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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이야기 스크랩 漢岩과 呑虛의 同異점 고찰
카페지기 추천 0 조회 69 13.07.25 23:0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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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岩과 呑虛의 同異점 고찰

 

윤창화ㆍ한암사상연구원, 민족사 대표

 

 

Ⅰ. 서 론

 

漢岩禪師는 鏡虛화상(1846-1912)의 法弟子로서, 근대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선승 가운데 한 사람이다. 네 번이나 종정에 추대될 정도로 근대 한국불교도들에게 존숭되었던 선승이다. 그리고 그의 제자 呑虛禪師 역시 현대 한국불교사에서 기록되고 있는 고승 가운데 한 사람이다(이후 존칭 생략함).

 

漢岩(1876-1951)과 呑虛(1913-1983)는 師資之間(37세 차이)이다. 呑虛는 입산 후 스승 한암이 열반하기 직전까지 약 16년 동안 오대산 상원사 선원에서 한암의 가르침을 받았다 그러므로 呑虛의 足跡은 당연히 漢岩과 거의 같은 방향, 같은 길을 걸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표면에 나타난 두 고승의 족적은 좀 다르다고 할 수 있다. 한암은 거의 시종일관 선승의 족적을 남겼지만, 탄허는 신화엄경합론과 육조단경, 보조법어 그리고 강원의 교재인 四敎, 四集 등을 번역, 간행하는 등 譯經과 교학, 승려 교육에 매진했다.

 

이와 같이 표면에 나타난 두 고승의 족적은 매우 다르지만 한편 한암과 탄허는 같은 儒生, 儒學者 출신이었으며, 修行觀, 불교관도 禪敎兼修, 禪敎(敎禪)一致, 定慧雙修를 지향했다. 그리고 사상적으로는 보조지눌(1158-1210)의 사상을 계승하는 등 내면적으로는 궤를 같이 하는 점도 적지 않다.

 

본고에서는 근현대 한국불교사에 큰 족적을 남긴 두 고승에 대하여 師資之間이라는 고리를 전제로 그 각각의 특성(別異)과 공통점(同)에 대하여 고찰해 보고자 한다.

 

 

Ⅱ. 漢岩과 呑虛의 특성-(異)

 

1. 漢岩--敎學에서 禪으로

 

漢岩은 유생 출신으로 22세1)에 금강산 장안사에서 錦月行凜 화상을 은사로 수계했다. 그의 儒學 계통은 현존하는 기록이 없어서 어느 학통인지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전통 유학자 집안 출신이었으므로, 유학의 정규과정을 이수한 다음 입산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9세 때 서당에서 ?史略?을 배우다가 ‘태고에 천황씨가 있었다’는 대목에 이르러 서당 선생에게 “천황씨 이전에는 누가 있었는지요”하고 묻자 선생은 “천황씨 이전에는 반고씨가 있었지”라고 대답했다. 이에 한암이 “그러면 반고씨 이전에는 누가 있었습니까” 하고 묻자 선생은 더 이상 대답을 못하고 머뭇거렸다는 것이다.

이후 한암은 ‘반고씨 이전에는 누가 있었을까’하고 화두처럼 생각하게 되었다”는 비문과 연보의 기록을 본다면, 22세에 입산할 무렵에는 최소한 정규과목인 7書(논어, 맹자,중용, 대학, 시경, 서경, 역경)는 모두 배웠을 것이고, 기타 역사서인 자치통감, 춘추 등도 배웠을 것으로 생각된다. 전통 유학자 가문에서는 보통 20여 세가 되면 7書 이상은 수학하기 때문이다.

한암은 입산 이후 산내 사찰인 신계사 普雲講會(보운강원)에서 전통 강원의 교과목을 공부하고 있었는데, 얼마 동안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가 입산 후 처음 만났던 것은 禪보다는 교학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그가 禪으로 방향을 바꾸게 된 것은 보조지눌의  "수심결" 의 一段 때문이다. 그는 당시의 심경을 자전적 구도기인 ?일생패궐?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1) 漢岩선사의 출가 연도는 1897년(22세)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19세 출가설이 있다. 1941년 4월, 당시 불교계는 조계종을 창종하여 총독부에 등록한 다음 6월 5일 31본산 주지회의에서 宗正을 선출했는데 漢岩스님이 압도적(19표)으로 선출되었다. 당시 월정사 주지 이종욱과 마곡사 주지 안향덕, 마하연 주지 원보산 등이 대표가 되어 상원사를 방문하여, 종정 취임 승낙을 받고 나서 관련 기사가 1941년 6월 6일자 《매일신보》에
〈宗正에 方漢巖老師〉라는 제목으로 보도되었는데, 보도 말미에 이종욱 스님은 “方스님이야말로 우리 불교계에서 가장 衆望이 높으신 어른이신 만큼 스님이 宗正자리에 계신다면 우리 불교계의 앞날은 새 광명을 맞이하는 것과 다름 없습니다. 스님은 금년에 예순여섯이시고 월정사에 오시기는 한 20년 전입니다. 그 전에는 평남 맹산 우두암에서 수도하셨고, 19세에 득도하신 분으로 정말 道人이십니다.” 또 한암선사께서 종정에 추대되자 당시 포교사 金大隱은 《불교시보》72호(1941년 7월 15일)에 〈大導師方漢巖禪師를 宗正으로 마지며〉라는 글에서 “(중략) 禪師는 方今66세의 耆宿長老로서 47년간을 修道하신 분이라 선사를 뵈옵기만 하여도 (중략) 일견에 白髮道眼에 慈悲가 흐르고 靑蓮紺目에 智光이 빛나시기는 전형적인 道人이라 누구든지 稽首瞻禮치 아니할 수가 없는 어른이다.” 이 글에서 ‘방금 66세’라는 말은 당시 한암선사의 年齒와 일치하고, ‘47년간 수도하신 분이다’는 것도 환산하면 19세 입산이 된다. 19세 출가설은 긍정적으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하겠다.

 

 

“내가 24歲 되던 己亥年(1899) 7月 어느 날 金剛山 神溪寺 普雲講會에서 우연히 普照國師의 著述 ?修心訣?을 읽다가, ‘만약 마음 밖에 따로 佛이 있고 性品 밖에 法이 있다는 생각에 굳게 執着하여 佛道를 求하고자 한다면, 비록 티끌과 같은 한량없는 세월(劫) 동안 몸과 팔을 태우며 云云, 내지 모든 經典을 줄줄 읽고 갖가지 苦行을 닦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마치 모래로써 밥을 짓는 것과 같아서 한갓 수고로움만 더할 뿐이다.’는 대목에 이르러, 나도 모르게 온몸이 떨리면서 마치 大限(죽음)을 맞이하는 것 같았다. 게다가 長安寺 海恩庵이 하룻밤 사이에 全燒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더욱더 無常한 것이 마치 타오르는 불과 같았다. (그리하여) 모든 계획이 다 헛된 일임을 절감하였다.”2)

 

2) 정본 한암일발록 상권 p. 268.

“余二十四歲己亥七月日, 在金剛山神溪寺普雲講會, 偶閱普照國師修心訣. 至若言心外有佛, 性外有法堅執此情, 欲求佛道者, 縱經盡劫, 燒身煉臂(云云). 乃至轉讀一大藏敎, 修種種苦行, 如蒸沙作飯, 只益自勞處, 不覺身心悚然, 如大恨(限)當頭. 又聞長安寺海雲庵, 一夜燒盡, 尤覺無常如火, 一切事業, 皆是夢幻.”

일생패궐 에 대한 연구로는 윤창화, 한암의 자전적 구도기 일생패궐 , ?한암사상연구? 제1집, pp.
191-270쪽 참고. 2006년.

 

보조국사 지눌의 ?修心訣?은 마음을 닦는 요체를 서술한 글로서, 강원의 정규 교과목은 아니다. 따라서 그가 ?수심결?을 읽은 것은 독자적으로 읽었다고 생각된다. 이어 그는 하안거를 해제하자마자 청암사로 가서 경허로부터 금강경 법문을 듣고 처음으로 眼光이 활짝 열리는 경지를 체험하게 된다.

 

 

“(신계사 강원에서) 夏安居를 마친 뒤 도반 含海禪師와 함께 짐을 꾸려 행각 길에 올라 점점 남쪽으로 내려가 星州 靑岩寺 修道庵에 도착하여, 鏡虛和尙께서 설하시는 金剛經 설법 중

‘무릇 모습을 갖고 있는 것은 다 허망한 것이다. 만일 모든 형상이 相이 아님을 간파한다면 (그대는) 곧 바로 如來를 볼 수 있을 것이다.’는 대목에 이르러, 문득 眼光이 확열리면서 삼천대천세계가 눈 속으로 들어오니, 모든 事物이 다 자기 아님이 없었다.”3)

 

3) 정본 한암일발록 상권 p. 268.

“解夏後, 與同志含海禪師, 束裝登程, 漸次南行, 至星州靑岩寺修道庵. 參聽鏡虛和尙, 說,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眼光忽開, 盖盡三千界, 拈來物物, 無非自己.”

 

 

이상이 한암이 경전공부 즉 교학을 그만두고 禪으로 방향을 바꾸게 된 경위인데, ‘문득 眼光이 확 열리면서 삼천대천세계가 눈 속으로 들어오니, 모든 事物이 다 자기 아님이 없었다”는 것은 임제의현이 말한 ‘立處皆眞’과 상통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 날 한암은 경허화상과 함께 해인사 선원으로 가서 그해 동안거를 보낸다. 1903년(28세)까지 타 선원에서 한두 철 정진한 것을 제외하고는 줄곧 해인사 선원에서 머물다가, 1903년 28세 때 드디어 당시 조실인 경허화상로부터 “開心의 경지를 넘었다”는 인가를 받게 된다. 그리고 다음 해에 통도사 내원암 조실을 거쳐 1910년-1912년까지는 맹산 우두암에서 혼자 정진한다.

