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
-양승국신부-
<천국에 사는 아이>
세례를 준비하고 있는 한 친구가 슬며시 제게 다가와 묻습니다. "사회에서 살 때 저질렀던 건수가 엄청 많은데...세례 받으면 다 용서해주시나요?
"어떤 사고를 쳤는데?"라는 제 물음에 아이는 그간 저질렀던 건수에 대해서 줄줄이 늘어놓았습니다. 미안해하면서도 아이는 자신이 친 사고들이 절대로 일부러 한 것이 아니고 전적으로 "생계유지형", "목숨부지형" 건수들이었음을 밝혔습니다.
자신의 그릇된 행동에 대해 전혀 죄의식 없이 살아가는 아이들도 많은데, 자신의 지난 삶에 대해서 걱정하는 아이의 마음이 참으로 기특해 보였습니다.
새출발을 준비하는 아이에게 참으로 큰 고마움을 느꼈습니다. 그 아이 안에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손길이 느껴졌습니다.
하는 짓이 너무도 제 마음에 들었던 아이에게 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가 이렇게 나한테 솔직히 고백한 이상 이미 네 죄를 하느님께서 다 용서해주셨을 것으로 확신한단다. 이제 더 이상의 방황은 없는거다."
환해진 아이의 표정에 제 마음이 너무나 흐뭇해졌습니다. 뉘우침과 화해, 용서와 사랑이 있는 한 하느님 나라는 우리 가운데 있다는 것을 실감했습니다.
하느님 나라가 과연 어떤 곳이겠는가? 자주 생각해봅니다. 하느님 나라는 뭔가 대단하고 특별한 그런 곳이 결코 아닐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지금 우리 사는 모습의 연장선상에 천국이 자리잡고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한 영혼이 지난 삶의 아픔을 접고 새 출발을 다짐하는 그 출발선상이 바로 천국이라고 생각합니다. 상시(常時)로 용서가 이루어지는 곳, 언제나 다시 한번 기회가 주어지는 공동체야말로 하느님 나라입니다.
비록 고통스러워도 하느님이 계시기에 부단히 희망하고 기쁘게 견뎌내는 한 소박한 영혼이 머무는 장소가 바로 천국이리라 믿습니다.
오랜 세월 우리가 지니고 있었던 그릇된 하느님 상을 떨쳐버리고 진정한 하느님, 참 하느님을 우리의 하느님으로 모시는 곳이야말로 천국입니다.
삼라만상을 지배하시는 우주의 하느님이시자 전지전능하신 창조주 하느님 앞에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고, 조심조심 경건하게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그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무엇보다도 끝없는 사랑으로 매일 우리를 살리시고 자비로 감싸주시는 연민의 하느님 앞에 감사를 드리며 그 극진한 하느님 사랑을 이웃에게 보여주는 그 삶의 현장이야말로 하느님 나라입니다.
새벽을 열며
-조명연신부-
어제 어떤 분으로부터 메일 한 통을 받았습니다. 그 분께서는 메일에 어떤 글을 적어서 제게 보내주셨지요. 아마도 좋은 글이라고 해서 제게 보내주신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 글의 제목은 ‘사랑한다는 말은’으로 에세이의 형식을 띄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읽어 가는데, 내용이 참 좋습니다. 하지만 어디서 읽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는 하더군요. 저는 ‘유명한 글인가 보다.’라는 생각을 가지면서 끝까지 천천히 뜻을 의미하면서 읽었습니다. 드디어 끝까지 읽었고, 맨 끝을 읽는 순간 저는 박장대소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맨 끝에는 이러한 글이 적혀 있었거든요.
“조명연 (마태오) 신부 / 희망가게(당신에게 행복을 팝니다)중에서”
맞습니다. 제가 2006년에 쓴 책이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직접 쓴 책인데도 불구하고 몰랐다는 것이지요. 얼마나 제 자신이 한심하던 지요.
어쩌면 우리 모두가 이러한 부족함을 안고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요? 솔직히 실수와 잘못 한 번 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이 없지요. 또한 성공만을 계속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실패와 성공을 반복하면서 조금씩 나아질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나만은 완벽할 것이라는 착각 속에 빠질 때가 종종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나의 기준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단죄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분명한 사실에 대해서도 자신을 위해서는 ‘거짓’이라고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펼치는 것이, 바로 똥고집을 가지고 있는 우리 인간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는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십니다. 이 행동은 악마의 세력을 쳐 이기는 하느님의 손길을 부각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기적에 대한 반응으로 군중들은 ‘다윗의 아들 메시아’로 예수님을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이에 당황스러운 예수님의 적대자들은 이 군중들의 생각을 역 설득하려고 예수님 기적을 악의 세력으로 돌리지요.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서 마귀들을 쫓아낸다는 것입니다.
이는 어느 정도 설득력 있는 말로, 왜냐하면 그 당시 마귀를 쫓아내는 구마행위는 이교도들 사이에서 주로 성행했었고 그들의 행위는 베엘제불의 힘을 빌리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유다인들이 이교도들의 신을 경멸하여 부르던 명칭인 ‘베엘제불’이란 이름을 쓰는 것이었지요.
아마 사람들은 이 말에 크게 동조했나 봅니다. 그래서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까지 요구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탄이 사탄을 내쫓지 않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그들의 생각이 잘못 되었음을 꾸짖습니다.
악과 정반대편에 계신 예수님을 악의 자리에 위치시키는 사람들의 모습들을 보면서 우리도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랑보다는 미움을, 용서보다는 다툼을 실천해 나간다면, 그래서 내 기준만을 내세워 내 이웃을 판단하고 단죄해 나간다면, 그 모든 모습들이 바로 예수님을 악의 자리에 위치시키는 큰 잘못을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는 주님을 제자리에 모셔야 합니다. 즉 하느님의 자리에 모실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님처럼 겸손해야 한다는 것……. 아시죠?
내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최대한 친절을 베푸세요.
