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는 열차
허 연
우리는 모두 뜨거운 수프 같은 열차를 탄 적이 있다
도적이 되어
혹은 야반도주자가 되어
덜컹대는 사연에 올라탄 적이 있다
대개는 취기에 기대어
다시 안 올 거라고 침 몇 번 뱉으며
은하철도에 올라탄 적이 있다
득의양양했지만 마음은 한없이 무너졌으며
두고 온 것들은 어쩌면 그렇게 또렷하게
스테인드글라스처럼 어두운 차창에서
되살아났는지
밤 열차에선
지친 사람들이 조각상처럼 줄지어 쓰러져
누군가는 귤을 씹고 누군가는 계란을 까곤 했다
사랑받고 싶었지만 그렇지 못했고
죽고 싶었지만 그것을 못 했던 조각상들
굵은 점선 같은 철로를 따라
슬픈 여자들은 쉼 없이 알을 낳고
남자들은 피를 닦아내고 있었다
잠들지 못하는 아이는
공주를 그리고 또 그렸고
거칠어진 공기를 뚫고 뜨거워진 열차는
이제 아무데도 갈 수 없는 사람들을 태우고
옥수수밭으로 들어가는 얼룩무늬 뱀처럼
막다른 세월 속에서
아주 짧은 석양이 되고 있었다
—사이버문학광장 《문장웹진》 2023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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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연 / 1966년 서울 출생. 1991년 《현대시세계》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불온한 검은 피』 『나쁜 소년이 서 있다』 『내가 원하는 천사』 『오십미터』 『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