 

이어 1921년에는 건봉사 萬日院 선원의 조실, 그리고 1923년에는 봉은사 조실로 있다가 1925년 50세에 이르러 “내 차리리 천고에 자취를 감춘 학이 될지언정 말 잘하는 앵무새는 되지 않겠다‘는 말을 남긴 뒤 봉은사 조실을 그만두고 오대산 상원사로 칩거한다.

 

이후 한암은 두문불출, 오로지 상원사 선원에 定住하면서 修禪하고자 하는 납자들을 지도했다. 조계종이 창종(1941년)되어 종정에 추대되었지만 서울로 나가지 않을 정도로 선승으로 일관된 足跡을 남겼다. 한암의 족적을 본다면 그는 ‘교학에서 선으로’ 옮겨갔다고 할 수 있다.

 

 

2. 呑虛--禪에서 敎學으로

 

반면 그의 제자 呑虛는 스승 한암과는 달리 ‘선에서 교학으로’ 방향을 바꾸었다고 할 수 있다. 禪보다는 교학 부분에서 많은 足跡을 남겼다. 그의 업적은 전통강원의 교과목인 沙彌科, 四集科(서장, 도서, 절요, 선요), 四敎科( 능엄경, 기신론, 금강경, 원각경) 교재를 비롯하여 대교과인 화엄경과 그리고 그 주석서인 청량징관의 화엄경소초 와 이통현의 화엄론까지 완역, 간행했으며, 선어록인 육조단경과 보조법어도 번역 간행했는데, 근현대 불교사에서 量的인 면에서 한 개인이 행한 譯經佛事로는 최대의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4)

 

4) 근현대 개인이 행한 역경불사로는 백용성, 김대은, 안진호, 운허스님, 탄허 등이 있으나 그 가운데서도 量的인 면에서 가장 많은 량의 경전을 번역, 간행한 것은 탄허이다. 특히 그는 자신이 번역한 경전을 모두 직접 출판, 간행했다.

 

또 탄허는 1956년(44세)부터 오대산 월정사와 삼척 영은사에 수도원을 개설하여 인재 양성과 승려 교육에도 적지 않은 심혈을 기울였다. 탄허가 이와 같이 교학과 譯經, 그리고 교육에 매진했던 것은 인재 양성을 통하여 불교, 더 나아가 한국사회를 다시 일으켜 세워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항상 “孔子가 16년 동안 周遊天下했던 것은 정치를 통하여 천하를 바로잡아 보고 싶어서였다. 그러나 그것이 불가능함을 깨닫고 만년에는 교육에 전념하여 많은 제자를 양성했는데, 만일 그가 정치를 했더라면 오늘날 공자는 없었을 것”이라고 하여, 항상 공자처럼 제자, 인재를 양성해보고자 했다.5)

 

5) 공자와 인재양성 등에 대해서는 필자가 7-8년동안 시봉하면서 수없이 들은 말이다. 그는 신화엄경합론과 四敎?장자?노자도덕경?출판이 끝난 다음에는 다시 수도원을 개설하고자 했으나 건강이 점점 악화되어
실행할 수 없었다.

 

오대산 수도원은 1956년 봄에 개설했는데, 수강 인원은 약 20여 명이었으며, 자격은 승속을 가리지 않고 대학졸업자나 유교의 6經 수료자, 대교과 졸업자 이상이었다. 졸업기간은 5년이었고 숙식은 모두 월정사에서 제공했으며, 교육과목은 修禪, 看經, 중국의 九流哲學이었고, 교재는 화엄경  기신론  영가집  능엄경 장자? ?노자도덕경? ?주역선해?등이었다. 모든 강의는 탄허 자신이 직접 맡아했는데, 하루에 적게는 6시간, 많
게는 8시간을 강의했다.6)

6) 김광식(2004) pp. 288-289.

 

월정사가 6·25동란으로 인하여 완전히 전소되고 끼니도 근근이 연명해 가고 있는 상황 속에서도 수도원을 개설했는데, 이것은 인재 양성에 대한 필요성이 매우 절실했기 때문이었다.
오대산 수도원이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3년 만에 문을 닫자 수도원을 다시 삼척 영은사로 옮겨서 3년 동안 계속했는데, 사찰의 재건 못지않게 인재 양성도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탄허는 절을 세우는 것이야 언제든 가능하지만 ‘敎育은 百年大計’로 못해도 10년은 가르쳐야만 효과를 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탄허는 본래 문자나 교학에 뜻을 둔 것은 아니다. 이미 漢學을 마치고 들어온 입장이었으므로 학문을 위한 입산은 아니었다. 또 입산처가 선원이었으므로 경전공부를 할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그가 선원 출신으로서 교학을 겸하게 된 것은 스승 한암의 권유가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내가 오대산 상원사에 온 것은 22세 때이다. 처음 3, 4년간은 일체 경전이나 문자를 보지 않았다. 그것은 선방의 당연한 관례였고, 또 선방에 온 사람으로서 당연한 자세였다.
그런데 얼마를 지나자 우리 스님이신 한암 노화상께서 나에게 이렇게 권하셨다. ‘道가 문자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글을 아는 사람은 일단 經을 봐야 한다.’ 몇 번인가 권하셨다. 스님께서는 내가 문자에 빠질 사람이 아니라고 인정하신 모양이었다. 그래서 나의 성장을 위하여 반드시 부처님의 經敎와 祖師의 말씀을 보라고 권하셨다.”7)

7) 탄허법어집, 방산굴법어 p. 74. 화엄경의 세계 ,

 

 

한암은 탄허로 하여금 먼저 경전(교학)을 본 다음 禪을 참구하게 하고자 한 것인데, 그 이유는 불제자라면 경전은 읽어야 하고 다음에는 ?금강경, ?화엄경, ?기신론 등은 선의 중요한 경전이므로 그것을 읽은 다음에 참선을 하도록 한 것이다. 그것이 순서이고 또한 삿된 길로 빠지지 않는 正道였기 때문이었다.

또 탄허가 신화엄경합론?능엄경?기신론?금강경 오가해 등 많은 경전을 번역, 간행한 것도 직접적으로는 오대산 수도원의 교재로 쓰기 위한 것이었지만, 간접적으로는 스승 한암의 권유도 있었다.

 

 

“그때 스님(한암스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시기를 ‘꼭 이 화엄경합론을 吐를 달아서 출판 보급했으면 좋겠다.’는 말씀이었다. 또 스님께서는 ‘화엄론' 은 참선하는 사람이 아니면 볼 근기가 못 된다.’고 말씀하셨다. 40년이 지난 근년에 내가 화엄경 번역을 완료한 것은 그때의 우리 스님의 부촉이 종자가 되었던 것이다. 결국 나는 스님의 부촉에 몇 배를 더 해서 완성한 셈이다.

?화엄경을 번역하게 된 직접 동기는 지금부터 25년 전(1956년)이다. 그 때 나는 오대산 월정사에서 ‘대한불교 조계종 오대산 수도원’을 설립하여 30여 명에게 강의하고 있었다. 수도생을 위하여 화엄학을 중심으로 교수하고 있었는데 그 기초 과정으로 永嘉集, 起信論?또는 능엄경 을 가르쳤다. 그래서 어느 정도 수준에 오른 다음에 화엄경합론을 공부하기로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특강으로 老莊學이나 周易 등을 간간이 했었다. 5개년 계획으로 추진되었는데 종단 내부의 분규로 중도에 와해되었다. 그때 수도생들을 위하여 준비한 교재가『화엄경합론』이었다. 그 뒤 일을 진행하면서 총 17년이 걸렸는데, 마지막 華嚴經論?疏 를 합하여 정리하는 데만 만 9년이 걸렸다.”8)

8) 탄허법어집, 방산굴법어 pp. 77-78. 화엄경의 세계 ,

 

 

탄허가 경전을 번역, 간행하는 등 상당 기간 교학에 몸을 담았지만 전통강원에서 교학을 전공했다거나 또는 전통강원의 강사로 경전을 강의한 적은 없다. 그가 경전을 공부한 것은 스승 한암 밑에서 한 것9)이고, 또 처음으로 경전을 강의한 것은 1956년 봄 오대산 월정사에 개설된 오대산 수도원에서였다. 그러므로 그가 교학 부분에 전념했던 것은 승려교육과 인재 양성을 위한 방편이었을 뿐, 講師로서 교학을 전념하고자 한 것은
아니다.

 

9) 탄허는 스승 한암의 권유로 박한영스님에게 가서 경전을 배우고자 편지를 보냈으나 마침 상원사에 강원도 삼본산 승려 연합수련소가 설치되어 禪敎를 兼修하게 되자 한암으로부터 배우게 된 것이다. 탄허는 그 사실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방산굴법어 p. 74.

“당대에 대강사는 朴漢永스님이었다. 나는 (한암)스님의 말씀에 따라 박한영스님에게 가서 경을 배우기로 하고 편지를 냈더니 ‘한암스님 같은 대덕고승을 모시고 있는 분이 나에게까지 배우러 올 것은 없소.’ 하는 내용의 편지가 왔다. 그러나 그것을 불구하고 떠나기로 하자 스님께서 온갖 준비를 해 주셨다.

그때 내 나이 24세였다. 그런데 때마침 강원도 지사인 孫永睦씨가 주동이 되어 강원도 삼본산 승려연합수련소를 오대산 상원사에 개설(1936)하게 되었다. 오대산 상원사에 수련소가 개설되자 助敎, 즉 中講이 필요했다. 조교의 적임자로 내가 지목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강원으로 떠날 수가 없게 되었던 것이다. 한문을 배웠다는 탓도 있거니와 다들 나를 아껴 주었기 때문이었다. 나 역시 선방만 있을 때는 경을 볼 생각을 안 했지만 선원이 수련소가 되었으니 경을 볼 수 있는 터라, 그럴 바에야 스님 밑에서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을 포기하였다.”

