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 / 피아노 소나타 32번 Piano Sonata No.32 in C minor, Op.111 Ludwig van Beethoven 1770∼1827
[피아노 소나타 32번] C단조 Op.111이 출판된 1822년은 베토벤에 있어서 그다지 행복하지 못했던 시기였다. 당시 그는 조카 칼의 양육 문제와 관련하여 법정 분쟁을 겪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아내에게 아무런 기대를 하지 않았던 칼의 아버지는 자신이 임종이 가까워오자, 성미 급하고 무심하며 외골수인데다 심한 청각 장애를 가진 천재 작곡가인 자신의 형에게 아들의 양육을 맡기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당시 40대 중반이었던 베토벤은 아이를 돌본 경험이 전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해 자신에게 닥친 일을 극복해 나가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조카 칼은 계속해서 방탕한 생활을 일삼고 흥청망청 문제아가 되어갔다. 늘 현금이 부족해 변호사 비용도 부담할 여유가 없었던 베토벤은 조카를 돌보는 것을 힘들어했다. 게다가 칼이 자살까지 시도한 탓에, 그를 사랑했던 베토벤은 더욱 더 깊은 슬픔 속으로 빠져들게 되었다. 당시 베토벤은 건강 또한 심하게 악화되어 친구들과 후견인들이 만들어준 보청기도 더 이상 소용이 없게 된 상태였다.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서는 종이에 적어야만 했을 정도다. 베토벤은 악화되는 자신의 건강에 대해 점점 무심해졌고, 여러가지 일로 몸을 혹사시켰던 베토벤은 만성적 질병과 감염 증세에 시달린 끝에 1827년 세상을 뜨고 만다.
Alexey Chernov performs Beethoven: Sonata no. 32 in C minor, op. 111 at the Arthur Rubinstein Piano Master Competition, May 2011 in Tel Aviv
Maria Yudina plays Beethoven Sonata No. 32, Op. 111
제1악장 : Maestoso - Allegro con brio appassionata C단조 소나타의 1악장 마에스토소의 느린 도입부는 초기작인 [‘비창’ 소나타]에 비견할 만하지만, 주제만큼은 명백한 푸가 주제로서 대위법적 발전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커다란 차이를 보인다. 첫 번째 주제와 이어지는 몇몇 중요한 요소들은 고전주의 스타일의 화성 가운데 가장 고도의 긴장감을 유발시키는 감 7도로 구성되어 있다.
베토벤의 C단조에서도 이 화성이 먼저 제시되지만, 이 작품의 가장 독창적인 모습은 끝까지 그 집중력의 강도를 유지한 채 그 가능성을 결코 반감시키지 않는다는 것에 있다. 두 번째 주제의 사색적인 분위기는 A플랫으로서 이 폭풍과도 같은 격정적인 악장에서는 단지 에피소드로만 남아 있는다. 짧은 코다는 비르투오소적인 패턴으로 점진적으로 발전하다가 사라지다가 다음에 이어지는 아리에타 악장을 준비하는 듯 피아니시모로 끝을 맺는다.
제2악장 : Arietta - Adagio molto semplice e cantabile 베토벤은 고풍스러운 분위기로서 초기 낭만주의의 향기를 머금고 있는 푸가와 자신의 작곡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변주 형식을 후기 피아노 소나타 양식에 적극 도입하여 독창적인 방식으로 변형시켜나갔다. 2악장 아리에타는 C장조의 주제와 장대한 다섯 개의 변주로 구성된 대목이다.
무엇보다도 1944개에 달하는 32분 음표의 연속과 끊임없이 이어지는 트릴의 향연은 작곡 당시로서는 연주가 불가능한 작품으로 인식되었을 뿐만 아니라, 현재까지도 그 어려운 테크닉과 천상의 아름다움을 노래해야만 하는 난해함으로 해석가들의 머리를 끊임없이 아프게 하고 있다. 특히 이 변주 악장에서 논리적 정연함과 유연한 멜로디, 광채로 쌓여있는 신비로운 분위기가 L'istesso tempo(똑같은 템포)로 표현되는 모습은 존경스러움을 뛰어넘어 일면 공포스러운 요소가 엿보일 정도로 집요하다.
