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형시로서의 시조 짓기
임 종 찬
(부산대 명예교수. 시조시인)
Ⅰ. 정형시 만들기
조선시대 선비들은 중국 한시에 아주 능한 사람들이었다. 훈민정음이 창제된 후엔 우리글이 있으니 중국어로 한시를 지을 게 아니라, 우리글로 된 정형시를 지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해야 옳은 일이었다. 그러나 조선시대 선비들은 중국 한시 말고는 시라 할 수 없다는 생각에 꽉 젖어 있었다. 중국 한시를 몇 백 수를 외우는 것은 물론, 이와 유사한 한시를 지을 수 있어야 행세하는 양반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였던 것이다.
우리 선비들은 중국어는 우리말과 달리 4성(평성, 상성, 거성, 입성)이 있고, 이를 평음(평평한 음)과 측음(변화음인 상성, 거성, 입성)으로 나누고 있음을 잘 알았다. 중국어를 모르는 우리 선비들은 한자 하나를 익힐 때에는 한시를 짓기 위해서 이게 평음인지 측음인지까지 별도 공부를 해야 했다. 몇 백 수 한시를 외우다 보니, 가령 雨가 있다면 한시의 어느 위치에 쓰여졌던가를 따져서 그 위치에 그 글자를 썼다. 아니면 평측을 표기한 자전을 살펴서 한시를 지었으니 한시 짓기 위해 적지 않은 고생을 했던 것이다. 시를 쓰기 위해 이런 고생까지 하다니, 그렇게 쓴 시라고 해도 우리 정서를 담아내기 어려운 한시 짓기에서 해방할 생각을 안 하고 살았으니 헛수고를 너무 많이 한 셈 아닌가.
시조는 흥얼거리는 노래가사 정도로 인식하여 時調라고 했지 중국 시와 구별되는 朝鮮詩라 하지 않았다. 시조란 말을 쓸 판이면 詩調라 할 만하였지만 이런 생각조차도 하지 않았다. 훈민정음이 반포되어 수 백 년이 지났지만 훈민정음이 공문서로 쓰는 국어로 활용되지도 못했다. 오죽하면 최만리 같은 인물들은 훈민정음 제정에 반대 상소문을 세종대왕께 올렸는데 “혹시 언문(훈민정음)이 중국으로 흘러 들어가서 이를 그르다고 말하는 이가 있으면, 중국문화를 섬김에 있어 어찌 부끄럽지 않다고 하겠습니까?”라는 말을 적고 있다. 우리 문화는 그렇고 그런 것이고 중국문화가 최고라는 생각을 하다니, 이따위 선비 같지 않은 선비들이 조정에 득시글거리었으니 한심한 일이다.
구한말에 이르러 신교육 기관이 여러 곳 서면서 우리글 위주의 교육이 실시되고, 독립신문(1896)에선 순 우리글로, 뒤이어 제국신문(1898), 황성신문(1898) 등 여러 신문이 국한문 혼용체를 도입하자 우리글이 일반화 되었으니 훈민정음이 암클이라 언문이라 폄시하던 풍조는 사라졌다. 훈민정음이 공식 언어로 쓰임 받게 되었다. 일제 땐 훈민정음을 한글이라 이름을 고치고 국어 연구에 열을 올렸다. 나라를 도둑질 당하고 나서야 국어의 소중함을 깨달았다. 訓民正音은 백성을 가르치려는 바른 말소리글자라는 의미이므로 관이 민에게 교육하는 말소리 글자라는 의미가 적당한 글자 명이라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글자이름을 고칠 필요를 느낀 것이다. 이렇게 되자 여태 중국어로 된 한시를 시라는 생각을 버리고, 우리말소리글자로 된 시를 우리시라고 해야 할 일이 생겼다.
그때서야 과연 무엇을 우리시라고 해야 하는지에 대해 당시 지식인들은 고민하게 되었다. 중국 한시, 일본 와카나 하이쿠, 영국의 영시가 그렇듯이 시라면 우선 정형시를 염두에 두고 당시 지식인들은 우리의 정형시를 어떻게 만들까를 고민하였다. 이때 나타난 인물이 육당 최남선이다.
1
처…ㄹ썩, 처…ㄹ썩, 척, 쏴…아.
때린다, 부순다, 무너버린다.
태산 같은 높은 뫼, 집채 같은 바윗돌이나,
요것이 무어야, 요게 무어야,
나의 큰 힘, 아느냐, 모르느냐, 호통까지 하면서,
때린다, 부순다, 무너버린다.
처…ㄹ썩, 처…ㄹ썩, 척, 튜르릉, 콱.
2
처…ㄹ썩, 처…ㄹ썩, 척, 쏴…아.
내게는, 아무 것, 두려움 없어,
육상에서, 아무런, 힘과 권을 부리던 자라도,
내 앞에 와서는 꼼짝 못하고,
아무리 큰, 물건도 내게는 행세하지 못하네.
내게는 내게는 나의 앞에서는.
처…ㄹ썩, 처…ㄹ썩, 척, 튜르릉, 콱.(이하 약)
1908년 11월 그의 나이 16살 때 지었다는 ‘해에게서 소년에게’라는 작품이다. 이게 시로서 완성이 되었든 안 되었든 우리 글로 시라고 쓴 첫 작품이라는 점에서 눈 여겨 봐야 한다. 그런데 이걸 가만히 보면 파도 소리를 의성화한 것이 각 연의 앞과 뒤에 붙어 있다. 그리고 1연의 첫 행과 2연의 첫 행에서 보듯이 대응하는 각 행들의 음절수를 같게 만들어 놨다. 우리 시는 이렇게 1연과 2연은 같은 음절의 행수를 반복하는 것이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서 이 작품이 시도된 것 같다.
