한줄기 시원한 느낌이 정수리에 내리꽂히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거의 충격으로 보였다.
절집에 있는 부처형상이 아닌 바로 별자리 천문도가 청색바탕위에 알록달록 하게 조각되어 있는 것을 보는 순간 나는 신비로움에 감탄사가 저절로 나왔다.
나는 이제야 우리의 별인 북두칠성을 본 것이다.
우리의 어머니들이 장독대위에 성수를 떠놓고 칠성별에 비나이다를 했던 그것을 떠올리면서 나도 모르게 경건해지기 시작했다.
칠성단에 새겨진 천문도를 바라보면서 흥미로운 별자리를 보게 되었으니
이 천문도에는 북극성과 북두칠성 그리고 삼태육성을 표시해 놓았는데 묘하게 생긴 별을 조각해놓고 있었다.
이별이 카시오페이아별인 것을 나중에 알게되면서 왜 서양의 천문도에서 나오는 이별이 우리의 삼신을 모시는 소중한 자리에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한동안 계속되었다.
천문학자인 박창범교수의 글을 일고 우리가 자랑하는 천문도인 天上列次分野地圖를 더듬어 가기를 계속하다 드디어 유명한 덕흥리 고분벽화에서 이별을 보게되니 묘한 흥분이 느껴지게 되었다.
중국과 일본의 천문에도 보이지 않는 이별은 예로부터 우리조상들이 북극성과 북두칠성과 더불어 고분에 벽화로 또한 암각화로 여러 곳에 사용해 온 우리의 별이었던 것임을 알게되니 조상들의 높은 천문지식과 삼신당을 세우신분들의 원대한 뜻앞에 부끄러운 마음이 들게되었다.
카시오페이아 즉 선후오성仙后五星은 우리별이었던 것이고 이러한 위대한 천문지식이 서양으로 전래된 것이 아닌가
계룡산 삼신당은 원래 평북태생의 백옥성(白玉星) 이라는 분이 묘향산에서 신도 안으로 이주해오면서 정도령이 오면 새로운 세상이 도래한다고 믿고 공부를 하던 중 이곳에 수도 하러온 정원강(鄭元剛)을 만나게 되었고 그를 사위로 삼게 되었다고 한다.
정원강은 “노송의 껍질은 따서 가루를 만들어 붓치고 일주일 만에 떼어보라“라는 습종의 특효약을 교시 받아 이병을 앓고 있던 이선달 등 애국지사와 독립군에게 전해줘 신통력과 도술을 인정받게 되었다고 한다.
이런 연유로 독립군과 애국지사들이 정씨를 따르자 계룡산 삼신당과 한양 삼각산에 독립기도를 드릴 수 있는 천단을 설치하게 되었다.
서울에서 부자들 몇 명이 자금을 내어 초하루 보름으로 구국기도를 올렸는데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쌀을 가마니로 떡을 하고 풍성한 재물을 차려 놓고 기도를 올린 뒤에 시국에 관한 토론을 하였다.
그러니까 겉으로는 종교단체 같았지만 그 내막은 나라를 되찾고자 염원하는 이들의 밀집이었던 것이다.
뜻이 있는 사람들이 전국적으로 모여들어 다 모여앉을 자리가 부족했다.
당시 경성태창방직의 백낙원, 백낙중 사장을 비롯한 많은 지사들의 협력이 있게 되었고 이층 양옥집을 지었다.
산꼭대기에 빨간 벽돌을 날라다 훌륭한 이층 벽돌집을 지었는데 지금까지 남아 있다.
이후 삼신당은 조선팔도 도사들이 만나 독립운동을 하는 거처로 변모했다고 한다.
매월초하루 보름날 한양삼각산에서는 저녁 술시(戌時)에, 계룡산에서는 밤 자시(子時)에 어김없이 대한민국의 독립에 대한 운수기도가 지성으로 시행되었다.
삼각산아래 손병희선생에 의해 비롯된 3·1운동이 실패하자 조성된 신도안 이주 열풍은 독립에 대한 열망이 넘쳐나게 되었다.