 

 

탄허의 經典觀은 다분히 宗旨 즉 大義 중심, 또는 禪의 관점에서 경전을 보고자 하는 입장이다. 물론 이는 전통강원의 교재인 四集(서장, 도서, 절요, 선요)과 四敎(능엄,기신, 금강, 원각경)가 대부분 禪의 경전이고 그 주석서 역시 선의 입장에서 해석한 주석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와 관계없이도 大義 중심, 또는 禪의 입장에 있음을 볼 수 있다.

 

그 한 예로 그의 대표적인 번역이라고 할 수 있는 화엄경의 경우 우리나라 강원의 교재인 청량징관의 화엄경 소초 보다는 이통현의 화엄론 중심으로 번역했는데, 그 이유는 청량징관의 화엄경 소초는 자구 해석 중심이지만, 이통현의 화엄론은 宗旨 즉 大義를 밝히는 데 역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화엄경을 현토 번역하면서 이통현의 화엄론은 번역은 물론 원문까지 수록했으나 화엄경 소초는 필요한 것만 선별적으로 번역하여 삽입했다.

 

<표 1>
漢岩의 足跡 : 儒學-입산(장안사) 교학(신계사 강원)-禪==敎禪一致.
呑虛의 足跡 : 儒學-입산(상원사) 禪 (상원사 선원)-교학==禪敎一致.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師資之間의 足跡을 본다면 스승 한암은 교학에서 선으로 방향을 바꾸었고, 그의 제자 탄허는 선에서 교학으로 방향을 바꾸었다고 할 수 있다. 한암은 ?수심결?과 금강산 해은암 전소 사건으로 일체가 무상함을 느끼고 禪에서 자신을 발견했고, 탄허는 인재 양성과 교육을 통하여 미래의 한국불교를 새롭게 해 보고자 했다고 할 수 있다. 한암은 종교적 자아의식이 더 강했고, 탄허는 역사의식이 더 강했다고 할 수 있다.

 

 

Ⅲ. 한암과 탄허의 공통점-(同)

 

1. 유학자 출신

 

지금까지 한암과 탄허의 특성 즉 다른 점에 대하여 고찰했다. 다음에는 공통점, 상통하고 있는 점에 대하여 고찰해 보고자 한다.

한암과 탄허는 모두 유생, 유학자 출신이다. 한암의 儒學 계통은 잘 알 수 없지만, 9세 때 이미 史略을 배울 정도였다면 입산할 무렵(22세)에는 보통 유생들이 학습하는 7書 혹은 13經까지는 보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탄허 역시 유생, 유학자 출신이다. 그의 學統은 면암 ‘최익현-전간제- 이극종’ 계통으로 이어지는 기호학파이다. 祖父로부터 한학을 했으며 다시 기호학파의 이극종으로부터 詩經, 書經 등 유학의 고급과정을 이수한 다음 입산했다. 그가 상원사로 입산하기 전 약 2년 동안 한암과 약 20여 통의 서간을 주고 받았는데, 현존하는 서간은 초창기 서간 두 통이다.

 

 

탄허가 한암에게 보낸 서간 (1)

 

“속생 금택은 글을 올리나이다. 거룩하신 모습을 뵙지 못하고 당돌하게 글을 올리게 되어 참으로 황공하여 몸 둘 바를 모르겠나이다. 스님을 우러러 존경하는 저의 마음은 잠시도 쉼이 없으나 다만 마음과 꿈을 통하여 오고 갈 뿐 미칠 길이 없나이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존후만복하시며 도를 닦는데 조용하고 정숙하시어 날마다 바다처럼 넓고 하늘처럼 높은 氣象을 가지고 계신 듯합니다. 흠모하여 우러름을 어쩔 줄 모르겠나이다.
속생 금택은 본디 정읍의 천한 출신으로 湖西에 흘러온 지가 이제 4년이 되었습니다. 나이는 20세로서 근기가 박약하고 배운 것도 형편없어 도를 듣는다 해도 믿지 못하고 도를 믿는다 해도 돈독하지 못하여

구슬을 품고도 구슬을 잃어 버리거나 나귀(騎驢)를 타고서도 나귀를 찾는 허물이 있으며, 또 쇠(鐵)를 銀으로 부른다거나 벽돌을 갈아(磨?) 거울로 만들려는 병폐에까지 이르렀사오니 참으로 탄식할만 하옵니다.

(,,,,,,)
詩經에서 “마음에 근심됨이 때 묻은 옷을 입은 것과 같다.”고 했는데, 이는 바로 俗生을 두고 한 말인 듯합니다.

(,,,,,,)
돌아보건대 저는 기질이 나약하고 心志가 굳지 못하여 훌륭하신 발자취 따라가는 것조차 감당 못하오니, 오직 바라는 바는 다행이 長者의 가르침을 얻어서 그 허물을 적게 하는 것 뿐이옵니다.

그러나 사람됨이 이와 같사오니 君子께서 기꺼이 더불어 말씀해 주실런지요?

執下께서 만일 버리시지 않고 가르쳐 주신다면 俗生의 지극한 소원을 다하였다고 할 만합니다. 

임신년(1932) 8월 14일 금택 상서10)

 

10) 방산굴법어 pp. 161-165.

"俗生金鐸, 白. 未?德儀, 遽以書?, 誠惶誠恐, 莫知措躬. 而自以區區素仰, 殆未弛於食息, 只有心夢往來而莫之及也.

伏惟. 尊候萬福, 結珠煉丹, 從容精熟, 日有海?天高底氣象否. 無任欽??賀之至.
俗生金鐸, 素以井邑賤?, 流落湖西, 四載於此. 年今二十, 根淺而學疎, 聞道不信, 信道不篤,

多有懷珠喪珠, 騎驢覓驢之失, 因致喚鐵作銀, 磨?成鏡之病, 良可嘆也.

(加以家累外聞, 人慾日肆, 耳蕩於聲, 目眩於色, 比如牛山之木, 已被斧斤之伐, 而又爲牛羊之牧, 非無雨露之所潤, 而萌孼不得以長焉, 其餘存者, 鳴呼幾何.)

詩云心之憂矣. 如非澣衣, 正是俗生之謂也.

(自顧身邊, 如是可憐, 竟作河漢同歸, 那得磨白浦, 濯垢滌塵, 洗心淨念, 永受淸福於三淸界二大宮耶. 何其執下, 有此淸福, 入山修道, 脫?忘世. 雖欲從之, 末由也己. 當?明春, 晉謁爲計, 而塵緣未盡, 道路且遠, 亦不可必也.)

顧此氣質懦弱, 心志搖揚. 未堪當途循轍, 唯其所望者, 幸得長者之敎, 以補其過.

然而爲人如是, 君子肯與之語哉.

執下?不置疎棄而辱敎之則俗生之至願, 可云畢矣.

壬申年(1932) 八月十四日金鐸上書"

 

 

한암의 답서(1)

 

“보내온 글을 자세히 읽어보니 족히 道에 향하는 정성을 보겠습니다.

장년의 호걸스러운 기운이 넘쳐서 하는 일이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도 모를 때에 능히 장부의 뜻을 세워 위없는 도를 배우고자 하니 宿世에 심은 善根이 깊지 않으면 어찌 능히 이와같으리오.

매우 가상하고 가상하네.
그러나 道는 본래 천진하고 또한 일정한 方所가 없어서 실로 배울만 한 것이 없소이다. 만일 생각을 두어 도를 배우고자 한다면 도리어 도를 迷함이 되나니, 오직 당사자의 한 생각 진실함에 있을 뿐입니다. 또한 누가 도를 모르리오 마는, 알고도 실천을 하지 않기 때문에 도가 저절로 사람에게서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
시끄럽다고 하여 고요한 것을 구하거나, 속됨을 버리고 참됨을 찾을 것이 없소. 항상 시끄러운 데서 고요함을 구하고 속됨 속에서 참됨을 찾아서, 구하고 구하여도 구할 것이 없는 데 도달하면, 시끄러움이 시끄러운 것이 아니요, 고요함이 고요한 것이 아니며, 속됨이 속된 것이 아니요, 참됨이 참된 것이 아닌 경지에 이르게 될 것이네. 졸지에 끊어지고 단절될 것이니 이러한 시절을 무어라고 말해야 하는가.

이것이 이른바 한 사람이 虛를 전함에 만 사람이 實을 전하는 도리네. 그러나 간절히 바라노니, 잘못 알지 말게. 한 번 웃노라.”11)

 

11) 정본 한암일발록 상권, pp. 342-345.

"細讀來書, 足見向道之誠也.

年壯氣豪, 作業不識好惡之時, 能立丈夫志, 欲學無上道, 非宿植善根之深, 焉能如是.

多賀多賀.

然, 道本天眞, 亦無方所, 實無可學. 若情存學道, 却成迷道, 只在當人, 一念眞實而已. 且孰不知道, 知而不行故, 道自遠人.

(,,,,,,)

不必鬧求靜, 棄俗向眞. 每求靜於鬧, 尋眞於俗, 求之尋之, 到無可求無可尋之處, 則自然鬧不是鬧, 靜不是靜, 俗不是俗, 眞不是眞. 猝地絶爆地斷矣. 到恁?時, 喚甚?道.

是可謂一人傳虛萬人傳實. 然, 切忌錯會. 一笑."

 

 

한암의 답서 (2)

 

“보내온 글을 두 번 세 번 읽어보니 참으로 일단의 좋은 문장과 필법이네.

구학문이 파괴되어 가고 있는 때를 당해서 그 文辭의 機權과 의미가 부처님도 매료될 정도이네.

먼저 보내온 글과 함께 산중의 寶藏으로 삼겠네.

公의 재주와 덕행은 비록 옛 성현이 나오더라도 반드시 찬미하여 마지않을 것이네.

능히 있어도 없는 듯하고 차 있어도 비어 있는 듯이 하니, 어느 누가 그 高風을 景仰하지 않겠는가.

