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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방서예[3311] 四佳亭詩 28, 比安題詠 [비안제영]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의 시문집《사가집(四佳集)》에 실린 시이다.
비안제영(比安題詠)이란 제목의 시로
『신증동국여지승람』(비안) 제영(題詠)조에도 실려 있는데,
쌍계에서 두 물줄기가 합쳐 흐르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比安題詠 [비안제영]- 徐居正
雙溪合抱玉灣回 쌍계합포옥만회
公館依然島嶼開 공관의연도서개
馬渡翠橋鰲背過 마도취교오배과
鳥飛蒼壁畫中來 조비창벽화중래
두 시내가 합하여 감싸 돌아 흐르나니
공관(公館)은 여전하고 도서(島嶼)는 펼쳐졌네
말은 푸른 다리 건너니 자라의 등을 지나는 듯
새가 파란 벽에 날아드니 그림 속으로 들어온 듯
원문=四佳詩集補遺三 / 詩類○輿地勝覽
사가시집보유 제3권 / 시류(詩類)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실려 있는 시
比安題詠 [비안 제영]
雙溪合抱玉灣回。公舘依然島嶼開。
馬度翠橋鼇背過。鳥飛蒼壁畫中來。
두 시내가 안아 들어 흰 물굽이 돌아 흘러라 / 雙溪合抱玉灣回
공관이 의연하게 섬 안에 자리하였네 / 公館依然島嶼開
말은 푸른 버들 다리 건너 자라 등을 지나고 / 馬度翠橋鼇背過
새는 푸른 절벽 그림 속을 날아오누나 / 鳥飛蒼壁畫中來
ⓒ 한국고전번역원 | 임정기 (역) | 2008
比安비안= 경상북도 의성 지역의 옛 지명.
題詠제영=제목을 붙여 시를 읊음.
雙= 쌍 쌍. 속자(俗字)䨇. 약자(略字)双.
溪= 시내 계. 약자(略字)渓.
合抱합포= 양팔로 껴안다.
[주로 나무나 기둥 등의 굵기를 가리키는 ‘아름(드리)’의 뜻으로 쓰임]
灣= 물굽이 만. 약자(略字)湾.
舘= 객사 관. 館의 俗字.
依然의연= 전과 다름이 없이
島嶼도서= 만조시 수면상에 돌출하며,
수면에 둘러싸인 자연적으로 형성된 육지.
국제수로국에서는 표면적이 10㎢이상이면 島嶼(island),
10㎢~1㎢면 小島(islet), 1㎢미만이면 岩島(rock)로 분류하고 있음.
사람이 자체적으로 거주 또는 경제적 생활을 영위하기에
적합치 않은 岩島(rock)는 독자적인 EEZ나 대륙붕을 갖지 못함.
馬度마도=말타고 건너다. 度=渡= 건너다. 지남.
翠橋취교=푸른 다리.
鼇背오배=자라 등,
鳥飛조비=새가 날다.
蒼壁창벽=푸른 벽.
畫= 그림 화, 고를 획, 그을 획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5권 : 경상도(慶尙道) 비안현(比安縣)
동쪽으로 의성현(義城縣) 경계에 이르기까지 16리,
남쪽으로 군위현(軍威縣) 경계에 이르기까지 17리,
서쪽으로 선산부(善山府) 경계에 이르기까지 22리,
상주(尙州) 경계에 이르기까지 21리,
북쪽으로 예천군(醴泉郡) 경계에 이르기까지 33리,
서울에서의 거리는 5백 38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신라 아화옥현(阿火屋縣)이다 병옥(幷屋)이라고도 한다.
경덕왕(景德王)이 비옥(比屋)이라 고치고 문소군(聞韶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
고려 현종(顯宗)이 상주목(尙州牧)에 귀속시켰고, 공양왕(恭讓王) 2년에
안정현(安貞縣)을 병합하였다. 본조 세종(世宗) 3년에 비안현(比安縣)이라 고쳐 부르고,
5년에 치소(治所)를 비옥으로 돌리고 이어서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속현】 안정현(安貞縣) 정(貞)은 정(定)이라 된 곳도 있다. 현 북쪽 17리에 있다.
본래 신라 아시혜현(阿尸兮縣)이다. 경덕왕이 안현(安賢)이라 고치고
문소군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 고려초에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현종은 상주(尙州)에 귀속시켰다. 공양왕(恭讓王) 2년에 감무(監務)를 두고
비옥을 겸임하게 하였다. 우리 세종(世宗)께서 안비(安比)라 고치고 비옥에
치소를 옮기고 비안(比安)이라 고쳐 부르며 계속 귀속시켰다.
【관원】 현감(縣監)ㆍ훈도(訓導) 각 1인.
【군명】 아화옥(阿火屋)ㆍ병산(屛山)ㆍ비옥(比屋)ㆍ병옥(幷屋).