역설의 하느님
-김상용 수사-
‘베엘제불’은 ‘바알’(셈 족이 섬기던 신의 이름)과 ‘즈붑’(파리라는 뜻)의 합성어입니다. 고대 근동지방의 셈 족들은 바알의 신을 비와 구름 그리고 물을 가져다주는 신으로 모셨습니다. 왜냐하면 사막기후의 건조한 땅에 물을 댈 유일한 수단은 비가 내리는 것뿐이었으므로 자신들의 이러한 바람을 신앙으로 고양시켜야 하는 절박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를 적대하는 자들은 바로 예수의 표징들을 일컬어 바알 신의 힘을 빌어 했노라고 매우 불손한 태도로 일관합니다. 그들의 불신앙의 근저에는 그들 고유한 메시아 신앙의 기대와는 달리 나자렛 시골 출신이라는 전혀 딴 판의 사내가 일으키는 감당할 수 없는 이적 행위들을 두고 급급하게 해석하는 유다 지도자들의 지독한 편견이 자리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삶에서 어렵지 않게 ‘역설의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기대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우리를 이끄시며 우리를 좌절시키셨다가도 지나고 보면 그것이 하느님의 거룩한 뜻이었음을 스스로 깨닫는 경험들을 했을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 사건에서 극명하게 우리에게 전달됩니다.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루카 24,26). 우리는 역설의 하느님을 알아뵙기 위해 일상의 고난으로부터 도망가지 말고 그 고난 한복판에 계시는 예수님의 동행을 믿어야 합니다.
어리석은 마음
-윤미경-
유난히 싸움을 잘하는 부부가 있다. 이 부부가 싸우는 내용은 참 단순하다. 부인은 “당신은 남자니까 내가 잘못한 것이 있으면 조근조근 알아듣게 얘기해. 그러면 내가 고칠 것은 고치고 바로잡을 것이 있으면 잡을 텐데, 남자가 조잔하게 말을 안 하고 입을 봉하고 있어?”라고 불만이고, 남편은 “여자가 깔끔하지 못하고 집안 꼬락서니하고는`…. 부엌에 가도 더럽고, 욕실에 가도 더럽고, 마루에 가면 거기도 더럽고. 그런 주제에 남편 알기는 뭐 같이 알고 무시해?”라고 불만이다.
마치 녹음테이프를 틀어놓은 것처럼 부부가 똑같은 말을 반복하고, 싸움은 서너 달씩 냉전으로 이어진다. 그뿐만 아니라 자녀들도 부모와 똑같이 말을 안 하고 각자 자기 방에 틀어박혀 있거나 집에 들어오기를 꺼린다. 주변에서 객관적인 조언을 해줘도 피차 자신은 잘못이 없다면서 상대방 탓만 하면서 조언을 좋은 양분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정도는 조금씩 달라도 이 부부의 모습은 결국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우리는 자신의 모습을 살피려 하지 않으면서 상대방의 허물은 잘 꼬집어 낸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상대방의 허물이 바로 나의 허물임을 알 수 있다.
하느님께서는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셨다. 용서를 하려면 우선 자신의 모습부터 알고 잘못된 부분을 인정해야 한다. 순간순간 내 안에서 떠오르는 생각·감정·기대를 살피고 그것이 자신과 상대방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알아야 한다. 자신의 태도·생각·기대·감정을 모르는데 어떻게 남을 용서하겠는가?
자기의 기대나 바람만 중요하게 생각하고 남의 기대나 바람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은 이기심과 탐욕에 가득 찬 것과 같다. 이기심과 욕심은 감사하는 마음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더 많은 것을 바라게 되고 남이 베풀어 준 덕에 대한 깨달음이 없다. 주변 사람이 베풀어 준 덕에 대해서도 깨달음이 없는데 어찌 하느님이 베풀어 주신 덕에 대한 느낌이 있겠는가? 그러니 일상의 모든 덕이 하느님한테서 온 것인데도 그 덕을 고마워할 줄 모르는 마음이야말로 가장 어리석은 마음이 아니겠는가.
<내 말을 들어라.
나는 너희 하느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길만 온전히 걸어라. 그러면 너희가 잘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순종하지도 귀를 기울이지도 않고, 제멋대로 사악한 마음을 따라 고집스럽게 걸었다.>
-오상선신부-
지방출장이 잦아서 여행중에 라디오를 많이 듣는 편이다
미리 채널을 고정시켜 놓았는데
나는 교통방송과 평화방송 두 채널을 주로 이용하는 편이다.
그런데 천안을 벗어나 남쪽으로 더 내려가게 되면
방송이 잘 잡히지 않아서 지지직 소리가 갈수록 많이 난다.
그래서 지역방송을 잡기 위해
주파수를 움직여가며 잘 잡히는 방송에 채널을 고정시키지만
때론 별로 마음에 안들어 꺼버리기가 일수다.
도움이 되기보다는 정신이 시끄럽고
그 지지직 하는 소리가 영 거슬리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오늘 예레미아 예언자를 통해서 말씀하신다.
<내 말을 들어라.
나는 너희 하느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길만 온전히 걸어라. 그러면 너희가 잘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순종하지도 귀를 기울이지도 않고, 제멋대로 사악한 마음을 따라 고집스럽게 걸었다.>
우리는 사실 주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나름대로는 노력하고 있는데
그게 잘 안 듣기니 문제다.
그렇다면 문제가 무엇일까?
왜 잘 안 듣기는 걸까?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다!>
주님이 방송하시는 하느님 나라 방송국 채널을 못찾아서는 아닐까?
나는 내가 생각하는 주파수를 고집하고 있으니
하느님 나라 방송국 주파수를 못찾고 있는 것일 게다.
말하자면
하느님과 나 사이에는 다른 주파수 대역이 있다는 것이다.
하느님 나라 방송을 알아듣기 위해서는
그 다른 주파수 대역을 찾아 정확한 채널을 잡아야 한다.
그것이 되지 않으면
늘 지지직 소리만 나지 다른 방송 채널이 잡힐 뿐이다.
그런데
이 하느님 나라 방송 채널은 아주 민감하다.
