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0658 영중어문학부
이우정
5월 13일 아침 나는 일찍 일어나 나갈 채비를 하였다. 저번에 단체로 간 동학농민 혁명의 숨결을 찾아서란 테마 여행을 못간 덕분에 난 같이 교양수업을 듣는 내 친구와 함께 길을 나섰다. 아직 운전이 초보이긴 하지만 부모님께 빌고 빌어서 차를 몰고 도시락을 가지고 우리 둘은 나가게 되었다.
어디로 가야할지 너무나 막막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와 같이 수업을 받는 선배님께 물어 테마 여행 자료를 얻어 그 길을 똑같이 움직이기로 했다. 길도 자세히 모르고 초보의 운전 솜씨라 솔직히 힘들긴 했지만 우리들은 열심히 돌아다녔다.
우린 처음으로 부안군 백산면에 있는 백산봉기 터에 갔다. 우리가 간 그 곳이 1894년 3월 25일에 수만의 농민군이 집결하여 군대로서의 대오를 갖추고 동학농민혁명의 시작을 널리 알린 역사적인 장소였다. 또 해발 47미터의 낮은 산이지만 부안, 김제, 고부, 태인 등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로, 고부들판이 한 눈에 들어오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산에 올라가기 때문에 힘이 많이 들꺼라고 생각하여 물까지 준비를 했건만 왜 사갔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낮은 언덕같은 산이었다. 하지만 주위를 둘러보니 정확히 어디가 어디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멀리까지 보이는 거 같았다. 그곳에 계속 있으니 어딘지 모르게 예전에 동학농민운동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다. 바로 이 자리에서 수백명의 사람들이 모였다는 모습을 상상해 보기도 하였다. 그러자 뭉클한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그런 감정이 들었다. 잠시 명상에 잠긴 후 산에서 내려갔다.
우리가 다음으로 간 곳은 전봉준 고택이었다. 멀리서 봤을 때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어떤 초가집이 두 채가 있었는데 나는 전봉준 고택이 아닌 다른 집을 보고 '전봉준 고택인가 보구나... 어? 근데 사람이 사는 거 같네..' 라는 엉뚱한 생각을 하였다. 잠시 내 착각이었던 걸 금새 깨달을 수 있었다. 전봉준 고택은 과거 전봉준 장군이 살았던 집으로 갑오년 당시 행정구역상 고부군 궁동면 장내리 조소마을이었다고 한다. 또한 1894년 고부농민봉기 때 안핵사 이용태에 의해 불태워졌으나 완전히 소실되지 않아 후에 보수한 것 이였다. 안을 구경해보니 다른 옛날 집들하고 별반 다를 것은 없었다. 그러나 전봉준 장군이 살았다는 데에 의의를 두기 때문에 조금 더 관심을 가지고 보았다. 여러 가지 삶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또한 후세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다시 수리하였다는데에 선조들에게 감사의 마음도 느꼈다. 초가집으로 되어있어서 관리하는 데에도 굉장히 힘들꺼 같았다. 특별히 와 닿는 감정은 없었지만 동학농민운동의 선두였던 전봉준 장군의 모습이 자꾸만 떠올랐다.
우린 다시 차를 몰고 말목 장터로 향했다. 테마여행을 갔던 사람들은 시간이없어서 인지 몰라도 들르지를 못했다고 했는데 우리는 인원도 적었고 우리가 차를 몬ㄹ수있는던 분에 여유롭게 말목장터를 들ㄹ름수 있었다. 말목장터는 부안, 태인, 정읍으로 가는 길이 만나는 삼거리에 있는 장터로 1894년 1월 10일 고부봉기 때 고부로 진출하기 전에 이 일대 농민 1천여 명이 모였던 장소로써 제 1차 봉기 직전까지 장두청 ( 고부봉기의 지도자들이 머무르며 지휘하던 장소 ) 이 있었던 곳이었다. 옆에 복지회관이 서 있었는데 그 자리가 옛 장터로 알려지고 있다고 하였다. 고부봉기 당시 전봉준 장군이 통문을 돌려 1월 9일 저녁 농민들을 이곳에 모이게 했다는 것을 보면 이 곳에 예전에는 큰 장터였음을 알 수 있었다.