천상의 아름다움 속으로 날아오르는 마지막 악장
1822년 이 작품이 출판되었을 때 악보를 구입했던 사람들 가운데 이 곡을 조금이나마 이해한 사람은 없었을 것이 확실하다. 애초에 출판업자인 슐레징거는 작곡가가 3악장을 보내줄 때까지 조판에 들어갈 수 없다고 주장하여 베토벤을 몹시 화나게 했다. 결국 베토벤이 3악장을 덧붙일 의도가 전혀 없음 확인하고 나서야 악보 인쇄에 들어가긴 했지만, 처음 완성되어 나온 악보는 오기 투성이에다가 곳곳에 임시표를 너무 많이 빼먹어서 작곡가를 재차 격분케 했다. 베토벤은 자신의 제자이자 조수인 안톤 쉰들러를 시켜 오스트리아 빈에서 판매되고 있는 이 악보의 모든 사본을 수거했고 손수 오자 표기 리스트를 만들어 붙였다고 한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출판된 지 30여년 이상이나 연주 불가능이라는 딱지를 붙인 채 방치되었다. 그러나 19세기 중반 이후 독일의 지휘자이자 피아니스트인 한스 폰 뷜로와 러시아의 대 피아니스트인 안톤 루빈스타인에 의해 처음으로 청중 앞에서 연주되기 시작한 이후, 작곡된 지 100여년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이 [피아노 소나타 32번]은 모든 피아니스트들이 반드시 극복해야 할 숭고한 대상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심오한 창작의 꽃을 피운 베토벤의 만년
육체적, 정신적 압박에도 불구하고 베토벤은 만년에 접어들며 더욱 심오한 창작기를 맞이했다. 특히 1821년부터 그는 후기 현악 4중주를 비롯하여 [장엄미사]와 [교향곡 9번], 마지막 세 개의 피아노 소나타를 작곡했다. 개인적인 가정사에서 비롯한 심적 고통과 점진적인 청력 및 체력의 악화가 그의 작품 세계를 보다 내면적이고 초월적이며 형식 파괴적인 대 범함을 이끈 직접적인 원인이라고는 장담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베토벤은 자신의 응축된 사고를 통해 현실을 극복하고자 했음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당시 그의 이러한 엄청난 창작열은 아마도 슈베르트 생의 마지막 해인 1828년에 비견할 수 있을 것이다.
전작인 두 개의 소나타 Op.101과 Op.106 ‘함머클라비어’와 더불어, 마지막 세 개의 소나타인 Op.109, Op.110, Op.111은 피아노 소나타 역사에 있어 새로운 전환점을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다. 특히 이 마지막 다섯 개의 소나타들은 이전까지 베토벤이 작곡했던 것들과는 완전히 다른 음악으로서, 음악적으로나 기교적으로 극단적인 난해함을 담고 있다. 청력과 체력의 고갈을 통해 베토벤은 무대에 서는 것을 자제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오직 자신의 세계에서만 비롯할 수 있는 상상력으로 현실적, 정신적 한계를 극복했고, 악기와 표현의 한계를 고려하지 않는 초월적인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이러한 베토벤의 초월 의지는 지금까지도 연주자와 감상자로 하여금 최종적으로 베토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생각하게끔 한다. 1822년 1월에 작곡을 시작하여 자신의 후원자였던 루돌프 대공에게 헌정한 [피아노 소나타 32번]은 그 신비로운 중요성으로 인해 피아노 음악뿐만 아니라 낭만주의 예술사조의 목적 자체를 한차원 더 발전시켰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벤스 사볼치(Bence Szablocsi)는 베토벤의 이 경이로운 작품에 대해 가장 잘 이해했던 헝가리 음악 학자였는데, 다음과 같은 평가를 남겼다.
“마지막 다섯 개의 소나타들은 각각 미증유의 길이를 자랑하는 동시에 구원과 승천과 같은 메시지를 담고 있는, 중세 시대의 미스터리에 비견할 만한 드라마틱한 플롯으로 가득 차 있다. 이 가운데 세 작품(Op.101, 106, 110)은 푸가토나 푸가와 같은 종결부로 하여금 클라이맥스와 카타르시스를 이끌어낸다. 반면 다른 두 개의 작품(Op.109, 111)은 하늘로 팽창해 나가는 듯한 확장된 변주곡 형식으로서 찬송가적 절정의 순간을 내포하고 있다. 모든 요소들은 그 자체로 투쟁하고 번민하며 꿈꾸는 한편, 위기를 맞는 과정을 겪으며 이러한 경지에 다다르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