아니 미세한 주파수 차이로도 그 방송이 잘 잡히지 않는다.
아마도 방해 방송이 많이 있어서인지도 모른다.
마치 옛적에 이북방송을 들을라치면
방해공작을 많이해서 들을 수 없도록 만든 것과 마찬가지 이치이리라.
그래서 그 정확한 주파수를 찾아 헤메다가
소리가 제대로 잡히지 않으면 포기하고 꺼버리기가 쉽다.
자,
그럼 어떻게 하느님 나라 방송을 쉽게 찾을 것인가?
나는 지금도 교통방송 주파수와 평화방송 주파수를 잘 모른다.
몇 키로헤르츠인지도 모른다.
잘 아는 사람에게 물어서 입력시켜 놓았을 뿐이다.
그렇다면 하느님 나라 방송을 잘 아는 형제자매들에게서
물어서 입력시키기라도 해야하지 않겠는가?
정확한 주파수를 알아서 입력을 해 놓으면 깨끗한 음질로
그 방송을 들을 수가 있다.
문제는 이렇게 입력을 안 해 놓았을 때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다른 방법이 없다.
정성을 다해 이리저리 채널을 돌려보며 정확한 주파수를 찾아내는 길 밖에...
그 길은 바로
기도의 길이고, 봉사의 길이고
묵상의 길이요, 미사성제의 길이다.
나눔의 길이고 겸손의 길이다.
워낙 방해공작이 많아서 그 길을 찾기가 늘 쉬운 것은 아니다.
하지만 꾸준히 그 정확한 주파수를 찾아 노력하면 찾아낼 수 있다.
우리가 신앙실천에 충실해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성인은 무엇보다도 잘 들을 줄 아는 사람이라고 했다.
거룩할 <성>(聖)자는
귀 이(耳)변에 입 구(口)
그리고 하변에 임금 왕(王)자로 구성되어 있다.
동양의 현인들이 생각한 거룩한 사람이란
귀와 입을 잘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이란 뜻이리라.
그 중에서도 입보다는 귀가 먼저임에 유의해야 하리라.
말하는 것보다 듣을 줄 아는 사람,
정확하게 들을 줄 아는 사람이
거룩한 사람이요, 성인이다.
자,
오늘
우리의 주파수를 한번 제대로 맞춰서 들어보자.
하느님 나라 방송국 채널과
이웃 사랑 방송국 채널을 찾아라.
사실 하느님의 음성은 고사하고
이웃 형제자매들의 음성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우리가 아닌가?
내 방송 채널을 고집하지 말고
채널을 돌려라.
그제서야 하느님의 음성이 들리고
형제자매들의 음성이 제대로 들리게 되리라.
그래야만
비로소 하느님과 이웃을 제대로 사랑할 수 있게 되지 않겠는가?
다시한번 주님께서
예레미아를 통해 하시는 말씀이 귓전에 맴돈다.
<내 말을 들어라.
나는 너희 하느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길만 온전히 걸어라. 그러면 너희가 잘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순종하지도 귀를 기울이지도 않고, 제멋대로 사악한 마음을 따라 고집스럽게 걸었다.>
<독서강론> : 하느님의 계명을 지킴으로써 하느님을 사랑하자.
-경규봉 신부-
이스라엘은 하느님께서 가르쳐주신 모든 규정과 법규 즉, 하느님의 모든 율법과 교훈을 지켜야 한다. 율법은 단순히 듣고 배워서 아는 것으로 그치는 지식이 아니라 온전히 실천해야 할 삶의 원리이다. 하느님의 모든 말씀 곧 규정과 법규는 하느님의 완전성과 거룩함, 그리고 전지하심에 근거하므로 완전하다. 성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따르는 것이 참된 지혜요 지식임을 강조한다.
솔로몬은 “주님을 두려워하여 섬기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다.”(잠언 1,7)라고 하였고, 시편은 “주님의 법은 이지러짐이 없어 사람에게 생기를 돌려주고 주님의 법도는 변함이 없어 어리석은 자도 깨우쳐준다. 주님의 분부는 그릇됨이 없어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고 주님의 계명은 맑아서 사람의 눈을 밝혀준다.”(시편 19,7-8)라고 노래했다. 예수님께서도 “지금 내가 한 말을 듣고 그대로 실행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슬기로운 사람과 같다.”(마태 7,24)고 하셨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말씀은 전적으로 지켜야 한다. 이스라엘이 강한 것은 결코 그들의 영토가 광활하거나 군사력이 막강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에게 참된 지혜와 지식의 근원인 하느님의 말씀이 있으며, 그 말씀을 주신 하느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시고 그들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여 주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주신 법규를 잘 지켜야 한다.
또한 하느님께서 주신 법규와 규정은 공의롭다. 그러므로 이 법을 잘 지키도록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 마음은 하느님께 대한 신앙의 주체로서 우리로 하여금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도록 하지만, 악에 이끌려 미혹당하기 쉽다. 그러므로 마음이 하느님의 말씀에 복종하도록 끊임없이 단련시켜야 한다(1고린 9,27).
그래서 성서는 “무엇보다도 네 마음을 지켜라. 그것이 바로 복된 삶의 샘이다.”(잠언 4,23)라고 가르친다.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탈출하던 때에 하느님께서 호렙 산에서 모세에게 율법을 주실 때를 마음에 새겨 늘 간직하고, 자자손손 깨우쳐주어야 한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때문에 하느님의 법 역시 사랑의 법이며,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요약하여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말씀하셨다. 하느님은 공의로우신 분이시다. 때문에 하느님의 법 역시 공의로우며,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해 두는데, 천지가 없어지는 일이 있더라도 율법은 일 점 일획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가장 작은 계명 중에 하나라도 스스로 어기거나, 어기도록 남을 가르치는 사람은 누구나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사람 대접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계명을 지키고, 남에게도 지키도록 가르치는 사람은 누구나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 대접을 받을 것이다.”(마태 5,18-19)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는 무엇보다도 계명을 먼저 강조하셨다. 그래서 부자청년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을 물었을 때에도 먼저 계명을 지키라고 말씀하셨다(마태 19,16-17).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에게는 전통을 핑계 삼아 하느님의 계명을 어기고 있다고 호되게 꾸짖으셨으며(마태 15,1-9),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고집하고 있다.”(마르 7,8)고 질책하셨다.
