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에 대한 니체의 생각.txt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니체가 자연언어를 보는 시각을 완전히 바꾸어놓았다는 데 있다. 가령 니체는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데카르트의 코기토(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명제는 자연언어가 유도하는 [문법적 습관]을 반영한다. 이 문법적 습관의 핵심은 '모든 행위에는 주체가 있다'는 믿음이다. 이런 믿음 때문에 데카르트는 사유의 행위에서 사유하는 주체로, 그리고 다시 실체로 추론해갔다. 하지만 이런 믿음의 행렬은 우리가 자연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생기는 착오에 불과하다.
모든 형이상학적 범주들 중에서도 특권적 지위에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주체 혹은 자아라는 범주이다. 그것은 다른 범주의 형성을 조장하는 모태범주라는 점에서 특권적이다. ['자아'에 대한 믿음은 논리학에 대한 믿음, 다시 말해서 이성적 범주들의 형이상학적 진리에 대한 믿음과 함께 간다. 가령 실체나 사물이라는 범주는 자아라는 범주에서 유래한다.]
그렇다면 다른 형이상학 범주들의 모태인 주체라는 범주는 어디에서 유래하는가? 그것은 자연언어의 문법적 구조와 그것이 형성하는 문법적 습관에서 온다. [모든 판단에는 주어와 술어 혹은 원인과 결과에 대한 전적인 믿음이, 충만하고 깊고 깊은 신앙이 숨어 있다. 게다가 원인과 결과에 대한 믿음은 주어와 술어에 대한 믿음의 특수한 경우에 불과하다. 그래서 근본적 믿음으로서 다음과 같은 믿음이 남는다. (주어에 해당하는) 주체들이 있다. 발생하는 모든 것은 이러저러한 주체에 술어적으로 관계한다.]
데카르트의 코기코 명제가 문법적 습관의 귀결이라는 니체의 지적은 이런 통찰에 근거를 둔다. 그 습관은 주어를 주체로, 행위의 원인으로, 실체로 둔갑시키는 가상적 추론의 뿌리이다. 그 습관 속에 싹트는 '근본신앙'은 명제의 구조와 세계의 존재론적 구조가 같다는 믿음이다. 여기서 실체는 여럿의 술어를 동시에 소유하는 주어이되 다른 주어의 술어로 귀속되지 않는 주어이다. 그러나 만약 귀속된다면? 그래서 모든 주어를 자신의 술어로 소유하는 최고의 주어를 생각할 수 있다면? 아마 그것이 많은 철학자들이 생각하는 신, 존재 등에 해당하는 실체가 될 것이다. 이는 서양 형이상학의 존재이해가 서양 언어에 고유한 문법적 편견의 산물임을 말한다. 서양적 존재이해, 그것은 서양인의 문법적 습관의 귀결이다.
김상환 [니체,프로이트,맑스 이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