나는 평소에 吟詠에는 능하지 않지만 이미 心月이 서로 비추어서 묵묵히 그냥 있을 수가 없네.

이에 되지도 않은 문장을 엮어 보내니, 받아보고 한 번 웃게.”12)

 

12)정본 한암일발록 상권, pp. 342-345.

"蒙賜書, 披讀再三, 好一段文章筆法.

當此舊學問破壞之時, 其文辭之機權意味, 何若是魅佛耶.

竝前書, 留爲山中之寶藏耳.

如公之才德, 雖古聖出來, 必贊美不已也.

而能從事於有若無實若虛, 孰不景仰其高風哉.

小衲素不能於吟詠, 而已爲心月相照, 不可以默然.

故, 玆構荒辭而呈, 幸賜一笑焉."

 

 

위의 서간에서 본다면 한암과 탄허는 이미 두 번째 서간에서 마음이 상통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한암의 답서(2) 끝에 ‘나는 평소에 吟詠에는 능하지 않지만 이미 心月이 서로 비추어서 묵묵히 그냥 있을 수가 없네(小衲, 素不能於吟詠, 而已爲心月相照, 不可以默然).’라는 대목이 그 사실을 입증해 주고 있다.

‘心月이 서로 비춘다’는 것은 의사가 100% 소통되고 있다는 뜻이다. 이와 같이 한 두 편의 서간에서 心月이 相照하고 있다면 그것은 무엇보다도 意氣가 상통했기 때문이고 그 바탕은 같은 유학자, 한학자 출신으로서 언어가 상통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2. 禪敎兼修, 禪敎一致

 

한암과 탄허는 모두 禪敎兼修, 禪敎(敎禪)一致를 志向했다. 물론 이것은 禪이 主가 되고 敎가 從이 되는 입장에서 禪敎兼修, 禪敎(敎禪)一致를 지향한 것인데, 그 이유는 선승도 교학적 바탕이 없으면 暗(闇)證禪, 盲禪, 無知禪으로 흐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사실 오늘날 우리나라 참선 수행자들의 가장 큰 문제점은 선에 대한 지식이나 교학적인 바탕 없이 처음부터 무작정 앉아 있는 경향이 많다는 것이다. 화두를 참구하는 구체적인 방법도 잘 모른 채 앉아 있는 것으로 선을 삼고 있고, 용맹정진, 장좌불와 등 무지한 방법을 가지고 수행의 척도로 삼고 있다.

 

그리고 참선 수행에서 가장 범하기 쉬운 오류가 깨달음에 대한 환상과 착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적지 않은 수행자가 깨달음에 대한 환상에 젖어 있고, 무엇이 정도(正道)이고 정각(正覺, 바른 깨달음)인지 잘 모르는 상태에서 참선수행을 하는 경우가 많다. 신체적 정신적 신비주의나 환영(幻影), 환시(幻視) 등을 깨달음의 前 단계 쯤으로 여기는 경우도 있고, 약간의 정신적 신체적 특이 현상이나 특별한 증세가 나타나면 곧 깨달았거나 또는 깨달은 것으로 오판한다.

 

객관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수행 방법과 깨달음을 가지고 깨달았다고 자칭하는 것, 혹은 그런 수행자를 암선(暗/闇禪)ㆍ암증선(暗/闇證禪)ㆍ암증선사(禪師)ㆍ암증비구(暗證比丘)ㆍ암증법사(暗證法師)ㆍ암선자(暗禪子)라고 하는데, 곧 맹선(盲禪, 눈이 먼 것), 무지선(無知禪)이다.

‘암증선’이라는 말을 처음 쓴 것은 천태지의(538-597)이다. 그는 법화경 주석서인 마하지관  5권에서, 무지한 채 그냥 앉아 있기만 하는 어리석은 선 수행자를 일컬어 ‘암증선사(暗證禪師)’라고 했고, 경전에만 매달리고 있는 교학승을 ‘문자법사(文字法師)’라고 규정했다. 천태지의의 이 말을 다시 해석하여 정의한다면 禪敎兼修라고 할 수 있다.

한암은 禪敎兼修의 필요성에 대하여 보조법어 纂集 重刊序文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보조선사가 후학을 연민히 여기시어 경책, 분발시키심이 매우 간절하셨다. 그래서 그 연민히 여기고 경책, 분발시키고자 하는 뜻을 同志들과 더불어 같이하고자 몇 편의 법어를 편찬하였는 데, (,,,,,,)

어떤 이가 말하기를, ‘西來의 密旨는 문자와 관계가 없는데 요즈음 마음을 닦는 이들로 하여금 말이나 기억하고 구절이나 좇아서 無明을 조장시키는 것이 옳은 일이겠는가?’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다만 글과 말에만 집착하기만 하고 성실하게 참구하지 않는다면 비록 대장경을 모조리 열람하더라도 마구니나 도깨비가 될 것이다.
그러나 만약 본색납자가 言下에 핵심을 알아서 正眼이 활연히 열리면 길거리에 흘러다니는 이야기와 재잘거리는 소리라도 훌륭한 法要를 설함이 될 수 있거늘, 하물며 우리 조사께서 直截하게 설하신 가르침은 당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까닭에 남의 비방과 싫어함을 마다하지 않고 이 일에 주력하여, 함께 修禪하는 이들로 하여금 수시로 열람하여 깊은 뜻을 체득해서, 入道의 宗眼을 삼게 하고자 합니다.(,,,,,,)13)

 

13) 보조법어 纂集重刊序.

“普照禪師, 憐悶後學, 策發痛切. 故, 其憐悶策發之意旨, 有與同志共之之思, 纂集其幾篇法語.

而自昧識淺, 敢懸其吐, 以貽同住道伴矣.

或曰. 西來密旨, 非關文字, 今使心學者, 記言逐句, 以助無明可乎.

余曰. 但執文言而不如實參究則雖閱盡大藏, 猶爲魔魅,

若本色人, 言下知歸, 豁開正眼則街談燕語, 善說法要, 況我祖師, 直截警誨耶.

是以, 不避譏嫌, 力主此事, 使同行禪者, 時常披玩而體得奧旨, 以爲入道之宗眼矣.”

 

 

한암이 상원사 선원에서 보조법어를 찬집, 간행하고자 한 것은 보조의 禪敎兼修가 수행의 올바른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납자들에게 보조법어를 읽게 하여 선수행, 간화선의 지침서로 삼고자 한 것인데, 특히 보조법어 속에는 화두 참구에 대하여 비교적 구체적으로 논하고 있는 ?간화결의론?이 들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납자들 간에는 이 문제로 이론이 좀 있었던 것 같다. 즉 ‘祖師西來의 密旨는 불립문자인데, 지금 보조법어를 간행한다면 그것은 납자들로 하여금 말이나 기억하고 언구나 좇아서 無明을 조장시키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었다.

한암은 이에 대하여 ‘정안이 활짝 열리면 세속의 雜言도 법문이 될 수 있는데, 하물며 조사께서 直截하게 설하신 말씀이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느냐’는 것이다. 보조법어야말로 진정으로 납자들이 읽어야 할 어록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남의 비방과 싫어함을 마다하지 않고 이 보조법어를 간행하는 것이니 수시로 열람한다면 깊은 뜻을 체득해서, 入道의 宗眼이 될 것’이라는 것이다.

한암의 이러한 입장은 매우 정확한 안목이다. 그의 이러한 입장을 선교겸수, 선교일치 등으로 표현할 수 있는데, 그가 1936년 6월 오대산 상원사 선원에 강원도 삼본사 승려연합 수련소(유점, 건봉, 월정사)를 설치, 개설한 것도, 그 목적이 禪敎兼修를 통하여 훌륭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것이었다.14)

 

한암은 당시 수련소에 소속된 승려가 아닌 선원 대중들에게 의무적으로 경전 강의를 들으라고 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항상 수좌들이나 제자들에게 참선과 동시에 경전을 볼 것을 권유했다. 또 한암은 갓 수계 받은 사람들이나 납자들도 원하면 개별적으로도 금강경, 능엄경 등 경전을 강의해 주었으며15), 점심 공양 후 소참법문 때는 항상 금강경을 강의했다는 것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16)

 

14) 탄허법어집 방산굴법어 p. 496쪽 1936년조 연보 참조.

15) 한암문도호회 김광식 편(pp.113-114)
16) 김호성(pp. 78쪽)

 

또 그는 ‘승려라면 參禪, 念佛, 看經, 儀式, 伽藍守護 이 다섯 가지는 겸비해야 한다는 관점에서 승가오칙17)을 강조했는데, 이 속에도 看經이 들어가 있다. 이와 같이 한암은 선승이면서도 경전과 교학의 필요성을 중시했는데, 이것은 당시 선승 가운데서는 드문 경우이고 경허의 여러 제자 가운데서도 유일하다.
흔히 우리나라 선승들의 생애나 수행, 悟道 과정을 서술할 때 대부분 捨敎入禪했다는 말을 쓰고 있지만, 사실 한암은 교학을 배척하거나 경시하지 않았다. 그는 선교겸수를 修證法으로 삼았다.

 

17) 정본 한암일발록 상권 pp. 126-129. 승가오칙은 한암이 평소 대중들에게 피력한 것으로서 參禪, 念佛, 看經, 儀式, 伽藍守護이다.