우리가 하느님의 계명을 지킬 때에 비로소 우리가 하느님을 알고 있다는 것이 확실해지며(1요한 2,3), 하느님의 말씀을 지킬 때 하느님을 완전히 사랑하는 것이다(1요한 2,5).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곧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이며, 하느님의 계명은 무거운 짐이 아니다(1요한 5,3).
그러므로 신앙인은 하느님의 계명을 지켜야 한다. 마음을 다스리고 욕정을 다스려 계명을 지키는 삶을 살아야 한다. “세상도 가고 세상의 정욕도 다 지나가지만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입니다.”(1요한 2,17)는 말씀처럼 결국 세상은 지나가는 것이므로, 세상 것에 얽매이지 말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사는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
하느님의 나라
-박순웅 목사 -
농사의 본뜻은 생명을 일구는 일이다. 농부들은 그것을 위해서 땀흘리고 애를 쓴다. 그렇지 않으면 곁길로 나간다. 밭을 일구고 씨를 뿌려놓고 일은 하지 않고 계산만 하는 것은 마음이 다른 곳으로 가 있는 것이다. 필자도 밭에 배추를 심어 가꾸면서 배추 포기를 세며 계산을 하니 옆에 계시던 어르신께서 한마디하셨다. “게으른 사람이 계산 먼저 한답니다.” 비록 어쩔 수 없는 현실이긴 하지만 그분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는 본질보다는 먹는 것, 입는 것, 마시는 것 때문에 그분 뜻을 흐려지게 할 수 있다.
오늘의 말씀 또한 그러하다. 벙어리 마귀를 내쫓으셨다. 벙어리 마귀가 스스로 나간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쫓아낸 것이다. 예수님이 마귀·악마·사탄을 쫓아내시는 것은 인간 안에 하느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이 그분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원칙과 본질을 사모하고 깊이 사유하는 마음을 모으기보다는 곁가지에 관심이 많아서 혼란을 가중시키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신앙과 삶 속에서 혹은 대화에서도 본질적인 고백들이 먼저 행해진다면 어디에든 그분의 나라가 활짝 꽃필 것이다. 그분의 나라를 일구기 위해 각자가 받은 탈렌트, 그분께서 주신 능력과 권능이 엉뚱한 곳에 쓰여지지 않기를 함께 마음 모아본다.
-김두유 신부 -
예수님에게 있어서 궁극적으로 함께 계시는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받는 아들이시지만, 예수님의 삶의 여정에는 반대와 배신과 모함이 가득한 험난한 삶의 형태를 가집니다.
가끔 면담을 하면서 느끼는 것입니다만, 많은 사람들이 마치 자기 스스로 예수님의 삶의 형태를 지니고 있다고 착각하며 사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누구 때문에 제가 잘 못사는 것 같습니다.”, “신부님, 제가 저 인간만 없으면 잘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런 삶의 방식을 취하는 사람은 자신이 모함과 배신을 당하고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다른 사람이 배신과 모함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당신의 권능으로 마귀를 쫓아내셨는데, 반대자들의 모함을 받습니다. “베엘제불의 힘을 빌렸다”고 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틀린 분이십니다. 우리는 억울함과 고통스러운 길은 외면하면서 살아가지만, 예수님은 그런 길도 마다하지 않으시고 참아내며 살아가신 분이십니다. 솔직히 마귀도 쫓아내시는 분이 한낱 인간의 모함을 못 쫓아내시겠습니까? 마귀를 쫓아내시는 큰 권능을 가지셨는데 그렇게 모함하는 인간을 못 쫓아내시겠습니까?
우리 인간은 억울함과 고통이 따를수록 거기에서부터 벗어나고 픈 마음이 당연지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순절 동안에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함께 동참하고 싶기는 하지만, 몸이 안 따라주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힘이 들 때마다 “차라리 주님을 몰랐다면”하고 생각들도 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외면하고, 우리 스스로가 신앙인이면서 신앙인이 아닌 척 주님을 모함하고 사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자신이 신앙인이면서 신앙인 아닌 척 하는 행위는 바로 오늘 예수님이 설명해주시는 것처럼 아버지의 나라, 아버지의 가정을 파괴하는 이율배반적인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길이 험할수록, 예수님을 따르는 삶의 길이 힘겨울수록, 우리를 모함하는 이들이 더욱 많을수록, 우리는 더욱더 유혹에 사로잡히지 말고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도록 최선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결단을 촉구하는 말씀을 던지십니다.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 버리는 자다.” 모함과 배신이 우리를 힘들게 할지라도 주님이 가신 길에 우리도 동참해야겠습니다.
예수님과 베엘제불
-김훈일 신부-
오늘 예수님께서는 베엘제불과 한편으로 모함을 받고 있습니다. 사건의 발단은 예수님께서 벙어리 마귀를 내쫓아 벙어리가 말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당시에 베엘제불은 사탄과 동일시되었습니다. 베엘제불은 ‘바알 즈붑’ (높은 거처의 주)이라는 뜻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의 신(2열왕 1, 2절 이하)인데, 이를 유다교에서는 베엘제불로 고쳐서 우두머리 마귀를 가리키는 말로 썼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사탄의 하수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는 치명적인 모략입니다.
우리 사회도 한때 이런 방식으로 진실과 정의를 외치는 사람들을 가두거나 죽였던 역사가 있습니다. 소위 ‘빨갱이’, ‘간첩’이라는 누명만 씌우면 정당한 절차도 제대로 된 변호도 없이 재판할 수 있었습니다. 슬픈 우리 사회의 광기였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적극적으로 당신을 변호하셨지만 결국 같은 죄목, 즉 하느님을 모독했고, 하느님의 적대자라는 누명으로 십자가에서 돌아가십니다.