【성씨】 비옥(比屋) 박(朴)ㆍ손(孫)ㆍ원(袁)ㆍ장(張), 소(邵) 정(鄭)이라 하기도 한다. 나(羅) 모두 내성(來姓)이다.안정(安貞) 오(吳)ㆍ임(林)ㆍ나(羅)ㆍ박(朴) 밀양(密陽). 김(金) 속성(續姓)이다.신평(新平) 팽(彭) 하필점(下筆坫)ㆍ물실(勿失)의 두 부곡(部曲)도 같다.
황(黃)ㆍ임(林) 모두 속성(續姓)이다.
【풍속】 백성은 순박하고 풍속은 검소하다 박결(朴潔)의 시에, “백성은 순박하고 풍속은 검소하여 옛날 풍습이 남아 있네.” 하였다.
【형승】 쌍계(雙溪)가 띠처럼 둘러있고, 겹겹의 봉우리가 병풍처럼 둘러있다
정종주(鄭宗周)의 시에, “쌍계는 얇은 비단 띠처럼 돌았고,
겹친 봉우리는 무늬 있는 비단 병풍처럼 둘렀도다.” 하였다.
【산천】 성황산(城隍山) 현 북쪽 1리에 있다. 진산(鎭山)이다.
대암산(大巖山) 안정현 서쪽 3리에 있다. 간점산(肝岾山) 현 남쪽 7리에 있다.
남천(南川) 현 남쪽 1리에 있다. 바로 군위현(軍威縣) 병천(幷川)의 하류이다.
쌍계(雙溪) 현 동쪽 10리에 있다. 의성현(義城縣) 병천(幷川)의 하류이다.
또 북쪽으로 흘러 남천(南川)과 합쳐 상주(尙州) 단밀현(丹密縣)에 이르러
낙동강(洛東江)에 들어간다. 저지(猪池) 안정현(安貞縣) 서쪽에 있다.
개천지(開天池) 현의 북쪽 21리에 있는데 현감 이간(李玕)이 쌓았다.
『신증』 성안굴(聖安窟) 현 북쪽 11리에 있다. 관어대(觀魚臺) 안정현 남쪽 5리에 있다.
【토산】 꿀[蜂蜜]ㆍ옷[漆]ㆍ지치[紫草]ㆍ인삼(人蔘).
【궁실】 요산헌(樂山軒) 바로 객관(客館)의 동헌(東軒)이다.
○ 김지경(金之慶)의 기(記)에, “공자의 말씀에, ‘어진 이는 산을 좋아하고[樂山],
지혜로운 이는 물을 좋아한다.’라는 말이 있다.
무릇 궁실(宮室)을 경영하는 이는 땅을 선택함에 있어 산수(山水)의 명승지를 얻지 못한다면 비록 사치를 다한다 하더라도 후세에서는 높이지 않을 것이니,
택할 점이 무엇있겠는가. 이 헌(軒)으로 말한다면, 여기에 앉아 사방을 돌아 볼 때
푸른 산이 병풍처럼 사방에 둘려져 있고, 산골물이 띠처럼 앞에서 흐르고 있어
실로 산에 오르고 물가에 가는 듯한 멋이 있다. 산수의 즐거움이 모두 갖추어 있는 것이다. 그밖에 제도(制度)의 교묘함이나 단청의 아름다움은 다만 나머지 일이다.
이제부터 이 헌에 오르는 이는 산수의 즐거움을 좌우에서 취하여도
그 근원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현의 별호가 본래
병산(屛山 병풍 같은 산)이니, 산수를 병풍에 그리는 것이 산수를 눈으로
직접 보는 것보다 못하다. 이렇게 해서 병풍의 뜻을 취하고, 감히 요산(樂山)으로써
이 마루의 이름를 삼고자 하거니와, 괜찮을 것인지.” 하였다.
【봉수】 간점산(肝岾山) 봉수 남쪽으로는 군위현(軍威縣) 마정산(馬井山)봉수에 응하고,
북쪽으로는 대암산 봉수에 응한다. 대암산(大巖山) 봉수 남쪽으로는 간점산 봉수에
응하고, 북쪽으로는 예천군(醴泉郡) 소이산(所伊山) 봉수에 응한다.
