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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남진은? 스크랩 장흥 천관산(天冠山;723m) 산행기
유경/박노철 추천 0 조회 268 10.04.19 07:00 댓글 7
게시글 본문내용

                        장흥 천관산(天冠山;723m) 산행기


  천관산은 전남 장흥군 관산읍과 대덕읍 경계에 위치해 있으며, 경관이 아주 수려하여 지리산, 내장산, 월출산, 능가산(내소사 뒷산 혹은 변산)과 더불어 호남 5대 명산 중의 하나로 꼽힌다. 그리하여 전라남도 도립공원이고, 우리나라 100대 명산에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천관산이 있는 전남 장흥은 우리나라의 정남진(正南津)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강원도 강릉시 강동면에 정동진(正東津)이 있듯이 전라남도 장흥군에는 정남진이 있는 것이다.

  이런 정남진이 있는 장흥에 위치한 천관산은 그 이름부터가 특이하다. 하늘을 향해 솟아오른 수십 개의 바위봉우리가 주옥으로 장식한 천자의 면류관을 닮았다 하여 천관산(天冠山), 즉 ‘하늘의 갓’이라 하였으니 그 이름에 걸맞게 경관이 참으로 기기묘묘하게 아름답고, 마치 바위 전시장을 방불케 한다.

 

  그리하여 천관산은 예부터 천풍산(天風山), 지제산(支提山), 신산(神山), 불두산(佛頭山), 우두산(牛頭山) 등 여러 이름으로 불려왔다. 즉 천관보살이 상주하며 법을 설파하고, 천자의 면류관을 닮았다 해서 천관산이고, 바람이 많이 분다 해서 천풍산이며, 산의 형상이 탑의 모양을 닮았다고 해서 지제산이라 했다. 지제산에서 ‘지제’는 탑을 뜻하는 범어(산스크리트어) Caitya(차이티야)의 한자음이라고 한다.

 

 ※탑(塔)의 어원(語源)---산스크리트어 스투파(Stuppa)와 파리어(巴梨語) 투파(Thupa)가 한자화하면서 탑이라 하게 되었고, 탑 중에서도 부처님이나 기타 덕이 높은 스님의 신골인 사리(舍利)를 넣은 불교식 무덤을 탑파 혹은 그냥 탑이라 하는데 비하여, 사리가 들어 있지 않은 탑을 차이티야(Caitya)라 하며, 이것이 한자화하면서 지제(支提)라 하게 되었다.


  그리고 가끔 정상에 흰 연기와 같은 이상한 기운이 서린다 하여 신산이라 했고, 북쪽에 솟은 관음봉이 부처의 두상을 닮았다 해서 불두산이라 했으며, 우두산의 ‘우두’는 불교에서 깨달음을 상징하니, 불교와 관련이 깊은 산이란 뜻에서 우두산이라 했다. 이처럼 여러 이름으로 불려왔으나 대체로 그 이름들이 불교와 깊은 연관이 있는 지명인 것이고, 바로 그래서 천관산이 불교 성지인 까닭이기도 하다.


  천관산의 바위는 설악산이나 금강산처럼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그보다 한결 정교하고 오묘하다. 그리고 가까운 곳에 있는 월출산과도 또 다른 형태를 지니고 있다. 월출산의 기암들은 크고 웅장한 멋은 있지만 산세가 워낙 험하여 원하는 대로 기암들을 다양하게 감상하기 어려운데 비하여 천관산은 순하기 이를 데 없다. 


  그래서 조선시대 인문지리서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도 ‘천관사에서 남쪽을 바라보면 오뚝한 것, 숙인 것, 우묵한 것, 입 벌린 것, 울퉁불퉁한 것 등 기이한 암석이 많다’고 한 것을 보면 옛날부터 천관산의 독특한 바위는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렸던 모양이다. 

  그리고 남동쪽의 여성적인 부드러운 산세와 북서쪽의 남성적인 씩씩한 산세가 잘 조화를 이루고 있으면서 천관산 능선은 소의 등줄기처럼 부드럽고 완만하다.


  거기에다가 다도해의 푸른 물과 어우러지면 더욱 아름다운데, 봄에는 진달래가 흐드러지게 피고, 그 사이사이 노란 히어리가 수줍은 듯 얼굴을 내밀며, 여름에는 계곡의 울창한 수림 사이로 맑고 깨끗한 계류가 흐른다.

                                               히어리

 

  특히 가을에는 환희대에서 연대봉에 이르는 주능선의 수십만 평에 이르는 억새밭이 장관을 이루며, 능선과 계곡엔 단풍이 아름답게 수를 놓고, 겨울에는 눈 속에서도 푸르른 동백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어 이국적인 풍치를 연출한다.  