이것 말고도 육당은 음절수를 정확하게 한 시편들을 많이 써 보였다. 음절수에 대한 애착이 대단했던 분이다. 일본 시가가 음절의 정확을 지키는 것이나 한시나 영시가 역시 음절수를 정확하게 갖추고 있음에 착안한 것인가. 육당이 이러고 있을 때 도남 조윤제는 시조를 정형시로 만들 욕심으로 음절수가 들쭉날쭉한 고시조를 다듬으면 정형시로서의 시조가 되겠다는 논문을 발표하자 여기에 육당이 실천으로 그 뒤를 따랐다. 이게 ‘백팔번뇌’라는 시조집이다.
다부서 지는때에혼자성키 바랄소냐금이야 갔을망정벼루는 벼루로다무른듯 단단한속을알이알까 하노라
이 작품은 ‘깨진 벼루의 명(銘)’(시조집 ‘백팔번뇌’·동광사·1926)이라는 작품이다. 육당은 고시조에서 벗어나 근대시조 개척에 공이 큰 사람이다. 당시엔 음보란 말이 없었던 시절인데, 띄어쓰기를 무시한 오늘 보면 음보식 표기를 해서 시조를 읽을 땐 이렇게 끊어 읽어 음악성을 나타내어야 정형시라 할 수 있음을 보여 줬으니 탁견이라 할 만하다. 이런 노력은 훌륭하나 음보를 마구잡이 형태로 나타내었다. ‘다 부서지는 때에’를 ‘다부서 지는때에’와 같이 억지 음보가 등장하고 있다. 이렇게 했다 해도 음보를 살려 읽어야 시조가 된다는 생각이 앞섰으니 크게 나무랄 일은 아니다. 서양 시에서도 전체적 흐름을 좇아 억지 음보가 가끔 등장하고 있지 않은가.
무엇보다 도남이 시조의 형식은 초장과 중장은 다 같이 3.4.3(4).4, 종장은 3.5.4.3이어야 한다는 주장을 육당이 백팔번뇌에서 실천으로 보여 준 점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하지만 고시조는 시라고 지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음절수가 들쭉날쭉하여 정형시라 할 수가 없지만 음절수를 일정하게 한 정형시로서의 가능성을 처음으로 내보인 게 ‘백팔번뇌’다. 이래야만 시조가 정형시가 된다는 생각이었다.
정형시는 일단 소리가 정형을 이루어야 한다. 소리의 정형은 한시처럼 고저, 그리스 시처럼 장단, 서양시처럼 강약에서와 같이 음의 고저나 장단, 강약이 정해진 자리에 놓여서 전체로 보아 음악성을 나타내어야 정형시라 하겠는데, 우리말로는 고저 장단 강약을 형식화해서 시적인 리듬을 만들 수 없기 때문에 도남은 한 단위씩 묶어서(음보식으로) 규칙적으로 읽어(한 음보에 걸리는 시간을 똑 같이 해서) 시조를 정형시로 만들자는 것이었다. 그건 그런데 앞 작품에서 하필이면 깨진 벼루를 기억해야 한다는 말이 웬 말인가. 백팔번뇌에 실린 앞 작품들은 모두 조선을 찬양하는 작품들이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깨진 벼루를 기억할 일이라는 이 시조를 그것도 시조집 맨 끝에 붙인 이유는 무엇인가. 조선심과는 다른 이 갑작스런 작품의 등장을 해석해볼 필요가 있다. 다 변절하고 있는 터이므로(다 부서지는 때) 원래대로의 모습이 아닌 변절의 모습(깨진 벼루)은 세태에 따른 것이다. 비록 변절은 했어도 속마음까지야 변할 수 있는가(무른 듯 단단한 속), 이런 내용을 시조로 쓴 게 아닌가 싶다. 이런 해석이 가능하다면 그는 변절의 변명을 이 작품을 통해 하고 있는 것 같이 들린다.
어찌했든 시조를 국시로 만들어보자는 그의 노력은 높이 평가되어 마땅하다.
1920년데 들면 김억, 주요한, 김소월, 김동환 등 소위 민요조 서정시를 주창하는 시인들이 등장하였다. 이들은 개화기 시가들이 보여준 연설조 계몽성을 타파하고, 한국 전통 율격을 살리면서 한국민요에 내재하고 있는 미의식을 살려 쓴 소위 민요시, 이런 걸 국시(그들은 국시란 말은 하진 않았다.)라 이를 만하다는 취지로 작품을 썼고, 이런 풍은 뒤에 조지훈 박목월로 연장 되어 왔다. 이것도 나쁜 게 아니다.
우리 민요에는 음절수를 정확하게 하고 있는 작품들이 허다하다.
장산곶 마루에 북소리 나드니
금일도 상봉에 임 만나 보겠네
갈 길은 멀구요 행선은 더디니
늦바람 불라고 성황님 조른다
바람새 좋다구 돛 달지 말구요
몽금이 포구에 들렀다 가소래
몽금포 타령이라는 민요다. 각 음보는 정확히 3음절로 되어 있으니 예사롭지 않은 가사다. 한국어는 음보 안에 내재하는 음절수를 정확히 할 수도, 또는 한 자 정도의 시적 허용을 하여 정형시를 만들 수도 있는 훌륭한 언어다.
1 산너머 南村에는 누가 살길래해마다 봄바람이 南으로 오데.꽃피는 사월이면 진달내향긔밀익는 오월이면 보릿내음새.어느 것 한가진들 실어안오리南村서 南風불제 나는 좋데나.2산너머 南村에는 누가 살길내저하늘 저빛갈이 저리고을가.금잔듸 너른벌엔 호랑나비떼버들밭 실개천엔 종달새노래어느것 한가진들 들여안오리南村서 南風불제 나는 좋데나.