그러나 부활을 통해서 그들의 사악함을 드러내고 진정 하느님의 적이 누구인지를 밝혀 주셨습니다. 요즘 어두웠던 시절에 감옥에 갇히거나 죽어야 했고, 잘못된 판결을 받았던 이들이 복권되고 진실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다시는 이러한 어둠이 이 땅에서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합시다. 음모와 모함으로 희생당하는 이들이 나오지 않도록 노력합시다.
일치
-허찬란 신부-
사람들은 예수님의 놀라운 능력을 보며 마귀의 두목의 힘을 빌리는 것이 아닌지
의심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어떻게 마귀가 마귀와 싸워 이길 수 있겠느냐고
반박하십니다. 사탄은 항상 공동체를 분열시키고 불신을 조장하지만,
예수님은 이 사탄의 세력을 물리치십니다. 세상의 죄를 없애시고 욕심과
불목을 쳐 이기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능력으로 살아가는가요?
아니면 마귀에게 사로잡혀 사는가요?
대중 가요 노랫말에 “당신 없인 못 살아”란 가사가 있습니다.
결혼한 부부가 처음에는 당신 없이는 못 산다고 얘기합니다.
그러다 조금 지나면 서로 지쳐서 당신 때문에 못 산다고 합니다.
직장에 처음 입사하면 신선하지만 점차 직장의 상사, 동료가 원수가 되어갑니다.
가정과 직장뿐 아니라 우리가 속한 조직이나 단체 안에서도 이런 모습은
비일비재합니다. 그만큼 세상에 마귀들의 활동이 심하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우리는 세례의 은총에 힘입어 성가정, 성인이 되겠다고
따라 나섰으며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릅니다.
우리가 하느님 현존을 잊고 세상살이에만 몰두한다면 마귀는 어느새
나와 이웃을 갈라놓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항상 경계를 늦추지 말고
공동체 안에서의 일치를 위해 노력하고 희생과 봉사를 아끼지 맙시다.
하느님의 손가락
-최성기 신부-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의 천지창조 중 아담의 창조 부분에는 하느님의 손가락과 아담의 손가락이 닿을 듯 말 듯 그려져 있다. 미켈란젤로는 아담이 하느님에게 숨결을 받는 순간을 두 손가락의 만남으로 표현한 것이다. 미켈란젤로가 이렇게 표현한 이유는 그 당시 유명했던 기도문 ‘창조주여, 오소서(Veni Creator)’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라고 하는데, 기도문에서 하느님 창조의 숨결을 하느님의 오른손가락으로(Tu, digitus Paternae dexterae) 표현한 데서 착안한 것이라고 한다. 유명한 작품이 그렇듯이 미켈란젤로의 하느님 손가락에 대한 이런저런 해석과 의미를 부여하려는 시도가 있지만, 분명한 것은 인간이 생명을 시작하는 데 하느님의 어루만짐이 있었다는 것이다.
시편 저자는 이 세상 만물에 대한 하느님의 어루만짐을 이렇게 표현한다. “우러러 당신 하늘을 바라봅니다, 당신 손가락의 작품들을 당신께서 굳건히 세우신 달과 별들을.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기억해 주십니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아 주십니까?”(시편 8,4-5) 하느님께서 나를 어루만져 주시고,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어루만져 주신다는 생각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함을 노래한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을 닮은 까닭은 우리한테도 이 세상을 어루만지고, 이웃을 어루만져 줄 수 있는 손가락을 가졌기 때문이 아닐까? 하느님과 우리는 ‘손가락이 닮은’ 사이다. 우리에게 다른 사람을 만지고 보듬어 줄 능력이 있다는 것, 다른 사람을 포옹할 힘이 있다는 것이 하느님과 우리의 가장 닮은 점이 아닐까? 밖에서 다쳐 돌아온 아이를 쓰다듬고 안아주는 엄마의 모습에서, 실의에 빠진 동료의 등을 두드려 주는 모습에서, 아픔에 지친 환자에게 다가가 지그시 손 잡아주는 모습에서,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슬픔에 잠긴 이웃을 안아주면서 우리는 가장 하느님을 닮은 사람이 된다. 사람을 살리고 우리를 살리고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살리는 창조의 숨결이 짧은 어루만짐 속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세상의 악을 몰아냈다고 말씀하신다.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어루만지신 그 손가락이 우리 편이라고 선포하신다. 오늘 하루, 어루만짐이 많은 날이었으면 좋겠다. 상처로 어두워진 마음, 분노와 미움으로 갈기갈기 찢겨진 상처를 보듬어 주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나지막이 기도하자. “주 우리 하느님, 우리 손이 하는 일 잘 되게 하소서”(공동번역 시편 90,17).
진지한 자기 반성이 필요한 신앙관
- 김수원 신부 -
두 학생이 큰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부모님들이 학교에 와서 선생님께 애원합니다. ‘선생님, 우리 애는 정말 착하고 좋은 아이입니다. 이런 일을 할애가 아닙니다. 나쁜 애들과 어울리다보니, 그 친구들의 꾐에 빠져 그런 잘못을 저지른 것입니다.