 

 

그가 입산한지 2년 무렵 신계사 강원에 있다가 ?수심결?의 한 문구에서 느낀 바가 있어서 강원을 그만두고 경허를 찾아간 것이 표면적으로는 捨敎入禪한 것 같이 보이지만, 그것은 “만약 마음 밖에 따로 佛이 있고 性品 밖에 法이 있다는 생각에 굳게 執着하여 佛道를 求하고자 한다면, 비록 티끌과 같은 한량없는 세월(劫) 동안 몸과 팔을 태우며 云云, 내지 모든 經典을 줄줄 읽고 갖가지 苦行을 닦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마치 모래로 밥을 짓는 것과 같아서 한갓 수고로움만 더할 뿐이다(心外有佛, 性外有法 堅執此情, 欲求佛道者, 縱經盡劫, 燒身煉臂(云云). 乃至 轉讀一大藏敎, 修種種苦行, 如蒸沙作飯, 只益自勞)”라고 하는 대목에서 ‘마음이 곧 부처(卽心是佛)’이고 ‘성품이 곧 法(性卽是法)’이라는 사실을 깊이 인식했기 때문에 순서를 바꾸어 禪을 먼저 하게 된 것일 뿐 교학을 배척한 것이 아니다.

 

한암이 진정으로 교학을 배척하거나 경시했다면 훗날 상원사 선원의 조실로 있으면서 납자들이나 제자들에게 경전을 보라고 권유할 까닭이 없다. 한암은 선승도 선과 교를 함께 공부해야만 올바른 수행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본 것이다. 禪修行의 방법은 좌선이지만,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는 반야지혜를 성취하는 데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의 제자 呑虛 역시 선교겸수, 선교일치를 志向했다. 그는 한암보다도 더 적극적으로 선교겸수를 실천했다고 할 수 있다.

탄허가 상원사 선원의 선승 출신으로서 1956년(44세)부터 오대산 월정사에서 수도원을 개설하여 화엄경, ?영가집, 기신론, 금강경 등 교학을 강의했고, 또 삼척 영은사에서도 수도원을 개설하여 강의했는데, 이것은 선수행에 교학을 끌어들인 경우라고 할 수 있다. 그는 항상 경전이나 교학을 강의를 할 때, ‘宗旨를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핵심, 요체를 파악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그것은 종이나 넘기는 것에
불과하고 복을 짓기 위한 독송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마음을 깨닫기 위한 看經이라고는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 탄허는 자주 제자들이나 학인들에게 “마음을 반조하지 않으면 경을 보아도 이익이 없다(心不返照, 看經無益)”고 했는데, 이것은 모든 경전을 心法의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모든 경전 특히 대승경전은 心法 즉 번뇌 망상 등 마음의 존재에 대한 규명이고, 마음을 깨닫기 위한 방법을 제시한 것이다. 따라서 心法의 관점에서 경전을 보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무리 看經하고 교학을 해도 祈福 외에는 별 의미는 없는 것이다.

탄허의 宗旨論, 또는 心法 중심의 간경 방법은 그가 선승 출신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이미 앞(呑虛--禪에서 敎學으로 끝부분)에서도 언급했지만, 그의 대표적인 번역서라고 할 수 있는 화엄경에서도 알 수 있다. 즉 그는 화엄경을 번역하면서 청량징관의 화엄경 疏? 보다는 이통현의 화엄론 중심으로 번역했는데, 이는 이통현의 화엄론은 宗旨 즉 大義를 밝히는데 역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Ⅳ. 唐宋 叢林(선원)의 禪敎兼修

 

한암과 탄허의 修證法인 禪敎兼修는 당송시대 선종사원(선원총림)에서 실천했던 수증법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즉 당송시대 선원총림에서는 藏殿(장경각)을 두어 납자들로 하여금 필요하면 마음대로 경전 탐독을 할 수 있도록 했고, 또 그 소임자인 知藏을 두어서 관리, 대출하게 했다. 선원총림의 藏殿은 대장경 보관소가 아니고, 경전 등 전적을 대출,독서하는 도서관 기능이 주 기능이었다. 다만 좌선하는 선당 안에서만 금했던 것이다.

 

현존하는 청규 가운데 가장 오래되었으며, 자료적 가치가 높은 宋初  장로종색 선사가 편찬(1103년)한 禪苑淸規와 후대인 元代에 편찬(1338년)된 동양덕휘의 勅修百丈淸規 등을 고찰해 보고자 한다.

 

먼저 장로종색의 선원청규 4권에 있는 ?藏主? 章에는 장경각 소임을 담당하고 있는 藏主(知藏)의 임무와 책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는데, 눈여겨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藏主(知藏)는 金文(경전)을 관장한다. 정식으로 ?案(책상)을 마련하고 茶湯(차)과 油火ㆍ香燭(등불)을 준비하여야 한다. 殿主(藏主, 知藏)는 잘 도모하여 총림의 통로(거리, 길목)에 알림장을 붙이되 本寮(승당, 선당) 및 경전을 보고자 하는 대중들이 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대중들이) 책상을 청하는 법(간경하고자 책상을 청할 때 예의)은 먼저 간경당 수좌(장주)에게 자리(案位)가 있는지 여부를 물은 다음 청한다. 만일 자리가 있으면 곧 장주를 보고 말한다.”18)

18) 장로종색 편, 선원청규 4권, 장주장;최법혜 역, 고려판 선원청규 역주 pp. 179-182.

"藏主, 掌握金文. 嚴設?案, 準備茶湯油火香燭, 選請(靖)殿主街坊表白, 供瞻本寮及看經大衆, 請案之法, 先白看經堂首座, 借問有無案位, 欲來依捿, 如有案位卽相看藏主白之."

 

장주는 항상 책상과 茶 그리고 기름(油)과 불(火), 향촉(香燭)을 준비하여, 경전을 보고자(看經) 하는 대중들에게 편의를 제공하도록 규정한 것으로, 오늘날 우리나라 선승들이 납자들에게 일체 경전을 독서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는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또 장경각 開閉 시간에 대하여 '(장주는) 早晨(아침, 8시) 이후부터, 저녁 放參(오후 4시) 전까지 장경각 개폐를 알리는 종을 쳐서 경전을 열람케 하되, 장부에 기록한 다음 출납해야 한다'19)고 규정하고 있다.

또 선원청규 ?藏主? 章에는 간경당(장경각)에서 경전을 閱讀하거나, 혹은 경전을 대출하여 衆寮(대중방)에서 읽을 때 주의해야 할 사항에 대하여 길게 나열하고 있다. 대략적인 것만 소개하고자 한다.

19) 장로종색 편, ?선원청규? 4권, 장주장;최법혜 역, 고려판 선원청규 역주 pp. 181.

 

 

“경전을 대출받은 사람은 먼저 장경각 내에서 향을 사르고 예배해야 한다. (중료로 오는) 路中에서 경전을 들고 말장난을 하거나 농담을 하지 말라. 책상에 경을 두고 그 위에 붓이나 벼루, 잡물, 禪策 등과 경전 이외의 책을 얹어 두지 말라.

간경당 안에서는 빈객을 접대하지 말라. 간경당 창밖에서 남과 이야기하면서 떠들지 말라. 대중을 시끄럽게 할까 염려스럽다. (,,,,,,) 몸으로 책상에 기대어서 경을 누르는 일을 하지 말라. 경전을 소리 내어 읽지 말라. 경전과 책상 주변에서 의복을 벗거나 걸어두지 말라.

모르는 글자가 있어서 물을 때는 먼저 篇韻(字典)을 찾아보고 난 다음에도 알 수 없을 때 물어야 한다. 묻는 일이 잦으면 타인의 간경을 방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자주 물어서는 안 된다.

만일 잠시 책상을 떠날 때는 반드시 보고 있던 경전을 덮어 두어야 한다. 가사를 개어 경전 위에 얹지 말라. 간경할 때에는 단정히 앉아 간경하되 소리를 내거나 입술을 달싹거리지 말라. 경전의 出納은 분명하게 장부에 적어야 한다.”20)

20) 장로종색 편, 선원청규 4권, 장주장;최법혜 역, pp.179-182.

 

 

이상은 대략만 간추린 것인데, 이 밖에도 대단히 많이 열거하고 있다. 또 장로종색의 선원청규 10권 말미에 있는 ?百丈規繩頌?에도 “?案(책상)은 모름지기 깨끗이 하라. 간경과 독서는 항상 ?然함(조용함)을 중요하게 여겨라. 말은 삼가하되 말하지 아니함과 같이하며, 대중에 처하기를 산과 같이 하라”21)고 당부하고 있다. ?백장규승송?은 楊億의 ?禪門規式?과 함께 古百丈淸規의 정신을 전하고 있는 몇 안 되는 자료라는 점에서 더욱 신뢰도가 높다고 할 수 있다.

21) 장로종색, ?선원청규?10권 百丈規繩頌;최법혜 역주, ?고려판 선원청규 역주? pp. 408-409.

 

일본 조동종의 개조로 일본 최초 선원총림인 영평사를 개창한 도겐(道元,1200-1253)은 24세부터 28세(1224-1228)까지 약 3-4년 동안 남송5산 가운데 하나인 天童寺에 유학했다. 거기서 굉지정각(1091-1157)의 4대 법손인 천동여정(1163-1228)으로부터 각별한 가르침을 받고 돌아왔는데, 자신의 저서 辦道法에서 다음과 같이 선승들이 경전을 보았음을 기록하고 있다.

 

 

“雲堂(승당, 선당)의 대중들은 점심 공양을 마친 후 蒲團(방석)을 들고 운당을 나가서 중료(衆寮, 큰방, 대중방)에서 쉬는데, 看讀床(앉은 뱅이 책상)에서 (경을 보다가) 哺時가 되면(세속의 未時 끝. 즉 오후 3시에 해당됨) 운당으로 돌아와 좌선한다”22)

22) 道元, 永平淸規辦道法속의 放參法. T. 82 p.319.

"雲堂大衆, 齋罷收蒲團出堂, 歇于衆寮, 就看讀床, 稍經時餘將哺時至(當世俗之未時之終), 歸雲堂, 出蒲團坐禪."