  이래서 이 산 기슭에서 태어나고 자란 조선 후기의 실학자 위백규(魏伯珪;1727 ~1798)는 이 산 하나만을 가지고 '지제지(支提誌)'라는 지리서를 썼을 정도로 천관산은 아름답고 유서 깊은 산이다.

  이런 산이라서 그런지 신라의 김유신장군과 ‘천관녀’에 얽힌 일화가 전하고 있다. 즉 김유신장군이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후 지난 젊은 시절 사랑했던 천관녀에게 서라벌로 같이 돌아가자는 간청을 했지만 뿌리치고 천관보살이 되어 천관산에 숨어들었다는 전설이 전하고 있다.

 

  김유신장군이 젊은 시절 기생인 천관녀를 사랑했으나 어머니 만명부인의 충고에 따라 천관녀의 집으로 발길을 돌린 백마의 목을 쳐서 죽이고, 오직 무예를 익히는데 전념한 나머지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했다.

  한편 김유신장군에게 버림을 받은 천관기생은 지금의 경북 월성군 내남면 일남리 뒷산에 암자를 짓고 숨어 살면서 김유신장군의 성공을 빌고 있었다.

 

  통일대업을 마치고 서라벌로 돌아가던 김유신장군은 그 부근을 지나다가 천관녀의 소식을 듣고 암자를 찾아갔다. 장군은 그녀를 만나 그녀의 매운 정절과 기도에 감복하여 서라벌로 같이 돌아가기를 간청했으나 그녀는 매정한 말로 김유신을 뿌리쳤다.

  “소첩이 장군과 맺은 인연은 소첩이 기생이었을 때뿐입니다. 사실 소첩은 천관보살의 화신으로 삼국통일의 대업을 달성시킬 수 있는 사람을 찾던 중, 장군이 젊은 시절 이미 이 일을 해낼 사람임을 알아차리고 기생이 되어 장군의 마음을 시험한 것인데, 역시 큰일을 치를 사람이라 소첩과 인연을 끊었으므로 소첩은 이미 할 일을 다 마친 것입니다.” 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럴수록 김유신장군은 “오늘의 이 위업이 너의 도움임을 알게 된 이상 이대로 인연을 끊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라고 고집을 부리는 것이었다.  

  이에 천관녀는 쉽게 장군의 고집을 물리칠 수 없음을 깨달은 것일까. 눈을 지그시 감고 주문을 외우더니 홀연히 하늘에서 내려온 백마를 타고 서쪽을 향해 사라지는 것이었다. 장군은 그녀를 놓칠 새라 타고 온 말을 몰아 뒤쫓았지만 결국 장흥의 천관산에 이르러 그녀를 잃어버렸다.

 

  이 때문에 천관산에 천관보살이 살고 있다고 후세에까지도 전해온다.(장흥문화원 발간 <문림고을 장흥>에서 인용). 그래서 불가에서 천관산은 천관보살이 항상 머물면서 설법하는 산이라고 보고 있으며, 문수보살이 머무는 오대산, 법기보살이 머무는 금강산과 더불어 천관보살이 머무는 천관산은 그래서 신령한 산이다.


  천관산의 산줄기는 호남정맥에서 갈라져 나온 가지에 해당한다. 즉 백두대간의 영취산(1,075.6m)에서 분기한 호남금남정맥이 진안의 주화산(565m)에서 호남정맥과 금남정맥으로 갈라져서 금남정맥은 북쪽의 계룡산(845m) 쪽으로 달려가고, 호남정맥은 남서쪽으로 내장산(763.2m)에 이른 다음, 다시 남쪽으로 무등산(1186.8m)을 거쳐 장흥 땅의 제암산(807m)으로 달려 내려온다.

 

  그리고 제암산에서 북동쪽으로 방향을 튼 호남정맥은 순천의 조계산(884.3m)과 광양의 백운산(1217.8m)을 거쳐 섬진강과 광양만이 만나는 남해에 가라앉으며 462km에 이르는 대장정을 마친다.

  그런데 그 호남정맥이 제암산에서 남쪽으로 가지 하나를 갈라놓는데, 이 가지가 탐진지맥(耽津枝脈)으로서 사자산(667.5m)에서 서쪽으로 휘돌아 남진하면서 억불산(517.2m)과 괴바위산(467m)을 거쳐 천관산에 이른다.

