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 때 향교는 웬만하면 빠트리지 않으려 노력한다. 이번 여정의 동선에 있는 향교 중 삼척, 동해, 강릉은 이미 전에 들렀었고, 이번에는 양양과 간성향교를 들렀다. 사실 향교건축에 대해 잘 알지 못하니 다 비슷해 보이고, 그나마 문을 잠가놓는 곳도 많아 ‘꼭 들러야 하나?’하는 회의가 들 때가 없지 않다. 하지만 그 지역의 역사를 생각할 수 있는 장소로 향교만한 곳이 없다는 생각 때문에 계속 향교를 찾고 있다. 향교 앞에 가능하면 지역 출신 학자들의 명단과 행적을 적은 설명판이라도 세워주면 좋으련만 기대하기 어려울 듯하다.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104호 간성향교(杆城鄕校)는 간성읍 교리 664번지에 위치한다. 정문으로 가보지만 문이 잠겼다. 이럴 때는 대개 측면으로 돌아 담장 너머로 명륜당과 대성전을 촬영하고 물러난다. 왼쪽으로 돌아가는데 담장도 제법 높고 걷기에도 어려움이 많다. 가벼운 실망감을 안고 오른쪽으로 돌아본다.
그런데 오른쪽에 문이 여럿 있고, 마침 어르신 한 분이 그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기에 따라 들어갔다. 향교 관리동 안에는 한 분이 계셨는데 관람을 요청하니 그러라고 한다. 현재 명륜당은 다시 짓기 위해 해체되어 있는 상태였다.
간성향교는 조선 세종 2년(1420)에 지은 것으로 보이며 그 위치는 성북 용연동으로 확인된다. 이후 여러 차례에 걸쳐 옮겼고, 임진왜란으로 불타 없어진 것을 다시 지었다. 한국전쟁으로 향교의 건물이 다시 불타자 1954∼1956년에 대성전과 동·서재, 대성문을 지었다. 이어 1960년에 명륜당, 1966년에 동·서무를 다시 지었고 1982년에는 외삼문을 세워 오늘에 이르고 있다.
건물 배치는 명륜당을 중심으로 양쪽에 동재·서재가 있고, 그 뒤쪽으로 대성전과 동무·서무가 배치되어 있다. 1961년에 세운 앞면 4칸 규모의 명륜당 안에는 ‘간성향교외삼문창건기(杆城鄕校外三門創建記)’를 비롯한 3개의 기문이 있다. 건물은 세월이 흐르면서 불타거나 낡아서 다시 짓거나 고쳤지만, 처음 지을 당시의 위패는 지금까지도 잘 모시고 있다고 한다.
간성향교의 특색은 아무래도 내삼문에 있는 것 같다. 대개 정면 3칸으로 구성되는 내삼문이 이곳에서는 삼문 바깥쪽으로 각각 2칸씩 확장되어 있다. 삼문 좌우로 각 1칸의 협문이 있고, 그 바깥쪽으로는 각각 祭器庫와 倉庫가 있다. 한편 임진왜란 때 임진왜란 때 향교의 위패를 지키고 난 후 재건을 주도한 선비들을 기리기 위해 순조 5년에 세워진 간성향교기적비(杆城鄕校紀蹟碑)가 간성읍 해상 2리에 있다고 하는데 아쉽게 들르지 못했다.
고성군 중에서도 거의 최북단에 가까운 현내면으로 달린다. 계속해서 통일전망대를 알리는 표지판이 나오지만 우리의 목적지는 그곳이 아니다. 마달리에 있다는 고성마달리석조여래좌상(高城馬達里石造如來坐像)을 만나러 가는 길이다. 정확한 주소지는 모르고 마달리마을회관, 또는 마달리 버스정류장 앞에 있다는 정보만 들고 가는 길이었다. 마을에 진입하니 마을회관이 보이고 그 건너편에 동네 어르신 세분이 담소를 나누고 있다.
차를 세우고 여쭤보니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버스정류장이 있고, 그 뒤에 있다고 한다. 마을회관에 있는 것으로 알고 왔다고 하니, 여기 보이는 것은 새로 지은 것이고 버스정류장 뒤에 원래 마을회관이 있었다고 한다. 천천히 고샅길을 걷는다. 머잖아 정류장이 보인다. 휴가를 가는 길일까? 군인 한 명이 정류장에 앉아 버스를 기다리는 모습이 애잔하다.
이 불상은 사전에 인터넷을 검색해 봐도 근래에 개인이 다녀온 뒤 결과를 올린 것을 찾을 수 없었다. 이 석불은 한참이나 북쪽으로 가야하고 허탕을 칠지도 모르지만 포기하면 안 된다는 것을 다시 일깨워주었다. 하긴 나의 걸음이 꼭 존재를 입증하려는 것만은 아니며 不在를 확인하는 旅程이기도 하므로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도 결코 의미 없는 일이 아니다.