 

 

남송시대에는 총림에서 점심 공양 후부터 未時 끝 즉 哺時 직전까지는 중료(대중방)에서 쉬기도 하고 또 책상에서 경전이나 조사어록 등 책을 보았다는 것이다.
張十慶이 지은 중국강남선종사원건축(湖北교육출판사, 2002) ?衆寮? 章에는 남송오산십찰도를 바탕으로 衆寮(대중방)의 용도에 대하여 “중료에는 사방에 경전을 보는 看讀床이 배치되어 있고, 경전과 조사어록, 그리고 차를 마실 수 있는 도구가 갖추어져 있다”고 서술하고 있다.

 

 

“중료는 선종사원에서 대중들이 경전과 조사어록을 보는 곳으로 이른바 학문의 도량이다. 건축 形制上에서 본다면 중료는 기본적으로 僧堂(선당, 좌선당)에 준한다. 중료안에 長連床(길게 연결된 상. 즉 마루. 이곳에서 좌선과 공양, 취침을 함) 위에 설치한 것은 경궤(經櫃, 경전을 두는 函)이다. 도구(생활용품)를 두는 함궤(函櫃)는 아니다.
(,,,,,,) 중료에서는 쉬기도 하고 차를 마시기도 한다”23)

23) 張十慶, p. 79.

 

 

또 그는 ‘중료 內의 모든 것은 한결같이 ?백장청규?와 같다. 중료 안에서는 당연히 대승경전과 조사어록을 보았다(寮中之儀, 一如百丈淸規. 寮中, 應看大乘經典幷祖宗之語句)’고 기록하고 있다.
1338년 동양덕휘선사가 편찬한 ?칙수백장청규? ?知藏(藏主)? 章에는 선승도 看經해야 하는 이유와 필요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선종은 본래 교외별전이다. 그럼에도 藏殿(장경각)을 관리하는 승려(지장)를 두는 것은 어째서인가?

부처님의 言行을 가지고 敎律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할진대 어찌 僧으로서 부처님의 언행을 따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특히 우리 선종에서 증득하고자 하는 바는 문자에 빠지지 않으면서 언행의 표면을 뛰어넘어 자성의 묘함을 보는 데 있다.

조사의 뜻은 우리 종도로 하여금 두루 경전과 갖가지 전적을 탐구하여 外侮(외부의 경멸과 비난 등)에 대항하며 변화에 무궁하게 대응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른바 (문자와) 不卽不離라는 것이다.”24)

24) 최법해 역해, 칙수백장청규 역주 pp. 307-308.

"原吾宗?曰?外別傳, 猶命僧專司其藏者何也.

以佛之所言所行??律, 而僧有不遵佛之言行乎.

特吾之所證所得不溺於文字, 而超乎言行之表, 以見夫自性之妙焉.

又祖之意, 欲吾徒遍探諸部與外之百氏, 期以折衝外侮應變無窮, 所謂不?不離者是也"

 

 

남악회양이 좌선만 하고 있는 제자 마조도일 앞에서 벽돌을 갈았다고 하는 南嶽磨?25)의 공안에서도 볼 수 있듯이, 부처가 되기 위하여 아무 일도 하지 않고 하루 종일 앉아만 있는다(좌선)고 해서 부처가 되는 것(깨닫는 것)이 아니다. 중국 선원에서 하루 네번 좌선하도록 규정한 것은 남송 이후이고 그 이전에는 규정하지 않았다. 좌선은 몇 시간 하든 개인의 능력에 맡겼고, 다만 入室(독참)과 請益은 정례화했고, 방장의 법문도
반드시 듣도록 규정했다. 이는 좌선을 통한 禪定보다는 청익과 입실, 법문을 통하여 반야지혜를 갖추는 것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었다.26)

 

이상과 같이 총림의 法典인 선원청규와 칙수백장청규, 그리고 도겐의 판도법과 張十慶의 연구 등을 고찰해 본다면 당송시대 특히 송대의 중국 선종사원에서는 좌선 시간 외에는 마음대로 대승경전과 조사어록을 열람 독서할 수 있도록 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25) 남악회양의 제자 마조도일이 부처가 되겠다고 하루 종일 좌선하고 있었다. 스승 남악이 하루는 좌선주의에 빠져 있는 그를 깨우치고자 그가 좌선하고 있는 암자 앞에 가서 벽돌을 갈았다. 마조도일이 나와서 물었다.
“스님, 여기서 뭘하고 계십니까?” “벽돌을 갈고 있네” “그것을 갈아서 무엇에 쓰시려고 하십니까?” “거울을
만들려고 그러네” 마조도일은 기가 막혔다. “아니, 스님, 벽돌을 갈아서 어떻게 거울을 만든다는 것입니까"
하고 반문하자 남악이 말했다. 그렇다면 앉아 좌선한다고 해서 어떻게 부처가 된다는 말인가?”
26) 楊億, ?선문규식?(T.51)p. 250c.

“入室(獨參)과 請益을 제외한 것(좌선)은 수행자의 勤怠에 맡긴다. 上(많이 하든) 혹 下(적게 하든)는 常準(평소의 준칙)에 구애되지 아니한다(除入室請益, 任學者勤怠, 或上或下, 不拘常準).”

 

 

선종사원(총림)에서 금강경, 화엄경 등 경전과 조사어록 등을 열람, 공부할 수 있도록 한 것은 禪敎兼修를 통하여 선정과 반야지혜를 성취하기 위해서이다. 선수행의 목적은 반야지혜를 성취하는 것이지 좌선은 아니다. 좌선이 중시되는 것은 남송 이후로 선불교가 지리멸렬하던 시기이다. 만일 우리나라 선원처럼 일체 경전을 보지 말라고 한다면 선원총림에 藏殿을 두어야 할 필요도 없을 것이고, 경전을 관리하고 대출해 주는 소임인 藏主(知藏)를 두어야 할 까닭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藏主가 首座와 書記에 이어 선원총림의 六頭首 서열제3위라는 점은 그 중요성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당송시대 조사선의 대표적 선승인 마조도일, 백장회해, 위산영우, 조주, 운문, 임제의현, 그리고 간화선의 거장 대혜종고도 매우 박학다식한 선승이었으며, 근현대 대표적 선승인 경허나 한암, 성철 등도 시문에 능하거나 교학에 매우 박학다식했던 선승이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사실 오늘날 한국선불교는 문자를 모르는 것이 마치 선승의 전형처럼 인식되어 왔다. 그 결과 적지 않은 禪者들이 無知禪으로 흘러가 버렸는데, 이것은 조선말기와 근대를 거치면서 일부 무식한 禪者들, 또는 正法眼을 갖추지 못한 어리석은 邪師輩의 잘못된 가르침에 의하여 형성된 왜곡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無知와 無識은 곧 어리석음(痴)이다. 어리석음은 불교에서 가장 배척하고자 하는 貪瞋痴 삼독 가운데 하나이다. 어리석은 이가 깨달음을 성취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논리이다. 경전이나 조사어록 그 어디에도 없는 말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Ⅴ. 간화, 보조선 실천

 

간화선은 송대의 선승 大慧宗?(1089-1163)가 대성시켰고 우리나라에는 고려 때 普照知訥(1158-1210)이 도입한 이후 한국 선불교의 전통적인 수행법이 되었다. 같은 시기에 宏智正覺(1091-1157)에 의한 묵조선이 있었지만, 우리나라에 정착되지는 못했다. 따라서 우리나라 선승이라면 看話禪者 아닌 이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다만 선승들에 따라서 간화선을 변용, 발전시킨 경우는 있을 수 있을 것이다.

한암과 탄허는 모두 간화 보조선의 수행자, 실천자이다. 한암은 간화의 대표적 화두인 무자화두27)를 참구했고, 그의 제자 탄허 역시 무자화두를 참구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다만 간화선 수행에 있어서 한암과 탄허는 모두 보조지눌의 사상, 가르침에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27)한암, 정본 한암일발록 상권 p. 268. 일생패궐 .

"和尙答云, 此是圓覺境界. 經云, 以思惟心, 測度如來圓覺境界, 如取螢火, 燒須彌山, 終不能着.

又問, 然則如何得. 答. 擧話頭究之, 畢竟得入.

(又問) 若知是話頭亦妄如何. 答.若知話頭亦妄, 忽地失脚, 其處卽是仍看無字話."

 

한암은 극락암에 주석하고 있던 경봉스님과의 서신에서 보조지눌의 저술인 절요와 ?간화결의론?을 매우 극찬하고 있다.

 

 

“만약 一生事를 원만하고 구족하게 하고자 한다면, 옛 조사의 방편 語句로써 스승과 벗을 삼아야 됩니다.

우리나라 보조국사께서도 일생토록 六祖壇經으로 스승을 삼고 大慧書狀으로 벗을 삼았습니다.

祖師의 言句 중에서도 제일 요긴한 책은 大慧의 書狀과 普照의 節要와 看話決疑(論)이 活句法門이니, 항상 책상 위에 놓아두고 때때로 점검해서 자기에게 돌린 즉 一生의 일이 거의 어긋남이 없을 것입니다.”28)

 

28) 정본 한암일발록 상권 p. 278.

"若欲一生事圓滿具足, 以古祖師方便語句, 爲師友焉.

故, 吾國普照國師, 一生以壇經爲師, 書狀爲友.

祖師言句中, 第一要緊冊子, 大慧書狀, 普照節要, 看話決疑, 是活句法門. 恒置案上, 時時點檢, 歸就自己, 則一生事, 庶無差違矣."

그리고 정본 한암일발록 상권 p. 293쪽의 경봉에게 보낸 네 번째 답서에서도 보조국사의 진심직설을 참고하라고 말하고 있다.