 

  천관산은 이름난 산인만큼 오르는 들머리가 많으나 처음 가는 사람은 대개 장천재 주차장을 기점으로 하여 원점회귀 산행을 한다. 그렇게 할 경우, 산행거리 약 6.5km, 산행시간은 빨리 가면 3시간이면 되지만 천관산 산행만은 공산당 식으로 속도전을 해서는 안 되고, 여유로운 시간으로 느긋한 산행을 해야 한다.

 

  그리하여 이곳저곳을 살피며 멋진 암릉을 감상하고, 내력과 유래도 알아보고, 사진도 많이 찍고, 그렇게 하려면 쉬는 시간 포함해서 최소한 4~5시간 산행을 해야 제대로 의미 있는 산행을 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널따란 장천재 주차장에 차를 두고, 관리사무소 앞에 이르면 등산로 안내판이 서 있고, 안으로 들어가면 천관산관광농원 입구에 자연석으로 ‘湖南第一支提靈山(호남제일지제영산)’이라고 새긴 표지석이 눈길을 끈다. 이 표지석이 천관산의 옛 이름이 지제산이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이어서 독립지사 덕암 위석규(魏錫奎;1878∼1913)의 유허지가 나온다. 이 유허지의 주인공인 위석규는 1905년 일제의 강요에 의해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망국의 한을 품고 만주로 망명하였다.

 

  1911년 청나라 원세개(袁世凱)의 원조를 받아 일제를 몰아내려 하였으나 역부족을 느끼고, 노령(露領)으로 망명하여 해삼위(海蔘威)를 거점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1913년 4월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하고 이국땅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조금 올라가면 산행 길이 좌우로 나누어진다. 오른쪽으로 가면 금수굴과 금강굴로 가는 길이요, 왼쪽으로 가면 양근암과 정암사로 가는 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른쪽으로 간다. 사실 오른쪽 길이 정상 산행길이다. 그리하여 산행기점에서 15분 정도 올라가면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72호인 장천재에 닿는다.

  

  장천재(長川齋)는 조선 초기(1450년 무렵) 장흥 위씨(魏氏)들이 장천암(長川庵) 터에 세운 장흥 위씨의 재각이면서 학문을 탐구하는 서재로 이용하던 건물로 1870년 무렵 중건하였다. 한때 조선 정조 때의 학자 존재 위백규(存齋魏伯珪)가 공부하였던 곳이기도 하고, 후학을 가르치던 곳이었으며, 주변의 풍치가 뛰어나고 위백규의 학풍이 두터워 도처에서 선비들이 이곳을 찾아와서 함께 학문을 논하던 곳이기도 했다. 


  장흥군이 자랑하는 호남 실학의 대표격인 위백규는 진보적인 실학자로 관산읍 방촌리에서 태어났으며, 그는 사회개혁과 정치개혁을 부르짖었고, 김정호가 대동여지도를 만들기 90여 년 전에 이미 중국과 일본을 상상하여 그린 지도와 한양, 평양 지방의 지도를 포함한 64장의 도해를 곁들여 만든 지리지인 <환영지(?瀛誌)>를 남겼다. 그리고 그는 실학자이자 성리학에도 남다른 관심을 보여 많은 경전탐구와 저술에 힘썼으며, 특히 천관산의 사찰, 봉우리, 전설 등을 모두 기록한 <지제지(支提誌)>를 남겨 천관산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장천재에서 2~3분 올라가면 오른편 산기슭에 위씨네들 무덤이 있다. 아마 이 고장엔 희성인 위(魏)씨들이 행세하는 고장인 것 같다.


  이어서 2~3분이면 금수굴과 환희대 오르는 길이 갈라지는 삼거리가 있는 체육공원이 나타난다. 갈림길 모퉁이에는 꽤 오래 묵은 동백나무가 서 있으며, 거기 이정표엔 ‘금수굴 1.5km, 연대봉 2.5km, 장천재 400m, 주차장 850m, 금강굴 1.3km, 환희대 2.6km’라 적혀 있다.

 

  곧바로 올라가면 금수굴, 오른쪽으로 올라가면 금강굴을 거쳐 환희대로 가는 길이다. 금수굴(金水窟)은 선인봉 능선과 봉황봉 능선의 한가운데로 뻗어 내린 능선상의 금수봉 중턱에 있는 작은 석굴이다. 굴 안에는 언제나 금가루가 떠 있는 것처럼 금색을 띤 물이 고여 있다고 해서 금수굴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특히 햇빛이 비치면 물이 찬란한 황금색으로 변하여 신비함을 더해준다고 한다.   


