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양사
대한불교조계종 제18교구 본사이다. 632년(백제 무왕 33) 여환(如幻)이 창건하여 백암산백암사라고 했으며, 1034년(덕종 3) 중연(中延)이 중창하면서 정토사(淨土寺)라고 개명했다. 1350년(충정왕 2) 각진국사(覺眞國師)가 3창하고, 1574년(선조 7) 환양(喚羊)이 현재의 백양사라고 개칭했는데 이것은 환양의 〈법화경〉 독성소리에 백학봉에 있는 흰 양떼가 자주 몰려온 것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한다. 1786년(정조 10) 환성(喚星)이, 1864년(고종 1)에는 도암(道巖)이 중건했다. 근세 이후에는 송만암(宋曼庵)에 의해 교세와 사운이 융성했다. 일제강점기에는 31본산 중의 하나였으며 현재는 26개의 말사를 관장하고 있다. 현존 당우로는 대웅전(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43호)·극락보전(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32호)·사천왕문(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44호)·명부전·칠성각·진영각(眞影閣)·보선각·설선당(說禪堂)·선실(禪室)·요사채·범종각 등이 있다. 이밖에 백양사 재흥에 힘쓴 태능(太能)의 소요대사부도(逍遙大師浮屠: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56호)와 고려 때 각진국사가 심은 것으로 전해지는 절 주위의 비자나무는 천연기념물 제153호로 지정되어 있다. 또한 이 절에서는 전통적인 재식(齋式)이 집전되는데 관조부(觀照部)·전경부(轉經部)·정근부(精勤部)·송주부(誦呪部)·범음부(梵音部)가 각각 행해진다.
정토사로 불리우던 절이 백양사로 불리우게 된 것은 다음과 같은 전설이 이어져 온다.
조선 선조 7년(1574) 환양선사(喚羊禪師)가 백양사라 개칭하였다. 환양선사는 법화경을 독경하며 기도하였는데, 백학봉 밑에 사는 흰 양이 암자로 찾아와 무릎을 꿇고 스님의 독경소리를 귀기울여 듣고 돌아가곤 했다. 그러기를 몇 달, 어느 날 스님의 꿈에 흰 양이 나타나 "스님의 독경소리에 깨달음을 얻어 축생의 몸을 벗고 이제 사람의 몸으로 환생합니다. 스님 감사합니다." 하며 절하고 물러났다. 스님은 이를 이상히 여겨 다음날 아침 뒤산을 산책하던 중 흰 양이 죽어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 꿈을 이해하였다. 그 후로 스님의 높은 법력에 의해 축생인 양을 제도하였다 하여 절 이름을 백양사라 고쳐 부르게 되었다
백양사 근처에는 숱한 외적과 전쟁을 치루어 민족의 한이 서려있는 입암산성이 있다. 이 산성에서 고려 고종 때 몽고군의 침입을 격퇴하기도 하였다. 임진왜란 때에는 1592년 7월 20일 장성 남문(현재의 북일면 오산)에서 김경수(金景壽), 기효간(奇孝諫), 윤진(尹診) 등이 격문을 각 고을에 보내어 의병을 일으켜 김경수를 맹주로 추대하고 김제민(金齊閔)을 의병장으로 삼아 북으로 진군하여 직산, 진성, 용인 등지에서 왜군을 격파한 남문창의 의병항쟁을 일으켰다. 이 남문창의에 의승장(義僧將)으로 처능(處能), 자혜(慈惠), 의관(義寬), 계묵(啓默), 덕인(德忍), 처한(處閒), 학인(學仁), 계한(戒閒), 혜인(惠仁) 등 9명의 승려가 참여했다. 또한 동학농민전쟁 당시 백양사 스님들이 다수 참여해 농민군과 함께 싸워 순절하여 역사와 민족과 함께 해온 백양사의 의절과 기개의 전통을 이었다.
백양사는 예로부터 훌륭한 선지식인 큰스님들이 백양사 입구에 줄지어 있는 고목나무들처럼 끊이지 않았으며, 백양사의 운문암은 고려 각진국사를 비롯 조선시대 소요태능, 편양언기, 연담유일 등 조선말기 불교를 이끌어 왔던 백파, 학명스님, 그리고 용성, 인곡, 석전, 만암, 고암스님 등 암울했던 일제강점기시대 우리나라 불교법통을 이어온 고승 선덕 스님들이 상주수행하여 수행근본도량으로 자리하고 있다.