 

 

경봉스님에게 보낸 답서인데, 祖師의 言句 중에서도 제일 요긴한 책은 大慧의 書狀과 普照의 節要와 看話決疑(論)이므로 이 어록들에 의거하여 수행하라는 것이다. 특히 대혜종고의 書狀과 보조지눌의 節要와 看話決疑(論)은 활구법문이므로 항상 책상 위에 놓아두고 때때로 점검해서 자기에게 돌린 즉 一生의 일이 거의 어긋남이 없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가 활구법문이라고 여기고 있는 3권의 禪書 가운데 보조지눌의 저술이 무려 두 권이나 들어가 있다. 이 정도라면 한암은 보조선의 실천자이고 보조지눌의 정신, 보조사상을 계승하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대혜종고가 간화선을 창안하여 대성시켰지만, 사실 간화의 구체적인 방법에 대하여 쓴 글이나 논문은 거의 없다. 우리에게 알려진 대혜서장은 주로 당시 거사들, 지식인들과 주고 받은 편지글이고, 대혜의 普說도 납자들이나 거사, 신도들이 청한 법문이다.
따라서 저술이나 논리적인 글은 거의 없다. 간화선에 대한 논리적인 글이라면 보조지눌의 간화결의론이 대표적이고, 이는 우리나라 간화선의 지침서라고 할 수 있다.

 

또 한암과 탄허는 각각 별권으로 유통 전래되어 오던 보조지눌의 저술들을 한 권으로 묵어서 간행, 유통시킨 당사자이다. 1936년 오대산 상원사에서 처음으로 보조지눌의 저술들을 모아서 순차를 정하여 활판으로 간행했는데, 이것이 오늘날 널리 유통되고 있는 보조법어의 체제이다. 그의 제자 탄허 역시 훗날(1963년) 한암의 강의를 바탕으로 자신이 번역한 현토역해 普照法語를 간행했는데, ?譯解에 대한 小言?에서 그 사실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이 法語(보조법어)는 원래 篇篇이 散在하여 完璧을 보지 못했던 것인데, 二十七年 전에 先師 漢岩和尙이 編纂해 놓은 것이다. 그 編次의 내용은 定慧結社한 후에 修心하여야 할 것이며, 修心하는 데 있어서는 眞妄을 알아야 될 것이다. 그러므로 眞心直說이 그 다음에 있다. 그리고 眞妄을 가린 후엔 敎理的으로는 華嚴論 宗旨를 依據해 닦아가고, 禪學的으로는 徑截門 活句를 參詳해 들어가라는 意味다.”29)

29) 탄허, (1963) ?현토역해 보조법어?, 譯解에 대한 小言,

 

 

보조법어가 오늘날과 같은 체재 즉 ?정혜결사문?, ?수심결?, ?진심직설?, ?원돈성불론?, ?간화결의론?, 부록 ?보조국사비문?의 순서로 확정, 편찬되어서 유통하게 된 것은 상원사에서 간행한 보조법어가 그 효시이다.

 

한암과 탄허는 화두 참구를 통하여 깨달음에 이르는 간화선 수행체계에 대하여 먼저 ?정혜결사문?을 읽어서 수행에 대한 신심과 열의, 의지를 갖추어야 하며, 다음에는 ?修心訣?을 읽어서 마음을 닦는 방법을 알아야 하고, 그리고 修心의 조건으로는 眞과 妄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眞心直說?을 그 다음에 넣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眞妄을 구별한 후에는 교리적으로는 이통현의 華嚴論을 읽어서 華嚴論宗旨를 의거해 닦아 나가고, 禪學的으로는 徑截門 活句를 參詳해 들어가라는 것이다.

 

이것은 한암과 탄허가 보조지눌의 글을 통해서 본 간화선 수행의 순서, 또는 차례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보조지눌은 이런 순서를 정해 놓고 ?정혜결사문? 등을 저술한 것은 아니지만, 한암과 탄허가 보았을 때는 이런 編次가 옳다고 보았던 것이다. 간화선 수행의 순차에 대한 한암과 탄허의 이런 제시는 오늘날 간화선 수행체계 정립에 중요한 대안이 된다고 생각된다.

 

또한 이는 한암과 탄허가 보조지눌의 글을 통하여 한국 간화선 수행의 방법과 체계를 정해 본 것이라고 할 수 있고, ‘대혜종고-보조지눌-한암중원’으로 이어지는 한국 간화선의 새로운 계통이라고 할 수도 있다. 향후 이 문제는 더 구체적인 연구와 고찰이 필요할 것이다.

 

그런데 탄허가 쓴 이 ?譯解에 대한 小言?에서도 본다면 끝에 가서는 결론적으로 ‘敎理的으로는 華嚴論 宗旨를 依據해 닦아가고, 禪學的으로는 徑截門 活句를 參詳해 들어가라는 것’이다. 이로 본다면 한암과 탄허의 禪의 교리적 바탕은 이통현의 화엄론에 의거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전통적으로 우리나라 강원에서 ?화엄경 주석서로는 청량징관의 화엄경소초를 절대적으로 참고해 왔던 것과 비교하면 매우 다른 것이다.

 

이통현의 화엄론의 입장은, 화엄경의 구성을 총괄하여 10처 10회 40품으로 파악하고, 범부도 실제 깨달을 수 있다고 하는 입법계품에 초점을 두고 해석해 나가는 입장이다. 이와 함께 또 화엄론에서는 해석상의 특징이 있는데, 그것은 공자나 노장 등 중국 고유의 사상을 대담, 과감하게 불교로 포섭, 통합하고 해석30)하고 있다.

30) 기무라 키요다타(木村淸孝), 정병삼 역 pp. 182-190.

 

선승들이 대승경전 가운데 가장 많이 인용, 의거하는 경전은 능가경, 화엄경, 금강경, 유마경, 능엄경, 대승기신론 등이다. 금강경은 육조혜능 이후부터이고, 능엄경은 송대 중기 이후이다. 그리고 능가경, 화엄경, ?대승기신론은 모두 유식사상과 관련된 경전으로 초기 이후부터 널리 인용되었다. 선승으로서 화엄경을 많이 인용하고 활용한 이는 간화선의 거장 대혜종고이다. 그는 서간집인 서장에서도 화엄경을 많이 인용하고 있는데, 보조지눌이 화엄경, 화엄론31)을 의거하는 것도 멀리는 대혜종고의 영향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한암이 보조지눌의 사상적 영향을 크게 받게 되는 것은 이미 앞에서 언급했지만, 신계사 강원에서 교학을 공부하다가 본 보조지눌의 ?수심결?에 있는 한 구절 때문이다.32)
31) 보조지눌에게는 화엄론의 내용을 촬요한 화엄론절요가 있다.
32) 정본 한암일발록 상권, p, 268.

"余二十四歲己亥七月日, 在金剛山神溪寺普雲講會, 偶閱普照國師修心訣. 至若言心外有佛, 性外有法堅執此情, 欲求佛道者, 縱經盡劫, 燒身煉臂(云云). 乃至轉讀一大藏敎, 修種種苦行, 如蒸沙作飯, 只益自勞處, 不覺身心悚然, 如大恨(限)當頭. 又聞長安寺海雲庵, 一夜燒盡, 尤覺無常如火, 一切事業, 皆是夢幻."

 

탄허 역시 보조지눌의 사상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는 자신이 번역하여 간행한 현토역해 普照法語 서문에서 육조단경과 보조법어의 의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普照國師는 常師가 없이 生而知之한 聖人으로서 平昔에 壇經으로 스승을 삼고 書狀으로 벗을 삼았다는 史話도 있거니와 原來 松廣寺에 가서 宗을 세울 때에 宗名을 曹溪라 한 것은 六祖가 曹溪山에 계셨으므로 그를 慕仰하여 命名한 것이니 五宗家風이 모두 六祖下에서 벌어진 걸로 보아 우리 曹溪宗은 五宗의 統一宗이라 하여도 過言이 아닌 것이다. 그러고 보면 六祖壇經과 이 (普照)法語는 우리 數百萬 宗徒의 必修的 敎典이라
하여도 또한 過言이 아닐 것이다
.”33)

33) 탄허, ?현토역해 보조법어?, 序, 963.

 

탄허는 헤능의 법어집인 육조단경과 지눌의 법어집인 普照法語는 우리 수백만 종도들이 의거해야 할 필수적인 敎典이라는 것이다. 敎典이라면 소의경전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가 얼마만치 보조지눌의 사상적 영향을 받았는지를 알 수 있다. 또 그가 1956년 오대산 월정사에서 행한 교육결사인 오대산 수도원의 院訓을 보면 첫째가 信願堅固이고, 두 번째가 吉羅無犯이며, 세 번째가 定慧雙修인데, 이 가운데 정혜쌍수는 특히 보조
지눌의 修證論을 대표하는 것 중에 하나이다.

 

 

Ⅵ. 맺는말

 

이상과 같이 사자지간으로 근현대 한국불교사에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두 고승의 동이점에 대하여 고찰해 보았다.

 

1. 한암과 탄허의 다른 점 곧 특성이라고 한다면 한암은 禪에 치중했고, 탄허는 교학에 치중했다고 할 수 있다. 한암은 금강산 신계사 강원에 있다가 보조지눌의 ?수심결?에서 느낀 바가 있어서 강원을 그만두고 경허를 찾아가서 선승의 길을 걸었고, 그의 제자 탄허는 반대로 선원인 상원사에 입산하여 참선을 하다가 훗날 교학의 길을 걷게 되었다. 한암의 족적을 본다면 교학에서 선으로 방향을 바꾸었고, 탄허는 선에서 교학으로
방향을 바꾸었다고 할 수 있다.

