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TV 특집 다큐 <삼성현> 관련 질의응답(안)
- 정호완(대구대 삼성현연구소)
※ 인터뷰 해주신 내용은 실제 인터뷰로 방송됨은 물론
최종 내레이션이 많은 참고가 됩니다.
질문 방향이 이상할 경우 바르게 잡아 주시기 바라고
질문에 중요한 내용은 추가로 말씀해 주셔도 됩니다.
일연스님이 경산 언제 어디에서 태어났나요? (추정되는 곳을 책이나 지도에서 대략 짚어주실 수 있으신지요?)
(답) 고려 희종2년(1206) 경산시(당시 장산군) 남천면 대명리(?) 어름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김견명(金見明)이고 자는 회연, 호는 목암(睦庵)이다. 어머니 이씨부인의 꿈에 해가 세 번이나 품속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 임신, 선사를 출산하였다.
2. 삼국유사에 원효와 설총의 이야기가 수록돼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떤 내용이 언급됐는지 소개 부탁 드립니다?
(답) 삼국유사 권4 의해 원효불기(元曉不羈)에 실려 있다. 의해편이란 신라고승전이라 할 수 있다. 불기란 말 그대로 어디에 매이지 않음을 이른다. 이는 곧 원효의 무애(無㝵) 사상이다. 그 계급이나 신분의 출신성분, 어디에도 막힘이 없이 서로가 자유롭고 평등하게 소통하며 어울려 산다는 새로운 삶의 지향성이다. 원효의 할아버지인 잉피공으로부터 아버지 담날내말, 그리고 아들인 설총에 이르는 4대에 걸친 가계가 올라 있다. 원효의 출생담이 실려 전한다. 원효는 어머니 꿈에 유성이 어머니 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임신, 사라수 나무 아래서 아이를 낳았다. 사라수는 밤나무였고 이와 관련한 절 모슴의 이야기는 자못 흥미롭다. 그러나 곧 어머니는 출산이후의 산욕으로 일찍 돌아갔다. 요석공주와 인연을 맺어 파계함을 계기로 귀족 불교를 대중 중심의 불교시대를 열어 통일 과정에서 얻은 민중들의 상처를 치유하려고 했다. 득도담은 잘 알려진 의상과 함께 구법입당하려고 화성의 당항성에서 해골 물을 마시고 모든 것이 마음에 달려 있다는 일체유심조를 깨닫게 되었다(임간록). 그의 사상은 화쟁(和諍)으로 서로 다름을 인정, 통합불교를 주창하였다. 원효종 혹은 해동 불교의 창시자가 되었다. 신분과 계층을 뛰어넘는 평등한 불교시대를 열고자 하고 김유신의 군사자문을 하는 등 호국과 대승의 정신을 표방하였다. 열반 이후 설총이 아버지의 유해를 화장하여 흙을 섞어 소상을 만들어 분황사에 모시어 추모하였다. 이 때 예배하는 아들을 향하여 소상이 고개를 돌렸다. 원효의 저술로서 금강경삼매경소와 화엄경소가 있다. 그밖에도 불교의 인식논리라 할 판비량론(判比量論) 등 200여 서책들이 있다.
설총(薛聰)은 원효와 요석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경전과 사서에 통달하여 동방 십현의 머리가 되었다. 지금도 우리말로 경전을 읽도록 한자의 한국의 모든 향교에 배향되어 있다. 가장 으뜸 자리에.
뜻과 소리를 바탕으로 삼국의 이두를 서라벌 중심으로 정리하였다. 국학을 세워 공평한 교육의 기회를 마련, 유교를 받아들여 새로운 사회와 왕권을 강화를 위한 지배이데올로기로 활용하였다.
3. 일연선사의 성품, 행적 등을 엿볼 수 있는 일화가 있을까요?
(답) 보각국존비명에 따르면, 어렸을 때부터 소걸음과 호랑이 눈빛으로 평소 과묵하고 헛된 말을 하지 않았다. 무척 효성스러웠다. 말년에 어머니를 모시기 위하여 국사(國師)의 자리도 내놓고 귀향, 인각사에서 어머니가 임종하도록 몸소 모셨다. 효심의 발로였다. 중국의 스님 신분으로 어머니를 모시기 위하여 힘썼던 목주(睦州)의 진존숙(陳尊宿)을 본떠 자신의 호도 목암이라 하였다. 본인이 열반한 뒤에 둥딩이골에 자리한 어머니의 무덤이 바라다 보이는 곳에 부도를 앉혀 달고 하였다.
