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천한담
행복한 만남들
1.
수학적으로 두 직선(直線)의 교점(交点)에 불과한 “만남”은 “누구를 만나다, 재앙을 만나다, 좋은 세월을 만나다” 의 명사형이므로 뜻으로는 간단히 정의되지만 생각처럼 그리 간단하지 않은 것은 만남에는 길이와 깊이가 있어 그 두 글자 속에는 하 많은 사연이 들기 때문이다.
잠시 스쳐 지나가는 만남(brief encounter)에서부터 우연히 이루어진 만남(accidental meeting), 숙명적인 만남(fateful encounter), 극적인 만남(dramatic meeting)들은 모두 만나는 순간의 일로서 그로부터 모든 사연이 시작될 것이다.
그 만남이 그저 두 직선이 교차되듯 부딪치거나 스쳐가는 순간적인 만남이 될 수도 있고 혈연(血緣)이나 지연(地緣), 학연(學緣)처럼 사는 동안 집합체(集合體)의 원소(元素)가 되어 하나의 표지(標識)처럼 붙이고 평생을 함께하는 만남도 있고 사랑하다 결혼하여 한쪽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함께하는 사랑의 만남도 있으며 스승과 제자의 관계처럼 배움의 길을 비춰주는 만남도 있다.
비록 스쳐 지나간 만남이라도 흐릿한 담배연기와 한잔 술로 몽롱(朦朧)한 가운데 맺은 육욕(肉慾)의 만남처럼 잊혀지는 만남도 있지만 첫사랑 연인과 같이 애틋하고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있는 만남도 있다.
첫 만남이야 어떻든 그 만남의 끝을 배신이나 증오로 마감하는 비극적인 만남도 있다.
그러나 만남은 순간의 만남에서 시점(始點)부터 끝까지 이어지는 기나긴 만남까지도 있을 수야 있지만 어떻게 되던 그 만남의 끝은 고독한 한 개인으로 마감되어 무대 뒤로 사라지는 것이니 아마 그것은 영원불멸(永遠不滅)하는 회자정리(會者定離)라는 진리가 될 것이다.
2.
재작년 작은 딸에 이어 금년에 큰 딸을 시집 보내고 나니 한편으로는 큰 짐을 벗은 것 같기도 하지만 재작년과 달리 이제는 아이들의 짐이 슬슬 빠져나가다 보니 어느덧 조금 횅댕그렁해진 방을 보니 왠지 가슴 속에 가을비가 내리는 듯 소슬(蕭瑟)하다.
어쩌면 작은 모험을 즐기는 내 마음을 읽은 듯이 애들 결혼 과정이 대조적(對照的)이었다.
작은 아이 때는 간소하게 치른다고 하여 친척친지만을 초청해서 진행하였더니 덕택에 내가 바라고 상상하던 분위기에 조금 가깝긴 했으되 흔치 않은 방식인지라 예상치 못했던 애를 꽤 먹었고 이번 큰 애 때는 소란스런 느낌이 들 만큼 시끌벅적했는데 “잔칫집은 원래 이래야 되는 것이 아닌가요” 라는 안사돈의 말대로 사실 옛 잔칫집 풍경을 떠올리는 즐거운 잔칫날이 되었다.
애들을 다 시집 보내고 나니 영화 맘마미아(mamma mia)에서처럼 하객들을 초대해서 다과를 즐기며 떠들썩한 파티분위기 속에서 결혼식은 갖는다는 것은 이제 상상 속의 일이 되어 버렸다. 사실 그러한 결혼식을 주도(主導)하기에는 여러모로 매우 자격미달이라 생각되기에 이만큼 하게 된 것만도 과분한 복을 받은 셈이다.
별로 뒷받침을 잘 해주진 못했어도 아이들은 제 스스로 잘 컸을 뿐 아니라 오히려 내가 힘들고 어려울 때 기쁜 일을 많이 만들어 기운을 북돋아 주었으니 대견하기만 하다.
큰아이가 대학 2학년 때 대구의 미술학원에까지 항공편으로 내려가서 가르치기도 했는데 그런 일이 얼마나 신기(?)했던지 드라이브를 겸해서 대구까지 차를 몰고 내려가 아이를 픽업해서 올라오던 기억조차 새롭다.
둘째 아이는 삼성에 입사한 다음해인가 혼자 미국으로 상담(商談)출장을 떠나 마음이 쓰이면서도 칼리 피오리나(Carly Fiorina)같은 거물이 되려나 하고 한동안 속으로 상상하며 즐거워하던 때도 있었다.
두 아이가 셀 수 없을 만큼 만들어준 별의별 에피소드가 나를 즐겁게 해주어 지금까지 웃음을 잃지 않고 살아온 원동력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3.