- 김동환 ‘산너머 남촌에는’ 일부
(1927년 1월 조선문단 18호)
앞서 몇 사람이 시도한 적이 있지만 김동환 역시 7:5조 신시를 만들어 이걸 우리 시의 한 형태로 아니면 이걸 국시의 모범으로 삼기를 바란 것 같다. 시도는 나쁠 것이 없다. 일본 시가가 5:7:5 같은 것이 있으므로 이건 왜색이 짙은 것이라 폐기처분이 맞다고 말한다면 권장할만한 말이 못된다. 우리말을 잘 부려 써서 시의 형태로 만들어 쓰면 되는 것이다. 일본에서 선수를 쳤다고 해서 우리말로 시를 이 같이 만들면 안 된다고 하면 안 된다. 우리말이 이런 시의 형태를 수용할 수 있다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소네트는 르네상스 때 이탈리아에서 만들어졌지만, 이게 영국에 전해지면서 영국 시의 대표 자리에 등극한 것이다. 셰익스피어는 154개의 소네트를 남겼지 않은가.
문제는 몇 백 년을 갈고 닦아온 우리의 詩歌 형태가 있다면 이것을 폐기처분하려 하면 안 된다. 이게 정형시로 어색하다면 개보수해서 활용하면 없던 형식을 새로 만드는 것, 외국 것을 수입하는 것보다 값 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육당은 시조가 국민시라 할 만하다는 주장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이 말이 안 된다는 패거리들이 등장하였다. 소위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역사주체이며 문화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KAPF들이 등장하면서 이들 대부분은 시조는 부르조아 계급 문학이고, 그들 계급의 여흥을 위한 노래에 지나지 않으므로 폐기처분이 온당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렇게 말할 수도 있다. 왜냐 하면 시조를 지었던 인물들은 벼슬아치들이고 여기에 빌붙어 살던 부속인물들 (기생이나 아전, 서리 부류)이었으므로, 이들 인물들이 지은 시조라는 것이 서민들의 삶과 영 딴판이니 이걸 갖고 국시로 한다는 게 말이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보면 그렇다. 그러나 시조가 다 그렇게만 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논리가 딱 들어맞지 않는다.
시조 형식은 지배계층에 의해 만들어졌을 뿐 아니라, 그들 중심의 위락적 가치를 포함한 경우가 많은 문학이었다. 그러나 세계에 존재하는 정형시는 모두 지배계층이 만들어 그들의 정서를 담아왔던 것이다. 무식쟁이는 글을 모르니 시를 짓지 못한다. 노동에 바빠 삶이 곤한 사람은 글을 안다 해도 시 지을 여유가 없지 않은가.
KAPF들이 북한으로 출장 가서는 그곳에 북한문학의 기틀을 만들 때, 역시 시조는 부르조아 계급문학이라는 점에서 형편없는 비평을 가하였다. 김일성 교지에도 시조는 배격되어야 할 퇴폐문학이란 말이 나오자 북한에서는 시조에 관한 연구도 창작도 하지 않게 되었다.
문학 형식은 한 가지 정서만 담아야 한다는 법칙이 없다. 시대가 달라지면 담기는 내용 역시 달라지는 것이다. 바구니에 담기는 과일은 철마다 다른 것 아닌가. 아니 바구니엔 과일만 담아야 하는가.
Ⅱ. 정형시의 마감하기
시의 마감은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닫힌 마감이고 다른 하나는 열린 마감이다. 닫힌 마감은 시적 논의를 더 진행할 수 없도록 닫아놓은 상태이고 열린 마감은 시적 논의를 더 진행할 수 있도록 가능성을 열어놓은 상태를 말한다.
정형시에서의 시의 마감은 닫힌 마감으로 끝나야 한다. 이를테면 7언 5언으로 만들어지는 한시의 경우엔 시적 논의가 기승전결의 4단 구성으로 되어 있고, 끝인 결(結)은 철저히 닫힌 마감으로 되어야 한시가 된다. 소네트 14행시도 끝의 2행은 앞에 전개한 시적 논의를 마감하는 결구로 되어 있다. 셰익스피어 소네트 18번(피천득 역)을 구경해 보자.
Shall I compare thee to a summer's day?
(그대는 더 아름답고 더 화창하여라.)
Thou art more lovely and more temperate:
(그대는 더 아름답고 더 화창하여라.)
Rough winds do shake the darling buds of May,
(거친 바람이 5월의 고운 꽃봉오리를 흔들고)
And summer's lease hath all too short a date:
(여름의 기한은 너무나 짧아라.)
Sometimes too hot the eye of heaven shines,
(때로 태양은 너무 뜨겁게 쬐고)
And often is his hold complexion dimmed;
(그의 금빛 얼굴은 흐려지기도 하여라.)
And every fair from fair sometimes declines.
(그 어떤 아름다운 것도 언젠가는 그 아름다움이 기울어지고)
By chance or nature's changing course untrimmed;
(우연이나 자연의 변화로 고운 치장 뺏기도다.)
But thy eternal summer shall not fade,
(그러나 그대의 영원한 여름은 퇴색하지 않고)
Nor lose possession of that fair thou ow'st;
(그대가 지닌 미는 잃어지지 않으리라.)
Nor shall death brag thou wander'st in his shade,
(죽음도 뽐내진 못하리, 그대가 자기 그늘 속에 방황한다고)
When in eternal lines to time thou grow'st:
(불멸의 시편 속에서 그대 시간에 동화되나니.)
