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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호(西胡) 대회처(大會處) 용황(龍荒), 고구려(高駒驪)땅과 접(接)했다. [제1편]
그곳은 서북방(西北方), 용성(龍城)으로 황복(荒服)이다.
○ 오늘날 역사통설(歷史通說)【필자(筆者)는 이를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이라고 칭한다.】에서 말하는, 한국사(韓國史)는, 「고구려(高駒驪)의 북계(北界)는, 용황(龍荒)과 가깝다(近) 또는 용황(龍荒)과 접(接)해 있다」는 등의 기록(記錄)을 접할 수 있다.
역사통설(歷史通說) 논자(論者)들이 말하는 조선사(朝鮮史)의 “용황(龍荒)”이란 : 〈용(龍)은 흉노(匈奴)족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용성(龍城)을 가리키고, 황(荒)은 멀리 떨어진 변방(邊方)이라는 뜻의 황복(荒服)을 가리키는 말로, 북쪽 오랑캐가 출몰(出沒)하는 지역이라는 뜻이다.〉라고 설명(說明)하고 있다.
➊ 따라서 역사통설(歷史通說) 논자(論者)들이 말하는 조선사(朝鮮史)의 용황(龍荒)이란 : 「평안도(平安道)·함경도(咸鏡道)의 북방지대(北方地帶) 또는 그 이북(以北)의 만주(滿洲) 땅을 일컫는다.」는 것으로 해설(解說)하고 있다.
간혹(間或) 용황(龍荒)은, ‘사막(沙漠)의 밖(外), 황복(荒服)의 땅’이라고 용어해설(用語解說)을 하는 분도 있다.
➋ 대륙사(大陸史)에서는 “용황(龍荒)”에 대해 설명(說明)하기를, 「「용황(龍荒)은 즉(卽) 용성(龍城)이다. 서호(西胡)【서(西)쪽 오랑캐(胡)】는 모두 용신(龍神)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고로 큰 회합처(會合處)를 부르기를 용황(龍荒)이라고 한다.」고 기록(記錄)하고 있다.
서호(西胡)란 서방(西方)에 살고 있었던 오랑캐(胡)를 말하는 것이지, 동방(東方)에 살고 있었던 오랑캐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본시(本是) 용성(龍城)이란 서방(西方)에 있었다는 것이고, 동방(東方)에는 없었다는 거다.”
이런 설명(說明)에 따르면 :「고구려(高駒驪)는, 용황(龍荒)과 그 땅이 접(接)해 있었다.」는 말은, 「반도(半島) 땅에 고구려(高駒驪)는 없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런 역사해설(歷史解說)이 올바른 것일까? 반도(半島) 조선왕조(朝鮮王朝)의 허구(虛構)【사실(事實)에 없는 일을 얽어서 꾸밈】를 밝혀보기로 하자.
곧 “고구려(高駒驪)는 서호(西胡)의 용황(龍荒)과 접(接)해 있었다.” 는 것을 고증(考證)해 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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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허백당(虛白堂)【용재(慵齋) 성현(成俔, 1439∼1504)】보집 제2권 / 詩 / 送永安節度使曺文緯(영안도 절도사로 부임하는 ‘조문위’를 전송하다.) :
《文武全才一代英 : 문무의 재능 겸한 한 시대의 영웅으로 / 嵬然閫外作長城 : 우뚝이 국경 맡아 장성이 되었는데 / 貔貅塞上三千隊 :변새에는 맹수 같은 삼천 편대 주둔하고 / 龍虎胸中百萬萬兵 : 가슴속엔 용호 같은 백만 병사 들었다오 / 日照黃沙氛祲散 : 황사에 해 비치면 요기(妖氣)가 흩어지고 / 風生白羽笑談淸 : 백우선에 바람 일 때 맑은 담소 즐길 테니 / 開田遠抵龍荒地 : 사막 밖 멀리까지 영토를 개척하여 / 春草年年看耦耕 : 해마다 봄풀 돋은 땅을 가는 정경 보리》하였다.【出處/古典飜譯院db,引用】
※ 주(注)【出處/古典飜譯院db,引用】: 조문위(曺文緯) :〈조숙기(曺淑沂,1434~1509)로, 문위(文緯)는 그의 자이다. 1,479년 건주위(建州衛) 여진 정벌에 종사관으로 참전하고, 이때 세운 공로로 세 품계가 특진되고 홍문관 부교리에 제수되었다. 충청도 병마절도사, 평안도 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문무를 겸비한 인물로, 비변책을 건의하는 등 국방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1,497년(연산군3) 8월 29일에, 영안북도 병마절도사에 제수되었다.〉
◇ 용황(龍荒) :〈開田遠抵龍荒地 : 사막 밖 멀리까지 영토를 개척하여〉라고 하였다. 번역(飜譯)한 분께서도 “용황(龍荒)”에 대해 말하기를, “사막(沙漠)의 밖(外)” 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영안도(永安道)는, 사막지대(沙漠地帶)와 북(北)쪽 또는 서북(西北)쪽의 막북지대(漠北地帶)를 포함(包含)하고 있었다는 것을 증거(證據)해 주고 있는 구절(句節)이다.