  그러나 처음 가는 사람은 오른편 능선을 향해 금강굴 쪽으로 올라가는 것이 정석이다. 그리하여 4~5분 올라가면 언덕을 넘어 능선 사면 길을 따라 오르게 된다. 6~7분 진행하면 작은 다리를 건너고, 거기 이정표엔 ‘환희대 2.2km, 금강굴 1.6km, 장천재 주차장 0.7km’라 적혀 있다. 이정표 수치들이 앞뒤가 맞지 않은 것 같다.


  이후 울창한 숲속으로 30여분 능선을 향해 올라가면 왼편으로 전망이 트이면서 고흥반도 앞 득량만이 한눈에 들어오고, 눈앞에 펼쳐진 능선은 마치 설악산의 공룡능선처럼 뾰족뾰족한 바위가 이어져 있으며, 산기슭에는 진달래꽃이 여기저기 무리지어 피어 있다. 천관산 진달래는 천관녀의 넋인가 색이 유달리 붉게 물들어 있다.

 

  그리고 진달래 사이에 드물기는 해도 토종식물로 명종위기의 희귀종인 노란 히어리가 피어 있어서 산객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 야생동식물 2급으로 분류되어 있는 히어리는 산수유. 생강나무와 더불어 봄의 전령 3총사라 불리기도 한다.

 

  이후 능선을 따라 올라가게 되는데, 천관산에서는 등산로를 따로 찾을 필요 없이 능선만 따라가면 된다. 계곡은 경사가 급하고 너덜지대가 많아서 오히려 위험할 뿐만 아니라 주변 경관을 제대로 보지 못하며, 그저 올라가기만 해야 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무수한 기암들은 모두 능선 위에 있어서 능선 길로 가면 이런 기암들을 감상하면서 산행을 할 수 있고, 바위가 더러 막아서면 우회로가 있어서 위험하지 않다. 그리하여 장천재에서 1시간 30여분, 산행기점에서 1시간 45분 정도 올라가면 금강굴(金剛窟) 앞에 다다른다. 종봉 바로 밑에 있는 금강굴의 천정에서는 물이 조금씩 흘러내리고 있으며, 금강굴 안에는 치성을 드린 흔적이 남아 있다.

 

  금강굴을 돌아서 나무계단 길로 바위봉우리인 종봉(鐘峰)으로 올라가면 정상의 암반 틈새에 소나무 한 그루가 자라고 있다. 척박한 환경을 이겨내고 이렇게 살아남은 소나무를 볼 때마다 경이롭다는 생각이 들지만, 한편으로는 암릉과 어우러져 소나무의 경관이 참으로 멋지다.

 

  종봉의 정상도 전망이 매우 좋다. 하늘을 찌를 듯이 우뚝 솟은 대세봉의 웅장한 암봉이 위압적으로 다가와서 마치 설악산이나 금강산의 한 자락이 눈앞에 펼쳐져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다.

  종봉을 지나 10여분 가면 또 하나의 나무계단 길을 오르는데, 위에 올라서면 천관사에서 올라오는 길과 만나는 대세봉(645m) 삼거리이다. 거기 이정표에 ‘장천재 2.5km,  천관사 1.6km,  환희대 0.5km, 연대봉 1.4km’라 적혀 있다. 

 

  이어서 환희대(歡喜臺)에 이르는 능선 길을 걷는 동안 기암괴석과 바위봉우리들이 연출하는 웅장한 경치가 시종일관 눈을 황홀하게 한다.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노승봉과 대세봉, 문수보현봉, 천주봉, 대장봉 등의 암봉들이 웅장한 모습으로 다가오고, 금수봉 능선 너머로 천관산 정상인 연대봉이 멀리 보인다.

 

  그리하여 천관사 갈림길에서 10여분 진행하면 천주봉(해발 약685m)에 올라선다. 천주봉 주변도 진달래꽃으로 붉게 물들어 있으며, 커다란 돌기둥이 하늘을 향해 우뚝 솟아 있어 천주봉(天主峰)이란 이름이 붙었다.

 

  천주봉을 떠나 대장봉을 돌아서 환희대에 올라선다. 환희대는 해발 720m로서 널찍한 바위로 구성되어 있으며 일명 대장봉이라고도 하고, 억새의 장관이 시작되는 곳이기도 하며, 사방으로 시야가 열려있다. 

  동쪽으로는 정남진이 지나는 삼산방조제 너머로 다도해의 수많은 섬들이 한 폭의 동양화처럼 펼쳐지는데, 보성만의 득량도와 장재도는 물론 소록도와 거금도도 보인다.