5. 일연선사가 지키고 실천하고자 했던 불교사상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답) 선불교 사상이며 통합적이다. 원나라의 침략을 당한 처지에서 민족의 정기를 살리고 대장경을 만들어 불력으로 외세의 침략을 막으려는 호국 불교 사상이라 할 수 있다.
6. 추가로 더 해주고 싶으신 말씀이 있으시면 기탄없이 해주시기 바랍니다.
(ex. 경산 삼성현을 우리가 왜 잊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한 코멘트)
(답) 삼성현, 세 분은 나라와 겨레가 바람 앞에 등불일 때 희망봉이었다. 원효는 통일 신라가 되는 과정에서 화쟁(和諍)으로 국민 통합과 정신적인 언덕을 마련하였다. 설총은 서라벌 중심의 표준이두로 새로운 교육방법을 도입, 국학을 세워 새 시대를 열어갈 교육제도를 통하여 사회개혁을 주도하였다. 일연은 외세에 억눌린 고려인들에게 우리는 하늘의 자손임을 일깨워 주었다. 고려대장경을 마무리함으로써 불력으로 외세를 물리칠 수 있다는 희망을 불어넣은 선각자였다. 특히 설총의 석독구결은 뒤로 오면서 점토구결과 각필 구결로 이어져 일본의 가나 글자 창제에도 깊은 영향을 주었고 훈민정음 창제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훈민정음과 고려대장경은 세계의 인류문화유산이 되었다.
설총에 대한 추가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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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총은 아버지인 원효를 어떻게 생각했고, 아버지는 아들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원효와 설총에 관한 대한 숨겨진 에피소드를 알고 계신가요?
(답) 설총은 어렸을 때 처자식도 돌보지 않는 아버지를 무책임한 사람으로 생각을 했고, 아버지는 어렸을 때부터 시련을 겪으면서 자라나야 인물이 된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서로 걸어야 할 길이 다르니까. 선생의 이두 곧 석독구결은 아버지인 원효의 이두와 각필 구결을 이어받아 발전시켰다. 이는 원효의 이두풀이(畵犢畵鸞-速還-빨리 돌아가라)로 김유신의 군사자문을 하여 위기를 넘길 수 있었던 사례에서도 그런 가능성을 찾아볼 수 있다.
2. 설총의 행동이나 말씨, 성품 등에 대해 알고 계신 정보가 있으시면
말씀 부탁드려요
(답) <홍유후실기>에 따르면 설총은 생김새가 턱은 제비와 같고 머리는 호랑이와 같다고 했으니까 괴팍한 인상이었다. 경산 집에서 글을 읽으면 서라벌(경주)의 외할아버지인 무열왕이 들을 정도였으니 목소리가 크고 낭랑하였다. 기억력이 뛰어났다. 당 고종 시절 황실에 사절로 태학사 방천경과 함께 황제에게 9경을 달라고 하니까 책을 줄 수는 없고 보고는 가라 하여 신라로 돌아와서 9경을 모두 외워서 그대로 원본처럼 복원하였다.
선생은 효자였다. 자신의 어머니의 뜻을 받들어 혼란했던 신문왕 시대의 사회를 국학을 세우고 표준 이두를 정리하여 새 시대에 걸맞은 인재육성과 유교 지향의 현실정치를 실현, 왕권을 강화하여 국정을 안정시켰다. 원효가 돌아간 뒤 흙과 대사의 유해를 섞어 소상을 만들어 분황사에 모셨다. 소상 앞에서 아버지를 추모할 때 소상이 고개를 돌려 자식을 보았다고 한다(삼국유사). 설 선생이 정리한 서라벌 중심의 표준 이두는 오늘날에도 이두의 흔적이 한글 자모의 이름에 남아있다(디귿 : 池末. 시옷 : 時衣). 이두는 후일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의 밑거름이 되었다.
3. 설총은 이두의 집대성한 인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 이두의 집대성이 왜 중요했나요?
(답) 오늘날 표준어를 생각하면 된다. 고구려 광개토대왕 비문이나 신라의 진평왕 때 서동요나 혜성가, 그리고 백제의 무령왕비의 팔찌에 새겨진 이두문등이 있었다. 통일 된 이후 서라벌 중심의 표준어를 체계적으로 적고 정리함으로써 소통을 원활하게 하였다. 공문서라든가 일반 사회생활에 불편을 최소화하기 위하여 만들었다.
4. 설화인 화왕계로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무엇이었고,
이 화왕계의 문학적 가치에 대한 코멘트 해주신다면?
(답) 임금 앞에서는 아첨하고 자신의 이익을 구하는 간신배를 멀리 하고 볼품은 없어도 성실하고 올곧은 생각을 하는 충신을 가까이 해야 나라와 겨레가 부강해 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