특히 용황(龍荒)의 ‘용성(龍城)’은 서호(西胡)들이 모여 용신(龍神)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이며, 이곳은 사막(沙漠)의 북(北)쪽 “막북지대(漠北地帶)”에 있었다는 것이다. 용성(龍城)은, 동방(東方) 땅에 없었다는 거다. 이게 아주 중요(重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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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晩靜堂集第四 / 詩 / 瀋陽城 : 《曾識遼東是我疆 : 요동이 우리 땅임을 일찍부터 알았네. / 高句北界近龍荒 : 고구려 북쪽 경계 용황(龍荒)에 가까웠지. 隋唐遙統提封蹙 : 隋·唐으로 이어지는 줄기에 봉토는 오그라들고, 丹鞨交爭壁壘長 : 거란·말갈 다투누라 성채가 길어졌네. 昭代百年同漢輔 : 태평시절 오래됨은 중국과 함께 도움이니, 本朝何日復河湟 : 우리 조정(朝廷)은 언제나 하황(河湟)을 회복할까. 中宵勑勒奚歌發 ; 한밤중 마음을 억누르니 어찌 노래가 나올까, 俛仰山川淚數行 : 산천을 두루 보니 눈물이 솟는구나. 近。一作接 : 근(近)은 다른 곳에는 접(接)이라고도 하였다. 【出處/古典飜譯院db,引用】
※ 주(注)【出處/古典飜譯院db,引用】:〈서종태(徐宗泰, 1652년 ~ 1719년)가 연행을 다녀오며 지은 한시로 그의 문집인 만정당집(晩靜堂集) 권4에 전한다. 정조사(正朝使)로 청나라를 다녀온 1703년(숙종 29년) 작품으로 보인다. 연행 경로를 따라 지은 여러 편의 한시 중 하나이다.잃어버린 영토에 대한 회복의지와 비분강개(悲憤慷慨)하는 심정을 그리고 있다.〉고 하였다.
➊〈曾識遼東是我疆,高句北界近龍荒 : 요동(遼東)이 우리 땅임을 일찍부터 알았네. 고구려(高駒驪) 북쪽 경계 용황(龍荒)에 가까웠지〉: “요동(遼東)이 오늘날의 요동(遼東)이 아니었다.”는 것을 이야기해 주고 있다.
오늘날의 ‘요동(遼東)요서(遼西)’ 땅엔 사막(沙漠)지형(地形)과는 전혀 관계(關係)없는 곳에 심어져 있다.
➋〈本朝何日復河湟 : 우리 조정(朝廷)은 언제나 하황(河湟)을 회복할까〉하였으니, 곧 하황이서(河湟以西) 땅을 청(淸)에게 빼앗겼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곳은 오늘날의 청해성(靑海省) 성도(省都)인 서녕(西寧)의 동(東)쪽에 있는 황수(湟水)가 하(河)에 합류(合流)는 땅을 말한다.
따라서 황수(湟水)가 황하(黃河)와 합류(合流)하는 그곳의 서(西)쪽 땅을 여진족(女眞族)에게 빼앗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卽) 「하황(河湟)의 동(東)쪽 땅은, 조선(朝鮮)의 땅이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➌ 위의 글 (1)과 (2)는 모두 같은 뜻이다. 용황(龍荒)이란 서방(西方) 오랑캐(胡)들이 모여 용신(龍神)에게 제사를 드리던 곳, 큰 회합(大會)을 열던 곳(處)을 말하는데, 이 땅은 사막(沙漠)의 밖(外)에 있다는 것이고, 서방(西方) 땅에 있었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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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허백당시집 제14권 / 시(詩) / 달자(達子)
《沙漠天驕種落稠 : 사막의 흉노족은 종자가 하도 많아 / 憑陵傳箭自相讎 : 속이고 침범하여 원수지간 되곤 하니 / 朝廷縱有羈縻術 : 조정에 견제하는 방책이 있긴 하나 / 중략(中略)》【出處 / 古典飜譯院db 引用】
[주-D001] 달자(達子) : 서북변 오랑캐라는 뜻으로, 명(明)나라에서 몽고족(蒙古族)을 일컫던 말이다. 달자(韃子)라고 표기하기도 한다.