 

  북쪽으로는 관산읍과 관산평야가 눈 아래로 펼쳐지며, 그 위로는 멀리 제암산에서 사자산을 지나 일림산(667m)으로 이어지는 호남정맥이 유장하게 뻗어가는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그 왼편 북릉과 서북릉 사이에 계곡 아래로는 농안마을과 농안제가 환하게 내려다보인다.

 

  환희대에서 남서쪽으로 뻗어가는 능선은 아홉 마리의 용이 노닐었다는 구룡봉에서 석굴암과 탑산사, 문학공원을 경유해서 대덕읍 연지리 쪽으로 이어지는데, 구룡봉에는 부산 금정산의 금샘과 같은 웅덩이가 수십 개 있어서, 그 가운데 어떤 샘은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다고 한다.

 

  한편 환희대 북쪽으로 솟아 있는 대장봉(大藏峰)과 천주봉, 문수보현봉, 대세봉(大勢峰), 선재봉(善才峯), 관음봉, 신상봉(神象峰), 홀봉(笏峰), 삼신봉 등 아홉 개의 암봉을 일러 구정봉(九頂峰)이라고 한다.

  그리고 천관산맥 주능선은 환희대에서 남동쪽으로 722m봉과 710m봉을 지나 연대봉으로 뻗어 가는데, 약 1km, 20여분 걸리는 가까운 거리이며, 경사가 완만하고, 산세가 펑퍼짐하고 순하다. 

 

  그리하여 가을이면 환희대에서 연대봉까지의 주능선 좌우에는 약 40만평에 달하는 광활한 억새밭이 장관을 이루며, 이 억새평원이 천관산의 명물이어서 해마다 이곳에서 ‘천관산 억새제’가 개최된다.

  헌데 나무 한 그루 제대로 찾아볼 수 없는 평원에 억새밭이 펼쳐져서 청관산이 헐벗어 보이는데, 거기에는 그럴만한 역사적인 아픈 내력이 있어서 이 고장 출신의 소설가 이청준(李淸俊;1939-2008)은 그의 소설 <신화의 시대>에 아래와 같이 적어놓았다.

 

  “멀리로는 고려조 때의 일본 공략에 나선 여몽연합군의 군선 건조를 위해 산의 수림이 크게 남벌 당했고, 다음으로 조선조 왜란 때 우리 군선 건조와 왜인들의 방화 약탈로 다시 울창한 수목과 사찰들이 큰 수난을 겪었으며, 봉수제도가 폐지된 한말 이후 일제 강점기부터는 일본인 회사들의 건축재 반출사업으로 온산이 크게 헐벗게 되었다.”

 

  환희대에서 10여분 걸어가면 넓은 공터가 있는 722m봉에 닿으며, 거기 이정표에 ‘연대봉 0.4km, 환희대 0.6km, 탑산사 1.1km’ 등이 적혀 있고, 거기서 오른편으로 탑산사 가는 길이 갈라진다.

  그리고 정상부 능선 722m봉 북쪽 사면에는 천관산에서 가장 아름다운 진달래 꽃밭이 펼쳐져 온통 진달래꽃으로 울긋불긋 마치 연분홍색의 물감을 쏟아 부은듯하다. 분홍색 진달래꽃이 활짝 피어나 천관산을 아름답게 물들이고 있어서 완만한 능선 길을 걸어가면 천관산의 봄 경치를 만끽할 수 있다.

 

  산 아래에서 불어오는 바람에서 봄기운이 완연하게 느껴지고, 진달래 꽃밭 아래엔 얼레지꽃과 노랑제비꽃이 피어나서 더욱 흥취를 돋운다.  

 

  그리고 710m봉에서 연대봉을 바라보니 풍만한 여인의 젖가슴처럼 봉긋하게 솟아 있다. 그 천관산 정상인 연대봉(煙臺峰, 723m)에는 봉수대를 뜻하는 연대라는 이름처럼 봉수대가 자리 잡고 있다.  

  연대봉 봉수대는 1149년(고려 의종 3년)에 처음 설치한 이래 계속적인 개축을 해왔으며, 지금의 봉수대는 기단만 남아 있었던 것을 1986년에 마을사람들이 뜻을 모아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 정상에는 돌로 4각형의 축대를 쌓아서 봉수대를 복구하여 그 위에 전망 안내도가 있다.

 

  연대봉은 장흥에서 가장 높고 사방이 일망무제로 전망이 뛰어난 곳이어서 봉수대의 입지로는 최고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여기서는 제암산과 사자산은 물론 완도의 상황봉, 해남의 두륜산, 영암의 월출산, 광주의 무등산까지 다 보이며, 날씨가 쾌청한 날은 제주도의 한라산도 보인다고 한다.   