일제의 멸망을 기원하며 1921년에는 계룡산 신도 안에 임시정부를 세운다는 말까지 퍼지게 되고 많은 사람들이 이곳으로 이주하게 되었으며 심지어는 일본으로의 침공을 외치기까지 하는 위험한 수위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곳을 일제가 그냥 보고만 있었겠는가?
이곳에서의 민족주의 성향의 독립운동의 열기는 일본 제국주의로 부터 위험지역으로 낙인찍히게 되고 신종교단체를 탄압해 나가게 되는데 치졸하게도 사기, 폭력, 금품갈취, 음란행위 따위의 죄목을 씌어 마음대로 탄압하게 된다.
예수를 처형할 때 파렴치범을 나란히 십자가에 매달았던 것과 비슷하지 않은가?
계룡산은 독립을 실현해 줄 희망의 등잔이요, 신도안은 그 불꽃이 타오르는 심지가 되었으니 민족의 성지로 자리 매김하게 된다.
그렇지만 믿기지 않는 것은 신도 안에는 외국인이나 그 기운은 맥을 못 쓴다고 한다.
“계룡산 장군봉 밑에서 통신대대장인 미군소령인데, 새벽에 호랑이가 물어 메쳐서 죽었거든.
양갈보, 미군 죽은 거 보고 옷도 안 입고 내려왔어, 날이 밝아서.
그 이튿날 뜯어서 상봉에 옮겼거든 (그게 언젭니까?) 을축년(1949년) 해방 후 바로.
신도 안에 왜놈이 못 들어갔어. 주재소 안 죽으면 불나고 자꾸 죽어. 주재소 옮겼어. 되놈도 재미 못 봐. 되놈이 장터 점령하고 음식점 했는데 세 놈 죽으니 되놈 안 들어와.
왕도의 왕기(王氣) 시작도 안한 덴, 뭐이든 처음은 무서운 힘이거든, 외국기운은 맥을 못 써요“(김일훈저 신의원초 중에서)
광복 직후인 1948년, 미군은 계룡산 주봉인 천왕봉에 군용 통신 탑을 세우려 했다. 건축 과정에서 사망하거나 중상을 입는 병사가 속출했다.
미군을 물리고 우리나라 군인이 공사를 전담한 다음에야 탑이 완공될 수 있었다.
이후 통신시설 관리를 명분삼아 슬그머니 계룡산으로 돌아 온 미군은 원인불명의 통신장애가 잇따르자 한국군에게 모든 것을 넘긴 채 완전 철수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주간조선 2005년11월12일자)
그러나 아직도 우리는 해결되지 않는 역사의 미완을 기다리고 있으니 이곳이 우리의 독립운동의 역사적 증거이며 민족적 긍지와 자부심의 회복이라는 터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방치되고 있으니 애석할 뿐이다.
나라를 위하는 유적들이 함부로 방치되고 후손들에게 그분들의 정신을 가르치지 않는다면 나라를 위해 누가 일하려 하겠는가?
더욱 이곳에는 나라를 지키는 군인이 상주하고 있는 곳이 아닌가?
자신의 영달만을 꾀하는 시대에 부끄러울 뿐이다.
정원강 선생이 사상범으로, 독립운동혐의로 붙잡혀 경북성주경찰로 넘어가 고문 끝에 돌아가신 후, 그 며느리인 박영숙씨가 정원강 선생을 독립투사로 인정해주고 삼신당을 독립운동의 산실로 육성해달라고 외쳤건만 아직도 이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독립지사들의 기도장소로 그 숭고한 얼이 담긴 유물이 방치되어 손상되어가는 것을 보면서도 어찌할 수 없으니 역사 앞에 또 다른 죄를 짓는다는 의식이 깊이 든다.
삼일정신을 이어받은 우리 선조들이 애국과 동지애로 만주에서 관동군 총칼에 피 흘리고 죽어 가고 이곳에 계룡산아래에서 독립운동을 하시던 지사들의 그 고혼(孤魂)이 오늘까지 위로받을 곳이 없다는 것은 너무 허망하다.