So long as men can breathe, or eyes can see,
(인간이 숨을 쉬고 볼 수 있는 눈이 있는 한)
So long lives this, and this gives life to thee.
(이 시는 살고 그대에게 생명을 주리.)
이 작품은 다음과 같은 운을 갖고 있다.
Shall I compare thee to a summer's day? a
Thou art more lovely and more temperate: b
Rough winds do shake the darling buds of May, a
And summer's lease hath all too short a date: b
Sometimes too hot the eye of heaven shines c
And often is his hold complexion dimmed; d
And every fair from fair sometimes declines. c
By chance or nature's changing course untrimmed; d
But thy eternal summer shall not fade, e
Nor lose possession of that fair thou ow'st; f
Nor shall death brag thou wander'st in his shade, e
When in eternal lines to time thou grow'st: f
So long as men can breathe, or eyes can see, g
So long lives this, and this gives life to thee. g
이것은 소위 abab cdcd efef gg의 운을 가진 셰익스피어 소네트 형식이다. 처음 12행인 마지막 두 행은 gg인데 마지막 2행 이것이 소네트의 마무리 부분이 된다. 그리고 iambic pentameter(약강 5보격) 형식의 소네트이다. 각 행은 10 음절로 되어 있지 않은가. 소네트라는 정형시는 이 같은 것이다. 이번에는 향가 10구체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향가 10구체는 비교적 잘 갖추어진 향가 형식이다. 노래로서의 향가는 각 행마다 박자 수가 일정한 정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가사는 어떤가. 정확한 일정 형식을 못 갖추긴 했어도 10행으로 짜여 있고, 마지막 2행은 작중화자의 결단과 결심으로 마무리됨과 동시에 첫 머리엔 감탄사가 오고 있음에 주목하여 어느 정도 정형성을 갖춘 가사라고 한다.
아래의 찬기파랑가(讚耆婆郞歌)는 신라 제35대 경덕왕(景德王: 재위 742∼765) 때의 승려 충담사(忠談師)가 화랑 기파랑(耆婆郞)을 추모하여 지은 십구체(十句體) 향가(鄕歌)인데 현대어로 바꾸어보면 이렇다.
(구름을) 열어젖히며
나타난 달이
흰구름을 따라 떠가는 것 아니냐?
(달의 대답) 새파란 시냇물에
기파랑의 모습이 있구나.
이로부터 시냇물의 조약돌에
낭이 지니시던
마음의 끝을 따르고 싶구나.
아아, 잣나무 가지가 높아
서리를 모르실 화랑의 우두머리여.(양주동 역)
흐느끼며 바라보매
이슬 밝힌 달이
흰 구름 따라 떠간 언저리에
모래 가른 물가에
기랑(耆郞)의 모습이올시(모습과도 같은)수풀이여
일오(逸烏) 내 자갈 벌에서
낭(郎)이 지니시던
마음의 갓(끝)을 좇고(따르고) 있노라.
아아, 잣나무 가지가 높아
눈이라도 덮지 못할 고깔이여(화랑의 장이여)(김완진 역)
소네트 14행 중 마지막 2행이 앞서 진행된 시적 논의의 마감에 해당되는 것과 같이 향가 10구체는 누가 어찌 번역하였든 마지막 2구는 여태의 시상을 마무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시조는 어떤가. 이 점을 알아보기 위해 우선 시조발생기 쩍의 고시조들을 살펴보면 과거 우리 선조들이 시조가 어떠하기를 희망했고, 시조의 존재의의가 어디에 있는가를 알 수 있게 한다. 번다함을 피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발생기 쩍의 시조 종장들을 몇 개 읽어보기로 하자.
① 님 向한 一片丹心이야 가싈 줄이 이시랴
② 우리도 이가치 얼거저 百年까지 누리이라
③ 夕陽의 호을노 셔셔 갈 곳 몰나 하노라
④ 多情도 病인양하여 잠 못 일워 하노라
①은 일편단심의 불변함을 ②는 인생백년을 누리고 살 일이라는 당연을 ③ ④는 상황에 대한 자기 판단을 각각 표현하고 있다. 어느 것이든 어떤 사실에 대한 자기 입장을 확정하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시적 논의를 계속할 수 없도록 닫힌 마감으로 끝맺고 있다. 그러나 귀하게는 다음과 같이 시적 논의가 계속될 수 있는 여지를 보여주는 열린 마감의 고시조도 있긴 있다.
1) 나뷔야 靑山에 가쟈 범나뷔 너도 가쟈
가다가 져무러든 곳듸 드러 자고 가쟈
곳에셔 푸對接하거든 닙헤셔나 자고 가쟈
- 지은이 모름 (靑六 419)
2) 오늘도 다 새거다 호믜 메고 가쟈스라
내 논 다 매여든 네 논 졈 매여 주마
올 길혜 뽕잎 따다가 누에 먹겨 보쟈사라 (無情農桑)
- 松江 鄭澈 (警民篇庚戌乙丑 13)
1) 2)는 시적 논의가 더 전개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놓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무한정 여지를 남겨 놓은 것은 아니다. 가령 1)은 청산행의 범위 안에서 2)는 작농의 범위 안에서만 논의를 전개시키도록 한정적 범위를 남겨놓고 있는 것이다.
1) 2) 같은 작품들은 고시조 중에서 이런 정도가 보일 뿐 모두 닫힌 마감으로 종장이 끝나고 있다.