백양사에는 산내에 12암자가 있었으나 한국전쟁으로 인해 전소되었다가 최근 대부분 복원되었다. 다만 묘련암만 빈터로 지금도 남아 있는데, 이곳에는 장서각이 있었다고 한다. 전란으로 소실되었던 쌍계루를 1985년 복원하였다.
백양 12경으로 쌍계루, 운문암, 영천암, 약사암, 감로천, 대웅전, 비자림, 비림, 용수탕, 천진암, 청류암, 봉황대가 있다.
백양사 12암자는 운문암, 청류암, 물외암, 약사암, 영천암, 천진암, 묘련암, 백련암, 서양암, 금강대, 지장암, 청량원이다.
백양사는 1300여년의 유구한 역사를 이어오면서 숱한 고난과 전란 속에서도 민초들과 함께 해 온 호남불교의 요람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곳은 백두대간이 남으로 치달려와 그 신령스러운 기운이 백암산에 치솟아 학이 날개를 편듯한 백학봉의 수려하고도 장엄한 기상의 품에 안겨 자리잡고 있다. 백양사 경내에는 고풍을 자랑하며 단아하게 지어진 극락보전이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식 맛배지붕을 하고 있으며, 대웅전, 사천왕문 등 지방 유형문화재가 있어 선조들의 빛나는 문화의 숨결을 직접 느낄 수 있다. 또 천연기념물 제153호인 비자나무숲과 차밭이 펼쳐져 있어 부드럽고 온화한 기품이 있다.
백양사는 1996년 3월 31일 열린 제120회 조계종 종회에서 고불총림으로 승인됨에 따라 이 지역 불교계의 활성화는 물론 수행도량으로서의 역할이 기대되고 있다. 백양사의 총림지정 배경은 개혁종단 출범이후 여러가지 법과 제도를 제정함에 따라 상대적으로 본 말사의 자치권이 약화된데다 왜색 서구문화범람과 더불어 타락한 승풍을 진작하고 민족정기를 함양하기 위한 것이다. 총림이란 선원(禪院) 강원(講院) 율원(律院) 등을 구비해야만 자격요건에 해당되며 명실공히 백양사가 종합수행도량으로서의 위상을 갖게 된 셈이다.
식영정
명승 제57호
조선 명종 때 서하당(棲霞堂) 김성원이 그의 장인 석천(石川) 임억령을 위해 지은 정자로, 이곳에서 송강(松江) 정철이 성산별곡, 식영정 20영 등 한시와 가사 및 단가 등을 남겨 송강 문학의 산실이 되었고, 우리나라 고전문학 발전의 기틀을 마련한 곳으로 역사·문화적 가치가 있는 곳이다.
식영정(息影亭)은 주변 무등산과 광주호 등이 있어 자연환경과 조화미가 뛰어나고 주변의 소나무 고목과 송림, 배롱나무 등이 있어 아름다운 경승지로, ‘그림자도 쉬어가는 정자’라는 뜻이다.
송강 정철은 명종 13년(1561) 스물일곱의 나이로 과거에 급제한 뒤로 많은 벼슬을 지냈지만 권력 다툼에 휘말려 벼슬을 그만 두고 고향에 내려와 이곳 식영정에서 많은 선비들과 친분을 나누었다. 정철은 임억령, 김성원, 고경명과 더불어 ‘식영정 4선(四仙)’으로 불리는데, 이들은 주변의 경관이 뛰어난 스무 곳을 골라 각각 20수씩의 <식영정이십영(息影亭二十詠)>을 지었다. 이 문집은 훗날 송강 정철의 <성산별곡(星山別曲)>의 바탕이 된다. 담양군 지곡리의 옛 이름이 ‘성산’인데, 성산별곡은 이곳의 풍물을 계절에 따라 노래한 가사(歌詞)이다.
명옥헌
명승 제58호
조선 중기 명곡(明谷) 오희도가 자연을 벗 삼아 살던 곳으로 그의 아들 오이정이 선친의 뒤를 이어 이곳에 은둔하면서 자연경관이 좋은 도장곡에 정자를 짓고, 앞뒤로 네모난 연못을 파서 주변에 적송, 배롱나무 등을 심어 가꾼 정원이다.