돌이켜보면 나는 마음먹은 대로 이룬 일이 거의 없어 “인생의 실패자야” 라고 하며 스스로 자책(自責)을 많이 했다.
지난날 거래처에서 얘기를 나누다 경기중학 선배를 만났었는데 비록 농담으로라도 “이런 못난 후배가 있나” 라고 하였을 때 참으로 부끄러웠었다. 그래서 그 선배에게 또 다른 실망감을 주지 않으려고 꽤 애를 썼었는데 그런 것들이 다 자괴심(自愧心)의 표출이었을 것이다. 어허, 내가 정철의 반쯤만큼도 쫓아갔었으면 꽤 괜찮았을 텐데, 그러면 어땠을까? 헤헤-
중1 때 방송반에 들어갔었다. 그때 등교시에 많이 들려주던 음악이 주페(Suppe)의 “경기병”(the light cavalry)이었는데 제목이 꼭 교명 같다고 해서 좋아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방송반이고 뭐고 걷어치우게 된 사연은 지금도 기억하기 싫다.
내 목소리가 가늘고 힘 없이 들리는 것도 참 못마땅했었지만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때는 시내 주요 중학의 합격자명단을 신문에서 실어주었는데 아마 신문에 실리는 내 이름으로는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지만 여하간 조간신문에서 내 이름을 본 그날부터 신나게 놀다 등교했는데 웬걸 그 동안 많은 친구들은 미리 선행학습(先行學習)을 했더군. 그래 처음부터 바닥을 박박 기었다.
그런 것이 꽤 낙천적이었던 내게도 어지간히 심적 부담이 되었던지 어느 날 갑자기! 수업시간에 영어 읽기를 하는데 “이” 발음이 나오지 않아 떠듬거렸는데 어찌된 일인지 그 후 “It’s---“ 같은 그런 뭐만 나오면 입안에서 우물대며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런 것을 심리적 요인이라고 하던가, 읽기 차례만 되면 공포에 질리듯 했으니 공포영화의 주인공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었다. 휴.
그래서 나름 대안(代案)으로 고안한 방법이 “이” 어쩌구, 저쩌구가 나오면 “이”를 “시”나 “지”나 “치”로 바꿔 읽는 것이었다. 대강 고1 초반 즈음까지 그랬으니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나만의 큰 고민거리였고 지금도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해질 만큼 어이없는 일이었다. 다행히도 언제인지는 모르나 나도 모르는 사이에 사라져 버렸다.
4.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62년 중2 때는 야구부에 들어갔다. 당시 홈런왕
어쨌든 야구부에 들어간 지 얼마간 되지도 않아 검지 손가락이 뒤로 딱 제쳐지며 골절되었는데 집에서 난리가 나고 결국 야구부는 종치고 말았다. 지금도 검지는 완전하게는 굽혀지지 않지만 겉보기는 멀쩡하다. 허나 어째 천만다행이지 뭐야, 나 같은 몸 치(癡)가 무슨 운동을 하겠다고?
3학년 여름에 중고 서점에서 우연히 찾은 페이퍼백(paperback) 카우보이소설에 필(feel)이 딱 꽂혔다. 그걸 어머니께 보여드리면서 “제가 번역해서 읽을 수 있게 해드릴게요” 라고 했으니 그야말로 어린 놈이 멋모르고 까부는 하룻강아지 꼴이 되어 시건방졌던 것이 분명하다. 하하, 지금도 그 때 생각하면 낯이 따끈해지는 듯하다.
아직 “메사의 복병”(ambush on the mesa)이라는 그 책을 가지고 있는데 워낙 책이 낡아 조금만 힘주고 손대면 조각나 부서질 지경인데 가만 보면 혹 내용보다 표지 그림에 매혹(魅惑)되어 그랬을법하다. 표지 그림에는 세 명의 카우보이가 권총을 뽑아 들고 절세미인(絶世美人)을 가드(guard)하고 있는 것으로 흠, 지금 봐도 멋있게 보인다.
그래 한 3분의1가량 번역을 시도해본 것 같지만 제 분수를 넘어선 짓인데다 게다가 때때로 복병처럼 튀어나오는 알 수 없는 이상한 단어들은 스페인어라고 하였다. 초기 서부개척시대의 텍사스, 캘리포니아는 스페인령이였으니 그랬겠지만 아이고, 그러다 보니 “이걸 제대로 번역 하려면 스페인어도 배워야 하는가” 하며 제 홀로 갈등을 겪다가 결국 두 손 두 발 다 들고 말았고 그러는 동안 다른 공부는 몽땅 찬밥이 되었으니 엉뚱한 노름에 말려 본전까지 까먹은 셈이 되었다고나 할까?