선비들은 자기신원 표출을 시조 속에 담으려 하였고, 그러다 보니 시조가 논리적 완결미를 나타냄과 동시에 단수만으로도 자족한 시 형태를 이루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에 하나 더 부과되는 것은 시조가 창사(唱詞)였다는 측면이다. 시조창이든 가곡창이든 창의 연행은 독창 위주다. 한 곡의 창이 끝나면 곧이어 화답(和答)의 창이 계속되기 때문에 시조가 장가(長歌)로 창작될 수 없고, 민요처럼 제창으로 연주되지도 않았다.
연시조는 각 수 그 자체의 독립적 완결미를 나타내는 단수들이 연속되는 형태이기 때문에 고시조는 단수로서 완결성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독립된 단수의 중첩이 연시조인 셈이다.
시조는 초장, 중장, 종장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이때의 장(章)이란 개념은 집합된 한 개의 의미 매듭(semantic phrasing)이라 할 수 있다. 이 의미 매듭 세 개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시조가 되는 것이고, 종장(終章)은 시적 논의가 끝났음을 의미한다. 이 점을 확실히 하기 위해 다시 발생기 쩍의 고시조를 다시 읽어보기로 하자.
① 이 몸이 죽어죽어 一百番 고쳐죽어 (그래서) 白骨이 塵土되여 넉시라도 잇고 업고 (그러나) 님 向한 一片丹心이야 가싈 줄이 이시랴.
② 이런들 엇더하며 저런들 엇더하리 (예를 들면) 萬壽山 드렁츩이 얼거진들 긔 엇더하리 (그러니) 우리도 이가치 얼거저 百年까지 누리이라.
③ 白雪이 자자진 골에 구룸이 머흐레라 (그러니) 반가온 梅花는 어느 곳에 퓌엿는고 (그래서) 夕陽의 호을노 셔셔 갈 곳 몰나 하노라.
④ 梨花에 月白하고 銀漢이 三更인제 (아마도) 一枝春心을 子規야 알냐마는 (그러나) 多情도 病인양하여 잠 못 일워 하노라
접속어의 생략은 시조의 형식 때문에 생략된 것이기도 하지만 시조가 아니라 하더라도 시에서나 특히 정형시에 있어서는 접속어 생략(asyndeton)은 언어 절약의 수단이면서 절제미(temporance)를 위해서 과감히 차용되는 수법이다. 어찌했던 앞 장의 정보가 뒷 장의 정보로 확실히 연결시키는 연결 장치가 ①, ②, ③, ④에는 존재하고 있다. 이렇게 발생기 쩍의 고시조는 시적 논의가 완벽하였고, 종장의 결구가 확실하였다.
Ⅲ. 이런 걸 시조라 할 수 있는가.
시조는 우리 민족이 낳은 정형시라는 데에는 다른 이견이 있을 수 없다. 그런 정형시인 만큼 이를 잘 가꾸고 키워나가자는 데에도 이견이 있을 수 없다. 그렇다면 시조를 정형시답게 창작해야 하겠는데 지금 발표되고 있는 시조라는 작품들이 정형을 잘 지키고 있는가. 그렇지 않은 것들이 시조 전문지에 발표되고 있어 이를 바로 잡는 일이 시급하다.
근체시(近體詩)로서의 한시(7언절구 5언절구 또는 7언율시 5언율시 같은 시)가 정형화되기에는 천 년 더된 세월이 걸렸지만 정형으로서의 한시(漢詩)가 정착되고부터는 여기서의 일탈은 일체 용납하지 않는다. 이런 엄격을 통하여 중국은 시방 정형시로서의 한시를 세계에 자랑하고 있다. 한시는 음절수를 정확히 지켜야 하고, 평음(平音)자리에 측음(仄音)이 뒤섞이면 안 되도록 되어 있다.(평음, 측음 모두를 허용하는 자리도 있다.) 일본 와카, 하이쿠 역시 한 음절을 더해서도 덜해서도 안 되도록 단단히 고정시켜 놓고, 이것이 자기네 정형시라고 세계에 자랑하고 있음은 다 아는 일이다. 자랑만 하는 것이 아니고 외국인들에게 외국어로 이를 짓도록 하여 많은 외국인들이 따라 짓고 있다.
시조는 그 발생기를 고려 말이라고 보면 대략 700년이 된 시가형식이다. 700년의 전통을 행사하는 정형시를 우리는 갖고 있어 자랑스럽지 않은가. 그 사이 4천 수 정도의 고시조가 지어졌으니 이게 예사스런 일인가. 4천 수 중에는 ㉠ 정형으로서의 시조 형식에 맞거나 가까운 단시조 형식 ㉡ 일정 형식을 못 갖춘 것으로 소위 엇시조 사설시조가 있다. ㉠을 단단한 정형시로 만들자고 하여 도남이 일찍이 음수를 3:4 3(4):4, 3:4 3(4):4, 3:5,4:3으로 정했던 것이고, 이를 정병욱은 더 정밀히 다음 표를 만들었던 것이다.
초장 3┃ 4 v 3(4)┃ 4
중장 3┃ 4 v 3(4)┃ 4
종장 3┃ 5 v 4 ┃ 3
*v는 음보의 율동적 흐름을 위한 중간휴지(caesura) 표시
이 표는 ㉠ 중에서 가장 빈도수가 많은 음절수가 이렇다는 것이고, 이를 시조 형식으로 정하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 형식에 따라 초창기 선배 시조시인들은 여기에 맞춘 명작들을 써왔다.(최남선, 이병기, 이은상을 선두로 조운, 이호우, 김상옥, 장응두 이런 선배들은 이 형식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았다.)