시냇물이 흘러 한 연못을 채우고 다시 그 물이 아래의 연못으로 흘러가는데 물 흐르는 소리가 옥이 부딪히는 것만 같다고 하여 연못 앞에 세워진 정자 이름을 명옥헌(鳴玉軒)이라고 한다.
주위의 산수 경관이 연못에 비치는 모습을 명옥헌에서 내려다보며 경관을 즐길 수 있도록 조성하여 자연에 순응한 조상들의 지혜를 잘 반영한 전통원림으로 자연경관이 뛰어난 경승지이다.
오희도(吳希道 1584-1624). 자(字)는 득원(得原) 호(號)는 명곡(明谷) 1602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1623년(인조1) 알성문과(謁聖文科)에 합격하였다. 예문관(藝文館)의 관원으로 천거되었고 기주관(記注官)을 대신하여 어전에서 사실을 기록하는 검열(檢閱)에 제수되었으나 곧 사망하였다. 오희도(吳希道)의 4자(四子) 오이정(吳以井 1619-1655)이 자연경관이 좋은 도장곡(道 藏谷)에 헌(軒)을 짓고 이를 명옥헌(鳴玉軒)이라 이름지었다. 오이정은 스스로 호(號를) 장계(藏溪)라 한 바 장계정(藏溪 亭)이란 이름은 여기에서 유래한다. 그 후 100여년이 지나 정자가 퇴락함에 따라 후손 오대경(吳大經)이 다시 중수하였다. 명옥헌(鳴玉軒)은 정자 앞에 연못이 파져있고 둘레에 적송(赤松) 및 자미나무등이 심어져 뛰어난 조경으 로 알려졌으며 장계정(藏溪亭)이란 현판이 걸려있다. 또는 뒤편 에 도장사(道藏祠)라는 사당에 있으므 로 도장정(道藏亭)이라고도 부른다. 명옥헌원림은 주변의 자연경관을 차경(借景)으로 도입한 정사(亭舍)중심의 자연순응적인 전통정원양식 이지만 전(前)과 후(後)의 조선시대 전통적인 ’방지중도형(方池中島形)’의 지당부(池塘部)를 도입하였다 전(前)의 지당부는 명옥헌의 북쪽에 위치하며 그 고저차는 약 6.3m이다. 동서너비 약 20m 남북길이 약 40m 크기를 갖는 방지의 중심부는 원형의 섬이있으며 주위에 약20주의 자미나무가 심어져있는데 수령 은 100여년 정 도이다. 명옥헌의 동쪽에 자리잡은 지당(池塘)은 동서 16m 남북 11m 크기이다. 이 지당 은1979년 여름에 조사 발굴된 것으로 남에서 북으로 흐르고 있는 계류의 물을 끌어 채운 것으로 북과 서 쪽에는 자미나무가 심어져 있다. 정면 3칸 측면2칸의 팔작지붕의 정자로 실의 구성은 외부로 퇴간을 돌리고 그 중앙에 실을 둔 중앙실형 (中央室形)이다. 방에는 구들을 두었고 평천장을 하였다. 마루의 외곽에는 평난간을 두었다.
소쇄원
명승 제40호
자연과 인공을 조화시킨 조선 중기 정원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다.
양산보(1503-1557)는 스승인 조광조가 유배되자 세상의 뜻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와 깨끗하고 시원하다는 뜻의 정원인 소쇄원을 지었다.
정원은 계곡을 중심으로 하는 사다리꼴 형태로 되어 있다. 4.060㎡의 면적에 기능과 공간의 특성에 따라 애양단구역, 오곡문구역, 제월당구역, 광풍각구역으로 구분할 수 있다. 정원 내에는 대나무, 소나무, 느티나무, 단풍나무들로 된 숲이 있다. 주위에는 흙과 돌로 쌓은 자연스러운 담이 있는데 ‘애양단’, ‘오곡문’, ‘소쇄처사양공지려’의 석판과 목판글씨가 담벽에 박혀있다. 소쇄원 안에는 영조 31년(1755) 당시 소쇄원의 모습을 목판에 새긴 그림이 남아 있어, 원래의 모습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 선비의 고고한 품성과 절의가 엿보이는 아름다운 정원으로, 조선시대를 대표할 수 있는 정원이다.