그런데 참으로 이상하다. 지금 그 소설을 읽어보아도 그때 몰랐던 것은 아직도 여전히 모르겠으니 그때나 지금이나 영어실력은 조금도 발전이 없었다는 건가? 띵--?
5.
본교 진학에 실패하고 재수를 준비하려는데 “어린애가 무슨 재수를 하느냐” 하며 아버지께서 입학원서를 두 장 가져오셨다. 그것이 성북에 있던 신설 S고교와 성동고였다.
그때 두말 할 것도 없이 단박에 결정한 것이 성동고교였다. 왜냐? 중1 때인 61년도에 고교야구를 휘어잡았던 것이 성동고였기 때문이지만 왜 성동고의 이름이 그렇게 머리 속 기억에 콕 박혀 있었을까는 지금도 알 수 없는 의문 덩어리다. 성동의 야구 명성(名聲)은 오직 61년도에 크게 한번 휘몰아쳤다가 사라졌을 뿐이니 이것도 인연의 한 오라기일까?
당시 최강 성동고의 멤버에는
어쨌든 내가 좋아하던 선수의 흔적을 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성동에 잘 들어왔구나” 하는 자기도피적(自己逃避的) 변명으로 삼을 수 있었다. 교사(校舍) 담벽에 남아있는 공 던진 흔적을 가리켜 여기가
6.
원래 사교성이 부족한 나에게 초등학교부터 대학에 이르기까지 친구들이라 해봐야 서너 명씩에 불과했는데 그조차 유학이나 이민으로 멀리 떠나 소식이 끊긴 것은 그들과의 인연이 그뿐이었기 때문인지 어쩐지 알 수가 없다. 그런 저런 이유로 회자정리(會者定離)의 이치를 너무 빨리 알게 된 것인지 모르나 깊이 생각해보면 실상 친구에 대한 정(情)이 많이 부족하였기 때문이 아니었을까도 싶다.
고1 때도 모임이 있었는데 당시 사진관에서 모여 찍었던 사진을 보니 해돋이모임이라고 이름 붙여져 있다.
그리고 2, 3학년 때는
뭐니뭐니해도 오랫동안 항상 내 마음 한가운데 자리잡은 친구가
30여 년 전의 옛 기억이다. 점심 먹고는 꼭 호프집 같은 데서 맥주도 마시고 커피도 마시며 남은 휴식시간을 노닥이며 때우기도 했는데 그때 호프집 여종업원 아이가 나를 “오빠, 오빠” 하며 잘 따랐었다.
어느 땐가 그녀가 제 자취방에 나를 초대해서 찌개랑 끓여 점심을 같이했었다. 그리고는 시골로 내려가게 되었다며 “오빠를 만났던 시간들이 너무 좋았어요, 그래서 꼭 점심 대접을 해드리고 싶었어요” 라고 해서 어라, 얘가 뭔 헛소리를 하냐? 하고 어리둥절하며 애매해했던 순간이 얼핏 떠오른다.
내가 달리 그녀에게 해준 것도 없고 뭔가 해 줄 능력도 없어 그저 그녀의 얘기를 잘 들어준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을 뿐이었는데 그런 작은 것이 그녀에게는 큰 힘이 되었다고 하니 사실 나로서는 그렇게 사소한 것을 굉장히 의미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 고맙다 해주니 괜히 미안해지기도 했고 또 한편으론 기쁘기도 했다. 그때 이별 키스를 했었던가? 설마?
어찌되었던 그녀의 마음가짐으로 보아 잘 살고 있을 것임에 틀림 없으리라.
하여튼 그녀는 만남의 소중함을 깨우쳐 주었는데 뒤늦게 이제 와서야 그때 생각이 나며 “아, 그 아이가 나에게 큰 가르침을 주었었구나” 하게 되었는데 늦게라도 깨달았으니 다행이라 해야 하는가?
7.
이제 아이들도 시집을 잘 갔다 싶으니 홀가분하고 편안하기는 하지만 여전히 나 자신에 대해서 만큼은 지금까지 가져왔던 꿈을 단 하나도 이룬 것 없다는 것에 회한(悔恨)이, 이제는 그런 꿈을 꾸는 것조차 허망한 것이 되리라는 것에 비애(悲哀)가, 때때로 와락 치밀어 오르곤 한다.
그래선가 때론 톰 죤스의 팝송 가사 “I who have nothing, I who have no one” 처럼 “참 난 너무도 이룬 것이 없구나” 라고 생각했었다.
그렇지만 어쩌면 지금이야말로 젊을 때 가질 수 없었던 과거의 반추(反芻), 현재의 관조(觀照), 미래에 대한 정일(靜逸)을 찾을 수 있는 때가 아닌가도 싶다.