이렇게 힘든 노력을 해서 시조발전을 해 왔는데 요즘 들어서 선배들이 일구어 놓은 업적을 무시하여 제멋대로 시조랍시고 쓰는 사람들이 자주 등장하고 있으니 언제까지 우리는 시조 형식 가지고 논란해야 하는지 걱정이다. 그리고 선배들이 못하고 간 나머지 구체적 형식에 대해서는 후배인 우리가 기워 넣고 다듬어서 확실하고 단단한 정형시로서의 시조 형식을 만들어 놔야 후배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선배가 된다. 필자는 바로 이런 사명감으로 논문 혹은 평문을 써왔다. 그리고 형식을 어기는 작품은 친소와 상관없이 꾸짖기에 바빴다.
1. 시조는 언어 절약이 생명이다.
어느 나라 정형시든 정형시는 정해진 틀 안에 언어를 절약해서 시적 논의를 전개해야 한다. 정형의 틀 안에서 표현의 경제성이 돋보이는 시, 함축미를 자랑하는 시를 우리는 정형시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다음 작품은 어떤가.
3) 보이지 않아라
바라볼수록 보이지 않아라
하늘과 땅 아득하여
보이지 않아라
가까이 다가갈수록
사람들 보이지 않아라
- 김제현 ‘보이지 않아라’ -
‘보이지 않아라’가 무려 네 번이나 반복되고 있다. 시조 한 편 안에 내장해야 할 정보의 양 대부분을 보이지 않는다는 말의 반복으로 채우고 있다. 이건 말장난으로 시조가 끝나고 있음을 의미하게 된다. 고시조에는 말의 반복을 극도로 제한하고 있음을 보아왔지 않는가. 고시조가 단수 위주라는 것도 다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45자 정도의 제한된 형식을 통해 시의를 함축하자니 말을 반복할 겨를이 어디 있겠는가. 이 점은 음절의 통제를 받는 한시(漢詩)에서도, 정형시로서의 영시(英詩)에서도 마찬가지다.
위 작품의 의미를 줄여 보면 ‘어디고 사람들 보이지 않다’라는 메시지에 불과한데 이런 메시지가 시라하면 시의 정의가 달라져야 한다. 시조는 이런 말장난할 겨를이 없는 시 형식이다.
4) 모두 아래쪽이다
아래쪽에 붙들려 있다
옆도 앞뒤도 없다
모두 아래쪽이다
마음이
오가는 길은
저기 저 허공뿐이다.
- 이정환 ‘저두족’ 일부-
이것 역시 말의 낭비가 심하다. 초장 중장을 간단히 줄이면 ‘모두 아래쪽이다’ 밖에 되지 않는다. 자유시에서도 시어의 반복을 권장하지 않는데 더더욱 언어를 절약해야 하는 시조에서 말을 반복한다면 너무 한가롭지 않는가. 한가한 이런 풍이 시조의 현대화라면 영 틀리는 말이고, 이것이 시조라면 시조에 대해 오해한 결과다. 시조가 왜 이래야 하는가. 한 말을 더하면 군더더기가 되고 한 말을 빼면 시적 논의에 타격이 되는 시가 시조여야 한다.
5) 멀리 있어 아름다운, 멀리 있어 슬퍼지는,
멀리 있어 응답 없는 그것이 지상의 별.
세상엔 별에게도 편질 쓰는 이상스런 자도 있다.
- 오세영 ‘시인’ -
자유시는 언어절약을 강요할 필요가 없다. 어떤 땐 오히려 반복과 나열이 시인의 심상을 강조하거나 묘사의 정확을 구할 수가 있다. 그러나 시조는 그렇게 되면 3장 안에 내장할 의미가 단순화된다. 위 시조에서 시적 메시지는 ‘시인은 별에게도 편지 쓰는 자’에 불과하지만 이것을 위해 초,중장이 수식어로 동원되었다. 이 말 하기 위해 ‘멀리 있어’를 이렇게 반복할 필요가 있는가. 다시 말하지만 초장에서 발단된 시의가 중장에서 심화 확대되다가 종장에서 반전 혹은 결론적으로 마무리 되어야 시조가 된다는 점을 놓치고 있다.
6) 풍경 소리 떠나가면 절도 멀리 떠나가고
흐르는 물 소리에 산은 감감 묻혔는데
적막이 혼자 둥글어 달을 밀어 올립니다.
- 정완영 ‘望月寺’ -
‘떠나가면’이란 말이 초장에 반복이지만 앞의 ‘떠나가면’은 청각으로서의 사라짐이고 뒤의 ‘떠나가면’은 시각의 사라짐이니 같은 말을 다르게 쓴 것이다. 이 작품 어디에도 군더더기가 없지 않은가. 시조가 이렇게 잔소리 군소리가 없어야 한다는 게 내 시조론이다. 아니 내가 지어낸 말이 아니고 정형시는 이래야 되고, 고시조에서도 우리 선조들이 그랬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짧은 형식 안에 내포할 의미를 충만시킬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2. 시조의 율성을 지켜야 한다.
7) 선릉역 5번 출구에
다리 없는 남자가 앉아있다
저도 제가 이렇게 될 줄 몰랐습니다.
못 본 척
지나치는 나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 권영오 ‘공명’ -
이 작품은 앞에 보인 선배들이 보여준 시조 형식과는 영 다르지 않는가. 초장을 음보식을 고쳐 읽으면 이렇게 될 수 있겠다.
Ⓐ 선릉역┃5번출구에┃다리없는┃남자가┃앉아있다
Ⓑ 선릉역┃5번출구에┃다리없는┃남자가앉아있다
Ⓐ로 읽으면 시조가 안 되고 그렇다고 Ⓑ로 읽으니 끝 음보가 한 음보 안에 들어갈 음량을 많이 초과하여 한 음보로 보기 어렵게 되고 말았다.(통상 음보의 음절수 2배가 되고 있지 않는가.) 이걸 시조라 할 수 있는가. 왜 이리 시조 아닌 작품들을 시조 전문지는 싣고 있는가. 시조 전문지 편집자들은 단단한 형식을 지키는 작품만이 실어야 한다. 그래야 후배들에게 가르침이 되고 모범 삼는 일이 될 게 아닌가.