제발 이 번 한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이 말이 끝나기기 무섭게 다른 학생의 부모도 이와 똑같은 말을 선생님께 전합니다. ‘내 아들은 착하고 잘못을 저지를 애가 아닌데, 친구를 잘못만나 그런 잘못을 범했다.’ 참 자기 중심적으로... 자기 기준으로만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시기, 질투, 욕심에 귀와 눈이 멀어 있을 때 우리 마음속을 보면, 자기가 특별한 일을 하면, 당연하고 대단한 것입니다. 그러나 상대방이 그런 일을 하면 재수가 좋았거나, 우연히 하게 된 행동으로 보고자 하는 마음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또한 우리 안에 갇혀 자기중심주의에 사로잡혀 있을 때에도, 상대방의 장점과 옳은 점을, 참 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마치 복음의 예수님을 대하는 많은 군중들처럼 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벙어리 마귀를 쫒아 냅니다. 그러자 백성들은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 놀라워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대한 악감정과 선입감을 갖고 있던 몇 사람은
그러한 기적의 은혜를 좋게 보아주고 기뻐하며 감사하기는커녕 오히려 악의에 찬 중상을 해댑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을 시험하느라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요구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벙어리 마귀를 사람에게서 쫓아내어 성한 사람이 된 것은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한 짓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능력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주신 메시아로서의 능력이 아니라, 악한 마귀의 힘을 빌려 일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그들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만일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면, 너희의 아들들은 누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는 말이냐?” 어디 스스로 결론을 내어 보라는 것입니다. “서로 싸우면 망하는 법이다.”는 자연 진리를 제시하시는 것입니다. 그 시대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어떤 사람은 자기 위신을 지키고자 할 때 능력이 없어지면 솔직하게 상대를 인정해 주고 칭찬해 주기보다는 오히려 중상 모략하는 것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이들에 대한 칭찬보다는 험담을 쉽게 하는 경향이 우리들에게도 많다 하겠습니다. 인간이 아름다운 것은 자기중심적인 사고를 가졌으면서도 서로를 돌아볼 수 있는 마음을 함께 가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모든 치유기적의 바탕은
그 사람에 대한 측은한 마음이었습니다.
우리 모두도 누군가가 나보다 높다 낮다를 가지고 판단하기보다는 서로가 서로를 생각해 주며 서로를 격려하고 칭찬하면서 위해주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시기했던 그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를 위해 짧은 기도라도 바칠 수 있는 하루가 되었으면 어떻겠습니까?
갈라져서 싸우면
-강영구신부-
예수님, 저희들은 당신을 스승이요 주님이라 고백합니다. 저희가 당신을 스승이요 주님으로 고백하는 까닭은, 당신이 힘이 세거나 싸움에 능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당신은 이 땅에 투사鬪士로 오시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악마와 죽음의 세력을 몰아내시고 인류를 구원하신 승리자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싸워서 이긴 승리자가 아닙니다. 당신은 사랑하고 용서하고 낫게 하고 품어주고 감싸 안음으로서 이긴 승리자입니다. 당신은 높은 곳에서 군림함으로서 승리자가 되신 것이 아니라, 가장 낮은 자리에서 섬기고 봉사하고 내어줌으로서 승리자가 되셨습니다.
당신이 사탄의 두목 베엘제불의 힘을 빌어서 졸개 사탄을 몰아내신 것이 아니라, 어둠의 세력인 사탄이 빛이신 당신을 감당할 수 없어서 스스로 물러간 것입니다. 빛이 머무는 자리에 어둠이 있을 수 없고, 聖靈이 머무는 자리에 惡靈이 함께 할 수 없습니다.
노자老子는 도덕경道德經에서 이렇게 가르칩니다. 善爲士者不武, 善戰者不怒, 善勝敵者不與, 善用人者爲下之. 是謂不爭之德, 是謂用人之力, 是謂配天, 古之極. 풀어보면 이렇습니다. “훌륭한 무사武士는 무력을 사용하지 않는다. 훌륭한 전사戰士는 노하지 않는다. 훌륭한 승리자는 적과 더불어 싸우지 않는다. 사람들을 잘 부리는 자는 스스로 낮은 자리를 차지한다. 이를 일러 ‘다투지 않음의 덕’이라 하고, ‘사람 부리는 힘’이라고 하고, 이를 일러 ‘하늘과 짝함’이라 하니, 예부터 내려오는 도道의 지극함이다.”
예수님, 당신은 싸우지 않고 이긴 하늘의 짝(配天)입니다. 그래서 저희는 당신을 주님이라 고백합니다.
예수님, 어리석은 인간들은 편 가르기를 좋아합니다. 편을 가르면 적敵이 생깁니다. 적은 힘으로 제압해야 합니다. 힘겨루기로 상대를 굴복시키기 위해서는 상대의 약점과 흠집을 들추어내고, 상대의 아픈 곳을 들쑤셔야 합니다. 이렇게 편 갈라 싸우는 것을 악마惡魔가 제일 좋아합니다. 악마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은 악마의 졸개요 하수인입니다.
예수님, 저희가 오늘 하루를 당신의 제자로서 살도록 이끌어 주십시오.(一明)
중상모략
-김건일 -
예수 시대뿐 아니라 오늘날에도 여전히 자기보다 나은 경우나 잘난 경우를 좋은 마음으로 봐주기가 참 어렵다. 위신을 지키고 싶거나 내가 그래도 조금이나마 더 낫다고 정당화시키려고 할 때도 많다. 능력으로 안 되면 솔직하게 상대를 인정해 주고 칭찬해 주기보다는 중상모략하기가 정말 쉽다. 칭찬보다는 험담이 쉽다. 못 들은 척 잡담을 하면서도 악의적으로 대꾸하기도 너무 쉽다.
예수님의 태도는 참으로 단호하면서도 분명하다. 이런 경우 구구한 변명으로 들려 오히려 아무 대꾸도 하지 못하는 경우가 참 많았다. 이런 마음을 잘 들여다보고 있으면 잘할 때만 나이고 싶고, 못할 때는 내가 아니고 싶어 그 잘못한 것을 가리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큰지를 본다.
이런 묵상을 하다가 문득 지율 스님이 떠올랐다. 가까이에서 그분을 만나본 적이 있거나 없거나 간에 많은 사람들은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가에 대해 말들이 많다. 하지만 나는 적어도 그분한테서 죽음이 두려워 삶에 매달리는 이들의 고통에 찬 신음소리를 듣지는 못했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 살거나 죽거나 상관하지 않는 자유로움을 느낀다. 욕심과 집착에서 벗어나 죽음 앞에 선 사람만을 본다. 이분에 대한 구구한 판단이 옳은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런 판단보다는 ‘자신’을 포기할 만큼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그분의 마음을 알아주는 것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구구한 판단과 모략 앞에서 단호하게 자신은 보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게 하는, 소외로부터 자유롭게 하려고 세상에 오셨음을 드러내신 주님, 당신을 따른다는 것은 모략과 험담 앞에서도 당신을 드러낼 수 있는 용기임을 잊지 않게 하소서. 죽는 것도 사는 것도 당신 안에서는 결국 다르지 않음을 알게 하소서..