2. 呑虛의 인재 양성과 교학적 업적은 전통강원의 교과목인 沙彌科, 四集科(서장, 도서, 절요, 선요), 四敎科(능엄경, 기신론, 금강경, 원각경) 등를 비롯하여 대교과인 화엄경과 그리고 그 주석서인 청량징관의 화엄경소초와 이통현의 화엄론까지 완역, 간행했으며, 선어록인 육조단경과 보조법어도 번역 간행했는데, 근현대 불교사에서 量的인 면에서 한 개인이 행한 譯經佛事로는 최대의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
또 탄허는 1956년(44세)부터 오대산 월정사와 삼척 영은사 등에 수도원을 개설하여 교육에도 적지 않은 심혈을 기울였는데, 탄허가 이와 같이 인재 양성과 교학, 譯經, 그리고 교육에 매진했던 것은 인재 양성을 통하여 불교, 더 나아가 한국사회를 다시 일으켜 세워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3. 이와 같이 표면에 나타난 양상은 다르지만 그들은 모두 유생, 유학자 출신으로 입산했으며, 禪의 입장에서 禪敎兼修, 禪敎融合을 시도, 실천했다. 禪敎兼修, 禪敎融合은 당송시대 총림에서 장경각과 그 관리자인 藏主(知藏)를 두어서 납자들에게 경전을 공부할 수 있도록 한 것과 궤를 같이한다고 할 수 있다.

또 한암과 탄허는 모두 보조지눌의 수행법과 사상에 영향을 받은 바가 크다. 또 그들의 선사상, 수행, 修證法은 간화선이지만, 그 간화선 역시 보조지눌의 간화결의론에 의거한 간화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경전적, 교학적 바탕은 화엄경과 이통현의 화엄론에 의거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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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허법어집(2003), ?방산굴법어? ?화엄경의 세계?, 오대산 월정사. pp.77-78.
한암, 보조법어 찬집중간서. 1936년.
한암문도회, 김광식 편(2006) ?그리운 스승 한암?(대담, 구술집). 월정사. pp.113-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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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종색 편,선원청규 4권,장주장 : 최법혜 역(2001),고려판 선원청규 역주 pp.179-182.가산불교문화연구원.
道元, 永平淸規, ?辦道法? 속의 放參法 ; 대정장? 82권, p. 319.
張十慶(2002), ?中國江南禪宗寺院建築?, 湖北敎育出版社, p.79.
최법해 역해(2008), 칙수백장청규 역주 가산불교문화연구원. pp. 307-308.
楊億, 선문규식, T. 51, p. 250c.
탄허(1963), ?현토역해 보조법어?, ?譯解에 대한 小言?, 법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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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허(1963), ?현토역해 보조법어? ?序?, 법보원.

 

 

 

 

 

윤창화 선생님의 “漢岩과 呑虛의 同異점 고찰”을 읽고

장진영ㆍ원광대 마음인문학연구소 HK연구교수

 

 

1.

본 논문은 한국 근대기 대표적인 선승이신 한암스님과 탄허스님, 두 사제 간의 동이점에 대하여 고찰하고 있습니다. 윤창화 선생님은 먼저 두 분 스님의 차이점(異)에 대해서 논하고, 다시 공통점(同)을 논하고 계십니다. 차이점은 크게 한암스님의 족적이 대체로 ‘교학에서 선으로’ 나아갔다면, 탄허스님의 행적은 오히려 ‘선에서 교학으로’ 나아가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표면상 드러난 두 스님의 경향성에 다소 차이가 있다 할지라도 유가에서 불가로 나아간 점, 선과 교를 겸수 혹은 융합을 시도한 점 등은 동일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두 분 스님 모두 보조지눌스님의 사상을 중시하고 있다는 점, 선에서는 간화선을, 교에서는 화엄사상을 그 사상적 근거로 하고 있다는 점을 공통점으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2.

두 분 스님의 생애를 비롯하여 근현대 불교 전반에 대하여 앞서 고민하신 윤창화 선생님께서 고견을 밝혀주시어 두 스님의 생애에 대하여 다시 돌아 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된 점 깊이 감사드립니다. 두 분 스님에 대하여 문외한인 저로서는 본 논평에 대한 부담이 적지 않지만, 다음의 몇 가지 우문을 던지는 것으로 논평자의 소임을 대신하고자 합니다.

 

첫째, 일반적으로 어떠한 사상이나 인물의 동이를 논할 때, 공통점(同) 혹은 유사성을 먼저 밝히고 이후에 차이점(異)을 드러냄으로써 서로의 장단점과 각각의 특징과 한계를 제시해줄 것을 기대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본고에서 선생님께서는 두 분의 차이점을 드러내는 것에 초점을 두었다기 보다는 두 분 스님의 공통점에 더 무게를 두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이와 같은 논의 전개에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둘째, 이어서 두 분 스님께서는 사제지간으로 아무래도 차이점보다는 유사점이 더 두드러진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경허스님 이후 한암, 탄허 두 분 스님이 사상적 경향성에서 볼 때 하나의 흐름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선생님께서도 강조하셨듯이 선을 중심으로 하되 선교겸수, 선교융합의 정신을 일관되게 실천해 오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선생님께서도 두 분 스님의 동이점을 드러내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물론 이어지는 단원에서 강조하고 있는 부분들에서 어느 정도 짐작은 할 수 있지만,) 두 분 스님의 사상이 동시대의 한국불교의 스님들과 비교하여 어떤 위상을 갖고 있는지를 좀 더 언급해주실 수 없는지 궁금합니다.

 

셋째, II장에서 한암 스님께서 강원에서 출발하여, 보조지눌의 <수심결>, 경허스님의 <금강경> 법문을 통해서 선으로 전환하여, 이후 해인사에서 상원사에 이르기까지 선승으로서 일관된 족적을 남기신 점을 들어 ‘교학에서 선으로’ 나아간 것으로 스님의 행적을 특징짓고 있으며, 반대로 탄허스님은 처음 입산했던 곳이 선원이었다는 점, 이후 스승 한암스님의 권유를 계기로 경전을 공부하게 되었고, 본격적으로 교육활동과 경전번역에 매진하시어 교학 방면에 큰 업적을 남기신 점을 들어 ‘선에서 교학으로’ 나아간 것으로 그 특징을 잡고 계십니다. 하지만 이어지는 III장에서 밝힌 공통점에서는 이러한 주장과 달리 두 분 스님이 모두 선교겸수의 입장에 있을 수차에 걸쳐 강조하고 있어 오히려 주장에 혼란을 주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실제로 선생님께서도 자상히 언급하고 계신 것처럼, 한암스님께서 탄허스님께 경전을 공부하도록 하신 점을 생각해 볼 때도, (이는 현실적으로 상원사에 개설된 삼본산(월정사, 건봉사, 유점사)연합승려수련소(1936)의 운영과 관련된 것이지만,) 스님께서도 승려교육과 교학의 필요성에 대해 깊이 공감을 하고 계셨다고 볼 수밖에 없다고 생각됩니다.
당시 연합수련소에서 진행된 2차례의 안거에서도 참선수행만이 아니라 경전강독을 함께 했으며, 스스로 <금강경>, <능엄경>, <범망경> 등의 경전을 강의했을 뿐 아니라, 탄허스님께서 중강을 하고 한암스님께서 증명을 하신 점, 이듬해 <보조법어>와 <금강경오가해>를 편집하여 현토?간행할 때 그 序를 찬술하신 점, 그리고 한암의 ‘승가오칙’에서도 禪뿐만 아니라 간경과 염불 등도 함께 중시한 점 등, 생애의 후반기에도 오히려 선교겸수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이를 실천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습니다.

 

또한 탄허스님의 경우도 선생님께서 밝히고 계시듯이 경전의 내용을 보면, 모두 禪의 관점이거나 大義를 중시한 것으로 그 예로 청량의 <화엄경소초>보다 이통현의 <화엄론>을 중시한 것 등을 들 수 있으며, 이후 오대산 수도원과 영은사 수도원에서 교육활동에 전력하실 때도 참선과 경학의 균형성을 강조하신 점, 역경의 과정에서도 禪에 중심을 두신 점 등 II장의 차이점에서 강조했던 ‘선에서 교학으로’, 혹은 ‘교학에서 선으로’ 등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설명과 모순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넷째, IV장에서는 한암스님과 탄허스님의 선교겸수의 수증법의 연원을 당송시대 선종사원(총림)의 藏殿(장경각)에서 찾고 그 내용을 <선원청규>와 <칙수백장청규> 등의 내용을 들어 고찰하고 계십니다. 이는 두 스님의 공통점을 논의하는 본 논문의 흐름상 갑작스럽게 끼어든 느낌, 혹은 의도적으로 강조된 인상이 듭니다. 실제로 삼본산연합수련소의 일과에서 아침, 저녁은 참선하고, 오전, 오후는 경전(금강경, 화엄경, 범망경, 조사어록)등을 보게 한 점이나, 오대산수련원에서도 예불, 좌선, 논강, 수강 등으로 일과가 구성된 점 등을 보면, 앞서 소개한 청규의 전통을 잇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다만 이는 조선후기에 이력과목이 성립되고, 삼문수학이 강조된 이후에 한국불교의 전통으로 자리잡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선교겸수의 전통도 그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고 보는데, 선생님께서 특히 한암스님과 탄허스님의 선교겸수의 연원을 굳지 멀리까지 구하신 이유가 있으신지 궁금합니다.

 

다섯째, V장에서는 간화선을 대성한 대혜종고와 이를 계승한 보조지눌, 그리고 다시 보조의 저술을 중시한 한암중원(그리고 탄허택성)으로 이어지는 사상적 흐름에 주목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이는 한국불교의 禪 전통이 간화선 아님이 없었으며, 보조선도 간화선의 연장이며, 그 연장에 한암스님이 있음을 들어 대혜종고의 간화선에서 보조선, 그리고 한암으로 이어지는 전통을 강조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이를 통해서 선생님께서는 크게 간화선의 흐름에 모든 한국불교(선)의 전통이 모두 포함되지만, 그 중 선교겸수(정혜쌍수)의 입
장에 있는 보조선이 한국선의 전통이며, 이를 중시한 한암스님(과 탄허스님)이 그 전통을 잇고 있음을 강조하신
것으로 이해됩니다. 이에 대한 보충설명을 듣고 싶습니다.

 

아무쪼록 부족한 논평에 대하여 두루 양해가 있으시길 바라며, 문외한의 우문에 대하여 선생님의 현답을 기대하며, 두서없는 논평에 가름하고자 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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