 

  연대봉의 동쪽으로는 보성만과 득량만, 그리고 고흥반도, 남쪽으로는 그림 같은 다도해가 한눈에 들어온다. 다도해에는 약산도와 금일도, 금당도, 거금도, 거문도, 소록도, 득량도 같은 섬들과 이름 모를 작은 섬들이 무수히 떠 있다.

 

  연대봉에서 남동쪽 방향의 능선은 657봉, 645봉, 책바위, 불영봉(535m), 470봉을 지나 관흥으로 달려 내려가며, 불영봉에서 갈라진 또 하나의 산줄기는 관산읍 삼산리 쪽으로 뻗어 내려가는데, 이들 능선의 끝자락에는 수동 제1, 2저수지가 있고, 그 아래로 해안선까지 넓은 들판이 펼쳐 있다.

 

  연대봉 북쪽으로는 관산읍과 관산 들판이 한눈에 내려다보이고, 북동쪽 능선은 봉황봉을 지나 관산읍 탑동 쪽으로 뻗어가며, 그 위로 멀리 억불산 뒤로 제암산에서 사자산을 거쳐 철쭉으로 유면한 보성의 일림산으로 이어지는 호남정맥이 장엄하게 굽이쳐 간다. 

 

  연대봉엔 일등삼각점(강진 11, 2001 복구)이 있고, 그 아래 이정표에는 ‘탑산사 2.1km, 장천재 2.5km, 환희대 1.0km, 양근암 1.0km)라 적혀 있다.

  천관산 정상은 또 계절에 따라 변화무쌍한 모습을 보여준다고 하는데. 봄에는 신록의 신선함과 생동감, 여름에는 기운 넘치는 초원, 가을에는 은빛 찬란한 억새로 바뀌면서 장관을 거듭하며, 정상에는 흰 연기와 함께 신비로운 기운이 서린다 하여 신산(神山)이라 부르기도 했단다. 

 

  정상에서 동북 능선을 따라 장천재 쪽으로 내려가기 20여분, 봉항봉에서 조금 더 내려가면 양근암(陽根岩)이라 이름 붙여진 바위를 만난다. 아무리 봐도 정말 잘 생긴 대물이다. 저리도 빳빳이 치켜들고 있으니 남성의 상징물답게 장엄하다. 양근암 맞은편 금수봉 능선에는 여성을 상징하는 금수굴이 마주보고 있다고 하니 이 또한 자연의 오묘한 조화라 아니 할 수 없다. 

 

  이어서 문바위를 지나 정상에서 50여분 내려가면 장안사와 장천재로 내려가는 길이 갈라지는 갈림길에 이른다. 거기서 10여분, 정상에서 1시간이면 장안사에 닿는다. 장안사는 시멘트 슬래브 건물로 여염집 같이 생긴 절이다.

                                          장안사

 

  장안사에서 내려가기 15분, 연대봉에서 1시간 20여분이면 아침에 지나갔던 삼거리를 거쳐 장천재 주차장에 닿으면서 산행을 마감하게 된다.

  그리고 남은 시간으로 천관사에 들렸다가 정남진을 찾아간다면 더욱 뜻 깊은 산행을 마감할 수 있을 것이다.

 

※ 잘 곳---1박을 해야 할 경우, 산행 들머리 마을인 관산읍은 워낙 시골이라서 잠자리나 식당이 마땅치 않다. 헌데 산행기점인 장천 주차장에서 장흥읍까지 나가는데 승용차로 20분이면 충분하므로 장흥읍에 나가서 1박 하는 것이 여러 가지로 편리하다. 장흥읍의 <진송관광호텔>은 깨끗하고 값이 싸다(1박에 4만원 ; 전화 061-864-77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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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관사(天冠寺)>

 

  천관사는 장천재 주차장에서 관산읍 시가지 쪽으로 들어가서 시가지 가운데에서 칠량으로 향하는 837번도로로 좌회전하여 3km 정도 남진하면 왼편 산비탈로 천관사 올라가는 길이 갈라진다. 꽤 가파른 길이기는 하나 주행에는 지장이 없다. 그 길로 약 2.4km 정도 올라가면 천관사 주차장에 닿는다.