【누정】 구요루(衢謠樓) 객관의 동쪽에 있다. ○ 하륜(河崙)의 기(記)에, “친시과(親試科)의 제삼인(第三人), 우정언(右正言) 지제교(知製敎)인 박서생(朴瑞生) 군이 장차 고향에 가서 선영(先塋)을 배소(拜掃 성묘(省墓))하려 하면서, 나에게 작별하고는 또 요청하기를, ‘나의 고향 비옥(比屋)은 전에 상주(尙州)의 속현(屬縣)이었는데, 주(州)에서 60여 리나 떨어져 있어 현리(縣吏)가 5일에 1차씩 주로 찾아가 청명(聽命)하면서도 혹시 미치지 못할까 겁을 내고 가끔 급한 일이 있어 주리(州吏)가 현(縣)에 오게 되면 현리를 욕보이고 현민(縣民)을 못살게 함을 다 말할 수 없었소. 전조 말경에는 일이 모두 창졸(倉卒)한 것이 많아, 현의 형세는 날로 궁축하였소. 우리나라에 이르러서는 그 까닭을 모두 알고 있었으므로 속현(屬縣)이 주와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은 모두 감현관(監縣官) 1명을 두어 스스로 다스리게 하므로 우리 고장도 예에 따라 관원을 얻게 되었는데, 이 뒤로 아전이나 백성이 조금 숨을 쉴 수 있게 된 것이오. 계미(癸未)년 봄에 감현관(監縣官) 유양(兪讓) 군이 도착하여서는 일을 일으키고 없앨 것에 대해서 모두 잘 처리하였소. 하루는 현의 부로(父老)를 모아 놓고 말하기를 「관우(館宇)는 사명(使命)을 접대하고 덕위(德威)를 베푸는 곳이오. 현이 이제는 앞서와 비교가 안 되게 달라졌소. 그런데 관우가 이처럼 좁아서야 여름철의 더위를 당해서는 사명을 편히 모실 수 없는 것이니, 부로들도 이것이 부끄럽지 않소.」라고 하니, 모두들 「명하시는 대로 따르겠습니다.」라고 말했소. 관(館)의 남쪽에는 큰 길[通衢]이 있고, 고목 두어 그루가 길을 에워싸고 높았다오. 이에 그 그늘에다 누대 3칸을 지었으니, 농한기를 틈타서 백성을 부역시킴으로 며칠 사이에 준공을 봤소. 그 위에 앉아 사방을 돌아보면 푸른 산은 곁에 둘러 있고, 산골물은 앞에 흐르며, 녹음은 온 땅에 깔리고, 청풍은 절로 불어와, 실로 산에 오르고 물가에 나간 것 같았다오. 청하건대 그대가 이름 짖고 기(記)를 적어주어 우리 현을 빛내주기 바라오.’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글이 유치한데 어찌 감히 하겠소. 그러나 내 일찍 듣건대, 요순(堯舜)의 백성은 집집마다[比屋] 봉(封) 받을 수 있었다 하였소. 이제 비옥이란 이름을 듣고 보니 마음에 느낌이 없을 수 없구려. 선비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어려서부터 성인(聖人)의 글을 읽었으니, 어느 누구인들 요순 시대의 임금과 백성의 뜻을 갖지 아니할 것이오. 그러나 필경에 이를 능히 실행하지 못하는 것은 무슨 까닭이겠소. 대개 요순의 도리는 인(仁)ㆍ의(義)일 뿐이니, 인의(仁義)는 사람 마음에 본디 있는 이치요, 사람들이 모두 이 마음이 있다면, 마음에 모두 이 이치가 있는 것이오. 다만 마음을 다하지 못할 뿐인 것이니, 위로 마음을 다하는 임금이 있고, 아래로 마음을 다한 신하가 있어, 이런 임금과 신하가 서로 만난다는 것은 예로부터 어려운 일이었소. 정언(正言 박서생(朴瑞生))은 이미 비옥의 세가(世家)이므로 일찍이 비옥의 이름을 들었을 것이니, 요순 시대의 임금ㆍ백성의 뜻을 가진 것도 얕지 않을 것이오. 휴가(休嘉 경사(慶事))를 만나 대정(大庭)에서 책문을 지어 시종(侍從)의 열(列)에 뛰어올려 언책(言責)으로 벼슬을 주었으니, 임금의 알아주심이 깊지 않음이 아닌즉 그대의 책임이 장차 클 것이오. 뒷날, 요순 시대의 군민(君民)의 마음으로써 요순 시대의 군민의 정치를 행하여 우리나라가 집집마다[比屋] 봉(封) 받을 수 있는 풍속을 이루게 된다면, 반드시 그대의 현에서 시작될 것이오. 봉 받을 수 있는 풍속이 있다면 반드시 강구요(康衢謠 요임금 때, 요의 덕에 의하여 천하가 절로 다스려지게 된 것을 구가한 동요임)가 있을 것이오. 관(館)의 남쪽에 누대가 있고, 누대의 남쪽에 큰 길[衢]이 있으니, 현민(縣民)들의 노래[謠]가 이 길[衢]에 끊이지 않을 것이오. 이 누대에 올라 이 노래를 듣는다면 그 즐거움이 어떠하겠소. 그러니 감히 구요(衢謠)로써 누대의 이름을 삼아도 괜찮지 않겠소.’ 하였다. 정언(正言)이 절하면서 말하기를, ‘크신 말씀이오. 추생(鯫生 소인)이 어찌 감히 이에 해당되겠소. 그러나 이 뜻을 돌아가서 감히 향인(鄕人)ㆍ부형(父兄)에게 말씀드려 이를 따르고 잊지 않게 하지 않을 수 있겠소.’ 하였다. 나는 늙어서 마음을 다하지 못하였으나, 이미 누정의 이름을 지었고 거듭 마음에 느낌이 생겨 이를 적어 기(記)로 삼는다.” 하였다.『신증』 쌍명루(雙明樓) 객관(客館)의 동쪽에 있다.