이곳을 길이 보존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일어나기도 한다.
다행이 이곳을 계룡시에서 사적지로 정한 것 같은데 다행스러운 일이다.
계룡산에는 4곳에 계곡물이 모이는 커다란 웅덩이가 있어 서용추, 동용추, 남용추, 북용추로 불리었다고 한다.
서용추와 동용추는 현재의 숫용추와 암용추로 불리고, 남용추는 떨어져 나가 있고, 북용추는 갑사 쪽에 있다고 한다.
삼신당을 보고 하산 중에 암용추를 지나면서 그냥 지나 갈 수가 없어 잠시 들러보기로 했다.
암용추는 여의주라 지금의 삼신당이 있는 성도봉이 황룡이고 제석사의 용구추가 청룡이라 암용추를 놓고서 쟁주(爭珠)를 벌이는 형태라고 한다.
이곳 웅덩이 석벽에는 경술국치 후 나라 잃은 망국의 한을 품은 12분들이 석벽위에 본인의 호와 이름을 새겨서 백절불굴하는 단결심을 표시하여두었다.
일러 ‘용산12일민회(龍山十二逸民會)’!
이분들은 의연금을 모으고 한국독립청원서를 작성하기도 하는 애국운동을 하여 국가로부터 독립운동의 포상을 받았다.
이런 것은 보면 이 일대가 평소에 민족정신을 고양하다 나라가 위난에 빠질 때는 뜻있는 독립운동의 중심지가 되곤 하니 살아 있는 계룡산의 정신세계에 거듭 감사할 뿐이다.
날씨가 덥고 웅덩이 위쪽 용산12일민회 석각을 찾아본다는 핑계로 잠시 옷을 ‘홀라당’ 벗고 암용추로 들어갔는데 시원하면서 짜릿한 물맛 때문인지 나오기가 싫어졌다.
계룡산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 알면 난리 나고 경 칠일이지만, 온몸이 근질거려 이곳에서 잠시 육체와의 향연(?)이 있었으니 온몸을 세척하고 뿌듯한 기분이 되었다.
웅덩이 깊이가 한길반이 넘는데 같이 간 박희덕은 수영이 프로급인지라 암용추 속으로 연신 들어갔다 나왔다 한다.
물밑으로 들어갈 때 마다 한웅 큼의 돌을 집어가지고 나오는데, 먼 다른 생각이 있어 그러는지, 다시 한 번 찾아갔을 때는 이전에 저지른 업보를 받았는지 위험한 상황에 이르기까지 했었다.
이 계곡에는 기도하면 소원성취를 할 수 있다 하여 길지로 여겨져 오고 있다.
1920년경 3·4월이면 이곳에서 서식하는 올챙이를 복용하면 만병통치효과가 있다고 하여 올챙이를 잡으러 몰려드는 인파가 수천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이곳 암용추는 건너편 산봉우리에서 쳐다보면 여성의 거시기와 거시기를 빼어 닮았다고 하는 곳이지만, 이곳은 굉장히 신성스러운 곳으로 여겨지는 곳인지라, 이런 표현이 가당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지만 사실이다.
이 계곡은 군부대에 속해있고 계룡산 국립공원의 통제지역인지라 보전이 잘되고 있지만 정말 한번 가보면 하는 멋진 장소이다.
우리나라에서 이런 절경이 있나 싶을 정도의 일품이다.
하기야 개방되면 그것으로 이 계곡은 ‘사망’이다.
계룡건설의 이인구회장은 이곳 암용추와 숫용추에서 나온 공룡 알 같은 수석인 ‘용의 알’, 즉 용란(龍卵) 두 점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데 사진으로 보니 정말 그런 것 같기도 하고, 별걸 다 지니고 있는 이 수석이 복을 부르는 돌인 것 같다.
개태사에 있는 용란도 여기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싶다.