8) 바닷길로 닿자면
울릉도와 대청도
발품의 거리로는
선운사와 마량리
올 봄도 수취인 불명
발신인은 최북단
- 김동인 ‘을미동백’ -
고시조 혹은 가사 또는 민요의 지배적인 율조는 한 행이 4음보다. 이때 앞 2음보가 한 구가 되고, 뒤 2음보가 한 구가 되어 한 행은 2구 4음보로 이룩된다. 그런데 한 구를 이루는 두 음보 중 뒤 음보는 앞 음보보다 무겁게 되어 있다. 이것은 전통시가의 율조로 이해해야 한다. 이걸 바꾸면 어떻게 되는가, 그렇다면 애써 만든 율조를 허무는 경우가 된다. 우리의 전통시가가 앞이 가볍고 뒤가 무거운 음보로 되어 왔다면 이것은 우리 시가로서의 육화된 율성(律性)이므로 이를 존중해야 한다.
바닷길로┃ 닿자면┃울릉도와┃대청도 4:3:3:3
발품의┃ 거리로는┃선운사와┃마량리 3:4:4:3
이렇게 읽어보면 여태 익숙하게 읽어내던 흐름과 어긋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고시조를 토대로 선배들이 만들어준 형식 그대로 지켜나가야 한다. 고치려 들면 시조형식은 다시 난장판이 되고 만다. 단단히 시조형식을 고수하여 세계 문학 시장에 수출해야 하지 않겠는가. 윗 시조는 영 어색하다. 3음절이 되어서는 안 되는 곳에 예사로 3음절이 등장하고 있다.
3. 시조는 3장 6구다.
시조의 각 장은 다음과 같이 의미상 (문장성분상) 두 토막으로 분절된다.
ㄱ) 주어구 + 서술어구
ㄴ) 전절 + 후절
ㄷ) 위치어 + 文
ㄹ) 목적어구 + 서술어구
① 仙人橋 나린 물이 / 紫霞洞에 흘너드러
② 半千年 王業이 / 물소리 뿐이로다
③ 아희야 故國興亡을 / 물어 무삼하리오
- 朱義植(甁歌 390) -
④ 江湖에 봄이 드니 / 미친 興이 졀노난다
⑤ 濁醪溪邊에 / 錦鱗魚 接酒 ㅣ로다
⑥ 이 몸이 閑暇하옴도 / 亦君恩이샷다
- 孟思誠(甁歌 55) -
⑦ 大棗볼 불근 골에 / 밤은 어이 뜻드르며
⑧ 베 빈 그르헤 / 게는 어이 나리는고
⑨ 술 익자 쳬장사 도라가니 / 아니 먹고 어이리
- 黃喜(詩歌 27) -
※ 번호와 빗금은 필자가 부가하였음.
ㄱ)에 해당하는 장은 ① ② ⑥, ㄴ)에 해당하는 장은 ④ ⑨, ㄷ)에 해당하는 장은 ⑤ ⑦ ⑧, ㄹ)에 해당하는 장은 ③이고 빗금친 부분이 경계가 되어 구조상 두 부분으로 나누어지고 있음을 본다. 구조상 두 부분으로 나누어짐은 장(章)의 의미단락이 두 개라는 뜻을 수반한다. 이렇게 고시조에서는 한 장이 두 개의 의미단위로 나누어지고 하나의 의미단위는 2음보로 이룩되고 있다.
흔히 시조형식을 말할 때 3장6구라고 하는데, 6구란 두 개의 의미마디가 한 장을 이룬다는 것, 즉 2음보가 1구가 되고 있음을 말한다. 그리고 두 개의 의미마디로 구분시키는 네 가지 형태의 통사구조는 의미의 연관성을 분명히 하자 함이고 그리하여 낭독이나 암기에 편리를 도모하자 함이었다. 참고로 한시의 5언시는 2언과 3언으로, 7언시는 4언과 3언으로 의미가 분절된다.
9) 내 사랑을 팔았네 헐값으로, 추억은 덤
가판대를 접으며 나는, 울지 않았네
얻은 건 살아갈 양식
잃은 건 산 날의 격조
- 오승희 ‘그 여자, 심순애’ -
‘내 사랑을 팔았네 헐값으로, 추억은 덤’ 이것이 초장인 셈인데, 이걸 두 개로 의미분절한다면 ‘내 사랑을 팔았네 헐값으로/추억은 덤’으로 된다. 이렇게 되면 장의 중앙에 분절되어야 하는 시조형식에서 벗어나버린다. 중장이라고 쓴 ‘가판대를 접으며 나는, 울지 않았네’ 이것 역시 쉼표를 중시해서 보면 ‘가판대를 접으며 나는/울지 않았네’가 된다. 이렇다면 이것 역시 시조 형식을 파괴한 셈이다. 만약 쉼표를 찍지 않았다면 ‘나는’이란 말이 도취로 보아 ‘나는 가판대를 접으며’ 도 될 수도 있고 뒤로 걸려 ‘나는 울지 않았네’로도 되는 두 다리 걸치기(enjambment) 효과를 노린 작품이랄 수 있다.