금성산성
사적 제353호
삼국시대에 처음 쌓았고, 조선 태종 9년(1409)에 고쳐 쌓은 후 광해군 2년(1610)에 보수공사를 하면서 내성도 함께 만들었다. 광해군 14년(1622)에는 내성 안에 관청을 건립하고 효종 4년(1653)에 성 위의 작은 담(여장)을 수리하면서, 전반적으로 성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외성은 2㎞, 내성은 700m 길이에 돌로 쌓은 산성이다. 동학운동(1894) 때 건물이 많이 불타 없어지고 현재는 동·서·남·북문의 터가 남아 있다. 내성 앞에는 국문영 장군의 비석이 남아 있다.
용흥사 동종
보물 제1555호
높이가 102㎝인 이 종은 조선시대 주종장(鑄鍾匠) 중 김애립(金愛立), 김성원(金成元) 등과 함께 사장계(私匠系)를 대표하는 김용암(金龍岩)이 주가 되어 1644년에 주성한 종으로, 규모도 비교적 클 뿐만 아니라 비례감과 조형성이 뛰어나다. 또한 종 고리로 쌍룡(雙龍) 대신 활력 넘치는 사룡(四龍)을 채용하여 특이함을 보이고, 종신에 시문된 각종 문양의 표현에서도 세련미가 넘쳐 난다.
따라서 이 종은 다른 조선 후기 범종에 비해 뛰어난 조형미와 문양 표현 등의 주조기술이 돋보이는 수작이다.
용화사 불조역대통재
보물 제737호
불조역대통재는 석가여래 탄생부터 원통 2년(충숙왕 복위 3년,1334)사이 학덕이 높은 스님들의 전기(傳記)를 연대순으로 적어 놓은 책이다.
이 책은 닥종이에 찍은 목판본으로 전체 22권으로 이루어진 것을 7권의 책으로 엮었으며, 크기는 세로 28.2㎝, 가로 16.8㎝이다. 김수온이 쓴 발문(跋文:책의 간략한 내용과 간행에 관계된 일을 적은 글)에 조선 성종 3년(1472)에 인쇄하여 펴냈다는 내용이 있다.
인수대비가 세조, 예종의 명복과 정희대왕대비, 성종, 공혜왕후의 장수를 빌기 위해『법화경』등 29종류의 불교경전을 간행하였는데, 이 책은 그 중 하나에 해당한다. 권22의 표지 안쪽에 있는 기록에는 묵담(默潭)이 세상을 떠난 스승으로부터 대대로 물려받아 간직해온 것이 현재 용화사 주지(住持) 스님에게 전해졌다는 내용이 있다.
전권을 하나도 빠짐없이 갖춘 유일한 것으로 조선 전기의 목판인쇄술과 왕실의 불교신앙을 살펴볼 수 있는 소중한 자료이다.
남산리오층석탑
보물 제506호
담양읍에서 순창 가는 길을 따라 1㎞쯤 가다 보면 넓은 평지가 전개되는데 절터의 흔적은 없고 들 가운데에 이 석탑만이 서있다.
탑은 1층의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며, 머리장식은 모두 없어졌다. 기단은 다른 탑에 비하여 높이가 매우 낮아 특이하고, 기단 맨윗돌의 너비가 1층 지붕돌의 너비보다 좁은 것 또한 특이한 양식이다. 탑신은 알맞게 체감되어 안정된 느낌이며, 2층 이상부터는 몸돌을 받치는 두툼한 괴임을 새겨 고려시대 석탑의 특색을 보여주고 있다. 지붕돌은 두껍고 처마는 경사졌으며 네 귀퉁이는 가볍게 들려있다. 또한 귀퉁이에는 풍경을 달았음직한 구멍이 있어 초창기의 장식적인 모습을 짐작하게 한다.