나도 이 암용추 밑바닥에서 나온 메추리알 크기의 돌멩이를 주어 왔는데 금암동에 있는 궁중갈비식당의 ‘이정호’ 사장에게 보여줬다가 압수당하고 돌려주지를 않고 있다.
그 뿐 아니라 이 분은 계룡대 안에 살고 있는 흰 사슴 두 마리를 찍은 사진을 남모과장님으로부터 본인이 선물 받아 보관하고 있는데 이것도 압수하려고 하는 분이다.
그래서 그런지 그곳 식당은 정말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으니 지금은 웃을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 곤 하는데 정말 복이 들어오는 돌멩이 일까?
암용추와 숫용추는 이런 여유로 성숭배문화와 깊은 관련이 있었고 아들을 낳고 싶으면 숫용추에서 계룡 산신에게 기도를 드렸고 딸을 원하는 부부는 암용추에서 푸닥거리를 일삼았다.
자연히 암용추는 남자들이 들끓었고 여자들도 북새통을 이뤘다.
이곳에 멀지 않은 장소에 숫용추가 있는데 이곳이 암용추와 자웅을 이루고 있다.
이곳에서는 많은 무巫행위가 이루어졌었다.
우리의 기복신앙은 원래 무巫가 가지고 있는 컨셉이 아니던가?
지금에는 불교나 기독교에서 이러한 기복신앙을 이용하여 널리 신도를 모으고 있으니 이러한 무巫의 사회社會현상을 어찌 설명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왜 무속이라면 그렇게 알레르기 반응을 보일까?
뒤로 무속인을 찾아가서는 “우리아이 대학 붙겠어요, 이번에 승진이 될까요, 차기대통령은 누가 될까요” 하면서 ‘미주알고주알’ 물어보고는 앞으로는 내가 언제 그런데 다녔냐는 듯이 안면을 바꾸는 일이 허다하지 않은가.
어차피 평범한 인간은 먼 앞날을 예견할 수는 없는 것이므로 그렇게 숨어서 호박씨 까듯이 하지 말고 정당하게 드러내놓고 그들에게 의견을 구하는 것이 떳떳하지 않은가?
조선말까지 만해도 무속이나 점치는 일은 기피대상이 되지 않았다.
선조들은 적당한 거리를 두면서 그들을 잘 활용해 온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고유의 정신적인 자산이다.
세계 어디에도 이렇게 신명이 발달된 민족이 있는가?
이제 무속을 기피하고 두려워하면서 신비화 할 필요가 없다.
그것을 밝은 양지로 끌어내어 인간생활의 고달픔을 달래주고 같이 놀아 줄 수 있는 사회의 활력소로 이용할 수는 없을까?
때로는 삶에 지친사람에게 따뜻한 대화를 하고 지친 영혼을 편안하게 해주면서 세상살이에서 부딪치는 어려움을 하나의 퍼포먼스로 들어내 줌으로서 서로간의 갈등을 해소 할 수 있는 완충제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도록 이끌어 주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이런 점에서 무속인 들이 본인의 의무가 무엇인지를 심각히 자각하는 정화운동을 펼쳐야 할 시대에 이르렀다고 보여 진다.
신의 능력을 받는 것은 갈등을 해소함으로서 해원상생의 시대를 준비하고 인간에게 희망의 새로운 메시지를 전하라고 부여된 의무를 가진 신의 대리인이 아닌가.
진정한 자신의 중심을 바로 잡기위해 외래종교에 의하여 굴절되고 덧 씌어진 것을 볏겨내고 본연의 모습을 회복하는 무교의 사회화와 역사성을 갖추어야함을 시대가 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무교대학에서 시도되는 무교의 역사歷史성을 확립하는 자세는 실로 신선하고도 획기적인 발상이라고 보여진다.
더불어 일부에서 진행되는 '연극형태의 영가천도' 무대는 무교의 사회社會화를 앞당기는 절묘한 기획이라고 보여 진다.
가슴에 억눌려온 모든 것을 풀어버리는 해원상생의 시대에 어울리는 절묘한 무대장치이다.