너희는 귀를 기울여 나의 말을 듣기는커녕 제멋대로 악한 생각에 끌려 등을 돌리고 나를 외면하였다."
-양승국신부-
<마음으로 들어야>
강론이나 강의를 준비할 때 마다 우선적으로 드는 감정은 강한 부담감 내지는 막막함입니다.
이 시대는 말씀을 선포하기가 참으로 어려운 시대입니다. 매스미디어 산업의 폭발적인 팽창이 계속되는 가운데 사람들은 최첨단 영상 문화의 바다에 푹 빠져 살아가지요. 뿐만 아니라 초고속 인터넷 문화의 영향 아래, "속전속결" "신속정확" "다양한 컨텐츠"를 최고로 여기며 그렇게 살아갑니다.
이런 가운데 하느님 말씀 선포자로 살아가기란 참으로 힘겹습니다.
그런데다 말씀선포에 따르는 부담 역시 만만치 않습니다. 강의를 부탁하시는 분들의 입장에서는 너무도 당연한 일이겠지만 요구사항도 보통이 아닙니다.
"신부님, 짧고 재미있는, 그렇지만 내용 있는 강의 부탁드립니다." "제발 졸리지 않게, 알아듣기 쉽게, 그렇지만 핵심은 빠트리지 마시고..."
저 역시 강의를 들을 때면 똑같은 마음이 됩니다.
"이 강의는 뭔가 들을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면 눈을 부릅뜨고 열심히 듣는다, 받아 적는다 하지만, 영 아니다 싶은 강의라면 눈은 물론 귀도 마음도 다 닫아겁니다. 부족한 수면을 보충합니다.
매일, 매주, 그리고 수시로 선포되는 말씀 앞에 우리의 태도 전환이 반드시 필요할 것입니다.
어떻게 모든 말씀 선포자들 한명 한명이 다 우리 맘에 쏙 들 수 있겠습니까? 어찌 모든 말씀 봉사자들이 다 내 스타일에 맞게만 강의를 할 수 있겠습니까?
말씀을 듣다보면 가끔씩 운 좋게 명강사나 대 강론가도 만날 수 있겠습니다만, 반대로 전혀 아닌 사람도 만날 것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일이 귀로만 듣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들으려는 노력입니다.
마음으로 듣는다는 것은 선포되는 하느님의 말씀에 마음을 연다는 말입니다. 정성을 기울여 관심을 모아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데 최선을 다한다는 말입니다. 말씀 선포자 그 사람에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 선포자 안에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성령에 우리의 시선과 마음을 집중하는 일입니다.
때때로 선포되는 말씀에 마음을 집중하기 힘들어질 때 삶이 뒷받침되지 못해도 어쩔 수 없이 강론대에 서야하는 말씀 선포자들의 말 못할 고충도 한번 헤아려주시기 바랍니다.
가끔씩 강론이 지루해질 때, 말씀 봉사자들이 하루 온종일 성서 한 구절을 붙들고 앉아있어도 단 자락 생각도 건지지 못하는 때도 있다는 것을 이해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귀 기울여, 정성을 다해 말씀을 듣는다면 스쳐지나가는 우스갯소리 한마디에서도 우리 삶을 뒤바꾸는 결정적인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마음으로 듣는다면 하느님께서 말씀 선포자를 도구삼아 활발하게 활동하고 계심을 반드시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적수들의 모함과 예수님의 반격
-박상대신부-
예수님의 행보가 빨라지고 있다. 그분의 발걸음은 예루살렘을 향하고 있는 것이다. 예루살렘을 향한 그분의 걸음이 빨라질수록 예수와 그 반대자들의 대립과 긴장은 고조된다. 적수들의 모함도 더 노골적이다. 그 가운데 예수님은 확실한 선택을 요구하신다: "내 편에 서지 않는 사람은 나를 반대하는 사람이며,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헤치는 사람이다."(23절) 오늘 대립의 발단은 예수께서 사람을 언어장애자로 만든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면서부터 시작된다. 예수를 반대하는 자들은 예수가 마귀의 두목 ’베엘제불’의 사주를 받아 마귀를 쫓아낸다고 함으로써 예수의 능력을 격하시킨다. 베엘제불은 직역하면 ’집주인’이란 뜻이지만 ’오물의 신’으로 널리 쓰였다. 아마 유대인들이 이교도들의 신명(神名)을 경멸하려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반대자들의 모함에 대한 예수님의 반격은 3단계로 진행된다. ① 마귀가 마귀를 쫓아낸다면 마귀세력의 내분(內紛)과 와해(瓦解)를 초래할 것이 뻔한데 아무리 마귀라 할지라도 그런 어리석은 일은 할 리가 없다. ② 예수가 마귀의 사주를 받았다고 주장한다면, 마귀를 쫓아내는 그 누구라도, 즉 바리사이파 사람들 자신들과 그 자식들까지도 마귀의 사주를 받은 것으로 인정해야 한다. 만약 그들이 다른 어떤 능력으로 마귀를 쫓아낸다면, 예수의 능력 또한 마귀와 별개의 것으로 인정해야 함을 피할 수 없다. ③ 힘센 자의 무장을 해제하려면 그 보다 더 힘센 자가 요구되듯이, 마귀를 추방하는 데는 마귀 보다 훨씬 뛰어난 능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능력이 바로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능력’이며, 원문에는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기록되어 있다.