  신라시대에 영통대사(通靈大師)는 절 세울 곳을 찾아 전국을 떠돌다가 지금의 전라남도 땅에 이르렀다. 먼 길을 다닌 스님은 몹시 피곤하고 지쳐있었던 터라 지금의 장흥읍 덕제리와 용산면 경계를 이루는 23번국도 상의 자울재에 다다랐을 때에 피로 때문인지 스님은 그만 그 자리에서 깜빡 잠이 들고 말았다. ‘자울재’란 이름도 바로 영통대사가 졸며 꿈을 꾼 고개라는 뜻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헌데 그때 스님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쇠 지팡이가 날아가 천관산 허리에 꽂히는 꿈을 꾸고는 잠을 깼다. 아무리 생각해도 꿈이 예사롭지 않음을 알아챈 스님은 꿈속에서 지팡이가 날아간 곳을 찾아갔다. 그리고 그 자리에 천관사를 지었다고 하며, 그 때가 신라 무열왕 2년(655년)이었다고 한다.

  이후 기도처로 이름이 높아 나중에 신무왕이 되는 김우징((金祐徵)도 이 천관사에 와서 기도를 드린 적이 있으며, 당나라에서도 많은 승려들이 찾아왔다고 전한다.

 

  그리하여 번성했을 때에는 89암자를 거느렸고, 1,000 여명의 대중이 운집해 수도 정진했다는 말이 전해진다.

  그러나 그 뒤의 역사는 전하는 바가 별로 없지만, 고려 초기의 것으로 보이는 삼층석탑(보물 제795호)과 석등(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34호), 그리고 고려 후기의 오층석탑(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35호) 등이 남아 있어서 고려시대까지도 여전히 사세가 번성했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

  하지만 조선 광해군 때 억불정책으로 폐사된 뒤 간신히 명맥만 유지해왔고, 현존 전각들은 1963년에 중건한 극락전을 비롯하여 칠성각과 요사채 등이 있다.

 

  보물 제795호인 천관사 삼층석탑은 천관사 경내 법당에서 약간 떨어진-절을 바라보는 위치에서 왼편 공터에 자리 잡고 있다. 천관산의 돌을 깎아 조성한 이 탑은 2단의 기단(基壇)위에 3층의 탑신과 상륜부가 안정된 구조를 보이고 있으며, 높이는 4m로서 지대석과 하대석은 땅속에 묻혀서 잘 보이지 않는다.

 

  형식은 전형적인 신라시대의 석탑을 따른 것이지만 전체적으로 기단부의 탱주가 생략된 점, 옥개석의 각 부분이 간략해진 점으로 보아 고려 초기에 건립된 것으로 보이며, 전각이 밋밋하고 중후하여 전체적으로 담담한 느낌을 주고 있다. 헌데 천관산의 석질이 다른 곳의 화강암보다 단단한 듯, 오랜 풍화작용에 의해서도 탑의 외형이 별로 훼손되지 않고 깨끗하여 정갈하게 보인다. 

 

  그리고 오층석탑은 높이 4.2m로서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보인다. 극락보전 앞에 석등과 같은 선상에 있으며, 4장의 장대석에 4장의 면석으로 기단을 구축하였고, 탑신부는 탑신과 옥개석을 각각 하나의 돌로 하였다. 옥개석이 두꺼운 점이 특징이고, 퍽 서민적이다.

 

  석등은 높이 2.52m로서 통일신라 후기 혹은 고려 초의 작품으로 보이고, 극락보전 앞에 5층 석탑과 일직선상에 위치한다. 좌대와 간석, 앙련, 화사석, 옥개석, 보주 등이 잘 갖추어진 우수한 석등이다. 양식면에서 장흥군 유치면의 보림사 석등(국보 제44호)과 비슷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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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남진(正南津)을 찾아서>

 

  서울 광화문에서 정동으로 가다가 동해와 만나는 곳을 정동진이라고 하고, 광화문에서 정남을 향해 쭉 내려와서 남해와 만나는 곳을 정남진이라 한다. 이렇게 해서 북에는 중강진, 동에는 정동진, 남에는 정남진이 있다. 그러나 정서진은 없다.

  헌데 현지에 가면 전라남도 장흥군 용산면 남포리 마을과 장흥군 관산읍 신동리 사금마을이 서로 자기네 마을이 정남진이라고 주장하면서 표지석을 비롯한 조형물이 서 있어서 외지에서 간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한다

                                         남포리 정남진 표지석 

 

  장흥군 용산면 동쪽에 위치한 남포리 사람들은 정남진이 남포리라 주장한다. 그리하여 남포리(南浦里) 정남진 표지석에는, 「장흥군은 한반도의 남녘으로 용산면은 장흥에서도 정남에 위치하여 그동안 남남면, 남상면, 남하면, 남면으로 불리다가 1940년 지금의 용산면으로 개칭되어 불리어져 오고 있다.