우리민족만이 독특하게 가지고 있는 영적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여 영성과 영혼의 진정한 진화를 이끌어주는 것이야 말로 이들이 해야 할 사명적인 의무가 아닌가.
새로운 문화의 전환기에서 이들로부터 새로운 싹이 나오기를 진심으로 기원해 본다.
금전과 인기에 야합하는 그런 자세가 아닌 새로운 시대를 미리 보고 이를 알려줌으로서, 이러한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는 준비자로서 진정한 선도자로서의 역할을 우리는 기대해보고 그들에게 변화의 자세를 가질 수 있도록 폐쇄된 음지에서 이들을 끌어내야 하지 않을까?
그리하여 정화된 영성과 영혼을 가진 그들로 부터 새로운 시대의 문화적인 패러다임을 듣는다면 우리의 영혼과 영성의 발전에 큰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해 본다.
우리도 그들을 무시하면서 실은 그들의 능력을 이용하고 있는 파렴치한 자세에서 벗어나 단순한 '점을 치는 자'의 위치에서 아픈 삶을 어루만져주고 껴안아주면서 새로운 세계를 조언해주는 '사회병리치료사'의 위치까지 그들을 끌어 올려야 할 것이다.
이제 이곳 삼신당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없이 무한한 베품을 보여주고 있는, 이러한 깊은 뜻을 새겨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우리주변에서 나타나는 불합리하거나 이익 되지 않는 현상이 나타날 때에 매사를 항상 신의 탓이라고 하고 있는 지나 아닌지?
모든 것은 현재에 살아가는 우리들의 의지와 마음가짐이다.
신의 시대에서 인간의 시대로 접어들은 시기에 인간으로서 예수와 부처가 남긴 자취는 매우 크고, 이분들 역시 신의 바른 의지를 인간의 몸으로서 재현해 나간 분이 아니던가.
남 탓하기 좋아하는 시절에 우리가 흔히 하는 말투 중에 ‘부처님의 자비로’, ‘하느님의 뜻대로’라고 하면서 신의 탓도 많이 하고 있는데 이것도 인간의 뜻대로가 아닌지 얼마 전에 타개하신 아동 문학가이신 ‘권정생’ 선생을 취재한 서울신문의 조연현기자가 쓴 기사가 새삼 떠오른다.
‘강아지 똥’과 ‘몽실 언니’를 쓴 故권정생 선생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독자가 많은 동화작가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만나려고 경북 안동시 일직면 조탑리의 오두막으로 그를 찾아오지만 그는 사람들을 만나주지 않는다.
기자는 말할 것도 없다. 인터뷰 같은 것을 한 적도 없다.
어려서부터 앓아온 전신결핵의 고통으로 신음하면서 홀로 살아가는 그는 “너무 아파서 인상을 찌푸리지 않고 사람을 맞을 자신이 없어서” 사람이 찾아와 불러도 아예 문조차 열어보지 않는다.
그런 그가 김장배추 속에 숨은 흰 속살 같은 얼굴을 내보였다.
지난 29일 그의 마을 정자나무 아래서 한 드림교회 예배에서였다.
드림교회란 이현주(62) 목사가 지난 4월부터 주일이면 좋은 사람과 좋은 장소를 찾아 예배를 드리는 건물 없는 교회다.
이 목사는 이 마을에 찻길조차 없던 1970년대 이오덕 선생으로부터 숨은 ‘인간 국보’의 소식을 듣고 그를 찾아다녔던 지기다.
그는 드림교회가 뭔지도 몰랐지만 그런 이 목사의 청으로 엉겁결에 마을 정자나무 아래 앉았다.
그를 만나고파 이 전국에서 이날 예배에 온 20여명과 함께였다.
권 선생은 사람들의 시선이 부끄러운 듯 모자를 눌러쓴 채 얘기를 했다.
그와 수십 년 지기인 이 목사도 “이렇게 한 자리에 오래 앉아 있는 것도, 이렇게 말씀을 오랫동안 하는 것도 처음 본다.”고 했다.