(4) 허백당시집 제14권 / 시(詩) / 길에서 서해 달자를 만나다(路逢西海達子)
《建州屯接海西陲 : 건주둔은 바다 서쪽 모퉁이와 접했는데 / 天作虔劉別種夷 : 사납기론 하늘이 낸 별종의 오랑캐들 / 冪頂帽冠梟鵩羽 : 머리에 쓴 모자에는 올빼미의 깃털 꽂고 / 穿身衣服狗羊皮 : 몸에 두른 옷이란 게 개와 양의 가죽이지 / 掠人子女常爲利 : 남의 자녀 빼앗는 걸 이롭다고 생각하고 / 麀彼兄妻昧秉彝 : 제 형수를 취할 만큼 인륜에도 어둡다네 / 共道聖皇新御極 : 성스러운 새 황제가 등극했다 말들 하며 / 爭將土物獻丹墀 : 다투어 토산물을 황궐에 바치누나.》 주(注) 冪 : 대본에는 ‘幕’으로 되어 있는데, 규장각본에 의거하여 바로잡았다. - 出處 / 古典飜譯院db 引用 -
➊〈沙漠天驕種落稠 : 사막의 흉노족은 종자가 하도 많아〉하였는데, 이로 미뤄보면, 달자(達者)는 곧 사막지대(沙漠地帶)에 살던 자(者)들이고, 반도(半島) 북방지대(北方地帶)와는 전혀 관계없는 자(者)들이었다는 것을 명백(明白)하게 밝혀주는 이야기다.
➋〈建州屯接海西陲 : 건주둔은 바다 서쪽 모퉁이와 접했는데〉하였다. 위 글 ➊과 같은 이야기로, 건주(建州)는 바다 서(西)쪽 모퉁이와 접(接)했다는 이야기는 오늘날의 심양(瀋陽)과는 전려 관계(關係)없는 다른 곳에 있었다는 증거(證據)다.
해서(海西)는, 바다(海) 서(西)쪽 땅을 지칭(指稱)한다. 반도(半島) 북방지대(北方地帶)에서 “바다 서쪽”이란 말은, 즉(卽) ‘하북성(河北省)과 산동성(山東省)’의 발해(渤海) 서(西)쪽 땅이다. 이곳에 건주(建州)가 있었고, 심양이 있었고, 오랑캐들이 살았던 곳이라면 중국(中國)은, 중화(中華)는, 화하(華夏)는, 한족(漢族)은, 곧 반도(半島) 땅에 있었다는 말이 된다. 가능(可能)한 일일까?
➌〈麀彼兄妻昧秉彝 : 제 형수를 취할 만큼 인륜에도 어둡다네.〉하였으니 곧 서북방(西北方)의 흉노(匈奴)로 유목종족(遊牧種族)이었다는 것을 밝혀준다. 단 인륜(人倫)에도 어둡다는 말은, 유교적(儒敎的) 관점(觀點)에서 말하는 것일 뿐이다.
여기서 ‘고구려(高駒驪)·맥(貉)=맥(貊)·부여(夫餘)’등도 호(胡)였다는 설(說)이 있고, 그 풍속(風俗) 역시(亦是) 형(兄)이 죽으면 형수(兄嫂)를 취(取)한다는 풍습(風習)이 있다.【兄死妻嫂, 與匈奴同俗】
➎ 여기서 우리가 주의 깊게 볼 것은, 「이연(李淵)에 의해 건국(建國)된 당(唐) 왕조(王朝)에 관한 것인데, 황태자(皇太子)는 장남(長男) 이건성(李建成.589-626)이었고, 그의 동생 이세민(李世民.599-649)은 진왕(秦王)에 책봉돼 있었다. 또 넷째아들 이원길(李元吉.603-626)은 제왕(齊王)에 책봉되어 있었는데, 또한 야심이 만만치 않았다.」고 한다.