【학교】 향교 현 서쪽 1리에 있다.
【역원】 안계역(安溪驛) 현 북쪽 29리에 있다. 쌍계역(雙溪驛) 현 동쪽 10리에 있다. 흥계원(興係院) 현 서쪽 19리에 있다. 옥미원(玉彌院) 현 동쪽 14리에 있다. 장족원(長足院) 현 북쪽 5리에 있다. 저천원(楮川院) 현 북쪽 19리에 있다. 안계원(安溪院) 현 북쪽 28리에 있다. 가차원(加次院) 현 동쪽 15리에 있다.
【불우】 용천사(龍泉寺) 비봉산(飛鳳山)에 있다. 안장사(安長寺) 무거산(無居山)에 있다. 미흘사(彌屹寺) 봉미산(鳳尾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 현 서쪽에 있다. 문묘 향교에 있다. 성황사 현 북쪽 1리에 있다. 여단 현 북쪽에 있다.
【고적】 퇴곡부곡(退谷部曲) 현 동쪽 10리에 있다. 신평부곡(新平部曲)ㆍ하필점이부곡(下筆坫伊部曲)ㆍ물실부곡(勿失部曲).
【인물】 본조 박서생(朴瑞生) 태종(太宗) 임금 때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은 이조 참의(吏曹參議) 가선대부(嘉善大夫) 안동대도호부사(安東大都護府使)에 이르렀다.
【효자】 본조 유포(柳砲) 벼슬은 경산 현령(慶山縣令)에 이르렀다. 모상(母喪)에 3년 동안 여묘(廬墓)살이하였다. 일이 임금께 알려져 정려(旌閭)되었다.
【제영】 관거금랭락(官居今冷落) 김겸(金謙)의 시에,
“관거는 이제 영락했고, 고와(古瓦)는 푸른 이끼 끼었어라.” 하였다.
사산송취근첨영(四山松翠近簷楹 이영견(李永肩)의 시에,
“사산의 푸른 솔 처마에 가깝고,
계하(階下)의 차가운 못 속속드리 맑도다.” 하였다.
쌍계합포옥만회(雙溪合抱玉灣回)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쌍계는 합하여 옥만 감싸 돌아드니, 공관(公館)은 여전하고
도서(島嶼)는 펼쳐졌네. 말은 푸른 다리 건너니 자라의 등을 지나는 듯,
새가 파란 벽에 날아드니 그림속으로 들어온 듯.” 하였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연혁】 고조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대동지지(大東地志)》
【방면】 안정(安貞) 북쪽으로 17리인데, 본래 신라 문시혜(問尸兮)이며, 아을혜(阿乙兮)라고도 한다. 경덕왕(景德王) 16년에 안현(安賢)으로 고쳐 문소군(聞韶郡) 영현으로 삼았다. 고려 태조(太祖) 23년에 안정(安貞)으로 고치고, 현종(顯宗) 9년에 상주에 예속시켰다. 공양왕(恭讓王) 2년에 비옥(比屋)을 병합했다. 본조 세종조(世宗朝)에 두 현을 합하였다. 위에 보라.
【방면】 현내(縣內) 끝은 7리이다. 신동(身東) 끝은 15리이다. 남면(南面) 위와 같음. 내면(內面) 끝은 10리이다. 외서(外西) 끝은 20리이다. 내북(內北) 끝으로 15리이다. 외북(外北) 끝은 30리이다. 정동(定東) 북쪽으로 끝은 15리이다. 정북(定北) 북쪽으로 30리이다. 정서(定西) 위와 같음. 우(右) 3면은 안정(安定) 고현의 땅이다. ○ 퇴곡부곡(退谷部曲)은 동쪽으로 10리이다. 신평부곡(新平部曲)ㆍ하필점이부곡(下筆坫伊部曲)ㆍ물실부곡(勿失部曲).
【성지】 고성(古城) 북쪽으로 1리이며 성황산(城隍山)이라 일컫는다.
【창고】 읍창(邑倉)ㆍ안정창(安貞倉).
【누정】 망북정(望北亭).
ⓒ 한국고전번역원 | 이가원 (역) | 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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