백제의 옛 땅 안에 위치하고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국보 제9호)을 모방하여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고려시대(高麗時代)의 석탑(石塔)인 이 탑은 높이 7m이며, 넓은 밭이 된 절터 한가운데 토단을 모으고 세워졌다. 기단(基壇)은 단층이며 중석(中石)에는 우주형(隅柱形)이 있을 뿐 탱주(撑柱)는 없다. 갑석(甲石)에는 밑에 부연(副椽)이 있고 위에는 각형(角形) 1단의 받침이 있으나 모를 죽인 점은 특이한 양식이다. 초층옥신(初層屋身)은 특히 높으며 각층 옥신에는 우주(隅柱) 모양이 있고 2층 이상의 옥신석 밑에는 별석(別石)을 삽입하여 고려시대(高麗時代) 석탑의 특색을 보여 주고 있다. 옥개석은 비교적 넓고 네 귀의 추녀는 모두 반전(反轉)되었으며 받침은 각층 3단인데 하각(下角)을 비스듬히 자른 괴임을 중심으로, 상하에 각형(角形) 괴임을 붙이는 특이한 양식을 취하였다. 이러한 받침 양식은 추녀 밑의 반전과 더불어 부여(扶餘) 정림사지(定林寺址) 오층석탑(五層石塔)의 양식을 본딴 듯하다. 상륜부(相輪部)는 전부 없어졌다. 기단은 폭이 약간 좁은 듯하지만, 석재(石材)의 가공이 정교하고 전체 형태도 정돈되었으며, 곳곳에 특이한 양식이 나타나는 중요한 석탑이다.
객사리석당간
보물 제505호
절에 행사가 있을 때 절 입구에 당(幢)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당간(幢竿)이란 이 깃발을 달아두는 대(臺)를 말한다. 담양읍 석당간은 담양읍에서 순창행 도로를 따라 1㎞쯤 가다보면 논 한가운데에 높게 서 있다.
연꽃잎이 새겨진 돌 위에 당간을 세우고 양 옆에 기둥을 세워 지탱하고 있다. 당간은 가늘고 긴 8각 돌기둥 3개를 연결하고 연결부위에 철띠를 둘렀다. 꼭대기에는 쇠로 만든 둥근 보륜(寶輪:바퀴모양의 장식)이 있는데 풍경같은 장식물이 달려있고 위에는 철침이 솟아있다.
바로 옆에 세워져 있는 석비(石碑)의 내용으로 미루어, 현재의 이 석당간은 조선 헌종 5년(1839)에 중건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유희춘 미암일기 및 미암집목판
보물 제260호
이 책은 조선 선조 때의 학자인 유희춘(1513∼1577) 선생이 직접 손으로 쓴 일기이다.
유희춘은 1538년 문과에 급제하여 수찬, 정언 등의 벼슬을 거쳤으나, 1547년 벽서사건에 연루되어 제주도에 유배되었다. 유배에서 풀려난 후 다시 여러 벼슬을 거쳤으며, 1575년 이조참판을 지내다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여생을 글쓰기로 보냈다.『미암일기』외에도『속몽구』,『역대요록』등을 남겼다.
지금 남아있는 일기는 선조 즉위년(1567) 10월부터 선조 10년(1577)까지 11년간에 걸친 내용이다. 내용 가운데 일부 중간은 몇 군데 빠진 곳이 있으나, 여기에는 조정의 공적인 사무로부터 자신의 개인적인 일에 이르기까지 매일 일어난 일과 보고들은 바를 빠짐없이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 일지는 임진왜란 때 선조 25년 이전의 기록이 다 타고 없어져,『선조실록』을 편찬할 때 이이의 『경연일기』와 더불어『선조실록』의 기본사료가 되었다. 본래는 14책이었으나, 현재 남아있는 것은 11책뿐이며, 부록으로 그의 부인 송씨의 시문과 잡록이 실려있다. 이 책은 판본을 포함하여 일괄 보물로 지정되었는데 이 중 3매를 전남대학교 박물관에서 임시 보관했다가 현재는 작자의 후손들이 보존각에서 보관하고 있다.
이 책은 조선시대 개인의 일기 중 가장 방대한 것이며, 동시에 사료로서의 가치도 크다. 조선시대의 각 관서의 기능과 관리들의 내면생활, 사회, 경제, 문화, 풍속 등을 여실히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개선사지 석등
보물 제111호
오랫동안 파묻혀 있었는데, 최근에 바닥을 파고 흩어진 부분을 정리하여 다시 세웠다. 높이 3.5m로, 아래받침돌에는 엎어놓은 연꽃 모양이 새겨졌고, 사잇기둥은 장고모양이며, 윗받침돌에는 솟은 연꽃모양을 새겼다. 불을 밝히는 곳인 화사석(火舍石)은 8각이며 창이 8면에 뚫렸다. 지붕돌은 아랫면에 낮고 널찍한 괴임이 있고, 8각의 끝부분에는 꽃모양을 둥글게 조각하였다.