「이연(李淵)의 태자(太子) 이건성(李建成)이 동생(弟) 이원길(李元吉)과 모의(謀議)하여, 이세민(李世民)을 제거키로 하였으나, 사전에 눈치를 챈 이세민(李世民)은 '현무문(玄武門)의 변'(626년 6월)을 일으켜, 형과 동생을 죽이는 것도 모자라 조카들도 씨를 말렸다. 고조(高祖) 이연(李淵)은 어쩔 수밖에 없었고, 두 달 만에 황제(皇帝)의 자리를 물려주었다.」고 하는데, 당(唐) 태종(太宗)은,
「장손황후(長孫皇后)가 죽고 나서, ‘현무문(玄武門)의 변’에서 살해(殺害)한 형(兄)의 아내 곧 형수(兄嫂)【태자비(太子妃) 양씨(楊氏)】를 황후(皇后)로 책봉(冊封)하려했으나, 장손(長孫)씨의 반대(反對)로 이룰 수가 없었다고 하니, 형수(兄嫂)를 취(取)하는 풍속(風俗)을 가졌던 당(唐) 역시(亦是), 흉노(匈奴)일파(一派)인 돌궐(突厥)계로, 한족(漢族)이 아니었다.」는 이야기다.
더불어 이들이 오늘날의 섬서성(陝西省) 서안(西安)【옛 장안(長安)】에 도읍(都邑)하고 있었는가에 대해서도 합리적(合理的) 의심(疑心)을 받을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이들은 서방(西方)종족(種族)이며, 서방(西方) 땅에 있었기 때문이며, 장안성(長安城)은 고구려(高駒驪) 태왕(太王)이 축조(築造)했고, 장안(長安)을 서울(皇城)로 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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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오산집 제6권 / 표(表) / 명(明)나라에서 우리나라 사람을 되돌려 보내 준 것에 대한 사례의 표
[주-D001] 용황(龍荒) : 용(龍)은 흉노(匈奴)가 하늘에 제사 지내는 용성(龍城)을 말하고 황(荒)은 중국 북부 황막한 지역을 말한다.【出處 / 古典飜譯院db 引用】
(6) 허백당보집 제4권 / 시(詩) / 함경 감사로 부임하는 정기수를 전송하다(送咸鏡監司鄭耆叟)
《鐵嶺嵯峨揷太蒼 : 철령이 하늘 위로 드높이 치솟은 곳 / 煙塵不動海茫茫 : 연진은 날지 않고 바다는 아득한데 / 天開沛邑山河壯 : 하늘이 연 패읍이라 산하가 장대하고 / 地接龍荒道路長 : 용황이 가까우니 가야 할 길이 멀지 / 遺愛召公分陝右 : 사랑 끼친 소공이 섬서 지역 나눠 맡고 / 屈身長孺臥淮陽 : 좌천당한 장유가 회양에 누웠으니 / 중략(中略)》
[주-D004] 용황(龍荒) : 흉노가 사는 사막 북쪽의 변방을 가리킨다. 흉노가 용성(龍城)에서 하늘에 제사 지낸 데서 나온 말이다.【出處 / 古典飜譯院db 引用】
● 고전번역원(古典飜譯院)의 번역본에서 나오는 주석(注釋)편을 봐도, 용황(龍荒)은 용성(龍城)을 말하는 것이고, 그 땅은 사막(沙漠)의 북방지대(北方地帶)라고 했다. 곧 동북방(東北方)과는 전혀 관계(關係)가 없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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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열성어제 제8권 / 효종대왕(孝宗大王)○시(詩) / 심양 여관에서 부질없이 읊다〔瀋館謾吟〕
《十載龍荒鬢欲霜 : 십 년의 용황 생활에 귀밑머리 세려는데 / 春風幾度碎柔腸 : 봄바람이 몇 번이나 애간장이 끊어졌나 / 江南芳草年年綠 : 강남의 고운 풀은 해마다 푸르건만 / 歸夢迢迢繞建章 : 돌아가는 꿈 아득히 건장궁을 두르네》
[주-D001] 용황(龍荒) : 용(龍)은 흉노족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용성(龍城)을 가리키고, 황(荒)은 멀리 떨어진 변방이라는 뜻의 황복(荒服)을 가리키는 말로, 북쪽 오랑캐가 출몰하는 지역이라는 뜻임.【出處 / 古典飜譯院db 引用】
● 여기서 용황(龍荒)은, 건주(建州) 곧 심양(瀋陽)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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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옥오재집 제4권 / 시(詩) / 승정원에서 읊조려 강계 부사 이상성을 송별하다〔銀臺口號 送別江界李府使 相成〕
《絶塞孤城號受降 : 변방 외로운 성 수항루라 불리는데 / 黃堂仍闢碧油幢 : 황당에 지방관으로 부임하네 / 龍荒地接千家帳 : 오랑캐 수천의 가옥들과 접해 있고 / 鴨綠天開萬里江 : 하늘 아래 압록강은 만리를 흘러간다 / 중략(中略)》
[주-D001] 이상성(李相成) : 1663~1723. 본관은 광주(廣州), 자호(字號)는 미상이다. 1716년(숙종42)에 강계 부사가 되었다.