권 선생이 생전 처음 베푼 말잔치는 소리 소문 없이 온 산하를 물들여 버리는 가을 기운 같은 축복이었다.
침묵 기도 뒤 사람들은 대화를 나누었다.
참석자들 대부분은 하나님께 “저를 왜 이곳에 불렀느냐? ”고 물었다며 하나님께서 이러저러한 응답을 주었다고 말했다.
“차를 타고 이곳에 온 게 하나님 뜻인가요?”
이 목사 옆에 다소곳이 앉아 있던 권 선생이 말문을 열었다.
무슨 일을 하든 관성적으로 ‘하느님의 뜻’에 갖다 붙이는 그리스도인들의 습관적인 말에 대한 일침이었다.
“이라크에서 전쟁을 일으키는 것도, 사람들에게 그 많은 고통을 주는 것도 하나님의 뜻인가요? 인간이 한 것이지요.”
권 선생은 한참 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마을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낙엽만이 침묵의 공간 속을 뒹굴었다.
마침내 여든 여덟 살 난 마을 할머니 얘기를 꺼냈다.
“할머니가 네 살 때 부모가 일본으로 끌려갔다. 그 뒤 아직까지 소식을 모른다.
그는 지금도 ‘아버지 어머니가 나를 버렸을까’ 아니면 ‘어쩔 수 없이 못 오셨을까’만 생각한다.
결혼해 자식 손자까지 다 있는데도 할머니는 아직까지 네 살짜리 아이로 살아가고 있다.
‘그것도 하느님 뜻인가.’
“하느님이 일제 36년과 6·25의 고통을 우리에게 주었는가?”
권 선생은 “아니다”라고 자답했다.
그 고통 역시 인간 때문이라는 것이다.
얘기 중에도 허공을 응시하는 듯한 눈으로 산과 들과 마을을 바라보던 그가 다시 마을 얘기를 이어갔다.
“우리 마을엔 당집이 있다.
거기엔 할머니 신을 포함해 세 분이 모셔져 있다.
한 분은 후삼국시대에 백제에서 온 장군인데, 죽을 줄 알던 마을 사람들을 모두 살려줬다.
또 한 분은 비구니 스님인데, 이 마을에 전염병이 돌 때 와서 사람들을 살려줬다.
당집에선 한 해 동안 싸움 안하고 가장 깨끗하게 산 사람이 제주가 되어 정월 보름마다 마을 사람들이 제사를 지내면서, 또는 당집 앞을 지날 때마다 스스로 착하게 살려고 자신을 다잡는다.
그렇게 마을 사람들은 평안하게 살아간다.”
그는 사람들이 교회에서 ‘착하게 살아가라’는 설교를 귀가 따갑게 들으면서도 한 가지도 행하지 못하고, 서로 싸우기 일쑤인데 왜 그럴까.
세상에 교회가 없었더라면 어땠을까?
그는 또 “교회나 절이 없었더라도 더 나빠지지 않았을 것 같다”고 자답했다.
그는 “세상에 교회와 절이 이렇게 많은데, 왜 전쟁을 막지 못 하는가”라며 다시 낙엽을 바라보았다.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유대인들은 아우슈비츠에서 600만 명이나 죽는 고통을 당하고도 왜 그렇게 남을 죽이고 고통스럽게 하는가.
1940년대 유대인들이 처음 팔레스타인 땅에 돌아올 때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키부츠 등에 땅도 내주고 함께 살자고 했는데, 이젠 ‘처음부터 막았어야 했는데’라며 후회한다고 들었다.
영화 쉘부르의 우산의 배경이 된 전쟁은 베트남전이다.
프랑스는 당시 베트남인들을 노예처럼 끌어다가 칠레 남부의 섬에 가둬 비행장 건설 노역을 시켰다.
그러다 전쟁이 끝나자 베트남인들은 그대로 남겨둔 채 자기들만 고국으로 돌아가 버렸다.
그 섬엔 아직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베트남 노인들이 살고 있다.