석등의 창 사이 공간에는 통일신라 진성여왕 5년(891)에 만들었다는 글이 새겨져 있는데, 신라시대 석등 가운데 글씨를 새긴 유일한 예로, 비슷한 시대의 다른 작품의 연대와 특징을 연구하는데 있어서 표준이 되는 작품이다.
면앙정
시도기념물 제6호
면앙정은 중종 28년(1533)에 면앙정 송순(1493∼1582)선생이 관직을 떠나 선비들을 가르치며 여생을 보내던 정자로, 퇴계 이황을 비롯한 유명인사들과 학문에 대해 토론하던 곳이다. 조선 중기 문신인 송순 선생은 과거에 급제한 후 여러 벼슬을 거쳤으며, 말년에는 학문에 전념하면서 많은 책을 저술하였다. 처음 있던 정자는 선조 30년(1597) 임진왜란으로 파괴되어, 효종 5년(1654)에 후손들이 다시 지었다. 정자는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면앙정은 간소한 양식의 건물이기는 하지만, 역사적 가치가 커서 중요한 자료가 된다.
송강정
전남도기념물 제 1호
조선 중기의 건물로 가사문학의 대가 송강 정철이 머물던 정자이다. 정철이 머물던 당시에는 ‘죽록정(竹綠亭)’이라 불렀으며, 1770년에 후손들이 그를 기리기 위해 세우고 ‘송강정’이란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앞면 2칸 옆면 3칸 규모의 팔작지붕집으로 앞면에는 ‘송강정’ 옆면에는 ‘죽록정’이라는 현판이 각각 걸려 있다.
정철이 이 곳과 식영정을 오가며 <사미인곡>과 <속미인곡> 등의 많은 시와 가사를 지었다고 전해진다. 환벽당, 식영정과 함께 정송강유적이라고 불린다
송강정은 송강 정철(1536∼1593)이 조정에서 물러나 4년동안 조용히 지내던 정자로, 1955년에 고쳐 지었다. 정철은 조선 중기 학자이자 정치가로 명종 16년(1561)에 27세의 나이로 과거에 급제하였다. 그 뒤로 많은 벼슬을 지내다가 정권다툼으로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내려와 글을 지으며 조용히 지냈다. 그가 송강정에 머물면서 지었다고 하는 『사미인곡』은 조정에서 물러나 왕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여인이 남편과 이별하여 사모하는 마음에 빗대어 표현한 노래이다.
소쇄원
명승 제40호
담양 소쇄원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원림(園林)으로 민간 최고의 정원이다. 조선 전기의 문신 양산보(1503∼1557)는 열다섯 살에 정암 조광조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스승이 바른 정치를 구현하다 기묘사화(1519년)에 연루되어 죽게 되자, 열일곱 살에 고향인 담양으로 돌아와 소쇄원을 짓고 그곳에 머물며 평생 세상에 나가지 않고 은둔하였다.
소쇄원은 ‘깨끗하고 시원하다’는 뜻인데, 양산보는 계곡 가까이에 정자 광풍각을 세우고, 방과 대청마루가 붙은 제월당을 지어 그곳에 거처하며 조용히 독서를 하였다. 당호(堂號)인 제월(霽月)은 ‘비 갠 뒤 하늘의 상쾌한 달’을 뜻한다.
소쇄원을 만든 양산보는 후손에게 “어느 언덕이나 골짜기를 막론하고 나의 발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으니 이 동산을 남에게 팔거나 양도하지 말고 어리석은 후손에게 물려주지 말 것이며, 후손 어느 한 사람의 소유가 되지 않도록 하라”는 유훈을 남겼다고 한다.
소쇄원은 정유재란 때 담양이 왜적들의 집중적인 공략을 받으면서 소실되었다가, 양산보의 손자인 양천운이 중건을 하였고, 5대손인 양경지에 의해 완전 복구가 되어 지금까지 원림을 잘 가꾸어오고 있다.
자연과 인공을 조화시킨 조선 중기 정원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다. 정원은 계곡을 중심으로 하는 사다리꼴 형태로 되어 있다. 4.060㎡의 면적에 기능과 공간의 특성에 따라 애양단구역, 오곡문구역, 제월당구역, 광풍각구역으로 구분할 수 있다. 정원 내에는 대나무, 소나무, 느티나무, 단풍나무들로 된 숲이 있다. 주위에는 흙과 돌로 쌓은 자연스러운 담이 있는데 ‘애양단’, ‘오곡문’, ‘소쇄처사양공지려’의 석판과 목판글씨가 담벽에 박혀있다. 소쇄원 안에는 영조 31년(1755) 당시 소쇄원의 모습을 목판에 새긴 그림이 남아 있어, 원래의 모습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 선비의 고고한 품성과 절의가 엿보이는 아름다운 정원으로, 조선시대를 대표할 수 있는 정원이다.