[주-D002] 수항루(受降樓) : ‘수항(受降)’은 수항루로 함경북도 종성군(鍾城郡)의 성내에 있는 3층 누각이다. 조선 전기에 북쪽 변경에서 자주 노략질하던 여진족의 항복을 받고서 이것을 징표로 남기기 위하여 누각을 짓고 수항루라 명명하였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 따르면 “종성에 뇌천각(雷天閣)이 있는데, 이것의 옛 이름은 수항루이다.”라고 한 것으로 미루어보아 종성의 수항루는 조선 중종 이전의 것으로 조선 후기에 뇌천각으로 개칭했음을 알 수 있다.
[주-D003] 황당(黃堂)에 지방관으로 부임하네 : 이상성이 강계 부사로 부임한다는 말이다. ‘황당(黃堂)’은 웅황(雄黃)의 염료(染料)를 칠한 태수(太守)의 집무처를 가리킨다. ‘벽유당(碧油幢)’은 기름 먹인 푸른 장막으로, 장수의 수레를 가리킨다.
[주-D004] 오랑캐 : ‘용황(龍荒)’의 ‘용(龍)’은 흉노족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용성(龍城)을 가리키고, ‘황(荒)’은 멀리 떨어진 변방이라는 뜻의 황복(荒服)을 가리킨다. 즉, 북쪽 오랑캐가 출몰하는 지역이라는 뜻이다.【出處 / 古典飜譯院db 引用】
➊ 〈絶塞孤城號受降 : 변방 외로운 성 수항루라 불리는데〉하였는데, 역사통설(歷史通說)은, 수항성(受降城)이란 당(唐) 장군(將軍) 장인원(張仁愿)이 내몽고(內蒙古)의 황하(黃河) 남북(南北) 연안(沿岸)에 만든 성(城)의 이름이다.【서수항성(西受降城)·중수항성(中受降城)·동수항성(東受降城)로 삭방절도사(朔方節度使) 관내(官內)에 있었다.】
그 성(城)의 망루(望樓)가 바로 수항루(受降樓)다.
➋ 〈龍荒地接千家帳 : 오랑캐 수천의 가옥들과 접해 있고〉하였는데, 오랑캐라고 번역(飜譯)하였지만, “용황(龍荒) 땅에 천여가(千餘家)가 접(接)해있었다.”고 해야 올바른 것이다. 강계(江界)에 수항성(受降城)이 있고, 이곳은 용황(龍荒) 땅으로 천여가(千餘家)가 모여 살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따라서 강계(江界)는 반도(半島) 북방(北方) 땅이 될 수 없다. 반도(半島) 북방(北方) 강계(江界) 땅이 “서방(西方)”인가? 기막힌 이야기다.
「이런 기막힌 코믹(Comic)소설(小說)같은, 희극(戲劇)의 시나리오(scenario)같은, 조작(造作)된 조선사(朝鮮史)를 공교육(公敎育)이란 이름으로 가르친다는 것 자체(自體)가 국민(國民)들에 대한 심대(甚大)한 모욕(侮辱)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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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水經注 河水 / 龍荒 : 《雅 歌 錄 云 : 中 略. 其 時, 帝 幸 龍 荒, 遊 鸞 朔 北 : 그때 황제(皇帝)가 “용황(龍荒)”에 행차하여, 난새【천자의 수레 또는 천자의 수레에 달린 방울 소리】가 북쪽 변방을 순행하였다.》고 하였다.
