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없는 평야 거느린 미륵신앙의 본거지
모악산은 언제 보아도 어머니 같이 푸근하다. 거기에다 우주만물을 아우르는 심오한 철학까지 스며있다. 그래서 모악산 가는 길은 편안하면서도 삶의 깊이를 천착할 수 있는 진한 멋이 배어있다.
차창 밖에서는 김제 평야의 옹골진 모습이 나의 마음을 넉넉하게 해준다. 금산사로 들기 전에 귀신사로 향한다. 청도 마을 입구에서부터 감나무 길이 나의 마음을 금방 고향 길로 인도한다. 홍시 맛도 각별하다.
마을 언저리의 때묻은 돌계단을 올라서자 소박한 농부 마냥 티없는 모습의 절 집들이 등장한다. 증축된 건물이 있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 고풍스러운 맛이 그대로 묻어 나온다. 절과 주변의 마을이 이웃사촌 마냥 어울려 있는 모습도 너무나 자연스럽다. 이런 절 마당에 서 있는 사람들의 마음도 더없이 편안하다. 대적광전의 고풍스러움 뒤에서는 백제계 삼층석탑과 사자상 등위에 세워진 남근석이 마을을 내려보고 있다.
"기름기 번지르르한 다른 절과는 달리 가난하고 예스러운 기운이 풍겨서 좋다."
"너무 친근하고, 소박해서 좋다."
귀신사 돌계단을 내려오면서 이심전심으로 이런 얘기가 오간다. 금산사, 귀신사 등 여러 절을 품고 있는 모악산은 계룡산과 더불어 우리나라 민간신앙의 본거지로 손꼽힌다. 대표적 민족종교인 증산교의 교주 강증산이 득도하여 증산교를 창시한 곳도 금산사 아래 구리골(銅谷)이다. 동학혁명이 실패한 이후 어디에도 마음을 둘 데가 없었던 민중들에게 증산교는 무서운 속도로 전파되었다.
금산사로 들어가는 초입의 금평저수지 근처에 증산법종교 교당이 있고, 교당 안 영대라는 건물에 강증산 부부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여기에서 금산사 쪽으로 약간 올라가 저수지가 끝나는 지점에서 조그마한 다리를 건너 왼쪽 동곡마을 가는 길로 돌아 700m 가량 들어가면 강증산이 도통한 후 9년 동안 머물며 민중을 교화했던 동곡약방이 있다.
아름다운 세상 꿈꾸는 미륵불
금산사 가는 길에는 늙은 벚나무와 수백 년 묵은 물참나무, 팽나무들이 우거져 있어 조용히 걸으면서 미륵불을 만날 마음의 준비를 하도록 한다. 포장된 길옆으로 야생화를 감상하며 걸을 수 있는 오솔길을 만들어놓아 정겹기도 하다.
우리는 일주문과 금강문, 천왕문, 보제루를 통과하면서 세속의 때를 한 가닥씩 벗고 나서야 참배공간에 도착한다. 너른 절 마당을 가운데 두고 보제루와 대적광전이 마주보고, 동쪽에는 국보 제62호인 미륵전이, 서쪽에는 대장전 등의 건물이 ?자형 구조를 이루고 있다.
제일 먼저 마음이 가는 곳은 미래의 부처인 미륵불을 모신 미륵전이다. 미륵불은 석가가 입적한 지 56억 7천만년 후에 석가가 구제하지 못한 중생을 마저 구제하기 위하여 오는 부처(後世佛)이다. 삼국시대 말기 백제에서 크게 일어나 현세에 행복하지 못해 새 세상을 갈구하는 사람들의 신앙으로서 지금까지도 이어져오는 미륵신앙, 그 미륵신앙의 본거지가 이곳 금산사다.
미륵전에 모셔진 미륵불 앞에 선다. 11.89m 높이의 웅장한 미륵입상이 아름다운 세상을 염원하고 있다. 그러나 세상은 힘의 논리가 지배하고, 세상의 모태인 자연은 갈수록 황폐화되어 가는 현실을 보면 정말로 아름다운 세상은 만들어질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생길 때도 많다. 미륵부처는 나에게 그럴수록 너 자신부터라도 마음을 다스리고 소박하게 살아가라는 충고를 하는 것 같다.
미륵불 옆으로 계단을 올라가면 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신 석종형 부도와 오층석탑이 절 마당을 내려보고 있다. 절 마당 곳곳에는 석등과 육각다층석탑, 석련대 같은 석물들이 금산사의 아련한 역사를 말해준다.
금산사 미륵불을 뒤로하고 모악산 정상을 향하여 본격적인 산행을 시작한다. 모악산 정상의 모습이 눈앞에 들어온다. 길 오른쪽의 과수원에는 빨간 사과가 주렁주렁 열려 있다. 금산사를 출발한지 얼마 안되어 계곡을 옆에 낀 숲길이 이어진다. 밤나무, 도토리나무에서 떨어진 밤과 도토리를 주어먹는 다람쥐의 몸놀림이 귀엽다.
심원암으로 가는 길이 갈리는 지점에서 모악정으로 방향을 잡는다. 계곡 옆에 조용하게 자리잡은 모악정은 주위의 숲, 계곡들과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면서 사람들을 부르고 있다. 난간 안쪽의 길다란 나무에 걸터앉으니 골바람이 서늘하게 불어온다. 계곡의 물소리도 그지없이 시원하다. 저 멀리 살포시 내민 푸른 하늘이 호방할 수 없는 계곡의 답답함을 덜어주기에 안성맞춤이다.