프랑스인들은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의 악행만 얘기하지 자신들이 한 것에 대해선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중국도 일본이 난징학살 때 30만 명이나 살육한 것을 지금까지 그토록 분개하면서도 티베트인들을 그렇게 죽인 것에 대해선 한마디도 하지 않고 지금까지도 억압만 하고 있다.
미국은 자기는 핵무기를 만 개도 넘게 가지고 있으면서도 다른 나라들만 나쁘다고 한다.”
권 선생은 “모두가 자기는 잘하고 옳은데, 상대방이 문제라고 한다.”고 했다.
그것이 불화와 고통의 원인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죽어서 가는 천당 생각하고 싶지 않다.
사는 동안만이라도 서로 따뜻하게 사랑하며 살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인간사의 일들이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 ‘인간의 짓’임을 분명히 한 권 선생의 말에 자신의 행동도, 세상의 해악도 하느님에게만 돌리던 핑계의 마음은 쓸려가 버렸다.
그러나 권 선생은 “하느님은 언제나 ‘인간이 하는 것’을 보고 계신다”며 “그렇기에 홀로 있어도 나쁜 짓을 할 수 없고, 착한 일을 했어도 으스댈 수 없다”고 했다.
(안동/글· 조연현 종교전문기자)
나는 종교도 음식점의 음식같이 사람의 호기심의 대상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자기가 좋으면 그것을 먹고 정신이라는 영양분을 섭취하여 마음의 편안함을 얻을 수 있다면 최상의 것이라 생각한다.
인산 김일훈옹이 하신 말씀이 있다.
“종교를 믿는 그 속에는 좋지 못한 기운이 자연히 커져요. 좋은 기운은 줄어들고, 흉기凶氣, 살기殺氣, 사기死氣는 절로 커지게 돼 있어요.
영력靈力이 줄어드니까 좋지 못한 기운이 나쁜 악惡으로 변하는 시기에 좋지 못한 결과가 오는데, 집단학살 당하는 거. 그런 인간 많으면 대량학살이 들어오게 돼 있어요.
학살 와야 될 시간이 와서 스탈린 같은 인간이 종교인 죽이는데 죽인 사람이 죄 받느냐? 없다고 보지요.
죽으면 지옥 간다. 그 소리 생긴 것이 좋지 않은 증거지.
사람 속이는 소리거든. 생기가 50%에 흉기가 50%다. 표현이 안 될 거요. 판단이 안가지? “
종교적인 편차가 큰사람에게는 더욱 이상하겠지만 종교는 단지 자신의 마음의 수양으로 그쳐야 하지 않을까?
지나친 사회참여는 결국 분열만을 야기하고 모두가 같이 패망하는 지름길 인 것을 우리는 역사에서 수 없이 보아오지 않았는가?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선에서 절제하는 지혜가 아쉽다.
종교라는 것이 평범한 사람들을 지혜롭게 하고 건강하게 오래 살게 가르치는 것이 종교가 아닌가?
평범한 사람들이 힘이 없어 덕을 보기위해 따르는 것을 속여서 뜯어 먹는 것이 종교라면 우리가 너무 못나지 않았는가?
내가 있으므로서 거기에 신이 존재하는 것이지 신만을 위해 산다면 인간으로서 사는 이유가 무엇인가?
부모가 나를 잉태하여 낳은 그 성스러운 인간으로서의 자세를 포기한 것이 아닌가.
신은 인간에게 인간으로서의 할 도리를 알려주고 있는 분이 아니던가!
사람으로서의 해야 할 도리에 최선을 다하고 부족한 면은 신의 지혜를 빌리는 자세가 아쉽다.
이제 선천이 끝나고 후천이 오는 시기에 앉아서 참선하거나 호흡하는 시기는 지났다.
따라서 이런 시대에는 수행보다는 공덕을 쌓는 일을 먼저 해야 할 시대가 온 것이다.
자기를 희생시키고 모든 생명체를 위하여 이득을 줄 수 있는, 복을 받는게 아닌 복을 짓는 자세가 절실히 요구되는 것을 우리는 삼신당의 천지인에서 배워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