마찬가지로 “용황(龍荒)”이란 반도(半島) 북방지대(北方地帶)와는 전혀 관계(關係)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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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漢 書 卷 一 百 下. 敘 傳 第 七 十 下 편중에서 : 《中 宗 明 明, 夤 用 刑 名 時 舉 傅 納, 聽 斷 惟 精. 柔 遠 能 邇, 燀 燿 威 靈, 『龍 荒 幕 朔, 莫 不 來 庭』 丕 顯 祖 烈, 尚 於 有 成. : 중종(中宗)은 밝고 밝아서 형명(刑名)을 공경히 사용하였다. 이때에 어진 자를 들어 쓰고 말을 올리는 자가 있으면 받아들여서 시(時)는 이것이니, 이때에 어진 자를 선발하여 등용한 것이다. 다스리고 결단함에 정밀하였다. 멀리 있는 자를 회유하고 가까이 있는 자를 길들여서 위엄이 빛나니, 「용황(龍荒)은 사막(沙漠) 북쪽 지역으로, 모두 와서 복종하여」 찬란한 조종(祖宗)의 공열(功烈)이 이루어짐이 있었다.》고 하였다.
➊ 한서(漢書)를 주해(註解)한 맹강(孟康)은 말하기를 ; <謂 白 龍 堆 荒 服 沙 幕 也>이라 하여 「용황(龍荒)은 백룡퇴(白龍堆)【옥문관(玉門關) 남(南)쪽 양관(陽關)으로부터 포창해(蒲昌海)에 이르는 사막지대(沙漠地帶)】이며, 이곳은 황복(荒服)으로 사막(沙漠)이다.」라 했으며,
➋ 「“幕”이란 의미를 “사기(史記)”에서 찾아보면 ; <집해> : 응소(應劭) - 幕(막)은 사막(沙幕)이고 흉노(匈奴)의 남쪽 경계다. <찬(瓚)> : 모래땅을 幕이라 하고 곧바로 건너는 것 (直度)을 絶이라 한다.」고 하였으며,
➌ 안사고(顏師古)가 이르기를 : <龍, 匈 奴 祭 天 龍 城, 非 謂 白 龍 堆 也. 朔, 北 方 也> 이라 하여 「용(龍)은 흉노(匈奴)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용성(龍城)을 말하는 것이며, 신강성(新彊省) 옥문관(玉門關) 남쪽의 백용퇴(白龍堆)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삭(朔)이란 북방(北方)이다.」라고 하였다.
➍ 「맹강(孟康)이나 응소(應召) 또는 안사고(顏師古)등의 옛 학자(學者)들의 설명(說明)에 의하면, 용황(龍荒)이란 “서(西)쪽 오랑캐(胡)들이 모여 회합(會合)을 갖는 용성(龍城)은 사막(沙漠)의 북(北)쪽에 있으며, 이곳은 황복(荒服)이다.」라는 것으로 좁혀지게 된다.
위 본문(本文)과 그 주석(注釋)에서 보다시피 한서(漢書)가 편찬(編纂)될 당시(當時)만 해도, ‘용황(龍荒)’이란 서방(西方) 땅에 있었으며, 그곳은 또 ‘삭북(朔北)’이라고 하였으니, ‘서북방(西北方)의 사막(沙漠) 북방지대(北方地帶)’를 말하는 것이다. [제2편으로 계속]
2019년 01월 21일 [글쓴이 : 문무(文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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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놀라운 내용에 감탄을 자아냅니다..
한국역사는 정말 위대합니다
안녕하세요. <러브 선>님!
보면 볼수록 옛 조선왕조의 영토와 변경 땅에 대한 기록은 아세아와 구라파를 넘나드는 광활한 곳에서 이루어졌던 삶의 이야기입니다. 옛 역사서를 보고 그에 따른 해설은 있는 그대로여야 함에도, 식민사관 논자들은 이를 축소하고, 또 축소하여 반도 땅에 심으려 혈안이 되어 있다고 보입니다.
옛 조선왕조의 영토가 반도 땅에 한정되어 있었다고 한다면, 옛 선인들이 기록한 내용들은 모두가 거짓과 허위로 기록한 것이 됩니다. 그럴 이유가 전혀 없지요.
관심과 성원에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조선사의 진실과 그것을 복원하려는 "러브 선"님의 노고 역시 칭찬받아야 마땅합니다.
감사드리며, 늘 건강하세요.
고맙습니다. 새해에도 많은 글들 부탁드립니다. 복많이 받으시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