독수정 원림
시도기념물 제61호
독수정원림은 고려 공민왕(재위 1351∼1374) 때 병부상서를 지낸 전신민이 고려가 망하자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며 은거하면서 지었다는 독수정이라는 정자 주위의 숲을 가리킨다. 독수정이란 이름은 이태백의 시에서 따온 것으로 은거하며 생활하는 선비의 고결한 뜻을 나타낸 것이다. 이곳에는 느티나무, 회화나무, 왕버들, 소나무, 참나무, 서어나무 등의 오래 된 나무들이 심어져 있고, 독수정 앞뜰에는 자미나무, 매화나무, 살구나무, 산수유나무 등이 심어져 있어 속세를 떠난 느낌을 준다. 전해 내려오는 말에 의하면 전신민은 대나무와 소나무를 심어 수절을 다짐했다고 한다. 또한 독수정의 방향은 북쪽으로 향해있는데, 이는 아침마다 북쪽 송도(지금의 개성)를 향해 탄식을 하며 절을 하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독수정원림은 조경적인 측면에서 볼 때 고려시대에 성행했던 산수원림으로서의 기법을 이 지역에 들여오는데 선구적인 역할을 했었던 것으로 여겨지며, 주변의 다른 정자에 영향을 주었으리라 생각된다. 그러나 지금의 독수정은 1972년에 허물고 새로 지은 것이기 때문에 기념물로 지정되지 못하였고, 그 주변의 노거수원림이 기념물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환벽당
광주시도기념물 제1호
조선시대 정자로 창계천의 충효동 언덕 위에 있다. 나주목사 김윤제(1501~1572)가 고향으로 돌아와 세운 후 후학을 양성하는데 힘쓰던 곳이다. 벽간당이라 불리기도 했던 환벽당은 앞면 3칸 옆면 2칸의 팔작지붕 목조기와이다. 우암 송시열이 쓴 글씨와 임억령, 조자이의 시가 현판으로 걸려 있다.
김윤제는 1532년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올랐으며, 그 후 나주목사 등 13개 고을의 지방관을 역임하였다. 송강 정철이 16세 부터 27세까지 이 곳에 머물면서 학문을 닦은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대표적인 제자로는 송강 정철과 김성원 등이 있다.
김윤제는 어느 날 집 앞 연못인 용소(龍沼)에서 용 한 마리가 승천하는 꿈을 꾸었다. 깨어서 용소로 가보니 용모가 준수한 소년이 목욕을 하고 있었다. 몇 마디 말을 나누어보니 용모 뿐만 아니라 머리도 영민한 소년이였다. 그래서 김윤제는 그 소년을 집으로 데려가 제자로 삼고 학문을 가르쳤으며 훗날 외손녀와 혼인시켰는데, 훗날 그가 명문장가로 이름을 날린 송강 정철이였다. 송강은 당시 순천 처가에 은둔하고 있던 중형을 만나러 가는 길에 환벽당을 지나다가 맑은 물이 흐르는 창계의 요소에서 목욕을 하던 중이였다. 그 때 마침 나주목사를 그만두고 고향언덕에 환벽당을 짓고 세월을 기다리던 김윤제를 운명적으로 만나게 된 것이다.
취가정
취가정(醉歌亭)은 광주시 북구 충효동 환벽당 남쪽 동산에 자리하고 있다. 이 정자는 이 마을 출신인 조선 선조 때의 명장 충장공(忠壯公) 김덕령(金德齡; 1567~1596)의 유덕을 기리기 위해 그의 후손들이 건립한 것이다.