                                           남포리 입구

 

  한반도의 끝자락 포구인 장흥군 용산면 남포마을은 경관이 빼어난 마을로 400여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소등섬 할머니의 당제와 전설이 깃들어 있고, 영화 “축제”의 촬영지이며, 전국 최고의 맛인 석화구이, 득량만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안선, 황홀한 해돋이와 달맞이 등을 볼 수 있는 전국적인 명소로 알려져 많은 관광객이 찾아오고 있다. 이에 우리 주민들은 인문, 사회, 지리, 역사적인 자료와 국립국토지리정보원의 개략적인 측량에 근거하여 “남포” 마을 이름을 “정남진”으로 개칭하기로 의결하고 정남진 표지석을 세우다. 2004년 2월 5일 정남진 주민 일동」이라 새겨져 있다.

                                        소등섬

 

  이 남포마을은 마을 바로 앞에 ‘소등섬’이라는 작은 무인도가 떠 있고, 득량만 바다의 득량도가 손에 잡힐 듯이 가깝게 보이는 갯마을이다. 그래서 이 마을의 민박집 창문만 열어도 소등섬 위로 붉은 아침 해가 떠오르는 일출 광경을 볼 수가 있고, 마을 주변에는 석화(굴)와 바지락이 생산되는 갯벌이 넓게 펼쳐져 있어서 석화구이를 맛보려는 미식가들의 발길이 겨우내 끊이질 않는다.

 

  한편 이 마을은 장흥군 회진면 출신의 작가 이청준의 소설 <축제>를 임권택 감독에 의해 영화로 촬영되었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이런 주장과 오랜 유래에다가 멋진 배경을 가진 곳이라서 정남진이라는 주장에 상당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국토지리정보원이 밝힌 정남진은 용산면 남포리가 아니라 관산읍 신동리 사금마을이다. 즉 서울 광화문의 도로원표(동경 126° 58′34.1″)를 기준으로 삼아 경도 126도 59분, 위도 34도 32분이 정확한 좌표점이고, 행정구역으로는 장흥군 관산읍 신동리(사금마을) 518-15번지라고 한다.

                                     사금마을 정남진 표지석

 

  사금마을은 바닷가 모래에서 금을 채취한 곳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이곳 해변에서 수평선 동쪽 약 20㎞ 지점에 고흥반도와 소록도, 아름다운 섬 완도군 금당도(꽃섬) 등 바다가 훤히 바라다 보이고, 관산읍 신동리의 사금마을의 삼산방조제 옆에는 정남진을 상징하는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삼산 방조제

 

  헌데 정남진 관광개발사업을 둘러싸고 용산면 남포리냐 관산읍 신동리냐를 놓고 법정 다툼으로 번져 지역갈등의 조짐까지 보이고 있다니 안타까운 일이다.

  이래서 장흥군에서는 ‘정남진’이 특정 지명이라기보다는 장흥군에서 발굴하여 명명한 지역이미지 브랜드라는 주장이다. 그리하여 맨 동쪽에 위치한 안양면 수문리에서 맨 서쪽의 대덕읍 옹암리까지, 즉 안양면, 용산면, 관산읍, 회진면 및 대덕읍 일대 바닷가 해안선 전체 42.195km를 정남진 권역으로 설정하여 개발을 해 나갈 계획이라고 한다.

 

  서로의 주장들이 팽팽해서 어느 쪽으로 결론이 날지 모르지만 원만한 해결이 나서 아름다운 천관산에 흠이 가는 일이 없었으면 한다. 


글쓴이 - 둘 산악회   아미산(이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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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0.04.26 07:48

    첫댓글 잘 정리된 설명에, 즐거운 산행이었습니다.

  • 10.04.27 16:11

    ~ 천관산에 대해서, 정남진에 대해서 공부 많이 하고 갑니다~~ 천관산도 가보고 싶어 지는군요~~ 감사합니다~~

  • 10.05.03 19:13

    천관산도 장흥의 명산이군요

  • 10.05.05 20:30

    정말 소중한 자료를 잘 즐감했습니다. 천관산의 진면모를 새삼 느끼면서 기회 있을때마다 자주 찾고 싶네요~~!!

  • 10.05.07 12:17

    초등학교 때 소풍가서 뛰어 놀던 장천제! 천관산 맑은 정기!

  • 작성자 10.05.07 14:16

    애증의 벽을 깨고 長坐不臥 숙숙惺惺
    천관산 산들바람 적멸락에 이르네

  • 10.05.12 10:47

    호남의 5대 명상인 천관산 늘 보기에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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