적수들의 모함에 대한 예수님의 3단계 반격은 결국 "그렇다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음"(20절)을 부정할 수 없다는 결론으로 마무리된다. 하느님나라의 도래(到來)는 메시아의 도래로 실현되는 것으로서 "절름발이는 사슴처럼 기뻐 뛰고 벙어리도 혀가 풀려 노래하며, 사막에 샘이 터지고 황무지에 냇물이 흐르는 때"(이사 35,6)이다. 따라서 벙어리 마귀의 구마는 메시아 도래의 상징적 행위에 속한다. 예수께서 벙어리 마귀를 구마(驅魔)하심은 곧 사람에게 인간본연의 품위와 자유, 하느님 말씀의 경청(傾聽)과 발설(發說)을 돌려주시기 위함이다. 이 일을 예수께서 하신다면 그는 하느님이시며, 그로 인해 이 땅에 이미 하느님의 나라가 도래한 것이다.(20절) 그러므로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인정하는 사람은 누구나 예수님 편에 서는 사람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도래하였음을 믿고 있다. 이 믿음은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그 어떤 힘도 하느님의 손가락을 능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서로 갈라서면 망하고(루가 11,14-23)
-유 광수신부-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이렇게 이르셨다. "어느 나라든지 서로 갈라서면 망하고 집들도 무너진다. 사탄도 서로 갈라서면 그의 나라가 어떻게 버티어 내겠느냐? 그런데도 너희는 내가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 낸다는 말이냐? 그러니 바로 그 사람들이 너희의 재판관이 될 것이다. 그러나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 내는 것이면 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이 벙어리 마귀들을 쫓아내신 것을 보고 놀라워하는 군중이 있는가 하면 "저자는 마귀들의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하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고 또 예수님을 시험하느라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예수님께 요구하기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사람에 따라서 같은 장소에서 같은 사건을 보고 이렇게 여러 가지 반응을 나타내는 것을 볼 수 있다.
단체나 공동체에는 여러 사람들이 모여 있는 법이다. 십인 십색이듯이 얼굴 모습도 다르지만 생각도 다 다르다. 다양성이 있어서 좋은 것이기는 하지만 서로 의견이 달라서 일치하기가 매우 어려울 때도 있다. 가정도 마찬가지이다. 부부간의 다툼은 서로 의견이 다르기 때문이고 결국은 싸우고 이혼하기까지 한다.
개인적으로도 여러 가지 생각이 있을 수 있다. 그래서 갈등하는 것이다. 좋은 생각이 있는가하면 나쁜 생각도 있고 남을 칭찬하고픈 생각도 있는가하면 미워하고 시기심과 질투하는 마음도 있다. 나훈아의 "왜 이런지 나도 몰라. 내 마음 나도 몰라."라는 노래가 있듯이.
어쩌면 우리는 서로 다르다는 이유로 상대방을 불편하게 여기는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은 뜨거운 것을 좋아하고 또 어떤 사람은 차가운 것을 좋아한다. 이 사람은 창문이 열려 있기를 원하고 저 사람은 창문이 닫혀 있기를 원할 수도 있다.
수세기 동안 사람들은 왜 서로 다른가를 밝혀내고자 노력했다. 그리고 비록 분류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여러 가지 범주가 이루어졌다. 우리는 이런 말을 듣곤 한다.
"저 남자는 전형적인 독일(아일랜드, 이탈리아, 프랑스 등등) 사람이야."
"저 여자는 전형적인 간호사(교사, 주부 등등)야."
"그들은 경상도 사람이고 저 사람은 전형적인 전라도 사람, 충청도 사람이야."
사람들은 각자 다른 독특한 존재라는 사실임에도 우리는 사람들을 분류하고 꼬리표를 붙여서 틀 속에 넣으려 한다.
탐험가이며 작가인 영국의 리처드 버튼경의 부인은 사람들을 네 가지로 분류해서 이렇게 적었다.
- 아무것도 모르면서 자신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조차 모르는 사람.
이 사람은 바보다. 피하라.
- 아무것도 모르고 자신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아는 사람.
이 사람은 단순하다. 가르치라.
- 많은 것을 알면서도 자신이 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
이 사람은 자고 있다. 깨워라.
- 많은 것을 알고 자신이 알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
이 사람은 현명하다. 따르라.
이 제마는 사상 체질론을 내세워 태음인, 태양인, 소음인, 소양인으로 분류하면서 인간이 서로 다른 차이점을 설명하였다.
빠스칼은 "세상에는 오직 두 종류의 인간이 있다. 하나는 의인이다. 그러나 그 자신은 자기를 죄인이라고 믿고 있다. 또 하나는 죄인이다. 그러면서 자기 자신은 의인이라고 믿고 있다."라고 말하면서 "신이여! 저를 버리지 마옵소서"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기면서 죽었다고 한다.
여러 유형이 있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다. 따라서 사람에 따라 다르게 볼 수 있고 말할 수 있다. 다르게 말한다고 해서 나쁜 것은 아니다. 다만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지 않고 상대방을 미워하거나 시기 질투하는 마음으로 말을 하거나 다른 사람이야 어떻게되든 자기 위주로 말을 자기 이익만을 위해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나쁜 것이다.
예수님은 주의 기도에서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다. 즉 각자 자기 나라가 아니라 모두 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해달라는 기도를 바치라는 것이다. 그러면 서로 갈라지는 일이 없이 일치할 것이고 모두 아버지의 나라를 위해 일하게 될 것이다. 비록 우리가 서로 다르지만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작용해서 좋은 결과를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로마8,28)라고 말하였듯이 아버지의 나라가 오기를 바라고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라면 무슨 말을 하고 무슨 일을 한다 하더라도 서로 일치할 것이며 좋은 결과를 가져 올 것이다. 그러기에 기도하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기도하지 않으면 우리는 제각기 아버지의 나라가 아니라 자기 나라를 위해서 말하고 행동하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 어떤 일을 하든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기 위해 노력한다면 아버지의 자녀가 될 것이며 반대로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이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 버리는 자이다."
바오로 사도가 "형제 여러분 끝으로 여러분에게 당부합니다. 여러분은 무엇이든지 참된 것과 고상한 것과 옳은 것과 순결한 것들을 마음 속에 품으십시오. 그리고 나에게서 배운 것과 받은 것과 들은 것과 본 것을 실행하십시오. 그러면 평화의 하느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실 것입니다."(필립4, 8-9)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첫댓글 감사합니다...