우리가 다음으로 간 만석보라는 곳은 정말 뜻밖에 장소에 있었다. 내 생각에는 좀더 잘 꾸며져 있을 꺼 같았는데 의외로 다리건너편에 기념비 몇 개밖에 없었다. 이곳은 갑오년 당시 고부군수 조병갑이 정읍천과 태인천이 합류하는 동진강 상류에 농민들이 쌓아 사용하고 있던 민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농민들을 동원하여 그 하류에 새로 보를 쌓고 과중한 수세를 징수하였다. 이에 전봉준, 김도삼, 정익서 등 고부 군민들을 1893년 11월과 12월 두 차례에 걸쳐 고부관아에 수세감면을 진정하였으나 강제로 쫓겨나고 말았다. 급기야 1894년 1월 10일 전봉준의 지휘 아래 1천 여명의 고부 농민들은 관아를 습격하고, 만석보를 부셔버렸다. 이것이 동학농민혁명의 도화선이 된 고부농민봉기이다. 여기서 만석보는 고부농민봉기를 유발한 고부군수 조병갑 학정의 상징물임을 알 수 있다라는 것이었다. 정말 우리 백성들의 고통이 느껴졌다. 앞의 배들평야라는 넓은 들이 펼쳐져 있는 걸 보니 백성들에게 착취했던 조병갑이라는 군수가 더욱 야속하게 느껴졌다. '좋은 환경에 있어도 잘못된 군수를 만나서 고통을 받고 가슴에는 걱정이 떠날 날이 없겠다.. 요즘에 정치인들을 봐도 서로 자기가 잘낫다고 싸울뿐이지 국민을 위한 정책은 마련하지 않는걸 보면 예나 지금이나 약한 자가 피해를 보는구나... '라는 생각을 하였다. 그런 생각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가슴 깊이 무언가가 올라오는 거 같았다. 그리고 착취속에 소중한 목숨을 잃어갔던 그 분들을 위해 잠깐동안의 묵념을 가졌다.
우리는 다시 차를 몰고 황토재 전적지로 갔다. 동학농민운동의 유적지에서 가장 크고 잘 꾸며진 곳이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관리를 잘하고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드는 그런 곳이었다. 우린 그곳에서 싸온 점심을 먼저 먹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말을 떠올리면서 말이다. 여러곳을 돌아다녀서 그런지 밥맛이 좋았다. 그리고 나서 황토재 기념관으로 들어갔다. 그 곳에는 갑오동학농민혁명 당시를 생생하게 그린 기록화 4폭과 선생의 마을 유품, 사료 및 당시의 병기 등 87종 104점이 전시되어있었다. 고등학교 때 배웠던 국사책에 나온 사진도 거기에서 볼 수 있었다. 국사책에서 보던것보다 더 생생한 느낌을 받았다. 역시 백문이불여일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념관에서 나와 뒤쪽으로 가보면 전봉준 동상이 있었는데 그 곳은 1987년에 세워진 곳으로 아까 썼던 백산 창의문 중에 "우리가 의를 들어 여기에 이르렀음은 그 본의가 ∼만일 기회를 잃으면 후회하여도 돌이키지 못하리라."라는 동학농민군의 함성이 묘사되어 있다고 한다. 이 말을 듣고 동상을 보니 그런 것 같았다. 전봉준 장군의 모습이 굉장히 위엄있어 보였다. 역사의 획을 긋는 큰 사건의 선두의 모습답게 말이다. 다부져 보이는 그의 모습에서 역시 크게 될 인물은 뭐가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나역시도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히 답사하는 게 아니라 역사의 흔적을 찾으면서 나를 반성하는 것이 오늘의 목적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 옆에는 예전에 고부관아지였던 고부초등학교가 있었다. 조선말엽에는 고부가 전주다음으로 컸다고 하였는데 지금은 쇠락하여 하나의 면 소재지로 되어 버린게 안타깝게 느껴졌다. 군자정에도 가보았는데 고부군수 조병갑이 기생들과 어울려 놀았던 곳이라 왠지 꺼림직했다.