모악정에서 장근재 쪽으로 가는 길을 버리고 헬기장으로 연결되는 능선 길을 택한다. 모악정 앞의 널따란 길을 벗어나자 곧바로 돌계단과 로프가 설치된 가파른 길이 기다리고 있다. 300m쯤 되는 가파른 길을 벗어나니 경사가 완만해진다. 길옆으로는 소나무, 굴참나무, 도토리나무 등이 우거져 있다.
8부 능선 근처에는 그리 크지 않은 바위들이 옹기종기 모여있어 그 동안 보여준 육산의 모습에서 약간의 변화를 준다. 이러한 둥그런 바위지대를 지나니 길가에 평평한 바위가 우리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신선들이 놀았다는 신선대다. 동쪽 대원사 밑에 위치한 선녀폭포에서 보름달이 뜨는 날이면 하늘나라 선녀들이 내려와 목욕을 즐긴 후 수왕사 약수를 마시고 이곳 신선대에서 신선들과 어울려 놀았다는 전설이 서려있는 곳이다.
오늘은 우리 일행이 선남과 선녀가 되기로 한다. 선남과 선녀들은 먼저 신선대 위에 편한 자세로 앉는다. 그리고 주위의 산세를 둘러본다. 건너편 위로 정상이 보이고 정상에서 장근재 쪽으로 부드러운 능선이 평화롭게 이어진다. 산비탈에는 울창한 숲이 조성되어 포근함을 더해 준다.
'산이 아니외다 어머니외다'
북쪽 중인리 쪽으로 연결되는 능선에 도착한다. 지척으로 정상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정상에는 송신소가 자리잡고 있어 송신소에서 설치해 놓은 철조망 앞에서 멈출 수밖에 없다.
여기에서 가없이 펼쳐지는 망망한 평야, 김만평야를 바라본다. 이곳 사람들에게 김만평야는 '징게맹게 외배미들'이다. '외배미'란 '이 배미 저 배미 할 것 없이 모두 한 배미'로 툭 트였다는 데서 온 말이니 '김제·만경의 너른 들판'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넓은 들 가운데 793m의 모악산이 우뚝 솟았으니 큰산일 수밖에. 모악산과 금산사는 원래 큰산을 뜻하는 고어 엄뫼, 큼뫼에서 비롯되었다. 한자가 들어오면서 엄은 어머니(母)의 뫼라는 뜻의 모악으로, 큼은 금(金)으로, 뫼는 산(山)으로 적게 되었다.
서쪽으로 김만평야가 지평선을 이루고 있다. 땅과 하늘이 닿아 이룬 지평선은 '징게 맹게'가 아니고서는 찾아보기 힘든 광경이다. 가없는 평야와 어울린 모악산, 이는 우뚝 솟은 산들이 자리잡고 그 사이에 들판이 조성된 우리나라의 일반적인 풍경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정상을 기준으로 서쪽은 김제시가, 북쪽은 전주시, 그리고 동쪽에는 완주군이 자리잡고 있다. 김제에는 김제(金堤)라는 이름부터 시작하여 금구, 금평, 금산, 금천 등 쇠 금(金)자가 들어간 이름이 유난히 많다. 옛날 백제 때부터 김제 땅에서는 사금이 많이 생산되어 이러한 지명이 붙었다.
정상 동쪽으로 조금 돌아가니 여기에서는 전주시내의 아파트들이 한 눈에 들어오고 구이 저수지와 경각산이 바로 앞에 와 있다. 서쪽은 지평선이 바라보인데 비하여 동쪽은 운장산, 연석산, 만덕산 등 완주·진안·무주·장수 쪽의 산들이 첩첩하다. 멀리 덕유산 줄기가 아득하다.
동쪽의 첩첩한 산군이 가슴깊이 다가오는 정상 동쪽에는 구이저수지 방면에서 올라오는 사람들이 금산사쪽 등산로에 비하여 훨씬 많다. 전주에서 가깝기 때문이다. 수왕사 입구에서 는 많은 사람들이 쉬고 있다. 절벽 아래에 보금자리처럼 자리잡은 수왕사는 동쪽으로 구이저수지를 비롯하여 첩첩한 산줄기들을 바라볼 수 있는 빼어난 조망처다.
수왕사에서 20분쯤 내려오니 대원사 바로 옆 느티나무 숲이 우리를 붙잡는다. 절 마당에 들어서니 모악산 정상이 올려다 보이고 느티나무에서는 몇 마리의 새들이 사이좋게 놀고 있다. 강증산은 갑오년 동학혁명 실패이후 풀벌레만도 못하게 죽임을 당하고 강탈당했던 우리 민중의 후천개벽(後天開闢)을 염원하며 먼저 스스로 크게 깨우치기 위하여 이곳 대원사에서 수도하여 득도하였다. 모악산을 쳐다본다. 어머니처럼 한없이 포근하다. 고은의 시 '모악산'을 음미한다.
내 고장 모악산은 산이 아니외다
어머니외다
저 혼자 떨쳐 높지 않고
험하지 않고
먼데 사람들마저
어서 오라 어서 오라
내 자식으로 품에 안은 어머니외다.
여기 고스락 정상에 올라
거룩한 숨 내쉬며
저 아래 바람진 골마다
온갖 풀과 나무 어진 짐승들 한 핏줄이외다
세세생생
함께 살아가는 사람과도 한 핏줄이외다
이다지도 이다지도
내 고장 모악산은 천년의 사랑이외다.
오 내 마음 여기 두어
▷교통
-. 호남고속도로 금산사나들목에서 712번 지방도로를 따라가면 금산사주차장에 닿는다. 구이방면은 전주나 순창에서 27번 국도를 타고 간다.
-. 금산사는 전주(25분 간격)와 김제(30분 간격)에서 시내버스가 자주 있고, 구이면 상학은 전주에서 20분 간격으로 시내버스가 다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