의향 호남을 말할 때 으레 등장하는 이가 곧 의병장 충장공 김덕령 장군인데, 그는 1567년(명종22년)에 태어나 1596년(선조29년)에 29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떴다. 충장공은 어려서부터 기백과 담력이 뛰어났으며 소년시절 환벽당 주인인 사촌(沙村) 김윤제(金允悌)의 증손으로 우계(牛溪) 성혼(成渾)에게서도 수학했다. 25세가 되던 해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형 덕홍과 함께 담양에서 창의하여 전주까지 진군했는데 전란 중에 어머니의 병세가 악화되자, 형 덕홍은 노모의 봉양을 이유로 김덕령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의 활약은 왜적들에게 가장 무섭고 두려운 존재로 알려졌을 만큼 대단했다. 이를 시기하는 무리들이 생겨났고 이몽학이 난을 일으키자 김덕령이 그들과 내통해 모반을 획책한다고 모함했다. 그로 인해 김덕령은 투옥되고 옥에서 세상을 뜨고 말았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은 김덕령은 1661년(현종2년)에야 신원(伸寃)이 되어 병조판서로 추증(追贈)되고 충장(忠壯)의 시호를 받았다.
송강 정철의 제자인 석주(石州) 권필(1569~1612)은 꿈속에서 충장공 김덕령을 만나 서로 시가를 교환하게 되었다. 이때 김덕령이 술에 취한 모습으로 나타나 그의 원한을 호소하는 한 편의 시가를 읊었고, 석주가 이에 화답하는 한 수의 시를 지어 그의 원혼을 위로했다고 한다.
<술에 취해 부른 노래 어느 누가 들을 손가/ 꽃과 달을 즐겨함도 나의 소원 아니었네/ 높은 공을 수립함도 나의 바람 아니로다/ 공을 세운 그 업적도 구름처럼 사라지고/ 꽃과 달을 즐겨함도 쓸모없는 허사로다/ 술에 취해 부른 가곡 어느 누가 알아줄고/긴 칼 들고 일어서서 임금 은혜 갚으오리> - 김덕령
<칼을 잡고 일어섰던 지난 옛날 장한 뜻이/ 중도에서 꺾였으나 운명인 걸 어떠하리/ 한이 서린 그 영혼이 지하에서 통곡하며/ 마음속의 그 울분을 술에 취해 읊었도다> - 권필
뜻있는 선비들의 슬픈 마음을 자아내는 감격적인 장면이다. 이러한 장면을 기리기 위해 후손 김만식은 1890년에 정자를 지었고 또 술에 취한 모습으로 나타나 읊은 ‘취시가(醉時歌)’에서 그 뜻을 취하여 정자 이름을 ‘취가정(醉歌亭)’이라 한 것이다.
1950년 한국전쟁으로 건물이 소실된 후에 1955년에 중건하였다. 이 정자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골기와 팔작지붕으로 중앙의 거실 1칸을 제외한 좌우양칸이 모두 마루로 꾸며져 있다. 정면에는 ‘취가정(醉歌亭)’이라는 설주(雪舟) 송운회(宋運會)의 단아하면서도 묵직한 해서로 된 현판이 걸려 있으며, 충장공과 석주의 ‘취시가’ 및 화답시와 많은 편액들, 그리고 성문우천(聲聞于天), 충관일월(忠貫日月), 기장산하(氣壯山河), 취가어지(醉歌於地) 등 4개의 주련이 부착돼 있어 당시의 정취를 실감케 한다.
관방제림
담양 관방제림은 담양읍을 감돌아 흐르는 담양천 북쪽 제방에 조성되어 있으며, 남산리 동정마을에서 수북면 황금리를 거쳐 대전면 강의리까지 2㎞에 걸쳐 길게 이어져 있다.
관방제림을 구성하고 있는 나무의 종류로는 푸조나무(111그루), 팽나무(18그루), 벚나무(9그루), 음나무(1그루), 개서어나무(1그루), 곰의말채, 갈참나무 등으로 약 420여 그루가 자라고 있다. 현재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구역안에는 185그루의 오래되고 큰 나무가 자라고 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큰 나무는 300∼400년 전에 심어진 것이고, 작은 나무는 철종 5년(1854)에 황종림 담양부사가 심은 것이라고 한다.
담양 관방제림은 홍수피해를 막기 위해 제방을 만들고 나무를 심은 인공림으로 우리 선조들의 자연재해를 막는 지혜를 알 수 있는 역사 및 문화적 자료로서의 가치가 크므로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하고 있다.
1991년 11월 27일 천연기념물 제 366호로 지정되었다.
첫댓글 8월 답사지 자료, 일찌감치 올리셨네요... 감사합니다.
많은 자료를 준비하셨네요 감사
새로운 곳에 대한 기대가 큽니다.
답사자료 잘 보았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