정읍시 고부면 신중리 주산마을에 있는 동학혁명 모의탑에도 갔다. 원래는 대뫼마을이었다고 한다. 큰 산옆에 있어서라나...그 앞에는 혁명을 추모하는 비같은게 있었는데 그것을 정부의 도움없이 그 마을 주민들이 돈을 모아서 세웠다는 게 인상적이었다. 비록 잘 꾸며져 있지는 않았지만 혁명을 추모한다는 정신만은 정말 어떤 다이아몬드에도 비교할 수 없는 값진 보석이었다. 그 마을사람들의 끈끈한 정도 느낄 수 있었다. 서로의 뜻이 맞았기 때문에 세워진 것일 테니까 말이다. 요새는 옆집에 사는 이웃하고도 말을 하지 않는데 비해 너무나 본 받을만한 일인 거 같다.
이 곳에서는 사발통문이 발견되었는데 사발통문이라는 것은 격문 또는 일반에게 호소문을 쓰고나서 그 주모자가 드러나지 않도록 관계자의 이름을 원둘레를 따라 적은 통문이다. 송두호의 집에서 조병갑의 학정에 대한 대책을 모색했는데 거기에 모인 사람들은 조병갑 군수를 죽이고 전주감영을 함락시켜 서울로 올라가자는 혁명적인 모의를 결의하고 이런내용을 답은 사발통문을 각 마을 집강들에게 보냈다. 이 사발통문이 송후섭의 집에서 족보를 보다가 발견되어 세상에 알려져 1969년 4월에 동학혁명모의탐을 세웠다. 그 발견이 너무 우연인 거 같았다. 그리고 아직도 알려지지 않는 동학혁명에 관한 사실이 많을꺼라는 생각도 들었다. 발견을 할 때마다 신중하게 생각하고 역사를 다시 쓸수 있는 그런 소중한 자료가 또 나타났으면 좋겠다.
우리들이 힘들게 차를 몰고 나갔었던 모든 답사가 끝났다. 차를 몰고 전주로 왔다. 오면서 피곤하기도 하였지만 오늘 하루에 대해서 생각해보았다. 먼저 동학농민 유적지는 내가 생각했던거 만큼 크지도 잘 꾸며져 있지도 않았다는 점이다. 역사적으로는 동학농민혁명이 큰 의의를 가진다고 해 놓고선 정작 유적지는 별로 볼 게 없다는 것이다. 탑하나만 있다던가 기념비 몇 개만 있다던가..그런 식으로 말이다. 이건 누구의 잘못도 아닌거 같다. 우리의 무관심속에서 알려지지도 않고 그냥 그렇게 내팽개쳐져 있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다행히 요즘에는 사람들이 서서히 관심을 가지는 거 같다. 학술세미나라든지 여러 가지 재현이라는지 동학농민운동에 관한 행사가 많아진걸 보면 말이다. 하지만 우리가 참여하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우리의 인식이 모두 바뀌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 내가 느낀 점은 답사라는 게 즐거웠다는 것이다. 부드러운 분위기 속에서 내가 알지 못했던 사실에 대해 하나하나 알 수 있었고 그에 관해서 느낄 수 있었다.
따뜻한 봄 날씨와 함께 했던 나의 답사는 정말 즐거운 시간이었고 많은 걸 느낄 수 있었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여러명의 친구들과 다른 주제를 정해서 답사를 또 한번 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