10) 한 아이가
수평선이 어디냐고
묻고 있다
한 노인은
그곳은 없다고
중얼댄다
자벌레
나무에 떨어져
그곳 향해 꿈틀한다
- 최연근 ‘땡볕, 그리고 지루한 여름날에’ -
‘한 아이가 수평선이 어디냐고 묻고 있다’ 이 문장에서 의미상 둘로 나눈다면 ‘한 아이가 수평선이/어디냐고 묻고 있다’가 되겠는가. ‘한 노인은 그곳은 없다고 중얼댄다’ 이 문장에서 의미상 둘로 나눈다면 ‘한 노인은 그곳엔/없다고 중얼댄다’가 되겠는가. 시조는 각 장 4음보의 중간에 중간휴지(caesura)가 올 수 있어야 한다.
4. 소통을 불허하는 詩文은 詩文이 아니다.
요즘 발표되고 있는 작품들 중에는 주술관계를 무시한 작품들이 자주 보이고 있다.
11) 귀뚜리 떠난 뜰에 미련 거둔 잎사귀가
된서리 시다림 받고 뜬 흙으로 돌아가니
세한에 노송 한 그루 찬 달 아래 외로워도
- 유명옥 ‘겨울 소묘’ 일부 -
12) 얼마를 흔들리며 걸어야 닿을텐가
허공 위를 구르다 허물어 다시 쓰는
첫 마음 빽빽한 자리
몰락의 틈을 딛고
- 서성자 ‘돌을 얹다’ 일부 -
11)은 초장과 중장이 한 문장으로 되어 있다. 수식어를 빼면 초 중장은 ‘잎사귀가 흙으로 돌아갔다’이다. 이 상황에 대한 마무리를 하지 않고 난데없는 말이 종장에 불쑥 등장하였다. ‘세한에 노송 한 그루 찬 달 아래 외로워도’는 앞 장과 무슨 연관인가. 새로 등장한 주어는 ‘노송 한 그루’고 초장 중장의 주어는 ‘잎사귀’다.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걸까. 노송 한 그루가 찬 달 아래 외로워서 어쨌다는 것인가. 3장이 유기적 연결을 이루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문장이 영 어색하지 않는가.
12)의 초장은 주어가 없다. ‘(내가) 얼마를 흔들리며 걸어야 (목적지 어디를) 닿을텐가’란 말인가. 그건 그렇다고 하자. 중장과 종장은 한 문장이다. 중장은 종장에 보이는 주어 ‘자리’를 어지럽게 꾸미고 있다. ‘빽빽한 자리(가) 몰락의 틈을 딛고’는 앞의 초장과 어떤 연관인지 그래서 어쨌다는 건지가 아리송하다. 이해가 안 된다.
13) 보리밥 허기 달랜 오뉴월 아버지가
모닥불 쑥냄새가 흙벽으로 스며들 때
한 가락 육자배기를 국수처럼 말아드신다.
- 정유광 ‘흰 고무신’ 일부 -
13)은 ‘신인작품상 당선작’이라 한다. 초장의 주어는 ‘아버지’다. 그런데 중장에 다른 주어 ‘쑥냄새’가 새로 등장하였다. 종장의 육자배기를 말아 드시는 주어가 아버지인지 아니면 어색하지만 쑥냄새인지가 확인되지 않는 희한한 작품이다. 의사소통이 영 어려운 이런 작품을 추천하는 선자의 의중을 묻고 싶다.
5. 시조 종장 앞에는 ‘그래서’가 아니면 ‘그러나’ 가 온다.
그래서는 여태 전개된 시적 논의를 결론적으로 판단하는 경우고, 그러나는 앞 논의를 반전하는 경우다. 우선 ‘그래서’가 생략된 작품을 보자.
이런들 엇더하며 저런들 엇더하리
萬壽山 드렁츩이 얼거진들 긔 엇더하리
(그래서)우리도 이가치 얼거저 百年까지 누리이라
<太宗, 甁歌 797>
다음은 ‘그러나’가 생략된 작품이다.
泰山이 놉다 하되 하늘 아래 뫼히로다
오르고 못 오르면 못 오를 理 업건마는
(그러나)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흘 놉다 하돗다
<楊士彦, 源國 109>
시조는 한시의 기승전결이란 4단구조가 아니라 초장 중장 종장이라는 3단구조로 되어 있다. 말하자면 한시의 경우로 비교하면 기승결 아니면 기승전의 구조라 해도 무방하다. 기승결은 종장 앞에 ‘그래서’가, 기승전이면 종장 앞에 ‘그러나’가 생략되어 있다고 보면 되겠다.
14) 텃밭에서 키웠다는 열무잎을 다듬다가
야금야금 씹어나간 벌레길을 보았다
한 바퀴
뱅글 돌다가
삐뚤빼뚤 짚어간,
- 이은주 ‘벌레의 길’ 일부 -
‘한 바퀴 뱅글 돌다가 삐뚤빼뚤 짚어간,’이 말 뒤에 ‘벌레길을 보았다’란 말이 생략된 형태다. 중장에서 이미 벌레길을 보았다라는 정보를 전달했는데 종장에서 이걸 되풀이한다면 종장 첫 머리에 ‘그러나’나 ‘그래서’가 올 수 없다. 종장(終章)의 종(終)이 없는 형태 아닌가. 간단히 의미를 정리하면 ‘열무잎에서 벌레길을 보았다’가 되는데 이게 시조랄 수가 있는가.
이상 요즘 발표되고 있는 시조전문지에서 몇 편을 골라 의견을 붙여보았다. 시조가 형식을 완벽하게 가다듬지 않는다면 시조로서의 정형시로 우뚝할 수가 없다. 이리 써도 저리 써도 되는 게 정형시가 아니므로 정형시는 형식이 단단해야 한다. 시조의 형식은 거추장스런 굴레가 아니라 시조답게 힘차게 견인하는 적극적 유도장치라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