딸애 결혼식을 치르면서 가만히 생각해보니 나라는 존재를 그래도 기억하고 찾아준 친구들이 꼭 영화 내셔널트레져(national treasure)에서 니콜라스 케이지(Nicolas Cage)가 찾아 다닌 보물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하니 그것만으로도 큰 기쁨이 아닌가 싶다.
이번에 지방에 사는 친구들, 오래 격조(隔阻)하였던 친구들, 이런 저런 사유로 경조사 때 제대로 챙기지 못했던 친구들에게는 미안한 마음에 청첩을 하지 않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찾아준 친구들, 참으로 고맙다.
다정다감(多情多感)한
주소를 잘못 적어 청첩장을 받지 못한 친구들도 애써 찾아 주었으니 고맙기만 하다.
처음부터 끝까지 돌아다니며 출석 확인하며 멋진 사진 찍어주느라 바빴던 우리 객원 사진작가 수호신! 수호 없으면 앙꼬(餡子anko) 없는 무엇?
그날은 결혼식이 제일 많았다는 날이라 엄청 바쁜 가운데에서도 시간을 내어 하객이 되어준 친구들 모두 더 말할 나위가 없는 보물과 같은 친구들이다.
의례적인 인사장으로 대신하기에는 너무 삭막한가 싶어 다시 한번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처음 만난 사람도 얘기를 나누다 보면 오래 사귄 옛 친구가 될 수 있다(傾蓋知己)”라고 한다는데 더욱 우리는 성동 16회라는 울타리에 함께 있으니 새삼 이 인연이라는 것은 두 번 가질 수 없는 진한 인연일터, 국적은 바꿔도 학적은 바꿀 수 없다는 명언을 누가 했던가?
당나라 시인 유정지(劉廷芝)는 “해마다 꽃은 같은데 해마다 사람은 다르네(年年歲歲花相似 歲歲年年人不同)”라고 하면서 이렇게 한탄했다. “내년 꽃필 때 누가 있을까?(明年花開復誰在)”
성동16회라는 집합은 결국 언젠가 누가 혼자 남을 지는 몰라도 성동16회의 끝을 장식하는 그 누군가가 퇴장하는 날까지 계속되겠지?
재물과 지위에서 인생의 행복이란 것이 대개 결정나리라는 것이야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이겠지만 그럼에도 안빈낙도(安貧樂道)와 같은 자위적(自慰的?)인 표제까지는 내걸지 않더라도 “분수에 맞추어 즐긴다” 라는 정신적인 만족감과 유대감(紐帶感)도 그에 버금가는 소박한 행복 찾기가 아닐까 한다.
해피 엔딩(happy ending)의 막을 내리는 그날까지 모두 행복하고 건강한 삶을 함께 즐기며 나눌 수 있으면 싶다.
지금은 이런 시가 가슴에 와 닿는 듯---
“이 삶은 무엇인가,
근심에 가득 차서 우리가 서서 바라볼 시간이 없다면
숲을 지날 때 다람쥐가 풀 숲에 도토리를 숨겨두는 곳을 볼 시간이 없다면
훤한 대낮에 밤하늘처럼 별이 총총한 시냇물을 바라볼 시간이 없다면
가엾어라 이런 삶은,
근심에 가득 차서 우리가 서서 바라볼 시간이 없다면”
(What is this life if, full of care,
We have no time to stand and stare
No time to see, when wood we pass,
Where squirrels hide their nuts in grass
No time to see, in broad daylight,
Streams full of stars, like skies at night
A poor life this if, full of care,
We have no time to stand and stare)
[W.H. Davies의 “Leisure” 중에서 일부 발췌하였음]
(양천서창에서
(앗싸! 만남의 이야기는 계속됩니다—to be continued)
첫댓글 여러가지로 공부를 시켜 주는구나! 항시 세상 선생님같은 내용이 어떤때는 지루하기도 하고(어려운 문자로),어떤때는 쏙 들어 오기도하고 ,치매예방에 큰 효과가 있지 않을까 생각드네!영어사전도 찾아보고, 옥편은~~~.하여튼 박식한 상두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장사진은 목을 잡고 꼬리를 밟으며 허리를 짤라 깬다고 하더군. 지루한 글은 뛰엄뛰엄 읽는 것이 요령이라더군. 하하.
무조건 축하하고 요약한 일대기를 끝까지 지루하지 않토록 역시 양천서창이야!!!!!!!! 다음에 7년후에 13대 사무총장 일대기도 부탁해
주인공을 "나" 로 바꿔서 읽게 됩니다. 가슴이 쨘~~한것이 남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