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태만상
외상됩니다^^
어제 낮 부산 범일동 한 음식점. 식사를 마치고 나오다가 계산대에서 발견한 기발한 아이디어 안내문 "외상됩니다." 몇 년 동안 코로나가 불러온 불경기에 지쳤을 업소에서 식사 마치고 나가는 손님들에게 즐거움과 위안을 주고자 만든 해학으로 읽혔다. 동행한 이들도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정작 그 업소로 안내하여 방문객을 대접한 친구는 단골로 자주 찾는 업소라 그런지 무덤덤하게 계산을 마친 후 그 안내문엔 눈길을 주지 않고 밖으로 향했다.
영화 <친구>의 주무대이기도 한 옛 조방일제 때 조선방직 터인 이곳은 지난 70-80-90년대 도시 속 황무지로 출발하여 아름드리 수입목재 합판용 원목 하치장을 거쳐 고속버스 터미널과 시민회관, 상공회의소가 들어서고 자유시장과 평회시장, 중앙시장 그리고 결혼예식장들과 보석상, 낙지골목, 호텔, H백화점과 K나이트클럽이 들어서 서면과 쌍두마차로 부산 상권의 흥행을 이끌었다. 하지만 지금은 전성기에 비하면 "아, 옛낧이여!" 탄식이 나올 정도로 쇠락하고 말았다.
이날 국민은행 맞은 편 해물요리 업소도 음식이 맛깔스러웠지만 인근엔 민뮬장어와 삼계탕집 중국집 횟집도 이름난 업소들이 즐비하다. 부산시청에서 은퇴한 친구는 이곳 한복판에 사무실을 갖고 노년 세월을 보내면서 가끔씩 옛 친구들을 불러 밥을 산다. 어느 익살꾼이 만들었는지 박사 위에 '밥사'라고 하는 바로 그 역할. 내가 현직 때 가끔 칼럼을 실었던 국제신문에 애착을 보였더니 친구는 그 신문을 가지런하게 잔뜩 쌓아놓고 날 기다렸다.
불쑥 2030 부산엑스포 얘길 꺼내고는 그때까지 내가 살아있을지 모르겠다고 했더니 친구는 "무슨 소릴 하느냐?"며 버럭 화를 냈다. 내일 내가 살아있다는 보장이 없는데 동연배 친구는 백세를 꿈꾸고 있는 모양이었다. 마침 친구 사무실 빌딩주인이 실내에 설치된 전기계량기를 검침하러 왔을 때, 식사를 마치고 영화 속 주인공이 선 거리에서 지나가는 아가씨에게 각각 부탁하여 노인들은 추억을 남겼다. 그 추억도 범일동에선 외상이 되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