불상은 다행히도 (구)마을회관 앞, 버스정류장 뒤에 자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불상을 바라보는 일은 가슴 아픈 것이었다. 여기저기 깨지고 닳아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운 것이야 어쩔 수 없는 운명이었다고 해도 아직도 아무런 보호 장치 없이,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하는 것처럼 방치되어 있어야만 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불상은 주변의 사지에서 옮겨 왔다는 전설 외에는 연혁이 자세하지 않다. 지금은 민간인 출입 금지 지역인 직골의 절터에 있었던 것을 마달초등학교 교사들이 떨어져 나간 佛頭와 함께 1970년도에 옮겨왔으나 佛頭는 도난당했다 고 한다. 대좌는 양분되어 있는데 파손이 심하다. 단엽 16판의 복련이 조식되었고, 상면에는 팔각형 2단의 받침이 조출되어 있다.
항마촉지인을 결한 석불은 머리가 결실되었고, 신체부의 파손이 심하다. 특히 오른쪽 팔과 어깨부분이 많이 훼손되었다. 법의는 뒷면의 옷 주름으로 보아 통견으로 보이는데 양 무릎 사이에 부채꼴형의 옷 주름이 남아 있다.
배면에는 왼쪽 어깨부에 치우쳐 원형의 매듭을 중심으로 4조의 의문이 밑으로 흐르면서 왼쪽 무릎으로 향하고, 다른 선은 원문의 바깥쪽에서 6조의 의문이 등을 타고 오른쪽으로 타원형을 그리며 선각되었다.
불상의 크기는 상고(像高) 75cm, 견폭(肩幅) 43cm, 흉폭(胸幅) 29cm, 슬폭(膝幅) 77cm, 슬고(膝高) 17cm이다. 대좌와 불상 모두 화강암을 사용하였으며 통일 신라말기에 조성된 것으로 생각된다고 한다. 현내면에는 마달초등학교 문관석과 명파리 문관석이 있다고 하는데 찾아보지 못했다.
고성의 마지막 답사처, 고성진부리사지(高城陳富里寺址)로 향한다. 간성읍 진부리 66-2번지에 위치하며, 간성향교 앞을 지나 인제 방향으로 나 있는 46번 국도변에 해당한다. 이 절터에 대해서는 문화유적총람, 한국사지총람 등의 자료에 나와 있는데 나는 문화유적총람 자료는 잊고 사지총람자료에만 의존했다. 사지총람 자료에 나와 있는 설명문은 다음과 같다.
진부리 민가 일대에 위치하고 있다. 근대까지 사찰이 있었으나, 현재는 사라지고 없는 상태이다. 민가 앞뜰에 석조유물 등이 남아있다. 연화문 대석은 도괴된 장명등 하부에 놓여 있는데, 팔각형으로 복엽 8판이다. 승탑이나 불상의 하대석으로 추정되며 연화문의 양식으로 보아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된다. 장명등은 조선시대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설명이 이러하였기 때문에 진부리복지회관에 차를 세우고 마을로 들어서자마자 눈에 들어온 석탑과 석등은 무시하고 말았다. 석탑은 알지 못했던 존재인데 근래의 작품이 분명한데다, 석등도 도괴되어 쓰러져 있다는 장명등과 쉽게 연결시킬 수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이 석물들은 민가 앞이 아니라 공터에 있었고, 다음지도는 이 공터와 길 하나를 둔 민가를 이 번지로 표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집과 그 윗집 정원을 열심히 찾아보았으나 연화문 대석은 발견할 수 없었다.
문화유적총람도 비슷한 설명이지만 몇 가지 추가정보를 주고 있다. ‘마을 주민에 의하면 스님이 이곳에 사찰을 건립할 목적으로 장명등 및 근년에 조성된 사사자 3층석탑 1기를 옮겨놓았다고 하나, 스님이 돌아가신 후 아무도 돌보는 이가 없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 설명문을 주의 깊게 보았다면 내가 찾는 연화문대석이 석탑 옆에 있는 장명등 하부에 있는 것이 맞는 것이다.
그 뒤 언젠가 도괴되어 있던 장명등을 다시 세웠나보다. 장명등 하부를 살폈어야 하는데 탑과 장명등 주위에는 불경(?)을 새긴 돌판이 가림막 역할을 하고 있었기에, 무엇보다 이 장명등이 내가 찾으려한 연화문대석 위에 있을 것이라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기에 자세히 살피지 못했다. 그러므로 그 연화문대석이 이 장명등 아래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지만 최종적으로 확인하지는 못하고 만 셈이다.
[인용 설명문 출처: 문화재청, 문화유적총람, 한국사지총람 上]
첫댓글 감사합니다. 인연 맺을 수 있을지...
언젠가 또 길 떠나시겠지요.
원래의 위치도 아니고, 저렇게 방치되는 상황이라면 고성문화원이나 군청으로라도 옮기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간성향교;간성읍 교동리 6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